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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

'베다'- 인더스 문명의 몰락

작성자뽀야|작성시간22.02.06|조회수493 목록 댓글 0

인더스 문명의 몰락과 유적

 

 

하라파 이전의 초기 도시의 발전 단계는 기원전 3000년경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도시의 발전은 기원전 2500년에서 도시가 멸망하던 기원전 1500년경까지로 추측되고 있다. 1,00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강대한 도시국가를 형성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두 유적지가 지하에 깊이 묻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대홍수로 인한 인더스 강물의 범람과 같은 재난으로 땅속에 묻힌 경우다. 다른 하나는 이민족의 침입이나 다른 전쟁으로 인해 멸망되었던 것이 오랜 세월 속에 폐허로 묻혀 있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추측이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아리안 족의 침입으로 인한 파괴의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아리안 족의 유입 시기도 기원전 1500년이고 보면, 고대 도시가 멸망하던 시기에 아리안 족이 침입하여 완전히 폐허로 만들고, 새로운 아리안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후 오랜 세월을 거치는 과정에서 사막화가 진행되어 도시 문명 전체가 지하 속으로 묻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모헨조다로 유적지는 인도의 고대 도시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줄 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 전체 도시 윤곽은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각각 직사각형의 격자 모양으로 구역이 분리되어 있는데, 구역 한 칸의 길이는 가로 1,200피트(약 366미터)에 세로 800피트(약 244미터) 정도 된다. 중앙 통로 양쪽으로는 벽돌로 길게 세워진 벽들의 허물어진 폐허만이 나지막하게 남아 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없지만 바닥의 경계나 높이와 위치 등을 보아서 그 장소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곡물 저장 창고와 왕궁, 숙소의 유적지까지 설계도를 내려다보듯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물도 구하기 힘든 지대에서 우물과 목욕탕 및 화장실, 그리고 낙하를 이용한 배수시설마저 갖춘 것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위생적 구조 설계는 당시의 발달한 문화뿐만 아니라 종교적 제의를 위한 정화(淨化) 시설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모헨조다로의 요새는 ‘거대한 목욕탕’이라 불리기도 한다.

 

요새의 중앙부에는 탁 트인 정원에 연못같이 낮게 파인 공동 목욕탕이 있는데 사방에서 그곳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공동 목욕탕 외에 작은 특실 목욕탕도 연결되어 있다. 거대한 이슬람 사원 내부에 들어가면 의례를 위한 정화의 목욕탕이 있듯이, 이곳에도 정화를 위한 욕실이 중앙에 마련되어 있다. 이밖에 사원(寺院)도 중요한 유적지로 남아 있지만 모헨조다로에서 그것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미궁 속에 남아 있다.

 

모헨조다로의 대목욕장으로서, 구운 벽돌로 건축된 정교한 축조물이다.?

 

목욕시설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종교적인 세정(洗淨)의식에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공동의 목욕장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거대한 유적지가 분포되어 있는데, 커다란 성채와 주거지가 1920년대에 와서야 발굴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종교 지도자가 세속적 통치권을 행사하던 고대의 관행과 풍속에 따르면 건물의 넓고 큰 공공장소 한두 곳은 사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는 언젠가 어느 유적지에서 발견된 것처럼, “거룩한 나무”가 자리했던 것을 둘러싼 표지라든가 석상(石像) 등의 종교적 요소를 많은 공공건물에서 간직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인더스의 예술, 조각과 인장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유적지 외에도 인더스 문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인더스의 예술이다. 지하유적지에서 발굴된 수많은 적갈색 점토 소조상(terra?cotta)들은 대부분이 기원전 2000~3000년 전의 것으로 당시의 종교적 풍토를 잘 보여준다. 나도 현지에서 여러 가지 모조품(replica)을 실물 교육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구입해왔다. 도시의 웅장한 규모와는 대조적으로, 발굴된 소조상들은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로 무수한 가축과 인물 또는 농부들의 삶의 모습 등을 보여준다. 대부분 점토로 만든 것으로, 돌이나 청동 재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특히 가축들은 대부분이 수컷이고 등에 혹이 달린 황소가 눈에 많이 띈다. 이는 일하는 황소의 모습을 통해서 농경사회의 번영을 기원하는 염원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사람 모양은 대부분 여성이다. 펑퍼짐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점토 여성상은 가슴의 넓은 목걸이와 정교한 머리 장식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상 가운데는 풍만한 젖가슴을 한 여인과 임산부를 뜻하는 배부른 여인상이 있는데, 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볼 수 있는 다산(多産)을 염원한 상징이다.?

 

점토상 이외의 예술품으로 특징적인 것은 돌에 새겨진 인장(印章)이다. 이 인장의 대부분은 평평하고 부드러운 동석(凍石, soap stone)에 4분의 3 또는 4분의 1인치 크기의 사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인더스 문자로 여러 가지 모양을 그룹지어 새겨두었다. 대부분의 인더스 문자는 바로 이 '도장 속에 새겨진 문자와 상징'으로 남아 있는데, 아직도 이 문자를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해독이 어려운 까닭은 문자의 어지러운 조합과 독특한 상징적 수법 때문이다. 새겨진 문양들은 주로 동물을 포함한 자연물인데, 짧은 뿔의 황소로부터 머리 뒤로 커다란 목정이 달린 황소, 외뿔의 무소, 코끼리, 악어 등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동물들의 모습은 거의 인장에서만 발견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이해된 바로는 동물에 대한 보호와 존경심이 깃든 종교적 성상(聖像)으로 추앙되었던 것으로 본다. 특히 물소 앞에서 줄지어 엎드려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동물숭배와 종교적 제의를 보여주는 특징적인 단면이기도 하다. 이 인장은 인더스 강변을 따라 활발하게 움직였던 무역 상인들이 주로 사용했거나 재산권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기원전 2000년경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황소 인장. 진흙판 위에 글자와 그림을 새겨서 도드라지게 찍어낸 작품으로서 고대 인도인들의 생활 풍습을 엿보게 한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원통형 인장의 영향과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상거래에서 사용되는 봉인(封印)의 역할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인장에 새겨진 인간의 모습을 살펴보면, 대부분 제의적 의식과 신성(神性)을 지닌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양쪽으로 무릎을 벌리고 두 발을 모은 채, 팔찌를 찬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지막한 걸상에 앉아 있는 남자가 머리에는 뿔처럼 생긴 장식을 하고 있다.

 

또 다른 형태의 인장을 살펴보면, 앉아 있는 남자의 의자 아래로 왼쪽에 코끼리와 호랑이가 있고 오른쪽에는 무소와 물소 외에 작은 뿔을 가진 소와 염소가 있다. 많은 동물들을 좌우에 거느린 위풍당당한 이러한 모습은, 사제 혹은 조물주와 같은 신으로서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남자의 성기(性器)가 우뚝 발기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는데 이는 남성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것으로 남근(男根) 숭배사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인장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모습 중에 황소와 무소, 코끼리, 호랑이는 물론 뱀이나 악어는 물리적?성적(性的) 능력과 다산(多産), 그리고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특히 뿔을 가진 동물은 인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그림으로 돋보이게 조각되어 있는데, 하나로 우뚝 솟은 뿔은 남자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여러 인장들' 그림 출처 - 나무위키

 

 

이같이 생산력을 중시하고 과시하는 남성 성기 숭배는 인더스 유적지의 여러 곳에서 발굴되는 ‘링가’(lingas: 생식력의 상징으로서의 남근상男根像. 후대 힌두교에서 시바 신의 상징으로 등장한다)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농업 중심 사회가 다산과 풍요를 빌던 민간 풍속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초기 베다시대의 신들과 아리아인의 세계관 ?

 

 

 

아리아인의 종교와 신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오로지 그들의 경전인 베다를 통해서 알 수 있다. ?

 

베다’의 의미는 ‘지식의 책’ 인 동시에 계시(?ruti)되었다는 점에서 ‘거룩한 가르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들에 대한 찬가를 모은 문헌집 역시 베다라고 부른다. ‘지식’을 뜻하는 ‘베다’(veda)는 원래 고대의 현자(賢者, ??i)들에게 ‘계시’된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초기 아리아인의 신은 데바’(devas)라는 명칭 하나로 통칭되었으나, 그 신들의 수는 대략 33개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신들의 이름은 후기로 갈수록 분화되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해졌다. 신들의 숫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들의 힘과 기능으로서, 어떻게 자연현상과 조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신들의 역할과 기능에 따라 신의 정체성도 각각 다르다.

 

신들의 역할과 기능은 대개 세 그룹으로 구분된다. 천상(天上)의 신, 대기(大氣)의 신, 지상(地上)의 신으로, 이 세 영역이 신들의 거주지와 활동 무대가 되며 이런 구분은 자연의 힘과도 결부된다. 아리아인에게 자연 세계는 삶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힘이었기 때문에 자연의 힘에 대해 인격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아리아인의 도래 이전에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도 자연의 힘을 숭배한 흔적이 있는데, 아리아인에 비교하면 주로 동물에 대한 숭배가 컸다. 이는 인더스인이 강줄기를 따라 살면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물소와 같이 힘 있는 동물을 숭상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아리아인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와 불을 더욱 상대적으로 숭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농경을 위주로 정착 생활을 했던 인더스인과 유목 생활을 해야 했던 아리아인의 전투적 삶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광활한 벌판과 초목을 달리며 새로운 정복지를 찾아 나섰던 아리아 유목민들은 야생동물이나 가축보다는 하늘과 태양 그리고 자연 질서의 배후에 있는 힘을 더욱 숭상하면서 우주적인 신들에 대한 관념을 키워갔다.?

 

자연의 우주적 통치에 대한 관심은 인도?유럽 계열의 유산이기도 하지만, 특히 아리아인의 천상의 신들에게서 그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장 오래된 신명(神名) 가운데 하나는 ‘디야우스 피트리’(Dyaus Pitri), 곧 ‘하늘의 아버지’다. 이 ‘디야우스’ 신은 그리스의 제우스(Zeus) 신과 로마의 주피터(Jupiter) 신에 비교 되는 존재다. 아리아인이 중시한 바루나(Varuna)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Ouranos, Ο?ρνο?)와 후대에 알려진 이란인의 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에 비교 될 수 있는 신이다.?

 

 

 

 

 

희생제의와 『리그베다』의 탄생

 

 

아리아인의 희생제의는 동물이나 가축을 불태워 신에게 바치는 번제(燔祭), 곧 불의 제사였다. 불은 인간 생활에 가장 소중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불이 신성시되는 것은 고대인의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또한 불은 식생활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소멸의 힘과 정화(淨化)의 힘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불은 가정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신성시되어 숭배를 받았으며, 사람들은 불을 향해 음식을 바쳤다.?

 

인도 아리아인의 초기 제사 형태는 바로 이러한 불의 제사였으며, 점차 불을 둘러싼 ‘거룩한 공간’ 속에서 여러 중요한 신들이 초대되었다. 신들이 초대된 까닭은 자연을 지배하는 힘들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 때문이었다. 베다시대의 아리아인은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영들의 세계를 숭상했고, 인간에게 재난과 복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이러한 신령한 세계의 신들에게 보호와 은총을 빌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

 

예배하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초대된 신들은 불속에서 가장 중요한 제물을 공급받았다. 특히 불의 신 아그니는 불속에서 제공된 희생물들을 다른 신에게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것이 아리아인이 창출해낸 베다 종교의식의 출발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의례가 처음부터 분명한 형식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불의 신 아그니를 숭배하면서 제의가 점차 형식화되고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초대된 신들은 음식만 제공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형태의 선물을 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시인(詩人)으로서의 사제(司祭)가 신들에 대한 찬가를 부르면서 신에게 음식과 선물을 제공했다. 찬가의 내용은 아리아인의 신화가 섞여 구성되었고, 희생제의의 목적에 따라 서정(抒情)적 형태로 불렸다. 전형적인 형태의 서정적 찬가는 다정하고 공경과 경외심 가득한 분위기에서 낭송되었다. 이러한 기본적 틀 안에서 시인?사제들은 각자의 형편에 걸맞은 시적 찬가의 형식을 점차 다양하게 발전시켜갔다.

 

이처럼 베다시대에 고도의 예술적 감수성을 지닌 시인?사제들이 영감을 받은 대로 찬가를 지어 부른 내용들이 하나둘씩 편집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베다의 초기 형태인 『리그베다』다.

 

『리그베다』 본집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사제들의 해석과 의례적 전승 속에 변화와 확충을 겪게 되었다. 사제가 전담하던 의례는 점차 아리아인의 가정에서 개인이 직접 희생제의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제들은 차별화를 위해 의례의 형식과 절차를 좀더 전문화하고, 새로운 찬가들을 더욱 보충하게 됐다.

 

『리그베다』의 본집이 완성될 무렵에는 사제 집단에서 희생제의의 일반적인 형태가 일치되면서, 좀더 세련미를 갖추어 체계화된 것으로 보인다. 제의가 대체로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이루어진 반면에, 전문 사제들은 부유한 계층의 후원자들에게서 선물과 일정한 대가를 제공받고 제의를 수행해주었다. 물론 물질적 봉헌을 바치는 제의의 목적은 지상과 천상에서의 복락이다. 희생제의를 받을 수 있는 신들만이 인간에게 무병장수와 같은 축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희생제의가 세분되고 전문화될수록 사제의 권위와 가치는 높아졌고, 유능한 사제 밑에서 수학하는 제자집단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들은 희생제의의 기술을 익힐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의를 개발하거나 혁신해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새로운 찬가의 보급과 교육은 제의의 중요한 요소를 차지했다.

 

이렇게 전문화된 제의는 점차 세련된 형태로 절차와 과정이 구체화되면서 규범적인 형태의 제의로 발전되어갔다.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행하는 제의도 사제들이 전문화시킨 모범적 절차를 따라 행하게 되었고, 사제들은 아리아인의 풍부한 민간전승의 풍속과 신화들을 흡수해가면서 제의 전통을 확대 발전시켜나갔던 것이다.

 

사제들이 행하는 전문적인 스라우타(?rauta: 베다의 찬가를 이용) 제의와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행해지는 그리하(Griha: 가정) 제의는 물론 구분되어 있었지만 모두가 사제들의 영향권 아래서 보급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이 집행하는 스라우타 제의는 일반 가정에서 행해지는 가정 제의보다는 훨씬 정교하게 발전된 것이었다. 특히 사제들이 제의에 사용하는 불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달랐다.?

 

아리아인의 가정에서 매일 직접 개인들이 봉헌했던 단순한 제의(homa)는 아침에 불의 신 아그니와 창조주 프라자파티(Praj?pati)에게, 그리고 저녁에는 태양신 수리아(S?rya)와 프라자파티에게 요리한 음식을 바치는 것이었다. 매일 드리는 제사 외에도 신년과 만월(滿月), 첫 수확기, 자녀의 탄생 혹은 건물을 신축했을 경우 등 수많은 절기와 시기마다 베다의 찬가와 함께 제의가 행해졌다.

 

이러한 제의 형식은 큰 변화를 겪지 않은 채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제사의 의미는 점차 '신화적인 내용'에서 '우주 철학적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것이 '후대에 베다의 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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