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1년9월15일, 네덜란드 헴스테더에서 태어난 요한 네스켄스(Johan Neeskens)는 야구, 축구 등등, 스포츠에 뛰어난 재능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특히 야구에 타고난 소질 발휘 1960년대 유럽청소년야구대회에서 최우수 타자로 선정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요한 네스켄스는 야구를 포기 축구 선수로의 길을 선택, 10대에 네덜란드 명문 팀인 아약스에 입단 네덜란드대표팀에 발탁되는 영광을 안게 됐다.
요한 네스켄스는 AFC 아약스에서 리누스 미셀(‘토탈 사커’ 창시자) 감독의 `토털사커'를 충실히 이행하며, 오른쪽 풀백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변신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3연속(1971 ~ 1973년) 유러피언컵(UEFA챔피언스리그 전신) 우승을 이끌어 AFC 아약스를 세계적 명문 팀 반열에 올려놓았다.
1974년 요한 네스켄스는 FC 바르셀로나로 이적 강한 투지와 열정을 바탕으로 뛰어난 플레이를 펼쳐, FC 바르셀로나 팀 전력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주인공 역할을 한 후, 1974년 서독 FIFA월드컵에 출전했다.
1974년 서독 국제축구연맹(FIFA)월드컵에서 세계 축구 팬들에게 가장 뚜렷한 인상을 남긴 팀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 팀의 등장은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네덜란드의 축구 스타일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네덜란드 문화를 반영하듯,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1974년 서독 FIFA월드컵 개최 전까지 세계축구 흐름은 4 - 2 - 4 및 4 - 3 - 3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이런 시스템을 과감히 버리고 일정한 포지션 없이, 선수 전원이 공격에 가담하고 수비를 책임지는 혁명적인 스타일을 구사했다.
전방과 후방, 왼쪽과 오른쪽을 책임진다는 지역 개념이 사라지고 공격과 수비, 측면 돌파와 중앙 돌파가 수시로 활기차게 뒤바뀌는 현란한 '토털 사커' 가 탄생한 것이다.
상대방이 공을 잡았을 때 서너 명이 재빠르게 에워싸는 압박 축구, 어느 곳에서 자기편이 공을 잡든지 빠른 속도로 운동장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위치 이동 등, 네덜란드가 구사하는 축구는 그 이전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이런 혁명적인 축구의 한 축을 담당한 요한 네스켄스는 페넬티킥(PK)으로 3골을 기록하며 페넬티킥(결승전: 페널티킥 FIFA월드컵 결승전 역사상 첫 페널티킥 득점) 전문 선수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브라질과의 2라운드에서 요한 크루이프가 단독으로 브라질 왼쪽 진영으로 파고 들어 날카롭게 문전으로 크로스를 올린것을, 부상으로 쓰러진 상태에서 오른발로 감각적으로 선취골을 뽑는 등 2득점 총 5골을 터뜨리며,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방불케 하는 득점력(네덜란드 출전 선수 중 최다득점)을 과시 네덜란드를 결승(네덜란드: 지역예선부터 본선 2차 조별리그까지 12전 10승 2무 25득점 4실점)까지 진출시켰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개최국 서독과 맞붙어 경기시작 2분만에 요한 크루이프가 얻은 페넬티킥을 요한 네스켄스 성공시키며 앞서가고도 `다이빙 논란`과 함께, 1 : 2로 역전패 요한 네스켄스는 차기 1978년 아르헨티나 FIFA월드컵을 기약하게 됐다.
1978년 두 번째 아르헨티나 FIFA월드컵에 출전한 요한 네스켄스는 이빨 빠진 호랑이(요한 크루이프 정치적인 이유로 불참 선언: 1974년 서독 FIFA월드컵 MVP)라는 평가를 받는 네덜란드를 이끌고 공. 수를 조율하며 선전 결승까지 진출하여, 다시 한 번 개최국 아르헨티나와 대결해 온갖 위협과 음모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0 : 1로 뒤지던 후반 37분 딕 나닝가의 극적인 동점골로 승부를 연장까지 끌고 갔지만, 결국 1 : 3으로 분패 우승 문턱에서 다시 한 번 주저앉으며 진한 아쉬움을 던져 줬다.
한편 요한 네스켄스는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에서 이빨이 2개나 부러지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불꽃같은 투혼을 발휘 세계축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78년 아르헨티나 FIFA월드컵을 끝으로 FIFA월드컵과 작별을 고한 요한 네스켄스는 1978년 코파 델 레이, 1979년 컵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한 후, 자신의 축구 인생에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 1979년 축구 불모지 미국 (북미축구 리그: NASL)에 진출 1979년부터 1984년까지 6시즌을 줄곧 뉴욕 코스모스에서 활약하며, 1980년, 1982년 리그 우승(서독: 베켄바우어)을 거머쥐는 실력을 발휘했다.


이후 FC 흐로닝언(1984년)과 미네소타(1985년), 포트로더데일 선(1986년), 레벤브로이(1987년)을 거치며 축구에 대한 열정을 쏟은 요한 네스켄스는 1990년 FC 바르 이적 후 FC 추크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선수시절 '요한 더 세컨드'라는 별명을 가졌던 요한 네스켄스는 동시대의 네덜란드 다른 거목, 요한 크루이프와 컴비네이션을 이루면서 세계축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 미드필더였다.
아울러 요한 네스켄스는 1970년대 리누스 미셀 감독이 이끌었던 AFC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토탈 사커’를 논할 때마다 빠짐없이 거명되는 이름이다.
그러나 요한 네스켄스는 리누스 미셀감독 체제하에서 NO1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단지 NO1 요한 크루이프 뒤에서 묵묵히 ‘토탈 사커’를 완성시키는 견인차의 역할을 충실히 한 선수였다.
그럼에도 요한 네스켄스는 1970년부터 1981년 까지 대표 선수로 활약, 49경기에 출전 19득점을 올리며 '오렌지군단' 네덜란드를 축구강국으로 부상시켰다.
요한 네스켄스는 지극히 성실한 플레이를 바탕으로 비상한 통찰력과 강한체력, 기동력, 득점력, 킥력을 가지고 총 230경기에 출전 56득점을 기록 네덜란드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선수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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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
소 속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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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 1970 |
RCH |
68경기 / 1득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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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1974 |
AFC 아약스 |
124경기 / 33득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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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1979 |
FC 바르셀로나 |
140경기 / 35득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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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1984 |
뉴욕 코스모스 |
94경기 / 75득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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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1985 |
FC 호로닝언 |
75경기 / 0득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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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미네소타, 포트로더데일 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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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1987 |
레벤브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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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1990 |
FC 추크 |
23경기 / 5득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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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 1991 |
FC 추크 |
1경기 / 0득점 |
▣수상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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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
수 상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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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1972 |
우승 |
네덜란드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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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1972, 1973 |
,, |
유러피언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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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 |
유럽축구연맹(UEFA)슈퍼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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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 |
인터컨티넨탈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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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1973 |
,, |
에레디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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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 |
코파 델 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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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 |
코파 델 레이 |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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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
소 속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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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 1993 |
FC 추크 |
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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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 1995 |
FC 스테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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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1996 |
FC 징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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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2000 |
네덜란드대표팀 |
수석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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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2004 |
NEC 니에미겐 |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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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 2006 |
오스트레일리아 |
수석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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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 2008 |
FC 바르셀로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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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 2009 |
네덜란드 B대표팀 |
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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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 |
갈라타사라이 SK(터키) |
수석코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