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역에 가장 일찍이 이주하여 들어온 민족은 '수메르인들(Sumerians)'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타나게 될 여러 문명들의 기반이 되는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도시 국가는 '아카드인(Akkadians)'에 의해 정복되기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 독립을 되찾았습니다. 이후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끊임없는 이주와 침입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이 이주해 온 민족이 처음에는 이전의 문명을 파괴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수메르 문명의 핵심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 위에 자신들의 새로운 문명을 결합하여 보다 더 나은 문명으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기원전 4000년경부터 기원전 330년 사이에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 서아시아의 여러 국가에서 전개된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으로 여러 민족의 침략과 지배가 반복되어 운명론적이고 현세적인 종교관이 형성되었고 건물의 유형은 분묘가 아닌 신전이 주요 유형이었습니다.
석재나 목재를 구하기 힘든 자연환경으로 풍부한 진흙을 이용한 진흙 벽돌과 구운 벽돌을 사용한 조적식 건축법이 발달하였으며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역청(아스팔트)을 접착제와 방수재로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벽돌을 연속적으로 쌓아 올려 반원형으로 만든 '아치(arch)'와 아치를 선형적으로 잇대어
통로형으로 늘인 '볼트(vault)' 구조의 건축기법이 나타났습니다.
자연환경이 황량하고 민족간의 전쟁이
빈번하여 외부에 대해 폐쇄적이고 방어적이며 집단적인 군집생활을 영위하였으며 도시 주변에 2중, 3중의 성곽을 건설하고 주요지점에 성문을 설치한
형태의 성곽도시가 발달되었습니다.
두터운 외벽으로 둘러 쌓인 건물
내부는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장방형의 실들이 집약되는 평면구성 기법으로 건설되어 창, 출입구 등의 모든 개구부는 중정에 면하여 설치되며 중정을
통해 각 실로 진입하도록 지어졌습니다.
메소포타미아 건축의 예
■ 핫수나의 주택(Houses of Hassuna) - 선사유적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오래된 건물유적으로 진흙과 갈대를 이겨 벽을 구축하고 부축벽을 쌓아 구조적 보강을 하였습니다.
전정, 침실겸 거실, 배수구, 아궁이, 저장설비가 갖춰져 있습니다. 개방적 전정이 이후 폐쇄적인 중정식 주택으로 변천되었습니다.
■
우르의 중정주택(Court House, Ur) - 구
바빌로니아
내부의 중정을 중심으로 4면을
에워싸듯이 방이 배치된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을 지닌 2층 규모의 주택으로 현관에 해당하는 주출입구 근처에는 계단실이 있어 2층으로 직접
진입이 이루어지고 중정의 중앙에는 하수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1층에는 주로 공적인 기능을 지닌 공간이 배치되었으며 2층에는 사적인
공간이 배치되었습니다. 주택의 중앙부에 위치한 중정은 가로로부터는 시선이 완전히 차단된 반면 상부는 뚫려있는 전형적인 중정의 형태를 띤 폐쇄적인
구조입니다.
<우르의 중정주택, 기원전 1800년경>
■ 지구라트(Ziggurat) - 구 바빌로니아
지구라트는 고대 바빌로니아, 앗시리아의 계단식 피라미드 모양의
사원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의 기능과 천문관측과 예언을 행하는 천문관측대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구라트'는
옛바빌론말로 '높게 만든 지역의 건축'이라는 뜻으로 신전의 기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기단위에 신의 성소가
있었습니다.
정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모서리를 동서남북 방향으로 지었으며,
동쪽 모서리는 춘분.추분 때의 일출지점에 맞추어져 있다고합니다. 내부는 진흙
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부는 구운 벽돌로 마감되었는데 한변의 길이가 20m~90m로 다양한 크기입니다. 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약 30개 정도가 발굴 되었지만 원래의 형태 그대로 보존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구라트의 초기 원형적 모습은 '우르크의 백색신전(White Temple on Ziggurat , Uruk)'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지구라트 중 그나마 잘 보존이 된 '우르(Ur)의 지구라트'는
제일 아랫단이 62.5m × 43m의 크기이며 높이는 50m로 진입에 필요한 3군데의 계단은 각각 100개의 단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르
제1왕조에 세워졌던 것을 우르 제3왕조의 우르남과 슈르기가 수복(修復)하였다고합니다.
<우르의 지구라트(현재 이라크
텔무카이야르), 기원전 2100년경>
가장 큰 지구라트는 초가
잔빌(Tchoga Zanbil)에 있습니다. '초가 잔빌의
지구라트'는 길이가 102m, 높이가 24m에 달하는데, 원래의 높이는
이것의 두 배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초가 잔빌의 지구라트(현재 이란 후제스탄주), 기원전 1250년경>
구약성서의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 것입니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사르곤
2세의 왕궁(The Palace of Sargon II) - 앗시리아
'사르곤 2세'(아카드어 사루키누('정통
국왕'의 뜻), 재위:기원전 722~705)는 앗시리아
왕이였습니다.
기원전 722년 사르곤 2세는 샬만 에세르 5세와 공동 집정하였습니다. 기원전 709년 샬만에세르 5세의 사후 왕국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사르곤 1세'라고 불리는 사람은 그 이전 시대 사람으로서 앗시리아가 아닌 수메르 지역을 정복하고 아카드 왕국을 세웠던 왕입니다.)
기원전 713년 그는 케벨 무르시의 기슭에 자리한 니네베에서 20km 북쪽, 현재의 코르사바드에 새로운 왕궁과 '두르샤루킨(DurSharrukin:사르곤의 성채)'이라 불리는 도시의 건설을 명하였습니다.
7.5m 높이로 성토를 하고 면적이 거의 10헥타르에 이르는 대지(臺地) 위에 방이 200개나 있는 왕궁을 세웠습니다.
<사르곤 2세의 성채와 왕궁 복원도, 코르사바드, 기원전 710년경>
궁전
입구에는 사람 머리에 날개가 달린 거대한 수소상(라마수:lamassu)이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중 한 쌍은 높이가 5m나 되었습니다. 궁전
벽은 사르곤 2세의 군사 원정과 위업을 묘사하는 프레스코화와 돋을새김들(부조)로 장식되었는데, 그러한 조각들로 채워진 벽면은 다 합하면 전체
길이가 약 2.5km나 되었습니다.
사르곤은 자기의 비문들 가운데 하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궁전에 거하는 나 사르곤을 위해 그(즉, 앗수르 신)가 장수와 몸의 건강과 마음의 기쁨과 영혼의 밝음을 나의 운명으로 정해 주길 바라노라.” (<고대 이라크>, 262면)
하지만 기록에서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사르곤은 이 궁전의 낙성식이 있은 지 1년 정도 후에 소아시아의 킴메리아 원정중 사망하였는데, 그가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센나케립'이 왕이 되었습니다.
■ 바빌론 성시(Old Babylon City) - 신
바빌로니아
앗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나비팔'이 죽은 후 기원전 626년 칼데아인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을
점령하고 그 곳에서 아시리아 세력을 몰아낸 후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로 정했습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재위:기원전 604년~562년)'의 치세 때 바빌론은 대규모 토목공사와 건축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바벨탑'이라고 알려진 '에메테난키 지구라트', 현재는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슈타르 문', 그리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 등도 모두 이 때 건설된 것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구약성서에 '느부갓네살'로 기록되어 있는데 성서 <다니엘서>에 유대와 예루살렘을 정복한 군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궁전, 신전, 주거지 등을 철저히 파괴시키고 그 곳에 있는 수천명의 주민을 바빌로니아로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합니다.
<바빌론 성의 조감도>
이 도시는 유프라테스강 양쪽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빌론 성은 양변이 1,800m와 1,300m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로 이중 구조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유프라테스 강과 연결된 해자가 있었습니다. 이 해자는 물을 공급해 줄 뿐 아니라 적군으로부터 도시를 지켜 주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바빌론의 문서들에서는 도시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성문이 여덟 개
있었다고 알려 줍니다. 여덟 개의 거대한 성문 가운데 바빌론의 여신 이슈타르에게 바쳐진
'이슈타르 성문'이 가장 유명합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길에는 유약을 바른 타일로 만든 황소(벨)와 용(마루둑의 상징)의 형상이 줄을 지어 서
있었습니다. 벽은 파란색 유약을 바른 벽돌로 만들어졌는데 거기에는 빨간색, 노란색, 흰색의 사자들(이슈타르의 상징)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에메테난키 지구라트(바벨탑) 복원도>
공중정원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위하여
건설한 정원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서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있다는 뜻입니다.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성토하여 수목을 심어놓아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합니다.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물을 댔다고 하는데,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공중정원 상상도>
■ 페르세폴리스 왕궁(The Palace of Persepolis) - 페르시아
페르세폴리스는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입니다. 현재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650㎞, 시라즈에서 북동쪽으로 70km 가량 떨어진 마르브다슈트(Marv Dasht) 평야의 쿠이라마트(Kuh-i-Rahmat, 자비의 산) 산기슭에 있습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이 도시를 페르시아인들의 도시라는 뜻의 ‘파르사’로 불렸는데, 이를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어로 옮기면서 ‘페르세’(Περσε? ,페르시아인들)와 ‘폴리스’(π?λι?, 도시)로 불렀고 그 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페르세폴리스 유적지>
다리우스 1세(Darius I, 재위 기원전 522~486)가 다스리던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에는 4개의 주요 도시가 있었습니다.
키루스 2세가 처음 수도로 삼았던 '파사르가다에', 옛 메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엑바타나',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바빌론', 왕의 길의 출발점인 페르시아 만 근처의 수사', 이렇게 4곳이었지요.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 제국 최초의 수도인 파사르가다에에서 남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곳이 바로
'페르세폴리스'이지요.
현대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부터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다리우스 1세'부터 궁전과 테라스 등을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완성하였습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끝날 때까지 부분적으로 공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페르세폴리스 궁전은 산과 넓은 평원이 만나는 곳에 거대한 축대를 세우고 그 위에 다양한 모습의 웅장한 건물들을 세웠습니다. 페르세폴리스 유적지 가운데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면 다리우스 1세의 궁전인 '타차라 궁'과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인 '하디시', 각국에서 온 사절단을 맞았던 알현전인 '아파다나', 그리고 입구인 '크세르크세스 문(만국의 문)'과 당시의 유물을 모아 둔 박물관을 꼽을 수 있습니다. 페르세폴리스 궁전에서는 왕의 즉위식과 함께 매년 초 페르시아에 복속된 수많은 나라들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페르세폴리스 평면도>
<만국의 문(Gate of All Lands)> <페르세폴리스 궁전기둥, 루부르 박물관 소장 >
<아파다나(알현실) 궁터>
<백주(百柱)의 홀>
기원전 333년경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침입했을 때 페르세폴리스는 최후를 맞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세폴리스로 쳐들어가 몇 달간 보물을 모두 약탈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 것을 명령했고 크세르크세스 1세의 궁전은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운 일에 대한 복수였다고 합니다.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셀레우코스 왕조 치하의 페르시아에서도 여전히 수도로 있었으나 점차 폐허로 변했습니다.
1971년 이란 정부는 이란(페르시아) 왕조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이곳에서 거행했고, 1979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참조 자료> [문명다큐] 메소포타미아 문명 https://youtu.be/DapQP36Tf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