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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

수메르 문명의 특징

작성자유토피아|작성시간19.12.09|조회수779 목록 댓글 0

수메르, 교역이 발달한 이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 문명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상류에서 많이 자라던 야생 밀과 관련이 깊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야생 밀을 채취하며 수렵생활을 했다. 학자들은 기원전 9050년경 지금의 시리아 부근에서 인류 최초의 농업이 시작된 걸로 보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곧 하류 지역을 수메르라 불렀다. 이 지역은 퇴적층을 이용해 밀농사를 짓고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으로 옛날에는 오늘날보다 더 온화하고 농사짓기에 좋은 기후였다.

수메르인들은 이를 기반으로 농업을 발달시켜 주변의 문명 등과 활발한 교역을 했다. 우선 수메르에는 집 지을 나무와 돌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마누스 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고 멀리서 돌을 가져 와야 했다. 그래서 목재, 석재와 금속 등을 수입하고 곡물과 옷감을 수출했다. 이렇게 수메르 지역은 풍요로운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워낙 환경이 척박해 외부로부터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오거나 재주껏 만들어 써야 했다. 때문에 일찍부터 교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명사를 들여다보면 문명은 풍요로운 곳이 아닌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발전했다.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도전과 응전’ 이론이 딱 맞아 떨어지는 곳이 수메르였다.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상지, 수메르




필요한 것들을 강과 바다를 통해 가져오다 보니 배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다. 그리고 배를 이용해 교역이 발전했다. 그 결과 도시가 발달하고 교역로가 활성화했다. 점차 해상교역도 활발히 진행되어 수메르인들은 인도양까지 진출, 인더스 문명과도 교류했다. 고대 인도의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수메르에서 만든 실린더 형태의 도장과 우르 산 녹색 활석들이 많이 발견되어 교역이 빈번했음을 알려준다. 수메르의 점토판 문서에 따르면, 인더스 사람들은 원자재를 그대로 내다 팔지 않고 “가공해 좀 더 가치 있는 제품으로 만들어 필요한 물건과 교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수메르 문명이 꽃피면서 기원전 5200~4500년경 에리두를 필두로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을 규모를 벗어나 도시가 탄생했음은 이미 농업 이외에 상업과 교역이 크게 발전했음을 뜻했다.

고대 인도 유적에서 발견된 수메르의 도장. 이 지역까지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불 다루는 기술이 문명을 창조하다 

           

수메르 지역에서는 인구가 늘어나자 나무와 돌을 사용하는 대신 무언가를 만들어 써야 했다. 그러다 진흙을 뜨거운 불에 구워 단단한 벽돌을 만드는 법을 알아냈다. 벽돌로 집을 지었을 뿐 아니라 수로를 건설해 관개시설도 만들었다. 더 나아가 밀폐식 가마를 만들어 세계 최초로 채색토기를 만들어 썼다. 고대에 토기를 굽기 위해 불의 온도를 1천 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기술은 대단한 경쟁력이었다. 수메르 채색토기는 중국 양사오 문화 채색토기보다 2~3천 년 이상 빨랐다.

밀폐식 가마에서 만들어진 수메르 채색토기



수메르인들은 벽돌과 타일에 법랑과 유약을 칠하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그들은 불의 온도를 더 끌어올려 도자기를 구워냈다. 또 대형 도자기 수로관을 만들어 멀리서 물을 끌어왔다. 대형 도자기 수로관은 고대의 기술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기술이었다. 관개시설을 발전시키면서 기원전 4000년경 우르에서는 다리 건설에 필수적인 아치도 벽돌로 만들었다. 이후 아치 기술이 발전한 게 돔이다. 지붕을 둥글게 만드는 돔도 수메르인이 처음으로 사용한 건축기법이다.

또한 수메르인은 각 도시 중앙에 벽돌로 거대한 신전을 만들었다. 훗날 40여 개의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대부분 계단식 7층탑 모양이었다. 이를 ‘높은 곳’을 뜻하는 지구라트라 부른다. 수메르인은 실제로 하늘에 닿을 만큼 높다랗게 탑을 쌓았다. 그들이 믿는 태양과 달과 별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홍수가 잦은 곳이라 신을 높은 곳에 모시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신전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한정되지 않고 경제 활동의 중심지였다. 토지가 모두 신의 소유여서 신전은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또 지구라트는 천문관측대로도 쓰였고, 신의 소유인 추수한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도 쓰였다.



 도시를 건설하다 

           

수메르인들은 벽돌로 주택, 관개시설, 성벽, 지구라트 등을 갖춘 계획도시를 건설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도시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계획도시였다. 수메르인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인구 1만 명 정도의 도시국가들을 여러 개 건설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무렵에 이미 도시 전체에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있었다는 점이다. 수도관은 고열로 구운 진흙과 역청으로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의 시멘트나 도자기와 유사했다.

이런 도자기를 굽는 ‘불 조작 기술’이 청동기시대의 야금기술을 가능케 했다. 기원전 4000년대 중엽에 수메르에서 발달한 청동 야금술을 사용해 도구와 무기를 만들면서 수메르의 도시화를 가속화했다. 그 뒤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청동이 오리엔트 지방까지 널리 알려지고, 유럽에도 전파되기 시작했다. 청동기시대를 수메르인이 연 것이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기원전 2000년대에 청동 사용량이 크게 늘어났다. 이유는 영국 남단 콘월에서 대규모 주석광산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생산된 청동기의 상당량이 여기서 채굴된 주석을 사용했다. 그 무렵 이미 오리엔트에서 영국까지 오가는 먼 거리 해상 교역이 활발했다.

수메르 유적 발굴 현장



무기를 대량생산하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에서는 우수한 공예품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납땜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세공술이 발달했다. 우르의 왕릉에서 나온 공예품들은 오늘날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런 기술은 무기의 발전도 가져왔다. 또한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주물을 만드는 기술도 발달해 도구와 무기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새로운 발명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검이었다. 역사에서 연장을 겸하지 않고 오로지 싸우는 데에만 쓰인 최초의 물건이 검이다. 무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자 다른 지역으로 쳐들어가 필요한 걸 빼앗아오는 게 농경과 수렵보다 세력을 더 빨리 늘리는 방법이 되었다. 이로써 전쟁이 빈번해졌다. 발달된 청동무기를 쓰는 민족이 당연히 쉽게 주변을 제패했다. 이후 전쟁포로를 활용한 노예경제가 시작됐다. 이로써 중앙집권제 국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푸아비 여왕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 머리장식




 언어, 수메르어 

           

수메르 문명은 인류에게 무려 백 가지가 넘는 ‘최초의 것’들을 선물했다. ‘문자, 바퀴, 음악과 악기, 야금술, 의학, 조각, 보석, 도시, 왕조, 법률, 사원, 기사도, 수학, 천문학, 달력’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문자다.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500년경의 도시국가 우루크(Uruk)에서 썼던 수메르어다. 우르 사람들도 이 쐐기문자를 썼으니 아브라함도 이 문자를 사용했었을 것이다.

농사와 관련된 것을 기록하기 위해 문자가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우르의 사원에서 발견된 점토판을 보면 식량을 계량해서 주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문자가 지배층의 통치수단의 하나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상업과 교역을 위해서도 문자는 필요했다.

우리는 역사의 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 기록이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 부른다. 수메르 문명이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인정받는 것은 바로 이 역사시대를 최초로 열었고, 우리가 수메르 문명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은 그들의 문자를 해독했기 때문이다. 수메르인은 점토판에 새긴 문자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후세에까지 자세히 전할 수 있었다.

수메르 쐐기문자가 새겨진 점토판




 바퀴와 전차 

           

신석기시대에 인류가 발명한 것 가운데 으뜸이 바퀴다. 고고학에 따르면 바퀴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000년 이전으로 도공(陶工)들의 물레에 처음 사용되었다.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에서 바퀴 달린 탈것을 사용했다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것이 발전해 기원전 2600년경 우르의 수메르인들은 통나무를 둥글게 자른 원판바퀴를 이용해 전차를 만들어 싸움에 사용했다. 이 전투용 사륜전차를 이용한 강력한 군대로 우르는 주변을 석권할 수 있었다. 전차는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였다. 이후 바퀴는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육상교통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기병보다 전차가 먼저 등장한 이유는 고대의 말이 지금에 비해 덩치가 많이 작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큰 말이 등장한 것은 한참 뒤인 기원전 1000년경이다. 유전자 변이와 의도적인 교배를 통해 만들어졌다. 원래의 말은 덩치가 작아 사람이 타기 힘들었다. 탄다 해도 허리 부분이 아니라 엉덩이 쪽에 앉아야 했다. 기동력과 체력이 지금 말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기원전 2600년경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의 유적에서 발굴된 사륜전차 그림. 당시 말은 상당히 작았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400년경에는 바퀴살이 있는 바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바퀴살이 발명됨으로써 훨씬 더 가벼운 바퀴로 더 많은 물건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이때부터 사륜전차는 기동성이 좋은 이륜전차로 진화한다. 이후 인류는 수레가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 수레를 이용해 대규모 관개시설과 성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재들을 운반해 고대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또 먼 거리 이동을 원활케 해서 공간을 좁히고 시간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말하자면 수레는 오늘날 기계문명의 효시였다.

그 뒤 바퀴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구리로 테를 둘렀다. 전투용 전차 이외에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마차와 짐을 끄는 수레의 바퀴도 계속 발전을 거듭했다. 우르에 살았던 아브라함도 필시 이런 마차를 타고 다녔을 것이다. 그의 이주를 나타내는 그림에 나귀나 낙타를 타고 이동한 것처럼 그린 것은 수메르 문명이 발견되기 이전의 것들이라 잘못된 고증이다.

수메르인들이 발명한 바퀴살




화폐, 세켈

수메르인이 남긴 유산 가운데 경제사에 가장 큰 족적은 화폐의 발명이다. 기원전 9000년경부터 사람들은 교환의 단위로 가축을 사용했다. 그 뒤 농업의 발달로 사람들은 물물교환을 위해 밀 다발을 사용했다. 이를 ‘세켈(Shekel)’이라 불렀다. 수메르인들이 기원전 3000년경에 동전을 제조해 사용하면서 여기에서 이름을 따 세켈이라 불렀다. 인류 최초의 화폐 단위였다. 이렇게 수메르인은 화폐를 발명해 물물교환을 한층 수월하게 했다. 그러나 큰 거래에는 금과 은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해 묘지를 살 때 화폐 단위로 세켈을 사용한 것이 《성경》에도 등장한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화폐 단위로 세켈을 쓰고 있다. 세켈은 인류 최초의 화폐 단위이자 가장 오래 쓰이고 있는 화폐 단위다.


수메르 해상교역, 인더스 문명과도 교역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왕래하기가 쉬운 개방적인 지리조건을 갖고 있었다. 이런 개방적인 환경은 민족 간의 활발한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당시 수메르인은 배를 타고 홍해 주변과 인도양까지 진출해 인더스 문명과도 교류했다. 또 상인들은 사막 길과 바다를 통해 페르시아 만에서 시리아와 소아시아까지, 나일 강에서 키프로스 및 크레타까지 그리고 북쪽의 흑해까지 진출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동 반경이 넓었다. 해상교역이 활발해 선박제조 기술도 발달했다. 아카드어로 번역된 선박 기술서에는 크기, 행선지와 사용 목적에 따라 105종이나 되는 선박의 종류가 있었다.


직조기술 발달

농업과 더불어 직조기술도 발달했다. 수메르 최초의 직물재료는 양모였다. 직물생산에는 서로 연관된 연계기술이 필요해 고대 문명사 연구에서 직조기술은 상당한 문명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로 사용한다. 수메르인은 이미 기원전 3800년경에 염색기술을 발견해 옷을 물들여 입고 다녔다. 또한 아마와 양털로 만든 옷들이 다양한 패션으로 나타나 상당한 사치를 누렸다. 실로 고대의 문명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당시 옷감들이 어찌나 우수했던지 수메르 멸망 1천 년 뒤 쓰인 〈여호수아서〉 7장에는 약탈을 자행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에도 유대 병사들이 ‘시나르’ 곧 수메르로 들어가 옷감 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학교에서 천문학과 수학을 배우다

유프라테스 강가의 슈루파크 지역에서 기원전 3000년경에 세워진 학교 건물 유적도 발굴되었다. 학교는 ‘에두바’ 곧 ‘점토판의 집’이라고 불렸다. 행정 관료인 서기 양성이 목표였다. 수메르인은 글을 쓰는 걸 성스럽게 여겨 서기를 최고의 직업으로 쳤다. 서기의 종류는 신전 서기, 공공기관 서기, 상업 서기, 학교 서기 등으로 세분화했고, 서기들은 교사로도 활약했다.

학교에서는 읽고 쓰기 외에도 수학, 지리학, 동식물학과 미술, 그리고 신을 찬양하는 노래도 가르쳤다. 하프와 리라 같은 악기 수업도 했다. 기원전 2000년 무렵 이미 오늘날과 같은 7음계 악보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서양음악의 기원이 그리스가 아니라 수메르에서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수메르인은 씨 뿌리고 수확할 시기를 정하는 지식과 강물의 범람에 대비하는 기술을 갖추어야 했다. 농업의 발달은 곧 역법과 천문학, 기하학과 수학의 발달을 가져온다. 이 역시 학교를 통해 교육되었다.

발굴된 수메르 점토판에는 거래내역과 영수증 등이 쏟아져 나올 만큼 수메르인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수학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이들이 땅의 크기를 재면서 발전한 것이 기하학이며 이때 벌써 원을 360도로 표현했다. 이들은 당시 곡식의 양이나 땅의 크기를 재기 위해 곱셈과 나눗셈 심지어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구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수메르 신화,  여러 신화의 근본이 되다

숫자 체계와 도량형은 십이진법을 사용했다. 사람의 손가락이 열 개라 십진법 사용이 훨씬 쉬웠을 텐데 그들은 십이진법을 선택했다. 그 까닭은 12라는 수가 성스러운 수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태양이 매년 통과하는 열두 종류의 별자리 곧 십이궁도의 수였다.

《구약성경》에는 열두 지파가 등장하고, 예수에게는 열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는 무수한 신들이 등장하지만 올림포스의 원탁회의에는 열두 명의 신들만이 참석했다. 인도와 이집트의 신들도 주요한 신들만을 간추리면 항상 열두 명이다. 우리 동양의 십이간지 역시 열두 종류의 동물들이 등장한다.

뉴턴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에서 ‘모든 고대 민족은 열두 명의 똑같은 신들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 인류학자 제카리아 시친(Zecharia Sitchin)도 이를 연구했는데 이집트, 인도,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 미케네, 기타 중동과 소아시아 문명권 각국의 여러 신들을 비교 분석한 결과, 모든 중요한 신들은 항상 열두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모든 다양하고 복잡한 신들의 계보와 관계가 결국은 수메르 점토판에 기록된 신들의 계보와 정확히 일치했다.

천문학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학문 중에서 가장 먼저 태동한 학문이다. 초기에는 점성술 분야가 중요시되었다. 점성술로부터 천문학이, 연금술에서 화학이 분화되어 나왔다. 오늘날의 과학은 천문학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인류 최초의 천문학이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수메르인은 일 년을 열두 달로 하는 태음력을 만들고, 다시 하루는 두 번의 열두 시간으로 구성하는 십이진법을 썼다. 그리고 한 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하는 육십진법을 만들었다. 그들은 북반구와 황도대의 별자리는 물론, 남반구의 별자리들까지 알고 있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을 만든 것도 그들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별자리들에 이름을 붙인 것도 그들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수메르인은 일식, 월식의 기록은 물론 행성들의 세세한 움직임까지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25,920년을 주기로 ‘지구 회전축 자체가 원운동을 보이는 현상’인 세차운동마저 알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놀랍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요일 명칭의 기원

학자들은 요일의 순서에 관한 해답을 수메르 7층 신전탑에서 찾아냈다. 제일 아래층에서부터 토성, 목성, 화성, 태양, 금성, 수성 그리고 맨 위 달의 제단에 힌트가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천문학자인 점성술사들에 의해 태양을 가운데 두고 만든 천동설에 입각한 태양계였다. 이 칠층탑에서 일곱 신들에게 제사드렸던 순서가 바로 오늘날 요일의 명칭이다. 곧 일요일은 태양신 샤마쉬에게, 월요일은 달신 난나에게 제사드리는 날이었다. 수메르인은 이들 행성을 상징하는 신들에게 각각 하루씩을 봉헌했다. 태양과 달까지 포함하면 모두 일곱 개로 여기에서 일주일이 생겨났다.


 성문법, 평등과 정의를 이야기하다

수메르 시대는 어부나 서기의 직업조차 세분화 할 정도로 산업 활동이 왕성했다. 그에 비례해 부패와 비리도 심했다. 그래서 기원전 2600년 무렵의 우르카기나 왕은 ‘자유, 평등, 정의’에 대한 개념을 명문화했다. 성문법의 시작이었다.

사업장의 월권과 부당한 착취, 공권력 남용, 독과점 집단의 가격조작 등에 대한 개혁령을 선포했다. 예컨대 집 한 채 값도 임의로 정할 수 없었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해서도 안 되고 또 빈민과 과부와 고아는 물론 이혼을 당한 여자도 법의 보호를 받도록 했다. 그리고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로부터 구매를 할 때는 은을 사용할 것을 포고했다. 당시에 벌써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정의’가 명문화해 강력히 추진되었다.

수메르의 법령은 특히 상업사회의 병폐인 경제 범죄에 관한 규정이 두드러진다. 기원전 21세기의 우르남무 법전에 보면 사기꾼과 뇌물을 받은 자들을 나라에서 쫓아내고, 공정한 도량형을 확립했다. 이 밖에도 상당히 많은 분량의 법률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예컨대, 계약서 · 양도증서 · 유언서 · 약속어음 · 영수증 · 법정판결문 등이다. 심지어는 식량가격, 량(量), 선박, 가축의 임대료, 부동산, 재산상속, 노사관계와 세금에 대한 이의신청 절차까지 있었다. 우르남무 법전은 3백 년 뒤의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인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이 후대의 제국들에 의해 그대로 차용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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