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정재의 반주음악
- 춘앵전을 중심으로 -
김은자(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춤에서 음악은 무엇일까? 기실 음악이 없어도 춤을 출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추려면 우리는 쉽게 음악을 떠올리고, 음악 또한 자연스럽게 우리를 춤추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춤에서 음악은 어떤 의미일까? 음악의 리듬은 느리게 혹은 빠르게 움직임을 조절하기도 하고, 선율은 그 움직임에 정서적 깊이를 더해주기도 한다.
우리 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중동의 미학이 내재된 궁중정재 역시 음악의 절주를 통해 움직임의 질서를 만들어 간다. 본고에서는 각 시대별 무용 반주음악의 존재 양상을 짚어보고 춘앵전을 중심으로 궁중정재의 반주음악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했는지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춤과 음악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Ⅰ. 시대별 춤 반주음악
1. 상고시대의 춤 반주음악
상고시대와 관련된 가무는 국중대회로 열리는 각 국의 제천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 시기 제천의식의 특징은 “飮食歌舞”로, 노래하고 춤을 춘 기록이 부여, 고구려, 예, 한, 변진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시기 춤의 반주음악은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대체로 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나 손뼉 혹은 발장단 등이 반주음악을 대신해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고시대의 춤 관련 기사>
부여(夫餘)에서는 정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국중대회에서 며칠 동안 음식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는데, 그런 의식을 영고라고 한다.1)
고구려(高句麗)의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즐겼으므로, 나라의 고을과 마을에서 밤에 남녀가 서로 어울려 노래와 유희를 했다.…(중략)…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국중대회를 동맹이라고 한다.2)
예(濊)에서는 늘 10월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는 낮과 밤에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추었는데, 그런 의식을 무천이라고 한다.3)
한(韓)에서는 늘 오월에 씨를 뿌리고 나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사람이 무리를 지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면서 밤낮을 쉬지 않았다. 그 춤은 10여 명이 일제히 시작하여 서로 따르면서, 땅을 높고 낮게 밟기도 하는데, 손과 발이 서로 박자에 잘 맞으므로, 탁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시월에 농사가 끝나면, 오월의 행사 때와 같이 한다.4)
변진(弁辰)의 풍속은 노래부르기와 춤추기를 좋아하고 술 마시기를 즐겨한다.5)
2. 삼국시대의 춤 반주음악
삼국시대에는 춤이나 음악을 담당하는 전문예술인이 출현한다. ������삼국사기������ 「악지」 등의 문헌기록에 따르면, 삼국의 무용수들은 인접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공연 및 교육 활동을 펼쳤다. 비교적 기록이 자세한 신라에서는 무용수를 척(尺)이라고 하였는데, 가무(笳舞)라는 춤을 출 때는 가척(笳尺), 무척(舞尺)이 함께 편성되는 것으로 보아 가(笳)라는 관악기가 반주음악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춤 관련 기사>
고구려악. 악공들은 새의 깃으로 장식된 자색의 비단 모자를 쓰고, 큰 소매의 황색 두루마기에 자색 비단띠를 띠고,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었는데, 오색으로 만든 끈으로 맸다. 무용수 네 명은 머리카락을 뒤로 틀고, 붉은 마래기로 이마에 동이고 금귀고리로 장식했다. 그런데 두 명은 누런 저고리에 붉고 누런 바지를 입었고, 나머지 두 명은 붉고 누런 바지를 입었으되, 그들의 소매는 매우 길었고, 모두 검은 가죽신을 신고서 쌍쌍으로 서서 춤을 추었다.6)
백제악은 중종 때 공인이 죽어서 폐했다가, 개원 때 기왕 집안의 범이 태상경이 되자 아뢰어 다시 설치하게 됐기 때문에, 음악과 춤이 많이 빠졌다. 무용수 두 명은 자색의 큰 소매가 달린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고 장포관을 쓰고 가죽신을 신었다.7)
신라악. 신문왕 9년(689)에 왕이 신촌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했는데, 가무에 감 6명․가척 2명․무척 1명이 연주했고, 하신열무는 감 4명․금척 1명․무척 2명․가척 2명이 연주했다. 사내무는 감 3명․금척 1명․무척 2명․가척 2명이 연주했고, 한기무는 감 3명․금척 1명․무척 2명에 의해서 연주되었다. 상신열무에서는 감 3명․금척 1명․무척 2명․가척 2명이 연주했고, 소경무에서는 감 3명․금척 1명․무척 1명․가척 3명이 연주했으며, 미지무에서는 감 4명․금척 1명․무척 2명이 연주하였다.
애장왕 8년(807)에 음악을 연주했을 때 비로소 처음으로 사내금이 연주됐는데, 무척 4명은 푸른색 옷을 입었고, 금척 1명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가척 5명은 채색된 옷을 입고서 수놓은 부채를 들고 모두 금실로 꾸민 띠를 띠었다. 다음으로 대금무를 연주할 때, 무척은 붉은 옷을 입었고, 금척은 푸른 옷을 입었다. 위와 같이 말하였을 따름이라고 했으니, 그 상세한 것을 말할 수 없다. 신라시대 악공은 모두 척이라고 불렀다.8)
신라 춤에서 반주음악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기록에는 ① 관악기, ② 현악기, ③ 현악기+노래의 3가지 형태가 보이는데, 상고사회보다 전문적인 형태의 연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연행 모습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처용무, 황창랑무, 무애무 등이 이 시기에 기원되었다고 하는데 연행 형태나 내용은 고려와 조선으로 내려오면서 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3. 고려시대의 춤 반주음악
고려시대의 무용 반주음악은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고 인접국가인 송의 영향을 받으며 독특한 모습으로 성장해간다. ������고려사������ 「악지」에는 이 시기의 춤이 향악이나 당악과 같은 ‘악’의 범주로 분류되어 있다. 「악지」에 전하는 향악정재는 무고, 동동, 무애이다. 이들은 모두 정읍사, 동동사, 무애사 등의 노래를 창하는데, 기록에는 이 춤의 반주음악명이 전하지 않고 ‘그 곡’을 연주한다고만 되어 있다. 아마도 이 시기의 향악정재는 이후 정재에서 볼 수 있는 반주곡의 명칭이 아직 명확하게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그 곡’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반주악기는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거문고, 비파, 가야고, 대금, 장고, 피리, 중금, 소금, 박 등의 향악기로 편성되었을 것이다.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향악기>
여섯 줄의 거문고, 다섯 줄의 비파, 열두 줄의 가야고, 열세 구멍의 대금, 장고, 여섯 매로 된 아박, 장식이 있는 무애, 무고, 두 줄의 해금, 일곱 구멍의 피리, 열세 구멍의 중금, 일곱 구멍의 소금, 여섯 매로 된 박.9)
<표 1> ������고려사������ 「악지」 정악정재의 반주음악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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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명 |
악곡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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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 |
정읍사 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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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 |
동동사 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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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 |
무애사 곡 |
향악정재와는 달리 당악정재는 각 정재마다 여러 곡의 반주 음악이 쓰였다. 고려조의 당악정재는 중국에서 배워오거나 혹시 중국인이 직접 고려의 무용수를 지도하여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114년 송의 휘종이 신악을 선물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중국에서 연행되던 모습이 비교적 고스란히 고려로 전해진다. 반주음악명에 사용된 인자, 만, 령, 최자 등은 송의 사악이나 교방악에서 사용되던 악곡들이다. 이 곡들은 조선전기와 후기로 내려오면서 차츰 변화하여 오늘날에는 곡명만이 전하는 곡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반주음악의 구체적인 실체는 알 수 없으며, 다만 방향, 퉁소, 적, 피리, 비파, 아쟁, 대쟁, 장고, 교방고, 박 등의 당악기로 연주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당악기>
당악기. 열여섯 철판으로 된 방향․여덟 구멍의 퉁소․여덟 구멍의 적․여덟 구멍의 피리․네 줄의 비파․일곱 줄의 아쟁․열다섯 줄의 대쟁․장고․교방고․여섯 매로 된 박.10)
<표 2> ������고려사������ 「악지」 당악정재의 반주음악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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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명 |
악곡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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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선도 |
회팔선인자-헌천수만-헌천수령최자-금잔자만-금잔자령-서자고만-서자고만최자-천년만세인자-회팔선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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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장 |
연대청인자-중강령-파자령-중강령 |
|
오양선 |
오운개서조인자-만엽치요도령만-최자령-중강령-보허자령-중강령-파자령-중강령 |
|
포구락 |
절화령-수룡음령-소포구락령-청평악령-소포구락령 |
|
연화대 |
오운개서조인자-중선회인자-백학자-헌천수령만-최자령-삼대령-하성조-반하무-오운개서조인자 |
4. 조선시대의 춤 반주음악
동일한 춤이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겪듯이 반주음악 역시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시용당악정재의 반주곡 명칭 중 고려조부터 전승되던 종목들은 대체로 유사하지만 빠지거나 첨가된 곡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표 3> ������악학궤범������에 기록된 시용당악정재의 반주음악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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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명 |
악곡명 |
|
헌선도 |
회팔선인자-헌천수만-헌천수최자-금잔자만-금잔자최자-서자고만-서자고최자-천년만세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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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장 |
연대청인자-중강령-중강급박-청평악-중강령 |
|
오양선 |
오운개서조인자-최자-만엽치요도-최자-보허자령-보허자급박-보허자령-파자-오운개서조인자 |
|
포구락 |
절화삼대-소포구락령-수룡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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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대 |
전인자-중선회인자-헌천수만-반하무-후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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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척 |
오운개서조인자-최자령-금척령-소포구락령-오운개서조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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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록 |
회팔선인자-보허자령-금전악령-회팔선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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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천정 |
오운개서조인자-최자령-금전악령-중강령-오운개서조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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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명 |
회팔선인자-보허자령-최자령-보허자령-금잔자만-보허자령-최자령-회팔선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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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황은 |
회팔선인자-금최자-금전악령-중강령-서최자-금전악령-서최자-회팔선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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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명 |
천년만세인자-최자령-헌천수만-하성조령-천년만세인자 |
|
성택 |
천년만세인자-최자-하성조령-헌천수만-중강령영-하성조령-중강령-천년만세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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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화대 |
천년만세인자-최자령-중강령-최자령-천년만세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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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파 |
회팔선인자-석노교-전편-입파-허최-최곤-최박-중곤-헐박-쇄곤-회팔선인자 |
조선전기에는 금척, 수보록, 근천정 등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는 7종의 당악정재가 제작된다. 이들 정재들은 당악정재의 형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반주음악도 대부분 고려조 5종의 당악정재와 유사한 반주곡을 사용하고 있다. 또, 조선전기에 복원된 육화대와 곡파 역시 송의 교방악에 사용되는 반주곡명을 쓰고 있다.
고려조의 당악정재 전통이 전승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향악정재 역시 고려조의 전통이 어느 정도 유지된다. 아박, 무고 등은 반주곡에 만기-중기-급기의 빠르기가 표시되어 있어 악곡이 느린데서 점점 빨라지는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보태평, 정대업, 봉래의는 기존의 향악정재와는 구성이 다르며, 무고, 학무의 경우 보허자령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은 만기-중기-급기의 짜임새에 각 연행 종목에서 여러 음악이 사용되었다.
<표 4> ������악학궤범������에 기록된 시용향악정재의 반주음악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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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명 |
악곡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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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태평 |
향당교주. 희문인입-기명-귀인-형가-집녕-융화-현미-용광-정명-대유-역성인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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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업 |
향당교주. 소무인입-독경-탁정-선위-신정-분웅-순응-총수-정세-혁정-영관인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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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의 |
향당교주. 전인자-여민락령-치화평3기-취풍형-후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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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박 |
동동 만기-동동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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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발 |
향당교주. 보허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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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 |
정읍만기-정읍중기-정읍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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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무 |
보허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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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화대처용무합설 |
전도: 처용만기(봉황음일기)-봉황음중기-봉황음급기-삼진작-정읍급기-북전급기 후도: 영산회상만기-영산회상령-보허자령-처용만기-미타찬-본사찬-관음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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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가요 |
여민락령-환궁악-별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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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곡 |
소포구락령 |
조선전기가 대체로 고려조의 전통을 계승하며 새로운 창작이 각기 당악정재와 향악정재 양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조선후기에는 다수의 정재가 창작되기는 하나 반주곡은 보다 간소화되는 형태를 띤다. 의궤에 기록된 정재의 반주곡명은 대체로 아명(雅名)을 사용했기 때문에 각 잔치마다 마치 다양한 반주곡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홀기에 기록된 속명을 살펴보면, 이 시기의 반주음악은 향당교주, 보허자령, 여민락령, 영산회상, 가곡농락, 취타 등의 몇 가지로 제한된 모습이다. 특히 각 정재마다 다양한 반주곡이 사용되던 과거와는 달리 한 정재 당 한 곡만을 쓰고 있고, 많아도 4곡 정도이다. 아마도 동일한 궁중악사들이 연주를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싶다.
<표 5> 11종의 ������정재무도홀기������에 기록된 각 정재별 반주음악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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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명 |
속명 |
정재명 |
속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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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전목단 |
향당교주 |
영지무 |
향당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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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무 |
〃 |
오양선 |
보허자령-향당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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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풍도 |
보허자령 |
육화대 |
보허자령 |
|
고구려무 |
향당교주 |
장생보연지무 |
〃 |
|
공막무 |
〃 |
제수창 |
〃 |
|
광수무 |
〃 |
처용무 |
영산회상 |
|
만수무 |
보허자령 |
첨수무 |
향당교주 |
|
망선문 |
향당교주 |
첩승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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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금척 |
보허자령 |
초무 |
보허자령 |
|
무고 |
향당교주 |
최화무 |
보허자령-향당교주 |
|
무산향 |
〃 |
침향춘 |
향당교주 |
|
무애무 |
〃 |
춘광호 |
〃 |
|
박접무 |
〃 |
춘대옥촉 |
〃 |
|
보상무 |
〃 |
춘앵전 |
〃 |
|
봉래의 |
여민락령-보허자령-향당교주-가곡 농락 |
포구락 |
〃 |
|
사선무 |
향당교주 |
하황은 |
여민락령 |
|
사자무 |
영산회상 |
학무 |
보허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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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락 |
취타 |
항장무 |
소취타-대취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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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장 |
보허자령 |
향령무 |
계락 |
|
아박무 |
정읍만기 |
향발무 |
향당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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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백복지무 |
보허자령 |
헌선도 |
보허자령 |
|
연화대무 |
보허자령 |
헌천화 |
보허자령 |
|
연화무 |
향당교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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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춘앵전의 반주음악
1828년(순조 28) 연경당 진작례에서 처음 선보인 춘앵전은 연향의 전 과정을 기록한 의궤의 「의주」편에 <춘앵전무>라는 정재명과 함께 <춘앵전>이라는 반주곡명이 기록되어 있다. 악보나 음원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므로 당시의 반주음악이 현재와 동일한 악곡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춘앵전>이 새로 만들어진 춤이므로 반주음악도 이전과는 다른 악곡일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다른 정재와 달리 <춘앵전>의 경우 정재명과 곡명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연경당 진작례에서만 출현하고 이후에 행해지는 연향에서는 악곡명이 각기 다르게 표기되었다. <표 6>에서 알 수 있듯이 춘앵전의 반주곡명은 <만년장환지곡>, <천년만세지곡>, <가연지곡>, <옥전춘지곡>, <승화지곡> 등 매 연향마다 달라졌다. 심지어는 고종 정해년(1887), 임진년(1892), 신축년(1901)과 같이 춘앵전이 두 번 이상 행해진 연향에서조차 반주곡명이 각기 다르게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반주곡명과 춤명 다음에 원무곡(原舞曲)이라는 표시가 있어 춤반주에 사용된 실제 반주곡은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6> 조선시대 각종 연향의궤에 기록된 <춘앵전>의 반주음악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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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명 |
연향 |
반주곡명 |
원 곡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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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무자진작의궤 |
연경당 진작의(1828) |
춘앵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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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기축진찬의궤 |
자경전 진찬의(1829) |
만년장환지곡 |
향당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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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무신진찬의궤 |
통명전 익일회작의(1848) |
천년만세지곡 |
원무곡 |
|
고종계유진작의궤 |
강녕전 진작의(1873) |
- |
- |
|
고종정축진찬의궤 |
통명전 익일진찬의(1877) |
가연지곡 |
원무곡 |
|
고종정해진찬의궤 |
만경전 야진찬의(1887) |
옥전춘지곡 |
원무곡 |
|
만경전 재익일왕세자회작의 |
승화지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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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임진진찬의궤 |
강녕전야진찬의(1892) |
만세장락지곡 |
원무곡 |
|
강녕전 왕세자회작의 |
천록영창지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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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신축진연의궤 |
함녕전 진연의(1901) |
요지반도지곡 |
원무곡 |
|
고종신축진찬의궤 |
경운당 야진찬의(1901) |
태평만년지곡 |
원무곡 |
|
경운당 재익일황태자야연의 |
경춘광지곡 |
<춘앵전>의 원무곡은 1829년 자경전 진찬의에서 <만년장환지곡>이라는 아명과 함께 <향당교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건대, <춘앵전>의 반주음악은 새롭게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기존에 있던 <향당교주>를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처음만 <춘앵전>이라는 악곡명으로 부르다가 이후부터 관례대로 아명을 붙여서 기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주곡명을 처음에 춤 이름과 동일하게 했던 까닭은 <춘앵전>의 창작 모티브와 관련 있다고 생각된다. 즉, “당 고종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악공 백명달에게 명하여 그것을 묘사하게 하였다.”는 ������연감유함������의 기록처럼 당 고종 당시 춤보다 음악으로 더 비중있게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의궤의 반주곡명은 주로 아명을 쓰기 때문에 음악의 실체를 알기 어렵다.11) 보다 정확한 기록은 홀기이다. 계사년 홀기를 비롯해 12종의 홀기를 조사한 결과, 춘앵전은 모두 7개의 홀기에 기록되어 있다. 춘앵전의 속명은 모두 <향당교주>(鄕唐交奏)로 기록되어 있고,12) 아명은 「신축진연회작홀기」만 제외하면 모두 <유초신지곡>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표 7> 12종의 ������정재무도홀기������에 기록된 <춘앵전>의 반주음악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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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기명 |
아명 |
속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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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 홀기 |
유초신지곡 |
향당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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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진연회작홀기 |
경신가회지곡 | |
|
무동홀기 |
유초신지곡 | |
|
갑오외진연홀기 |
유초신지곡 | |
|
신축진연홀기 |
유초신지곡 | |
|
신축외진연홀기 |
유초신지곡 | |
|
신축진찬홀기 |
유초신지곡 |
<유초신지곡>은 현재 <평조회상>의 아명으로 알려진 곡이다. 아명을 붙이던 습관은 조선 말기에 생겨났다고 한다. 당시에는 임기응변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유독 춘앵전의 반주음악은 대부분 <유초신지곡>인 점이 흥미롭다. 속명으로 사용된 <향당교주>는 <관악영산회상>의 상령산 20박을 10박으로 줄여 연주한 곡을 가리킨다. <평조회상>의 상령산 20박도 10박으로 연주하기 때문에 <향당교주>라는 속명과 어느 정도 맥이 닿는다. 하지만 당시 음악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지금의 <평조회상>이 당시에도 그대로 쓰였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유초신지곡>이 오늘날과 같이 <평조회상>으로 연주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1931년 성경린의 기록을 통해서이다. 이 기록은 조선시대의 홀기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유초신지곡>이라는 반주곡명에 상령산-중령산-세령산-삼현-타령 등이 표기되어 있어 동작과 음악의 변화를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 현재 춘앵전은 모음곡으로 구성된 평조회상의 여러 곡들을 사용하고 있다. 곡에 따라 장단도 10박-6박-4박으로 점점 빨라지는 구조이다.
<표 8> <춘앵전>에 사용된 곡과 장단수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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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명 |
한 장단 |
장단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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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령산 |
10박 |
4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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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령산 |
10박 |
8각 |
|
세령산 |
10박 |
6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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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도드리 |
6박 |
19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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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염불도드리 |
6박 |
9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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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령 |
4박(12박) |
30각 |
춘앵전의 악기 편성은 삼현육각에 당적이 추가된 형태가 일반적이다. 악기 편성 역시 각 연향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순조조의 연경당 잔작례 때 편성된 악기는 다음의 <표 9>와 같다. 대체로 연향의 악대 편성은 전상악과 전정헌가의 두 악대로 편성된다. 하지만 순조 무자년의 진작례는 연경당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간단한 세악으로 편성하였다. 두 명의 전악에 16명의 악사가 음악을 담당했는데, 가운데 장고, 갈고, 교방고 등의 타악기를 배치하고, 오른쪽은 장고, 피리, 대금, 해금 등 관악기 위주로, 왼쪽은 아쟁, 현금, 당금, 비파, 가야금 등 현악기 위주로 편성하였다.
<표 9>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의 악기 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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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
비파 |
당금 |
현금 |
아쟁 |
방향 |
교방고 |
갈고 |
|
장고 |
피리 |
피리 |
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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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춘앵전을 중심으로 궁중정재의 반주음악에 대해 살펴보았다. 춤의 반주음악은 춤을 더욱 풍성하고 질서있게 만들어주는 필수요건이다. 하지만 춤을 추는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반주악기 편성, 연주 악곡의 길이 등은 충분히 바뀔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 순조조에 만들어진 춘앵전은 이전의 정재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향당교주의 반주음악이나 가곡 선율에 얹은 창사음악 등에서 조선 후기의 독특한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