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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과 독립운동(3)

작성자한다예아빠|작성시간19.02.28|조회수51 목록 댓글 0

“이승훈과 독립운동”


Ⅰ. 독립투사의 일대기 및 역사적 의의
삼일운동 지도자는 민족대표 33인 혹은 민족대표 48인으로 불린다. 이런 삼일운동 지도자 가운데 본교(당시 본교 전신인 대한[조선]장로회신학교 속칭 평양신학교) 동문이 무려 6분이나 계신다.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분인데 그중 5분이 우리 선배로 곧 길선주, 양전백, 김병조, 유대여, 이승훈이다. 그리고 48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20분(15+5) 인데 그중 6분이 우리 선배로, 이상 5분외에 함태영이 추가된다.(48인이란 33인 중 망명한 김병조[기독교]와 옥사한 양한묵[천도교]을 제외하고 17인이 추가된 숫자이다.) 당시 본교 졸업생은 4분이고 재학생은 2분이었는데, 교회직분으로는 목사가 4분이었고 장로가 2분이었다. 다시 말해, 본교에 있어서 삼일운동은 졸업생과 재학생, 목회자 지도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함께 골고루 참여한 일대 애국운동이었다. 이승훈은 삼일운동에 있어서 사실상 기독교 대표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삼일운동으로 인한 투옥으로 인해 학업이 중단되었는데, 그 후 복학하여 목회자가 되는 대신 기독교 사회지도자로서 나라를 섬기는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함태영은 출옥 후 학업을 계속하여 목사가 되었고, 사회적인 지도력을 계속 발휘했다.


그렇다면 기독교 대표 지도자였던 이승훈은 어떤 인물이었고, 삼일운동에서 어떻게 지도력을 발휘했는가?
남강 이승훈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근면하고 성실하여 가난을 딛고 성공한 사업가로 유명하였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사업을 통하여 민족을 살리기 위한 민족기업가,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품질을 향상시킨 선도적인 사업가, 한국의 토착자본을 일군 대부호가 되었다. 그는 연속되는 민족의 위기 속에서 1907년 안창호의 강연을 들은 후 민족운동가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운동을 위하여 스스로 검약을 실천하는 동시에, 백년대계인 교육사업에 투신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한일강제병합을 전후하여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는 회심한 뒤에는 하나님 사랑을 통하여 나라 사랑을 더욱 힘차게 더욱 은혜롭게 실천해나갔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서 나라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 이어졌고, 하나님 사랑은 나라 사랑을 성숙시켰다. 따라서 그의 삶 가운데 신앙과 애국은 서로를 이끌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령, 그는 민족운동의 일환인 교육사업을 위하여 1907년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한일강제병합이 있던 1910년 12월에 그 “교육 주지를 기독교로” 바꿨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인이 된 후, 교회의 장로로서 교회를 섬겼고, 기독교교육가로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오산학교를 민족교육기관에서 기독교민족교육기관으로 전환하였으며, 기독교 민족독립운동가로서 민족독립운동으로 인한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특히 삼일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기독교 대표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10년대 중반 평북노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고, 1917년 경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19년 3월 삼일운동에 따른 투옥으로 말미암아 신학공부를 중단했다. 그는 그 후 신학교에 재입학하지 않고 평신도 지도자로 사회를 더욱 폭넓게 섬기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그는 생애 말기에 교회에 대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자유로운 태도를 보여, 그의 말년은 교계로부터 다소 저평가 받는 경향도 있다.


이승훈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와 투옥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그런 고난은 그의 신앙을 정금같이 만들어주었고, 그의 고결한 신앙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듭되는 고난으로 인하여 신앙도 소망도 약해져갔지만, 그는 고난 중에서도 아니 고난 때문에 신앙을 더욱 붙들었고 그 신앙을 통해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투옥 중에 수도 없이 성경을 읽어 성경에 해박한 사람이 되었다. 즉 “민족운동에 대한 신념은 도산[안창호]을 만나고 나서 굳어졌거니와 종교신앙은 감옥 속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사실 한국교회 초기에 감옥은 위대한 신앙의 훈련장 역할을 했다. 이승만과 일단의 개혁가들이 집단으로 회심한 것도 감옥이었다. 재한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이 삼일운동 후 감옥이 찬송과 기도 소리가 넘쳐서 뜨거운 부흥회 장소가 되었다고 증언한 바도 있다.


이승훈은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일제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만 굽히지 않고 계속 애국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첫째, 이승훈은 일제가 황해도 중심의 가톨릭교인들을 억압하려고 했던 ‘안악사건’(일명 안명근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그 결과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당시 제주도는 기독교의 교세가 미약했는데, 가톨릭교회는 소규모였고 개신교회는 1907년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 선교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걸음마를 떼는 수준이었다. 그런 중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를 와서 신앙을 지키며 자신을 다스려나가는 과정은 제주의 개신교회의 부흥에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제주의 교육을 촉발하고 신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그는 유배 중에도 신앙인과 교육가의 모습을 보이고 영향을 미치면서, 신생교회의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이승훈은 이어서 일제가 평안도 중심의 개신교인들을 압제하려고 했던 ‘105인사건’(일명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었다. 그는 투옥 중에 의연함을 보였고, 그의 형기를 줄이고자 친구들이 변호를 맡긴 일본인 변호사의 조언조차 진실 되지 못한 것이라고 해서 거절한 바 있다.


셋째, 이승훈은 삼일운동으로 또다시 검거되었다. 그는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3번이나 검거되어 무려 9년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삼일운동에 있어서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그는 천도교가 주도하던 과정에 기독교가 참여하도록 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삼일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종교 연대하는 운동이 되었고, 기독교의 참여를 통하여 기독교의 정신이 반영되었다. 또한 기독교는 삼일운동의 최대 피해자로서 민족수난에 동참한 민족종교로 정착하게 되었고, 기독교의 전국조직망과 기독교인의 애국적 신앙을 통해 삼일운동이 전국적인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다음과 같은 일화는 유명하다. 삼일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선언서에 서명할 순서로 인해 다툼이 벌어지자,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 사실 삼일운동이 일대 사건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대범한 마음을 지녔던 그의 역할도 한몫을 했다. 그는 자신의 옥고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 바 있다. “감옥이란 이상한 곳인 걸, 강철같이 굳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같이 흩어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거든…” 감옥은 그를 견고한 강철 같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승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영웅적인, 성인(聖人)적인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좋은 면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위대할 수 있었고, 동시에 겸손할 수 있었다. 즉 그는 출세하여 오히려 망해버린 사울보다는 출세하면서도 스스로를 낮출 줄 아는 다윗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함석헌이 1930년 이승훈의 간증의 요지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인용해보자.


"자기[이승훈]는 본래 무식한 사람으로 아무 것도 할 만한 힘이 없었다. 자기가 오늘까지 온 것을 자기 자신도 어찌하여서 그렇게 해왔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 즉 자기가 진리를 찾고 의를 사모하고 그 의를 위하여 자기를 이기고 일하여 나가고자 하는 힘은 성경을 보는 가운데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고로 자기는 이를 생각하기를 신이 그렇게 하시었다고 믿는다. 자기가 성경을 그렇게 가까이 하기는 감옥중에서였다. 고로 마침내 감옥이 조금도 괴로운 것이 안 되었다. 젊은 사람들도 다 싫어하는 똥통의 소제를 자기가 솔선하여 독점하여 가지고 하였다. 손으로는 똥을 만지며 기도하는 말이 “주여 감사합니다. 바라건대 이 문에서 나가는 날 이 백성을 위하여 이 똥통 소제하기를 잊지 말게 하여 주십소사” 하였다. 지금도 자기는 밤중에 눈이 띄기만 하면 올리는 기도가 “주여 이때까지 이기고 오게 하여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와 같이 이후도 이기고 나가게 하여 주십소서”다. 이것이 그가 몸소 우리를 놓고 하나님의 앞에서 한 증거다."


이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이다. 에벤에셀(도움의 돌, 즉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는)의 신앙이고, ‘오직 은혜’의 신앙이며,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신앙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승훈은 출옥 후에도 자기의 기도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흔히 신앙인이 어려움 가운데 기도나 약속을 했다가도 어려움을 벗어나면 그것들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그는 초지일관했다. 그가 오산학교에서 변소청소를 도맡다시피 했다는 사실 역시, 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일화이다. 학교의 창시자가 그 학교의 머슴이 되는 모습은 가장 강력한 교육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이승훈은 스스로를 교육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남을 키우는 교육가였다. 오산학교가 수많은 민족지도자의 산실이 된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바이다. 그는 학교를 이끌어나가는 동료를 위하여 우수한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만식이다. 또한 그는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경직이다.


이승훈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졸업하지 않았고 따라서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길, 자기답게 하나님과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길을 택해서 나아갔다. 그는 장로로서, 사회분야에서 사역하는 기독교지도자로서, 교회와 사회에 큰 기여를 하였다. 사실 기독교의 발전은 목회자 지도자와 평신도 지도자 모두가 필요하고, 훌륭한 목회자 지도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자 독특한 사역을 감당할 때, 그 영향력은 매우 크다. 즉 목회자 지도자와 평신도 지도자가 수레의 양 바퀴처럼 함께 역사할 때 큰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비조인 칼뱅(Jean Calvin)의 주장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극장’이고 따라서 성도가 세상에서 다양한 소명과 사명으로 섬겨야 할 분야는 너무도 많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일생은 기독교인의 소명의 폭을 넓혔고, 비전을 다양하게 제시했던 모범적인 개혁신앙인 의 삶이었다.


이승훈을 기억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는 끝까지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에 관한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바로 그가 후대의 연구를 위하여 자신의 시신을 생리학 표본으로 기증한 것이다. 비록 일제의 금지로 그런 유지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자신을 남김없이 하나님과 나라를 위해 바치려던 의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는 이승훈에게 빚진 바 크다. 특히 내년 100주년을 맞이하는 3·1운동은 이승훈 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3.1운동 100주년기념 주간말씀묵상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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