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료실

유여대와 독립운동(6)

작성자한다예아빠|작성시간19.03.02|조회수59 목록 댓글 0

유여대와 독립운동

 

. 독립투사의 일대기 및 역사적 의의

1. “서당훈장 유여대, 목사가 되다.”

유여대(劉如大)18781210일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서호동에서 유택현(劉澤賢)과 윤치현(尹致賢)3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릴 적 유여대는 당시의 여느 아동들처럼 동리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그의 나이 열일곱 되던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었지만 전쟁은 우리 땅에서 벌어졌다.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한 청군은 의주방면으로 패퇴하였다. 패퇴하는 청군과 추적하는 일본군 사이에 산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의주와 인근 지역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다른 나라의 군대가 멋대로 이 땅에 들어와서 전쟁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서 온갖 약탈과 행패를 일삼았다. 유여대와 가족들은 난리를 피해 의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청년 유여대는 갑자기 닥친 고통의 원인이 나라의 힘이 없기 때문에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힘없는 나라가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사람을 기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육영사업에 뜻을 굳히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자택에서 서당을 열고 훈장 일을 하였다.

 

평안북도 의주는 압록강 하류에 위치하여 압록강 너머로는 중국과의 국경에 가장 밀접한 도시였다. 국경 도시에다가 압록강 하류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중국과의 문물 왕래와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조선의 상인집단 가운데 만상’(灣商)은 의주상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와 같은 환경으로 인해 기독교가 중국으로부터 비교적 일찍 유입되었다. 한국개신교 최초의 세례자인 백홍준·서상륜 등이 의주출신 청년들이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기독교 선교가 암암리에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여대는 친구 안승원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문하여 의주읍 서교회(西敎會)에 출석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 되던 1898년에 선교사 휘트모어(N. C. Whittemore, 魏大模)에게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로 개종하고 나서 유여대는 개종 이전부터 줄곧 관심의 대상이었던 학교교육에 보다 체계적인 접근을 할 수 있었다. 1899년 휘트모어, 장유관(張有寬), 김창건(金昌健) 등과 함께 의주지역 최초의 신교육 기관인 일신(日新)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한문 교사를 맡았다. 이윽고 1907년 의주읍 서교회에서 장유관 등의 발기로 유여대를 비롯한 최광옥(崔光玉), 조학선(趙學璇), 이성하(李成夏), 배신희(裵信希) 등이 힘을 합쳐 보다 체계적인 학교교육을 실현하였다. 곧 일신학교와 의신소학교(1902), 그리고 여자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양실학원(1905)이 통합하여 1908년에 양실학원(養實學院)이 된 것이다. 양실학원은 심상소학부(4), 고등소학부(3), 중학부 (3)의 학제를 두면서 의주지역을 대표하는 근대교육 기관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유여대는 비록 한문을 가르치고 있지만 학교를 통해서 또는 교회를 통해서 근대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문명개화의 주된 통로는 기독교였다. 그리고 당시의 기독교는 애국심을 상징하는 종교이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김구 선생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중략)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백범일지185)

 

이를 뒷받침 하듯 그즈음의 독립신문에는 기독교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 사설이 심심찮게 실렸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문명개화한 나라는 모두 기독교를 믿는 나라인데, 이것을 보더라도 기독교가 문명개화하는 데에 긴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독립신문, 1897.1.26.)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으나, 예수교와 같이 참으로 선량하고, 참으로 사랑하고, 참으로 타인의 곤궁함을 살피는 종교는 이 세계에서 달리 없다. 어떤 종교가 천하만국에 사람을 파견하여 금전을 보내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타국인을 가르치고 치료하고 돌보겠는가~!”(독립신문1898.8.20.)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문명개화에 나서는 길이다. 문명개화를 통해서 나라가 부강해지면 우리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 우리의 주권을 수호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애국하는 길이다.’

 

유여대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의주와 주변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하였다. 의주군 운천교회(雲川敎會) 설립자로 참여했고 송장면교회(松長面敎會) 수진면교회(水鎭面敎會)를 순회하며 전도하여 많은 결신자를 얻었다. 이윽고 1910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면서 의주 동교회(東敎會) 영수로 있다가 1911년에 그 교회 조사를 맡았다. 19148월 동교회 장로로 장립되고, 19156월 장로회신학교를 제8회로 졸업하였고, 그해 8월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모교회인 의주 동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191931일 피체될 때 유여대 목사가 시무했던 의주 동교회 교인수는 300여명이었다.

 

2. “민족대표 33인이 되어 의주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191811월 평북노회에서 의산노회(義山老會)가 분립되었다. 당시 평안북도의 교세가 계속 늘어나 한 개의 노회만으로 치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의산노회의 지경은 의주군을 비롯하여 삭주, 창성, 벽동, 삼산군을 포함하였다. 즉 의주에서 삼산까지라는 의미로 신설노회 이름을 의산노회로 한 것이다. 창립 당시 의산노회에는 70개의 교회와 13천여 명의 교인이 속해 있었고, 초대노회장은 휘트모어 선교사였다. 의산노회가 분립될 때 유여대 목사는 창립노회에서 부회계로 선임되었다. 유여대 목사가 평북노회로부터 새로 분립된 의산노회에 귀속될 재정을 정산하기 위해 이듬해 210일 전후로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를 방문했을 때, 선천의 양전백 목사 집에서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 장로를 만났다.

 

이승훈은 유여대 목사에게 상해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의 민족대표가 참석하러 가고 있다. 조선은 독립을 선언할 좋은 기회이다. 지금 경성과 평양에서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독립선언서의 대표자가 되지 않겠느냐고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 때 유여대 목사는 원래부터 자신에게도 조선독립의 의지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의기투합하여 거사에 흔쾌히 동참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때 양전백 목사가 독립선언은 경성(京城) 및 각지에서 하기로 되어있는데 자기는 경성으로 갈 생각이므로 당신 (유여대)도 민족대표로서 경성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때 유여대는 민족대표로서 거사에 참여하는 것은 찬성이나 자신은 경성으로 가지 않고 의주에 남아서 의주 방면의 일을 담당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유여대 목사가 선천에서 의주로 돌아왔으나 선천에서의 회동사실이 누설되지 않도록 비밀을 엄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주방면의 독립운동을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동지를 규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217~8일경에 의주면 서부동(西部洞) 과부가 운영하는 숙박업소에서 정명채(鄭明采), 김두칠(金斗七)을 엄밀히 만나 선천에서의 회동내용을 알려주면서 의주에서 독립운동을 같이 할 것을 제안했고 두 사람의 찬동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유여대 목사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했지만 막상 언제 어떻게 운동이 벌어질지 후속 연락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와 다름없이 목사로서의 직무를 보면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2월말 즈음 의주군 주내면(州內面) 용운동교회(龍雲洞敎會)에서 사경회(査經會)를 인도하고 있을 때, 정주(定州) 사람으로 선천교회의 영수인 도형균(都衡均)이 사경회 중인 유여대 목사를 찾아왔다. 도형균이 전하는 요지는, ‘독립선언은 31일이며 경성을 비롯한 전국 각 지방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하기로 되었다. 지난 번 선천에서 약속한 대로 의주에서도 31일 기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시라. 31일 이전에 경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보내올 것이니까 그것을 낭독하고 조선독립을 선언하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228일이 되어도 경성으로부터의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28일 밤 정명채, 김두칠 등과 양실학교(養實學校)에 모여서 내일(31) 있을 독립선언의 발표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여기에는 이미 독립운동을 동참하기로 결의한 20인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경성으로부터의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다른 곳에서 발표한 선언서 (2·8독립선언서) 를 등사하여 준비해 놓았다가 독립선언과 더불어 배포하면 어떠냐는 의견이 있었고 참석자들이 모두 찬동하였다.

 

191931일 오후 2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내에 있는 의주읍 서교회당(西敎會堂) 부근 공터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 선언식을 주재한 사람은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유여대 목사였다. 순서는 (1) 찬미가, (2) 기도, (3) 식사(式辭), (4) 선언서 낭독, (5) 독립창가 합창, (6) 대한독립만세, (7) 의주성(義州城) 행진으로 이루어졌다. 식장에는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許尙璉)이 미리 준비한 대형태극기 두 개가 세워지고, 종이로 만든 소형 태극기 일백 수십 매도 배포되었다. 식이 시작되자 함께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안동현(安東縣 에 거주하던 김병농(金炳穠)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 기원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어 유여대 목사가 이로부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식사를 하였다. 동경의 2·8독립선언서를 원고로 그 날 새벽에 등사한 선언서를 낭독하려 할 때에 때마침 경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도착하여 그것을 낭독하였다.

 

이어서 북하동교회 영수(領袖) 황대벽(黃大闢)과 송장면 창원교회 조사(助事) 김이순(金利淳)이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담아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찬미가와 독립 창가를 사람들과 함께 합창했다. 이윽고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고, 학생을 선두로 독립만세와 독립 창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이에 놀란 헌병들이 달려와 해산을 하려했으나, 오히려 시위대는 점점 더 늘어나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날 시위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31일뿐만 아니라 32일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36일까지 읍내 곳곳에서 계속되었다.

 

의주의 유여대 목사와 김병조(金秉祚) 목사는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 서명하였지만 경성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는 참여하지 않고 의주 지역 일대의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다. 독립선언서 서명한 민족대표가 경성으로 가지 않고 자신의 지역에서 직접 민중들을 지도하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주도한 유일한 사례였다.

 

독립선언식 직후에 주동자 7인과 더불어 체포된 유여대 목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3년여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116일에 만기로 출소하였다. 출옥하자마자 의주 동교회 담임으로 복귀하여 목회를 계속하는 한편, 삼일운동으로 폐쇄되었던 양실학교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120여 년간 시무하던 의주 동교회를 사임하고, 신의주로 이사하여 그곳 백마교회를 담임하며 예배당을 새로 짓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러나 1934년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백마교회를 사임하였다. 유여대 목사는 휴양을 하면서 후학들을 위해서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지금까지의 설교를 모은 강대지남(講臺指南), 귀감이 될 만한 동서고금 위인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 위인기담(偉人奇談), 각종 서식 작성법과 상식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 면무식(免無識) 등을 출판하였다. 하지만 결국 건강이 더 악화되어 1937113일 자택에서 소천 하였다. 1962년에 삼일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유여대 목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