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랑비서(鸞郞碑序)》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년) 기사에 '崔致遠鸞郞碑序曰(최치원난랑비서왈)', 최치원이 난랑비 서문에서 말하기를
國有玄妙之道(국유현묘지도)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曰風流(왈풍류)
풍류라 한다
設敎之源(설교지원)
그 가르침을 창설한 내력은
備詳仙史(비상선사)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實乃包含三敎(실내포함삼교)
실로 곧 삼교를 포함하여
接化羣生(접화군생)
뭇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且如入則孝於家(차요입즉효어가)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出則忠於國(출즉충어국)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魯司寇之旨也(노사구지지야)
노나라 사구의 뜻이요
處無爲之事(처무위지사)
무위로(자연 그대로) 일을 하면서도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
周柱史之宗也(주주사지종야)
주나라 주사의 근본이요
諸惡莫作(제악막작)
모든 악을 만들지 말고
諸善奉行(제선봉행)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竺乾太子之化也(축건태자지화야)
축건태자의 가르침이다.
ㅡ석가
*난랑(鸞郞)은 한민족의 고유 선도인 화랑도를 수련하는 낭도를 이른다. "1478년 조선 성종 시기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이라는 책에 수록된 곽동순이 지은 팔관회 선랑 하표라는 글에서 난랑이 원랑(原郞)과 함께 신라의 대표적인 화랑으로 언급되어 있어 난랑비가 신라의 화랑 난랑을 위해 세운 비석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무위키>
신라는 진한의 후예답게 선도사상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화랑도는 곧 선도사상이고 선도를 수련하는 청년들을 화랑, 낭도라고 불렀다. 신라군의 지휘관은 김유신 장군부터 화랑 관창에 이르기까지 모두 낭도 출신이었다. 신라는 660년 백제 패망부터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 9년동안 삼국통일전쟁을 치루었고,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동안 대당전쟁을 치루었다. 16년에 이르는 장기전을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꺾고 당시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의 간섭마져 물리치고 마침내 자주독립국으로 우뚝섰다.
비록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했으나 30년후 696년에 고구려 무장출신 대조영이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물리치고 동모산에서 대진국, 발해를 건국했다. 통일신라와 발해는 하북 요동의 패수(패강)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어 공존하였다.
혹자는 삼국통일후에 신라는 고구려 고토만 잃어버리고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만 점유하여 반쪽통일이라고 폄하하지만 그런 주장은 고구려 평양이 평안도 대동강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제가 조작한 악랄한 역사왜곡에 불과하다. 신라와 발해는 하북요동을 반분하였다. 그 증거가 신라가 설치한 패강진이라는 대형 군진이다. 거려는 신라의 패강진은 평주로 고쳤다. 강단사학은 하북의 평주를 황해도 평산으로 비정한다. 무엇에 홀렸는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엉터리 주장을 할 수 없다. 그것도 실증없는 실증사학이라는 명분으로.
발해는 제3대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가 742년(문왕 6)에 국초 이래 수도였던 동모산에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천도하였다. <요사지리지>에 중경현덕부는 옛 고구려의 평양성이라고 하였다. 평양은 하북 요동에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
강단사학은 중경현덕부에 대해서 "그 위치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중국 지린성(吉林省)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和龍市) 서고성(西古城)였을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요사지리지>에 확실한 위치를 밝혀 놓았는데 도 불구하고 "그 위치는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만주 길림성으로 추정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신라는 아쉽게도 통일후에 정치적으로 유교와 당제, 당풍이 유입되어 고유사상이 훼손되었지만 신라인의 자주성에는 변함이 없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최치원 선생이 쓴 난랑비 서문에서 말한 풍류도는 해동천자국을 자처한 고려의 팔관회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