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8단계와 단계별 숙제들
1단계: 신뢰 형성하기
신뢰는 태어나 1년 6개월 사이에 형성된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양육자가 배고플 때 먹여주고 졸릴 때 재워주고 똥오줌을 싸서 불쾌할 때 잘 치워주고 웃는 모습으로 대하면 '아,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낀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 사이에 기본적 신뢰가 생기면 아기는 삶에 대한 희망이라는 미덕을 갖게 된다. 희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덕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희망이 있는 한 사람의 삶은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배가 고파도 먹여주지 않고 졸린데 재워주지도 않으며 똥오줌을 싸도 치워주지 않아 불쾌한 상태로 방치되거나 엄마가 찡그리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대하면 아기는 '사는 것이 힘들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세상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세상에 대해 불신감을 갖는다. 불신은 무서움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환경을 탐색하려 하지 않고 엄마 뒤에 숨게 만든다. 자신의 발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얻지 못하고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 제대로 의지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없고 힘이 없으며 늘 안전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즉, 자폐적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아기가 이 단계에서 신뢰를 형성하면 평생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되고, 불신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퍠쇄적인 사람이 된다. 이것이 발달의 첫 번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과업과 위기다.
2단계: 자율성을 발휘하기
1단계에서 양육자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한 걸음마기 유아는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자율적, 주장적이 되어간다. 이때 아이의 의지를 꺾고 처벌을 심하게 하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의심과 수치심을 갖게 된다.
생후 1년 6개월에서 3년 사이의 아이들은 무엇이든 만지려 하고 잡으려고 한다. 자신의 뜻대로 되면 재미있어하고 더 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자율성을 제대로 발달시키면 덕으로 의지력이 생긴다. 그러나 아이가 이런 자율성을 행사할 때 주변에서 지나치게 야단을 치거나 억제를 해 강제로 쥐고 있는 물건을 놓게 하면 아이는 창피해하며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런 아이들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쥐면 놓지 않으려는 신경증적 경향을 갖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데 주저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의지력을 발휘하는 행동을 하는 데 어려움을 갖게 된다.
3단계: 주도성 갖기
의지력이 생긴 아이들은 놀이에서 주도권을 갖고 싶어 한다. 세 살에서 다섯 살 반 사이의 아이들은 자신의 주도하에 놀이를 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서로 주도를 하려고 소리를 지르고 심한 경우에는 상대방을 밀치고 때리는 행동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배우고 역할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 성 역할도 이때 확고히 하게 된다. 즉, 목적의식이 생긴다. 목적의식이 뚜렷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성격이나 방향 등을 분명하게 알고 이를 추진하는 힘을 갖는다.
그러나 주도성을 확립하는 데 실패하면 유아적 질투심을 느끼고 상대방을 공격한다. 예를 들어 대장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실패하면 대장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몰래 해를 끼치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을 조종해서 대장을 괴롭히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에게 죄의식을 느낀다.
4단계: 근면성 배우기
다섯 살 반에서 10~11세에 이르는 이 단계에 아동들은 학교를 통한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 앞으로의 삶에서 필요한 가장 기본적 지식들과 기술들을 익히는 시기다. 아이들은 읽기, 쓰기, 셈하기 등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습득하고 학교 과제들을 수행함으로써 근면성을 발휘하고 자신감을 갖는다. 자신감이 생긴 아이들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면서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탐험해나간다.
그러나 읽기나 셈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 생활을 재미없어할뿐더러 열등감을 느낀다. 근명성을 발휘하지 못해 주어진 과업을 완성하지 못함으로써 이들은 자신에 대해 부적절감을 느끼며 의무적으로 일을 하거나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외부적인 강압이 아니면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하고 필요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의존 성향을 보인다.
5단계: 정체성 형성하기
청소년기 아동은 새로운 역할이나 성인으로서의 모습 등 자신의 실체나 역할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는 청소년 자녀에게 여러 가지 역할이나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긍정적인 정체감 형성을 도와줄 수 있다. 이 시기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청소년기 시작의 가장 큰 특징은 성호르몬의 왕성한 분비다. 2차 성징이 나타난면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성적 성숙으로 인한 신체적 변화가 일어난다. 동시에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생기며,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조정하고 적응하는 사회적 변화가 급격하다. 이러한 변화를 자신의 삶에 잘 통합하면 자아 정체성을 갖게 되고, 그 결과로 자신의 삶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충실성을 갖게 된다. 자아 정체성이 분명하고 뚜렷해지면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역할 혼돈이 생긴다.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으면 유명 인물들과 자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긴다. 성적 경계선을 긋는 데도 어려움이 생긴다. 지나친 집착이 생기거나 관계를 단절하고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경향도 생긴다.
6단계: 친밀한 관계 맺기
정체성을 형성한 청년들은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21~40세가 이 시기다. 친밀한 관계란 자신의 마음과 시간, 에너지를 내어주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느 것을 말한다. 정체성이 분명해야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상대방에게 발할 수 있고, 상대방의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해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친밀해지고 다음 세대도 준비한다. 친밀한 관계가 잘 형성되면 덕으로 사랑이 생긴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친밀한 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건강한 이성 간의 관계를 확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엄격한 금욕적 삶을 살거나 난잡한 성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다른 사람과 있으면서도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고 실제로 성행위를 하면서도 즐거움이나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7단계: 관용 배우기
40~65세의 중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이 단계에 해당한다. 중년기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잘 키워서 사회의 다음 주역으로 키워야 한다. 이런 일을 잘 진행하면 돌봄이라는 덕이 생긴다.
그러나 이렇게 다음 세대를 돌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정체된다.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생활 습관, 그리고 행동 양식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젊은 세대나 아이들을 힘들게 만든다. 다음 세대를 돌보기보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음 세대를 착취한다.
8단계: 자아 통합 이루기
65세 이후 노년기에 해당하는 이 단게의 사람들은 다양성을 수용하게 된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개방적으로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자신의 삶과 역사, 문화를 통합하는 삶을 살게 되며 이를 통해서 지혜라는 덕을 발달시키고, 이를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전수하여 더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반면에 자아 통합이 안 되는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더 이상의 기회도 없는데 후회되는 것들만 많다. 많은 나이 든 사람들이 '걸걸걸' 한다고 한다. '그때 이럴걸,' '저때 저럴걸' 후회를 하면서 사는 인생이라는 의미다.
발달단계의 핵심은 정체성 형성
에릭슨의 발달단계는 청소년기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수렴했다가 다시 분산하는 과정을 거친다.
신뢰, 자율, 주도, 근면이라는 각 단계들은 정체성을 향해서 발달이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수렴이다. 정체성을 형성하고 나면 그 뒤에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즉 분산을 위한 단계들을 거치는데 이러한 단계들이 친밀, 관용, 통합단계들이다.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전반기의 단계들은 모두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삶을 살지를 정립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기적으로만 성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방식이 주종을 이룬다는 의미다. 이에 반해서 후반기의 단계들은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종국에는 자신의 삶을 모두 내어주는 이타적 삶이다.
에릭슨의 발달단계는 이처럼 이기적 삶인 수렴단계를 거쳐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후 이타적 삶인 분산단계를 거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마치 건물을 짓는 원리와 비슷하다. 건물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인력, 자재, 자본 등이 동원된다. 모든 필요한 것들이 건물을 짓는데 들어가는 수렴의 단계이자 이기적 단적 단계이다. 이를 거쳐서 건물이 완성되면 이때부터 건물을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단계로 접어 든다. 즉, 분산의 단계들을 거치게 된다.
각 단계의 발달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신뢰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거나 자율성, 주도성, 근면성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 못다 한 숙제는 언젠가는 인생의 발목을 잡는다. 이 부분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못다 한 숙제가 만드는 증상들
-무기력해지고 중독에 빠지기 쉽다
아기가 태어난 후 3년 사이에 심리적 기초가 세워진다. 이때 심리적 기초가 잘 형성되어 신뢰와 자율성이 발달된 아이들은 어른 말을 잘 안 듣는다. 말을 안 듣는다는 얘기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뚜렷하다는 얘기다. 어린아이들이 엄마 말을 안듣고 떼를 쓰는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이다. 애들 입장에서는큰 싸움이다.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는 아이를 다시는 떼를 못 쓰게 기를 꺽어놓는 부모들이 있다.
주도성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로 성장하면 무기력해진다. 주도성이라는 특성은 자기 자신을 꾸려갈 수 있는 힘이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언제나 자기 안에 주도성이 있어야 된다. 자유 의지가 필요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필요하다. 주도성이 확실해지면 사람이 근면해진다.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뭔가를 성실하게 하는 생동이 근명성인데. 이는 영어로 보면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란 뜻이다. 믿음이 충만하지 않으면 성실하게 못한다. 뭔가를 꾸준하게 하는 사람들은 일단 발달과업 차원에서 보면 주도성이 해결된 사람이다. 주도성 문제가 해결 안되면 무기력으로 가게 되고, 근면해지지 않는다. 뭐를 해도 하다 말다 하면서 성취해내는 것이 없고, 그런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잘하고 싶은 욕구는 있다 보니 이런 현실이 괴로워 이를 피하려고 중독에 빠진다. 남성들 중에 술 중독, 도박 중독, 성 중독에 빠지는 사람은 주도성과 근명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정체성이 없으면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초기 청소년기인 16세까지 신뢰, 주도성, 근면성을 배우지 못하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러면 서바이벌로 살게 된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외부의 요구에 맞추어서 삶을 산다. 이렇게 되면 마음을 나누는 정서적 관계를 하지 못하고 일만 하면 살게 될 수 있다.
1단계의 기본적 신뢰가 형성이 안된 사람들은 세상은 믿을 만한 곳이 못 되니 모든 걸 투쟁을 통해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살아남으려고 열심히 산다. 모든 초점이 서바이벌 쪽으로 가 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도 않고 근면하게 사는데, 존재로서가 아니라 기능적으로 열심이다. 돈을 벌 수 있고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렇게 열심히 해서 주도성도 생기고 근명성도 생겨 정체성이 형성되기는 하는데, '쓸모 있는 기계적인 인간' 쪽으로 형성이 된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만성 우울이기 쉽다. 열심히 사니까 성공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는 단계에 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가 중년기에 자살을 한다. 중년기가 되면 더 이상 기능만으로는 못 버티기 때문이다.
존재로 사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 자꾸 해보고 싶고 도전하고 싶어진다. 존재적으로 주도성이 있고 근면성이 있는 사람들은 삶을 재미있게 살아간다. 일이 재미있으니 열심히 한다. 일을 하는 데서 기쁨을 누린다. 기쁨은 정체성과 관계가 있다. 정체성이 형성된 사람들은 삶에 대한 기쁨을 느끼고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기쁨 중 하나가 보람이다. 정체성이 형성된 사람들은 일을 하며 삶에 대한 기쁨을 느낀다.
-올인하거나 상대를 지배하는 데이트
청소년기는 발달단계상 5단계다. 이때까지 발달단계별로 과제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으면 데이트를 할 때 1차적으로 문제가 불거진다. 거기서 해결이 안 되면 잠복했다가 중년기 때 본격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데이트는 자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자신의 시간, 돈,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런데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은 주지 못하고 가지려고 한다. 겉으로 보면 시간, 돈, 에너지를 다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을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한다. 데이트를 할 때 주지 못하고 가지려 하는 두 가지 양상이 있다. 하나는 '상대에게 올인하기'고 다른 하나는 '상대 지배하기'다.
-죽기 전에 사랑 한번 해보고 싶다는 몸부림
올인을 하거나 지배하는 방식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사람들은 아직 친밀한 관계, 즉 자신을 주는 방식의 관계를 해보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면 새로운 경제적 생존의 문제에 부딪힌다. 당장 코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20년 동안 열심히 산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앞으로 살날이 적어지고 있는 것을 의식하며 더 늦기 전에 자신이 못해본 것들을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는 그중 하나다. 아이들도 있고, 부인이나 남편도 있지만 친밀함에의 욕구가 강해진다. 연애다운 연애를 못한 사람들은 연애를 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죽기 전에 사랑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해진다.
김용태, <중년의 배신>, 129~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