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몽설화 관련기록
성은 고씨(高氏).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 기록되어 전한다. 즉 《국사 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성이 고씨, 이름은 주몽이라 하였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추모’ 또는 ‘상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 묘지에서는 ‘추모왕’이라 하였다.
또 백제에서 시조로 모신 동명에 대하여 《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 등 일본문헌에는 ‘도모(都慕:일본음 쓰모)’라고 하였다. 이들 일련의 한자(漢字)표기는 모두 동명을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한편 중국문헌인 《위략 魏略》, 《후한서 後漢書》 부여전, 《양서 梁書》 고구려전에는 부여의 시조가 동명이라 되어 있고, 《위서 魏書》· 《주서 周書》· 《남사 南史》· 《북사 北史》· 《수서 隋書》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시조가 주몽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동명을 시조로 모시는 전통은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원래 동명과 고구려 시조 주몽은 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몽설화도 문헌기록에서 볼 때 동명설화와 줄거리가 구조적으로 똑같다. 그 특징은 ‘단군(檀君)’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왕자(王者)의 정치적 권위의 원천을 하늘에 귀속시키면서 농업생산을 좌우하는 ‘물의 신령’의 권위를 아울러 주장하는 새로운 종교사회사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 사서의 주몽설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였으며, 해모수는 동시에 북부여의 왕이었다. 이것은 그가 동부여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왕실의 법통의 근원을 북부여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주몽의 어머니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柳花夫人)이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정을 통한 뒤 집에서 쫓겨났다. 이때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유화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가두었더니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치어 태기가 있어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은 그것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에 버려도 소나 말이 피해 갔다. 또 들판에 버렸더니 새들이 모여 날개로 덮어주었으며 알을 깨뜨리려 하였지만 깨어지지 않아 드디어 유화부인에게 되돌려주었다. 이에 알을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 골격과 생김새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7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므로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왕자가 있었는데 큰아들 대소(帶素)가 “후환이 두려우니 제거함이 옳다.”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그는 날랜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하니 왕이 살찐 말을 골라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러나 왕자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꾀하니, 유화부인이 “멀리 도망가서 큰 일을 도모하라.”고 이르니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으로 벗삼아 엄체수(淹遞水, 또는 蓋斯水, 掩遞水, 奄利大水)에 이르렀다.
이때 주몽이 강물에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망하다가 뒤쫓는 군사가 닥치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이 건너자 곧 흩어져 뒤쫓는 군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한편 어머니 유화부인이 비둘기 한쌍을 보내어 보리씨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모둔곡(毛屯谷:지금의 渾河流域)에서 재사(再思)· 무골(武骨)· 수거(獸居) 등 세 사람의 신하를 얻었다.
▶ 개국과 치적
졸본(卒本:일설에는 紇升骨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서기전 37년에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하였다. 왕위에 올라 서기전 36년(동명성왕 2)에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고, 서기전 33년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고, 서기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서기전 24년에 유화부인이 죽자 동부여의 금와왕이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서기전 19년에 동부여에서 첫부인 예씨(禮氏)와 왕자 유리(類利:뒤에 유리명왕)가 도망하여 오므로 태자로 삼았다.
이해 9월에 왕이 돌아가니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졸본으로 온 뒤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었다고 하였다.
▶ 주몽설화의 특징
그런데 주몽설화는, 첫째 여자를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어 태기가 생기고, 둘째 알을 낳고, 셋째 태어난 땅에서 달아나, 넷째 물고기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여, 다섯째 새로운 땅에서 왕이 되었다는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첫째는 단군과 마찬가지로 주몽이 천손(天孫)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 유화부인이 단군의 어머니인 곰이 굴 속에 갇혔던 것처럼 방 속에 갇혔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몽설화 또는 동명설화에는 단군의 전통에서 볼 수 없었던 넷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가 하백의 외손으로 물의 신령의 영험스러운 능력을 지녔다는 것으로 비를 다스리는 주술적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즉 단군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새로운 농경사회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 2 -
온달 설화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얼굴은 웃음 직하게 못났으나 마음씨는 고왔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노상 밥을 빌어 모친을 봉양하며 해진 적삼에 헐어빠진 신발로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지목하여 '우온달(愚溫達)'이라고 하였다. 평강왕이 어린 딸아이가 울기를 좋아하니 농담으로,
"네가 노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란 다음에도 반드시 사대부(士大夫)의 아내 노릇은 못 할 것이니 우온달에게 시집보내야 마땅하겠다."
하며 마냥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나이 16세가 되자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출가시키려고 하였다.
- 배경의 제시
공주는 아뢰되,
"대왕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이제 와서 무슨 까닭으로 말씀을 고치십니까? 필부도 식언(食言)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至尊)이시옵니까. 그러므로 왕자(王者)는 농담이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그릇된 것이니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노하며,
"네가 나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으면 단연코 내 딸이 될 수 없다. 같이 살아서 무엇하느냐. 네 갈대로 가라."
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값진 패물 수십 개를 팔목에 차고 궁중을 나와 혼자 가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바로 그 집에 당도하여 앞못보는 늙은 어머니를 보고 앞에 가까이 가서 절하며 그 아들의 행방을 물으니 노모(老母)는 대답하되,
"우리 아들이 가난하고 또 배운 것이 없어 귀인과 가까이 할 자격이 못 되는데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아보니 향취가 이상하고 그대의 손목을 잡아 보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소. 반드시 천하의 귀인일 터인데 누구의 꼬임을 입어 여기에 왔소? 우리 아들은 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티나무 껍질을 벗기러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오."
하였다.
공주는 나가 산 아래에 당도하여 온달이 느티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그와 더불어 속사정을 말하니 온달은 성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일 것이니 나를 박해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돌아보지 않으며 바로 갔다. 공주는 홀로 돌아와 그 집 사립문 밖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 모자(母子)와 더불어 자세히 말을 하니 온달은 의아하여 결정을 못 하고, 그 모친은,
"우리 아들이 지극히 천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우리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살 곳이 못 되오."
하였다.
공주는 대답하되,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재봉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부귀한 뒤에 야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가졌던 패물을 팔아 전택(田宅)·노비(奴婢)·우마 (牛馬)·기물(器物)을 사들여 살림을 두루 갖췄다. 처음 말을 사들일 적에 공주는 온달에게,
"아무쪼록 상인의 말은 사지 말고 국마(國馬)가 병들고 여위어 버림을 당한 것만을 가려서 사오세요."
부탁하므로 온달은 그의 말대로 하니 공주는 착실히 사육하여 그 말이 날로 살찌고 장대하여졌다.
- 평강 공주와 온달의 결연
고구려가 항상 봄 3월 3일에 낙랑벌에 모여 사냥하고, 잡힌 그 돼지·사슴으로 하늘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하므로 그 날이 되면 왕이 사냥 나오고 여러 신하 및 5부의 병정이 다 따르게 된다. 이 때, 온달은 자기가 기른 말을 타고 수행하는데 그 말의 달림이 항상 다른 말 보다 앞서고 잡은 것도 많아 다른 사람은 그와 같이 하는 자가 없으므로 왕은 불러오라 하여 성명을 묻고 놀라며 기특하게 여겼다. 때마침 후주 무제(後周武帝)가 군사를 출동하여 요동(遼東)을 치니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에서 마주쳐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랜 격투로 적군 수십여 명을 베니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서 들이쳐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적에 온달로서 제일이라 하지 않는 자 없으므로 왕은 감탄하며,
"너는 내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아들인 다음 벼슬을 내려 대형(大兄)으로 삼으니 이로 인해 은총과 영화가 더욱 거룩하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 온달의 입신
양강왕(陽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은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짜개서 저희들의 군·현을 만들었으므로 백성이 원통히 여겨 항상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니 원컨대 대왕은 저더러 어리석다 마시고 군사를 내주시면 한번 걸음에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 "
고 하니 왕은 허락하였다. 온달은 출전할 적에 맹세하되,
"계립현(鷄立峴), 죽령(竹嶺)의 서편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길을 떠나 신라군과 아차성(阿且鑛) 아래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길에서 죽었다. 그를 장사하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삶이 결정 났으니, 아! 돌아갈지어다."
하니 드디어 관이 들려서 장사하였다. 대왕은 듣고 애통해하였다.
- 3 -
달팽이 각시
어떤 사람이, 논에 물을 보러 가니까, 삽으로 논 구멍을 콱 찍으면서,
"이 농사를 져다 누구하고 먹나?"
이러니까,
"나하고 먹지 누구하고 먹어."
그래, 이상해서 또 한 번 콱 찍으면,
"이 농사를 져서 누구하고 먹나?"
이러니까,
"나하고 먹지 누구하고 먹어."
그래, 거기 아무것도 없고 달팽이 한 마리만 주먹만한 게 있어. 그걸 주워다가 물두멍에다 놓더니 어디 갔다 오면 밥을 해 놓고 밥을 해 놓고….그래 한 날은 (숨어서 모습을) 지키니까는 색시가 하나 나오더니 해를 이 - 보더니 그만 밥을 해서 상을 차려 들어가려고 하는 놈을 꽉 붙드니까,
"아이, 사흘만 있으면 임자하고 백년 해로(百年偕老)할 턴데, 그런 사흘을 못 참어서 이별 수(數)가 있다."고 하더라는 거여.
그래, 인제 있는데, 참 얼마나 이쁜지 당체 나무도 못 하러 가고, 뭐 오금을 못 떼 놔. 나무를 하러 가도 곁에다 갔다 세워 놓고는 나무를 하고….
그래, 하도 그러니까는, 하루는 화상(畵像)을 그려 주며 가는 거여. 나무에다, 화상 그려 준 걸 나무에다 걸고서는 나무를 좀 깎다 보니까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아 그걸 훌떡 걷어 갔단 말여.
그래 가지곤 어느 나라에 갖다 던졌는지, 그 나라 임금이 그 화상을 주워 가지고, "아 요 사람, 어서 가 찾아 오라."고.
그래, 사―방에 인제 광고를 했지. 그 화상 가지고 다니며 찾는데, 한 군데 가니까, 참, 집에 하나 외딴집에 있는데 조그맣게, 그래, 그집에 새댁, 그 새댁이 똑 그 화상 같더래. 그래, 그만 데리고 왔지 응. 그래, 데리고 왔는데, 생전에 온 그 날부터 그러니까 웃는, 그 임금의 아낙이 돼도 웃는 법을 못 보거든. 임금이,
"아이, 당신은 대체 사람도 내 사람이요, 만물이 다 내 거여.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생전에 웃는 걸 못 보겠느냐."고.
"나를 거지 잔치를 한 서너너덧 달 해 주면 그렇게 거시기할거라."고.
"아! 까짓 뭐, 거지 잔치 그까짓 것 뭐. 서너너덧 달 못 해 주겠느냐."고.
"일 년이라도 다 - 해 줄 수 있다."고.
그래, 인제 거지 잔치를 했는데, 아이, 한 날 거지가 지나가도 그 남자가 안 와. 한 날 인제 맨 끄트머리 들어오는데, 쥐철 벙거지에 새털 날개에, 그래 입고서는 들어오는데, 그렇게 쥐털 벙거지에 새털 날개를 했는데, 아주 옷이 그만 다 떨어져서, 그만 그러니까, 그만 새털이 됐지 뭐, 새털. 그러니 아, 그걸 보고 (여자가) 아부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하고 웃었어.
이 임금이 앉았다가,
"야! 저, 저렇게 웃으니 내가 저걸 쓰고서는 한 번 더 할거라."고.
"그걸 벗어 노라."고.
그래서 그걸 입고서는 춤을 추고 돌아가니까, 깡통을 차고, 그 사람매루 깡통을 두드리고 돌아가니까, 그 여자, 한참 웃더니, 갑자기
"아, 저, 저놈 저기 잡아내라."고.
아 그래, 그래 그만 잡아 내라니, 그만 잡아 내라고 하니, 그만 쫓겨나고, 내쫓아 버리고.
아, 그 남자 그, 그만 용상에 그만 올라앉아 그만 임금님이 되고, 정작 임금은 떨려 나가 버리고…….(자료 출처 : 한국구비문학대계, 1980년 충남 대덕에서 윤민녀 구연/ 박계홍·황인덕 채록)
그외 신라,백제의 설화는 아래의 주소로 가셔서 읽어 보세요
http://myhome.hanafos.com/~sjsman/seolhwa/seolhwamain.html
http://pinggoo.com.ne.kr/korea-culture.htm
성은 고씨(高氏).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 기록되어 전한다. 즉 《국사 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성이 고씨, 이름은 주몽이라 하였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추모’ 또는 ‘상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 묘지에서는 ‘추모왕’이라 하였다.
또 백제에서 시조로 모신 동명에 대하여 《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 등 일본문헌에는 ‘도모(都慕:일본음 쓰모)’라고 하였다. 이들 일련의 한자(漢字)표기는 모두 동명을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한편 중국문헌인 《위략 魏略》, 《후한서 後漢書》 부여전, 《양서 梁書》 고구려전에는 부여의 시조가 동명이라 되어 있고, 《위서 魏書》· 《주서 周書》· 《남사 南史》· 《북사 北史》· 《수서 隋書》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시조가 주몽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동명을 시조로 모시는 전통은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원래 동명과 고구려 시조 주몽은 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몽설화도 문헌기록에서 볼 때 동명설화와 줄거리가 구조적으로 똑같다. 그 특징은 ‘단군(檀君)’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왕자(王者)의 정치적 권위의 원천을 하늘에 귀속시키면서 농업생산을 좌우하는 ‘물의 신령’의 권위를 아울러 주장하는 새로운 종교사회사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 사서의 주몽설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였으며, 해모수는 동시에 북부여의 왕이었다. 이것은 그가 동부여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왕실의 법통의 근원을 북부여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주몽의 어머니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柳花夫人)이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정을 통한 뒤 집에서 쫓겨났다. 이때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유화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가두었더니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치어 태기가 있어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은 그것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에 버려도 소나 말이 피해 갔다. 또 들판에 버렸더니 새들이 모여 날개로 덮어주었으며 알을 깨뜨리려 하였지만 깨어지지 않아 드디어 유화부인에게 되돌려주었다. 이에 알을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 골격과 생김새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7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므로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왕자가 있었는데 큰아들 대소(帶素)가 “후환이 두려우니 제거함이 옳다.”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그는 날랜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하니 왕이 살찐 말을 골라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러나 왕자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꾀하니, 유화부인이 “멀리 도망가서 큰 일을 도모하라.”고 이르니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으로 벗삼아 엄체수(淹遞水, 또는 蓋斯水, 掩遞水, 奄利大水)에 이르렀다.
이때 주몽이 강물에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망하다가 뒤쫓는 군사가 닥치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이 건너자 곧 흩어져 뒤쫓는 군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한편 어머니 유화부인이 비둘기 한쌍을 보내어 보리씨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모둔곡(毛屯谷:지금의 渾河流域)에서 재사(再思)· 무골(武骨)· 수거(獸居) 등 세 사람의 신하를 얻었다.
▶ 개국과 치적
졸본(卒本:일설에는 紇升骨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서기전 37년에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하였다. 왕위에 올라 서기전 36년(동명성왕 2)에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고, 서기전 33년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고, 서기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서기전 24년에 유화부인이 죽자 동부여의 금와왕이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서기전 19년에 동부여에서 첫부인 예씨(禮氏)와 왕자 유리(類利:뒤에 유리명왕)가 도망하여 오므로 태자로 삼았다.
이해 9월에 왕이 돌아가니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졸본으로 온 뒤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었다고 하였다.
▶ 주몽설화의 특징
그런데 주몽설화는, 첫째 여자를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어 태기가 생기고, 둘째 알을 낳고, 셋째 태어난 땅에서 달아나, 넷째 물고기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여, 다섯째 새로운 땅에서 왕이 되었다는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첫째는 단군과 마찬가지로 주몽이 천손(天孫)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 유화부인이 단군의 어머니인 곰이 굴 속에 갇혔던 것처럼 방 속에 갇혔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몽설화 또는 동명설화에는 단군의 전통에서 볼 수 없었던 넷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가 하백의 외손으로 물의 신령의 영험스러운 능력을 지녔다는 것으로 비를 다스리는 주술적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즉 단군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새로운 농경사회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 2 -
온달 설화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얼굴은 웃음 직하게 못났으나 마음씨는 고왔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노상 밥을 빌어 모친을 봉양하며 해진 적삼에 헐어빠진 신발로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사람들이 지목하여 '우온달(愚溫達)'이라고 하였다. 평강왕이 어린 딸아이가 울기를 좋아하니 농담으로,
"네가 노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란 다음에도 반드시 사대부(士大夫)의 아내 노릇은 못 할 것이니 우온달에게 시집보내야 마땅하겠다."
하며 마냥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나이 16세가 되자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출가시키려고 하였다.
- 배경의 제시
공주는 아뢰되,
"대왕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이제 와서 무슨 까닭으로 말씀을 고치십니까? 필부도 식언(食言)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至尊)이시옵니까. 그러므로 왕자(王者)는 농담이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그릇된 것이니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노하며,
"네가 나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으면 단연코 내 딸이 될 수 없다. 같이 살아서 무엇하느냐. 네 갈대로 가라."
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값진 패물 수십 개를 팔목에 차고 궁중을 나와 혼자 가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바로 그 집에 당도하여 앞못보는 늙은 어머니를 보고 앞에 가까이 가서 절하며 그 아들의 행방을 물으니 노모(老母)는 대답하되,
"우리 아들이 가난하고 또 배운 것이 없어 귀인과 가까이 할 자격이 못 되는데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아보니 향취가 이상하고 그대의 손목을 잡아 보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소. 반드시 천하의 귀인일 터인데 누구의 꼬임을 입어 여기에 왔소? 우리 아들은 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티나무 껍질을 벗기러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오."
하였다.
공주는 나가 산 아래에 당도하여 온달이 느티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그와 더불어 속사정을 말하니 온달은 성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일 것이니 나를 박해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돌아보지 않으며 바로 갔다. 공주는 홀로 돌아와 그 집 사립문 밖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 모자(母子)와 더불어 자세히 말을 하니 온달은 의아하여 결정을 못 하고, 그 모친은,
"우리 아들이 지극히 천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우리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살 곳이 못 되오."
하였다.
공주는 대답하되,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재봉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부귀한 뒤에 야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가졌던 패물을 팔아 전택(田宅)·노비(奴婢)·우마 (牛馬)·기물(器物)을 사들여 살림을 두루 갖췄다. 처음 말을 사들일 적에 공주는 온달에게,
"아무쪼록 상인의 말은 사지 말고 국마(國馬)가 병들고 여위어 버림을 당한 것만을 가려서 사오세요."
부탁하므로 온달은 그의 말대로 하니 공주는 착실히 사육하여 그 말이 날로 살찌고 장대하여졌다.
- 평강 공주와 온달의 결연
고구려가 항상 봄 3월 3일에 낙랑벌에 모여 사냥하고, 잡힌 그 돼지·사슴으로 하늘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하므로 그 날이 되면 왕이 사냥 나오고 여러 신하 및 5부의 병정이 다 따르게 된다. 이 때, 온달은 자기가 기른 말을 타고 수행하는데 그 말의 달림이 항상 다른 말 보다 앞서고 잡은 것도 많아 다른 사람은 그와 같이 하는 자가 없으므로 왕은 불러오라 하여 성명을 묻고 놀라며 기특하게 여겼다. 때마침 후주 무제(後周武帝)가 군사를 출동하여 요동(遼東)을 치니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의 들에서 마주쳐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랜 격투로 적군 수십여 명을 베니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서 들이쳐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적에 온달로서 제일이라 하지 않는 자 없으므로 왕은 감탄하며,
"너는 내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아들인 다음 벼슬을 내려 대형(大兄)으로 삼으니 이로 인해 은총과 영화가 더욱 거룩하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 온달의 입신
양강왕(陽岡王)이 즉위하자 온달은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짜개서 저희들의 군·현을 만들었으므로 백성이 원통히 여겨 항상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니 원컨대 대왕은 저더러 어리석다 마시고 군사를 내주시면 한번 걸음에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 "
고 하니 왕은 허락하였다. 온달은 출전할 적에 맹세하되,
"계립현(鷄立峴), 죽령(竹嶺)의 서편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길을 떠나 신라군과 아차성(阿且鑛) 아래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길에서 죽었다. 그를 장사하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삶이 결정 났으니, 아! 돌아갈지어다."
하니 드디어 관이 들려서 장사하였다. 대왕은 듣고 애통해하였다.
- 3 -
달팽이 각시
어떤 사람이, 논에 물을 보러 가니까, 삽으로 논 구멍을 콱 찍으면서,
"이 농사를 져다 누구하고 먹나?"
이러니까,
"나하고 먹지 누구하고 먹어."
그래, 이상해서 또 한 번 콱 찍으면,
"이 농사를 져서 누구하고 먹나?"
이러니까,
"나하고 먹지 누구하고 먹어."
그래, 거기 아무것도 없고 달팽이 한 마리만 주먹만한 게 있어. 그걸 주워다가 물두멍에다 놓더니 어디 갔다 오면 밥을 해 놓고 밥을 해 놓고….그래 한 날은 (숨어서 모습을) 지키니까는 색시가 하나 나오더니 해를 이 - 보더니 그만 밥을 해서 상을 차려 들어가려고 하는 놈을 꽉 붙드니까,
"아이, 사흘만 있으면 임자하고 백년 해로(百年偕老)할 턴데, 그런 사흘을 못 참어서 이별 수(數)가 있다."고 하더라는 거여.
그래, 인제 있는데, 참 얼마나 이쁜지 당체 나무도 못 하러 가고, 뭐 오금을 못 떼 놔. 나무를 하러 가도 곁에다 갔다 세워 놓고는 나무를 하고….
그래, 하도 그러니까는, 하루는 화상(畵像)을 그려 주며 가는 거여. 나무에다, 화상 그려 준 걸 나무에다 걸고서는 나무를 좀 깎다 보니까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아 그걸 훌떡 걷어 갔단 말여.
그래 가지곤 어느 나라에 갖다 던졌는지, 그 나라 임금이 그 화상을 주워 가지고, "아 요 사람, 어서 가 찾아 오라."고.
그래, 사―방에 인제 광고를 했지. 그 화상 가지고 다니며 찾는데, 한 군데 가니까, 참, 집에 하나 외딴집에 있는데 조그맣게, 그래, 그집에 새댁, 그 새댁이 똑 그 화상 같더래. 그래, 그만 데리고 왔지 응. 그래, 데리고 왔는데, 생전에 온 그 날부터 그러니까 웃는, 그 임금의 아낙이 돼도 웃는 법을 못 보거든. 임금이,
"아이, 당신은 대체 사람도 내 사람이요, 만물이 다 내 거여.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생전에 웃는 걸 못 보겠느냐."고.
"나를 거지 잔치를 한 서너너덧 달 해 주면 그렇게 거시기할거라."고.
"아! 까짓 뭐, 거지 잔치 그까짓 것 뭐. 서너너덧 달 못 해 주겠느냐."고.
"일 년이라도 다 - 해 줄 수 있다."고.
그래, 인제 거지 잔치를 했는데, 아이, 한 날 거지가 지나가도 그 남자가 안 와. 한 날 인제 맨 끄트머리 들어오는데, 쥐철 벙거지에 새털 날개에, 그래 입고서는 들어오는데, 그렇게 쥐털 벙거지에 새털 날개를 했는데, 아주 옷이 그만 다 떨어져서, 그만 그러니까, 그만 새털이 됐지 뭐, 새털. 그러니 아, 그걸 보고 (여자가) 아부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하고 웃었어.
이 임금이 앉았다가,
"야! 저, 저렇게 웃으니 내가 저걸 쓰고서는 한 번 더 할거라."고.
"그걸 벗어 노라."고.
그래서 그걸 입고서는 춤을 추고 돌아가니까, 깡통을 차고, 그 사람매루 깡통을 두드리고 돌아가니까, 그 여자, 한참 웃더니, 갑자기
"아, 저, 저놈 저기 잡아내라."고.
아 그래, 그래 그만 잡아 내라니, 그만 잡아 내라고 하니, 그만 쫓겨나고, 내쫓아 버리고.
아, 그 남자 그, 그만 용상에 그만 올라앉아 그만 임금님이 되고, 정작 임금은 떨려 나가 버리고…….(자료 출처 : 한국구비문학대계, 1980년 충남 대덕에서 윤민녀 구연/ 박계홍·황인덕 채록)
그외 신라,백제의 설화는 아래의 주소로 가셔서 읽어 보세요
http://myhome.hanafos.com/~sjsman/seolhwa/seolhwamain.html
http://pinggoo.com.ne.kr/korea-cultur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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