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와 독립운동”
Ⅰ. 독립투사의 일대기 및 역사적 의의
1. “도사 길선주, 목사가 되다”
길선주는 성균관 박사를 지냈던 야은(冶隱) 길재(1353~1419)의 19대손으로 1869년 3월 15일 평남도 안주읍에서 길봉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길선주의 어린 시절은 나라 안팎의 정세가 매우 어지러웠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관리들은 부패하고 민심도 팍팍해졌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던 청년 길선주는 책을 통해 읽고 배운 세상과 너무도 다른 현실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염세의 마음을 이겨보려고 장사에 손을 대었지만 이마저도 녹록치 않았다. 장사 실패로 인해 세상에 대한 염증은 더욱 깊어갔다.
그의 나이 열아홉 되던 해 어느 날 기묘한 꿈 때문에 평양 을밀대에서 도사를 만나게 되어 차력술에 빠져들게 되었다. 차력술에 빠져든 그는 곧 선도(仙道)에도 빠져들었다. 선도야 말로 무병장수할 수 있다는 말에 입산하여 3년을 정진했다. 길선주의 선도수련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일반인과 다른 신통력을 가졌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도로서는 젊은 여자의 유혹도 극복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입산하여 선도를 수양하는 동안 집안 살림은 완전히 바닥이 되었다. 더 이상 선도에 매달릴 수 없었던 길선주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선도를 같이 수양했던 김종섭(金鍾燮)이 길선주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런데 그 사이 김종섭은 기독교에 입문한 터였다. 그는 향후 평양 장대현교회의 첫 장로가 될 인물이었다. 김종섭은 길선주에게 자기와 같이 기독교에 입문할 것을 권하였다. 당시 기독교는 ‘양귀자’(洋鬼子) 즉 서양귀신으로 불릴 정도로 평양지역에서는 반감이 높았다. 더구나 얼마 전까지 선도의 수양에 푹 빠져있던 길선주에게는 정신 나간 사람의 소리로 들렸다. 오히려 길선주는 김종섭에게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김종섭은 길선주의 완강한 저항에 굴하지 않고 매일 같이 찾아와 『그리스도신문』을 읽어 주었다. 『그리스도신문』은 언더우드에 의해 발행된 장로교계 신문이었지만 해외소식을 알 수도 있어서 차츰 흥미를 갖게 되었다. 또한 김종섭이 권하는 한문으로 된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천로역정 天路歷程』을 읽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부터 기독교에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성경을 접하면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선도를 수양하면서 단 한 번도 미치지 못한 가르침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형상과 같이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부자 관계로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선악과는 이 관계에 대한 약속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다. 사람은 범죄하여 스스로 그 관계를 끊었다. 사람이 몸을 가리고 숨은 것은 죄를 짓고 나서 순진함과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 들어오실 수 있지만, 인간은 결코 그 역사를 넘을 수 없다. 하나님의 훈련을 통과하지 못한 인간은 삶의 모든 축복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길선주는 특히 ‘메시야 사상’에 흠뻑 젖어들었다. 이 사상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삶의 길을 터놓은 것이며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여겨졌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섭리가 성경을 읽을수록 길선주의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이윽고 1897년 8월 15일 스물아홉 나던 해에 널다리골교회(장대현교회)에서 그래함 리(Graham Lee, 李吉咸) 선교사 에게 세례를 받았고, 1898년에는 교회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고, 1902년 장대현교회의 조사(助事)겸 평안도와 황해도 양도의 도조사(道助事)를 맡았다. 190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07년 제1회 졸업생으로 7명의 동료와 함께 평양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장로교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2. “신앙의 힘으로 민족의 아픔을 품다.”
길선주가 기독교인으로 성장하던 그 즈음 외세의 침탈과 탐관오리들의 탐학으로 인해 나라는 어지럽기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던 즈음 경성에서 국운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독립협회 운동이 일어났다. 독립협회 운동의 기세는 맹렬했다. 이에 길선주도 평안도 사람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17인이 발기하여 독립협회 평양지회를 조직하였고, 자신은 사법부장을 맡았다. 독립협회 평양지회는 평안도 관리들과 유지들도 초청하여 구국민중대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는 평안도 남녀 5천여 명이 운집하여 국권회복을 염원했다. 당시 연설위원이었던 길선주와 안창호가 사자후를 토하자 군중은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화답하였다.
1910년 일본이 강제적으로 한국을 병합했을 때, 민중들은 전국적으로 분노를 표출하였다. 장인환의 스티븐슨 저격사건, 안중근 의사의 이토우 히로부미 저격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공교롭게도 관련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한국 기독교인의 뒤에는 선교사가 있었고, 선교사의 뒤에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영국, 그리고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미국이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적으로 병합하긴 했지만 조선은 타이완과 달리 민중들의 반일정서가 매우 강력하였다. 한국 민중의 반일정서 뒤에는 어떤 형태이던 기독교인들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일본은 한국 민중의 반일 정서를 완전히 꺾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적 배경에서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105인 사건’은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했다는 가공의 사실을 꾸며내 경성과 평양의 기독교인 수백 명을 잡아들인 사건이었다. 체포된 수백 명 가운데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고, 105인 가운데 98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숭실대를 졸업하고 선천 신성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길선주 목사의 맏아들 길진형이 ‘105인 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되었다.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진형은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진 반송장의 상태였다. 신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도 가보았지만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길진형은 1918년 봄에 귀국하였고 귀국한지 사흘 만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민족을 위해 자신을 던졌던 맏아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길선주 목사는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맏아들을 잃은 자신의 슬픔은 자신만의 슬픔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에게 저미는 슬픔이었다. 민족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바른 정신은 오로지 기독교 신앙밖에 없다고 길선주는 생각했다. 즉 민족의 아픔과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견디고 버텨내어서 훗날을 기약하는 길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3. “장대현교회에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1919년 2월 초순에 길선주 목사 사택으로 한 사람의 신사가 찾아왔다.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맏아들 진형과 함께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중국 상해로 망명을 떠났던 선우혁이었다. 장로교 교인이었던 선우혁은 장로회신학교에 재학하면서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를 했던 여운형이 결성한 신한청년당에 가맹하였다.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로 파견했다. 김규식은 파견되기 전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그래서 신한청년당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 일본, 만주 및 노령에 각각 밀사를 파견하였다. 평양으로 밀파된 선우혁이 장로교 증경 총회장인 양전백 목사와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을 만나고 나서 평양기독교계의 영적 지도자이면서 ‘105인사건’의 동지 길진형의 부친 길선주 목사를 찾아온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선우혁과 회담한 후 독립선언에 가담할 것을 결의하였다. 선우혁이 다녀간 지 며칠 후에 정주의 이승훈 장로가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기별을 받았다. 이승훈의 입원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서 동지를 규합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길선주는 이승훈 장로의 병문안 자리에서 선우혁에게 들었던 평양에서의 독립운동 계획을 재차 확인하였다.
그 당시의 일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상해로부터 밀파된 선우혁은 우선 ‘105인 사건’의 옛 동지인 양전백 목사, 이승훈 장로를 차례로 만나고, 또한 평양지방의 기독교계 유력자 길선주 목사를 만나, 현금의 국제정세와 이에 따른 독립운동을 논의하여 적극적인 찬동을 얻었다. 얼마 후 ‘105인 사건’의 또 다른 옛 동지들인 강규찬 목사(산정현교회), 김성탁 목사(송오동교회), 이덕환 장로(장대현교회), 김동원 장로(산정현교회), 윤원삼 집사(장대현교회), 윤성운(남문밖교회), 도인권 그리고 안세환(평양예수교서원 총무)과도 회합을 갖고 독립운동 및 의연금모집에 관해 논의하고 상해로 돌아갔다.
이에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계의 독자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수립하였다. 구체적으로는 평양시내의 기독교인과 기독교계학교와 관립학교에 재학하는 기독학생들을 총동원하여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교사측 교섭은 윤원삼, 학생측 교섭은 안세환, 학생동원은 이보식(창동교회 조사)이 맡기로 하였다.
한편 길선주 목사는 장대현교회가 준비할 일에 착수하였다. 먼저 여전도회 원로인 이신행 권사와 회장인 한영신 권사를 조용히 불렀다. 두 권사는 신앙심이 탄탄하고 애국심도 깊은 사람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두 권사에게, “전 민족이 궐기하는 독립운동이 곧 있을 예정입니다. 그때 태극기가 필요한데, 여전도회에서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며칠 뒤에 여전도회 회원 몇 명이 목사 사택의 별채에서 태극기 제작에 착수하였다. 또한 길선주 목사는 자신의 생일 핑계로 숭의여학교 기숙사생들을 초청하여 평양에서 벌어질 독립운동 계획을 알렸고, 장대현교회에서 출발하는 행렬에 동참하여 행진하도록 당부하였다.
1919년 3월 1일이 되자 서울, 평양, 선천, 의주, 진남포, 안주, 원산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 전국에서 7곳인데 이북지역이 6곳이었다. 이북지역의 중심은 단연 평양지역이었다. 그리고 평양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독립선언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평양지역 기독교인들이 고종황제 봉도식을 명목으로 숭덕학교에 집합하였다. 봉도식이 끝나자마자 오후 1시경에 태극기가 단상에 걸리고 도인권이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식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김선두 목사(당시 장로회총회장)가 독립선언식의 시작을 선포하고 사회를 맡고, 정일선 장로(서문밖교회 전도사)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강규찬 목사(산정현교회)는 자유평등 및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곽권응의 인도로 애국가를 합창했고 윤원삼(장대현교회 집사)은 숭덕학교 교사 황찬영과 함께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부하며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 제창을 인도하였다.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가두로 진출하여 거리에 모여 있던 군중들과 합류하여 독립선언을 외치며 행진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던 장대현교회에서도 독립선언서 낭독식이 벌어졌다. 장대현교회 한영신 권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교회 마당에 높이 게양했다. 이 태극기는 한일합방 때 길선주 목사가 교회 지붕에 감추어 두었던 바로 그 태극기였다. 장대현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교인들과 학생들은 선언서와 태극기를 뿌리면서 서문거리, 종로거리, 신창리 등지로 다니면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조선이 독립을 선언했다고 목소리 높여 외쳤다.
3월 1일 당일 길선주 목사는 2월 21일부터 시작된 황해도 장연읍교회의 사경회 일정을 모두 마치고 기차로 경성으로 향하였다. 경성에 도착해보니 날은 이미 저물고 시위 군중은 대부분 흩어지고 말았다. 길선주 목사는 주저하지 않고 총독부로 직행하여 다음과 같이 외쳤다.
“기차시간에 맞추지 못해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나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길선주요. 나를 감옥에 넣으시오.”
체포된 길선주는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뒤로는 북간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부흥집회는 지역을 막론하고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예수 믿지 않는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의 군화발에 짓밟히는 이 나라 이 백성을 구할 길은 기독교 신앙밖에 없다는 길선주 목사의 일념이 예수 믿지 않는 뭇사람에게도 전달된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신앙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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