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경(大辯經)은 ‘환국-신시-삼한’에 유래한 고유 3수 원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자 고대 역사를 3수 원리로 설명을 하고 있는 역사 경전이다. “심경(心經)” 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 처럼 문체가 완전히 다른 15권 이상의 책 핵심 문장을 추려서 모아 놓은 형태이다.
나이테 1.
그런데 이 책. 주자 이상의 강박관념이랄까? 정말이지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정치, 종교, 역사 전반에 대해서 큰 틀은 철저하게 3수 원리로만 설명이 하고 있다. 경전으로서의 의미로 보자면 갑골 문자의 사상이나 동이족과 관련된 사상 이해 기부터 ‘단군세기’에서 ‘태백일사’ 까지 나오는 3수와 관련된 사상을 이해하는데 더 이상이 없는 최고의 경전으로 보인다.
<大辯經(대변경)에 담겨져 있는 내용>
1) 정신문화적 차원
(1) 삼신 (조화신,교화신,치화신)
(2) 삼진 (성,명,정),
(3) 삼망 (심,기,신),
(4) 삼도 (감,식,촉)
(5) 삼식 (영,지,의)
(6) 삼혼 (영혼,각혼,생혼)
2) 역사 현상 분석
3수 원리에 입각하여 고대 역사를 분석을 하고 있다.
(1) 환(桓),단(檀),한(韓),
(2) 신시씨(神市氏), 청구씨(靑邱氏), 조선씨(朝鮮氏)
(3) 전(全),선(仙),종(宗)의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의 원리등
3) 고조선 3왕조 시대 분석
(1) 1세 단군 왕검부터 21세 단군 소태 까지를
수도는 송화강 아사달,
나라 이름 3한(三韓),
(2) 22세 색부루 단군부터 43세 물리 단군까지를
수도는 백악산 아사달
나라 이름 3조선(三朝鮮),
(3) 44세 구물단군부터 47세 단군 고열가 까지를
수도는 장당경 아사달
나라 이름 대부여 시대로 보고 있다.
4) 고조선의 제도 원리 분석
(1) 고조선 1왕조였던 삼한(三韓)은
조정을 3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분조관경(分朝管境),
(2) 고조선 2왕조였던 삼조선(三朝鮮)
권력을 3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분권관경(分權管境)
(3) 고조선 3왕조였던 대부여 시대는
마한 진한 번한이 완전히 다른 나라로 분리 되었다고 분석했다.
☞ 담고 있는 철학적 사상의 연대를 유추 해 보면 3수 원리이기에 음양 사상 보다 고대 사상에 해당한다. 음양론을 바탕으로 한 격물치기의 현실주의 중용(中庸) 보다도 더 형이상학적인 부분이 강조 되어 있어서 담겨져 있는 내용은 중용 보다 훨씬 더 고대의 사상임을 알 수 있다.
<大辯經(대변경)의 최초의 저본의 저자의 주체와 시칭>
1) 환국(桓國), 신시(神市), 삼한(三韓)에 대한 역사서이다.
(1) 고조선은 수도를 3번 천도한 3왕조 시대로 분석하고 있다.
(2) 조정을 3개로 나누어 통치한 광대한 제국으로 보고 있다.
2) 고구려 개국 고주몽에 대한 내용 까지 나온다.
3) 고구려 초기 사관들이 3성조(三聖祖)시대 역사를 분석한 시각으로 적혀져 있다.
☞ 고구려 역사서가 大辯經(대변경)의 저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이때 책 이름은 大辯經(대변경)이 아닌 經(경) 또는 단음절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나이테 2.
그런데 대변경 원문을 보다 보면 이 책을 편집한 사람이 고대서적을 엄청 많이 읽고 연구한 학자의 느낌이 난다. 문장 마다 나타나는 문체와 문법이 다 다르고 설명하는 방식과 설명하는 사상이 다르다. 거대한 나무의 나이테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면서도 3수 원리와 관련된 다양한 사상과 주석들을 총 집대성 하여 사상적 통일을 이룬 거의 완벽에 가까운 3수 철학 경전으로의 모습도 보인다. 이 부분에서는 대변경(大辯經) 고대의 문헌이 아니라 후대의 문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고대의 저본을 바탕으로 주석들을 모아 놓은 듯한 느낌의 책이다. 그래서일까? 주자가 중용(中庸) 원문에 주석을 달은 집주(集註)와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나이테 2. 대진국(발해) 시대에 사상적 통합이 된 흔적>
1) 통일 신라는 불교 중심의 문화권에 있었던 시기였기에 환단의 사상을 집대성 할 수 있는 문화 여건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2) 고려는 왕건이 고려를 개국 하던 시절부터 문화는 당나라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제 대한민국이 미국의 문화 영향권에 있는 수준으로 보인다.
3) 大辯經(대변경)의 저본이 되었을 고구려 역사 문헌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권은 고구려 유민의 나라 대진국(발해)이었다.
4) 환단(桓檀)으로 대변되는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동이족 고유의 3수 원리와 관련된 다양한 사상과 주석들을 총 집대성 하여 사상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문화적 여건이 조성 되었던 시기는 대진국(발해) 시기였다.
☞ 朝代記 (조대기)처럼 대진국(발해) 시대의 여러 문헌들이 하나로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책 이름도 여러 문헌이 하나로 되었다는 뜻에서 클 대(大)자가 붙었을 것이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대변설(大辯設)이 혹시 大辯經(대변경)의 저본이 되는 책이 아니었을 까 추측해 보기도 생각해 본다.
나이테 3.
이제 문장을 세세하게 검토하기 시작 하면 잘 비벼진 전주-비빔밥 같은 문장이 나온다. 하나의 문장 안에 시대가 다른 다양한 학설의 이론들을 설명하는 주석(註釋)이 중구 남방으로 인용 되어 있다. 주석의 경연장, 주석의 난장토론 같기도.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커다란 틀에서의 3수 원리를 논하면서도 세밀한 부분에서는 음양론적 배열이 나와 있는 곳이 있다는 점이다.
<고려 말 음양이 바탕이 된 유학적 설명이 덧붙여진 흔적>
1) 어떤 부분은 신교적 색체가 나오기도 하고 다음 줄에는 유교의 색체가 나오기도 하고.
2) 3수 원리를 설명하는데 일부러 1을 빼서 음양의 바탕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3) 행촌 이암 선생이 1363년 공민왕 12년 10월 3일에 쓴 단군세기 서문에 인용된 고문과 같은 사상적 철학, 비슷한 문체들이 나오고 있다.
4) 책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문란적으로 몰려 9족을 멸하던 조선시대에 3수와 관련된 사상을 통합을 하는 책을 쓸 이유도, 쓸 수도 없다.
☞ 단군세기 서문 보다는 더 이전의 글로 추측이 된다. 유교적인 해석이 들어 간 것은 고려 중엽이나 말엽으로 보인다. 大辯經(대변경)이란 책 이름이 정해 진 것도 이무렵 일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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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경(大辯經)에는 천부인과 천부경, 삼일신고가 어떠한 것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천부인, 천부경, 삼일신고는 사람이 태어나는 비밀과 태어날 때 배꼽 아래에 숨겨 나온
무병장수하고 불로장생하는 비밀을 여는 방법을 설명하는 단학이 고스란히 들어 있음을 밝힌다.
허나 아직 이 길에 제대로 든 사람이 없으니 난설 난해하고 설왕설래하는 설(說)만 분분할 뿐
제대로 꿰뚫어 아는 자가 드물었다. 한단고기는 수련서인 동시에 역사서이다.
대변경은 환단고기에 소개된 '행방불명된 사서 13종'중의 하나다.
1.대변경
2.표훈천사(表訓天詞)
3.삼성밀기(三聖密記)
4.고려팔관기(高麗八觀記)
5.배달유기(倍達留記)
6.삼한비기(三韓秘記) 등
<전문>
大辯經曰惟天一神
대변경왈유천일신
대변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冥冥在上乃以三大三圓三一之爲靈符者心
명명재상내이삼대삼원삼일지위령부자심
하늘의 한 주재신이 깊고 깊은 하늘에 계시어, 삼위의 창조 정신으로 위대(삼대)하고 삼위의
창조 정신으로 삼원(원융무애)하며, 삼위의 변화정신을 일체(삼일) 로 하여 대우주 성령의
근본정신으로 삼으시고,
大降降于萬萬世之萬萬民一切惟三神所造
대강강우만만세지만만민일체유삼신소조
이를 영원무궁토록 세계의 모든 백성에게 크게 내리시니,
일체 만유는 오직 삼신께서 지으신 바로다.
氣身必須相信未必永劫相守
기신필수상신미필영겁상수
마음과 기운과 육신(심기신)은 반드시 서로 일체 관계에 있으나
서로의 일체 관계를 영원토록 유지하지는 못한다.
靈智意三識卽爲靈覺生三魂亦因其素以能衍形年魂嘗與
영지의삼식즉위영각생삼혼역인기소이능연형년혼상여
심령과 지혜와 의식의 3대 정신 작용은 영으로 만물을 환히 깨닫는 영각 작용을 하여 삼혼을 생성
하는데, 이 3대 요소의 직관 작용으로 인해 나이 먹은 해를 거듭하여 우리의 혼이 성숙하게 된다.
境有所感息觸者而眞妄相引三途乃歧
경유소감식촉자이진망상인삼도내기
사물과 접촉하는 경계를 따라 느낌과 호흡과 촉감(감식촉) 작용이 일어난다.
삼진과 삼망이 상호 작용하여 삼도의 작용으로 나뉘어진다.
故曰有眞而生有妄而滅於是人物之生均是一其眞源
고왈유진이생유망이멸어시인물지생균시일기진원
그러므로 삼진의 작용으로 삶이 열리고, 삼망의 변화로 죽음이 이루어진다.
이에 인간과 만물의 삶이란 다 같이 진리의 한 본원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性命精爲三關關爲守神之要會
성명정위삼관관위수신지요회성불리
성명정은 삼관이다. 성품과 목숨과 정기는 신과 합일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3대 관문이다.
관문이란 신을 지켜내는 가장 중요한 조화의 핵심처를 말한다.
性不離命命不離性精在其中心氣身爲三房房爲成化之根源
성불리명명불리성정재기중심기신위삼방방위성화지근원
성품은 타고난 수명과 분리될 수 없고, 수명은 타고난 수명과 분리될 수 없고,
수명은 타고난 성품과 분리될 수 없느니 이는 정기가 이들 가운데서 작용하기 때문이니라.
심기신은 삼방이다. 마음과 기운과 육신은 신이 머무는 3대 안식처이다.
방이란 조화를 지어내는 근원을 말한다.
氣不離心心不離氣神在其中
기불리심심불리기신재기중
기는 마음을 떠나 존재할 수 없고, 마음은 기를 떠나 있을 수 없으니,
내 몸이 이 가운데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感息觸爲三門門爲行途之常法
감식촉위삼문문위행도지상법
감식촉은 삼문이다. 느낌과 호흡과 촉감은 신의 조화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3대 문호이다.
문이란 내가 삼신의 도를 실행하는 영원불변의 법도를 말한다.
感不離息息不離感觸在其中性爲眞理之元關心爲眞神之玄房
감불리식식불리감촉재기중성위진리지원관심위진신지현방
감각은 호흡 작용과 분리되지 않으며 호흡 작용은 감각의 상호 작용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는 말초 신경의 촉감 작용이 이 가운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품은 진리의 원관이요, 성품은 우주의 참 이치를 체험하는 최상의 관문이요.
마음은 진신의 현방이요, 마음은 우주의 조화신(삼신과 그 주재자인 삼신상제)이 안주하는
현묘한 안식처요.
感爲眞應之玅門究理自性眞機大發存神
감위진응지묘문구리자성진기대발존신
느낌은 진응의 묘문이니, 느낌은 삼신의 성령을 감응해 느낄 수 있는 오묘한 문이 되나니,
천지이치를 꿰뚫어 본연의 성품 자리에 안주하라! 그대 속에 깃든 참된 생명의 전 면모가
발현되리라. 삼신 상제님의 성신을 너의 마음에서 구하여라.
求心眞身大現化應相感眞業大成所驗有時 所境有空人在其間
구심진신대현화응상감진업대성소험유시 소경유공인재기간
조화가 응하는 삼신상제님의 성령의 불을 받아 느껴라! 그대 우주의 한 소식을 들어 광구천하의
대업을 크게 이루리라. 우리의 삶이 실현되는 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고,
인류 문명이 열리는 삶의 장인 지경의 이치는 공간속에 깃들어 있으니,
인간은 이러한 삶의 현실 법칙인 시공의 경계와 변화속에서 존재하고 있도다.
庶物之有虛粗同軆者 惟一氣而已 惟三神而已
서물지유허조동체자 유일기이이 유삼신이이
만물속에 정신과 물질이 일체로 깃들어 있는 것은
이 우주에는 오직 한 조화기운과 삼신의 창조 정신만이 있기 때문이다.
有不可窮之數 有不可避之理 有不可抗之力
유불가궁지수 유불가피지리 유불가항지력
여기에는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법칙과 결코 피할 수 없는 변화 원리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창조력이 깃들어 있다
有或善不善報諸永劫 有或善不善報諸自然 有或善不善報諸子孫
유혹선불선보제영겁 유혹선불선조제자연 유혹선불선보제자손
그리하여 혹 선하거나 착하지 못한 행동을 범하게 되면 그 응보가 영원토록 작용하게 된다.
혹은 그 보답을 필연적으로 받게 되어 때로는 자손에게까지 그 응보를 철저하게 받게 되느니라.
대변경이 전해지지 못한 사연에 대한 소고
이맥(李陌)
조선시대사인물 조선전기 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정부(井夫), 분야 조선시대사유형인물. 시대조선. 성격문신, 성별남, 출생일1455년(세조 1) 사망일1528년(중종 23)본관고성(固城), 경력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관련사건중종반정조선전기 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정부(井夫). 이강(李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원(李原)이다. 아버지는 이지(李墀)이며, 어머니는 정보(鄭保)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곧 성균관전적에 제수되고, 이어서 벼슬이 누천되어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이때에 장숙용(張淑容)이 연산군의 은총을 기화로 호화주택을 짓고 축재에 광분함을 보고,
수차례에 걸쳐 이를 탄핵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외방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몰려나면서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성균관사예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헌부장령을 겸하고서 관기 확립에 힘썼다.
벼슬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는데,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매사에 공정하였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중종실록(中宗實錄)/국조방목(國朝榜目)/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집필 (1997년) 최완기
이맥(李陌)은 태백일사를 쓰신 분이신데이맥이 『태백일사』를 썼다
『태백일사』를 쓴 이는 이맥李陌(1455~1528)이다.
이맥은 연산군 때 사람인데 너무 강직해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 충북 괴산으로 유배당했다.
그리고 다시 풀려나 벼슬길에 복귀하였는데 그의 호가 일십당一十堂이요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李嵒의 현손(고손자)이었다.
연산군이 몰락하고 난 뒤 중종이 즉위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찬수관纂修官으로 재등용되었는데 그때 내각에 있는 비장도서를 읽고 깜짝 놀랐다.
우리 역사의 시작 즉 상고사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군 이전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것이다.
이맥이 내각의 비서를 읽고 『태백일사』를 지은 것은 중종(1506~1544) 초의 일이었다.
세조(1455~1468)가 모든 상고사 기록 즉 『고기』를 거두어들이라는 명(收書令)을 내린 지 불과 50년 뒤의 일이었다.
세조 2년, 왕은 각도 관찰사에게 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모든 상고사 기록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영을 어기고 책을 숨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으니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비슷한 문화탄압이었다.
이때 압수된 고기의 서목이 실록에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일부 서목이 『태백일사』에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이맥은 목숨을 걸고 『태백일사』를 저술했던 것이다.
잠시 이맥이 『태백일사』를 쓰게 된 동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때는 갑자년(연산군 10년 1506). 내가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적소謫所에서 근신하고 있으니 너무 무료하여집에 간직해 두었던 사전史典들과 노고들에게 들은 이야기, 그리고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16년 만인 경진년(중종 15년 1520)에 찬수관纂修官으로 있을 때 내각에 소장된 비밀스런 책들을 읽고 이들을 모두 합해서 책을 엮었는데 이름하여 「태백일사」라 한다.
(『태백일사』 발문跋文)
『태백일사』의 <일사逸史>란 말은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란 뜻이다.
태백이란 태백산 즉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란 뜻이다.
태백의 역사가 왜 빠졌는가 하면 조선왕조가 이를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왕조는 명나라와의 외교적 문제를 고려하여 단군 이전의 역사를 금지했던 것이다.
상고사는 금지된 역사요 국시國是에 위반되는 역사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책의 소장자를 죽이겠다고까지 으름장을 놓았겠는가.
『태백일사』를 소중하게 간직하여 후세에 전한 분이 바로 이맥의 후손인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였다.
이기 선생은 한말의 애국지사로 이름난 분이었고,
『환단고기』를 통해 우리 나라 상고사를 밝혀 준 숨은 민족사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호가 일십당一十堂이요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李의 현손(고손자)
연산군이 몰락하고 난 뒤 중종이 즉위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찬수관纂修官으로 재등용
이맥이 내각의 비서를 읽고 『태백일사』를 지은 것은 중종(1506~1544) 초의 일이었다.
세조(1455~1468)가 모든 상고사 기록 즉 『고기』를 거두어들이라는 명(收書令)을 내린 지 불과 50년 뒤의 일이었다.
이맥은 목숨을 걸어놓고 태백일사를 쓴 것입니다.
때는 갑자년(연산군 10년 1506). 내가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적소謫所에서 근신하고 있으니 너무 무료하여
집에 간직해 두었던 사전史典들과 노고들에게 들은 이야기, 그리고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16년 만인
경진년(중종 15년 1520)에 찬수관纂修官으로 있을 때 내각에 소장된 비밀스런 책들을 읽고
이들을 모두 합해서 책을 엮었는데 이름하여 「태백일사」라 한다.
(『태백일사』 발문跋文)
오늘 주제가 대변설(大辯設) 조대기 대변경인데
세조의 역사서 수거령은 왜 내려졌나?
『조선왕조실록』 세조3년(1457)
5월 26일(무자) 3번째 기사
• 팔도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
(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表訓)』,
『삼성밀기(三聖密記)』,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중략)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그래요 세종대왕 때 세종대왕의 스승이신 이맥의 증조부가 말입니다.
소격서에 제사를 지내는 관리로 재직했거든요.
세종이나 성종이나 할아버지 증손자간에 끈끈하게 조상을 잘 모시려는 충정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조 때 그러니까 문종 단종 세조입니다.
수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수서령은 일단 소격서 폐지의 시작 점이 되는 것입니다.
조선은 신하들이 세운 나라이고 신하들이 왕권을 견제하며 이건 유교를 받들고 공자를 시조로 모시기 때문에
단국천황은 아예 머리속에 없는 것입니다.
그마저도 일연 때문에 단국 천황이 단군으로 격하되어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 말 조선초의 상황을 보면
민심이 흉흉할 수록 소위 미신이라고 하는 산천제신 도교 무교 신앙이 속속들이 행해져서 왕권이 흔들릴 정도였으며
그것도 궁중에서 왕비까지 궁녀들도 유교 보다는 도교적 무속 신앙에 몰래 퍼다주고 신봉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왕의 입장에서 보면 신하보기도 민망하고
그래도 세종대왕은 너그나그캐라 라면서 신하 눈치 안보고 신미대사하고 친하게 지내고 그랬습니다.
소격서폐지 라는 말을 계속 묵살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상황의 조선 초기는 유교를 신봉하는 신하 유생들이 불교 무속 도교를 억압하려고
줄줄히 서서 오만가지 수단을 동원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정책적 분위기에서 세조는 명나라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고
또 신하들에게도 입닥치게 할 필요가 있기 깨문에 수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 아들 예종 대에서도 수서령이 내려집니다.
예종실록의 2차 수서령
• 傳于禮曹曰: “《周南逸士記》、《志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ㆍ《玉居仁》ㆍ《薛業三人記》一百餘卷, 《壼中錄》、《地華錄》、《明鏡數》, 及凡干天文、地理、
陰陽諸書家藏者, 京中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超二階,
自願受賞者及公私賤口, 賞綿布五十匹, 隱匿不納者, 許人陳告, 告者依上項論賞, 匿者處斬。 其速諭中外。
금서 목록의 공통점과 정치적 이유
• 1. 사대모화 역사관과 충돌하는 자주적인 상고 역사서(태종의 싞지비사 붂서 사건)
• 2. 선가(도가) 계열의 서적으로서 유학과의 사상적 충돌
• * 단종 폐위와 사육싞 처형 후 정통성 위기에서 명의 인정을 받기 위한 사대모화로의 경도 연출과 유불선 합일에서
유학 중심의 국가이념 재편과 유림 위주 신분질서 강화
사라진 상고사서를 비밀리에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와 고성이씨 문중
이게 말입니다.
저번 시간에 말했던 율려는 천지 본음과 관계가 있어요,
훈민정음이 삼신오제본기의 영향을 받아서 창제 되었으니까요.
정말로 훈민정음은 율려의 부활이었습니다.
저번 시간 강의를 못보신분은 율려로 검색해서 꼭 보세요 ,
오늘 강의와 연관 있습니다.
아직 삭제 안 됐으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빼먹지 말고 부지런히 봐야해요.
조선 초기까지 궁중 태일칠성신앙 소격전昭格殿)에 대해서 검색
■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8월 29일
• 태일전(太一殿)을 파하여 소격전(昭格殿)에 합하였다.
• ■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5월 13일
• 북두초례(北斗醮禮)를 소격전(昭格殿)에 베풀고, 3일 동안 재계(齋戒)하였다.
• ■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 9월 28일
• 동지총제(同知摠制) 이숙묘(李叔畝)를 시켜 시령 조화 태일초(時令調和太一醮)를 소격전(昭格殿)에서 거행하게 하였다.
• ■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4월 26일
• 소격전(昭格殿) 태일신(太一神)에게 기우제를 지냈다.
• ■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6월 1일
•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를 소격전(昭格殿)에 가서 북두칠성에 초제(醮祭)하고, 저녁에 소경 중[盲僧] 7인을 불러 모아 삼십품 도량(三十品道場)을 낙찬정 안뜰에 배설하고, 임금이 수라도 진어하지 아니하고 침소에도 들지 아니하며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였다.
실록의 환단사서 핵심어 소격전과 태일의 용어 데이터 빈도수조사 결과 태종, 세종과 중종 때 관심이 가장 많음
소격전 텍스트 데이터 빈도수: 태조 (13), 정종 (1), 태종 (40),세종 (71), 문종 (3), 단종 (3), 세조 (22), 예종 (4), 성종 (45), 연산군(18), 중종 (203), 인종 (1),명종 (16), 선조 (6), 인조 (4), 효종 (3), 현종 개수 (3), 숙종 (2), 정조 (1)
키워드 太一빈도수: 태조 (5), 태종 (15), 세종(27), 문종 (4), 단종 (2), 세조 (5),성종 (15),연산군(4), 중종(24), 명종 (4),
인조 (2), 현종 (1), 정조 (3), 숚조 (2), 고종 (1)
중종 때 유림들과 소격서 논쟁
중종실록 13권, 중종 6년 5월 12일 “지금의 소격서(昭格署)가 바로 이것과 같은데,
사전(祀典)으로 보면 소격서는 바로 성신(星辰)을 제사드리는 것이니, 천자라야 하늘에 제사드리고
제후는 산천에만 제사드립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제사드리는 일은 자못 예에 합당한 것이 아니니, 혁파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중종은 고집스럽게 소격서를 지키려 하였는데 중종 때 이맥이 찬수관이 되어 비밀리에 태백일사를 쓴 것과
신하들이 이맥의 탄핵을 요구한 것은 중종+이맥 vs 모화유림 간의 이념갈등 구도의 과정일 수 있다
중종 때 이맥이 찬수관이 되어 비밀리에 태백일사를 쓴 것이 들통 났다는 말은 없는데
어째거나 이맥이 궁지에 몰리고 중종이 방어합니다.
실록 텍스트분석 결과 중종의 이맥 보호/
태백일사 묵인은 태일 칠성사상과 유가의 대립을 배경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 가능
아! 대단한 발견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위엄
• “장령 이사공(李思恭)이 아뢰기를 이맥(李陌)은 공론에도 불합하고 사사로운 은혜를 쓰심이 이와 같으시지만
그 인물이 합당치 못합니다.“
“대간이 이줄·이맥·이공우 등의 일을 논하고, 두 번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맥(李陌)·이위(李偉)·강태수·문계창과 소격서의 일을 아뢰고, 간원이 홍경주·심의 등의 일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대간이 정난 공신 및 노영손(盧永孫)·상산군(常山君)의 가자 및 이맥(李陌) 등의 일을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소격서는 조종조(祖宗朝)에서 관아로 둔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좌도(이단)는 허탄(虛誕)하여 불씨(佛氏)와 다름이 없으므로 도가(道家)의 일을 역대에 더러는 숭상하고
더러는 숭상하지 않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관아까지 두어 허비하는 비용이 또한 너무 많습니다.
이때에 있어 혁파함이 옳습니다.”
• 좌도(유가, 불교가 아닌 고유 우주론)와 이맥이 연루된 기록이 발견됨
여기까지보면 소격서와 유교 분쟁이 심화되면서 자연히 왕은 신하의 눈치를 보면서
또 명나라의 코치까지 가미해서 수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조선초는 바로 유교화 되가는 과정에서 고려의 상무정신이 퇴락해가는 ㄱ
중종 때 이맥의 태백일사 목록
태백일사가 당시 정리 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탄압의 결과 였단 역설
902-1
강화도 大始殿 의 행촌 이암 영정
902-2
이래도 조선이 대륙에서 일제시대까지 있었단 말이 나옵니끼
단군세기의 저자 이암의 손자 이원은 세종의 스승이자 우의정/좌의정
902-3
궁중 선가제사에 이원이 자주 등장
이원은 이맥의 할아버지입니다.
피가 다릅니다.
그 후손들은 대대로 환민족사를 지켜왔습니다.
환단고기도 그 후손의 손에서 만들어집니다.
해학이기
■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5월 21일
• 좌승지(左承旨) 이원(李原)을 보내어 금성 양초(金星禳醮)를 신도(新都)의 소격전(昭格殿)에서 행하였다.
• ■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6월 8일
• 이조 판서 맹사성에게 명하여 소격전(昭格殿)에 비를 빌고, 검교 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 최덕의(崔德義)로
석척 기우(蜥蜴祈雨)를 경복궁 경회루 못가에서 지내게 하고, 우의정 이원으로 원구(圓丘) 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 ■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4월 29일
•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을 종묘(宗廟)에 보내어 기도드리고, 좌의정 이원(李原)을 소격전(昭格殿)에 보내어
기도드리게 하였다.
• ■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7월 15일
• 좌의정 이원이 아뢰기를, 제사하는 도(道)는 정결하게 하고 정성을 다하면 복을 받게 되고,
그렇지 아니하면 신이 흠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화(禍)가 또한 따르는 것입니다.
어찌 외방에다가 사당을 설치하여 제사하게 한 것입니까.
하물며 별에게 제하는 장소로서 소격전이 있지 않습니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