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 (揆園史話)
요약 1675년(숙종 2) 북애노인(北崖老人)이라는 호를 가진 이가 쓴 역사책.
규원사화
1675년(숙종 2) 북애노인이라는 호를 가진 이가 쓴 역사책.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내용
서문·조판기(肇判記)·태시기(太始記)·단군기(檀君記)·만설(漫說)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이라는 책 이름은 작자가 부아악(負兒岳:지금의 북한산) 기슭에 지은 자신의 서재 이름에서 딴 것이다.
작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쓴 동기가, 과거시험에 낙방한 자신의 울적한 심기를 달래려는 것과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의 민족적 울분 속에서 씩씩한 국사(國史)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에 여러 사서(史書)가 출간되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었지만, 작자는 유학자들의 사관은 주체성 없는 존화사대사상에 젖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유학자들이 외면해 온 고기(古記)들을 참고하여 우리 나라 상고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작자가 참고한 책은 고려 말의 이명(李茗)이 지은 ≪진역유기 震域遺記≫인데, 이 책은 고려 초 발해의 유민이 쓴 ≪조대기 朝代記≫를 토대로 한 것으로 ≪삼국유사≫보다 훨씬 씩씩하게 쓰여진 사서이다.
≪조대기≫가 실재했던 고기임이 ≪세조실록≫을 통해서 확인되므로, ≪진역유기≫라는 책도 실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의 <조판기>와 <태시기>에서는 환인(桓因)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이 천지를 개창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 일명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즉, 환웅은 신교(神敎)를 선포하고 치우씨(蚩尤氏)·고시씨(高矢氏)·신지씨(神誌氏)·주인씨(朱因氏) 등, 신하의 보필을 받아 366가지 일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특히, 치우씨는 병기를 제조하고, 고시씨는 농업과 목축을 주관했으며, 신지씨는 문자를 발명하고, 주인씨는 혼인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복희씨(伏羲氏)는 팔괘를 만들어 음양과 역학(易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단군기>에서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에 이르는 47대의 왕명과 재위기간, 그리고 각 왕대의 치적이 서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적이 많은 것은 환검이다. 그는 환웅의 아들로서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에 박달나라 임금이 되어 수도를 길림(吉林)에 두었으며, 9개의 대국과 12개의 소국을 거느려 그 영토는 멀리 요서(遼西)지방에까지 미쳤다.
이 시기에는 문화도 더욱 발전하여 8가(八加)의 관료를 두고, 제천(祭天)을 시작했으며, 8조의 가르침을 지어 백성을 교화하였다. 2대 임금 부루(夫婁)는 큰 홍수를 다스리고 도산(塗山)에서 하(夏)의 우(禹)임금과 만나 화해했으며, 환인·환웅·환검을 제사하여 비로소 삼신(三神)에 대한 제사가 확립되었다.
부루는 또한 중국의 순(舜)임금이 차지하고 있던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고,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여 옥저·비류·졸본을 거느리게 되었다. 부루 이후의 임금들은 그 치적이 간단히 처리되어 있는데, 47대 임금 고열가에 이르러 제후가 난립하면서 열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으로 <단군기>는 끝난다.
마지막으로 <만설>에서는 우리 나라가 만주를 잃어버린 뒤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개탄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첫째는 지리(地利)로써 잃어버린 만주땅을 되찾는 것이고, 둘째는 인화(人和)로써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성(保性)으로써 우리 풍토에 맞는 고유문화의 장점을 지니면서 남의 장점도 받아들이는 일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고유문화는 바로 단군시대부터 내려오는 신교(神敎)이며, 주자학은 사대사상의 근원으로서 철저하게 매도된다.
이 책은 결국 민족고유신앙인 신교의 입장에서 쓰여진 일종의 종교사화(宗敎史話)인데, 엄밀한 문헌고증의 토대 위에서 구성된 역사책이 아니라, 주로 전승되어 온 민속자료에 의거해서 엮어진 것이다.
따라서, 상고사의 역사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기보다는 한국문화의 저류를 이루어 온 민속적 역사인식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 역사의 창세기와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은 고기라고 통칭되어 온 국내측 자료밖에 없다.
중국인들은 기자 이후의 역사만 적었을 뿐이다.
고기는 처음에는 삼신(환인·환웅·단군)에 관한 전설만 적었으나, 시대로 내려오면서 삼신 이후의 역사를 첨가해 놓았다.
예를 들어 조선 세조 때 권람(權覽)이 지은 ≪응제시주 應製詩註≫에서는 단군의 아들 부루가 도산에서 하우(夏禹)와 만났다는 이야기가 첨가되고, 18세기 초 홍만종(洪萬宗)의 ≪동국역대총목≫에서는 단군이 백성들에게 편발(編髮)과 개수(蓋首)를 가르치고 군신·남녀·의복의 제도를 정했으며, 단군이 팽오(澎吳)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을 다스렸다고 썼다.
그러나 대체로 유학자들의 역사책에서는 부루 다음의 왕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단군시대 47대 왕명을 나열하고, 나아가 동이(東夷)라고 총칭되었던 동방의 여러 종족들을 단군조선의 주민인 배달민족으로 간주하여, 단군조선의 역사를 웅대한 대제국으로 재구성한 것은 대체로 한말의 대종교(大倧敎) 성립 이후부터이다.
≪단기고사 檀奇古史≫와 ≪환단고기 桓檀古記≫는 대종교인들이 쓴 대표적 사서로서, 전자는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지은 것이고, 후자는 역대의 고기들을 모은 것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실은 한말·민족항일기의 대종교인들이 창작해서 넣은 대목이 적지 않다.
특히, 단군 47대의 왕명은 ≪규원사화≫의 기사를 그대로 전재하고 있어서, 이 책이 대종교의 역사관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규원사화≫나 그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대종교인의 사서들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여 서술하였으므로, 이를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동이족을 모두 배달겨레로 해석한 것은 여진족·거란족·몽고족 등 북방민족까지도 한민족으로 오인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단군조선이 기원전 24세기에 이미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는 것도 문헌자료는 물론이요 고고학자료에 의해서도 아직 증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책들이 조선 후기와 한말에 유행했다는 것은 그 나름의 사상사적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사상사의 흐름 속에 유학자들의 역사의식에 대항하면서 그들에게 지속적인 자극을 주는 민족고유의 사상적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상의 근간이 되는 단군민족주의가 민족항일기에는 독립운동의 거점 마련에 커다란 구심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1.《규원사화》현존 판본
1) 원본 1종
북애노인의 親筆本으로 알려진《규원사화》는 국립중앙도서관 측이 1945년 말부터 1946년 1월 사이에 서울 시내의 한 서점에서 김수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현금 100원에 사들인 것이다. 그 후 1972년 11월 3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등이 참가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조선조 숙종 1년(乙卯, 서기 1675년)에 제작된 진본으로서의 가치성이 인정되어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되었다.(고평석, <한배달> 6호, 1989년.)
校勘記
국립중앙도서관소장본(貴629, 古2105-1)은 1990년에 한뿌리 출판사에 의해 그 원전이 처음으로 영인 출판되었고, 그 책자를 기준하여 책 제목을 제1쪽, 그리고 序의 시작 부분을 제3쪽으로 산정하였을 때, 총 143쪽 26,828자(제 45쪽 闕二字 포함, 제목 제외)이다. 이 판본을 편의상 「한영본」이라 부른다.
① 소장장소: 국립중앙도서관
② 도서열람번호: 貴629(古2105-1) 1책
③ 크기: 가로(16.6㎝) x 세로(24.7㎝)
④ 국립중앙도서관 등록일자: 1946년 5월 25일
2) 필사본 계열 6종
현재 전하는《규원사화》필사본은 서기 1940년(단기 4273년, 昭和 15년) 9월에 梁柱東이 비장하고 있던 소장본을 孫晋泰가 3본을 필사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광복 후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각각 1부씩 기증하여 소장하고 있던 중, 고려대학교본은 서기 1976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발간한 사실이 있고, 서울대학교본은 그 후 없어졌다가 方鍾鉉이 소장하고 있던 소장본을 다시 등사하여 동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그밖에 언제 어디에서 누가 필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權相老 소장본을 필사하여 동국대학교에, 李瑄根 소장본을 등사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각각 소장하고 있고, 또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마이크로 필름본 1개를 역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등 도합 6종이 현존하고 있다. 이 6종의 필사본을 비교 대조하여 보면 동국대학교본에서는 '啓發'을 '啓達'로, 고려대학교본에는 '壬儉'을 '王儉' 등으로 잘못 필사한 흔적이 간혹 발견될 수 있을 뿐 그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이상시,《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p.248, 고려원 1990년.)
필사본 가운데 양주동 소장본을 손진태가 필사하여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기증하여 소장된 판본 가운데 하나가 서희건 著 고려원 발간의《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제2권의 부록으로 영인 수록되어 있으며, 책 제목을 제1쪽, 序의 시작 부분을 제3쪽으로 산정하였을 때, 총 148쪽 26,357자(제목 제외)이다. 이 판본을 편의상 「손필본」이라 부른다.
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1) - 도서열람번호 2121.3 1책
②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2) - 도서열람번호 2105.1 1책
③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3) - 마이크로 필름본
④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 權相老 소장본을 필사한 것
⑤ 서울대학교 도사관 소장본 - 方鍾鉉 소장본을 등사한 것
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 소장본 - 李瑄根 소장본을 등사한 것.
2.《규원사화》번역 주해서 출판 현황
1) 申學均 번역 주해본
① 저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貴629《규원사화》
② 번역주해: 신학균
③ 출판: 단기 4301년(서기 1968년) 3월, 大東文化社
④ 역자소개: 본적은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성산리, 1967년 4월부터 1973년 4월까지 국립중앙도서관 사서과장 역임.
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번역주해본 열람번호: 2105-81-0.2
2) 高東永 번역 주해본
① 저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貴629《규원사화》외
② 번역주해: 고동영
③ 출판: 1986년 도서출판 자유문고에 의해 초판 발행, 이후 한뿌리 출판사에 의해 96년 현재 3판까지 발행.
④역자소개:《송천가》.《부싯돌》.《단군조선 47대사》.《한국상고무예사》등의 저서와《단기고사》.《신단민사》등의 번역서가 있다.
3. 한영본의 북애노인 친필 여부에 관한 고찰
한영본의 원문은 총 26,828자이며 손필본은 총 26,357자로서, 두 판본간에 471자의 차이가 있다. 이 가운데 손필본에는 있으나 한영본에는 없는 글자가 衍字를 포함하여 모두 27자인데, 일부 글자는 원본에 없던 것이 필사본으로 옮겨지며 필사자에 의해 내용이 보충되면서 첨가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여겨지는 내용이 보인다. 먼저 태시기의 말미의 해당 문장을 판본별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영본] 乃城於탁鹿, 宅於淮岱. □□□□ □□□□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손필본] 乃城於탁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즉, 손필본의 '遷徙往來 號令天下' 8자가 한영본에는 빠져있다. 필사본에 있는 문구가 정작 원본에 없을 수는 없으며, 더욱이 손필본은 한영본과 비교해 보아도 무려 500여 자를 빼먹는 등 필사할 때 다소 소홀한 흔적이 역력한데, 한 두 글자의 助詞도 아닌 본문 8자를 보충하여 첨가하였을 리가 없다. 문맥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宅於淮岱'에서 문장이 일단락됨에 무리가 없는데, 그 부분이 조심성 없는 필사자의 눈에 띄어서 없던 내용이 8자나 보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영본을 친필 원본으로 가정한 뒤, 그 후에 내용이 보충된 원본의 재판본이 나왔으며, 손필본은 그 재판본을 저본으로하여 필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한영본 자체가 필사된 판본일 것이라는 여러 흔적으로 인해 더욱 희박해진다.
한영본과 손필본을 상호 교감하여 볼 때, 비록 손필본의 것을 버리고 한영본의 것을 취할 수 있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무려 30곳 정도가 된다. 물론 교감의 내용에 따라 그 숫자에 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영본의 것을 버리고 손필본의 것을 취할 경우가 대부분 문맥의 내용상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글자의 순서가 바뀌는, 즉 필사자들이 필사하며 흔히 행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한영본] 古有淸平山人 李茗高者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X)
[손필본] 古有淸平山人 李茗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O)
[한영본]《史記》.《漢書》通及典, 皆有王險城字, (X)
[손필본]《史記》.《漢書》及《通典》, 皆有王險城字, (O)
[한영본]《北史·勿吉傳》曰亦: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 (X)
[손필본]《北史·勿吉傳》亦曰: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 (O)
[한영본] 然則, 神市氏降, 旣在白頭於山, (X)
[손필본] 然則, 神市氏降, 旣在於白頭山, (O)
[한영본]《孟子》舜曰生諸馮, 東夷之人也.」 (X)
[손필본]《孟子》曰: 「舜生諸馮, 東夷之人也.」 (O)
[한영본] 則猶有一分迂소之責八聖矣之名, 必表以佛家名字, (X)
[손필본] 則猶有一分迂소之責矣. 八聖之名, 必表以佛家名字, (O)
[한영본] 夫南方之濕熱, 北方燥寒之, (X)
[손필본] 夫南方之濕熱, 北方之燥寒, (O)
[한영본] 立業垂憲未嘗有差, 末流而之弊猶然如此. (X)
[손필본] 立業垂憲未嘗有差, 而末流之弊猶然如此. (O)
[한영본]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政而敎始成, (X)
[손필본]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而政敎始成, (O)
주로 助詞의 순서가 바뀐 이러한 실수는 전체적인 내용을 머리에 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행해진 실수로 보기는 힘들다. 그 가운데 한영본에서 「史記漢書通及典」의 '書'와 '通' 사이 및 「孟子舜曰生諸馮」의 '子'와 '舜' 사이 등, 글자의 순서가 바뀐 것으로 여겨지는 문장마다 붓으로 그린 작은 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옮겨 적다가글자가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듯 하니, 즉 '及'자는 '書'와 '通' 사이에 와야하며, '曰'자는 '子'와 '舜' 사이에 와야함을 표시한 듯하다.또한 한영본의 원문은 줄이 쳐진 빈책(空冊)에 붓으로 직접 쓴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전체에서 16자 정도가 이미 쓰여진 글자 사이에 덧붙여 적어넣은 작은 글자이다. 그 가운데 몇몇 助詞는 글을 적다가 흘렸기에 다시 적었다고 볼 수 있지만, '閉'·'里'·'惑'·'侯' 등의 글자는 문맥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글자들로서 내용을 재검토하며 보충하여 넣은 조사와는 성격이 틀리는 글자들이다.
[閉] 宇宙大塊, 冥閉已久, 混元之氣, 包蘊停축
[里] 上有九萬里者
[惑] 妙淸, 發身於沙門, 蠱惑其世主
[侯] 藍侯儉達, 與靑丘侯?句麗侯?루진侯, 率兵伐殷, 遂深入其地
그리고 군데군데 틀렸다고 생각되어(실제로 몇 군데는 교감상 틀린 곳으로 밝혀졌다) 일정한 표시를 한 부분 가운데 「人事則軀殼」의 '事'(교감상 '死'의 오자이다)는 글자 전체를 붓으로 둥글게 덧칠하여 글자가 틀렸음을, 즉 잘못 옮겨 적었음을 나타낸 듯하다. 글자를 옮겨 적는 필사자의 입장이 아닌, 내용을 옮겨적는 저자의 입장이라면 문맥의 내용상 '人死'가 분명한 곳에서 '人事'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이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 원본이 아님과 더불어, 손필본 계열 필사본의 저본이 된 양주동 소장본은 한영본이 아닌 제3의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필사되거나 인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영본에 없는 글자를 손필본에서 모두 27자를 적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한영본에서 순서를 바꿔 쓴 것이 손필본에는 바르게 되어 있으며, 또한 몇몇 글자는 문맥의 내용에 있어 오히려 손필본이 한영본의 내용상 결점을 보완해 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한영본: 敎]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敎特盛, 自能聞風驚奇. (X)
[손필본: 交]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交特盛, 自能聞風驚奇. (O)
[한영본: 事] 人事則軀殼厥冷, 骨肉梗固 (X)
[손필본: 死] 人死則軀殼厥冷, 骨肉梗固 (O)
[한영본: 民] 曾無一人, 民於南方而制天下者 (X)
[손필본: 起] 曾無一人, 起於南方而制天下者 (O)
이와 같은 내용으로 살펴볼 때, 비록 한영본이 그 紙質 등으로 보아서 조선 중기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북애노인이 직접 쓴 친필 원본이거나 또는 양주동 소장본의 필사저본이 된 판본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규원사화》는 한뿌리사의 한영본 영인 발문에서 밝혔듯이, 서지학자이자 국립도서관에서 고서를 전문으로 다루고 있는 장지연씨가 종이의 질과 글씨 및 제호를 표지에 바로 쓴것 등으로 미루어 한영본은 조선 중기에 쓰여진 것임이 틀림없음을 확인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서지학 측면에서 한영본의 작성 연대를 추증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서지학상의 검토에 의해 한영본이 조선 중기에 쓰여졌을 것이라는 결과만을 가지고 이 판본이 바로 저자인 북애노인이 직접 쓴 친필본일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단지 추측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하나의 책이 眞書냐 혹은 僞書냐를 판단하거나원본 여부 등을 가늠함에 있어서 어느 한 측면, 즉 문헌학이나 문자학 또는 서지학 등의 여러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그 판단 기준으로 삼아 결과를 논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며, 이와 더불어 어느 한 측면의 연구성과만을 가지고 전체의 결과를 논하거나 관련성이 없는 여타 분야의 결과까지 추론하는 것 역시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 한영본의 친필본 여부를 검토함에 있어서는 한영본과 손필본의 두 판본만을 문자 교감의 방법을 통해 異字와 有無字 및 脫誤字를 비교하여 먼저 교감표를 작성하고, 그 교감표를 바탕으로 내용을 검토하여 보는 단순한 방식을 택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얻어지는 결과는《규원사화》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논거 가운데에서도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본인지 여부의 판단에 대한 참고 자료라는 아주 제한된 분야에 참고될 수 있는 자료가 될 뿐이다. 본문에서는 몇몇 내용을 지적하며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본이 아니라 친필 원본이나 또는 그 후의 원본을 필사한 또 다른 필사본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결과가 한영본이 조선 중기에 쓰여진 것이 아닐 것이라든가, 혹은《규원사화》자체가 조선 말기에 위작된 위서일 것이라는 논거로 말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서지학상으로 한영본이 紙質 등의 상태를 보아 조선 중기에 쓰여진 것임이 분명하다는 가정 아래 북애노인의 친필본이 아님을 확인하는 본 교감의 결과가 결합된다면《규원사화》의 원 저작 연대가 적어도 한영본의 紙質로서 확인되는 연대보다는 오래되었음이 확인될 수 있으며, 아울러 한영본은 원본의 저작 이후에 손필본 계열과는 다른 시기에 쓰여진 또 다른 필사본임이 인정되어 다양한 필사 판본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 되므로,《규원사화》자체가 僞書가 아닌 眞書일 가능성을 높여 주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한영본의 발견으로《규원사화》가 조선 말기에 단순히 위작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에는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할지라도, 더 나아가 정확한 저작 연도에 대해서는 문헌 및 문자 측면의 고증을 통하여 보다 엄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며, 그러한 종합적인 고증에 의해 정확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규원사화》를 僞書나 改撰書 혹은 眞書일 것이라는 어느 하나의 단정은 금물로 여겨진다.
----------------------------------------------------
揆園史話 序
北崖子旣應擧而不第, 乃위然投筆, 放浪[於]江湖, 凡數三歲, 足跡殆遍於제域, 而深有蹈海之悲. 時經兩亂之後, 州里蕭然, 國論沸鬱, 朝士간食, 野氓懷온. 於是北崖子, 南自金州. 月城, 歷泗비?熊川, 復自漢山入峽而踏濊貊舊都之地; 北登金剛之毘盧峰, 俯看萬二千峯簇擁초列. 乃望東海出日而泣下, 眺萬丈瀉瀑而心悲, 慨然有出塵之想. 更西遊至九月山, 低徊於唐莊坪, 感淚於三聖祠. 及自平壤到龍灣, 登統軍亭, 北望遼野, 遼樹계雲, 點綴徘徊於指顧之間, 若越一葦鴨江之水, 則已更非我土矣. 噫! 我先祖舊疆, 入于敵國者已千年, 而今害毒 日甚, 乃懷古悲今, 咨(差) [嗟]不已. 後還至平壤, 適自 朝家有建乙支文德祠之擧, 卽高句麗大臣, 殲隋軍百餘萬於薩水者也. 經月餘, 至松京, 始聞荊妻之訃, 急遽還歸居家, 益復寂寞. 是, 구揆園書屋於舊居之南?負兒岳之陽, 聚諸家書, 廣采其說, 意欲以此終餘生焉
북애자는 이미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니, 이에 탄식하며 붓을 던지고 강호를 떠돈지 무릇 삼년에, 발길은 이 나라 구석까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때로는 바다에 이 발길을 내어 맡길까 하는 슬픔에 젖기도 하였다. 때는 두 난리를 겪은 뒤라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국론은 끓어 올라 조정과 선비들은 끼니를 거를 만큼 경황이 없으며, 뭇 백성들은 가슴에 그저 분노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북애자는 남쪽의 금주(金州김해)와 월성(月城경주)으로부터 사비(泗비부여)와 웅천(熊川공주)을 거치고, 다시 한산(漢山)에서 골짜기로 접어들어 예맥1)의 옛 도읍을 밟았으며, 북쪽으로 금강산의 비로봉에 올라서서 빽빽이 들어차 가파르게 늘어서 있는 일만 이천의 봉우리를 굽어보았다.2)
이에 동해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니 눈물이 절로 흐르고, 만길 높이로 떨어지는 폭포를 쳐다보니 마음은 슬픔에 잠기는데, 그 복받친 마음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다시 서쪽으로 노닐며 구월산에 이르러 고개를 늘이고 당장평(唐莊坪)을 돌아다니자니 삼성사(三聖祠)3)에선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양으로부터 용만(龍灣)4)에 이르고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북녘으로 요동의 들판을 바라보니, 요동(遼東) 벌판의 나무와 계주(계州) 하늘의 구름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노닐고 있는데, 작은 거룻배로 압록의 물길을 건너고자 하나 이미 갈마들어 우리의 땅이 아니구나. 슬프다! 우리 선조들의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지 이미 천여 년에 이제 그 해독이 날로 깊어져 가니, 옛날을 그리워하며 지금을 슬퍼함에 그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구나. 그 뒤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 이르니 마침 조정에서 을지문덕의 사당을 짓는다는데, 곧 고구려의 대신으로서 살수(薩水)에서 수(隋)나라 군사 백여 만 명을 무찌른 분이다.
한달 남짓 지나 송경(松京)에 이르러 비로소 아내의 부음을 듣고 빨리 집으로 돌아 왔으나 더욱 적막할 따름이라, 이에 옛집의 남쪽이며 부아악(負兒岳)의 양지 바른 곳에 규원서옥(揆園書屋)을 짓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을 모아 그 학설을 널리 연구하는 것으로 삶을 마치고자 하는 마음이다.
夫以力服人者, 力窮而人叛; 以財用人者, 財竭而人去. 力與財, 余旣不能有焉, 而亦不曾冀求. 觀乎! 荒凉北邙坂下, 曾何力與財之有乎! 且名者(포) [實]之賓也, 余將慕名而爲賓乎! 名亦不足願. 昔者勿稽子有言, 曰: 「天識人心, 地知人行, 日月照人意, 神鬼鑑人爲.」 夫! 人之善惡正邪, 必爲天地神鬼之所照臨監識, 則斯已矣. 寧向 촉루人世, 汲汲然競寸銖之名利哉! 余決不爲. 惟存性養志, 修道立功, 以遺效於來世後孫, 則雖終世無知者, 亦可無온, 或萬世之後而一遇知其解者, 是旦暮遇之也. 觀夫閃忽千年往事, 曾復何向촉루人世, 爭寵辱於石火光中耶!
무릇 힘으로 남을 따르게 하고자 하는 이는 그 힘이 다하면 사람들로부터 배반을 당할 것이며, 재물로써 남을 부리고자 하는 이는 그 재물이 다하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 권력과 재물은 이미 내가 가지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일찍이 바라거나 찾은 적도 없다. 보라! 황량한 북망의 산비탈 아래 어찌 권력이나 재물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명예란 것은 참된 것의 손님과도 같은데, 내가 명예를 그리다가 도리어 손님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인가! 명예란 것 역시 내가 넉넉히 바랄 것이 되지 못한다.
예전에 물계자(勿稽子)5)가 말하기를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땅은 사람의 행실을 알며, 해와 달은 사람의 뜻을 내려 비춰보고, 귀신은 사람의 행위를 내어다 본다」 하였으니, 무릇 사람의 선하고 악함과 바르고 사악함의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천지신귀(天地神鬼)가 내려 비춰보고 살펴 아는 것이 곧 그와 같을 따름이다. 어차피 백골 쪽으로 가는 삶에서 어찌 그리도 한푼어치의 명리를 가지고 다투는 데 바쁠 것인가! 나는 결단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타고난 성품을 간직하여 뜻을 기르고, 올바른 수행의 길을 닦아 공을 세움으로써 다음 세대의 후손들에게 본보기로 남고자 하는 것이니, 비록 세상이 다하도록 알아주는 이가 없다 할지라도 성냄이 없을 것이나, 행여나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 변명을 아는 이를 마주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절박하게 바라는 것일 뿐이다. 무릇 섬광과도 같은 천년의 지난 일들을 바라보며, 한낱 백골 쪽으로 가는 부싯돌의 불빛과도 같은 삶에서 어찌 또 다시 명예와 치욕을 다투겠는가!
余嘗論之, 朝鮮之患, 莫大於無國史. 夫《春秋》作而名分正,《綱(耳)
[目]》成而正閏別,《春秋》.《綱目》者, 漢士之賴以立者也. 我邦經史, 屢經兵火, 散亡殆盡. 後世孤陋者, 流溺於漢籍, 徒以事大尊周爲義, 而不知先立其本, 以光我國, 是猶藤葛之性, 不謀其直而便求纏絡也, 豈不鄙哉! 自勝朝, 以降貢使北行累百年而不爲之恨, 猝以滿洲之수爲不俱戴天, 則獨何故耶. 噫! 雖然, 若天加선寧廟十年之壽, 則卽可陳兵於遼.瀋, 馳艦於登.萊, 縱敗뉵旋至而亦不失爲近世之快事也. 乃天不假만聖壽而終無其事, 幸耶? 不幸耶? 余則悽切而已矣.
내가 일찍이 늘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의 근심 가운데 나라의 역사가 없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무릇《춘추(春秋)》가 쓰이자 명분이 바로 서게 되고,《강목(綱目)》이 이뤄지니 바른 계통과 가외의 계통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나,《춘추》나《강목》같은 것은 한(漢)나라 선비들이 그들대로의 사상으로 간추린 생각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사서는 여러 병화를 거치며 흩어져 거의 없어졌다.6)
뒷날에 고루한 자들이 한나라 서적에 탐닉하여 헛되이 사대(事大)와 존화(尊華)만을 옳다고 여길 뿐, 먼저 근본을 세우고 이로써 우리나라를 빛낼 줄은 알지 못하니, 마치 칡이나 등나무의 성질이 곧바르게 나아가고자 하지는 않고 도리어 얽히고 비틀어지는 것과도 같음에 어찌 천하다 하지 않겠는가!
고려조(高麗朝)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조공하는 사신이 북쪽을 드나든지 이미 수백 년인데도 한(恨)으로 여기지 않다가, 졸지에 만주의 동류(同類)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김은 유독 어찌 된 까닭인가? 오호라! 비록 그러할지라도 만약 하늘이 효종에게 십년의 천수(天壽)만 더하여 주었더라면, 곧 병사를 요동의 심양으로 진군케 하고 병선을 등주(登州)와 래주(萊州)로 내달리게 하였을 것인데, 설령 패하고 꺾여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또한 근세의 통쾌함은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이 임금의 천수를 빌려주지 않아서 마침내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다행인가 불행인가? 나로서는 그저 처절하게 여길 따름이다.
余嘗有志於述史, 而固無其材, 且名山石室, 渺無珍藏, 以余淸貧匹夫, 亦竟奈何哉! 然何幸, 峽中得淸平所著《震域遺記》中有三國以前故史, 雖約而不詳, 比於巷間所傳區區之說, 尙可吐氣萬丈, 於是復采漢史諸傳之文, 以爲史話, 頗有食肉忘味之槪矣. 雖然, 凡今之人, 孰能有志於斯而同其感者哉!《經》曰: 「朝聞道, 夕死可矣.」 亦惟此而已矣. 若天假我以長壽, 則卽可完成一史, 此不過爲其先驅而已也. 噫! 後世若有, 執此書而歌哭者, 是乃余幽魂無限之喜也. 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 北崖老人, 序于揆園草堂.
내가 일찍이 나라의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으나 본디 그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름 있는 산의 석실에조차 귀하게 비장된 것 하나 없음에, 나와 같이 씻은 듯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서 이 또한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진역유기(震域遺記)》를 얻으니, 그 가운데 삼국 이전의 옛 역사가 있음에 비록 간략하여 상세하지는 않으나 항간에 떠도는 구구한 말들에 비하면 자못 내비치는 기상이 견줄 바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중국의 사서에 전하는 모든 글들을 가려 뽑아 사화(史話)를 지으니, 그 재미로움은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러한 것에 뜻이 있어 이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으리오! 경전에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듣게 되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하였으니, 오직 이를 두고 한 말 같구나. 만약 하늘이 나에게 오랜 수명을 누리게 한다면 하나의 역사를 완성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단지 그 선구(先驅)가 될 뿐이리다. 오호라!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우는 이가 있다면, 이는 곧 나의 유혼(幽魂)이 무한히 기뻐할 바로다. 숙종 2년 을묘년7) 3월 상순 규원초당에서 북애노인이 서문을 쓰다.
==================================================================
肇判記
太古, 陰陽未分, 洪 久閉, 天地混沌, 神鬼愁慘, 日月星辰堆雜無倫, 壤海渾瀜, 生無跡, 宇宙只是黑暗大塊, 水火相 不留刹那; 如是者, 已數百萬年矣. 上界, 却有一大主神, 曰桓因,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 其所居數萬里, 恒時大放光明, 麾下更有無數小神. 桓者, 卽光明也, 象其體也; 因者, 本源也, 萬物之藉以生者也.
肇判記
태고에 음과 양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채 아주 흐릿하게 오랫동안 닫혀 있으니, 하늘과 땅은 혼돈하였고 신과 도깨비들은 근심하고 슬퍼하였으며,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은 난잡하게 쌓여 질서가 없었고 흙과 바다는 뒤섞여 있어 뭇 생명의 자취는 아직 존재하지 않음에, 우주는 단지 커다란 암흑 덩어리일 뿐이고 물과 불은 잠시도 쉬지 않고 서로 움직이는지라, 이와 같은지가 벌써 수백만 년이나 되었다. 하늘에 무릇 한 분의 큰 주신(主神)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환인(桓因)이라 하는데, 전 세계를 통치하는 가없는 지혜와 능력을 지니고서, 그 모습은 나투지 않고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거처하는 곳은 수만 리나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밝은 빛을 크게 내뿜고, 그 아래로는 또한 수많은 작은 신들이 있었다. '환(桓)'이라 함은 밝은 빛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근본 바탕을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인(因)'이라 함은 말미암은 바를 말하는 것이니 곧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음을 나타낸 것이다.
爾時, 一大主神, 乃拱手默想曰: [如今, 宇宙大塊, 冥閉已久, 混元之氣, 包蘊停 , 正要啓生化育; 若不 時開判, 何以成無量功德乎!] 乃召桓雄天王, 授命行剖判之業. 天王奉命辭出, 乃督諸神, 令各自大顯神通, 只看風雲晦冥 深 電光閃 馳繞 雷霆 震擊 得, 玉女失色, 百鬼遁竄. 於是洪 肇判, 天地始分, 虛曠浩茫, 不可端倪. 乃命日月, 輪流相轉, 光麗於天, 照臨於地, 日行爲晝, 月行爲夜, 又命星辰周 蒼穹, 以定四時, 以紀年日.
이때 한 분의 큰 주신이 손을 마주잡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이르기를 [지금과 같이 우주의 큰 덩어리가 어둠으로 닫힌지 이미 오래되어, 천지개벽의 기운이 감싸인 채 머물러 오다가 바야흐로 낳아 길러지기를 바라니, 만약 때가 다하였음에도 세상을 열어서 구분하여 주지 않는다면 어찌 가없는 공덕을 이룰 수가 있으리오] 하고는, 환웅천왕(桓雄天王)을 불러 세상을 가르고 나누는 작업을 명하였다.
천왕은 명을 받들고 물러나와서 여러 신들을 독려하여 각자에게 스스로의 신통력을 크게 발휘하게 하니, 단지 바람과 구름이 어둑어둑한 가운데 검푸른 빛이 깊어지고 번개불이 일어나며 번쩍이는 섬광은 쏜살 같이 치달아 얽혀 드는 것만이 보일 뿐, 우뢰와 천둥소리는 맹호가 울부짖는 소리와 같은지라, 옥녀는 놀라서 낯색을 잃어버렸고 모든 도깨비들은 도망쳐 숨어 버렸다. 그리하여 아주 흐릿하게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하니, 그 나누어진 처음에는 텅하니 비어 있고 휑하니 넓은 것이 아무런 구별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해와 달에게 명하여 바퀴가 굴러가듯이 서로 돌아가며 하늘에서 고운 빛을 발하여 땅에 내려 비추게 하여, 해가 가는 것을 낮으로 삼고 달이 가는 것을 밤으로 삼았으며, 또한 별들로 하여금 창공을 두루 돌게 하여, 이로서 사시(四時)를 정하고 햇수와 날수를 기록하게 하였다.
雖然天地旣分, 日月輪轉, 而地界, 水火未定, 壤海混淪, 停 之氣, 未卽啓發化成矣. 一大主神, 再命桓雄天王大顯法力, 只看大地, 水(涯)[ ]陸現而壤海始定, 火藏水動而萬物滋生. 於是草木托 , 昆蟲 鱗介 飛禽 走獸之屬, 振振生育 繁衍充 於地上三界. 盖自天地始分以來, 又十萬年矣.
그러나 비록 하늘과 땅을 나누고 해와 달을 운행하게 하였으나, 땅에는 물과 불이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고, 흙과 바다는 그 원기가 아직 나뉘지 않은 채 하나로 엉켜 있었으니, 멈추어 쌓여온 기운은 아직 열려 변화하지 못하였다. 한 분의 큰 주신이 다시 환웅천왕에게 명하여 법력을 크게 드러내게 하니, 단지 큰 땅덩이만 보이던 것에서 물이 휘돌아 나가며 뭍이 드러나고 흙과 바다가 비로소 나뉘어져 자리를 잡게 되니, 불의 기운은 잠들고 물의 기운이 움직여 만물이 무성하게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초목은 뿌리를 내리고 곤충과 물고기 및 날짐승과 들짐승 등의 무리들은 무수히 자라나 땅 위의 삼계에 번성하여 가득하였다. 무릇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누어진 이래 또 십만년이 지났다.
一大主神, 更聚衆神曰: [今乘宇宙自然之運會, 已煩汝等出力, 剖判天地, 化生萬物, 功德自固無量. 但天地之間, 宜置萬物之長, 其名曰人, 可與天地 爲三才, 而作萬物之主. 元來天地停 之氣, 散爲萬物, 而靈秀之性 貞明之氣, 則尙鍾毓而不發; 今可啓導靈秀 發放貞明, 而別作人衆, 於 生之中, 自作主宰. 但此事須先有備, 不可造次.] 乃三命桓雄天王. 天王奉令, 依計頒行. 於是桓雄天王大召滿天(皇)[星]宿, 令分管上天諸事, 却令主神麾下無數小神, 一幷降落下界, 主治山岳 河川 洋海 沼澤 丘陵 原野里社之基, 務要謹嚴平正, 不可有誤, 然後采天地靈秀之性 貞明之氣, 造成無數人生.
한 분의 큰 주신이 다시 뭇 신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지금 우주의 자연스러운 기운을 타고 이미 너희들이 번거롭게 힘을 내어 하늘과 땅을 가르고 나누며 만물이 드러나게 하였으니, 그 공덕이 자고로 한량이 없구나. 그렇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마땅히 만물의 어른을 두어야 하기에 그 이름을 '사람'이라 할 것이니, 하늘 그리고 땅과 더불어 삼재(三才)로 삼아 만물의 주인이 되게 하리라. 원래 하늘과 땅의 멈춰 쌓였던 기운을 흩어지게 하여 만물이 되게 하였는데, 신령하고 빼어난 성질과 곧고 밝은 기운은 자못 모아 받았지만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이제 신령하고 빼어남을 이끌어 내고 곧고 밝음을 드러내게 할 수 있게끔 따로 사람의 무리를 만들어서 이들로 하여금 뭇 생명 가운데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마땅히 먼저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며, 절대 미루어서도 안된다] 하며 환웅천왕에게 세번째로 명을 내리니, 천왕은 명을 받들어 계획대로 널리 펴서 행하였다. 이에 환웅천왕은 하늘에 가득찬 별자리를 모두 불러 하늘 위의 모든 일을 나누어 맡게 하고, 주신(主神) 휘하의 무수한 작은 신들에 명령하여 하나같이 모두 하계에 내려가 산악과 하천, 해양과 소택, 구릉과 들판 및 마을들의 바탕되는 일들을 다스리게 하며, 근엄하고 공평하게 하여 잘못이 없도록 한 후에, 하늘과 땅의 신령하고 빼어난 성질과 곧고 밝은 기운을 가려 모아 무수한 사람들을 만들었다.
一大主神, 乃四命桓雄天王曰: [如今, 人物業已造完矣. 君可勿惜厥勞, 率衆人, 自降落下界, 繼天立敎, 爲萬世後生之範.] 乃授之以天符三印曰: [可持此, 敷化於天下.] 桓雄天王, 欣然領命, 持天符三印, 率風伯 雨師 雲師等三千之徒, 下降太白之山 檀木之下. 太白山者, 卽白頭山也. 衆徒推爲君長, 是爲神市氏. 自草木托 禽獸滋生以來, 又十萬年也.
한 분의 큰 주신이 이에 네번째로 환웅천왕에게 명하기를 [이와 같이 사람과 만물을 일으키는 공적을 이미 이루어 완전하게 하였다. 그대는 그 노고를 너무 애석히 생각말고 뭇 사람들을 이끌어 몸소 하계에 내려가서, 하늘을 이어서 가르침을 세움으로서 만세토록 후생의 모범이 되도록 하라] 하고, 천부(天符)의 세가지 인(印)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널리 천하에 교화를 베풀어라] 하였다. 환웅천왕은 흔연히 명을 받들어 천부의 세 가지 인을 지니고서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등 삼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밝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태백산'이라 함은 곧 백두산을 말한다. 뭇 무리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니, 그가 곧 신시씨(神市氏)이다. 초목이 뿌리를 내리고 금수가 무수히 생겨난 이래 또 십만 년이 되었다.
太始紀
神市氏旣爲君長, 以神設敎, 存其彛性, 周護飽養, 聽其繁衍, 天下民物, 於是漸盛.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鳥獸雜處, 人民艱困殊甚, 且猛獸.毒蟲不時衝動, 人民被害不少. 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蚩尤氏, 實爲萬古强勇之(租)
[祖], 有旋乾轉坤之力, 驅使風.雷.雲.霧之能, 又造刀.戟.大弩.巨斧.長槍, 以之而治草木.禽獸.蟲魚之屬. 於是草木開除, 禽獸蟲魚, 僻處深山大澤, 不復爲民生之害矣. 是以, 蚩尤氏世掌兵戎制作之職, 時常鎭國討敵, 未嘗少懈.
太始紀
신시씨가 임금이 되어 신(神)으로서 가르침을 베풀며,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보존케하고 두루 보살펴 배불리 먹이고 양육하며 무성하게 불어남을 모두 받아들이니, 천하의 백성과 사물은 이로서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었기에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신시씨는 곧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진실로 만고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니, 천지를 움직여 휘두르는 힘과 바람·번개·구름·안개를 부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칼·창·큰도끼·긴창 등을 만들어 이로써 초목과 금수며 벌레와 물고기의 무리를 다스렸다. 이에 초목이 차츰 걷히고 금수와 벌레며 물고기들이 깊은 산 속이나 큰 못 속으로 피하여 달아나 숨어 버려서 다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해악이 되지 않았다. 이로서 치우씨는 대대로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항시 나라 안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적을 토벌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神市氏, 見人居已完.蠢物各得其所, 乃使高矢氏, 專掌궤養之務, 是爲主穀. 而時, 稼穡之道不備, 又無火種, 民皆就食草蔬木實, 철鮮血, 茹生肉, 殆不堪其苦. 高矢[乃氏]
(氏, 乃)漸敎稼穡之方, 猶以無火爲憂. 一日, 偶入深山, 只看喬林荒落, 但遺骨骸老幹枯枝, 交織亂叉. 立住多時, 沈吟無語, 忽然大風吹林, 萬竅怒號, 老幹相逼, (揆)
[擦]起火光, 閃閃삭삭, 乍起旋消乃猛然, 省悟曰: 「是哉! 是哉! 是乃取火之法也.」 歸取老槐枝, (揆)
[擦]而爲火, 功猶不完. 明日, 復至喬林處, 徘徊尋思, 忽然一個條紋大虎, 咆哮躍來,
高矢氏大叱一聲, 飛石猛打, 誤中巖角, 炳然生火. 乃大喜而歸, 復擊石取火. 從此, 民得火食, 鑄冶之術始興, 而制作之功, 亦漸進矣.
신시씨는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물들 또한 각기 그 마땅한 처소를 얻었음을 보고, 이에 고시씨(高矢氏)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일을 맡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곡식을 주관하는 일이다. 이때는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불씨 또한 없던 때라, 백성들은 모두 풀의 푸성귀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선한 피를 마시며 날고기를 먹었으니, 그 고초는 참아내기 어려웠다.
고시씨가 이에 점차 곡식을 심고 거두는 방법은 가르쳤으나, 여전히 불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깊은 산 속에 들어가니 높이 우뚝 솟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것이 온 사방으로 보였는데, 앙상하고 말라버린 체로 메마른 가지들만이 남아서 서로 어지럽게 얽혀져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려니, 갑자기 숲으로 큰 바람이 불어와 모든 구멍들이 성난 목소리를 내뱉고 앙상한 가지들은 서로 밀치며 비벼대었는데, 마찰되어 일어나는 불길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 언뜻 일어나다가는 도리어 사글어드는듯 하더니 이내 맹렬하게 타오르는지라, 깨달음이 있어 이르기를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로구나」 하였다. 돌아와서 마른 홰나무 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못하였다. 다음 날 다시 숲속으로 가서 생각에 잠겨 배회하고 있으려니, 홀연히 한 마리의 줄무늬 범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기에, 고시씨가 벽력과 같은 소리로 꾸짖으며 돌을 날려 호되게 내려치니 바위 모서리에 빗맞으며 번쩍이면서 불길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기뻐하고 돌아와 다시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주조하는 기술이 비로소 흥성하게 되었으며, 제작의 능률 또한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又使神誌氏作書契. 盖神誌氏, 世掌主命之職, 專管出納獻替之務, 而只憑唯舌, 曾無文字記存之法. 一日, 出行狩獵, 忽驚起一隻牝鹿, 彎弓欲射, 旋失其(跡)
[踪]. 乃四處搜探, 遍過山野, 至平沙處, 始見足印亂鑽, 向方自明, 乃俯首沈吟, 旋復猛省曰: 「記存之法, 惟如斯而已夫! 如斯而已夫!」 是日, 罷獵卽歸, 反復審思, 廣察萬象, 不多日, 悟得창成文字, 是爲太古文字之始矣. 但後世年代邈遠, 而太古文字泯沒不存, 抑亦其組成也, 猶有不完而然歟. 嘗聞, 六鎭之地及先春以外岩石之間, 時或發見雕刻文字, 非梵非篆, 人莫能曉, 豈神誌氏所作古字歟.
또한 신지씨(神誌氏)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무릇 신지씨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 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그러나 후세에 세월이 까마득히 오래되어서 태고 문자는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그 꾸밈새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한다. 듣건대, 육진(六鎭)1) 의 땅이나 선춘(先春) 등지의 암벽 사이에 때때로 문자를 조각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범자(梵字)도 아니요 전자(篆字)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이 능히 알아먹지 못한다고 하니, 어쩌면 그것이 신지씨가 지은 옛 문자가 아닌가 한다.
高矢氏, 亦世掌主穀之職, 而後世蚩尤.高矢.神誌之苗裔, 繁衍最盛. 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 神誌氏之族, 則繁殖於北東之地; 獨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 皆其孫也. 三氏苗裔, 又細分九派, 卽견夷.우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暘夷之屬, 皆異支同祖, 不甚相遠. 夷之爲言, 大弓之稱也. 盖自蚩尤氏作刀.戟.大弩以後, 狩獵征戰, 賴以爲武, 中土諸族, 甚畏大弓之用, 聞風膽寒者久矣. 故謂我族曰夷.《說文》所謂: 「夷, [人人大]人人弓, 東方之人」者, 是也. 乃至仲尼《春秋》之作, 而夷之名, 遂與戎狄幷爲腥조之稱, 憤哉! 後世견夷,風夷, 分遷西南, 恒與中土諸族, 互相힐항,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고시씨 역시 대대로 곡식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았으며,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하게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견夷)·우이(우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暘夷)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2)
'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씨가 칼과 창이며 큰 쇠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사냥하고 전쟁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병장기로 삼으니 중토의 뭇 부족들이 큰 활의 쓰임을 매우 두려워하였으며, 그 위풍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곤 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 '이(夷)'라고 한 것이다.《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이(夷)는 '크다(大)'는 것과 '활(弓)'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중니가《춘추》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이나 적(狄) 등과 아울러 비속한 명칭으로 삼아 버리니, 분할 따름이다.3)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4)
先是, 蚩尤氏, 雖然驅除鳥獸충魚之屬, 而人民猶在土穴之中, 下濕之氣逼人成疾. 且禽獸一經窘逐, 漸自退避藏匿, 不便於屠食. 神市氏, 乃使蚩尤氏, 營造人居; 高矢[氏], 生致牛.馬.狗.豚.雕.虎之獸而牧畜; 又得朱因氏, 使定男女婚娶之法焉. 盖今之人謂匠師曰智爲者, 蚩尤氏之訛也; 耕農樵牧者, 臨飯而祝高矢者, 高矢氏之稱也; 婚娶之主媒者曰朱因者, 亦朱因氏之遺稱也.
이보다 앞서, 치우씨가 비록 그렇게 날짐승과 들짐승 및 벌레와 물고기 등의 무리를 몰아내긴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 흙굴에서 사는 까닭에 아래로부터의 습한 기운이 사람에게 해를 끼쳐 질병을 일으켰다. 게다가 짐승들을 한차례 휘몰아 내쫓으니, 점차 스스로 물러나 피하고 숨어 버린 까닭에 잡아먹기에 불편하였다. 신시씨가 이에 치우씨로 하여금 사람이 거처할 만한 것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씨에게는 소·말·개·돼지·수리·범 등의 짐승을 사로잡아 데려와서 가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또 주인씨(朱因氏)를 신임하여 그에게 남녀간에 장가들고 시집가는 법을 정하게 하였다. 무릇 지금의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두고 '지위'라 함은 치우씨의 이름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며, 밭갈고 농사짓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례' 하며 축원하는 것은 고시씨를 일컫는 것이며, 혼인에서 중매를 서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인씨의 이름에서 남겨진 명칭이다.
此時, 神市氏之降世, 已數千載, 而民物益衆, 地域愈博. 於是, 復置主刑.主病.主善惡及監董人民之職, 以獸畜名官, 有虎加.牛加.馬加.鷹加.鷺加之稱. 盖牛.馬.狗.豚之屬, 皆當時民衆養生之料, 而賴以爲業者也; 虎與鷹.鷺者, 境內棲息之鳥獸, 而以表官職之[性也. 後世夫餘國, 猶傳此俗, 亦以獸畜名官, 此不可탄述焉.
이때는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온지 이미 수천 년이 되었으니, 백성과 사물들은 더욱 많아졌고 땅의 경계는 더욱 넓어졌다. 이에 다시 형벌과 질병과 선악을 주관하고 백성들을 보살펴 이끌 수 있는 직책을 설치하고,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이름하였으니, 호가(虎加)·우가(牛加)·마가(馬加)·응가(鷹加)·노가(鷺加)5) 등의 명칭이 있게 되었다. 무릇 소와 말 그리고 개와 돼지 등의 무리는 모두 당시에 백성들이 기르는 것으로서, 이에 의지하여 생업을 삼았던 것이며, 범과 매 및 해오라기 등은 나라안에 서식하는 새와 짐승들이니, 이로서 관직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후세 부여국(夫餘國)에도 여전히 이러한 풍속이 전해져 역시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일컬었다 하는데, 이를 모두 빠짐없이 적을 수는 없다.
神市氏, 旣立敎御民, 民皆協洽. 乃登太白之전, 臨大荒之野, 觀天地寂然而氣機無息, 日月奔馳而貞明不易, 春秋代序而萬物循回, 乃推天地玄妙之理, 倚數觀變而創成人民依從之則, 是乃易理之原也. 當是之時, 遼瀋.幽燕之地, 已爲我族耕農游牧之所. 伏犧氏, 適以是時, 生於風族之間, 熟知倚數觀變之道, 乃西進中土, 代燧人之世而爲帝, 又得史皇之輔.河圖之瑞, 畵成八卦, 爲中土易理之元祖. 盖陰陽消長之理, 發源於我而卒爲彼國之用, 近世禹倬, 以傳《易》之故, 反爲偉功, 造翁難測之意, 盖亦怪哉! 伏犧氏, 自能馴伏犧牲, 威降豺豹, 伏犧之名, 因於是也, 生於風族, 以風爲故姓也. 以龍紀官者, 亦原於虎加.馬加之類也.
신시씨가 이미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니 백성들은 모두 서로 도우며 흡족히 여겼다. 이에 태백(太白)의 꼭대기에 오르고 대황(大荒)의 들녘에 이르러 천지를 바라보니 쓸쓸하고 고요할지언정 그 기운의 틀은 쉼이 없었다. 해와 달은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면서도 곧고 밝음은 변하지 않았으며, 봄과 가을은 차례대로 잇대어 가고 만물은 쉬지 않고 자꾸만 쫓아 돌아갔다. 이에 천지의 깊고도 묘한 이치는 숫자에 의지하여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음을 미루어 깨닫고, 사람들이 의지하여 따를 만한 법칙을 새로 만드니, 이것이 곧 역리(易理)의 근원이다.
당시에는 요동의 심양 및 유연(幽燕)6)의 땅이 이미 우리 민족들이 농사짓고 유목하던 곳이었다. 복희씨(伏犧氏)7)가 마침 이때에 풍족(風族)에서 태어나서 숫자에 의지하여 변화를 바라보는 이치에 대하여 자세히 익힌 뒤, 서쪽으로 중토로 나아가 수인씨(燧人氏)의 세상을 이어 황제가 되어 사황(史皇)의 도움과 하도(河圖)의 상서러움을 얻어서 팔괘(八卦)를 그리니, 중토 역리(易理)의 원조가 되었다. 무릇 음과 양이 줄고 늚에 대한 이치는 우리로부터 발원하였으나 마침내 저들 나라의 쓰임이 되었는데, 근세에 와서 우탁(禹倬)8)이《역(易)》을 전한 까닭으로 도리어 위대한 공로자가 되었다 하니, 조물주의 헤아리기 어려운 뜻은 또한 괴이하다 할 것이다. 복희씨는 스스로 능히 희생(犧牲)을 잘 길들이고 복종케 하여 그 위엄이 승냥이와 표범에까지 이르렀기에 '복희(伏犧)'라는 이름이 그로 연유한 것이며, 풍족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풍'을 성씨로 삼았다. 용(龍)으로 벼슬을 기록한 것 또한 호가(虎加)나 마가(馬加)라고 일컬음과 같은 유형에서 근원한 것이다.
神市氏御世愈遠, 而蚩尤.高矢.神..朱因諸氏, 幷治人間三百六十六事, 男女.父子.君臣.衣服.飮食.宮室.編髮.盖首之制, 次第成俗, 普天之下, 悉化其沾. 制治漸敷, 而政敎禮儀逐漸稍備, 初之于于휴휴草衣木食者, 始入人道之倫矣. 嗚呼偉哉!]9)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더욱 오래되니, 치우·고시·신지·주인씨 등이 모두 같이 사람간의 삼백 예순 여섯 가지 일을 다스려, 남녀와 부자 및 군신간의 일이며, 의복과 음식 및 궁실의 일은 물론, 머리카락을 땋고 머리를 덮는 일에 관한 법도를 차례차례 풍속으로 이뤄가게 하였기에 하늘이 덮고 있는 곳이면 모두 그 교화에 물들어 갔다.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치고 다스림과 가르침이며 예절과 의례 등도 점차 따라서 조금씩 갖추어져 가니, 처음에는 아는 바가 없이 제 멋대로 날뛰며 풀로서 몸을 가리고 나무 열매를 먹던 사람들이 비로소 사람된 도리로서의 윤리에 접어들게 되었다. 오호라 그 위대함이여!
夫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 聖人論而不議;《春秋·經世》, 先王之志, 聖人議而不辯. 鴻몽肇判而萬物滋生, 則余聞諸耆老,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政而]
(而政)敎始成, 則余徵諸斷簡破編. 夫六合之外, 洪荒之世, 聖人曾不詳辨區區, 後生安得以窺其一斑哉! 至如唐虞三代.秦.漢.隋.唐者, 中國歷代之謂也; 험윤.훈죽.荊蠻.越裳之屬, 則上古戎狄之稱也. 漢武之世, 始通西域, 月氏,安息.奄蔡.焉嗜.于전.계賓諸國, 始現於載籍中; 多民, 隨畜牧, 逐水草往來者, 及被髮裸身之類. 及若大秦之國, 遠在西海之西, 地方數千里, 領四百餘城, 小國役屬者數十, 以石爲城郭, 列置郵亭, 人皆곤頸而衣(文)
[紋]繡, 乘輜병出入所居, 城邑周(圍)
[환]百餘里, 宮室皆以水精爲柱, 以至殊俗珍風.奇寶異貨之産, 不可탄述, 盖想見其殷富盛(疆)
[彊]之風矣. 漢.章和中, 班超遣甘英, 由條支欲通大秦而不果, 及至桓帝.延熹中, 其主安敦遣使始通. 降至唐代, 又有당項.吐蕃.波斯.大食之國, 或交侵.洛, 或航通商舶, 而赤髮綠睛.巨幹長軀之徒, 罕至出入宮庭. 宋代, 有提擧市舶司之職, 專管西域買遷之業. 近代, 明.萬曆中, 有利瑪竇者, 自廣東轉入北京, 有數理曆法之書, 使行之從燕還者, 或傳其說. 盖其國, 與古之大秦同在西域之西, 與古來諸國逈殊云. 噫! 天下廣矣, 生民之來久矣. 未知, 後世果有巨人一目之國, 復自東南來, 通於此世否.
무릇 우주의 밖은 성인이 그대로 간직해 둘 뿐 의론하진 않고, 우주의 안은 성인이 대체의 강령만 의론할 뿐 그 근원까지는 논의하지 않는다 하였다.《춘추》의 <경세편>에, 앞선 성군의 뜻은 성인이 명분품절만 의론할 뿐 그에 대한 자세한 시비를 논변하진 않았다 하였다. 천지자연의 원기가 처음으로 나눠지고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난 것은, 곧 내가 뭇 노인네들에게 듣기로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옴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 번성하고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쳐서 사물을 다스리는 일과 가르쳐 육성하는 일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하였으니, 이것을 내가 어찌 쪼개고 나누어 밝힐 수 있을 것인가. 무릇 우주 밖의 아주 오랫적 세상에 대해서는 성인들도 아직 하나하나 상세히 나누어 놓지 않았는데, 후손이 어찌 그 일부분일지언정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당요(唐堯)10)와 우순(虞舜)11)및 하(夏)·은(殷)·주(周)의 삼대 및 진(秦)·한(漢)·수(隋)·당(唐)과 같은 것은 중토의 역대를 말하는 것이며, 험윤(험윤)과 훈육(훈죽) 및 형만(荊蠻)과 월상(越裳) 등의 무리는 상고 시대의 중국 변방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나라 무제 때 처음으로 서역과 통하여 월지(月氏)12) ·안식(安息)·엄채(奄蔡)·언기(焉嗜)·우전(于전)13) ·계빈(계賓) 등의 나라들이 비로소 서적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많은 민족들은 목축을 하며 물과 풀을 좇아 오가고 머리를 풀어 늘어트리거나 벌거숭이 몸을 한 부류들이다. 대진(大秦)과 같은 나라는 멀리 서해의 서쪽에 있으면서 영토는 사방 수천 리에 사백여 성을 거느리고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지배를 당하는 것이 수십 개나 된다고 한다. 돌로 성곽을 쌓고 역말의 객사를 열지어 설치하였으며, 사람들은 모두 목덜미까지만 머리를 기르고, 수놓은 옷을 입으며, 덮개가 있는 수레를 타고 거처하는 곳을 출입하며, 성읍은 그 주위가 백여 리로 궁실은 모두 수정으로 기둥을 하는 등, 별스럽고 진귀한 풍속과 기이한 보물과 재화의 산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세히 말할 수가 없다고 하니, 그 번성하고 부강한 기풍은 그저 미루어 볼뿐이다.14)
한나라 장화(章和) 연간에 반초(班超)가 감영(甘英)을 보내어 조지(條支)를 경유하여 대진과 통교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환제(桓帝) 연희(延熹) 연간에 이르러 그 나라의 주인인 안돈(安敦)이 사신을 파견하자 비로소 통교하게 되었다. 후세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또한 당항(黨項)·토번(吐蕃)·파사(波斯)·대식(大食) 등의 나라가 있어 혹은 번갈아 앙락을 침범하거나 상선을 보내와 통상을 하였는데, 붉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큰 몸뚱이와 큰 키의 무리들로서 드물게는 궁정에까지 출입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제거시박사(提擧市舶司)15)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오로지 서역과의 교역 업무만을 전담하였다. 근대의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이마두(利瑪竇)16) 라는 자가 있어 광동으로부터 북경으로 옮겨왔는데 수리(數理)와 역법(曆法)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사신으로 갔던 무리 가운데 북경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이 간혹 그 예기를 전하였다. 대저 그 나라는 옛날의 대진과 같이 서역의 서쪽에 있으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하니, 오호라! 천하는 넓고도 넓으며 사람이 생겨난 지는 오래고도 오래구나. 후세에 과연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가 있어, 다시 동남쪽으로부터 와서 이 세상과 통교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盖異風殊道之國, 星羅碁布於普天之下, 時移物換而逐漸交通. 想於神市氏之世, 坐而論之, 則安知世間有奄蔡.安息.天竺.大秦之國耶. 然則, 高辛氏之世, 所謂「執中而遍天下, 日月所照, 風雨所至, 莫不[服]從」者, 盖亦自好之(說)
[言]也. 余절(蚩)
[嗤]之可惜, 近世學者, 拘於漢籍, 溺於儒術, 혼혼然以外夷自甘, 動稱華夷之說.
무릇 풍속이 다르고 법도가 틀린 나라가 하늘 아래 별처럼 늘어서 있고 바둑돌처럼 퍼져 있다가 시대가 흐르고 사물이 교환되면서 점차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생각건대 신시씨의 시대에 앉아서 세상을 얘기하면서 이 세상에 엄채나 안식이며 천축이나 대식과 같은 나라가 있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한 즉 고시씨 세대에 이른바 '한가운데를 잡아 그 교화가 천하에 두루 미치니, 해와 달이 내려 비치는 곳과 비와 바람이 닿는 곳마다 복종치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훌륭하게 여긴 말일 것이다. 내가 남몰래 냉소하면서도 애석해 하는 것은, 근세의 학자들이 한나라의 서적에 얽매여 유교의 술수에 빠지고 흐리멍덩해져 '바깥 오랑캐(外夷)'라는 말을 스스로 달갑게 받아들여서 걸핏하면 '화이(華夷)'의 논리를 입에 올리는 일이다.
余於盛筵, 賓朋齊會, 皆雄談峻論之輩, 余因醉揚臂而呼曰: 「君等皆云華夷, 焉知我非華而中原之爲夷耶! 且夷者, 從大從弓, 東人之稱, 太古我朝鮮, 以武强鳴於世, 故中原之士, 聞風懼之, 夷豈是戎狄之賤名耶! 國自上古, 人皆强勇質直, 雅好禮讓, 中土有'東方君子之國'之稱焉, 我國豈本戎狄之類哉! 鴨水以外, 縱橫萬里之地, 是乃我往聖先民, 艱苦經營之地也, 豈本是漢家物耶! 孔子之世, 周室旣衰, 外族交侵, 려王敗死於犬戎, 其他北狄.荊蠻.山戎無終之屬, 侵핍不已, 我族亦以是時, 威振中土. 故孔子, 慨王政之不敷, 恨列國之交侵, 有志而作《春秋》, 尊華攘夷之說, 於是乎始立. 若使孔子, 生於我邦, 則寧不指中土而謂戎狄之地乎!」 滿座冷笑或驚怪, 不小縱有然之者, 竟不快應, 余蹴床而起, 人皆謂淸狂殊甚, 可(難)
[歎]. 前者, 滿洲之有흔, 廟議紛운斥和者, 亦以尊周爲重, 余不知其可矣. 若余復出此言於제輩, 則渠等應必, 大驚小怪, 殆將不齒, 豈怪彼輩言. 箕子之化則信, 漢武之討滅則信, 唐高之平定則信, 而殊不知, 我先民却有赫赫武勳之有足誇耀者耶! 余悲, 世俗不察其變漫, 以仲尼尊攘之意, 自誤焉.
내가 어느 성대한 잔치 자리에서 손님이며 벗들과 함께 모였는데, 모두 뛰어난 말솜씨로 그럴싸한 말들을 하는 무리들이기에 내가 취기를 빌어 팔뚝을 걷어올리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그대들이 모두 '화이(華夷)'를 말하는데, 우리가 어찌 중화가 아닐 것이며 중원이 도리어 오랑캐가 됨을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17)
또한 '이(夷)'라 함은 '크다'는 것과 '활'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동방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랜 옛적 우리 조선이 무예가 강성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때문에 중원의 선비들이 그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이(夷)가 어찌 융(戎)이나 적(狄)과 같은 천한 이름이겠는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날래며 품성 또한 강직하고 올바르기에 평소에도 예의와 양보를 좋아하여 중원에는 '동방 군자의 나라'라는 말이 있게 되었는데, 우리나라가 어찌 그 근본이 융·적 등의 무리와 같다는 말인가! 압록강 바깥 사방 1만 리의 땅은 예전에 우리의 성인과 앞선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일구어 온 땅인데, 어찌 본시 한나라 놈들의 물건이겠는가! 공자의 시대에 주(周) 왕실이 이미 쇠퇴하여 바깥 민족들이 번갈아 침범하니 여왕(려王)이 견융(犬戎)에게 패하여 죽게 되었고, 그 밖에 북융(北戎)이며 형만(荊蠻)과 산융(山戎) 등 끊임없는 무리들이 침략하여 핍박하길 마지않았으며, 우리민족 또한 이때에 위엄을 중토에 떨쳤었다. 때문에 공자가 왕의 다스림이 널리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여러 나라가 번갈아 침범함을 한탄하며 뜻이 있어서《춘추》를 지었기에,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내친다는 말이 이때 비로소 쓰여지게 되었다. 만약 공자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오히려 중토를 가리켜 오랑캐의 땅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하니, 모든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고 혹은 놀랍게 생각하기도 하였으며 적지 않게는 사뭇 수긍하는 자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모두 쾌히 응하지 않기에 내가 상을 박차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광기가 매우 심하다고 말하였다. 탄식할 노릇이다.
예전에 만주에 허물이 있다 하여 조정에서 화친이니 배척이니 하며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이 또한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이기에 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만일 내가 또 다시 동년배들에게 이 말을 끄집어낸다면 그네들은 응당 크게 놀라긴 하여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장차 친구로 끼워 주지도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어찌 저들의 말만을 이상하다 하겠는가. 기자(箕子)가 교화를 베풀었다는 것은 믿으면서, 한무제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켰다는 것은 믿으면서, 당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였다는 것은 믿으면서, 오히려 우리의 선조들에게 충분히 자부할 만한 빛나는 무훈이 있었음은 왜 알지 못하는가. 내가 슬퍼하는 것은, 세속의 인식이 제멋대로 변한 점은 살피지 않고, 중니가 높이고 깎아 내린 것 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그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夫神市肇降之世, 山無蹊隧, 澤無舟梁, 禽獸成군, 草木遂長. 民與禽獸居, 族與萬物幷, 禽獸可係기而(遊)
[游], 鳥鵲之巢可攀援而규. 飢食渴飮, 時用其血肉, 織衣耕食, 隨便自在, 是謂至德之世也. 民居不知所爲, 行不知所之, 其行塡塡, 其視顚顚, 含哺而熙, 鼓腹而(遊)
[游], 日出而起, 日入而息, 盖天澤洽化, 而不知窘乏者也. 降至後世, 民物益繁, 素樸漸離, 별설제기, 勞勞孜孜, 始以生計爲慮. 於是焉, 耕者爭畝, 漁者爭區, 非爭而得之, 則將不免窘乏矣. 如是而後, 弓弩作而鳥獸遁, (綱)
[網]고設而魚鰕藏, 乃至刀.戟.甲.兵, 爾我相攻, 磨牙流血, 肝腦塗地, 此亦天意之固然而不可怨者也. 余嘗觀, 夫小兒재[出胎門, 便규救我救我者, 盖求其哺也; 재]18)
至行走, 便會시打시打者, 欲其求强也. 余於是乎知, 爭戰之不可免也.
무릇 신시씨가 처음 내려온 세상은, 산에는 길이나 굴이 없었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으며, 날짐승과 들짐승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풀과 나무는 무성히 자라났다. 백성들은 금수와 함께 거처하며 만물과 더불어 어울리니, 금수는 굴레를 매어 같이 노닐 수 있었고, 새나 까치의 보금자리는 기어올라가 엿볼 수 있었다.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심에 때에 따라 그 피와 고기로 하였으며, 옷감을 짜서 옷을 해 입고 밭을 갈아 음식을 먹으며 편함에 따라 있는 그대로 지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덕이 가득한 세상이다. 백성들은 살아가면서도 그 행하는 바를 느끼지 못하였고, 나아가면서도 그 가는 곳을 의식하지 않았으니, 그 행위는 당당하고 그 시야는 한결 같았다. 배불리 먹고 기뻐하며 배를 두드리고 노닐며,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니, 대저 하늘의 은혜가 널리 미쳐 궁핍함을 알지 못한 것이리라.
후세에 내려와 백성과 사물이 더욱 번창해지며 소박함에서 점차 멀어지고, 아등바등 힘쓰며 쉬지 않고 노력하게 되니 비로소 생계를 근심거리로 삼게 되었다. 밭을 가는 자는 이랑을 놓고 다투고, 고기를 잡는 자는 구역을 놓고 다투는데, 다투어 얻지 못하면 장차 궁핍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된 후에 활이며 쇠뇌를 만드니 날짐승과 들짐승은 달아나 버렸고, 그물을 만들어 설치하니 물고기와 새우들은 숨어 버렸다. 이에 칼과 창이며 갑옷과 병사가 생기게 되고,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여 이를 갈고 피를 흘리며 간과 뇌를 꺼내어 땅에 바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이라면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보건대, 어린아이가 막 태문(胎門)을 나서며 곧 '응애(救我), 응애(救我)'!19) 라고 부르짖는 것은 대개 음식을 구하는 것이며, 막 걷게 되어 곧 서로 토닥거리며 '쎄다(시打), 쎄다(시打)'! 할 줄 아는 것은 강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내가 이로서 다투고 싸우는 것이 면하기 어려운 것인 줄 알게 되었다.
夫, 月氏.大秦之屬, 余不知其詳, 至若中國與倭, 接隣之國也, 翼在左右而我國介處其間, 從古交爭最繁, 是亦必然之勢也. 神市氏[御世之]
(之御世)已遠, 而民物之生愈往愈博. 民物之生愈博而, 所以彼.飮食.奉生.送死之具, 愈見其耗. 是以, 始之熙[熙]者, 漸至忙忙, 夫忙忙求索者, 豈非爭亂之(偕)
[階]歟. 及夫有巢.燧人者, 西方之君也, 神市.蚩尤者, 東方之君臣也. 御世之初, 各據一方, 地域逈殊, 人烟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故狩獵採伐之外, 曾無險役.
무릇 월지나 대진의 무리에 대해서 내가 그 상세한 바를 알지 못하나, 한(漢)나라와 왜(倭) 같은 것은 인접한 나라로서 날개와 같이 좌우에 있고 우리나라는 그 가운데에 끼여 있어서 예로부터 갈마들어 다툼이 가장 빈번하였으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다.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이미 오래되니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가면 갈수록 넓게 퍼졌다.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넓게 퍼질수록 덮고 입으며 마시고 먹는 일과 생전에 봉양하고 죽은 후에 장사지내는 일 등에서 모두 그 소비가 눈에 뛰게 늘었다. 이러한 까닭에 처음에는 화락하기만 하다가 점차 다급하게 되어 가니, 무릇 다급하게 무엇을 구하고 찾다 보면 다투고 싸우는 순서를 어찌 밟지 않겠는가. 대저 유소씨나 수인씨는 서방의 임금이요, 신시씨와 치우씨는 동방의 임금과 신하이다. 세상을 다스리던 초기에는 각각 한쪽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땅의 구역이 사뭇 다르고 인가(人家)는 서로 통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은 자기들만 있는 줄 알고 다른이들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까닭에 수렵하고 채벌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힘든 일이 없었다.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且中國者, 天下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族之分遷西南者, 垂涎而轉進, 中土之民, 亦湊集而萃會. 於是焉, 黨同수異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初炎帝之世, 中土之漸民至盛阜, 穀.麻.藥.石之術, 亦已稍備. 及累傳至於楡罔之世, 而爲政束急, 諸侯携貳, 民心離散, 世道多艱. 我蚩尤氏與其民衆, 虎踞河朔, 內養兵勇, 外觀時變, 及觀楡罔之衰政, 乃興兵出征. 選兄弟宗黨可將者八十一人, 部領諸軍, 發葛盧山名之金, 大制劒.鎧.矛.戟.大弓.고矢, 一幷齊整, 乃發탁鹿而登九渾, 連戰連捷, 勢若風雨, 습(仗)
[伏]萬民, 威振天下. 一歲之中, 凡拔九諸侯之地. 更就雍狐之山, 發水金而制芮.戈及雍狐之[戟, 再整兵而出洋水, 殺至空桑. 空桑者, 今之]20)
陳留, 楡罔所都也. 一歲之中, 更兼十二諸侯之國, 殺得(仗)[대]
伏尸滿野, 中土之民, 莫不喪膽奔竄. 時, 楡罔使少顥拒戰, 蚩尤氏揮雍狐之戟, 大戰少顥, 又作大霧, 使敵兵昏迷自亂, 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탁鹿. 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 回兵圍攻於탁鹿之野, 又大破之.《管子》所謂「天下之君, 頓戟一怒, (仗)[대]
伏尸滿野」者, 是也.
수천 년을 내려온 뒤 세상의 형세는 이미 변화하였으며, 게다가 중국은 천하의 보고(寶庫)로서 기름진 벌판이 천리에 뻗어 있고 화창한 바람 기운은 널리 퍼져 있으니, 우리 민족 가운데 서남쪽으로 나누어 옮겨간 자들은 대단히 탐을 내어 더욱더 나아갔으며, 중토의 백성들 역시 꾸역꾸역 모여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편끼리는 도와서 무리를 이루고, 다른 편은 그저 원수로 삼아 창과 방패로 서로 충동질을 하니, 이것이 바로 만고에 있어서 전쟁의 시작이다.
처음 염제(炎帝)의 세대에 중토는 점차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졌으며, 곡식을 일구고 삼베를 자으며 약과 침을 쓰는 기술 또한 점차 갖추어져 갔다. 이로서 여러 세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니, 정치에 있어서는 단속하기 급급하고 제후들은 두 마음을 지녔으며 민심은 흩어져 세상의 도는 어렵기만 하였다. 우리 치우씨는 백성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 할거하고 앉아서 안으로 용맹스러운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잔하였음을 보고 이내 병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21)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탁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한 해 만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끈 달린 방패와 가지창 및 옹호창을 제작하여,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를 떠나 파죽지세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합치니, 죽어 엎어진 시체는 들녘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 숨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 유망이 소호(少顥)22)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관자(管子)》에 이른바 「천하의 임금이 창을 들고 한번 크게 노하니 엎어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時有軒轅者, 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 欲代以爲君, 乃大興兵, 與蚩尤氏拒戰. 蚩尤氏, 大戰軒轅於탁鹿, 縱兵四蹙, 斬殺無算, 復作大霧, 令敵軍心慌手亂, 奔竄逃生. 於是, 淮岱.冀연之地, 盡爲所據, 乃城於탁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23)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不解鎧甲之用又値, 蚩尤氏法力高强, 心驚膽寒, 每戰輒敗,《雲급軒轅記》之所謂「蚩尤始作鎧甲.兜무, 時人不知, 以爲銅頭鐵額」者, 亦可想見, 其狼狽之甚矣. 蚩尤氏益整軍容, 四面進擊, 十年之間, 與軒轅戰七十餘回, 將無疲色, 兵不退. 後軒轅, 旣屢敗, 乃復大興士馬, 效蚩尤氏而廣造兵甲, 又制指南之車, 期日會戰. 時蚩尤氏, 仰觀(天)
[乾]象, 俯察人心, 深知中土旺氣漸盛, 且炎帝之民, 所在固結, 不可勝誅, 황各事其主, 不可漫殺無(事)
[辜]. 乃決意退還, 使兄弟宗黨, 務要大戰而立威, 使敵不敢生意追襲, 復與軒轅大戰, 混殺一(陳)
[陣], 然後方退. 此時, 部將, 不幸, 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 盖謂是也. 蚩尤氏, 乃東據淮岱之地, 以當軒轅東進之路, 及至其沒, 漸至退영矣. 今據《漢·地理誌》, 其墓在東平郡.壽張縣.감鄕城中, 高五丈. 秦.漢之際, 住民猶常以十月祭之, 必有赤氣, 出如疋絳, 民名謂蚩尤(氏)
旗, 豈其英魂雄魄, 自與凡人逈異, 歷千歲而猶不泯者歟.
이때에 헌원(軒轅)24)이란 자가 있었는데,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침에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25)와 기연(冀연)26)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이때의 중토 사람들은 단지 화살과 돌의 힘에 만 의지할 뿐 갑옷의 쓰임이나 가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치우씨의 법력이 높고도 강한 것에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져 매번의 싸움마다 번번이 참패하였다.《운급헌원기(雲급軒轅記)》에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여겼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낭패가 매우 심하였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대의 위용을 가다듬고 사방을 쳐나가며 십년 동안 헌원과의 싸움을 칠십여 차례나 하였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고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에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만들었으며, 또한 지남(指南)27)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대개 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28)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29)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감향성(감鄕城) 안에 있으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30)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서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이 어찌 영웅의 혼백이 범상한 사람들과 사뭇 다르기에 천년이 지나고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蚩尤氏, 雖然退歸, 中土以是蕭然, 楡罔亦不得復位, 炎帝之業, 以是永墜矣. 自是, 軒轅代爲中土之主, 是爲黃帝. 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감, 黃帝氏亦不得自安, 終其世, 未嘗安枕高臥.《史記》所(云)
[謂]「披山通道, 未嘗寧居, 邑于탁鹿之(河)[河]
阿31) , 遷(徒)
[徙]往來無常處, 以師兵爲營衛」者, 盖其戰競之意, 歷歷可觀. 而《尙書·呂刑》亦云「若古
有訓, 蚩尤惟始作亂」 彼之畏威, 而世傳其訓, 亦甚明矣.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써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32)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이어졌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사기》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늘 머무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상서(尙書)》의 <여형편(呂刑編)>에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오직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대로 그 교훈을 전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其後, 三百餘年無事, 只與少昊氏戰, 破之, 以至檀君元年前後, 凡闕千歲. 闕者, 萬之稱也, 今之稱久遠者, 必曰闕千歲. 闕千歲者, 盖神市氏之御世, 至萬千歲, 寔爲我國最長年代, 故也. 或曰神市氏之後, 高矢氏與蚩尤氏, 相繼爲君, 前後合算, 爲闕百歲, 而檀君復立云, 此說亦近理. 大抵, 太古之事, 鴻荒(潤)
[수闊]遠, 不可得而詳矣.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니,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하여 무릇 궐천년(闕千歲)이 된다. '궐(闕)'이란 '만(萬)'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아주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는 반드시 '궐천년'이라 말한다. '궐천년'이란 아마도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로 1만 1천년이 흘렀다는 것이니, 진실로 우리나라가 가장 긴 연대를 지녔다 함이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혹은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그 앞뒤를 합하여 보면 1만 1백년이 되며, 게다가 단군이 다시 나라를 일으킨 것이라 말하는데, 이러한 얘기 역시 이치에 가까울 것이다. 대저, 오랜 옛적의 일은 너무 오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29.《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 제1
*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탁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 代神農氏, 是爲黃帝.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황제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가 군사와 제후를 모아 치우와 탁록의 벌판에서 싸움을 벌여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로서 황제가 되었다.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 황제가 그에 따라 그들을 정벌하여 평정시킨 자들은 제거하였으나,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 치우씨를 사로잡아 살해하였다고 한 뒤에 거듭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라 하였으니 여전히 저항의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30. '치우(蚩尤) 사당'에 대한《한서》와《후한서》의 <지리지(地理志)> 기록
* 東郡 … 壽良, 蚩尤祠在西北제上. 有구城(동군 … 수량현은 치우의 사당이 그 북서쪽 제(제)의 위에 있다. 구성이 있다). ..《한서》권 28 상, <지리지> 제8 상. 동군(東郡) 條.
* 東平國 … 壽張 春秋曰良, 漢曰壽良, 光武改曰壽張. 有堂聚, 故聚屬東郡.〔《地道記》曰: 「有蚩尤祠, 狗城.」《皇覽》曰: 「蚩尤총在縣감鄕城中, 高七丈.」〕(동평국 … 수장현은 춘추 때는 량(良)이라 하였으며, 한나라 때는 수량이라 하였는데, 광무제 때 수장으로 이름을 고쳤다. 당취가 있는 까닭에 동군에 귀속되어 있다.〔《지도기》에 이르기를 「치우의 사당이 있으며 구성이 있다」 하였다.《황람》에 이르기를 「치우의 무덤이 현의 감향성 안에 있는데 높이가 일곱장이다」라고 하였다.]) ..《후한서》지(志) 제21, <군국(郡國)> 3. 동평국(東平國) 條.
31.【河→阿】:《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 원문에 의거하여 河를 阿로 수정한다. 正義에서 阿자에 대해 주석하기를 「廣平曰阿. 탁鹿, 山名, 已見上. 탁鹿故城在山下, 卽黃帝所都之邑於山下平地(넓고 평탄한 것을 '아'라고 한다. 탁록은 산 이름으로 이미 윗글에 나타나 보인다. 탁록의 옛 성이 그 산 아래에 있으니 곧 황제가 산 아래의 평지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라 하였다.
32.【幽靑】: 유주(幽州)와 청주(靑州). 지금의 요서와 하북성 및 산동성 일대를 가리킨다.
檀 君 紀
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鴻荒之世, 開창之業, 賴以成焉,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古有淸平山人.李茗[高者]
(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引《朝代記》, 備載我國故史, 比於一然之書, 甚相逕庭中, 多仙家語. 余以爲, 我國以神設敎, 從古爲俗, 沈漸於人心者, 久矣. 故, 說史者, 不可只擬班.馬之筆而踞척焉. 夫漢自是漢, 我自是我也, 豈堂堂震域, 必擬漢制, 以後乃足乎! 황, 國史蕩失於屢經兵火之餘, 今僅存者, 只是道家及緇流之所記傳, 而僥倖得, 保於岩穴者也. 道家旣承, 檀儉神人所創之源流, 而又得文獻之殘脈, 則其論東史者, 大有愈於緇流所記, 多出於牽强傅會.臆爲之說者也. 余寧取淸平之說, 而欲無疑云.
檀 君 紀
신시씨는 진실로 동방 인류의 조상으로서 태고적 세상이 처음으로 개벽하던 일들이 모두 그에게 힘입어 이루어 졌으니, 무릇 단군 이전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인이다. 예전에 청평산인(靑平山人) 이명(李茗)이 있었는데, 그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서《진역유기(震域遺紀)》1) 세 권을 저술하였으니, 이는《조대기(朝代記)》2)를 인용하여 우리나라 옛 역사를 갖추어 실은 것으로서 일연(一然)의 책과 비교하면 서로 사뭇 큰 차이를 보이는 가운데 선가(仙家)의 말이 많다. 내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신인(神人)이 교화를 베푼 것이 오래 전부터 풍속이 되어 사람의 마음에 점차 스며들어 베어 있는 지가 이미 오래인데,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어찌하여 단지 반고나 사마천의 글만을 흉내내며 옴짝달싹을 못하는가! 한(漢)나라는 한(漢)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인데, 어찌하여 당당한 진역(震域)3)을 꼭히 한나라 정도에 견준 연후에야 만족을 하는가! 항차 나라의 역사가 몇 번에 걸친 병화(兵禍) 끝에 씻은 듯이 소실되고 지금에 근근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도가와 불가에서 기록하여 전하는 것뿐이었으나 요행히 바위굴에 간직되어 오던 것을 얻게 되었다. 도가는 이미 단검신인(檀儉神人)이 창제한 근본 흐름을 이어받은데다 아울러 이렇게 문헌의 잔맥을 얻게 되었으니, 해동(海東)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견강부회하고 억측이 많은 불가의 기록에 비해 훨씬 낳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청평의 말을 취함에 의심이 없는 것이다.
桓雄天王御世, 凡闕千歲, 是卽神市氏. 蓬亭柳闕而居, 陶髮跨牛而治, 處無爲之事, 敷自然之化, 開創成業, 源流萬世. 及其暮年, 見功業已完, 民物樂生, 登太白山, 乃置天符三印於池邊石上.檀木之下, 因化仙乘雲而朝天. 是以, 名其池曰朝天. 高矢氏諸人, 奉天符三印, 共推其子桓儉神人, 爲君長, 是爲壬儉. 壬儉者, 君長之意也, 新羅所謂尼師今者, 亦此類也. 以今追計, 約算四千餘歲, 正與唐堯同時, 世俗所謂與堯幷立者, 是也. 因稱檀君, 檀君者, 朴達壬儉之譯也. 盖神市氏, 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 復踐조於檀樹下, 故因以檀爲國名, 則檀君者, 檀國之君也. 而東語謂檀曰朴達, 或曰白達, 謂君曰壬儉. 當時無漢字, 故只稱白達壬儉, 而後世之述史者, 譯以檀君, 復傳至後世, 則只記檀君字, 而不知檀君之爲白達壬儉之譯, 此漢字之功罪相半也. 今若以諺書幷用, 則必無是弊, 而草野愚夫, 亦可易曉, 文化之啓發, 更可速矣. 此未遑長述.
환웅천왕이 세상을 거느린지 무릇 궐천년이니, 그가 바로 신시씨이다. 쑥대 정자와 버드나무 궁궐에 거처하면서 정성으로 사람을 교화함에, 앉아서 쉴 틈도 없이 다스리고,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처리하여 자연스러운 교화를 널리 펴니, 처음으로 나라를 열어 이룬 위업은 그 근본이 만세로 이이졌다. 그 말년에 이르러 공들인 위업이 이미 완성되며 백성과 사물들이 즐거이 사는 것을 보고는, 태백산에 올라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印)을 못 가 돌 위의 박달나무 아래에 놓고 신선으로 변화하여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 때문에 그 못을 이름하여 '조천지(朝天池)'라 하는 것이다.
고시씨와 모든 사람은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을 받들고 그의 아들인 환검신인(桓儉神人)을 다함께 추대하여 군장으로 삼으니, 이로서 임금이 되었다.4)
'임금'이라 함은 군장을 뜻하는 것으로서, 신라에서 이른바 '니사금'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셈하면 대략 4천여 년이 되니 바로 당요(唐堯)와 같은 때로서, 세속에서 말하듯이 「요(堯)와 아울러 함께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단군(檀君)'이라고 이름하는데, '단군'이란 '박달임금'의 번역이다. 대저 신시씨가 이미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고, 환검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에 '단(檀)'으로 나라이름을 삼게 된 것이니, '단군'이라 함은 박달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고 하며, '군(君)'을 '임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없었던 까닭에 단지 '백달임금'이라고 하였던 것을, 뒤에 역사를 서술하던 자가 번역하여 '檀君(백달임금)'이라 하였고, 다시 후세에 전해지며 단지 '檀君'이라는 글자만 기록하게 되었기에 '檀君'이 '백달임금'의 번역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한자의 공과 죄가 반반이다. 지금에 만약 언문과 함께 쓴다면 이러한 폐단은 반드시 없을 것이니, 곧 들녘의 어리석은 백성도 쉽게 깨우쳐 문화의 계발이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於是, 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 曰壬儉城. 今, 滿洲.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 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水之地, 及大氏之興, 爲其先구. 盖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後屬凌夷, 盡擲先祖舊(彊)
[疆]於他人之手, 而區區靺鞨一支, 猶能(천)
[捿]息於분楡之地; 大氏一號, 影從者數十萬, 天門大捷, 國基賴定, 夫豈偶然也哉! 盖蘇密.涑沫.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豈聖人所宅, 神化洽被, 經萬載而其韻不絶者耶! 今, 春川.淸平山南十餘里, 昭陽.新淵兩江合襟之處, 有牛頭大村, 山中展활而江流抱回, 是爲貊國故都. 貊國亦出於檀氏之世, 則建都襲名, 必有之理也.
그리하여 모든 고을의 지세(地勢)를 살피고는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5) 이라 하니, 지금의 만주 길림 땅에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한 소밀하(蘇密河)라고도 일컬어지며 곧 옛날의 속말수(粟末水)이다. 신라 때에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어서 속수(粟水)의 땅을 점거하고 있다가 대조영이 흥기하자 그 선봉이 되었다. 대저 말갈6)은 옛 숙신(肅愼)의 후예로서 이 또한 단군의 자손인데, 뒤에 점차 쇠퇴해져 선조의 옛 강역을 모조리 다른 사람의 손에 던져 주고는 구구하게 말갈의 일족이 되어서 여전히 고향 땅에 깃들어 살더니, 대씨(大氏)가 한 차례 호령함에 그 그림자를 쫓는 자가 수십만이 되었으며, 천문령(天門嶺)에서 크게 이기고는 나라의 기초를 이로서 바로잡게 되었으니, 무릇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대개 소밀(蘇密)·속말(涑沫)·속말(粟末) 등은 모두 '우수(牛首)'의 의미와 서로 가까운데, (그 말은) 대대로 그릇되게 전해졌지만 오히려 그 뜻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성인이 자리잡은 곳에 신의 조화가 두루 미쳐 만세가 지나도록 그 운치가 끊어지지 않았음이 어찌 아니겠는가. 지금의 춘천 청평산 남쪽 10여 리에 소양(昭陽)과 신연(新淵)의 두 강이 합쳐지는 어귀에 우두대촌(牛頭大村)이 있으니, 산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강의 흐름을 안고 도는 이곳이 바로 맥국(貊國)의 옛 도읍지이다. 맥국 역시 단군 때에 나왔기에 도읍을 세우며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니, 반드시 그러한 이치가 있었을 것이다.
淸平云: 「粟末水之陽, 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 故壬儉城卽平壤也. 北去上京.忽汗城六百里…」云, 又曰: 「高王夢有神人, 授以金符曰『天命在爾, 統我震域』故, 國號曰震, 建元曰天統, 恒敬祀于天, 及至子孫, 驕逸而漸廢, 亦幷事儒.佛, 國遂衰…」云. 今, 內外載籍, 幷無是語. 盖忽汗之敗, 遼虜凶殘, 室宮庫藏, 焚燒略盡, 復豈有載籍之得存者耶. 雖然, 渤海王子大光顯以下, 來投於高麗者甚衆, 中多公侯卿相及慷慨泣血之士, 淸平所記, 盖有據於渤海人之所秘藏者也.
청평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0있으니,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 곧 평양이다. 북으로 상경(上京) 홀한성(忽汗城)과는 육백여 리 떨어 졌으며……」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고왕(高王)의 꿈 속에 신인이 나타나 금부(金符)를 주며 『천명이 네게 있으니 우리의 진역(震域)을 통치하라』고 하였기에, 나라의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천통(天統)'이라 건원하며 항상 하늘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자손에 이르러 교만하고 안락함에 빠져 점차 이를 폐지하고 또한 유학과 불교를 아울러 섬기니 마침내 쇠퇴하여……」라고 하였다.
지금 나라 안팎의 서적에는 모두 이 말이 없다. 아마도 홀한의 패배 때 요나라 오랑캐의 흉악한 잔당들이 궁실이며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거의 모두 불살라 버렸으니, 다시 어찌 서적 가운데 남아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 이하 고려에 투항해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는 공경대부나 제후와 재상 및 비분강개하는 의기로운 선비도 많았으니, 청평이 기록한 것은 아마도 발해인들이 비밀리에 소장한 것에 근거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可怪, 金富軾爲仁宗修三國史, 而二千載往聖之遺烈, 闕而無述, 只以「海東三國, 歷年長久, 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 前言往事幽昧…」 如彼等語, 謀逃其責. 至於東川遷都之年, 而僅有「平壤者, 本神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儉)」等[自]
(字). 當時較今, 猶近古五百年, 而古記之散亡無徵, 曾若是其甚耶! 且《朝代記》之名, 與《[古]朝鮮秘記》.《誌公記》.《三聖(蜜)
[密]記》等書, 現於世祖求書之諭, 而金氏之世, 獨無此書耶!
괴이하게도 김부식이 인종(仁宗)을 위하여 삼국의 역사를 편수하며 2천년 동안의 옛 성인이 남긴 공덕을 빠트리고 기술하지 않고서, 단지 「해동 삼국의 역년이 장구하나 옛 기록은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일의 자취는 이지러져 없어지고 앞선 말들이나 지나간 일들은 가뭇가뭇 어둡기만 하니……」라고 하며, 이와 같은 말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7)
그러다 동천왕이 천도한 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평양은 본래 신인왕검8)이 자리잡은 곳이다」 혹은 「왕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등의 글귀가 있을 뿐이다. 당시를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옛날에 5백년이나 가까운데 옛 기록이 흩어져 없어지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이다지도 심할 줄이야! 더욱이《조대기(朝代記)》의 이름이《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지공기(誌公記)》.《삼성밀기(三聖密記)》등의 책과 함께 세조(世祖)가 내린 구서(求書)의 유시9)에도 보이는데 유독 김씨의 세대에 이 책들이 없었더란 말인가!
盖, 三國鼎立, 互事呑서, 新羅終致聯唐兵而覆麗.濟, 厥後渤海雖興, 只與新羅南北相對, 不惟秦.越而已. 是以, 弓裔襲據漢北之地, 則恨平壤之茂草, 聲言爲高句麗報수, 而浿西諸鎭, 望風歸服, 立國建元, 威壓列州; 甄萱叛據完山, 則憤百濟之衰亡, 以雪義慈宿憤爲言, 而西南州縣, 所至響應, 建都設職, 喜得人心. 高麗旣承羅後, 而疆土不出鴨水以外一步之地, 自與北方無涉. 且遼.金之勢, 威壓境上, 區區鴨水以南數千里地, 更非雄邦巨國之比, 則民氣之衰微, 自有甚於古者[矣. 是以, 金氏撰史之時, 已無過問, 鴨北之事者.]10) 황, 平壤之地, 荒廢頗久, 舊基雖存而荊棘滋茂, 蕃人(遊)[游]獵, 侵掠邊邑者, 麗.太祖初年所記也. 然則, 高句麗亡後三百年, 而平壤不免荊棘, 渤海人之遊獵其間者, 則輒稱之以蕃人侵掠邊邑, 則只恨其大害. 然則, 忽汗敗而大氏之來奔高麗者, 亦家敗而睦族之類而已.
대저 삼국이 정립하고 있으며 서로 집어삼키고 물어뜯고 하다가, 신라가 마침내 당나라 병사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넘어뜨렸다. 그후 발해가 비록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단지 신라와 더불어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었을 뿐, 서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곧 소원해질 따름이었다.11)
그러다가 궁예(弓裔)가 한강 이북의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고는 잡초만 무성해진 평양 땅을 한탄하며 고구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하니, 패서(浿西)12)의 모든 고을이 그 기세에 힘입고 모여들어 복종하기에,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정함에 그 위세가 모든 고을을 제압하였다. 견훤(甄萱)은 완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점거하고 백제의 쇠망을 분하게 여겨 의자왕의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한다고 천명하니, 서남쪽의 고을 가운데 그 명성이 이르는 곳마다 모두 향응하기에, 도읍을 세우고 직책을 설치하여 기꺼이 인심을 얻게 되었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였다고는 하지만 강토는 이미 압록강에서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땅이 되었으며, 북방과 더불어 스스로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었다. 또한 요나라와 금나라의 기세가 국경을 위세로 억누르니, 구구하게 압록강 이남의 수천 리 땅으로 다시금 웅혼하고도 거대했던 나라와 비교될 수가 없었기에, 백성의 기세가 저절로 쇠미해짐이 옛날보다 심하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김씨가 역사를 서술할 때는 이미 압록강 이북의 일에 대해 묻는 자가 없었다. 항차 평양 땅은 황폐해진지가 자못 오래되었으니, 예전의 기초는 비록 남아 있다고 하지만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오랑캐들이 수렵하여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였다는 것이 고려 태조 초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즉 고구려가 망한 뒤 3백년이 지난 후 평양은 가시덤불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발해인들이 그 곳을 수렵하며 노닐었던 것을 그저 '오랑캐들이 침입하여 주변의 고을을 약탈했다'라고 한 것은 단지 같은 민족을 욕하는 커다란 해악을 두려워해서이다. 그러기에 홀한에서 패한 대씨가 고려로 투항하여 온 것 역시, 마치 집안이 망하면 오히려 가족끼리는 화목하여 지는 것과도 같은 것일 따름이다.
及夫묘淸之造亂, 奉命剿討者, 又是金富軾也. 金氏旣無信文, 又惡妙淸之妖.西京之破, 幷不深採其說, 下筆寫過, 只留「本神人王儉之宅」數句, 亦何足深責! 而渤海史, 幷不過問, 金氏於此, 終不免其咎矣. 盖, 金氏旣醉於漢籍, 又乏雄圖, 則雖有甚歎於吾邦之事, 却茫然不知其始末之處, 而亦無能而已矣. 我邦經史之禍, 其來久矣. 今浩歎無益, 亦復奈何.
무릇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여 전멸시킨 사람 또한 김부식이다. 김씨에게는 원래 믿을 만한 글이 없는데, 또한 묘청의 요사스러움과 서경의 파탄을 미워한다 하면서도 더군다나 이 모두에 대해 깊이 있게 그 내용을 캐지 않고 글을 써내려가며 단지 「본래 신인왕검이 자리잡은 곳이다」는 몇 구절만을 남겨 놓았으니, 어찌 그를 심하게 질책하는 것만으로 족하겠는가! 더욱이 발해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김씨는 이로서 언제까지나 그 허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씨는 본디 한나라의 서적에 빠져 있고, 또한 웅장한 계책 같은 것도 결핍된 자인지라, 비록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근심하여 한숨을 쉰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엉뚱하게도 그 시작과 끝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역사 서적이 입은 화는 이미 오래이니, 지금에 와서 아무리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한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按《遼史·地理志》, 有「顯州.奉先軍, 上,節度. 本渤海.顯德府地. 天顯三年, 遷東丹民居之, 升爲南京城. 天顯十三年, 改南京爲東京府曰遼陽…」等句. 今遼陽在蘇密以南六百餘里, 與淸平之說, 甚相逕庭. 且遼陽旣爲中京, 則西京當擬於遼西.臨潢等地, 以渤海舊疆考之, 決無是理. 황, 淸平諸說, 已有所據, 而《遼史》則乃元.至正中, 丞相脫脫等所撰也; 經金.宋交爭以後數三百年, 文獻自多不備, 傳說亦多失正鵠. 而渤海亡後, 其世族舊臣, 隨處擧兵, 殆將百年不息, 遼人多遷其民, 與漢民雜處, 遼西之地, 以至城邑, 冒稱渤海, 本名者, 不下數十, 元人修史者, 只憑古傳名字, 輒自斷之, 不亦소乎. 壬儉城者, 卽古語京城之意也. 平壤之意, 雖未詳, 亦必都城之義, 如新羅之徐羅伐.百濟之慰禮也.《括地志》云, 高麗治平壤城, 本王險城.《史記》.《漢書》[通及]
(及《通)典》, 皆有王險城字, 此又儉字之誤也. 此可續述焉.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현주(顯州)의 봉선군(奉先軍)은 상절도(上節度)로서 본래 발해의 현덕부(顯德府) 땅이다. 천현(天顯) 3년에 동란(東丹)13)의 백성을 옮겨 살게하고 승격시켜 남경성(南京城)으로 삼았다. 천현 13년에 남경을 고쳐 동경으로 삼고 관청을 두어 요양(遼陽)이라 하였다」14)는 등의 구절이 있는데, 지금의 요양은 소밀(蘇密)의 남쪽 600여 리에 있으니 청평의 말과는 서로 차이가 매우 심하다. 또한 요양이 이미 중경이 되었으니 곧 남경은 당연히 요서(遼西)나 임황(臨潢) 등의 땅에 비견되어야 하므로, 발해의 옛 강토로써 이를 고찰하여 보면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 더욱이 청평의 모든 말은 이미 그것이 근거하는 바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지만,《요사(遼史)》는 곧 원나라 중정(中正) 연간에 승상 탈탈(脫脫) 등이 찬술한 것으로서, 금나라와 송나라가 서로 다툰 이후 거의 3백년이 지난 뒤이기에 문헌이 많이 소실되었고 내려오는 얘기 또한 자못 그 올바름을 잃어 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발해가 망한 후 그 명문세가나 옛 신하들이 도처에서 병사를 일으킴이 거의 백년 동안 쉴 틈이 없자, 요나라 사람들이 그 백성들을 많이 옮겨 한나라 백성과 섞어 거처하게 하였기에 요서의 땅에는 성읍에 이르기까지 발해의 지명을 모방하여 부르게 되어서 본래의 지명이 남은 곳은 수십 곳을 넘지 못하였음에도, 원나라 사람이 엮은 역사는 단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름의 글자에만 의지해서 함부로 단정지어 버린 것이므로, 이 또한 소홀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15)
'임금성'이란 것은 옛날 말로 바로 '서울'이라는 의미이다. '평양'16)의 의미는 비록 상세하진 않지만 이 또한 반드시 '도읍한 읍성'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서라벌'이나 백제의 '위례'와 같을 것이다.《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려가 평양성에서 다스렸는데 바로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으며,《사기》와《한서》및《통전(通典)》에도 모두 '王險城'이란 글자가 있으니, 이 또한 '儉'자가 잘못 쓰여진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서술하겠다.
檀君旣建都於壬儉城, 乃築城郭, 建宮室, 置主命.主穀.主兵.主刑.主病.主善惡及主忽諸官, 以其子夫婁爲虎加, 총諸加者也. 神誌氏卽古神誌氏之後,下皆倣此爲馬加, 曰主命; 高矢氏爲牛加, 曰主穀; 蚩尤氏爲熊加, 曰主兵; 二子夫蘇爲鷹加, 曰主刑; 三子夫虞爲鷺加, 曰主病; [周]
(朱)因氏爲鶴加, 是主善惡; 余守己爲狗加, 是分管諸州也. 稱爲檀君八加, 乃殺白牛, 以祭天于太白之麓.
단군이 임금성에 도읍을 세워 성곽을 축조하고 궁실을 지으며 생명과 곡식과 병사와 형벌과 질병과 선·악과 및 지방의 일 등을 주관하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다. 아들 부루(夫婁)는 호가(虎加)로 삼아 모든 가(加)들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신지씨(즉 옛날 신지씨의 후손이다. 다음의 모든 것도 이와 같다)는 마가(馬加)로 삼아 생명을 주관하게 하고, 고시씨는 우가(牛加)로 삼아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씨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둘째아들 부소(夫蘇)는 응가(鷹加)로 삼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세째 아들 부우(夫虞)는 노가(鷺加)로 삼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주인씨는 학가(鶴加)로 삼아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는 구가(狗加)로 삼아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를 일컬어 '단군팔가(檀君八加)'라 하고는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舊禮, 凡祭天, 必先定吉日, 擇白牛而護養之, 及期, 宰殺以頭薦之於嶽瀆. 白頭, 牛首之名, 頗亦有因於此也. 盖祭天報本之禮, 始於檀君, 後世歷代諸國, 莫不祭天. (扶)
[夫]餘.濊(백)
[貊].馬韓.新羅.高句麗諸國以十月, 百濟以四仲月, 各有禱天.舞天.祭天.郊天.迎鼓.東盟之稱. 夫餘則又有, 祭天殺牛, 以제占吉凶之俗, 盖其源流久遠而沈漸成俗, 亦可知矣. 夫尊卑之禮, 必自敬鬼神而興, 上下尊卑之序定而先王經世之道行焉. 而敬神之禮, 莫大於祭天, 通萬古, 흘四方, 未有人而不知畏天者. 是以,《易》曰: 「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又曰: 「首出庶物, 萬邦咸寧.」 盖言其聖人, 체天而率民也.
옛 예절에 무릇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먼저 상서러운 날을 정하고, 흰소를 선택하여 이를 보호하여 기르다가, 날이 되면 잡아서 그 머리를 명산대천에 제물로 올렸다. '백두(白頭)'는 소의 머리를 이름하는 것이니 이 또한 여기에서 연유한 바가 있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의 모든 나라는 10월에 지냈고 백제는 사중월17)에 지냈으며, 각각 도천(禱天)·무천(舞天)·제천(祭天)·교천(郊天)·영고(迎鼓)·동맹(東盟)의 명칭이 있었다.18) 부여에서는 또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소를 잡아서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으니,19) 대개 그 원류가 오래되고 요원하지만 생활에 깊숙이 젖어 들어 풍속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저 존귀하고 비천함에 대한 예절은 반드시 귀신을 공경하면서부터 일어나게 되는 것이며, 위아래와 귀천의 순서가 정해지니 세상을 다스리는 선왕의 도가 행하여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신을 공경하는 예절 가운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만고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하늘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역(易)》에 이르기를 「크도다 건(乾)의 원(元)이여. 만물이 원(元)에 바탕하여 비롯하나니, 이에 하늘을 모두 다스리도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모든 것이 싹이 터 나오니 모든 나라가 다 평안하니라」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성인이 하늘의 뜻을 체득하고 그것으로 백성을 통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洪範八政, 三曰祀, 祀者, 所以通神明而報其本也. 是以, 陸有祭獸之豺, 水有祭魚之獺. 夫豺獺者, 禽獸也, 猶知報本之意, 황人而不知(其)報本之禮乎! 又황神市, 肇宅人界, 其降自天, 桓儉繼志述事, 未嘗少弛, 此桓儉所以, 재定厥鼎而便祭上天也. 且太白山者, 神市陟降之靈地也, 檀君踐(祚)
[조], 亦肇于厥地, 此又始行之, 于太白也. 是爲東方萬世之國典, 故古代國君, 必先敬事上帝卽一大主神[也]及檀君三神, 因以爲道.
홍범팔정(洪範八政)의 세번째는 '사(祀)'를 말하고 있는데, '사'란 신명(神明)과 통함으로써 그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다.20)
그러기에 육지에는 제사를 지내는 짐승인 승냥이가 있고, 물에는 제사를 지내는 고기인 수달이 있으니, 대저 승냥이며 수달은 짐승이면서도 오히려 근본에 보답하는 의미를 아는데 항차 사람이면서 근본에 보답하는 예절을 알지 못하겠는가! 또한 신시씨가 인간세계에 처음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환검은 그 뜻을 이어 이를 처리함에 조금도 소흘하지 않았으니, 그러한 까닭에 환검이 비로소 솥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태백산은 신시씨가 하늘을 오르내리던 신령스러운 땅이며, 단군의 등극 역시 그 땅에서 비롯하였으니, 이로서 그 제사를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나라의 제전이 되었으니, 고대의 나라 임금은 반드시 먼저 상제(上帝)(한 분의 큰 주신이다)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 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至於官職, 又有(太)
[大]仙.國仙.조衣之稱, 至若東明聖王, 有朝天之石, 明臨답夫, 曾帶조衣之職. 泉蓋蘇文, 入鳳凰山, 修鍊十年,□遂□萬古奇傑; 金庾信, 亦入中嶽石]21)
窟, 十年修道, 終爲名將, 助太宗致盛强. 渤海時有報本壇, 高麗時有聖帝祠, 遼有木葉山三神廟, 金有開天弘聖帝之廟. 我世宗, 設檀君廟於平壤, 世祖元年, 改位版曰「朝鮮始祖檀君之廟」. 盖, 神市氏之事, 聽者多疑其迂怪. 至今惟知崇檀君, 而不知其前實有神市氏之開創矣. 世俗不知原由, 只憑漢籍曰: 「仙敎是黃老餘流.」 殊不知, 以神設敎, 實自我神市之世也.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국선(國仙)·조의(조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니,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22)가 일찍이 조의(조衣)의 직책을 맡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발해 때는 보본단(報本壇)이 있었고, 고려 때는 성제사(聖帝祠)가 있었으며, 요나라에는 목엽산(木葉山)의 삼신묘(三神廟)가 있었고,23) 금나라에는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의 사당이 있었다.24)
우리 세종께서는 단군묘(檀君廟)를 평양에 설치하였는데, 세조 원년에 위패를 고쳐 '조선시조단군지묘(朝鮮始祖檀君之廟)'라 하였다.
대저 신시씨의 일을 들은 사람은 현실에 맞지 않고 괴이함에 의심을 많이 한다. 지금은 오직 단군만을 숭상할 줄 알 뿐, 그 앞에 신시씨가 세상을 열어 창조하였음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세속은 그 연유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단지 한나라의 서적에 의지하여 이르기를 「선교(仙敎)는 황노(黃老)의 한 부류이다」라고 하니, 신인으로서 가르침을 베푼 것이 우리 신시씨의 세상에서부터 비롯하였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檀君旣祭天而立敎率民, 而致道化行數年, 率土之民, 皆洽其化, 陶鈞停毒, 無爲而治, 此檀君神德之所致也, 乃立國之本也. 後可續述焉.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통솔하며 도를 궁구하여 교화를 행한 지 수년만에 강토의 백성에게 모두 교화가 두루 미치니, 세상은 잘 다스려지고 모든 악독함이 사라지는 등 행함이 없이도 잘 다스려졌으며, 이는 단군의 신령스러운 덕의 소치로서 곧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후에 계속하여 말하고자 한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浿水之北, 曰平壤, 卽第二(王)
[壬]儉城也. 盖, 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록府地, 神州是也. 高句麗.國內.桓都古城之址, 在其境內焉.」 則浿水之非獨爲今之大同江, 明矣.
우수하(牛首河)의 물가에 거처한 지 10년만에 백산(白山)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25)이라 하니 곧 두번째의 임금성이다. 대저 속말의 땅은 바람 기운에 냉기가 돌고 토양이 척박하여 비록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농사를 짓는 이로움은 남쪽 땅만 못하였다. 게다가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기에 남쪽으로의 교통에는 자연히 많은 불편이 있었으니, 이것이 반드시 그 이유일 것이다. 청평이 말하기를 「단씨(檀氏)의 치세 때 모두 네 차레 솥을 옮겼는데, 그 두번째는 패수의 북쪽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발해의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그 곳이다. 고구려의 국내성 및 환도성(桓都城)의 옛 성터가 그 경내에 있다」고 하였으니,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26)
按《新唐書·渤海傳》曰: 「高麗(古)
[故]地爲西京, 曰鴨(綠)
[록]府, 領神.豊.桓.正四州.」《遼史·地理志》曰: 「록州, 鴨록軍, 節度, 本高麗(古)
[故]國, 渤海號西京.鴨록府, 都督神.桓.豊.正四州事. 故縣三, 神鹿.神化.劒門, 皆廢.」 又
曰: 「桓州, 高麗.中都城, 古縣三, 桓都.神鄕.淇水, 皆廢.」 夫, 渤海承高句麗(之)後統, 高
句麗復出於夫餘, 則渤海之世, 猶有古史之傳者, 想不少矣. 或曰: 「平壤之敗李勣, 盡燒宮室
庫藏, 復虜其公侯世族, 則史籍亦不免灰燼矣, 渤海, 安得傳其史乎.」 余以(謂)
[爲]不然. 渤海.高王, 乃高句麗舊將也. 高句麗之亡, 徙居營州, 及看藎榮之亂, 與乞四比羽,
領衆東還, 麗.鞨之衆, 響應而起. 盖其舊國宿將, 如百濟之黑齒常之明矣, 其麾下, 想多舊國
遺臣, 能博通古今者. (耳)
[且]自高句麗亡後, 距高王之興, 僅二十七八年事也, 古史能無得傳乎. 且以文勢言之, 則神
州當爲渤海.西京所在鴨록府地, 而神州.桓州之名, 又有近於神市.桓儉等字. 황, 神市.桓儉,
人每認爲一人, 至今擧世殆然. 而神州屬縣, 有神化.神鹿等地; 桓州屬縣, 又有桓都.神鄕.淇
水之名. 桓都者, 盖高句麗之丸都也. 丸都之名, 旣出於《魏志》.《北史》等書, 則桓.丸之
誤, 固不可知, 而渤海旣以桓州.桓都定名, 則其或原於慕遠之意. 神鄕則, 有寓神市之鄕之義
也. 神化則, 言神人之化也. 神鹿之稱, (丸)
[尤]益可奇. 황古來, 稱桓儉曰神人, 則神.桓等名, 決非偶然. 且淇水,《元.一統志》作浿水,
又與前述浿水之北之說, 暗合. 按漢籍, 說浿水及平壤者, 頗多, 今不可便述. 而神州.桓州.神
化.神鹿.桓都.神鄕.浿水之名, 旣與檀君古事, 多合, 則檀君第二之平壤, 當在於鴨水之北.
《신당서·발해전》에 따르면 「고려의 옛 땅을 서경으로 삼아 압록부(鴨록府)로 이름하고 신(神)·환(桓)·풍(豊)·정(正)의 4주를 거느리게 하였다」라 하였으며,《요사·지리지》에는 「녹주(록州)의 압록군(鴨록軍)은 절도(節度)이다. 본래 고려의 옛 국토로서 발해가 서경압록부라 불렀다. 모두 신(神)·환(桓)·풍(豊)·정(正) 등 4주의 일을 감독한다. 옛 현인 신록(神鹿)·신화(神化)·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환주(桓州)는 고려의 중도성(中都城)이며 옛 현인 환도(桓都)·신향(神鄕)·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다. 무릇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 훗날 그 지역을 다스렸고, 고구려는 다시 부여로부터 나왔으니, 곧 발해의 세대에는 아직까지 옛 역사가 전해지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평양이 이적(李勣)에게 패하여 궁궐이며 곳간이 남김없이 불타 버리고, 게다가 공경대부며 명문세족들은 포로로 잡혀갔기에 역사 서적 역시 재가 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인데 발해가 어떻게 그 역사를 전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발해의 고왕은 바로 옛 고구려의 장수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영주(營州)로 옮겨 거처하다가 신영(藎榮)의 난을 보고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무리를 영도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니,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어났다. 대저 그는 옛 나라의 노련한 장수로서 마치 백제의 흑치상지27)와 같음이 분명하니, 생각건대 그 휘하에는 옛 나라의 신하였던 자로서 능히 고금의 일에 널리 통하는 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구려가 망한 후로부터 고왕이 일어서기까지의 사이는 겨우 27,8년의 일이니 옛 역사가 능히 전해진 것이 없었겠는가.
또한 문장의 흐름을 보아 말하더라도 곧 신주(神州)가 마땅히 발해의 서경이 있는 압록부 땅이며, 신주(神州)나 환주(桓州) 등의 이름 또한 신시(神市)나 환검(桓儉) 등의 글자에 가까운 바가 있다. 항차 신시씨와 환검신인을 사람들마다 모두 한 사람으로 여기더니, 지금은 모든 세상이 거의 다 그렇게 여긴다. 신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신화(神化)와 신록(神鹿) 등의 땅이 있고, 환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또 환도(桓都)와 신향(神鄕) 및 기수(淇水) 등의 이름이 있다. 환도(桓都)는 아마도 고구려의 환도(丸都)일 것이다. '환도(丸都)'라는 이름은《위지(魏志)》나《북사(北史)》등의 책에도 이미 나오는데, 곧 '桓'이 '丸'의 잘못 된 표기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발해에서는 이미 환주(桓州)와 환도(桓都)로 이름을 바로잡아 놓았으니, 이는 아마도 오랜 옛날을 그리는 뜻에 그 근원을 두었으리라.
'신향'이라 함은 곧 신시씨에게 의지하며 살던 마을이라는 뜻이 있으며, '신화'라 함은 곧 신인의 교화를 말하는 것이다. '신록'의 명칭은 더욱 기이하다. 항차 예로부터 환검(桓儉)을 일컬어 신인(神人)이라 하였으니, 곧 '神'·'桓'등의 이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기수(淇水)는《원일통지(元一統志)》에 패수(浿水)로 되어 있으며, 또 앞에서 서술한 '패수의 북쪽'이라는 예기와 암암리에 부합한다. 한나라 서적에 의거하면 패수와 평양을 말한 것이 자못 많으나 지금 다 말할 수는 없다. 신주·환주·신화·신록·환도·신향·패수 등의 이름은 이미 단군의 옛 일들과 많이 부합되니, 곧 단군의 두번째 도읍인 평양은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且《三國史記》, 高句麗.琉璃王二十一年, 薛支見王曰: 「臣逐豕至慰那岩,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미鹿魚鱉之産, 王若移都, 則不惟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云云. 故明年冬十月, 王遷都國內, 則其地, 非但山水險阻, 原野開활, 亦可知, 適於耕農矣. 夫, 古者建都, 必取險固殷富及交通之便. 今平壤.松京.漢陽之地, 莫不皆然, 長安.洛陽, 恒爲漢土建都之地, 亦此故也. 然則, 檀君之世, 民物漸繁, 交通愈緊, 且耕農之業, 逐漸而興, 則其捨粟末之地, 而南遷於浿水之濱, 以圖後日之隆運, 盖可想見矣.
또한《삼국사기》의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설지(薛支)가 왕을 뵙고 아뢰기를 「신이 희생(犧牲)인 돼지를 쫓아 위나암(慰那岩)에 이르렀더니, 그 곳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은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고, 또한 순록과 물고기 및 자라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일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면 단지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 또한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다음해 겨울 10월에 왕이 도읍을 국내(國內)로 옮겼으니, 곧 그 땅은 단지 산수가 험준하고 들판이 광활할 뿐만 아니라 또한 농사짓기에 적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무릇 옛날에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험준하여 견고하며 산물이 풍부하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취하였다. 지금의 평양이나 송경과 한양 등지의 땅이 모두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며, 장안과 낙양이 항상 한나라에서 도읍을 세우는 땅이 됨은 또한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그러한 즉, 단군의 세대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로 번창해지고 교통이 더욱 요긴해지며 또한 농사짓는 일도 따라서 점차 일어나게 되니, 그 속말(粟末) 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패수의 물가로 옮겨와 후일의 융성한 운세를 도모하게 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又按《唐書·地理志》曰: 「自鴨록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 東北三十里, 至泊작口, 得渤海之境; 又溯流二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 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 王所都; 又正東如北六百里, 至渤海王城」云. 今, 自鴨綠江口, 約行四百餘里, 乃得婆저江合流處, 又行二百里, 至江界.滿浦鎭隔江處, 田野開豁, 山河固密. 盖, 檀君南遷四百餘里, 定都于古鹽難水之東, 浿水之北, 渤海.神州.神化等地, 殆無疑, 而渤海之時, 猶傳其蹟也.
또한《당서》의 <지리지>에 의하면 「압록강 어귀로부터 배로 1백여 리 가서, 또 작은 배로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작口)에 이르러 발해와의 경계에 닿는다. 2백리를 또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읍성에 이르는데 옛날 고려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동북으로 2백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르고, 또 육지로 4백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바로 동쪽에서 북으로 6백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닿는다」28)라고 하였다.
지금 압록강 어귀로부터 약 4백여 리를 가면 이내 파저강(婆猪江)과 합류하는 곳에 이르고, 또 2백리를 가면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강의 맞은편에 닿게 되는데, 밭과 들이 광활하고 산과 강이 견고하게 밀집되어 있다. 대저 단군이 남쪽으로 4백여 리를 옮겨와서 옛 염난수(鹽難水)의 동쪽이요 패수의 북쪽인 발해의 신주·신화 등지의 땅에 도읍을 정하였음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으며, 발해 때는 여전히 그 유적이 전해졌었다.
乃復祭天而薦新居, 築城郭, 建宮室, 浚溝혁, 開田陌, 勸農桑, 治漁獵, 使諸民進用餘之物, 以補國用, 民皆熙熙而樂之. 時有, 蒼鹿遊郊外, 靑龍見朝天池. 檀君乃出巡, 至南海, 登甲比古次之山, 設壇祭天. 還至海上, 赤龍呈祥, 神女奉합, 有一童子, 衣緋衣, 從합中出謁, 檀君愛之, 因姓曰緋, 名曰天生, 遂爲南海上長. 及還至平壤, 有三異人, 自東方渡浿水而至, 首曰仙羅, 次曰道羅, 又其次曰東武. 於是因二龍之祥, 改虎加曰龍加, 使仙羅主之, 道羅爲鶴加, 東武爲狗加. 又因蒼鹿之瑞, 改鷺加曰鹿加, 依前, 使夫虞主之, 制治比前更完矣.
이에 다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거처로 옮겨 성곽을 짓고 궁실을 세우며, 봇도랑을 준설하고 밭두둑 길을 열어 농업과 누에치기를 권장하였으며, 어로와 수렵을 가르치고 모든 백성들에게 쓰고 남은 물자를 진상하게 하여 이로서 나라의 살림에 보태게 하니, 백성들은 모두 화합하며 즐거워하였다. 이때 푸른 사슴이 교외에서 뛰어 놀았으며, 푸른 용이 조천지(朝天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군은 이에 순행을 나가서, 남해에 이르러 갑비고차산(甲比古次山)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이르니 붉은 용이 상서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신녀가 함을 받들어 바치는데, 한 동자가 붉은 비단 옷을 입고 그 함속에서 나와 단군에게 알현하기에, 그를 사랑스럽게 여겨 성을 비(緋)라 하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지어 주었더니 마침내 남해상장(南海上長)이 되었다.
돌아와 평양에 이르니 3명의 비범한 사람이 동방으로부터 패수를 건너와 있었는데, 그 첫째는 선라(仙羅)라 하였고, 다음은 도라(道羅)라 하였으며, 또 그 다음은 동무(東武)라 하였다. 이에 두마리 용의 상서러움이 있었다고 하여 호가(虎加)를 고쳐 용가(龍加)라 이름하고 선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도라는 학가(鶴加)로 삼고 동무는 구가(狗加)로 삼았다. 또 푸른 사슴의 길함으로 인해 노가(鷺加)를 녹가(鹿加)로 고쳐 부르고 예전처럼 부우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니, 제도의 다스려짐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기大荒, 西率알견兪,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정碧, 曰藍國, 宅奄慮忽. 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 河嶽(鹿병)
[추莊], 風氣勁雄, 曰루진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治肅愼忽.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封[周](周)
朱因氏之後, 於蓋馬國. 余守己爲(穢)
[濊]君. 夫蘇.夫虞及少子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眞番.夫餘諸國, 是也. 其後, 夫婁又封東來三人於各地, 後世之沃沮.卒本.沸流之稱, 皆起於其所封國名也. 通檀氏之世, 凡大國九, 小國十二, 分治天下諸州, 今不可詳矣.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29) 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루진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30)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 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31)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32)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徒)
[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神誌氏受封於루진國, 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後世, 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 추健勁悍.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 漢曰읍婁, 元魏曰勿吉, 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 金.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양, 五穀豊肥. 民皆, 衣輕(暖)
[煖]而食肥양,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夫, 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 故《管子》曰: 「倉름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若使民, 終歲견견以絲粟爲慮, 則復奚暇言禮義哉! 雖然, 天覆地載, 區隅各殊, 於是氣有寒溫, 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何是! 三家者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異, 而其果應亦自不同者也.
치우씨는 남국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해대(海岱)33) 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한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
신지씨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흑수(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하면서도 검약하니 건장하고도 억세어 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한(漢)나라는 읍루(읍婁)34)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35) 때는 물길(勿吉)36) 이라 하였으며, 수와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금나라와 여진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
고시씨는 청구국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 무릇 음식이 풍족하고 물자의 유통이 원활한 연후에야 나라가 견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관자(管子)》에서 이르기를 「곳간이 가득하고 서야 예절을 알 수 있으며,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고 서야 영광됨과 수치스러움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평생을 곁눈짓이나 하며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게 한다면 곧 누가 다시 한가롭게 예의며 의리를 말하려 들겠는가.
비록 다 같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으나 거처하는 구석은 각기 다르기에, 기후는 찬 곳과 따뜻한 곳이 있고 토양은 비옥한 곳과 척박한 곳이 있으니, 마치 하늘의 혜택과 땅의 이로움이 고르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이를 어찌하겠는가! 세 집안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가 그러한 까닭으로 각기 다르기에 그 결과 또한 응당 같지 않은 것이다.
檀君旣封諸侯, 天下淸靜. 居十年, 有南夷之患, 卽甲比古次以南夷人也, 乃遣夫餘, 率兵定之. 後益遣夫蘇.夫虞, 築城於甲比古次, 以備南巡, 今江華.三郞城, 是也. 摩利山又有塹城壇, 此卽檀君設壇祭天之頭嶽也. 盖水行藉舟, 陸行藉車, 泥行乘취, 山行則국, 此乃上古交通之具. 而陸行不如水行之易, 是以, 上古建都, 必擇37) 臨水之地. 凡人居之稱美者, 必曰阻山帶水, 或依山傍水.背山臨流者, 其所從來尙矣. 故檀君之世, 必使依山臨水而結居, 耕農漁獵, 隨便可行.《山海經》所謂: 「北海有國, 名曰朝鮮, 天毒育也其人, 水居외(受) [愛]也人」者, 非但, 其聲敎之澤, 洽被四린, 亦可窺見, 其結居之風矣. 夫檀君祭天, 非但頭嶽也. 北狩則祭太白, 南巡則祭頭嶽也. 而甲比古次傍在海濱, 通航容易, 則南巡之際, 必致祭於壇所也. 황, 其地孤絶靜謐, 山岳淨潔, 海天收霽, 則정深晶瑩之氣, 使人自感, 神明之陟降者耶. 余嘗(遊) [游]觀其地, 祭壇疊石, 爲之上圓下方, 而太多頹이, 仁祖十七年改築云. 噫! 平壤故城, (王) [壬]儉舊闕, 今不留敗石殘礎, 獨一壘天壇, 得保其形骸, 豈僻處海외, 人跡稀到故耶! 余實不勝, 追遠之悲矣.
단군이 제후들을 모두 봉하니 천하는 맑고도 고요하였다. 10년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후에 부소와 부우를 아울러 파견하여 갑비고차에 성을 쌓아 이로서 남쪽을 순행할 때를 대비하게 하니, 지금의 강화 삼랑성(三郞城)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또한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두악(頭嶽)이다.38) 대저 물로 다닐 때는 배에 의지하고, 뭍으로 다닐 때는 수레에 의지하며, 진흙 위를 다닐 때는 썰매를 타고, 산으로 다닐 때는 징나막신을 신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랜 옛적 교통의 도구이다. 그러나 뭍으로 다니는 것이 물로 다니는 것 보다 쉽지 않았던 까닭에 옛날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물에 잇대어 있는 땅을 택하였다. 무릇 사람이 거처하는 곳 가운데 좋은 곳이라 일컫는 곳은 반드시 '산을 막아서며 물을 두르고 있다'거나, '산에 의지하고 물을 곁에 두고 있다'거나,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다'는 등으로 말하는 있는데, 그러한 장소는 예로부터 바라던 곳이었다. 때문에 단군의 시대에 반드시 산을 의지하고 물을 끼고 있는 곳에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여서 농사짓고 어로와 수렵을 함에 편히 행할 수 있게 하였다.《산해경(山海經)》39) 에 이른바 「북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이름한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毒은 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40)
물가에 살면서 남을 아끼고 사랑(외는 사랑함을 의미한다)한다」41)고 한 것은, 비단 그 덕스러운 교화의 은택이 사방에 흡족히 두루 미친 것 뿐만이 아니라 집을 지어 거처하는 기풍 또한 엿볼 수 있게 한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은 단지 두악(頭嶽)에서 만이 아니었다. 북으로 사냥을 나가면 곧 태백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으로 순행할 때는 곧 두악에서 제사를 지냈다. 갑비고차는 바닷가에 있어서 배를 통하기에 용이하므로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단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항차 그 땅은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 고요하고 평온하며 산악은 정결하고 바다와 하늘은 가든히 개어 있으니, 곧 안존하고 깊으며 밝게 빛나는 기운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명이 오르내리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 내가 그 땅을 유람하며 살펴보니 제단은 돌을 포개어 위는 둥글고 아래로는 네모지게 하였는데, 아주 많이 무너져 있던 것을 인조(仁祖) 17년에 다시 고쳐서 쌓았다고 한다. 오호라! 평양의 옛 읍성과 임금성의 옛 궁궐은 이제 부서진 초석의 조각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유독 한 채의 천단(天壇)만이 그 모습의 골격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는 편벽된 바다의 후미진 곳이기에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닿은 까닭이 어찌 아니겠는가. 나는 실로 옛일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 懷襄遼滿之(時)
[野], 浿水漲溢平壤沈潛. 乃遣四子, 遍相土地之宜, 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今文化.九月山下, 有莊莊坪, 卽其地也. 余嘗觀其地, 方數百里無大河, 而水勢東走, 原土高燥, 可避西來之水矣. 乃結廬阿斯達下, 使夫婁, 盡濟平壤之民, 復治平水土屢年(以)
[而]後功完, 唐莊之民, 亦已安土而樂居矣. 今俗士或云: 「檀君遭洪水, 使彭吳治山川, 奠民居…」云云, 而《漢書·食貨志》明書: 「武帝卽位數年, 彭吳穿濊(백)
[貊].朝鮮」等句, 則是乃, 東西有兩個彭吳, 相前後而同掌朝鮮水土之役也, 史上豈有, 如此奇巧事耶. 盖, 夫婁[與]弗虞同音, 且漢音.虞.吳相(同)
[通], 而彭.弗兩字之初聲, 皆與夫音相近, 則後人忘夫婁字而只記其音, 又訛而只記彭吳也. 今, 人家有夫婁壇地者, 籬落淨潔處, 築土爲壇, 土器盛禾穀, 置於壇上, 編(緝)
[葺]藁艸掩之, 每十月, 必薦之以新穀, 或稱業主嘉利, 卽報賽夫婁氏治水奠居之義, 賴爲鎭護之神[也].
나라를 다스린지 30여 년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는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아래 장장평(莊莊坪)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내가 그 땅을 살펴보니, 사방 수백리에 큰 물줄기가 없고 물의 형세는 동쪽으로 내달으며 넓은 들녘의 땅은 높고도 건조하여 서쪽에서 오는 물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아사달 아래에 띠풀집을 짓고 부루로 하여금 평양의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게 하고, 다시 물과 흙을 다스리기를 몇 년 한 후에 그 일을 온전하게 하니, 당장(唐莊)의 백성 또한 그 땅에서 편안하게 기거하며 즐겁게 생활하게 되었다.
지금의 세속 선비들이 혹 이르기를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오(彭吳)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고……」라고 하는데,《한서·식화지》에 「무제가 즉위한지 몇 년만에 팽오가 예맥 및 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는 등의 문구가 분명히 적혀 있으니, 이는 곧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팽오가 연이어 앞뒤로 있으면서 조선의 물과 흙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인데, 역사에 어찌 이와 같이 기이하고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아마도 '부루(夫婁)'와 '불우(弗虞)'는 음이 같고, 또한 한나라 소리로 '우(憂)'와 '오(吳)'는 서로 통하며 '팽(彭)'과 '불(弗)' 두 글자의 초성이 모두 '부(夫)'의 음과 서로 가까우므로, 훗날의 사람들이 '부루(夫婁)'라는 글자는 잊어버리고 단지 그 소리만을 기록하면서, 또한 잘못 전하여져 단지 '팽오(彭吳)'라고 만 기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집에는 '부루단지(夫婁壇地)'라는 것이 있는데, 울타리를 친 깨끗한 곳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토기에 곡식을 담아 제단 위에 놓아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그것을 덮어두고 매 10월마다 반드시 새로운 곡식을 올리는 것으로서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곧 부루씨가 물을 다스리고 거처를 정하여 준 것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미이니, 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누르고 백성을 보호하는 신이 된 것이다.
夫婁旣平水土仍舊而奠民居, 萬民咸懷其德. 及至粗定宅宇而, 濕汚之氣蒸成려疫, 罹病死者甚多, 夫虞幷醫藥而治之. 又値猛獸毒충乘間滋殖, 殆將橫行民間, 夫蘇乃演高矢舊法, 以乾艾爲料, 金石相擊, 因此廣造火種, 燻燒山澤, 於是獸충遠遁而其害漸除. 今人, 多携取火之物, 有金.石.艾三種, 必冠之以夫蘇之名, 如夫蘇鐵.夫蘇石.夫蘇羽者, 皆原於夫蘇氏之完其功也. 夫婁, 又使民帶劒戟而行, 及至關嶺협액, 必積石爲堆, 行逢猛獸則用以爲備, 後世所謂石子軍者, (爲)
[謂]東國用武之一目, 而實原於此也. 今遺俗尙存而, 野수村氓, 以此謂石城隍, 頗懷畏敬之意. 何後俗之陵夷, 如此其甚耶!
부루가 물과 흙을 예전과 같이 모두 바르게 하고 백성들을 그 땅에 편안하게 살게 하니 만백성은 모두가 그 덕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대충이나마 집들을 정하고 보니 축축하고 더러운 기운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병에 걸려 죽는 자가 많아서 부우가 의술과 약으로 이를 치료하였다. 또한 맹수와 독충이 그 틈을 타고 무수히 번식하여 머지않아 민간에 거리낌없이 돌아다닐 것 같기에, 부소가 이에 고시씨의 옛법을 헤아려 마른 쑥을 재료로 하고 쇠와 돌을 맞부딧쳐 이로서 불씨를 만들어 산과 못 등을 태우니, 그제야 맹수와 독충이 멀리 숨어 버리고 그 해악이 점차 제거되었다. 불을 일으키는 물건으로 지금의 사람들이 많이 지니고 있는 것에는 쇠와 돌과 쑥의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부소(夫蘇)'라는 이름을 머리에 붙여 '부싯쇠(夫蘇鐵)'·'부싯돌(夫蘇石)'·'부싯깃(夫蘇羽)'이라 하니, 모두 부소씨가 그 공덕을 온전히 하였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부루는 또 백성들로 하여금 검과 창을 지니고 다니게 하였으며, 관문과 산꼭대기의 고갯길 등 좁고 험한 길에는 반드시 돌을 쌓아 돌무더기를 만들어 놓고 지나다니다가 맹수를 만나면 곧 그것을 사용하여 위험에 대비케 하였다. 후세에 이른바 '석자군(石子軍)'이라 하는 것이 우리나라 무예의 한 종목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은 실로 여기에 그 기원을 둔다. 지금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시골의 늙은이와 들녘의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석성황(石城隍)'이라 하며 자못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뜻을 품고 있으니, 뒷날에 와서 풍속의 쇠퇴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42)
初, 神市之末, 蚩尤氏兄弟, 雖自탁鹿退歸, 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천織牧, 資以爲業. 且, 南鄙海島之民, 皆以빈珠魚貝, 相交易於漢土, 稍稍住息於濱海之地. 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 與漢土之民, 交(遊)
[游]而錯居.《尙書》所稱, 우夷.萊夷.淮夷.島夷者, 皆是也.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우夷)와 래이(萊夷) 및 회이(淮夷)와 도이(島夷)43) 등이 모두 그들이다.
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 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 後之辰.弁諸族, 皆是也.
부여가 남쪽의 이인(夷人)들을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왕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辰)·변(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御國四十餘載, 而有알견兪之亂. 알견兪者, 험윤之屬也, 洪水之際, 僥倖得免, 及看水土재定而州里蕭然, 乃乘흔東侵, 其勢頗猛, 卽使夫餘會集中外之兵, 討平之. 乃益封夫餘, 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王)[壬]儉城, 令夫蘇修樂浪忽, 夫虞監唐莊京, 更封高矢氏於南方之地.
나라를 다스린지 40여 년만에 설유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진 것을 보고는 이내 그 틈을 타고 동쪽으로 침략해 오니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하였는데,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44)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의 평양이다)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금성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