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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호와의 증인`이란 --- 제2부 러더퍼드에 의한 조직의 확대

작성자Watchman|작성시간07.01.24|조회수1,258 목록 댓글 0
 

역사 제2부    러더퍼드에 의한 조직의 확대


1)러더퍼드

조셉 프랭클린 러더퍼드 (1864 - 1942) 는 미국 미주리 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고학하며 도제로서 고용되어 일하면서 변호사의 자격을 얻은 후,1906년 세례를 받고 러셀의 종교 활동에 참가하였다. 마침 그때는 러셀의 이혼과 교직자들과의 분쟁으로 수많은 재판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러더퍼드로서는 이 단체에서 지위를 쌓아 올리는데 행운이었다. 그는 장기인 웅변을 발휘하여 러셀과 그 종교를 변호하였다. 따라서 러셀의 사후 불과 2개월에, 그가 러셀의 후계자로 취임한 것도, 특별히 불가사의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러더퍼드의 러셀과 대조적인 강권적인 성격은 그의 취임 당초부터 눈에 띄었다.


러더퍼드의 성격에 대해서는 러셀과 마찬가지로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장신에다가, 강건한 체구, 거기서부터 나오는 위압적인 음성과 말투는 언제나 듣는 사람을 압도했다. 그는 종교지도자라기 보다 상원의원의 정치가 타입이었다. 그는 몹시 기분파여서 말투는 무례하고 거만한 인상을 듣는 사람에게 주었다. 화를 잘 내는 성격으로 이따금씩 화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자기를 비판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자기에게 반대하는 것에는, 자동적으로 악마의 레테르(*역자 주-딱지) 가 붙여졌다. 품행방정을 캐치프레이즈로 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장에는 걸맞지 않은 품의 없는 언동이 자주 보였다.


주의 만찬 기념식의 전날 밤, 두 사람의 장로를 거느리고 누드-쇼를 보러갔던 일로, 그는 공적으로 비난받게 되었다. 러더퍼드가 알콜 중독자였던 것은 모든 역사적인 자료가 일치하게 인정하는 바다. 당시의 베델(뉴욕의 협회 본부를 이렇게 불렀다)에서 러더퍼드가 있던 곳에서 일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러더퍼드는 회장 직권을 이용하여 캐나다 지부감독자로부터 술을 헌상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러더퍼드의, 영적지도자라고 말하기보다, 야쿠자의 두목이라고 하는 편이 꼭 맞는 이 성격과 언동은, 그를 러셀과 다른 모양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만들어 갔다. 수년 후에, 협회는, 집단지도체제를 지시한 러셀의 유서와는 반대로, 러더퍼드의 절대독제체제로 전혀 다른 변혁을 이루어 간다.


2)  1 9 1 7 년의 대분열

1916년 10월 31일 러셀의 사후, 후계 회장의 자리를 둘러싸고 몇 사람이 다투게 되었다.

볼 존슨은 처음 러셀의 지시에 따라 영국에서 국제성서연구생협회를 조직하고 있었지만, 러셀의 사후 차기 회장을 노리게 된다. 이것을 알게 된 러더퍼드는 런던에 있던 존슨의 모든 직권을 박탈하고, 즉시 미국으로 귀국을 명령했다.  러더퍼드는 존슨을 정신병 취급을 하고, 그 후 일체 그에게는 직무를 주지 않았다.


한편 협회의 이사회에는, 러셀이 직접 임명한 4명의 멤버가 있었다. 이 4명은 러더퍼드가 러셀의 유지를 무시하고 러더퍼드 독자의 방침을 내어 놓은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협회 규약을 변경하고, 러더퍼드에 대한 권력 집중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안 러더퍼드는 즉시 이 4명의 이사를 해임하고, 자기를 지지하는 다른 4명의 이사로 바꾸어 버렸다.

이유는 그들이 러셀의 직접 임명에 의한 이사이며, 이사회의 선거를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위는 무효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핑계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외에도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이사가 몇 명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립이 결정적이 된 것은 1917년 7월 러더퍼드가 은밀하게 다른 두 사람과 공동으로 집필해 온 [종말을 고한 신비]를 러셀의 6권 [성경연구]의 제 7권으로 돌연 발표해버린 것이다. 이 책은 주로 계시록과 에스겔서를 주해한 것이지만, 이때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기이하고 기묘한 해석이 눈에 띄었다. 예를 들면 계시록 14장 20절의 포도주 틀로부터 흘러내린 피의 거리 1600 ‘스타디온’의 far-long은 , 이[종말을 고한 신비]를 쓴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으로부터 협회의 본부가 있는 브루클린까지의 거리에 대하여 쓴 것이라고 해석되어있다. 그러나 이 거리의 계산은 뉴저지 주 호보켄 으로부터 출발하는 페리보트를 타는 것이 전제 조건이 되어있다.


그 괴이한 내용은 제쳐놓는다고 해도, 이 책의 집필에 관하여는, 공동 집필자가 있기는 하였지만, 러더퍼드 한 사람이 실질적으로는 기획 편집한 것이었다.  이 일은 러더퍼드가, 그 당시는 아직 살아남아 있던 민주적인 협회 운영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어서,  이사들 특히 러셀의 유지를 계승한 자들의 불만을 샀다. 존슨은 이 일을 공공연히 러더퍼드의 앞에서 항의 하였다. 1917년 7월 27일 존슨은 베델 가족(직원들을 이렇게 불렀다) 의 면전에서, 자신을 해명할 기회도 얻지 못한 체로, 러더퍼드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다. 존슨이 자신의 입장을 말하려고 했을 때, 러더퍼드는 폭력적으로 존슨을 베델로부터 몰아내었다고 한다.

그의 개인 물건들을 문밖에 내어 던지고, 몇 명의 형제가 감시하며 존슨이 돌아오는 것을 저지할 채비를 하였다. 또한 4명의 반 러더퍼드 이사들도 경찰력을 도입해서 추방하였다.

    

1918년 드디어 이들 추방된 신자들은, 별도의 교파를 형성하고 완전히 러더퍼드가 통솔하는 협회와 갈라서게 되었다.  이들 분파한 신자들은 그 후 [러셀 파] 로 불러지게 되었다.

그들은 확실히 러셀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모양이 되었다. 그러나 만약 개인의 이름으로 그 교파를 부른다고 한다면, 러더퍼드의 조직이야 말로 [러더퍼드 파]로 불러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스탈린 독제정권하의 공포의 숙청을 방불케 하는 러더퍼드의 처리방법과 거기에 이어지는 일련의 독제체제 구축 과정을 보면, 한 개인의 영향이 일관되게 그 교파의 교의(가르침)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 점에서는, 러더퍼드의 추종자, 결국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 분들은, 소위 [러셀 파]보다도 훨씬 강력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다름 아니라, 현재의 여호와의 증인은 모두 [러더퍼드 파] 로 불러져야 할 사람들인 것이다.



3) 러더퍼드의 투옥사건

1917년, 러더퍼드는 회장 취임 시초부터, 그리스도교계의 성직자들이 당시 진행 중인 제1차 대전을 지지하는 것을 비난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 일은 당연하게 큰 반발을 사서,   러더퍼드를 포함한 8명의 협회 임원은 선동죄로 기소되어 유죄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애틀랜타의 구치소에 보내어져 9개월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 동안에 일시적이긴 하지만, 워치타워 종교는 실질적으로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경험은 러더퍼드의 생애에 일관된 그리스도교계에 대한 증오에 박차를 가한 것이 되었다.  1919년 3월, 그들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어, 그 다음 달, 공정한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원 무죄를 언도 받았다.



4) 새로운 출발

석방 후 러더퍼드는 조직의 재건에 몰두하였다. 새롭게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교리가 필요하였다. 1920년 그는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책을 출판하여 “새로운 빛” (여호와의 증인들은 새로운 교리를 발표할 때 마다 이렇게 부른다)을 나타내었다. (책의 제목과 같은) 동명의 슬로건의 기치아래 신자들에 의한 새로운 집에서 집으로의 선교활동이 개시되었다. 이 새로운 교의에서는, 1925년에 인류가 완전함을 회복하고, 완전한 인간이 지배하는 1000년 통치가 시작된다, 그때에는 구약성서의 여호와의 충실한 종,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모두 완전한 인간으로 부활하여, 현존하는 만민과 함께 새 질서의 가운데서 영원히 살게 된다. 이 새로운 캐치프레이즈는 러더퍼드의 계산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붙드는데 성공하였다. 새로운 집에서 집으로의 선교활동과 그 시간보고 의

무의 개시는 이것에 박차를 가하였다. 1925년이 가까워 올수록 이에 따라 신자들의 감정은 더욱 앙양되었다.


러더퍼드는 협회의 자금으로, 부활하여 온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맞아들여서 살게 하기위하여 ‘베스 살리움’ 이라는 이름의 호화 저택을 캘리포니아 주 샌디애고에 구입하였다. 신자들은 사업. 학업, 결혼, 출산 등을 죄다 늦추고, 1925년의 새 질서의 도래에 대비하였다.

집을 판다든가 보험을 해약하기도 하였다. 또한 농촌의 신자들은 1925년 이후의 수확은 필요 없다고 하여 파종하는 것도 중지하였다.


드디어 1925년이 와서 지나가고, 예상되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수천 이라는 신자들이 실망하고 이 종교를 떠나갔다. 러더퍼드는, 말하자면 그는 이 실패에 조금도 마음이 동요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변함없이 “끝은 바로 가까이에”  “설령 지금은 빗나갔지만 수년 혹은 수개월내에는 실현될 것이다” 하며 강경한 태도를 계속했다.


이 마지막 때의 설정, 그것에 대비하는 신자들의 동원과 급격한 증가,  실망과 얼버무리는 예언의 수정이라는 패턴은, 이때 이후 현대까지 줄 곳 이어 온, 반복되는 이 종교의 특징이며, 그 최초의 원형이 이 1925년의 예언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5) 러더퍼드의 지도에 의한 워치타워종교의 확대

이 1925년의 예언의 실패는 이 종교의 신자 수를 일시적으로는 감소시켰지만, 그 경향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러더퍼드는 차례차례로 새로운 선교활동을 시도한다. 1925년 이후

일 년에 한권의 비율로 그는 자기의 책을 출판하였다. 또한 1922년의 오하이오주 시더포인트에서 시작하여 매년 전 미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수만 명이라는 신자를 동원하여 그 확대된 모습을 짐짓 드러내 보였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의 이들 전국 대회는, 계시록 8장 1절부터 기록 된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분다고 하는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이며, 현대 여호와의 증인도 믿고 있는 교의의 하나인 것이다. 또한 1925년 이후 협회의 출판물은, 편집위원회를 통하지 않고 러더퍼드 한사람의 판단으로 출판되게 되어, 그는 결국 편집위원회 그 자체를 해산하였다.



6) [ 여호와의 증인 ] 의 명명

1919년 이후 러더퍼드는 지신의 추종자인 [성경연구생]과, 러셀을 계승하고 있기는 하지만, 러더퍼드를 반드시 따른다고는 할 수없는 [성경연구생]들과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1931년 7월의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전국대회에서 그는 자신들의 종교를 [여호와의 증인]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를 것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이사야서 43 장 12절의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로부터 가져 온 것이다. 그는 이사야 62장 2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새 이름] 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했다.

그러나 이 이사야서를 2절 더 읽어 나가면, 그 새로운 이름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고,   [나의 기쁨이 그 여자에게 있다] 로 되어있어 ( *역자 주-신세계역 이사야 62장 4절은 “- - - 도리어 너는 ‘나의 기쁨이 그 가운데 있다’ 라고 불릴 것이며”), 러더퍼드가 붙인 이름은 그가 인용한 성구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러더퍼드의 새로운 교리나 방침과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종교의 이름도 많은 신자들의 의기를 앙양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7) [신권통치] 의  철저한 강화

러더퍼드의 독재체제는 조직의 구조면에서도 [신권통치]의 이름하에 강화되었다. 1919년부터 1932년에 걸쳐서 그는 각지의 회중에 선교활동을 부과하고, 그 결과를 직접 협회 본부에 보고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 다음에 협회가 임명한 봉사감독이 각 회중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초로 [황금시대] ([깨어라!]의 전신)를, 그리고 1926년부터는 [파수대]지를  팔며 다니는 것이 선교활동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러셀의 시대로부터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각 회중의 독립성을 제거하고, 모든 회중을 협회가 직접 컨트롤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현재에도 매주 계속되고 있는 [파수대] 연구는, [파수대] 지의 난외에 인쇄되어 있는 질문에 대하여, [파수대]의 본문 가운데서 답을 찾아서 그것을 복창하게 함으로, 그 인쇄되어 있는 내용을 신자의 머리에 집어넣는, 이 종교의 중심이 된 신자 교육방법인 것이다. 이 방법은 러더퍼드의, 이 시대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변하는 협회의 교리를 신자들에 일률적으로, 일제히, 또한 효과적으로 침투시키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파수대] 연구는, 각 회중의 장로가 혼자의 생각으로 하는 설교나 공개강연을 하는 그때까지의 회중의 활동보다 도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932년, 그때까지 반드시 러더퍼드에게 협력적이지만은 않았던 몇 개 회중들에 속을 끓여 왔던, 러더퍼드와 협회 지도부는, 그때까지 러셀 시대로부터 계속되어온 각 회중의 장로와 감독의 민주적 선거에 의한 선임제를 폐지하고, 1938년에는 각 회중의 모든 직분은 협회의 직접 임명제에 따라 결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러더퍼드는 각 회중에 계속 남아 있던 그의 비판세력을 억압하는데 성공하였다.


러더퍼드는 또한 여러 가지 선교방법을 채택하였다.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의 기둥이 되어 있는 집에서 집으로의 선교와 그 시간 보고제도를 구축한 것도 그였다. 그 외, 현재의 증인들은 일체 하지 않는 흥미진진한 선교방법을 몇 개 채용하였다. 그 중 하나는 휴대축음기로 러더퍼드의 연설을 집에서 집으로의 선교에서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 외, 독자적인 라디오 방송국을 개설한다든가 선전 카에 큰 음량의 스피커를 장착하고, 어느 것이나 모두 러더퍼드의 박력 있는 연설을 일반 시민의 귀에 퍼 부었다. 이들 방법은  러더퍼드 체제의 종료와 함께 쓸모없게 되었지만, 얼마나 러더퍼드 개인의 신자에 대한 직접적영향이 중시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인 것이다.



8) 새로운 교리 - 닫혀 진 천적 희망과 [ 큰무리 ]

러더퍼드 체제하의 워치타워종교는 갖가지 새로운 교리를 발표하면서, 보다 급진적인 변혁을 이룬다. 먼저, 새로운 교리에는 부활의 희망이 있는 인간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러셀의 시대에는 많은 인간에게 천적 부활의 희망이 있었지만, 1923년에는 그리스도교계의 성직자들, 그리고 후에는 러더퍼드와 협회의 지도부에 순종하지 않는 모든 자들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아마도 최대의 공포의 교리는, 아마겟돈의 시점에서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분별력이 없는 유아까지를 포함해서 모두 죽임을 당하고, 영원히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일 것이다.


이 교리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한다면 영원히 지상에서 살게 된다고 하는, 매력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어필하였다. 신자들은, 워치타워 조직에 의지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의 길이며, 거기로부터 떠나는 것은 절망적인 영원한 죽음이라는 교묘한 “당근과 채찍” 이라는 틈바구니에 끼이게 되어, 조직에 대한 충성을 강요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에도 계속되는 이 종교의 ‘마인드 컨트롤’ 의 기초로 되어 있다.


아마도 러더퍼드가 만들어낸 교리의 가장 중요한 것은, 14만 4천명의 천적 부활 계급과, 지상에 남아 영원히 살게 될 [그 외의 대다수]의 신자들의 계급과의 “두 계급 부활의 교리”일 것이다. 이 [그 외의 대다수]의 [큰 무리]는 하늘에서 예수와 함께 영원히 살 희망은 없어졌다. 이 희망은 14만 4천명의 특별한 계급의 신자들에게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당시 점점 증가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대부분의 신자에게 어느 정도의 희망을 줌과 동시에, 워치타워 종교의 핵심인 14만 4천명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특별히 선택되었다는 교리를 계속해 나가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신자들은 14만 4천명 뿐 만 아니라, 불특정다수의 [큰 무리]를 모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새로운 과제를 받게 되어, 그 이후 이 교리는 끝이 없는 선교활동에 억지로 끌어내는 이론적 근거를 주었다. 


9) 사회적 고립

한편, 러더퍼드의 사회체제로 부터의 고립의 경향은 기묘한 교리를 차례로 만들어 내었다. 1928년, 러셀 시대로부터 아무런 문제도 없이 계속되어온 크리스마스, 탄생일 축하가 돌연, 이교의 습관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러더퍼드는 상업, 정치, 종교 (워치타워 이외의) 를 악마의 3대 도구로서 공격의 기세를 강화하였다.


그는 그때까지의, 유대인은 여호와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교의를 버리고, 여호와의 증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이스라엘 인”에 해당한다고 하여, 당시의 미국 상업의 지배 세력이었던 유대인을 멸시하였다.  증인들은, 이 세상의 정부는 모두 악마가 지배하고 있다는 교리를 철저히 교육받아서 ,국기에 대한 경례, 국가의 제창을 금지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연면히 계속되어온 교리여서, 이를 명백히 위반하는 것은, 제명처분 결국 영원한 죽음으로 처벌된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이 러더퍼드가 만든 “진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더욱 더 그는 1918년 그의 투옥 사건에 관여했던 그리스도교 성직자들, 특히 로마 가톨릭교의 성직자들에 대하여 치열한 공격을 되풀이하였다. 그것은 마치 [적 토벌]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었다.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리스도교를 “큰 바벨론”으로 모욕적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 시작되었다. 그 당시,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러더퍼드가 만든 슬로건, -   “종교는 올가미이며, 속임수다 ” (Religion is a snare and a racket), 라는 플래카드를 내세우고 그리스도교의 교회 앞이나 번화가에서 데모 행진을 하는 것이 눈에 뜨이곤 했다.  


  

                      

10) 정체를 알 수없는 의학 교리

또한 이 시대에 시작된 교리에, 여러 가지 의학에 관한 것이 있다. 현대의 여호와의 증인은 

그 수혈 거부의 교리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종교의 기묘한 의학에 대한 개입도 이 러더퍼드의 시대에 시작되었다. 이들 [의학적 진리]는 현재의 [깨어라 !] 지의 전신이었던 [황금시대]에 차례로 발표되었다. 몇 개의 예를 들면, 감염증이 병원체의 감염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의학상식의 부정, 종두를 시작으로 하여, 예방접종의 일관된 반대 ( 그 이유는 -질병 있는 동물의 고름을 인체에 주입하는 불결한 습관-이라는 것이었다),  투베르쿨린 주사의 위험, 알루미늄제의 식기의 유해설의 선전, 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우유의 저온살균의 유해설, 등이었다. 이 이외에도 의심스러운 암의 치료약, 온수에서 관장을 6개월간 매일 반복하는 “채내 온욕” 건강법, 의심스러운 의료기기의 소개, 미국의사협회에 대한 공격, 등이 빈번히 [황금시대]에 게재되었다. 이러한 워치타워 종교의 의학에 대한 개입의

중요한 점은, 여호와의 증인 전체가 이와 같은 근거 없는 의심스러운 의학이야기를, 마치 협회의 성서 해석과 같이 무비판으로 받아들여 믿어버리는 체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흔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미신을 깊게, 애매한 것을 믿기 쉬운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성질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지금의 수혈의 교리의 전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 “의학 교리”의 여러 가지인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의 증인의 [사이비 의학]에 대한 무비판적인 신뢰는, 워치타워협회 지도부가   교묘하게 만들어낸 “새로운 진리”에 대한 무비판적인 신뢰와 밀접히 평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1) 러더퍼드의 사생활

역사 제1부의 러셀의 사생활의 항목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대변자를 자칭하고, 자신이 만들어 낸 “진리”를 “여호와의 진리”로서 널리 알린 독제적 종교지도자, 러더퍼드의 사생활은, 러셀의 사생활과 마찬가지로 명확히 공개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와 같이 높은 지위에 자신을 올려놓은 인간에게는 그 개인의 프라이버시도 신중히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먼저, 대단히 흥미진진한 러더퍼드의 개인 문제에는, 그의 결혼생활을 들 수 있다.      그도 또한 러셀과 마찬가지로, 이른 시기에 그의 처 마리아와의 별거생활에 들어가, 그 이후 생애,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체험하는 일은 없었다. 이처럼 제1대, 제2대의 창시자인 회장 두 사람 모두 정상적인 가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은, 과연 우연이었는가? 


이 종교가 현재까지 여호와의 이름하에 많은 부부를 갈라 놓았다고 하는 역사를 볼 때, 이 부부관계의 경시는 이들 두 사람의 회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종교의 전통으로 되어 있다.

가령 다른 워치타워 출판물이 어떻게 부부관계를 중시하는 기사를 실렸다고 해도, 실제로   개개의 여호와의 증인과 그 지도자가 부부생활을 어떻게 보고 있는 가를 관찰할 때, 그것들은 전혀 실속은 없고 겉만 번지르르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그에게는 한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이 아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가정에서는 드물게 부친이 이끌고 있는 종교에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결국 여호와의 증인은 되지 않았다.


러더퍼드의 이 부부관계의 파경은 그의 일관된 여성 차별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멸시의 뒷받침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 남성이, 당시 미국 사회의 주류로 되어있던 “여성제일” 의 습관에 영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워치타워협회는 언제나 러더퍼드의 알콜 중독을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해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증언과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이제는 누구도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많은 당시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러더퍼드가 만취되어서 강연을 할 수 없게 된 것을 목격하였다. 더욱 중요한 기록은 당시의 캐나다의 지부감독자였던 월터-솔더가 1937년에 발표한 공개질문서일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그는 다량의 맥주, 위스키, 브랜디를 상자 단위로 협회의 자금으로 구입하고, 캐나다로부터 은밀하게 회장 개인의 사용을 위해서 보냈다는 것을 밝혔다.  러더퍼드는 일반신자들이 집에서 집으로의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사이에, 자기 자신은 일체 이와 같은 활동에 참가하는 일 없이 (회장으로서의 직무가 다망하여 집에서 집으로의 선교는 할 수 없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브룩클린의 깊숙한 곳에서, 몇 사람의 측근을 제외하고는 일체 그의 가까이에 오지 않도록 하고, 이들 알콜 음료를 계속 마셔댔다고 한다.


러더퍼드의 생활은 당시의 대공황의 태풍 가운데에서도, 전혀 세상의 심각한 불황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사치가 극에 달했다. 그의 주된 주거는 뉴욕의 아파트였지만, 이것은 당시 재벌의 간부가 살기에 상당하는 호화로운 것이었다.

그 외에, 그는 협회의 자금으로 제2의 주거를 스테이든 섬의 협회 라디오 방송국 가운데에, 또한 마찬가지로 스테이든 섬의 가운데에 별장을, 그리고 런던과 독일의 마그데부르크에도 그의 전용 주거를 각각 준비시켰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해도 최대의 주거는, 협회의 자금으로 캘리포니아주 샌디애고에 구입한  베스-살리움 이라는 이름의 호화저택이었다. 이것은 당초, 1925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성인들이 부활해서 온다는 기묘한 예언에 근거해서, 이들 성인들을 맞아들여 거주하도록 하기 위해서 구입하였다. 실제로 이 별장은 러더퍼드가 이들의 성인들로부터 신탁을 받은 형태로 명의등록 하였다. 이 별장에는 이들 성인이 사용한다는 목적으로 호화 캐딜락 2대를 비치해 두었다. 


이들 성인들이 예언과는 반대로 1925년에 부활하지 않은 후에는, 이 별장은 전적으로 러더퍼드의 호화로운 제2의 거주지가 되었던 것이다.


12) 러더퍼드의 만년과 사망

러더퍼드가 죽기 수년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이것도 또한 우연의 짓궂음 이상이라고 여겨지겠지만, 그도 제1대 회장 러셀이 제1차 세계대전을 아마겟돈의 시작이라고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이 아마겟돈으로 다다른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만년의 러더퍼드가 191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에 나타난 모습은, 당시 19세였던 젊은 날의 레이몬드 프랜즈가 목격한바다. 그 대회의 마지막 날, 러더퍼드는 5세부터 18세의 어린이들을 맨 앞자리에 앉히고 멀지 않아 곧 올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성인들이 부활되어 올 날까지  그들에게 결혼을 연기하도록, 그렇다면 그 날에는 어울리는 상대가 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어린이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표하였지만, 임박한 아마겟돈에 대비해서 결혼을 늦추는 것이 그 주요한 테마였다.


동년 9월 15일의 파수대의 기사에는 “아마겟돈까지 앞으로 수개월” 이라는 문구가 실렸다.

이 회장의 충고를 충실히 지켜 결혼을 하지 않은 여호와의 증인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은 언제가지 기다려도 실현되지 않은 러더퍼드의 예언을 계속 기다리다가, 혼기를 놓치고 일생을 정상적인 부부, 가정을 갖지 못한체, 현재에는 만년을 맞고 있다. 

러더퍼드는  이 때 이미 말기 암으로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든지, 또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아마겟돈을 끝까지 지켜보겠다고한  희망의 표현이었는지, 그는 만년에 더욱 더 아마겟돈의  접근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암은 거스릴 수 없었다.  

1942년 1월 8일,  그는 샌디애고의 베스-살리움의 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얄굿게도 가까워 온것은 아마겟돈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생의 종말이었다.

여기에서 현대  워치타워 종교의 많은 교리와 조직을 이룩한, 현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하여 초대 회장을 훨씬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제 2대 회장 죠셉 러더퍼드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참고문헌:

1.[여호와의 증인  하나님의 왕국의 선포자]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  1993년

2. "Apocalypse Delayed "  M. James Penton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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