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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대 미스테리

작성자유토피아|작성시간20.04.11|조회수397 목록 댓글 0

1.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

 아틀란티스 대륙

 상상도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335년경 플라톤의 저서<대화편>중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라는 철학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플라톤은 <대화편>을 집필하는데 있어, 소크라테스와 친구들의 대화를 기록하는 형식이라서 어느 것이 플라톤의 것이며, 어느 것이 소크라테스의 것인지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유명한 그리스의 정치가 솔론은 이집트의 고도(古都) 사이스의 사제로부터 아틀란티스 대륙 이야기를 듣고 그리스 인 크리티아스에게 들려주었다.
이 크리티아스와 이름이 같은 그의 손자가 소크라테스의 친구이며, 바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

"9,000년 전에 아주 강력한 고대 국가가 있었다. 이 나라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이상 국가였다.
아주 예전에, '헤라클레스의 기둥'(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지금의 지브롤터 해협 동쪽 끝에 솟아있는 두 개의 바위를 말한다) 뒤편에 큰 섬이 있었다.
이 큰 섬을
아트란티스 대륙이라고 불렀는데 이 섬을 지배하던 나라는 동서로 리비아에서 이집트 접경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유럽의 티레니아(이타리아 중북부)까지 통치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이 국가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해협에 위치한 지역도 점령하였다. 그러자 그리스에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그리스 전체를 총괄하는 동맹군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맹군 간의 이해가 서로 엇갈려 모두들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그리스 혼자만 싸워 승리자가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후에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단 하루의 밤과 낮 사이에, 그리스의 전사 모두가 땅 속에 묻혔고 아틀란티스 대륙 역시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사라진 섬과 유적들이 수면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배가 항해하기 불가능하다. 그것은 침몰한 섬이 남긴 많은 이토(泥土)가 배의 항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에 일어난 엄청난 지진과 해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노아의 방주와 9년홍수와는 무슨 연관이 있는것일까요?
그리고 수없이 전해내려오는 '일본이 가라앉는다'라는 전설과는....


 


2. 1만2500년 전 남극에 첨단문명 있었다?








고대 해양왕의 지도 찰스 햅굿 지음|김병화 옮김|김영사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저자는 미국의 킨 주립대에서 과학사를 강의하던 학자다. 그는 192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발견된 고지도 한 장에 주목하면서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편다.
단 철저하게 과학적 증거와 논리에 입각해서.이 지도는 1513년 터키 해군제독 피리 라이스가 그린 것으로, 여기에 묘하게도 당시로서는 그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던 남극대륙이 포함돼 있다. 1920년 최초의 발견 이후 한동안 학계의 관심권에서 사라졌던 이 지도에 다시 주목한 인물은 고대 지도연구가인 앨링턴 맬러리. 이때가 1956년이다.


저자 햅굿은 “이 지도의 남반부가 남극대륙의 퀸모드랜드”라는 맬러리의 주장에 이끌려 제자들과 함께 장장 7년에 걸친 과학적 상상력의 순례길에 나선다. 이들의 종착지는 그러나 평범한 상식만을 갖춘 우리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 1만2500년 전에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진 고대문명이 남극대륙에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저자는 이것이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입증된’ 사실은 아니고 유력한 가설임을 밝힌다. 우선 그는 피리 라이스의 지도가 ‘어떤 지도’를 모사했다고 본다. 그리고 상당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그 어떤 지도는 그리스시대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그리스시대의 지도제작술을 샅샅이 검토한 결과 그때는 그런 수준의 지도를 만들 수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만들어낸 초(超)고대문명이 존재했다!
여기서 눈치빠른 독자들은 90년대 후반 국내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던 그레이엄 핸콕의 베스트셀러 ‘신의 지문’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 핸콕이 ‘신의 지문’을 쓸 수 있었던 유사과학적 가설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햅굿이며 그 이후 이 같은 초고대문명의 존재를 가정한 지적 흐름까지 생겨났다. 이런 저자들을 미국 출판계에서는 뉴 에이지 저술가라고 부른다.

여기서부터 사실 ‘믿거나 말거나’이다. 지도가 제작될 무렵 남극대륙은
온난기후였으며 그 시기가 1만2500여년 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구의 자전축이 바뀌면서 남극이 얼음의 대륙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지도를 동원한 탐구과정은 사건추적에 몰두하는 탐정 홈스의 이야기를 보는 듯하다. 동시에 과학사 연구자답게 과학의 발견에 담겨 있는 우연적 요소들이나 아마추어적 호기심의 중요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 책을 과학책이라고 본다면 ‘오류로 가득찬 쓰레기’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논픽션 추리’ 정도로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면 ‘흥미로 가득찬 대작’이라고 찬사를 보내도
무방할 듯하다.


 


3. 이집트 피라미드도 우리가 전해준비법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현대과학 물질문명 시대에
단군신화 / 곰자손 운운은 얼마나 자신이 정보 무지상태에 있는지 잘알아야 합니다

기원전 2700년대에단군왕검 보다 400여년 앞선 동이선조 치우천자가 실존하였음 기록과 유물유적을 통하여 알고있지요

과연 이시대에 서양에는 무슨일이 있었는가 ?

한가지만 예를들면바로 기원전 2600 ~ 2100년대에 건설된 이집트 피라미드입니다

아래사진을 참고바랍니다

우리나라는 "
환국" → "구리(배달, 한웅)" →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약 9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역사중 적어도  치우천자의 구리국 시대는 세계문명과 견줄수 있는 대제국 시대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기존 학계에서는 우리 상고사에 대한 근거가 없다며 단군은 실존인물이 아닌 신화라 주장하며일본놈들과 똑 같은 신화설 운운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이병도도 죽기전에 참회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를 하여단군은 신화가 아닌 실존의 역사 였으며 일제시대때 단군제사가 끊겼다고 고백을 하고 죽었습니다


관련글:       
☞클릭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國祖  이병도 사설 

그런데 이병도의 손자뻘되는 나이 40도 안된 송OO이라는 작자가
국내 고대사 박사 1호라 선전하며단군 신화운운 / 곰새끼 운운을 하고 있으니

3대 제자가 지 스승의 턱수염을 뽑는 것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닌지요 ?

단순 비교로 아래에 올리는 이집트 피라미드 자료를 보시고
더 이상 기원전 2700년대의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의 기록을 부정하는
비 상식적인 분들이 되지 말기를 기원합니다

 


만주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밝혀진것은 100개이상이다. 평균 25 ~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이집트 최대 피라미드보다 더 큰 것도 있고.
제작시기도
이집트보다 한 2천년은 앞섭니다.

참고 사진 (만주 피라미드들의 일부-독일인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가 찍은 것)


이런 것들을 축조하기 위해서는(고대의 기술로) 연 인원 100만 명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큰 것은 이집트 최대 피라미드보다 더 크다죠.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알게되었고.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죠.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는겁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죠.

(대체적으로 지금으로 부터 약 5,6천년 전으로 밝혀짐.황하문명보다 한 천년정도는 빠름.)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구요. 학술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답니다.
(
중국당국은 1960,70년 대에 이미 위 피라미드들을 발굴하다가 동이(東夷)족 즉 한민족(배달민족)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므로 발굴 중단 했다. 그 후 중국 당국은 위 피라미드들에 대해 접근을 금지 시키고 고조선과 고구려를 중국역사라 우기는 작업을 시작하였음.)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 크랴샤 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의 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 구역으로 묶여있던 북중국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답니다.

그 후 중국 공안당국은 촬영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촬영 직후 곧바로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 서방세계에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을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렵의 수 많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중국 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죠.

처음에는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것 이라고 발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야만민족이나 기마민족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웅장하여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 발표와 함께 10년전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 가르치고 전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위로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지요.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의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답니다.

그러면 5 천년 전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였을까? 중국인 이였을까? 아니다. 중국인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짓고 있었다. 몽골인 이였을까? 아니다.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서, 정착 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 이들도 유목민이죠

 



Chinese Pyramids




 

    Historically China is well known for things like the Great Wall of China, its dynastic rulers and of course it superb china ware. It is not very well known for its Pyramids, well China has a large number of pyramids, possibly over a 100. Most of them are located in a 70-mile area around the city of Xi'an. This has mostly been unknown by the out side world, thou as china opens up this may change.

   The first photo of a Chinese pyramid was taken in 1945 at the end of World War II. This White Pyramid is located in the Qin Ling Shan mountains about 60 miles Southwest of Xi'an. The photo was in the files of the US Military for 45 years before it became public knowledge.


   The biggest breakthrough came when Hartwig Hausdorf a writer and author from Germany, was able to visit some of the restricted areas in china, he then found and photographed a large number of pyramids. Hartwig Hausdorf has written his own account of his visit to china, as well his ideas on the Pyramids. These can be found, on the Extraterrestrial legacy web site.

   As we can see from the photographs the pyramids in china are as large as any that can be found in Egypt, Mexico and any other part of the world.


   These images and others that become available over time, will help all researchers of the ancient world to peace together our past. I would expect any new ideas to be as controversial and wide ranging, and probably have similar lines to the one's we have already seen, for other pyramid sites around the world.



 



The main Pyramid areas are on the Qin Chuan Plains in central China.

Qin Lin Valley
Qin Ling Shan Mountains - 100km SouthWest of Xi'an
Moa Ling - Near Xianyang township 50km West of Xi'an
Wei Ho River - North of Xi'an (Chinese Imperium)
Stensi
Shandong - Stone Pyramid
Taibai Shan Mountain - 10,000ft highest point in the Qin Ling Mountains




    Were the Pyramids constructed as tombs for the emperors of china or were they copies of an existing great white pyramid? In a television documentary "The First Emperor" some footage was shown of the pyramids describing them as tombs of the emperors of china.
 An alternative view by the author Hartwig Hausdorf has suggested an Extraterrestrial connection, his ideas can be found in his book the "Chinese Roswell"

   In ancient texts the mound found near the terracotta army is described as resting place of Chin the first emperor of china. It is supposed to contain a model of the Chinese empire with rivers of flowing mercury and a roof covered with jowls that show the constellations and stars in the sky. The texts also describe the existence of the terracotta army, and as we know that they are correct in this respect then we can assume that the rest is also true.

   No one has excavated this tomb yet but attempts have shown traces of toxic chemicals that would make any attempt very hazardous indeed.

  The big question is are all the pyramids like this one or is this, the exception? These are questions that cannot be answered until a substantial amount of fieldwork is done.



    

    New Photorecon images from the farshore web site they show a large number of pyramids in three areas. After careful examination of the images you can see that they are not of the same pyramids as the ones taken by Hartwig Hausdorf

    The second photograph is a larger view of the lower center in the first Photograph. It shows a few large pyramids and a large number of small pyramids.
    




If any one has photos or other material on the Pyramids in China and wants to include them on this site please drop us an email.


관련글:       ☞클릭 만주에 고조선때 축조된 피라미드가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 자료)






(피라미드 위치)
기원전 2686년 ~ 2181년에 건립된 피라미드 들이다




(피라미드 3기)
멘카우레왕
카프레왕(136미터)
쿠프왕



(이형 피라미드)
기원전 2560년경 건설 : 스네푸르왕시 건설



매의 모습을 한 수호신 호르스의 날개로 보호를 받고 있는
기원전 2500년대의 카프레왕 모습



(인면사자상)
높이 22미터, 길이 73미터

("구리"시대 연표)





(추가설명 : 한글병기)

① 최초의 나라 "한"(桓國: 동아시아 단일시대)
우리민족은 약 9200년전인 기원전 7197년에 최초의 국가 "한"(桓)이
일어나 약 30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② 두 번째 나라 구리(九黎)
- 배달(倍達) 또는 한웅(桓雄), 신시(神市)시대 : 동아시아 단일국가

한(桓)에 이어 기원전 3898년(약6,000년전)에 구리(九黎)시대가 1565년간 유지되었는데
치우천자는 구리시대의 14세 천자(B.C 2707년, 일명 자오지 한웅)이었습니다
이때가 중국정사에 나오는 중국인의 시조 "헌원"시대로 치우천자와 전쟁을 하게됩니다


이 치우천자에 대한 것은

정사에 기록이 있으며
정사에 기록된 자리에서 유물이 발견 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이 신화라는 말입니까 ?


(산동성 에서 발견된 유물)


① '치우총(蚩尤塚)' 비석



석회암으로 된 길이 2.38m, 넓이 0.83m, 두께 0.31m의 비석

② '치우사' 표지석



화강암에 석각된 된 길이 1.1m, 넓이 0.55m, 두께 0.15m의 표지석 

 


 


 


4. 지난 우주일년의 유물들


 


지난 우주일년의 유물들

 


이라크에서 발견된 고대의 배터리


고대 배터리 구조도





고대의 컴퓨터


고대의 컴퓨터 구조도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2.8억년전의 쇠공


2800만년전의 사람 이빨 화석





화석으로 발견된
수백만년전의 배터리 스파크 플러그


화석으로 발견된
수백만년전의 스파크 플러그 X-Ray 사진





두께 25m 바위안에 있던 800만년된 종


이집트에서 발견된 고대 전기등 벽화



유물은 분명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글쎄요.. 위와같은 물증의 사실들을 인정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어오고 배워온 '5만년의 유인원역사'의 관념을 벋기가 힘들기 때문일까요.

중요한것은 우리 후세에게도 전해질 이
물증들의 진실
인류의 역사를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인 것만은 분명한 것일것입니다.




 


5. 마야문명








 울창한 밀림 안에 서 있는 티칼유적




마야문명은 현재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에서 과테말라, 유카탄 반도의 전역과 온두라스 일부에 퍼져있으며, 과테말라 북부 페텐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 문명이다.
마야문명은 자연적인 지형에 의해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것은 광대한 열대림으로 덮힌 페텐 지구, 우수마신타 분지의 파시온 강 지구, 유카탄 저지대 지구이다.


다른 문명들과는 달리 인간이 살기에 아주 부적합한 열대 밀림에 도시를 세우고, 중앙집권의 단일 지도 체재가 아닌 수많은 부족의 집합으로써 도시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던 마야문명은 천문, 역법, 수학, 미술 공예 등이 놀랄 만큼 과학적이고 정교하였으며, 일종의 상형 문자인 신성 문자를 사용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마야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화전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촌락이 올멕의 영향 하에 문명화로의 첫걸음을 내딛는 시기로, 기원전 300년까지를 형성기(形成期)라고 한다.
그 후로 3세기까지를 전고전기(前古典期)라 하는데, 서기 68년경에 이미 마야인은 지금의 온두라스에 우와하쿠콘이라는 도시를 세우고 약 120년간 그곳에 살았다. 엘미라도르 유적 등에서는 대규모 신전 건축이 세워졌다.







그들은 3세기 후반에 페텐 지방에 강대한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이 때부터 987년까지를 고전기(古典期)라 부르는데 특히 티칼로 도읍을 옮기면서 전성기를 맞아 그곳에서 5세기 초까지 거주했다.
그 후 마야인은 도읍을 건립했다가 버리고 또 건립했다가 버리는 일을 되풀이했다.
8세기경부터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9세기말 멸망한다.

한편, 유카탄 반도 북부 저지대에는 5세기부터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150년 후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유카탄의 마야문명은 8~9세기에 전성기를 누린다. 9세기말부터 유카탄이 멸망한 15세기까지를 후고전기(後古典期)라 한다. 에스파냐 인이 들어왔을 무렵(1510년)에는 이전의 화려했던 문명은 밀림 속에 함께 매몰되어 있었다.







 팔렌케 비명의 신전


마야문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문명보다도 신비롭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첫째, 마야인들은 다른 어떤 문명과도 견줄 수 있는 뛰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이 살기 부적합한 밀림 속에 도시를 건설했냐는 것이다.

이들이 도시를 세운 열대 우림 지역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밀림으로 덮여있고 표범, 멧돼지, 독사, 독도마뱀, 독거미 등이 우글거린다. 또한 축축한 습기와 더위로 전염병이 유행하기 쉽다.
고대 4대 문명의 발상지들이 강을 끼고 온대기후에 속해 기후가 좋고 비옥한 토지에서 발생했던 것과는 달리 마야문명은 무더운 밀림 속에서 이룩되었다는 점이다.









 비명의 신전 내부에서 발견된 파카르 왕의




둘째, 마야인들이 세운 거대한 석조 건축물의 비밀이다. 그들이 세운 건축물은 인근 어느 민족보다도 뛰어났고 규모도 컸다.

페텐의 밀림 속에 있는 티칼은 신대륙 최대의 유적이며 마야 최고의 대도시이다. 그곳에는 신전, 궁전, 승원(僧院) 등 석조 건축물이 무려 1㎢ 당 약 200개의 비율로 3,000개 이상이나 된다.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면서도 마야인들은 도시와 밀림을 연결하는 포장도로도 만들지 않았다.
또한, 수레바퀴의 사용법을 알고 있었음(무덤 속에서 바퀴 달린 장난감 출토)에도 불구하고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직접 그 많은 자재를 운반했다.







           태양의 돌


셋째, 다른 고대문명보다 훨씬 앞선 역법, 천문학, 수학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사용되지 않았고 근세기에 들어와서 사용한 0(Zero)의 숫자를 마야인은 일찍이 실용화한 점이다.

카툰이란 단위로 시간을 측정했던 마야인들은 3세기경부터 이미 0 을 포함한 20 진법 숫자 체계를 갖고 계산했다. 0 의 사용은 인도보다는 3 백년, 아라비아 상인보다는 7 백년 정도 앞선 것이다.

마야의 천문학은 매우 발달하여 그들은 1년이 365.2420 일이라고 밝혔다. 오늘날 정확한 과학조사로 밝혀진 날짜는 365.2422 일이니 불과 17.28초의 차이다. 그들의 수치계산이 얼마나 정확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또한, 마야인들은 금성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 584일 주기의 금성력(金星曆)까지 만들었는데, 그들은 태양력의 8년 동안에 금성력이 꼭 0.4일 어긋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넷째, 찬란한 마야문명을 꽃피었던 마야인은 9세기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 고전기의 마야의 도시는 이카튼(7,200일)의 종료 때마다 기념비를 남겼는데, 790년에는 19개의 밀림도시의 모습이 사라졌고 810년에는 12개 도시로 줄었으며 830년에는 불과 3개의 도시만이 남았다.









 코판 유적에 있는 신성 문자를 새긴 석비




전쟁이 일어난 흔적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흔적도 없다. 그들은 문명의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설 하나 남겨놓지 않고 사라졌다.

왜 마야문명이 멸망했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우선 내부적인 요인으로 소수 지배계층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반란을 들 수 있고 ,외부요인으로는 북쪽의 아즈테카 같은 강력한 종족의 침입을 들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의 멸망의 원인으로는 지역적인 기후조건(열대 밀림지역), 토양의 생산성 부족, 문명 진보의 거부를 들 수 있다.

결국, 마야문명은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으로 귀결 된다.
척박한 기후와 화전에 의한 토질 악화, 탐욕스러운 유럽의 정복자들과 전염병, 바로 이런 몇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멸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살아 있는 마야인의 후예는 약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그들은 고대 자신들의 선조가 이룩했던 찬란한 마야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6. 깊은바다 속에 잠겨있는 고대 유적



해저 유물의 주인공들은 문자를 알고 있었고, 피라미드를 건설 한 발달한 문명 소유

지구는 46억 년 전에 생겨났다고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인간 이전의 영장류는 신생대 4기의 빙하기에 비로소 출현했는데 그 때가 대략 180만 년 전 일이다.


몇몇 과학자들은 화석을 연구하여 인류의 사회활동과 문화는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야 나타났는데 그때가 약 1만 2천년 전이라고 본다.그러나 처음 7천년 동안, 즉 석기시대에는 이들의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한다.

문자와 상징체계의 기록이 5천년 전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이 시대 이전 즉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 시대를 사람들은 선사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해저에서 건져 올린 점점 더 많은 선사시대 유적들이 위와 같은 견해에 도전하고 있어서 과학자들은 당황하고 있다.






▲ 이집트 고대문자 해저 유적 중 건축물들은 정교한 건축 기술과 예술적 기교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발달된 문명의 흔적을 보여준다.게다가 그 문명의 주인공들은 문자를 알고 있었으며 피라미드를 건설하기도 했다.

현대의 과학기술로 보면 그곳이 1만년 혹은 그 이전에는 육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 훨씬 이전의 선사시대에 발달된 문명이 존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문명들은 사라졌고 바다 속에는 그 유적만 남았다. 아래에서 이들 문명이 존재했다는 몇 가지 증거들을 살펴보자.

ː지중해 연안에서 발견한 해저도시



이집트 해안 근처 해저에서 고고학자들이 거의 완전히 폐허로 변한 고대도시의 유적들을 찾아냈다. 2,000년 6월에 프랑스와 이집트 연합팀은 1,000여 년 전에 가라앉은 메누티프와 헤라클레이온이라는 도시를 알렉산드리아에서 6km정도 떨어진 지중해 해저에서 발견했다.

가발라 이집트유물최고회의 의장인 가발라 알리 씨는 "무덤이나 교회 또는 이슬람 사원을 발굴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번에 우리가 발굴한 것은 옛날 그리스-로마시대 문헌에서나 들었던 완전한 도시들이었기에 우리는 대단히 흥분하였다."라고 말했다.

파리에 본부를 둔 유럽 해양고고학연구소 소장인 프랭크 고디오 씨는 "아마 그것들은 지진 때문에 사라졌던 것 같다. 지진으로 지중해의 해수면의 갑자기 상승했다가 가라앉았거나 아니면 기후의 변화가 그 도시들의 멸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 도시에는 세라피스, 이시스, 오시리스 신들에게 바쳤던 수많은 사원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와 예술이라는 면에서도 고대의 전설이었다. 해저에서 건져 올린 정교하게 조각된 키 1.5m의 검은 이시스 여신상을 매스컴에 공개하면서 고디오씨는 "나에게는 그녀가 17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마 1,200 살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2년에 걸친 해저탐사에서 파라오(고대 이집트 왕) 동상의 머리, 수염을 기른 세라피스 신상, 스핑크스 상, 전체 길이가 90m나 되는 고대 로마풍의 기둥, 화강암 석상, 비잔틴 제국 시대나 이슬람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금화와 그 밖에 가옥이나 사원, 이시스 여신을 모신 신전의 흔적도 발견하였다.

고고학자들은 이 도시들이 가라앉기 수백 년 전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발굴한 금화로 볼 때 이 지역들은 적어도 8세기까지는 물속에 가라앉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지역에서 카노푸스와 토니스라는 수몰된 다른 두 도시를 확인하였다.

이렇게 해저로 가라앉은 고대도시들을 전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하였다. 이집트의 이 도시들은 약 1,200년 전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것에 불과하지만 이보다 훨씬 오래된 해저도시들도 발견하였다.

ː버뮤다 삼각지대의 수중피라미드와 바하마제도의 해저 건축물

1958년에 몇몇 미국의 과학자들이 바하마제도 주위의 바다 속을 탐사하던 중 이상한 건축물들을 발견했다. 이 건축물들은 특이한 기하학적 양식이었는데 수 마일이나 곧바로 뻗어 있었다. 10년 후에 길이가 120m에서 150m에 이르는 거대한 돌 벽들을 그 근처에서 발견하였다.

이 벽들은 주요 벽과 함께 직각을 이루었으며 주요 벽은 한 면이 1평방피트 이상인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이후에 복잡한 연단, 도로, 항구, 다리 등과 같은 것들을 발견하였다. 이 전체 유적들이 마치 항구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유럽과학자들은 버뮤다 삼각지대를 조사하던 중 예전에 알려지지 않은 거대한 수중 피라미드를 발견했다. 그 피라미드는 한 변이 300m, 높이는 200m였다. 피라미드에는 사람이 만든 것이 분명한 거대한 구멍이 두 개 있었다.

바닷물이 이 구멍으로 밀려 들어와서 회오리치며 밀려나와 피라미드 근처에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그 소용돌이가 해수면을 구름모양으로 만들었다. 육지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것은 수 만년 이전 일이기 때문에 이 피라미드를 언제 만들었는지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ː일본 요나구니 섬 해저에서 발견한 상형문자

약 50년 전에 몇몇 잠수부들이 류큐 군도에 있는 요나구니 섬 남단의 바다 속에서 인간이 만든 건축물 유적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산호로 뒤덮인 사각형 모양 건축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거대한 연단이었다. 모퉁이, 통로, 계단, 아치형 부속 건축물을 갖춘 연단이었다. 그 유물은 고대도시의 제단과 비슷하게 생겼다. 길이는 동서로 약 200m, 남북으로 약 140m에 이르렀다.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약 26m 정도였다.

1986년에 그 지역 잠수부들은 이 해저 도시를 “해저유적 잠수지역”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곳은 여러 언론 매체들이 보도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그 유적을 발견한 직후에 류큐 대학에서는 “해저고고학탐사대”를 결성하여 8년간에 걸친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 결과 시후나 섬 남쪽과 인근 지역 바다 속에서 더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다.

그 유물들로는 돌로 만든 건축물, 기둥에 둘러싸인 동굴 같은 건축물, 사람의 머리상, 아치형 문, 기하학적 도형의 거북이 상 등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발견은 “상형문자”였다. 그 상형문자들은 돌 벽에 새겼는데 고도로 발달한 어느 고대인류문명이 후세에 남긴 것으로 보인다.

위 유적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를 살펴보면 거리와 농경지가 있다. 가장 큰 유적은 길이가 100m에 이르고 높이는 25m나 되는 거대한 바위 구조물이다. 류큐 대학에서 컴퓨터로 합성한 모형에 의하면 그곳은 아마 고대인들이 모여 종교의식을 거행한 사원의 제단인 것 같다고 한다. 그 사원 북쪽에는 반원형 지주가 있는 두 동굴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그곳이 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목욕을 한 장소라고 보고 있다. 그 사원 동쪽에는 거대한 바위 두 개가 겹쳐있는 아치형 문이 있다. 그 바위 상단에는 사람이 만든 직사각형 구멍이 있다. 그 바위는 기계로 깎았으리라고 추정할 정도로 정교했으며 그 도시의 주춧돌로 사용했던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요나구니 섬 남쪽의 유명한 리센얀 주위의 바다 속에서 사람의 머리상을 발견하였는데 안면 특징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 후에 그 거대한 인간의 머리상 근처에서 상형문자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그 해저 유적을 건설한 사람들이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마사키 기무라 씨는 류큐 대학 지질학 교수이다. 그는 1999년 9월 어느 인터뷰에서 “그 유적들이 인간이 만든 건축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통로와 직각계단이 있고 이 직각계단에는 돌기둥을 세우기 위하여 디자인한 듯 둥근 구멍이 있는 바위가 있다. 인간의 머리상과 상형문자를 발견하였다는 것은 요나구니 섬 남쪽의 해저 유적이 바다 속으로 침몰되기 전에는 지상에 존재했던 선사문명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겠다.

ː일본에서도 발견한 해저 피라미드(1만 년 전)

요나구니 섬 남쪽은 물론 서쪽에서도 중요한 유적을 발견하였다. 1990년에 잠수부들이 바위로 만든 거대한 피라미드를 발견했다. 이 피라미드는 폭이 183m, 높이가 27.43m였는데 직사각형 바위로 만들었고 5층으로 되어 있었다. 근처에는 이 거대한 피라미드와 비슷한 작은 건축물들도 몇 개 있었는데 소형 피라미드라고 할 만했다. 그런 소형 피라미드들은 폭이 대략 10m, 높이는 약 2m인 돌 층으로 되어 있었다.

이 탐사에 참여한 류큐 대학의 지질학자들은 이 유적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인조 건축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자연적으로 생겼다면 부식으로 인한 돌 더미가 있어야 하는데 주위에서는 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피라미드를 에워싸고 있는 거리라고 추측할 만한 흔적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미국 보스톤 대학교의 지질학자 잠수팀은 1m 높이 바위 층으로 된 거대한 계단들이 계단식 피라미드와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 구조물이 수중부식으로 깨진 바위들로 형성되었다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자연적으로 형성된 그렇게 예리한 계단은 이제까지 발견한 적이 없다. 런던대학교의 고고학자들은 그 피라미드를 만든 사람들은 적어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인더스 문명과 같은 고대문명 수준이라고 믿었다.

도쿄 대학의 한 지질학 교수는 그 지역이 약 1만 년 전 즉 마지막 빙하시대에 바다 속으로 침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과학지식으로 이해한다면, 그 시기 인류는 아직 동물을 사냥하며 생활하던 원시인이었다. 그런 원시인들이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물들을 축조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알려지지 않은 어떤 문화의 유산이라고 본다. 혹자는 그런 진보된, 번창한 문명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는지 궁금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해저 유물들이 일본에만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ː대만 펑후에 있는 고대 해저도시 벽

펑후 현의 고대 사료보관소 기록을 보면 “후징 지역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바다 속에 길게 뻗어있는 도시의 벽을 볼 수 있다.”라고 나와 있다. 예전에 사람들은 그곳을 “후징의 깊은 물웅덩이”라고 불렀다. 1982년에 전문 잠수부들이 후징의 침몰된 도시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이 고대의 도시 벽은 십자 모양이었다. 나침반으로 측정한 결과 그 벽은 정확하게 동서남북 방향을 향하여 직각을 이루었다. 그 벽은 주로 현무암으로 만들어졌고 표면은 해초로 덮여 있었다. 길이는 동서 약 160m, 남북 약 180m에 이르렀다. 두께는 상단부가 약 1.5m, 바닥이 약 2.5m이다. 어떤 부위는 부식하여 평평하지 못했으나 돌 사이의 연결 부분은 대단히 견고했다. 북쪽에 둥근 판 모양 건축물이 있었다. 바깥쪽 벽의 직경은 약 20m이고 안쪽 벽은 약 15m였다.

그 당시에 몇몇 사람들은 그 가라앉은 도시는 후징 지역이 바다 속으로 뻗어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질학자들이 연구한 바로는 만약 그 벽이 천연 바위로 형성된 것이라면 깨지지 않은 하나의 바위로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람이 만든 벽이라면 분리된 부분들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벽이 길고 일직선이라면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하였다.

특히 돌들이 거의 같은 크기이고 직각을 이루었으며 연결한 돌들 사이에는 틈을 메운 흔적들이 보였다. 또한 벽 상단의 우묵한 부분은 십자 모양이었고 평평하고 매끄러운 연결부가 있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의 건축표준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영국인 작가 그레이엄 헨콕은 “신들의 지문” 등과 같은 저서를 통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 8월 그는 이 지역을 탐사하는 중국과 일본의 조사대에 아내와 함께 합류했다. 그는 “바다 속에 가라앉은 도시에서 건져 올린 돌 건축물들은 천연 석조물들과는 확실히 달라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 건축물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그런 구조물들이 세부적인 곳까지 엄청난 주의를 기울여 만든 것으로 보아 그것들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분명하게도 후징의 해저도시에 있는 돌 벽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 돌들은 표면이 매우 평평하고 매끄러웠다. 그 돌들을 매우 밀접하게 일직선으로 연결해 놓아서 연결부위는 아주 얇은 나이프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헨콕의 견해로는 이 해저 돌 벽은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현재 인간사회에는 이미 확립된 학설이 있다. 그러나 이 학설로는 최근에 발견한 고고학적 유물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오늘날과 선사시대의 건축물들이 서로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까? 사실 현재의 역사는 사라진 고대문명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건축물들이야말로 사라진 고대문명을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단서들이다. 다시 말하면 후징의 해저도시나 유사한 유물들이 과거 인간문명에 대한 숨은 증거를 담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ː전설적인 무 대륙의 문명

19세기 말에 영국의 제임스 처치워드 대령이 인도에서 수비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어느 힌두교 사원의 수도원장에게서 나칼비문(주: 인도의 무 대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점토판 비문)을 입수하였다.

그 비문은 매우 난해한 언어로 되어 있었다. 많은 노력 끝에 처치워드와 한 유명한 수도승이 전설로만 존재하던 위대한 무 문명의 역사를 밝혀내었다. 1926년에 처치워드는 무 문명에 대해 기술한 <잃어버린 대륙(The Lost Continent)>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 비문을 보면 무 대륙은 태평양에 위치해 있었다. 무 문명은 매우 번성하여 높은 수준의 문학, 예술, 공예기술, 기계류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놀라운 건축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거대한 건물, 피라미드, 석조 기념비, 성, 도로 등을 건설할 수 있었다. 무 대륙의 수도와 다른 큰 도시에서 단정하고 깨끗한 돌로 만든 도로를 발견하였다. 모든 벽은 금으로 장식하였다. 사람들은 호화스럽게 생활했다.

무 대륙에 살던 사람들은 항해술이 아주 뛰어났다. 그들은 모든 대양을 항해했다고 했다. 그들은 강력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기까지 했다. 그 당시에 무 제국을 “세계문화의 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번창했던 무 대륙은 일시에 사라졌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지각변동으로 무 대륙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말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 엄청난 비극은 격렬한 화산 용암분출에 이은 강진, 태풍과 함께 시작하였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발생했다. 육지는 파도처럼 소용돌이쳤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모든 것이 장난감처럼 무너졌고 즉시 용암과 바다 물이 이를 덮어버렸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무 대륙은 태평양속으로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전설로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로 보면 인간문명이 존재했다는 가능성을 알 수 있다.

해저 유적은 선사문명이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교과서에서는 아직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대의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현존하는 역사적 지식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도전은 현재의 이론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지구의 역사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이런 명백한 역사적 증거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더 깊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7. 초고대 문명 레무리아(MU) 대륙




수많은 자료에 의하면, 최초의 문명은 78.000년 전, 뮤나 레뮤리아로 알려진 초거대 대륙에 세워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문명은 52,0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이 문명은 BC10500년전 지금부터 약 12500년전에 일어난 지축의 이동(혹은 극이동)에 의한 대규모 지각변동(지진)에 의해 멸망했다고 기록은 전한고 있다.(플라톤의 저서)

다른 후기 문명과 마찬가지로, 뮤 문명은 그다지 고도의 기술수준에는 도달하지 않았으나 몇몇 분야에서 만큼은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지진에도 충분히 견딜수 있는 견고한 거석 구조물의 건축기술이 특별히 발달했다. 이러한 뮤의 위대한 유산이라 일컬어지는 이러한 기술은 정부주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뮤는 '단일언어','단일정부' 체제였다. 교육은 왕조의 성공의 기조였고, 그것으로 인해서 모든 국민은 세상의 질서(자국의 법)를 알고있으며 무역이나 전문분야의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정책은 뮤제국의 엄청난 번영을 가져왔다. 아동기때 부터 21세까지 '사회적응'이라는 명분아래 의무교육이

행해졌다. 이러한 '사회적응훈련'의 기간은 7년더 지속되었고, 결국에는 제국의 국민이 된 가장 젊은 사람(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 )의 나이는 28세나 되었다.


고대사 X파일 아틀란티스 문명의 신비


뮤대륙이 바다속으로 가라앉았을때, 세상의 바다의 수위는 현저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새롭게 형성된 태평양의 저지면으로 해수가 몰렸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레무리아 문명기에 대서양에 존재했던 작은 섬들은 해수면이 낮아 짐에따라 수면위로 솟아올랐고(섬의 더많은 부분이 노출) 땅은 건조되었다. 새롭게 생겨난 땅이 대서양의 'Poseid Archipelago'에 접합되면서 작은 대륙을 형성했다. 이 대륙은 오늘날 학자들에 의해서 'Atlantis'라 불리게 되었으나 실질적인 이름은 'Poseid' 이다.

아틀란티스는 고도의 단계(very advanced stages)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되고 있으며, 현재 우리가 가진 모든 기술보다 충분히 앞서 있었다. 'Dweller On TwoPlanets'

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발명품이나 장치에 관한 언급이 있다. 치명적이고 심각한 대기의 환경을 극복하고자 고안된 'air conditioner'로 진공 실린더 램프, 크리스탈 튜브 전자총, 총은 추진력있는 힘(propulsive force)으로써의 전기를 발생시킨다. 또한 단일 레인(mono-rain)의 교통수단과

대기로 부터 물을 모으기 위한 장치로 'water generator(s)'가 있었다. 그리고 'the Vailx', 공중부양과 반중력의 힘에 의해서 통제되는 항공모함이 있었다.


잠자는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의 언급


잠자는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예언중에 아틀란티스의 문명인들은 항공기와 에너지등(의 자원)으로 크리스탈(혹은 불의 돌 : firestone)을 사용했다고 언급했다. 또한 케이시는 이러한 문명의 힘의 남용이 문명의 종말로 이끌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 문명의 힘의 남용이라는 말에 주안점을 둔다면 요즘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긴박한 상황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봄 직하다.


 


8. 빙하기가 없던 남극지도 !!



    

피리 레이스 지도 미국 킨 주립대학의 찰스 햅굿 교수는 중세에 만들어진 지도를 연구하다

지도가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정확하다는사실을발견했다.

무엇보다 지도가 제작되던 때에는 탐사되지 않았던 오지들이 매우 정확하고 상세하게 묘사

됐다는 사실에 그는 주목했다. 대부분의 경우 위도와 경도가 0.5도 이내에서 실제의 위치와

일치했던 것이다. 어떻게 알려져 있지 않은 지역이 지도에 정확히 표시될 수 있을까.


특히 많은 중세 지도에 오늘날에는 수km 두께의 얼음에 파묻힌 남극대륙이 정확히

묘사됐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중세의 지도들은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원본을 베끼고 짜집기해서 제작된 것이 틀림 없었다.

즉 중세의 과학기술 암흑기에 점차 잊혀지던 사실이 그 이전에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시대의 과학기술 수준도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햅굿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원본의 기원을 찾아야 했다.


햅굿이 내린 결론은
지도가 최소한 기원전 4천년 이전 남극의 일부가 얼음에 뒤덮히지

안았던 시기에 제작됐다는 것이다. 특히 '피리 레이스 지도'라는 대표적인 지도는

이집트가 중심이 돼 제작됐음이 밝혀졌다. 또 이 지도에는 8방위 시스템 대신 12방위

시스템이 적용됐다. 12방위 시스템은 원을 30도 단위로 12분할하거나 60도단위로6분할하는

방법을말한다.


햅굿은 이런 방위 시스템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사용됐을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이 지도는 고대 이집트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원조격인 초고대 문명에서 만들

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초정밀 측량술이 구현됐다는 점에서 대피라미드와 중세 지도는 상호보완적으로 초고대 문

명의 실재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고대에 남극지도 그릴 수 있다

얼음 없던 시기에 탐험

16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장의 지도가 많은 화제를 남기고 있다. 이 지도에는 남아메

리카의 오지가 그려져 있으며, 현재 얼음에 덮힌 남극 대륙도 그려져 있다. 또 위도와 경도

의 위치가 근대에 사용되는 것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16세기는 남극에 대륙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인데, 1km도 넘는 얼음 두께 아

래의 모습을 어떻게 그릴수 있을까. 과연 누가 그것을 제작했을까.

약 1만년 전까지 지구에는 현재보다 훨씬 넓은 지역에 빙하가 퍼져있었다(뷔름 빙기). 그러나

약 1만년 전부터 얼음이 녹으면서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약 6천년-5천년 전에 이르러 최

고의 온도를 보였다(고온기 또는 기후최적기). 이 시기에 기온은 현재보다 높았다.

남극은 어땠을까. 지질학적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4천년까지 남극의 일부가 얼음에 덮혀 있지 안

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당시 얼음이 없는 남극을 여행하면서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지도는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지구에

서 최고의 문명을 갖고 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굳이 초문명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어도

지도 제작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참고로 이집트 피라미드 남쪽에서 발견된 '제1 태양의 배'는

당시 이집트의 건조 능력을 보여준다. 현재 원형이 복원돼 전시되고 있는 이 배는 좌우측에 5명

씩, 그리고 배 앞뒤에 1명씩 총 12명의 노젓는 사람에 의해 운행된 것으로 보인다.배의 규모를 볼

때 총길이 42.3m, 폭 5.6m로서 한번에 약 1백50t의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 것으로추정된다.

 



9. 4천년전 사하라는 ‘문명의 숲’


지구 공전궤도 변화로 기온 상승 등 기후 급변

세계 최대의 사막인
사하라 사막이 생겨난 것은 불과 4,000년 전이며,
그 이전엔 이 지역에
고대문명이 번영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독일 「포츠담기후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지구 기후에 관한 컴퓨터 모의실험을 통해

사하라 지역이 4,000년 전부터
약 300년간 가혹한 기후변화를 거친 끝에
사막이 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영국 BBC방송이 지난 9일 보도했다.

사하라 지역은 1만년 전에는 풀과 키작은 관목으로 뒤 덮여 있었으나,

이 같은 기후변화로
여름 기온이 상승하고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면서
이 지역에 번성했던 고대문명이 황폐화되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포츠담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지난 1만1천년 동안 일어난 기후변화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례로 사하라의 사막화를 꼽았다.

또 나일강,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따라 초기 문명이 발달하게 된 것은
이 지역의 사막화로 인한 농지 상실과 주민 이주 때문인지 모른다고 BBC는 분석했다.



한편 연구팀은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 궤도의 미묘한 변화
이처럼 엄청난 기후 변화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9,000년 전 지구 회전축
수직면에 대해 24.14도 기울어져 있었으나,

오늘날 그 기울기는 23.45도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9,000년 전에는
지구가 1년 중 7월말에 태양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지만 지금은 최접근기가 1월로 변했다.

과학자들은
지구 회전축의 기울기 변화에 따른 대기와 대양 및 대륙간의 상호작용 현상은
갑작스럽고 가혹한 기후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1999년7월13일)



 


 



10. 고대 피라미드도 한민족이 최초입니다.


중국문명은 황하문명부터 시작합니다.

황하문명은 4천 몇백년전에 시작한 문명입니다.

신화통신이 보도한 5천년 이상 전에 만들어진 만주 북서부(내몽골)의 피라미드는 황하문명 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지역은 원래 중국의 지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국당국이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래 장안지역의 피라미드들에 대하여도 중국당국이 홍보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국 내륙 가운데 시안(Xian)이란 지명.

당의 수도였던 장안.

붉은 동그라미.



상공에서 촬영한 장안 지역의 피라미드들.

(사진 출처 - http://www.earthquest.co.uk/china/china.html )








위의 피라미드들에 대하여 중국당국이 홍보를 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오래된 피라미드들이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4천 몇백년전에 시작한 황하문명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만약 황하문명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고 중국인들이 만든 것이라면

중국당국이 벌써 오래전에 세계를 향하여 초강력 홍보를 하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을 것입니다.

위의 피라미드들이 당나라 무덤이고 흙무덤이라는 분들도 계시지만

원래 중국은 돌로 무덤을 만들지 않고 흙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흙무덤이 천년이상을 저렇게 각이 잡혀 있을 수 있나요. 

'각' 말입니다.

당 고종이 묻힌 건릉으로 추정된다는, 산을 깍아 만든 흙무덤.

위의 흙무덤(산무덤)은 위의 피라미드들과는 다르지요.

위의 피라미드들은 한단고기에 나오는 [고대 한국]에서 만든 것들로 보여집니다.

내몽골(만주 북서부)의 피라미드가 5천년 이상 전의 것이라는 것은 중국 신화통신이 이미 보도 했고

장안지역의 피라미드들에 대하여는 

중국당국이 고조선 고구려 역사 훔치기가 확실히 성공했다고 확신한다면

고대만주역사 통째로 훔쳐가기가 확실히 성공했다고 확신한다면

세계를 향해 대대적으로 선언할 것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중국의 피라미드를 배낀 것이라고. 

(사실은 중국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 [고대한국]의 피라미드인데 말이죠.)   

장안지역의 피라미드들 공중사진과 이집트 피라미드들 공중사진을 비교해 보지요.

 


[상공에서 촬영한 장안 지역의 피라미드들]

 



[상공에서 촬영한
이집트 피라미드들]

 

두 지역의 피라미드들이 비슷하지요.

그런데 워낙 유명한 위 사진의 이집트 '대 피라미드'들도 4천 몇백년 밖에 안된 것입니다.

장안지역의 피라미드들보다 최소한 대강 한 천년 후의 것들이라는 거지요.





1번이 고대한국(환국)

2번이 배달국(한웅(환웅)님의 나라)

3번이 고조선 입니다. 

 

오랜 옛날 시베리아 (또는 만주)의 고대 한국인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인디언이 됩니다.

아래는 [고대 한국] 에서 건너간 미국의 인디언들이 만든 피라미드.

 



미국 일리노이주 커호키아에 있습니다.

미국의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

인디언이 이런 문명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지요.

그 인디언의 일부가 아래로 더 내려가서 중앙 아메리카에 마야문명을 세웁니다.

아래 사진은 마야문명의 피라미드들 입니다.

 

 




상당히 엄청난 크기이지요.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다음 그림을 보십시오.

 

 

 

왼쪽부터
1.장안지역의 피라미드
2.이집트의 피라미드
3.마야문명의 미라미드
4.오리온 별자리

같은 문명이 만든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고대 한국]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 피라미드는 [오키나와]에도 있습니다.

오끼나와는 일본과 대만 중간에 있는 섬들로 일본이 오키나와를 합병한 것은 한 4백년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전에 오키나와는 독립국으로서 조선에 조공을 하고 그랬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도 그러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바다속에 잠겨 있는 오키나와 피라미드.

 

 





<오키나와 피라미드 전체 그림>

위 사진의 오키나와 피라미드는 최소한 5천년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입니다.

외국의 다큐멘타리에서 이미 많이 다루어졌던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이 피라미드들에 대하여 대대적 홍보를 하지 않는 이유도

중국이 현 중국땅의 피라미드들에 대하여 대대적 홍보를 하지 않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들의 선조가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오래 전 것이라는 이유입니다.

일본은 약 2천 4백년전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일부 가야인들이

청동기 벼농사 등의 문명을 전해주기 전에는 원시석기시대였습니다.

 

* 고구려 호대왕릉과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벽화에 나오는 고구려 사신들.


 디지털 복원한 호대왕릉 (한변 길이 약 70 ~ 80 미터)




장군총 (한 변 길이 약 31미터) 


함께 찾아나가는 '인류문명의 뿌리의 진실'입니다.

잊혀진 고대사를 바로 세웁시다!


 


신화통신이 보도한 만주의 고대 한국 피라미드(번역) |

5,000-year-old "Pyramid" Found in Inner Mongolia 


5천년전  "피라미드"를 내몽골(만주 북서부)에서 발견했다.


Chinese archaeologists has discovered a pyramid-shaped building, dating back more than 5,000 years ago, in the Inner Mongolia Autonomous Region, in north China.


중국 고고학자들은 중국북부의 내몽골 지역에서 5천년이상 된 피라미드 모양으로 된 건물을 발견하였다.


The "pyramid", located on a mountain ridge one kilometer north of Sijiazi Township in the Aohan Banner (county), is a three-storied stone building, with the bottom layer being more than 30 meters long and 15 meters wide.


이 피라미드는, Aohan Banner의 Sijiazi Township의 북쪽 1킬로미터의 산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3층의 돌로된 건물이고, 밑 바닥은 30미터가 넘고 폭이 15미터 이상 된다.


The "pyramid" belongs to the Hongshan Culture period of 5,000 to 6,000 years ago, according to Guo Dashun, a famous Chinese archaeologist who works in Liaoning Archaeological Research Institute.


Liaoning(랴오닝 - 요녕)고고학 연구소안에 일하는 유명한 중국 고고학자 "GuoDashun(구오다쉰)"에 의하면


이 피라미드는 5천~6천년전 의 [홍산문화]에 속한다,


Seven tombs and ruins of an altar were found on the top of the "pyramid."


At the site of the altar there are many fragments of broken pottery carved with the Chinese character “mi" (rice).


Archaeologists said that the character "mi" may have something to do with people's understanding of astrology in ancient times.


피라미드의 정상에서 제단의 7개의 무덤과 유적을 발견하였다.


제단의 위치에 한자로 "Mi"(米 - 쌀)이 새겨져있는 많은 도자기의 파편들이 있었다.


In one of the tombs, archaeologists found a bone flute and a stone ring, and they unearthed a stone sculpture of a goddess the size of a human body in another tomb.


고고학자들은 무덤의 한곳에서 뼈대와 돌반지,


그리고 다른 무덤에선 사람 몸크기의 돌로 조각된 여신상을 발굴했다.


Archaeologists were surprised to find a stone-carved linga on the wall of a tomb and a small stone statue of a goddess below the linga in the same tomb.


동일한 무덤안의 돌로 된 벽에 새긴 Linga와 이 밑에 있는 작은 돌로된 여신상을 발견되어, 고고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Archaeologist Guo said that many of the relics were first-time discoveries and they are of great significance in studying the burial customs, religious and sacrifice rituals, and the social structure of the Hongshan Culture.


고고학자인 구오(Guo)는, "유적의 많은 부분이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홍산 문화에서 그들의 매장풍습, 종교와 제사 그리고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이다." 라고 말하였다.


He pointed out, the discovery of the "pyramid" is also of great significance in exploring the origin of the Chinese civilization.


그는 피라미드의 발견은, 중국문명의 원류를 밝혀내는 중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 황하문명은 배달문명의 한 지류.)


The Hongshan Culture, belonging to the Neolithic culture, is mainly distributed in the juncture area between Inner Mongolia, Liaoning and Hebei provinces.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홍산문명"은 Liaoning(랴오닝)이 Hebei(허베이)성과 만나는 지역안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Xinhua News Agency 07/09/2001)


 


 




 


11. 모나리자보다 더 가치 있는 유물[고대컴퓨터]


[팝뉴스 2006-11-30 14:08]


 




연구팀 “모나리자보다 더 가치 있는 유물이다”

지난 1901년 그리스 안티키테라에서 발견된 고대 기계 장치의 비밀이 연구 100년만에 풀렸다.

29일 과학 전문 잡지 네이처 및 뉴욕타임스 등이 영국, 그리스, 미국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인용 보도한 바에 따르면, ‘안티키테라 기계 장치’라 이름 붙여진 이 유물이 달, 태양 등의 움직임을 계산, 예측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천체 연구용 컴퓨터’라는 것.

안티키테라 기계 장치는 약 2,000년 전 침몰된 로마 시대 화물선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 수십개의 청동제 톱니 바퀴와 다이얼 등 복잡한 기계 장치로 구성된 이 유물은 기원전 150~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며 발견 후 그리스 아테네 박물관이 보관하고 있었다.

이 장치는 고대 시대에 제작된 컴퓨터로 추정되어 왔는데, 영국 및 그리스 등 과학자들이 3차원 X 레이 판독기 등 최첨단 장비를 이용해 분석 연구한 결과 이 장치가 정교하게 4년 마다 윤년을 계산에 넣는 '365일 달력'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월식과 일식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고, 주요 별자리들의 이동을 계산하는 별 달력 기능도 가지고 있는 '컴퓨터'로 파악된 것.

연구에 참여한 영국 카디프 대학의 천문학자 마이크 에드먼즈는 안티키테라 기계 장치가 놀랄만한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된 유물이라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보다 값어치가 있다는 것이 언론의 설명.

연구팀은 첨단 기술을 이용, 안티키테라 기계 장치의 원리와 모습을 컴퓨터를 통해 복원했는데, 이 장치가 37개의 톱니바퀴로 이뤄졌고 시계 모양을 한 두 개의 면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기계는 가로,세로,두께가 각각 31.5㎝, 19㎝, 10㎝인 나무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달과 별 그리고 태양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기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문 연구용 컴퓨터’가 분명하다는 것이 연구팀의 설명. 고대 그리스의 과학 기술 역사를 새로 써야 할 중요한 유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해외 언론은 이번 연구 결과를 보도하면서, 또 하나의 진귀한 고대 과학 기구도 언급했다. 바그다드 인근에서 발견된 그것은 14cm 높이의 ‘바그다드 배터리’.(사진 아래)

진흙으로 빚은 작은 그릇의 뚜껑은 아스팔트로 만들어져 있다. 2천 년이 넘은 과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용기에 액체 초(醋)를 채우고 금속관을 넣으면 1.1 볼트의 전기가 발생한다. 정확한 용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과학자들은 전기 도금을 할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 : 그리스, 영국, 미국 합동 연구팀이 첨단 기술을 이용, 복원한 안티키테라 기계 장치와 바그다드 배터리, 아래는 2천년전의 바그다드 배터리)

최기윤 기자 (저작권자 팝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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