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내세운 5가지 쟁점 *
1. 사서 조작의 문제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원본이 없기 때문에 조작된 위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환단고기>는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입니다.
또한 위서론자들은 '계연수가 수안 계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계연수를 가공 인물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수안 계씨 종친회에 의하면, 북한 출신 종친 중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은 부지기수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느라 후손이 끊기고 가계도가 왜곡되어 족보에 오르지 못한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계연수를 유령 인물로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해동인물지(1961)>와 <정신철학통편(1920)>에서는 계연수가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2. 지명과 인명의 문제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영고탑'이 청나라(1644~1911)의 시조 전설과 관련 있는 지명이므로, <환단고기>는 청나라 이후에 꾸며진 위서라고 주장합니다. 조인성은 <단군세기>의 저자인 이암과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이 고려 말 사람이고,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은 조선 중기 사람이기 때문에 <환단고기>에 '영고탑'이란 지명은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도학 역시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쓰인 것이 위서론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 단서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제주대 안창범 교수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나오는 영고탑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여 이 주장들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즉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라 하고 '자리'는 특이라 한다. 영고탑은 본래 영고특에서 영고태로, 영고대에서 영고탑으로 와전된 것이며 구설로서 지명이 아니다"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영고탑'은 지명이 아니라 단군조선 때부터 있었던 건물 모양의 탑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도 '영고탑'을 오랄, 애호와 함께 동삼성의 하나라 하고 '성이 높고 해자가 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영고탑'은 원래 탑의 이름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명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한편으로는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배달과 고조선의 제천행사를 이어받은 부여의 영고와 관련이 있다는 점도 짚을 수 있습니다.
잠깐, 부여의 영고, 익숙하지 않나요?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국가별 제천행사의 이름을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나는데요
빈칸채우기 푸느라고 등에 땀이 흘렀었죠![]()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이전부터 국가의 중요한 행사이자 온 백성이 참여하는 축제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 행사를 치렀습니다. 이 제천행사를 부여에서는 '영고'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에는 동맹, 동예에는 무천이라 불리우는 제천 행사가 있었습니다.

- <단군세기>를 보면 16세 위나단군이 '구환족의 모든 왕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고, '44세 구물단군이 재위 2년(BCE 424)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를 올렸다'고 하였습니다. 부여는 고조선을 이은 나라이므로 부여 영고제는 곧 고조선의 제천행사입니다.
- 영고탑은 바로 삼신상제님께 올리던 천제인 영고제를 지내던 '소도 제천단'이 있던 곳(영고제를 지내던 터)입니다. 따라서 후대에 청나라가 그 땅을 차지하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3. 근대 술어 사용의 문제
위서론자들은 국가, 문화, 평등, 헌법, 인류, 세계, 산업과 같은 근대 용어가 쓰였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여러 고전에서도 위의 용어가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 역주본 123P부터 128P까지는 환단고기 술어가 여러 고전에서 등장하고 있음을 짚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몇가지만 소개드리겠습니다.
문화
- 문화라는 말은 본래 '문으로써 가르쳐 변화시키다'는 뜻의 '이문교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은 '무력정복'이란 말에 대응해서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합쳐 이른바 '문치무공'이라 한다.
- <주역> <비>괘에는 '문화'에 관한 원시적 견해를 엿볼 수 있는 말이 나온다. "인문을 관찰하여 교화로써 천하 사람을 다스린다."
평등
- 인도 승려 구마라습(344~413)의 <금강경><정심행선분>에 "이 법은 차별이 없어 높고 낮음이 없다"라고 하여 '평등'이라는 어휘가 사용되었다.
- 인도 승려 구나브리티가 492년에 한문으로 번역한 <백유경> 이자분재유 편에, "너희에게 서로 똑같게 물건을 나누는 법을 가르쳐 주리니 지금 갖고 있는 모든 물건을 부서어 이등분하라"는 말이 나온다.
국가
- <주역> 계사전에 "군자는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존립해 있을 대에도 멸망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려질 대에도 어지러움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몸을 보전할 수 있고, 나라와 집안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 <맹자> <이루> 하편에, "사람들이 늘 하는 말로 모두 '천하 국가'라 하는데,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집안에 있으며, 집안의 근본은 자기 자신에 있다"라는 말이 있다.
헌법
- 전국시대의 역사서인 <국어> 진어편을 보면 "선행을 상주고 간악한 행위를 벌주는 것은 나라의 법이다"라고 하여, 법, 법전을 뜻하는 '헌법'이 나온다. 여기서 '헌법'이 '법'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속자치통감> <송철종 6년>에 "처음에 보좌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부터 재상이 되어서까지, 법을 손질하여 엄격히 집행하고, 그릇됨과 올바름을 가리어 사리를 밝혔으며, 홀로 한 뜻을 세우고, 만나자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서도 '헌법'이 '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업
- <한비자> 해로편을 보면 "백성이 감히 법을 어기지 않으면 군주는 안으로 형벌을 사용하지 않고 밖으로 그들의 재산(산업)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힘쓰지 않는 다면 백성들은 번성해서 많이 퍼질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산업은 개인의 재산을 말한다.
- <사기><소진열전>에 "주나라 사람의 풍속에는 생업을 경영하고, 공상업에 힘써 10분의 2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산업은 생업을 뜻한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취리산에 단을 쌓고 칙사 유인원과 마주하여 피를 마셔 서로 맹세하고 산과 강으로 서약하였으며,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영원히 국경으로 삼아서 백성들이 머물러 살고 각기 생업을 꾸리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근세 용어라고 여겨왔던 용어들의 다수가 이미 고대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서론자들이 이를 근거로 환단고기를 비판하는 것은 부정을 전제로 한 역사의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 부정을 위한 비난에 가까운 것이죠.
4. 다른 사서의 영향과 표절 의혹의 문제
- 위서론자들은 다른 사서들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 <환단고기>가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그 내용을 일방적으로 베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대표적으로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습니다.
- 이에 더해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에 비해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광개토태왕비의 중요 비문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의 아버지 광개토태왕은 원시조로부터 17세손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13대 태왕입니다. 그렇다면 고주몽으로부터 13세손인 광개토태왕이 17세손이라고 밝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환단고기의 <삼성기>에는 ‘사해모수위태조’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해모수를 태조로 삼아 제를 지냈다는 뜻인데요, 여기에서 고구려의 시조가 고주몽이 아닌 해모수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하는 데 그친 <조선상고사>에 비해 <환단고기>는 기존의 역사서가 밝히지 못한 본래의 진실까지 담아내고 있습니다.
- 5.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 문제
<환단고기> <삼성기> 상,하편의 저자인 안함로와 원동중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증거가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에 나와있습니다.
"안함로원동중삼성기"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를 언급하는 결정적 문장입니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이것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이일까요? <세조실록> 70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 원로, 동중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세조실록>에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합니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의 "안함로원동중삼성기"의 기록이 잘못되었으니 '안함, 원로, 동중의 삼성기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습니다.
1)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먼저 나온 책을 인용합니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세조실록>이 70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했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2) <세조실록>에서는 저자가 세 명 이상일 경우 사람의 수를 명시하였습니다. '문태, 왕거인, 설업 등 세 사람이 쓴 책'과 같이 이름을 나열할 때 몇 사람인지를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함로원동중삼성기"라는 문구에서는 안함로와 원동중 두 사람이 <삼성기>를 저술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안함安咸'은 <세조실록>의 '안함安含'과 독음만 같을 뿐 글자가 다릅니다. 정확성을 요구하는 정사正史인 <왕조실록>이 '안함安咸'과 안함安含, '로원老元'과 '원로元老'를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렵습니다.
- 이에 더해 원동중의 <삼성기>가 실재했다는 증거로 이맥의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에 '원동중 삼성기 주'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맥이 원동중의 <삼성기>에 주가 달린 책을 모고 <태백일사>를 저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서론자들이 말하는 '안함, 원로, 동중의 세 성인에 대한 기록'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로지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함로원동중삼성기'는 '안함, 원로, 동중의 세 성인의 기록'이 아니라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인 것입니다.
- 이처럼 위서론자들은 일반적으로 문헌고증을 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부분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 이승호는 "이런 오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데 특정한 시각이나 목적으로 <환단고기>를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즉 위서론자들이 위서로 낙인찍기 위한 불순한 목적으로 갖고 <환단고기>를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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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환단고기>를 둘러싼 위서론 논쟁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 포스팅을 하며 느낀 것은 어떤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논리의 허점을 명확히 파악하여 대응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본인의 의견을 감정적으로만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주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환단고기가 엄청난 역사적 사료성과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행태가 학문을 탐구하는 자들의 올바른 자세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적힌 '17세손'과 같이, 현존하는 사료로는 밝히기 어려운 역사의 진실을 담아내고 있는 환단고기를 보다 열린 마음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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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전의 해명론 요약
논점 -1- [자유]지에 발표한 이유립의 글들
◈ 위서론의 주요 내용
[자유]지 발표 내용과 [환단고기]의 내용이 대동소이하므로 이유립이 썼다는 유력한 증거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이유립은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바탕으로 [자유]지에 글을 썼기 때문에 내용이 같은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논점 -2- 안함로, 원동중 문제
◈ 위서론의 주요 내용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안함,원로,동중 세 명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원동중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세조실록]에 [안함로원동중삼성기]라 적힌 것은 안함로와 원동중 두 사람이 [삼성기]를 지었음을 뜻한다. [세조실록]의 다른 구절 "문태, 왕거인,설업 등 세 사람이 쓴 책"에서 알 수 있듯이, 몇 사람인지 혼동할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사람 숫자를 표시하였다.
논점 -3- 근대용어의 사용문제
◈ 위서론의 주요 내용
국가,문화,평등,부권등 근대어가 사용되었으므로 [환단고기]는 후대에 조작되었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국가,문화,평등,자유,인류,세계란 어휘는 고대부터 사용된 예가 많다
논점 -4- 지명 : 영고탑 寧古塔
◈ 위서론의 주요 내용
청조 때에 나온 명칭이므로 그 이전에 사용될 수 없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청조 이전부터 영고대 혹은 영고탑으로 불렸다. 명대 초기에 여진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이곳을 동해와집영고탑로東海窩集寧古塔로라고 불렀다.
논점 -5- 지명 : 상춘常春
◈ 위서론의 주요 내용
청조 때에 나온 명칭이므로 그 이전에 사용될 수 없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장춘이란 지명은 [요사]와 [금사]에 자주 등장하며 장춘은 상춘과 의미가 같으므로 별칭으로 불렸을 수도 있다.
논점 -6- 장수왕 연호 '건흥' 문제
◈ 위서론의 주요 내용
1915년 충주에서 발견된 불상 광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1915년 이후에 쓰인 기록이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환단고기]만이 옛 사료에 기록을 바탕으로 광개토태왕의 붕어와 장수왕의 즉위 연대를 명쾌하게 밝혀주는 데 불상 광배명이 오히려 그 진가를 확인시켜 준 것이다.
논점 -7- 연개소문 조부 이름 '자유子遊' 문제
◈ 위서론의 주요 내용
1923년 천남생 묘지에서 발견된 묘비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1923년 이후에 쓰인 기록이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연남생의 묘지 명문 또한 [환단고기]만의 기록을 확인시켜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이 광廣이라는 것까지 밝혀주고 있다.
논점 -8- [소도경전본훈]에 실린 [천부경]발견 문제
◈ 위서론의 주요 내용
계연수가 1916년에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 석각을 발견하고 탁본하였다는 사실은 천부경이 실린 [환단고기]가 1911년에 간행되었다는 것과 모순된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계연수는 [천부경]을 [태백일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고 확신하고 그 실체를 찾다가 1916년 묘향산에서 발견한 것이다.
논점 -9- 삼위일체,삼신,성삼품설등의 기독교 교리 유사성
◈ 위서론의 주요 내용
삼위일체,삼신,성삼품설 등은 기독교 교리에서 볼 수 있는 용어이므로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에 위작된 것이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삼신이란 용어는 우리 민간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말이고, 사마천의 사기에도 등장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동양과 기독교의 개념 및 교리체계는 서로 전혀 다르다.
논점 -10-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단군 치세 연수 차이
◈ 위서론의 주요 내용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이암과 이명,범장은 함께 소전도사로부터 환단의 진결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이명의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저술한 [규원사화]는 [단군세기]와 치세가 천년이나 차이가 난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행촌 이암이 [진역유기]를 보았을 것이나 내각찬수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단군세기]를 저술하는 데 주로 의존한 기록은 [진역유기]라는 다른 책일 가능성이 높다.
논점 -11- 일 년의 길이에 대한 문제
◈ 위서론의 주요 내용
[마한세가]에는 환웅이 정한 책력에 일 년의 길이가 365일 5시간 48분 46초라고 나와 있는 바, 이는 당시 천문지식으로는 불가능한 수치이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이집트나 중국을 비롯한 고대인들은 이미 일년의 길이가 365일에 1/4일을 더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분초 단위의 기록은 후대에 주석으로 삽인된 것으로 보인다.
논점 -12- 국가형성과 관련된 청동기 연대
◈ 위서론의 주요 내용
단군조선은 BCE23세기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고대국가 형성된 청동기 시대 상한은 기원전 10세기 이상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고대국가 형성에 청동기가 필수적인 전제는 아니다. 최근 고고학 발굴에 의해 동북아 청동기시대는 BCE3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논점 -13- 대진 3대 문왕의 연호 대흥大興
◈ 위서론의 주요 내용
[신당서]에 이미 나와 있는 것이므로 대흥 연호가 [환단고기]를 증명하지 못한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신당서]에 실려 있는 것은 사실이나 주목받지 못하고, 1980년 정혜공주 묘에서 발견된 묘비명으로 인해 제대로 알려졌다.
논점 -14- 강화도 참성단 축성 시기
◈위서론의 주요 내용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므로 [환단고기]에 처음 나오는 것이 아니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단군세기]는 고려 말에 쓰인 것으로 [세종실록] '지리지'보다 앞선다. 또한 참성단을 언제 누가 쌓았는지 처음으로 정확히 알려주는 기록이다.
논점 -15- 단군세기에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鬼方을 공격한 기록을 갑골문이 증명
◈ 위서론의 주요 내용
[주역] 63번째 기제괘에 이미 나오는 것이다
- 위서론의 허점과 그에 대한 반론
다른 역사서도 아니고 [주역]에서 단 한 줄 나오는 고종벌귀방이란 구절을 찾아내 조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갑골학은 1899년 중국에서 갑골문이 발견된 이후 연구되다가 1950~70년 사이에 학문적 체계가 잡혔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성과가 조금씩 알려지다가 199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글출처 : 환단고기 번역본 (상생출판, 2012년 5월 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