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거석문화사에 우뚝 선 고인돌
△ 강화도 하점면 부근리에있는 고인돌인 사적 137호 강화지석묘. 한겨레 자료사진 | ||
흔히들 돌을 무지나 아둔함, 그리고 무언에 빗댄다. 그러나 인간의 슬기가 스며들었을 때, 돌은 ‘불멸의 상징’이나 ‘수호신’ 으로 둔갑되기도 하고, 말도 한다. 그래서 버려졌던 큰 돌들이 인간의 주목을 받고, 인간은 이러한 돌들과 긴 시간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는데, 그 역사는 백년도 채 안된다.
거석이란 선사 시대에 무엇을 기리거나 상징하기 위하여 큰 돌로 만든 구조물, 즉 거석기념물을 말하며, 이러한 거석기념물을 수반하는 여러 문화를 통칭 거석문화라고 한다. 원래 거석기념물은 유럽의 대서양 연안지대에서 발견된 거석분묘나 원시 신앙과 관련된 각종 거석유물을 가리켰으나, 지금에 와서는 유럽뿐만 아니라, 그밖의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거석유물들을 통틀어 일컫고 있다. 거석문화는 대체로 신석기 시대에 출현하여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 시대 초기까지의 긴 세월 동안 생존해온 끈덕진 문화다.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최근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의 일부 도서 지방에서는 여전히 거석기념물을 축조하는 이른바 ‘살아있는 거석문화’가 남아있어 생생한 연구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거석기념물은 지역에 따라 제작 편년이나 형태 및 기능이 조금씩 다르지만, 총체적으로 유형화하여 고찰할 수 있다. 긴 기둥 모양의 돌 하나를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멘히르(독석)와 돌기둥을 두 개 세우고 그 위에 평평한 돌을 한 개 가로얹은 트릴리톤, 그리고 돌을 여러 개 세운 위에 평평한 뚜껑돌을 얹은 돌멘이 있다. 일명 지석(支石)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이 돌멘은 좁은 의미에서 거석기념물을 뜻하리만큼 거석기념물 중에서 가장 많고, 또 분포지도 제일 넓다. 그래서 거석문화 연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다음으로, 돌멘 앞에 큰 돌로 출입하는 통로를 만들고 봉토를 쌓은 코리도툼과 기둥 모양의 돌을 여러 줄 배열한 알리뉴망(열석), 여러 개의 돌을 일정한 간격에 따라 원형으로 둘러서게 한 크롬렉(환상열석)도 있다. 그밖에 사람의 형상을 한 석상도 거석기념물에 속한다.
△ 자료: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2001) |
거석기념물은 북유럽과 서유럽으로부터 지중해 연안과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를 거쳐 멀리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동서 광활한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범세계적 문화권을 이루고 있다. 그 편년을 보면 유럽과 지중해 일원에서는 신석기 시대에, 그 이동 지역은 청동기 이후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자칫 거석문화의 ‘서방기원설’이나 ‘동전설’을 유발시킬 수 있는데, 아직은 그 확실한 전거가 잡히지 않고 있다. 문명의 전파는 단순한 편년의 차이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다. 거석유물은 주로 큰 바다와 인접한 곳에 밀집되어 있으면서 태양 숭배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남방의 양석(陽石)해양문화의 소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소속이야 어떻든간에 거석문화는 오래된 하나의 큰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권은 자생한 것인지, 아니면 교류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자생치고는 문화의 보편성이 너무나 우연히, 그리고 너무나 넓은 지역에서 실현된 것이 못내 의아스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교류에 의한 것이라면, 엄청난 거석이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시점에서 추단할 수 있는 것은 자생설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거석의 이동이 아닌 그 문화 창조자들의 이동이나 만남에 의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더 크다는 점이다.
이러한 거석문화권의 중추에 우리 한반도가 우뚝 서있다. 중국 동북 요녕 지방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서부의 규슈 지방을 망라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이른바 ‘고여있는 돌’이란 뜻의 고인돌(돌멘)이 수많이 발견되는 까닭에 이 지역을 ‘동북아시아 돌멘권’이란 하나의 거석문화 분포권으로 묶을 수 있다. 이 분포권에서 우리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그 가운데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도 가장 많다. 고인돌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널려있는데, 대개는 무리를 지어 있어 그 분포밀도가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형태나 부장품도 다양하다. 알려지기로는 지금 세계에 약 5만 5천기의 각종 거석유물이 있는데, 그 중 고인돌은 그리 많지 않다. 거석유물이 많다고 하는 아일랜드에도 고인돌은 고작 1500 기밖에 안된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약 4만 기(북한에 1만 4~5천 기)가 집중되어 있다. 그 중 전남 지방에서만 발견된 것이 2만여 기나 되니, 정말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고인돌 밀집지역이다. 그래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화순·고창·강화 지역의 고인돌군을 세계문화유산 997호로 등록하였다. 고인돌이 대표적 거석기념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커다란 문화적 긍지를 갖게 된다.
△ 영국남부 웨섹스 지방의 환상열석(스톤헨지) 복원도. 태양숭배와 관련된 거석기념물로서 원내구조물은 하지의 일출을 관측하기 위한것으로 보고있음. |
한반도 돌멘의 기원에 관해서는 남방의 벼농사 문화와 함께 전해졌다는 남방기원설과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져있는 상자식 돌관에서 원류를 찾는 북방기원설, 그리고 자생설의 세 가지가 있다. 아직은 어느 것 하나도 논거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고인돌이 거석기념물 본연의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다른 지역 거석문화와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 (위로부터) ○고창 도산리 야산 꼭대기 인가 옆의 북방식 고인돌 |
이러한 얼과 넋은 겨레의 갈라짐을 넘어딛고 오늘로 이어지고 있다. 2년 전 남북한 고인돌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던 만남의 물꼬를 트는 순간이었다. 반 세기란 한맺힌 세월이 고인돌의 이름으로부터 그 기원과 편년에 이르기까지 남북한 학자들 사이에 얕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본의 아니게 하나의 역사를 놓고 서로 다르게 둘로 써왔다. 어찌 고인돌뿐이랴. 우리 겨레 앞에 나선 숙명적 과제는 하나를 둘 아닌 하나로만 되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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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유라시아의 슬기를 아우른 동검
△ 칼몸체가 반듯하게 가는 직선을 이룬 한국식 세형동검의 복원품. 청동기 시대의 상징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도판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02>(사계절 펴냄, 2000) | ||
얄팍한 ‘왜학(倭學)’의 곡필과 우리의 후진 속에 오롯한 문명사의 한 장이 자칫 지워질 뻔했다. 옛 이야기가 아니다. 1920년대부터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한국에 청동기 시대가 없었다는 ‘청동기 부재설’을 꾸며내면서 제멋대로 신석기 시대와 철기 시대 사이에 이른바 ‘금석병용기 시대’라는 얼토당토 않는 ‘시대’를 끼워넣었다. 그네들의 말대로 금속붙이와 돌붙이를 함께 썼다면, 사실상 그 시대는 철기 시대이지 무슨 ‘병용기 시대’는 아니다. 이러한 속내평도 모른 채 후진으로 무지몰각했던 우리는 그네들의 주장을 그렇거니 하고 믿어왔다.
잃었던 빛을 되찾는다는 광복은 우리를 잠에서 깨웠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못하고 일시 미로에 빠지기도 했었다. 북녘에만 청동기 시대가 있고 남녘에는 없었다는 이른바 ‘국부존재설’이 일부에서나마 나돌았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북을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청동유물이 속속 발견되면서 우리의 문명사는 원상을 복원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찬란한 청동기 문화가 그 면모를 하나씩 드러내고 있다.
원래 구리는 기원전 6천년께 처음으로 오늘날 중동 지방에서 채취되기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4천년께에 이르러 비로소 구리와 주석을 합금시킨 청동이 만들어졌다. 그 후 청동기는 유럽과 중앙아시아, 시베리아를 거쳐 기원전 1천년기쯤에 동아시아에까지 전해진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보면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4천년부터 1천년까지 약 3천년간 지속된다.
모든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발생으로부터 조락에 이르기까지 양상이나 규모에서 하나 같지는 않고 일정한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각 지역의 청동기 문화를 통틀어 보면, 청동기를 비롯한 합금 용기와 이기가 사용되고, 도시문명이 발달하며, 축력에 의한 정착농경이 시작되고, 원시적인 종교와 예술이 출현하는 등 전대와 구별되는 일련의 보편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청동기 문화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 청동기 시대의 편년에 관해서는 그 시작을 어떤 기준에서 보는가에 따라 학계, 특히 남북한 학계의 견해는 좀 다르다. 편년의 하한을 기원전 4~3세기께로 보는 데는 대체로 일치하나, 상한에 대해서는 기원전 2천년설(북한)과 기원전 1천년설(남한)로 엇갈리고 있다. 편년이야 어떻든간에 우리 나라에서 청동기 문화가 고조선 시대에 꽃피었다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만큼 고조선은 발달된 청동기 문화로 인류문명의 창달에 응분의 기여를 하였다. 고조선 사람들은 구리와 주석말고도 남달리 아연을 섞어 현대의 주조기술로도 그려내기 어려운 불가사의의 잔무늬거울(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과 같은 아름답고 질 좋은 각종 청동기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와의 교류를 통해 청동기 문화를 한결 살찌웠다.
유럽서 출현한 안테나식 동검 시베리아 거치며 새모양 얻고
한반도선 칼몸좁은세형동검 발전 유라시아 문명융화의 본보기로
△ 이땅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한국식 동검의 칼몸과 칼자루끝장식. 도판출처 대원사의 ‘빛깔있는 책들’시리즈 <청동기문화>(이건무 지음, 2000) |
이와 더불어 한반도에서 출토된 조형(鳥形)안테나식 세형동검은 청동기 시대 유라시아와 한국의 만남이 빚어낸 상징적 융합물이다. 안테나식 검이란 칼자루 양끝이 벌레의 더듬이(촉각)처럼 위로 뻗어 올라갔거나, 둥글게 구부러져서 고사리 같은 타래 모양(와형)을 이루고 있는 형식의 검을 말한다. 이러한 검은 본래 중부 유럽의 청동기 시대 말기(기원전 9~8세기)에서 철기 시대에 걸쳐 성행한 검 형식이다. 조형안테나식 세형동검이란 새 모양의 칼자루를 갖춘 한국 특유의 좁은 놋단검을 말한다. 중국 동북 요녕성 일대에서 한반도를 거쳐 서부 일본에 이르는 지역에서 이러한 동검(일명 촉각식동검)이 발견되는데, 그 발생지에 관해서는 아시아니 유럽이니 하는 등 이론이 있어서, 막연하게 ‘북방식 검’이라고도 부른다. 이에 관한 판명은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조형안테나식 세형동검의 대표적 유물이 청동기 시대 말기 또는 철기 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 비산동 분묘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곳에서 모두 5점의 세형동검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 한 점이 바로 이런 동검이다. 길이 32.2cm, 너비 3.1cm, 칼자루 길이 12.5cm의 이 동검의 칼자루는 대나무 모양으로 마디가 있고 칼자루 끝 장식은 오리 모양의 새 두 마리가 머리를 틀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칼자루가 평양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 요녕성 지방이나 일본 대마도에서도 이러한 유형의 동검이 발견되었다. 이상 세 나라에서 발굴된 유사 유물들의 실연대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약 3~4백년간에 걸친 것으로 추정된다.
△ 오늘날의 정밀한 세공기술로도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청동기시대 잔무늬거울. 태양, 물방울 등의 자연 이미지를 본떠 새긴 동심원, 빛살 따위의 기하학적 무늬가 촘촘하게 새겨졌다. 다뉴세문경으로도 불린다. 도판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 02> |
이렇게 독일에서 출현한 안테나식 동검이 동진하여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 몽골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곳에 유행하던 스키타이 동물 장식의 영향을 받아 조형(새 모양)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다시 한국을 비롯한 세형동검 문화권에 들어와서는 칼몸이 좁아져서 마침내 특유의 조형안테나식 세형동검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형의 동검이 일본까지 전파되어 중국 동북지역과 한국, 일본을 망라하는 이른바 ‘조형안테나식 세형동검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이 문화권의 중심에 가장 세련된 융합 동검을 만들어낸 한국이 자리하고 있다.
문명은 교류하는 과정에서 이질적 문명간의 접촉으로 인해 이러저러한 접변(接變)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한 접변에는 상이한 문명 요소가 건설적으로 조화되어 일어나는 융합(融合)과 피차가 아닌 제3의 새로운 문명이 형성되는 융화(融化), 그리고 일방적 흡수인 동화(同化)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그중 융합은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전통문명의 내용을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등 순기능적 구실을 한다. 이에 비해 융화는 그 기능이 유동적일 뿐만 아니라, 드문 현상이며, 동화는 전통문명을 말살하는 역기능을 한다. 역사는 문명간의 조화로운 융합만이 인류가 공생공영하는 길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보다시피 조형안테나식 세형동검은 구성 요소에서 유럽의 안테나식 칼자루에 북방 유목문화의 동물장식을 곁들인 후 한국 고유의 좁은 칼몸과 접목된 청동기 시대의 전형적인 융합물이다. 실로 유라시아 문화의 슬기를 보듬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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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천년의 유대를 지켜온 벼
△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1만7000~1만3000년 전 볍씨. 출처는 ‘소로리 사이버박물관’( http://www.sorori.com | ||
소로리 볍씨 한톨 사해동포와 입맞춤
우리와 남들을 이어주는 유대관계 치고 벼만큼 끈끈하고 오래된 것은 없다. 그것은 아마 벼야말로 ‘벼문화권’이란 하나의 유대로 묶여있는 사람들 모두의 생명원으로서 수천년 동안 서로간의 문화적 공유성과 상관성을 줄곧 유지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한 유대는 결코 끊기질 않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벼는 물리적으로 우리의 생명원일 뿐만 아니라, 생태적으로도 우리의 보호원이다. 벼의 껍질을 벗겨낸 알맹이인 쌀은 우리네 주식이라서 그 중요성에 관해서는 구태여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거니와, 속겨는 사료나 비료, 기름이나 제약 원료로 쓰이며, 겉겨는 탄화(炭化)시켜 흡수제로 쓰기도 하고, 그대로는 포장용으로 인기가 있다. 그런가 하면 볏짚은 또 볏짚대로 가축사료나 방한재료로 쓸모가 있다. 이렇게 보면 벼는 어느 부분 하나 내버려지는 것이 없다.
그뿐이랴. 벼는 생태적으로 환경보전 기능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홍수가 지는 여름철은 벼농사가 한창인 때라서 논은 홍수조절 기능을 하는 거대한 댐과 같다. 보통 논둑 높이를 27cm로 치면 우리나라 전체 논(134만 5천 헥타르)에 가둘 수 있는 물은 춘천댐 저수량의 24배에 맞먹는 약 36억톤이나 된다고 한다. 다목적댐 건설비용으로 환산하면 무려 15조원이나 드는 댐을 공짜로 얻는 셈이라고 하니, 실로 크나큰 혜택이 아닐 수 없다. 그 밖에 논은 비탈진 밭에서 씻겨내리는 흙을 받아서 보존하기도 하고, 수질과 대기를 정화하는 역할도 해낸다.
바로 이 때문에 벼는 아득한 그 옛날부터 삶의 버팀목으로 우리를 지켜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벼를 심어 쌀밥을 먹기 시작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낙점을 보지못하고 있다. 그것은 유물의 발굴에 따라 그 상한선이 대단히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 학자들이 20년대 김해 패총에서 나온 유물에 관해 연구한 결과를 좇아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고작 기원전 1세기께야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벼농사는 이미 기원전 3세기에 벼농사를 받아들인 일본으로부터 유입되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70~80년대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와 평양시 삼석구 남경, 충남 부여 송국리 등 여러 유적에서 기원전 1천년께의 탄화미가 속속 출토됨으로써 벼농사의 시작을 청동기 시대로 밀어올렸다. 그러다가 9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기도 김포시 가현리와 경기도 고양군 일산 가와지유적에서 기원전 2천년께의 탄화한 볍씨가 발견되자, 다시 그 상한을 신석기 시대 후기로 올려잡았다.
그러다가 벼의 역사에서 획을 그을만한 놀라운 발견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다. 1998년과 2001년 조사한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유적이 그곳인데, 지금으로부터 약 1만 7000~1만 3000년 전의 토탄층(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흙층)에서 모두 59톨의 볍씨(고대벼와 유사한 벼)가 발견되었다. 여러 학문분야의 공동연구를 진행하여 얻은 결과가 2002년 제1회 소로리볍씨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되었다. 이듬해 워싱턴에서 열린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에서도 그것이 소개되어 국제학계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을 비롯한 세계적 언론매체들도 앞을 다투어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로리볍씨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진, 중국 양자강 유역 옥섬암(玉蟾岩) 유적에서 출토된 볍씨(약 1만 1000년 전)보다 수천년 앞선,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짚풀문화와 소박한 밥상의 나라
1만7천~1만3천년전 토탄층서 나온 충북 청원의 가장 오래된 볍씨
그리로부터 수천년간 벼는 우리와 세계를 이어주는 끈끈한 끈
△ 초기 철기시대 대전 괴정동 석관묘에서 출토된 농경문 청동기. 위는 이랑이 또렷한 밭과 쌍날따비, 괭이 등이 그려진 세부그림이고 아래는 실제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탄화미 같은 실물과 함께 볍씨 자국 찍힌 청동기 시대의 토기조각, 벼농사와 연관된 농경문청동기나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같은 껴묻거리(반출품)도 이곳저곳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 농경문청동기에는 이랑이 또렷한 밭과 쌍날따비, 괭이 등이 그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충남 보령 관창리와 전남 무안 양장리 유지에서는 논과 밭 같은 유구(遺構)도 발견되었다. 또한 고대의 논농사와 관련한 문헌기록도 적지않다. 최초의 문헌은 ‘변진국들은 오곡과 벼 재배에 알맞다’라고 쓴 중국 사서 <삼국지>의 ‘위지(魏志)-변진(弁辰)’조이며, 국내 사서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백제 2대 문루왕(文婁王)이 즉위 6년(32년) 2월에 ‘명을 내려 처음으로 벼를 심을 도전(稻田: 논)을 만들게 하였다”는 대목이 보인다. 이러한 제반 사실은 우리나라의 벼농사가 청동기 시대에 본격화했음을 말해준다.
비록 벼농사는 본격화했지만, 쌀이 우리네 주식이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벼농사를 하기 전까지 우리 조상들의 주식은 조나 보리 같은 잡곡이었다. 쌀 생산이 일취월장으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5~6세기까지도 쌀은 귀족 식품에 불과하였으며, 고려 시대에도 물가의 기준이나 봉급의 대상이 될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조선 시대에 와서야 곡물의 주종으로 떠올랐다. 원래 벼는 남북 위도 40도 이내에서 연중 서리 없는 날이 150일 이상인 고온다습한 고장(연강수량 1,000~1,200mm)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였으나, 오랜 경작과정에서 변이(變異)가 생겨 지금은 그런 지리조건에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
아무튼 벼농사는 지난 수천년 동안 지구 방방곡곡으로 펴져나가 하나의 범지구적 문화권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5대주의 110여 개 나라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주역은 재배면적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아시아다. 그 동단에 ‘소로리카’를 갈무리한 우리나라가 자리하고 있다. 벼가 이토록 널리 퍼지고 오래 생존하면서 끈덕진 유대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독특한 친화성과 순화력(馴化力) 때문이다. 본래는 고온다습한 지역의 식물이었으나, 재배법의 개선에 따라 북위 53도까지의 한랭건조한 지역에서도 재배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그 품종이 5천 여종에 달하였다. ‘소로리카’가 환경에 적응해 유전적으로 변화한 순화벼라든가, 1971년 우리나라에서 3원교배(元交配)로 탄생시킨 다수확품종 ‘통일벼’는 그 생생한 실례들이다.
벼농사의 긴 역사가 보여주듯이, 친화성과 순화력은 문명의 산생과 성장을 낳으며, 문명의 보편성과 개별성을 조화시켜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것을 이탈하거나 상실했을 때, 문명은 생존근거를 잃게 되어 결국 도태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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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중 교류의 서막을 연 서복
△ 서복의 고향인 중국 장쑤(강소)성 간위(감유)현 서복사당에 있는 좌상과 서복 일행이 내한할 때 이용했을 범선. 서귀포시 제주서복연구회,<정방폭포서복유적조사보고서>(1992년) 8쪽. | ||
불로초 얻었는가, 해동땅 건너온 그대
어릴적 어른들로부터 불로초를 구하러 진시황이 동남동녀 수천 명을 우리나라쪽에 보내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 선약을 구해 갔는지, 못갔는지는 저마다 하는 소리가 달라서 종잡을 수 없었고, 또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통 오리무중이었다. 그저 심심파적의 흥미거리로만 들렸다. 어쩌면 이것이 전설의 매력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매력은 허망만이 아닌, 사실의 투영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전설은 상상과 가공이라는 허구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일정한 사실성과 역사성을 반영한다. 그래서 전설은 오래도록 전승되며, 또한 전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방증적으로 조명하게 된다.
이 불로초 전설의 중심에는 서복(徐福:일명 서불)이라는 방사(方士)가 서 있다. 사실 서복이 바다로 동쪽을 향해 갔다는 ‘출해동도(出海東渡)’는 기원전 3세기께 중국과 한국, 일본 세 나라의 관계에 얽힌 역사적 현장으로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일본 사람들은 서복을 고대 일본문명을 일으킨 문명의 개조(開祖)로 보고 있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여 관련 논문만도 200편 넘게 내놓았으며, 정기적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당사자인 우리는 거의 소외되어 있다. 2년 전, 섬 고장 서귀포에서 어렵사리 ‘서복과 동아시아 문화교류’란 이름 아래 3국 학술모임을 한번 열었지만, 뭍 사람치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중앙 언론에 보도 한 줄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사람들의 무관심과는 관계없이 전설과 그 주인공은 오늘날까지도 이러저러한 문헌기록과 유적유물, 그리고 민간 구전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중국의 사서 <사기>와 <삼국지>, <후한서>에 나오는 서복의 동도와 관련된 7종의 기사를 종합해 보면, 진시황은 방사 서복의 거듭되는 청을 받고 선약(불로초)을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수천 명과 함께 오곡과 쇠뇌까지 지닌 각종 공장들을 바다에 들여보냈는데, 그들이 택한 행선지는 ‘가기에 멀지 않은’ 발해 한가운데에 있는 봉래산(蓬萊山)과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삼신산(三神山)이다. 그런데 선약을 구할 수 없게 된 서복 일행은 죽음이 두려워서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회계(會稽) 바다 밖에 있는 단주(亶洲) 혹은, ‘평원광택(平原廣澤: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이 있는 그 어느 곳에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서귀포 정방폭포에 ‘이곳 지나가다’ 글 남기고
남해 금산 바위엔 ‘해 향해 예 올렸다’ 기록
한-중교류 서막이었나
이 내용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서복 일행의 내한(來韓)과 관련된 것이다. 당초 행선지로 잡은 삼신산과 그 산들이 소재하는 발해, 그리고 종착했다는 단주가 다 한반도 판도 내에 속한다. 단군 이래 우리 겨레의 고유 신앙체계인 신선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삼신산은 오늘의 금강산과 지리산, 한라산을 가리킨다. 또 진대의 발해는 오늘의 발해와 황해를 망라한 한반도 주변의 해역이다. 회계는 오늘의 중국 절강성 회계이고, 단주는 선인들이 사는 동해 상에서 회계와 교역을 하는 곳이라고 하니, 십중팔구는 한반도 내의 어느 곳일 것이다. 단,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이 있는 땅이 어디인가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서복이 일본에 이르렀다는 유일한 증거로 삼으며, 거기에 봉래산을 부사산(鳧繭箚내세우며 한술 더 뜬다. 신빙성이 없는 억지주장일 따름이다.
이러한 문헌기록과 더불어 서복의 내한과 관련된 유적유물로는 마애각(磨崖刻:절벽에 새긴 글) 5점과 암각(岩刻:바위에 새긴 글) 1점, 총 6점이 있는데, 그 중 명문을 남긴 대표적 유물은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의 마애각과 경남 남해군 금산(錦山)의 암각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방폭포의 암벽에 ‘서복과지(徐福過之)’, 즉 ‘서복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글이 옛 중국 문자의 하나인 올챙이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금석학자이기도 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인 1840~49년 탁본했다고 한다. 19세기 말의 <삼한금석록>과 제주도 설화 속에도 ‘서복과지’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기록과 전승으로 보아, 조선조 말엽 당시에는 마애각이 있었던 듯하며, 광복 뒤까지도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암각은 폭포 위에 전분공장이 들어서면서 폐수가 흘러내려 지워졌다고 전해진다.
다음으로, 지금도 또렷한 남해 암각은 금산의 한 평평한 바위 위에 새겨진 금석문(너비 1×0.5m)인데, 그 내용은 여태껏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16세기 전반 이맥(李陌)은 그 옛날 환웅시대의 수렵도 같기는 하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고 하였다. 19세기 말엽에 와서야 이 각문을 서복의 내한과 관련시켜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왔다. 금석문 학자 오경석은 탁본을 해 가지고 중국에 간 뒤 상형문 학자인 하추도(何秋濤)로부터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즉 ‘서불이 일어나서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예를 올렸다’라는 해석을 받고 돌아왔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각문에 대한 논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크게는 글자를 새겼다는 각문설(刻文說)과 그림을 새겼다는 각화설(刻畵說)이 맞서고 있다. 각문설에는 그것이 고문자이거나 상형문자, 혹은 진나라의 전자(篆字)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각화설에는 물형그림이나 수렵그림, 혹은 태양을 상징한 그림이라는 주장이 있다.
진시황의 명 받자옵고 아직 동정인 수천명 데리고
뱃길이라 몇 만리 신선의 나라 찾은 서복
전설로만 남겨둘수야‥
이와 같이 아직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이 암각이 서복의 내한을 실증하는 유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래된 유물로서 서복 내한의 전설적 요소가 깊이 배어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고장(남해도)의 서리곶을 비롯해 주변 가까이에 관련 전설이 여러 건 있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이 암각이 갖는 상징적 의미나 시사하는 바를 결코 무시 못할 것이다. 그밖에 서복의 내한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전설은 사실성을 한결 보강해준다. 서복이 제주도 영주산에서 ‘시로미’(한라산 17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라는 상록관목의 완두 크기만한 식용 과실)란 ‘불로초’를 구해서 득의양양한 채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오른 포구라는 데서 ‘서귀포’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지리산 어구에 자리한 전남 구례군 마산면 냉천마을은 서불과 동남동녀 500명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삼신산(지리산)에 가면서 이 마을에 들러 샘물을 마셔보니 물이 하도 차서 ‘냉천마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섬진강 지류인 구례의 서시천(徐市川, 서불의 불(市)자를 시(市)자로 오인) 이름도 같은 경우다.
이와 더불어 서복전설은 계발과 교훈을 보듬어주는 문학적 모티브로까지 승화하여 귀중한 민족문학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가사 묶음집인 <경세설(警世說)> <백발가(白髮歌)>에는 서복의 맹랑한 구약 허사를 빗대어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개탄한다. “서복의 동남동녀 돌어온지 뉘 들었노, 불사약 어디 있고 불로초 보았느냐, …가는 청춘 뉘 막으며 오는 백발 뉘 제할까‘. <심청전>에도 이러한 대목이 있다. ”동남동녀 실었으니 진시황의 불로초 캐러 가는 배인가, 방사 서시(서불의 오자) 없으니 한무제의 신선 찾는 배인가, 가는 길에 죽자해도 뱃사람들이 지키고, 살아가자 해도 돌아갈 나라는 멀고 아득하다“. 배에 실려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심청의 신세를 서복이 당한 비운에 비추어 애통해 하고 있다. 조선조 문인 신광한도 <기재기이(企齋記異)>에서 진시황의 허망한 꿈은 ”천하를 혼란시키고 만세에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면서 ”신선이 될 분수도 없으면서 신선이 되는 약을 먹는 자는 한갓 그 수명을 재촉하기에 족할 따름이다“라고 신랄한 풍자를 보내고 있다. 그밖에 유명한 ’금란굴 전설‘은 불로초를 구하려는 것처럼 헛된 망상을 안고 무모하게 이땅을 범접하는 자들은 죽임만 당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런 여러가지 사실은 전설 속의 서복을 2천여 년 전 한중 교류의 역사적 현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물론, 진나라 이전 시대에도 고조선과의 인적 , 물적 교류가 있어왔지만, 서복 일행처럼 수천 명이 대선단을 만들어 곡식과 무기를 싣고 오간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중국 해양사에서도 서복의 출해동도는 원양 항해의 효시라고 평가한다. 서복 일행은 낭아란 곳에서 출항해 산동반도의 연해를 따라 북상한 다음 발해를 건너 요동반도의 남해안을 거쳐 한반도의 서해안을 남하해 제주도나 남해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고대 한중 해로의 연해로를 따른 셈이다. 그 선단 규모에 관해 동남동녀 3000명을 포함해 승선인원을 약 5300명으로 계산하는 학자가 있다. 아무튼 전말이야 어떻게 되었든간에 서복은 고대 한중 교류의 여명기에 그 서막을 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8) 만남의 인연을 맺어준 허황옥
△ (좌로부터)수로왕비 허황옥 영정·수로왕 영정 | ||
임찾아온 뱃길2만리
2천년 전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로 이 땅에 온, 현숙한 외방 여인 허황옥(許黃玉:허왕후)은 지금도 우리 속에 살아 있다. 2년 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에서는 36억 아시아인의 하나됨을 상징하여 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이 재현되었다. 해마다 치러지는 김해의 수로제에서 왕은 왕후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다. 몇 해 전에는 인도의 한 점성가가 한국에서 차기 ‘구국의 큰 별’은 가락 김씨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는 솔깃한 점괘를 내려 대선 정국에 흥미를 더한 일도 있었다. 모두가 시조 할머니의 가호와 보우를 비는 발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허황옥은 살아 있는 설화의 주인공으로 오늘날까지도 맥맥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설화의 얼개를 보면, 16살의 아유타국(阿踰陀國:아요디야) 공주 허황옥은 하늘이 내린 가락국 왕을 찾아가 배필이 되라는 부모의 분부를 받들고 기원후 48년에 2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붉은 돛을 단 큰 배를 타고 장장 2만5천리의 긴 항행 끝에 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이른다. 영접을 받으며 상륙한 다음 비달치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는 장유사(長遊寺)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궁에 가서 상면한다.
하늘이 내린 황금알에서 태어나 배필도 역시 하늘이 점지할 것이라고 믿어오던 가락국 시조 수로왕은 허황옥을 반가이 맞이한다. 둘은 2박 3일의 합환식(결혼식)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온다. 그 후 140여 년을 해로하면서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두었는데, 둘째와 셋째에게 왕비와 같은 허씨 성을 따르게 하여 그들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아들 가운데 7명은 지리산에 들어가 선불이 되고, 왕후는 189년 나이 157살에 생을 마감한다. 한국의 ‘국제결혼 1호’로 피의 만남(섞임), 곧 혈연이다. 그 만남이 있었기에 수백만 김해 김씨와 허씨가 왕후를 시조 할머니로 모시고, 오매불망 할머니의 고향을 찾아가기도 한다.
사실 허황옥설화는 수로왕의 천강난생(天降卵生) 같은 신화소는 거의 없고, 역사적 사실에 바탕하였거나 그것을 반영한 설화다. 단, 어떻게 그 시대에 멀고먼 인도에서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 올 수 있었는지, 왕후의 내한이나 불교적 행적을 말해주는 물고기 무늬나 석탑 등은 후세의 ‘조작’이 아닌지 등등 몇 가지 왕후의 정체성과 관련된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 논란을 내용별로 묶어보면, 기원전 3세기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서 크게 번성한 태양조 불교국 아요디야에서 왔다는 설, 아요디야에서 중국 쓰촨(사천)성 푸저우(보주)를 거쳐 양자강 하구에서 황해를 건너 온 일족이라는 설, 타이 방콕 북부의 고대 도시 아유타와 관련이 있다는 설, 일본 규슈 지방에서 도래했다는 설, 기원초 중국의 전후한 교체기에 발해 연안에서 남하한 동이족 집단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종합하면, 다들 외래인이라는 데는 견해를 같이하고 있으나, 외국 어디인가에서는 크게 인도와 비인도의 두 지역으로 나뉜다.
달마가 서쪽에서 왔듯이 열여섯살 아유타국 허황옥이 서쪽에서 온 까닭은‥
‘고운임 수로왕과 백년해로 위해서’
불교와 차 씨앗을 싣고 붉은 돛배 남해에 닻내렸네
다들 나름의 전거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나, 몇 가지 현존하는 문헌기록과 유물들을 근거로 하는 인도설이 좀 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주로 상황론에 입각한 연역법을 따르는 비인도설 쪽 논리는 짐짓 미흡해 보인다. 철학과는 달리 역사를 연역법으로 추리하면 왕왕 빗나가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는 항시 일회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만남, 문명의 만남이라는 교류사관에서 본다면, 그녀가 어디에서 온 누구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우리는 세계와 어떻게 만났는가, 세계에 대한 우리 마음의 여닫이는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일이다. 설혹, 그녀의 정체가 허구라고 할지라도 우리네 선조들은 어떻게 그녀라는 ‘허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와 만나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제를 짚어보는 의미인 것이다.
허왕후는 혈연뿐만 아니라, 우리와의 불연(佛緣), 즉 부처님과의 인연, 불교와의 인연도 맺어주었다. 우리의 많은 고대국 건국신화에서 유독 가락국만이 그 건국이 불교와 관련지어진다. 수로왕은 건국한 다음해에 궁성터를 찾아다니다가 신답평(新畓坪)이란 곳에 이르러 이 곳은 비록 땅은 좁지만 16나한과 7성이 살 만한 곳이어서 궁성터에 적격이라고 말한다. 16나한이란 석가의 16제자이고, 7성은 도를 깨우친 사람들로서 모두가 최고의 불자들이다. 그리고 4년째 흉년이 들자 왕은 부처님께 청하여 설법을 하니 흉년을 몰아온 악귀들이 제거되었다고 한다. 가락국을 일명 ‘가야국’이라고 하는데, 이 ‘가야’란 말은 인도어로서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나 코끼리, 가사 등에서 그 어원을 찾고 있다.
△ (위로부터)허황옥이 함께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수로왕 남릉 정문에 새겨진 쌍어문 |
비인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체로 이러한 불교의 가락국 초전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시대에 인도로부터 뱃길이 트일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서〉‘지리지’에 보면, 기원전 3세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때부터 중국은 남양 각지와 해상교역을 하며, 기원 전후에는 지금의 부남(扶南:베트남)으로부터 인도 동남단의 황지(黃支:칸치푸람)까지 해로가 개척되어 11개월이면 오갔다.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뱃길이 한반도 남해안까지 이어졌다고 한들, 무리 무근이라고 일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허황옥의 내도는 문물의 교류라는 또 하나의 결과를 가져왔다. 왕후가 소지한 옥합에는 수놓은 비단옷이나 갖가지 금은주옥의 장신구 패물과 함께 차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흔히들 9세기 초 신라 흥덕왕 때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종을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보다 900년 전에 허왕후가 최초로 가져다 심은 차종에서 유명한 죽로차(竹露茶)가 자라났고, 머리, 귀, 눈을 밝게 한다는 등 가야인들이 구가한 차의 9덕은 오늘의 다도로 이어지고 있다. 묘견공주는 불교와 함께 차의 씨앗과 부채도 일본에 건네주었다고 한다. 수로왕은 왕후 일행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빚은 향기로운 술을 대접하고, 무늬와 채색이 고운 자리에서 잠을 자게 배려하며, 비단옷과 보화까지 하사한다. 왕후가 타고 온 배의 뱃사공 15명에게는 각각 쌀 열 섬과 비단 삼십 필씩을 주어 돌려보냈다. 가야인들의 열린 마음과 너그러움이 밴, 첫 인도인들과의 만남이고 나눔이었다.
왕후는 올 때 파신(波神)의 노여움, 즉 풍랑을 막고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배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싣고 왔다. 높이가 120㎝ 정도밖에 안되는 이 자그마한 석탑은 고려 중엽까지는 김해의 호계사에 보존되어 있다가 지금은 허황옥릉에 인치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귀중한 석탑은 한낱 뭉그러진 돌덩어리 다섯개를 쌓아놓고 무슨 탑이냐고 하는 비아냥거림까지 받아왔다. 그러나 한 후손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오늘은 그 원상이 거의 복원되었다. 김해의 한 병원 원장인 허아무개씨는 200회나 넘게 탑을 찾았고, 돌이 우리나라에 없는 파사석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며, 탑은 초기 인도 스투파의 축소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렇게 보면, 이 석탑이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불탑인 셈이다. 허씨는 평범한 의사다. 역사와 그 해석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의 몫이다. 이와 같이 2천년 전 이 땅에 온 허황옥은 혈연과 불연, 그리고 교류의 인연을 맺어준 메신저와 교류인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와 함께 있다. 문명은 이러한 메신저와 교류인들에 의해 알려지며 서로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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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우름이 돋보이는 고구려 건국신화
△ 평양에 있는 동명왕릉 | ||
알에서 태어난 주몽
지구상의 어디든, 고대 국가의 건국과정은 대부분 신화로 윤색되어 전해오고 있다. 신화의 주인공은 예외없이 건국자이며, 신화의 구성은 대체로 건국의 기틀이 마련된 후에 완성되며, 그때까지를 ‘신화시대’라고 한다. 따라서 건국신화의 내용은 건국의 과정을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건국신화는 오래 전승되는 ‘왜곡 없는 윤색’이니, ‘강요하지 않는 신앙’이니 하는 평을 받는다.
고대 국가의 건국과정이 신화로 엮어지는 까닭은 건국과정을 신비의 힘을 빌어 합법화하고 신성시하며 그 정체성을 믿게하기 위해서이다. 그 ‘신비의 힘’이란 신화를 꾸미는 요소, 즉 신화소(神話素)인데, 나라마다 건국의 역사적 배경이 다르므로 이러한 신화소도 다르게 설정된다.
천제와 하백의 딸이 부모
의아스러운 것은 무지몽매한 그 옛날에야 하늘에서 내려왔다느니, 알에서 태어났다느니하는 신화가 그런대로 먹혀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오늘의 이 개명천지에서도 아직 그런 류의 신화가 버젓이 나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리핀 대통령궁 박물관에는 쫓겨난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멜다의 탄생신화를 그린 한 장의 현란한 벽화가 진열되어 있다. 바다속 진주 조개에서 태어나 요염한 인어처럼 헤엄쳐 인간의 세계로 떠오르는 모습이다. ‘난생’신화의 현대판이다. 3천 컬레의 구두 주인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은 그녀는 75년 전에 보통인간으로 출생한 스페인계 혼혈인이다. 영달에 환장한 인간들의 이러한 꾸며냄 때문에 신화는 일시적 ‘신뢰를 얻고 있는 허위’에 불과하다고 폄하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신화 가운데서 건국신화는 무에서 유의 창조과정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나 얼개에서 상통하는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다. 즉 건국자의 천강(天降:하늘에서 내림)이나 난생(卵生:알에서 태어남) 같은 비정상적인 탄생과 고귀한 혈통, 비범한 자질, 신비의 힘에 의한 구제, 건국이란 영광의 획득 등 내용을 대체로 공유하고 있다. 또한 첫머리를 열고 그 뜻을 이어받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대 전기를 맞이하고나서 유종의 미(건국)를 보는 이른바 ‘기승전결’의 짜임새도 엇비슷하다. 그러나 신화소의 표현형태나 상호관계에서는 나름의 차이성(개별성)을 나타내고 있다.
천신의 하강은 유목민신앙 난생은 남방 농경민신앙
두 요소 어우러져 장엄한 고구려건국신화
△ 주몽 영정 |
천제인 해모수(解慕水)가 햇빛으로 물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어루만지고 뱃속을 비추니 그녀에게 태기가 생겨 마침내 알 하나를 낳는다. 깨뜨릴 수도 없고 짐승들이 범접하지도 않는 이 신기한 알에서 영특한 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그가 바로 주몽이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의 명사수가 되니 ‘주몽’(‘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불렀다. 부여 왕자들이나 신하들의 모해가 우려된다는 어머니의 권유를 받고 주몽은 세 동료들과 함께 기듯 부여를 떠난다. 엄체수(掩遞水)란 큰 강에 이르렀을 때 활로 물고기와 자라를 불러 다리를 만들게 하여 강을 무사히 건너고 추격자들을 따돌린다. 신력을 발휘한 셈이다. 졸본(卒本) 땅에 이르러 그곳의 지배자 송양왕(松讓王)과 서로의 능력을 검증하는 일련의 대결 끝에 그를 제압한다. 그리곤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으며 성을 고씨로 삼았다. 주몽은 기원전 37년, 약관을 갓 벗어난 나이에 등극한 후 주변국들을 병합해 대국 고구려의 터전을 닦아놓았다.
늑대젖 빼면 허술한
로마건국신화와 비할까
△ (위로부터) 오녀산성에서 발견된 왕궁터·로마의 건국신화 동상(늑대의 젖을 먹는 로물루스) |
보다시피, 두 건국신화의 내용이나 구조를 비교해 보면 신화의 보편성에서 오는 공통점도 있으나, 뚜렷한 차이점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고구려 건국신화는 다양한 신화소를 갈무리하고 있다. 천강소인 하늘의 신(해모수)과 물의 신(하백)의 결합은 천지조화를 말하며, 여기에 난생소가 얹히는데, 원래 천강은 북방 유목민들의 신앙이고 난생은 남방 농경민들의 신앙이나, 주몽신화에서는 그것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게다가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는 기적소도 곁든다. 한마디로 하늘의 도움과 신의 보우를 받는 천조신우(天助神佑)의 신화소가 대단히 돋보이는 복합신화이다. 이에 비해 로마의 건국신화에는 신화소가 빈약하다. 실비아가 동굴에서 마르스 신을 만나 쌍둥이 형제를 낳고,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난 것 말고는 별다른 신화소가 없다.
상쟁보다는 상생의 신화
다음으로, 그 차이점은 이념적 지향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상대를 눌러 이겨야 권력을 잡고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이 건국인만큼 그 과정에 갈등과 분쟁이 없을 수는 없지만, 이것을 풀어나가는 길에서는 서로가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죽마고우들과 끝까지 시련을 함께 이겨내면서 건국의 위업을 달성하고, ‘구르는 돌과 박힌 돌 사이’인 송양왕과의 관계에서도 어디까지나 활쏘기나 변신술의 대결, 그리고 비를 다스리는 신력 등 지혜와 능력의 검증을 통해 그를 설복시킴으로써 상생과 합일로 건국에 이른다. 이에 반해 에네아스는 오로지 전쟁수단으로 주변세력들을 물리치고 지배자가 되며, 그 후예들도 형제간에 권력을 둘러싸고 골육상잔을 벌임으로써 상극과 분열로 건국의 목적을 달성한다.
△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오녀산성 |
더불어, 우리는 일본건국신화의 기조로 강조되는 이른바 ‘팔굉일우’(八紘一宇:팔방을 덮어 집을 삼다), 즉 ‘온 세상을 일본 천하에 둔다’는 팽창주의 망령에도 경각심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때 이 망령에 덩달아 춤춘 사람들이 더러 있었으며,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조화와 상생, 합일의 이념과 철학에 바탕한 우리 고유의 신화전통, 문화전통을 굳건히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10) 동아시아의 유리의 보물창고
△ 경주 98호 고분에서 출토된 새머리모양 유리물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더 반짝인 카이로의 유리병
11년 전 여름, 숱한 수수께끼를 안고 ‘유리의 길’을 추적하던 한 방송사 취재팀과 함께 그 길의 서단에 위치한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했다. 수소문 끝에 ‘다우르’란 가장 오래된 유리공장을 찾아갔다. 허술하기 이를데 없으나 진열한 수백 종의 오색창연한 유리그릇은 대대로 유리그릇만을 만들어 온 공장의 유구한 내력을 여실히 말해준다. 취재팀은 경주 98호 고분 남분(4세기 후반)에서 출토된 봉수형 물병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대로 하나 만들 수 있는가하고 물었더니, 기능공 아흐마드씨는 하찮은 물음이라는 듯 씩 한번 웃고는 별로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단숨에 대롱불기로 똑같은 물병을 만들어냈다. 10분도 채 안 걸렸다. 구연부가 새의 머리 모양이라 하여 봉수병(鳳首甁)이라고 하는 이 유리물병은 후기 로만글라스계의 전형적인 유리병으로서,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유사품이 발견된 바가 없다.
동아시아에서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이 1500년 전의 유물을 4만리나 떨어진 곳에서 한 기능공이 순식간에 재현하는 기적 같은 일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한마디로 이것은 이 유리그릇의 친정이 바로 그곳으로서 그 인연이 오늘까지도 끈끈히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알고보니 우리에게는 한낱 유물로만 남아있는 봉수형 물병이 1천오백여 년 동안 이집트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줄곧 만들어지고 써내려 온 일상의 유리그릇이었다.
사실 유리처럼 역사의 사연을 확연하게 증언해주는 물질은 드물다. 다양한 소재와 가공기법으로 만들어지는 유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중한 보물로 애지중지되어 왔다. 유리는 언제 어디서나 값진 교역품으로 거래되고 있으며, 한때는 화폐로 대용되기까지 하였다. 지금도 유리는 일상생활의 용기에서부터 첨단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될 물질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것은 유리의 독특한 성질 때문이다. ‘불과 모래의 조화’니, ‘모래와 재로부터 태어난 불사조’니 하고 묘사되는 유리는 색깔이 아름답고 가벼우며 투명하여 광명효과가 있으며, 여기에 방수성과 불변성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유리의 제조과정은 복잡하고 우수한 기슬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므로 당대 사회의 과학이나 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유리는 불변의 소재이기 때문에 어떤 물질에 비해서 당대의 사회상이나 교류상을 입증하는 데 가장 신빙성있는 검증방법과 증거를 제공해 준다.
△ 금동제 유리 사리장치(위)와 그 속의 유리잔과 물병(아래). |
1500년전 4만리밖 카이로의 유리병은
신라 유리병으로 이어지고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초의 유리제품은 1989년에 부여 합송리 석관묘에서 출토된 길이가 각각 5~6㎝ 정도의 남색 관옥(管玉: 둥근 구슬) 7점인데, 제작연대는 초기 철기시대인 기원전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규슈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출토된 48점의 관옥은 이 합송리 유리와 같은 성분의 유리구슬로서 한반도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판명된다. 이때부터 삼국시대 전반에 걸쳐 제작된 각양각색의 유리장식품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구슬이 주종을 이룬다. 그 중에서 곡옥(曲玉: 굽은 구슬)은 우리나라 특유의 것이다. 이러한 장식품들은 색깔이나 무늬가 한결같이 아름답고 우아하다. 구슬의 교류와 관련해 신묘한 느낌마저 주는 유물로는 경주 미추왕릉지구 고분에서 출토된 인물문 상감(象嵌)구슬이 있다. 목걸이의 중심 구슬에는 사람의 얼굴과 새, 그리고 꽃무늬가 검정, 빨간, 흰색으로 아주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얼굴의 생김새나 길고 짙은 눈썹 등으로 보아 아리안계통의 서역인임에 틀림없다. 원래 상감구슬은 사람의 얼굴이나 동물, 꽃, 새 같은 동식물의 형상을 구슬 속에 새겨 넣는 일종의 모자이크 무늬의 구슬을 말하는데, 이러한 장식무늬구슬은 대체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중앙아시아 등 서역 일원에서 일찍이 유행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유물은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짐작된다.
기둥구슬 굽은 구슬 서말 구슬 꿰 만든 보배
동아시아 특유의 유리문화를 꽃피우는데‥
△ 이집트 카이로 공장에서 경주의 옛 물병을 보고 1993년 본떠 만든 유리물병(맨위)은 놀라울 정도로 빼닮았다. 가운데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리제품으로 기원전 2세기 이후 발견되는 관옥(기둥구슬)이고 맨아래는 우리나라 특유의 곡옥(굽은 구술)이다. |
이와 같이 기원을 전후한 초기단계에는 주로 구슬을 비롯한 아름답고 다양한 특유의 장식품을 만들거나 수입하여 우리의 유리제조사를 빛내었다. 그러다가 대체로 4세기 이후, 삼국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대내외적으로 문화의 발달에 관심을 돌리게 됨으로써 전래의 제조기술이나 교류에 바탕하여 유리그릇을 만들어내거나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출토된 고대 유리용기류는 총 80여점에 달하는데, 크게는 고분 출토품과 사리 관련품의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중 출토지가 분명한 22점은 모두가 9기의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연대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말까지의 약 100년간에 해당된다. 고분에서 나온 이러한 용기들은 소재나 제조기법, 장식무늬, 색깔 등으로 보아 거개가 후기 로만글라스계에 속한 것으로서, 4~5세기에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 제작된 뒤 흑해를 북상해 남러시아에서 초원로를 따라 북중국을 거쳐 신라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는 것은 초원로를 낀 여러 곳에서 유사품들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용기들은 98호분의 출토품 4점을 제외하고는 그 유사품들이 지중해 주변이나 남러시아, 중부 유럽, 북중국의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모두가 전형적인 후기 로만글라스계 유리용기들이다. 앞에 말한 봉수형 물병은 그 대표적인 일례다. 이러한 사실은 초원로를 통한 유리의 동전설을 뒷받침해주며, 아울러 신라문화가 초원로를 통해 로마문화와 접촉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신라시대에도 유리교류는 계속된다. 그러한 유리용기로는 불국사 석가탑을 비롯한 불사의 사리장치로 쓰인 8점의 용기가 있다. 그 중 1959년 경북 칠곡군 송림사 5층 전탑에서 나온 금동제 사리장치는 희대의 유물로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7세기 초에 건조된 이 탑의 중앙부에 안치된 방형금동제 사리장치 속에는 큰 유리잔과 다시 그 속에 작은 녹색 유리병(높이 7㎝)이 들어있다. 유리잔 표면에는 페르시아의 사산계 문양인 환문(環紋:고리모양의 무늬)이 3단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사산계 유리제품이나 제조기법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로만글라스계 용기가 고신라 고분에서 출토되고, 사산계 용기가 통일신라시대의 사리탑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동서 문명교류란 큰 흐름 속에서 고신라문화와 통일신라문화가 지니고 있는 상이성과 그 변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역사의 ‘불사조’라고 하는 유리유물이 많이 남아 있어 우리의 그 옛날 역사, 특히 남들과 어울렸던 역사, 동아시아의 유리보고로 당당했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불과 모래를 ‘조화’시킨 것이 유리라고 할진대, 우리네 역사도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남들과의 조화를 이룰 때가 분명 있었다. 그럴 때 우리는 흥했고, 그렇지 못했을 때 우리는 낭패를 맛보았다. 이것이 유리가 우리에게 주는 엄정하고도 고마운 교훈이다.
(11) 지울 수 없는 고구려의 정체성
△ 동방의 피라미드 고구려의 옛 도읍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장수왕릉인 장군총(가로 31.5m, 높이 약 13m). | ||
고구려의 옛땅 옌볜(연변)은 필자가 나서 자란 고장이다. 거기서 고구려의 떳떳한 후예로 자부하면서 겨레의 역사를 배웠고 겨레의 얼과 넋을 키웠다.
꼭 50년 전 이맘때, 그러니까 대학교(베이징대) 3학년 여름방학 때, 고구려 수도였던 지안현 퉁거우로 찾아갔다.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북안에 자리잡은 그곳 룽산의 나지막한 언덕 위, 우거진 숲 속에서 그 용자를 드러낸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주변의 광개토대왕비며 태왕릉, 그리고 수백기의 무덤들이 고즈넉이 눈앞에 펼쳐졌다. 돌보는 사람, 찾는 사람도 별로 없이 삭아빠진 나무푯말만이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같은 해라고 기억되는데, ‘아시아사’ 강의를 맡은 저명한 저우이량(주일량) 교수는 기말 구두고사 때 본인을 ‘꼬리렌’(고구려인)이라고 부르면서 고구려에 관해 이것저것을 물었다. 저우 교수는 1960년대 공동저술한 〈세계통사〉에서 고구려는 한민족 국가라고 못박았다. 사실 이것이 중국 정통사학계의 정견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민족사의 어제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베이징대학에 유학 온 북녘의 학자 리지린이 고조선의 서쪽 영역을 베이징 근방의 강으로 추정하는 난허까지 넓힌, 괄목할 만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이 과정에서 일부 중국 학자들이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북방사에 의문을 던지는 낌새가 보여, 자칫 논쟁거리가 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리 교수와 의기투합한 필자는 고서점가에서 구한 관련사료들을 한 보따리 챙겨가지고 63년 북녘에 환국했다. 20년 후 남녘에 와보니 이쪽 학계에서도 고조선 강역 문제가 한창 논의 중이었다. 그것을 곁에서 말없이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 지금도 겸연쩍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50년전 베이징대 다닐때 아시아사 강의한 저우이랑교수
“고구려는 한민족 국가” 못박아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96년 초, 중국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열린 ‘담기양 선생 탄생 85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초청되어 ‘고대 한-중 육로 시론’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담씨는 80년대 이른바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즉 역사적으로 오늘의 중국 판도 안에 있던 모든 국가나 민족은 중국에 귀속된다는 ‘귀속론’의 이론적 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의 요지는 고대의 고조선과 삼국시대부터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의 하나인 오아시스 육로가 장안에서 유주(베이징)를 걸쳐 고구려땅을 관통해 경주까지 이어졌다는 이른바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설’이다. 참가자들은 대체로 동감을 표했으나, 한 사람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바로 고구려의 중국 편입을 앞장서 주창하는 ‘선양동아연구중심’ 주임인 쑨진지(손진기)다. 그는 평양 천도 이전의 고구려는 중국에 신속된 나라이기 때문에 그곳을 한민족 국가로 삼아 실크로드를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역시 ‘귀속론’의 논리다. 논쟁 끝에 ‘구동존이’(같은 견해는 함께 구하고, 다른 것은 남겨두어 연구하자)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렇게 고구려는 필자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 모두의 가슴속에 마냥 살아 숨쉬고 있는 실체다. 중국은 이러한 실체를 무시한 채 관변의 힘으로 ‘동북공정’이라는 어마어마한 괴물을 가설해 놓고, 여러 가지 강변요설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끌어들이면서 고구려의 정체성을 냉큼 지워버리려고 한다.
중국 쪽은 아예 종족 기원부터 건드린다. 역사적 사실은 고구려의 종족은 중국 동북과 한반도 일대에서 자생해 농경을 영위하던 예맥족계 종족임을 증언하고 있는데도, 중국은 엉뚱하게도 서명이나 저자, 저작연대, 어느 것 하나도 확실치 않은 〈일주서>(逸周書) 같은 책을 인용해 전설상 인물인 전욱 고양씨(高陽氏)의 후예 고이(高夷)가 바로 고씨 고구려의 선조라고까지 한다. ‘고구려’에서 ‘고’자는 족칭이 아닌데, 고이와 연결시키는 것은 일종의 견강부회이며, 전욱 고양씨는 기원전 2500년께고, 고이는 기원전 1000년께 사람으로서 양자 사이에는 무려 1500여 년이란 시간차가 있다. 차제에 ‘고구려’나 ‘고려’의 ‘려’자는 ‘려’가 아니라 ‘리’(‘나라이름 리’)로 읽어야 한다고 제언해 본다.
700년 장수한 독립국을
조공·책봉관계 등 들먹이며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니‥
△ 이래도 중국의 지방정권인가 고구려를 중국 판도밖의 다른나라로 표시한 동한형세도(〈중국고대사 교육참고지도첩〉·베이징대학 출판사·1983년). 부여, 옥저, 읍루, 예맥과 함께 고구려가 중국 영토 밖의 독립국가로 표시되어있고 흉노, 선비도 외국으로 그려졌다. |
중국 쪽이 고구려의 ‘귀속’ 문제에서 가장 유력한 증거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소위 조공·책봉관계다. 고구려는 중원왕조에 조공하고 그로부터 책봉을 받는 처지여서 결국 중원왕조의 신속국(번속국)이라는 논리다. 우선, 중앙에 군림하여 지방을 호령하는 ‘중원왕조’라는 것이 과연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고구려 존속 705년 동안에 중국 영내에는 무려 35개 나라가 흥망했는데, 그중 86%가 넘는 30개 나라는 100년도 못 견디었으며, 두 나라(한과 당)만이 간신히 200년을 넘겼다. 자신의 고고한 천하관을 가지고 있는 동방의 패자 고구려로 볼 때 ‘중원왕조’란 한낱 허깨비에 불과했다. 다음으로, 원래 조공·책봉은 중앙과 지방 간에 맺어진 정치질서였으나 점차 국가 간의 교섭형식으로 발전한 일종의 관행인데, 종래 중국사람들은 중화관에서 출발하여 이러한 관계를 일방적인 신속관계로 왜곡하고 강요해 왔다. 그러나 제아무리 왜곡하고 강요해도 고구려 같은 강자의 독자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영락·연기라는 독자적 연호까지 사용하였다. 주변의 수많은 조공·책봉국 가운데서 유독 고구려만을 신속국으로 얽어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우리 민족수호정신의 발현인 고구려의 수·당 항쟁도 중국은 지방의 ‘소란’을 진압하기 위한 내전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역시 독자적인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흑심이 깔려 있다. 이 전쟁은 중화적 질서를 무력으로 실현코자 하는 수·당의 야심에 대한 고구려의 정당한 항전으로서 두 세력 간의 국제전쟁이지 결코 중앙과 지방 간의 내전은 아니다. 그밖에 중국 학계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 주민의 상당수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한족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파악해야 하며, 또한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왕건이 세운 고려는 본래 족속이 다르므로 계승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주제넘는 억측도 마다지 않는다. 반박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한심한 억지에 불과하다.
옛 영토를 차지했다고 역사까지 지배할 순 없는 법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지 말길
역설적으로 이 억지 속에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고구려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 정체성이란 고구려의 민족뿌리는 외래가 아닌 자생의 예맥족계라는 것, 고구려는 조공이나 책봉에 얽매인 ‘중원왕조’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중국 왕조사에도 전무후무한, 700년 이상 장수한 자주 독립국가라는 것,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하고 발해와 고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연쇄 전통국가라는 것, 고구려는 ‘중화문명’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인 선진문명을 가진 나라라는 것 등이다. 고구려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다.
역사는 누가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고 바꾼다고 해서 바꿔지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역사는 사실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토주권’이 ‘역사주권’과 다르다는 것은 역사학의 상식이다. 현실적으로 옛 고구려 땅을 지배한다고 해서 그 역사까지 마구 지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행히 중국의 일부 양식있는 지식인들이 역사의 곡필에 맞서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제부터라도 중국은 얼토당토않은 ‘역사도발’을 접고 정도로 돌아와 큰 나라다움의 체통을 지켜줄 것을 역사를 믿고 중국을 아끼는 한 사학자의 양심으로 간절히 호소하는 바이다. 한편, 우리로서는 남북이 뜻과 슬기를 한데 모아 당당하게 역사의 순리를 따라 대응논리와 방안을 개발하고 전개하여 우리다운 성숙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