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합성의 원리
사고가 올바르려면 그 자체로서 확실해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 사고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은 그 요소들 상호간에 그리고 한 사고는 다른 사고와 서로 알맞게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다른 사고'란 나의 다른 사고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의 사고도 포함한다.
"나는 지금 앉아 있다. 그리고 동시에 걷고 있다"는 생각이 어떤 사람에게 제아무리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생각이다.
또한 "나는 철수를 아침에 강화도에서 분명히 보았다"는 생각이 나에게 제아무리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에 철수는 영국 런던에서 박물관을 관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철수 자신이 여러 증빙 자료를 통해 확인해 주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보증할 때는 나의 '확실한' 생각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은 다른 생각과 알맞게 어울릴 때 올바른 생각일 수 있다고 우리는 받아들인다. 이것은 우리가 정합성(整合性)을 사고의 원리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사고의 정합성은 몇 가지 사고의 법칙에 근거한다. 그런 법칙으로 사람들은 보통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 배중률(排中律)을 꼽는다.
동일률
동일성의 법칙은 "어떤 것도 자기 자신과는 같다"고 표현될 수 있다. 철수는 철수이며 나무는 나무이고, 삼각형은 삼각형이다. 그러니까 철수를 영수라고 생각하거나 나무를 돌이라고 생각하거나 삼각형을 원이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은 정합하지 않다. 즉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무엇과 무엇의 동일성에는 "철수는 철수이다"처럼 완전한 경우도 있고, "철수는 사람이다"처럼 부분적일 경우도 있다. 완전한 동일성을 말하면, 그것은 동어반복으로서 그 생각은 자명하다고 한다.
그러나 부분적인 동일성, 즉 부분적으로 같음이 생각되는 경우에는 그 양자 사이의 포함 관계를 헤아려 보아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그 생각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나무는 나무이다"는 생각은 자명한 것으로 언제나 맞다.
"나무는 식물이다"는 생각은 나무는 식물에 속한다, 즉 식물의 일부라는 점에서 맞다.
그러나 "식물은 나무이다"는 생각은 식물이 나무에 속하는 경우는 아주 조금 뿐이므로, 아주 조금 맞는 생각이라고 평가하거나 거의 맞지 않는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나무는 동물이다"는 생각은 나무는 전혀 동물에 속하지 않으므로 전혀 맞지 않는 것이라 해야 한다. 어떤 생각의 맞고 맞지 않음의 척도 혹은 규범으로 기능하는 이런 이치가 바로 동일성의 규칙, 동일률이다.
동일률의 실제 적용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과 무엇의 동일성을 살필 때에 관점을 바꿔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삶은 삶이 아니요,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삶으로써 죽고 오히려 죽음으로써 산다"고 말할 때, 문맥상 앞의 삶과 뒤의 삶, 앞의 죽음과 뒤의 죽음이 다른 뜻으로 말해진 것이라면, 이 말은 동일률을 어긴 것이 아니다.
가령 위의 말이 문맥으로 볼 때, "(수치스런) 삶은 (참다운) 삶이 아니요, (의로운) 죽음은 (값없는) 죽음이 아니다. (치욕스럽게) 삶으로써 (인격적으로) 죽고, 오히려 (떳떳하게) 죽음으로써 (영혼으로) 산다"는 뜻으로 이해된다면, 이 말은 논리적으로 그릇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일상 언어(자연 언어)로 말할 때는 말이 문맥에서 의미하는 바에 따라 '논리성' 여부를 가려야 한다.
모순율
모순율이란 "어떤 것에도 그것에 어긋나는 것이 속할 수 없으며, 또한 서로 어긋나는 성질이 함께 어떤 것에 속할 수 없다"는 사고 법칙을 말한다. 원을 삼각이라고 생각하거나 천장에 뚫린 구멍이 둥근 사각이라고 생각함은 알맞지 않은 것이다.
어떤 것도 자신과 어울릴 수 없는 것을 자신의 성질로 가질 수 없으며,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성질들을 동시에 함께 가질 수 없다.
이 모순의 법칙을 일상적인 사고나 언표에 적용하여 그것의 맞고 맞지 않음을 판별할 때에는, 동일률의 적용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순을 파악하는 관점을 바꾸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 사람은 무식하면서 유식하다"는 언표가 한 관점에서 말해졌다면 모순을 범한 것이지만, 어떤 문맥에서 그것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말해진 것으로 이해될 때는 모순을 범한 것이라 볼 수 없다. 가령 저 말이 그 사람은 현대인의 필수 교양인 수학, 과학 등을 전혀 모른다는 점에서는 무식하지만, 인생 경험이 풍부하고 세계의 풍물에 대해서 밝게 안다는 점에서는 유식하다는 뜻으로 말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모순을 범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또 누군가가 "인간은 살아가면서 죽어 가는 것이며, 죽어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고 말할 때도 살아가다와 죽어 가다를 서술하는 기준이 다를 경우에는, 이 말이 모순을 범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나는 지금 슬프면서 기쁘다"고 말할 때도, 그것의 문맥상 의미가, 예컨대 고향을 떠남은 슬프지만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꿈을 펴게 되어 기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모순된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언표에서 모순의 규칙 준수 여부는 문맥상의 의미를 살펴 가려야 한다.
배중율
배중률 즉 중간(혹은 제3자)은 배제된다는 법칙은 "모순 관계에 있는 두 생각이 모두 틀릴 수는 없다"로 표현된다. 어떤 생각 '가'와 어떤 생각 '나'가 모순 관계에 있다면, 분명히 '가'와 '나' 모두가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생각이 있을 때 그것은 맞거나 틀리거나다. '맞다'와 '틀리다'는 모순 관계에 있는 말이고, 그래서 어떤 생각에 이 말이 동일한 관점에서만 적용된다면 그것은 맞거나 틀리거나 중 하나다. 다시 말하면 맞으면서 동시에 틀릴 수도 없고, 맞는 것도 아니고 틀리는 것도 아닐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모순율이 일러주는 바다. 그렇다고 양자가 다 틀리지는 않다고 배중률은 말하고 있다.
"꽃은 열매이다"는 생각은 맞거나 틀리거나다. 이때 이 생각이 틀리다면, "꽃은 열매 아닌 것이다"는 생각은 맞을 수밖에 없다. "꽃은 열매이다"와 "꽃은 열매 아닌 것이다"가 모순 관계에 있다면, 이 두 생각이 모두 틀릴 경우 그것은 "꽃은 열매도 아니고 열매 아닌 것도 아니다"는 말인데, 이럴 수는 없다. 그러니까 만약 어떤 두 생각이 모순 관계에 놓여 있다면, 그 두 생각 중 하나는 맞는다는 것을 배중률은 지시하고 있다.
배중률을 어떤 두 생각에 적용할 때 주의할 점은 그 두 생각이 과연 모순 관계에 있는가를 판별해 내는 일이다. "영혼은 있다"와 "영혼은 없다"는 두 생각의 경우 여기서 '있다'와 '없다'가 모순적인 의미로 쓰였다면, 우리는 적어도 "영혼이 있다"는 생각이 맞으면 "영혼이 없다"는 생각은 틀리고, "영혼이 없다"는 생각이 맞으면 "영혼이 있다"는 생각은 틀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있다'와 '없다'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면 저 두 생각은 다 맞을 수도 있고 다 틀릴 수도 있으며, 그 맞고 틀림이 도무지 가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누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영혼은 있지 않지만, 나의 사랑의 힘으로서의 영혼은 있다고 말한다면, 이 말의 뜻은 논리적으로 뜯어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예로서 "용은 동물이다"와 "용은 동물이 아닌 것이다"는 두 생각을 살펴보자. "용은 동물이다"라는 생각은 경험 과학적으로 볼 때는 틀리다. 그렇다면 "용은 동물이 아닌 것이다"는 생각은 맞는가? '동물 아닌 것'이 만약 '동물은 아니지만 그러나 다른 무엇인 것'을 함축한다면 이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이다. 용은 도대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금은 동물이다"와 "금은 식물이다"라는 두 생각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 두 생각은 서로 반대가 되기는 하지만 모순은 아니다. 이렇게 반대가 되는 생각도 함께 맞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예처럼 양쪽 모두가 틀릴 수도 있다. 반면에 "개는 동물이다"와 "개는 식물이다"와 같은 반대되는 생각에서처럼 한쪽은 맞고 다른 한 쪽은 틀리는 경우도 있다.
이상의 설명과 예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배중률은 앞서 언급한 모순율의 다른 적용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모순율의 사용에서와 마찬가지로 배중률의 적용에서도 먼저 생각에 포함되어 있는 요소들의 관계가 과연 모순관계인가 어떤가를 주의 깊게 살펴야만 배중률을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생각이 의미 있는 내용을 담으려면 최소한 이와 같은 사고의 법칙을 준수해야 하며, 이 사고의 법칙은 기본적인 논리 척도이므로, 언표도 당연히 이를 준수할 때 '논리적'이 된다.
[출처] 철학적 논리의 정합성 (잃어버린 철학을 찾아서) |작성자 goodstat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