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치유와 성장

잔느귀용의 욥기

작성자꿈샘|작성시간24.04.02|조회수52 목록 댓글 0

 

욥이 늘 눈에 띄는 은혜 속에 거하며, 하나님의 은총과 많은 선물들을 받았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은 성경을 통틀어 또 다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이상한 방법으로 시험을 받고, 훈련받고, 정결하게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토록 거룩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와 같은 호된 시련이 필요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택하신 자들을 같은 방법으로 다루신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왜 놀라야 하겠습니까? 시련이 다소 혹독하고 크고 긴 것은, 물론 사람들에게 거기에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만, 즉 그들 자신의 올바름에 대한 확고한 만족, 딱딱하고 옹졸한 기질, 벗겨짐을 당하고 자신의 전부를 잃는 것을 허락하기 꺼려하는 마음 등 그들이 끝내 부수어질 준비를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이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만들어 가실 때이기도 합니다.

 

내가 영혼이 항복하는, 극심한 비참함을 보여주는 시련에 대해 말할 때, 여기에 고의적으로 짓는 온갖 종류의 죄는 결단코 제와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둡니다- 왜냐하면 유혹이 얼마나 강하든지 간에, 사람은 결코 고의적으로 죄를 지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너무나 어두워지고,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내어주신 힘이 너무 커서, 사람에게 그가 고통당하는 악이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욥은 오히려 그가 고통당하는 모든 것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은 완전히 단념하며 하나님의 손에서 그 고통을 받습니다. 그는 “좋은 것들이 주님의 손으로부터 왔는데, 그분께로부터 왜 악한 것들은 받으면 안 되는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비의 충만하심 안에서 기쁨으로 채움 받았으니, 우리의 고통 속에서도 기뻐합시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우리가 지각없이 우리의 것으로 삼은 것들을 다시 찾으셔서 당신께 공평을 행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에게 속한 것만을 우리에게 남겨두심으로 우리에 대하여도 공평하게 행하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욥이 인내심 없는 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는 조금도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그가 받은 재앙이 욥의 그릇 행함과 죄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 친구들에게 맞서, 하나님의 동기를 고수하기 위해 일어섭니다. 친구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욥은 그 시련들이 자신의 무죄와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임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표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욥이 오직 자신을 방어한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 그는 의로우나 유혹을 받으며 고통 받는 자들의 동기를 방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욥이 자신에게도 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그것은 욥이 매우 깊은 겸손과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서, 예언자로서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척이나 많은 재앙의 무게로 욥을 짓누르신 후에도 여전히 욥에게 맞서 그의 원수들의 편을 드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식으로 욥의 비탄을 그 충만한 분량대로 끝까지 가득 채우시려 하셨다면, 그분은 거기서 종지부를 찍으셨을 것입니다.

 

이 죽음은 몹시 짧고, 그 슬픔들은 몹시 가벼우며(비록 그것을 표현하면 몹시 끔찍하게 보일지라도), 반면에 그것이 낳는 축복은 대단히 크고, 매우 광대하며 무한정합니다. 그리하여 이를 이해하기만 한다면, 백배나 더한 고통도 그것들을 감수하기에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일 것입니다. 오직 약간의 용기와 충성과 정절이 필요할 뿐입니다.

오,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기 원하는 이들이여, 시도하십시오! 순교자들은 이 상태를 경험하지 않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짧고 격렬한 순교는, 이제 순교가 다른 사람들 안에서 얼마나 더 길고 덜 상식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가 그러한(순교의) 고통으로부터 제외되지 않았었음을 우리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스바(기괴한 나라) 사람들이 광란의 약탈자로 와서 밭을 갈고 있는 소와 멍에 메고 있는 짐승들을 빼앗가 가버렸습니다.

이러한 박탈은 고행과 혹독한 선의 훈련의 성과를 빼앗는 것을 상징하며, 사람이 자기 영혼의 땅에서 수고하여 일굴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실했다는 것을 알 때에만이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면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상실에 대해 무지하다면 우리는 손실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잃은 것들을 우리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후에 불이 내려와서 하늘로부터 양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양들을 불살라버린 이 불은 내면의 순전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훨씬 더 깊은 사랑이 사랑의 달콤함을 빨아들인 것입니다. 이 불은 우리가 대단한 관용으로 시행하는 어떤 구제의 행위라던가 참회, 또 기도를 계속하게 하는 어떤 기술들을 다 불살라 없애버립니다. 이 무자비한 불이 다 파괴합니다. 파괴된 것들은 더 이상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영혼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빼앗긴 것만을 다시 받을 수 있고, 불로 태워진 것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갈망,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기도와 구제, 참회 등을 행하고자 하는 생각까지도 모두 빼앗깁니다. 그곳들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을 돕는 종들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오직 한 종만이 남았고, 그것은 그 영혼에게 손실을 알리는 지식이며 모든 쓰라림을 느끼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욥의 외면적인 축복들, 곧 그의 바깥쪽에 있는 것들을 박탈하기 시작하셨고, 그 다음 그에게서 좀 더 가까이 있는 것들을 가져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면적인 영혼들에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욥이 경험한 외면적인 상실은 대부분의 인내심 깊은 사람들에게라면 아주 사소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더욱 강력하게 그의 내면의 것을 빼앗아가지만 않으셨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고통을 겪는 것은 대개는 일종의 내면의 고통들입니다. 질병과 재산 상실은 내면을 짓누르는 슬픔을 동반합니다.

 

세 때의 갈대아 사람들은 영혼의 세 능력을 한꺼번에 공격하는 모든 종류의 유혹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그 영혼을 지탱시키고 자신감 있게 행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가장 먼저, 총명이 어두워지고, 신성에 대한 불손하고 거룩하지 못한 유혹이 가득해지며, 악한 생각들과 두려움, 비열함이 한꺼번에 모여들며, 일천 가지 의롭지 못한 만족과 죄에 대한 갈망, 그리고 이것들에 명백하게 동의하고자 하는 갈망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영혼은 너무나도 눈이 멀어, 고통을 동의하는 것과 죄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고통들은 그에게 마치 죄처럼 보이고 맙니다. 게다가, 이는 종종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성향으로써, 그 마음의 어떤 집착과도 문제를 일으키는데, 마치 모든 행복을 파괴시키는 것 같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