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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실체(實體)와 형상(形相) - 아리스토텔레스?

작성자유토피아|작성시간18.05.30|조회수543 목록 댓글 1

다음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평가를 하는데 왜곡된 내용들이 있다고 봅니다.

사실 플라톤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 구조적인 모델자체가 다릅니다.

즉 세계관 그자체체가 다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플라톤철학이 황금비라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피타고라스적인 수학이라는 겁니다.

이 점을 염두하시고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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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모든 개별 사물을 초월해서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이데아를 질서라고 주장한 것과 달리 경험적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개체들만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현실속의 개체들이야말로 스스로 존재하면서 세계를 이루는 '실체(實體 : substance)'이다. 따라서 현상 세계는 초월적 실재 세계의 단순한 모방이나 그림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참인 실재 세계로서 학문의 참된 대상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체란 자신은 술어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자신은 다른 사물의 술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명제에서 소크라테스는 주어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어도, '사람은 소크라테스다'라는 예처럼 다른 어떤 것데 대한 술어의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개별자로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사람은 개별적인 것을 지칭하기 보다는 보편적인 것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체로서의 개별자(주어)는 보편적인 것(술어)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이 보편자를 '형상(形相, edios)'이라고 부른다.

형상이란 개체에 본질을 규정하고 부여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자는 형상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생성은 형상을 받아들인 것이고, 모든 소멸은 형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즉 형상은 이데아처럼 모든 현상의 근거가 된다. 그에 의하면 형상은 개체들로부터 떨어져 있거나 초월해서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각 개체에 내재한다.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달리 보편자로서의 형상이 제 기능을 하는 것은 그것이 시간과 공간 안에 개체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각 개체에 내재한 형상은 그 성격상 보편적이지만 항상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실현된다.

 

그럼 어떻게 해서 보편자인 형상이 개별적 개체에서 발현되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질료(質料, hyle)'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질료는 그 어떤 형식이나 규정도 지니지 않은 것으로서 보편적 형상을 수용하는 물질이다.

예를들어 설계도만으로는 집이 될 수 없다. 설계도 속의 집을 구체화하고 실현시킬 건축 자재가 필요하다.

설계도는 형상에 해당하고, 건축 자재는 질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건축 자재가 없는 설계도는 집을 짓는 데 무용지물이듯이 질료없는 형상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건축자재는 나무, 돌 등 아주 다양하다.

 따라서 어떤 재로로 짓는가에 따라 동일한 설계로부터 나무집이나 돌집 등과 같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처럼 형상은 다양한 개별자들이 종(種,species)의 본질적인 통일성과 구조적인 단일성을 부여하는 원리인 반면에, 질료는 그 형상을 구체화하고 개별화하는 원리로 작용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질료로서 불, 공기, 흙, 물을 언급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항상 질료와 형상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질료나 형상은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양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면서 실체를 이루는 원리들이다.

그러므로 만두가 속과 겉피를 모두 필요로 하듯이, 모든 실체는 형상과 질료로 구성된다.

 

이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안고 있는 난점이었던 변화에 대한 이리스토텔레스의 해명에 관심을 돌려보자.

형상은 다른 형상으로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영원한 것이다.

반면에 질료는 그 자체가 무규정적인 것이므로 여러 상이한 형상들을 차례로 취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어떤 개체의 변화는 질료가 애초에 갖고 있던 형상을 잃고 새로운 형상을 수용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특히 변화 중 성장에 대한 설명을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태'와 '현실태'라는 개념을 이용한다.

 

잠재태는 질료와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비 규정적인 반면에 현실태는 형상과 관련되어 규정적인 성격을 띤다. 예를들어 도토리가 떡갈나무의 잠재태이며, 역으로 떡갈나무가 도토리의 현실태인 것과 같다.

 즉 도토리가 떡갈나무가 되었을 때, 자신에 잠재되어 있던 형상을 실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개체는 자신 속에 내재된 형상의 통제와 지도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거나 자라고 발전하면서 잠재적 형상을 구체화하고 실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변화를 잠재적인 것에서 현실적인 것에로의 이행으로 이해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파르메니데스에게 나타난 변화의 문제, 즉 변화를 위해 전제되는 비존재는 생각될 수 없다는 비상식적 결함을 극복한다.

 

이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실체는 새로운 의미를 함축한다.

모든 개체에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형상이 내재되어 있고, 그로 인해 각 개체는 고유한 성질(본성)을 가진다.

또한 각 개체는 자신 속에 내재된 형상을 구체화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개체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이 세상의 변화와 발전은 바로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이다.

우주 전체를 놓고 본다면, 우주는 도달해야 할 목적을 가지며 이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목적론적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이는 특히 중세의 종교적 세계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08~111p)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생물학으로부터 성장했다.

세계의 모든것은 내부의 충동에 따라 지금보다도 더 큰 것이 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모든 것은 질료 또는 원료였던 어떤 것으로부터 성장한 형상 또는 실재이다.

예를 들면 어른이 형상이라면 어린이가 그 질료이고, 어린이가 형상이라면 태아가 그 질료이고, 태아가 형상이라면 난자가 그 질료이다.

 

 이와 같이 소급해가면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형상이 전혀 없는 질료라는 개념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 형상 없는 질료는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사물은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광범한 의미로는 질료는 형상의 가능성이고, 형상은 질료의 현실태, 완성된 실재이다. 질료는 방해하고 형상은 건설한다.

형상은 단순한 형태에 그치지 않고 형성하는 힘, 곧 단순한 재료를 특수한 모양과 목적에 맞도록 형성하는 내적 필연성이며 충동이다.

형상은 질료의 잠재적 능력의 실현으로 만물에 깃들여 있는 활동의 힘, 존재의 힘, 생성의 힘의 총화이다. 자연은 형상에 의한 질료의 정복이고 삶의 항구적 진보와 승리를 의미한다.

 

출처 : 철학이야기(윌 듀랜트)

 

 

* 형이상학

과학은 어떤 특수한 영역의 존재자()를 구성하는 원리를 탐구한다. 예컨대 경제학은 경제사상()을 성립시키는 경제법칙을 연구하고, 물리학특수성), 즉 영역()을 고정시킴으로써 그 대상과 방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체의 존재자(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주관적인)의 지식이다. 따라서 특수한 영역과 시야를 넘은 초월의 시야에서 얻어지는 초월적 지식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성론자로서 경험보다 이성을 중시하고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자들 입니다.

플라톤의 이상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은 실체의 존재에 관하여 아주 대립적인 면이 있지만 그 둘의 사상을 비교해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철학을 통합시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상을 비교해 보면 첫째, 세계관은 플라톤이 이원론을 주장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원론을 주장합니다.

플라톤은 본질적 실체는 이데아에 있고,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세계인 형상은 그림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데아와 현상계가 분유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계는 계속적으로 변하지만 이데아는 영원불변 하는 참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그중 ‘선의 이데아’가 최고의 원리로서 조물주인 신보다도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하여 신의 단절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 대신에 사용하는 개념은 실체(Ousia)입니다.

탁자의 본질 자체는 탁자 안에 정신과 물질이 같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시아의 원리로 일원론을 설명하였습니다.

 

재료인 나무는 ①질료인, 작업공은 ②운동인, 바램은 ③목적인, 디자인은 ④형상인의 4가지 원인설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제1질료로 시작하여 =>형상=>질료(dunamis<가능태>) => 형상(energeia<현실태>) => 질료 => 형상... 이처럼 질료와 형상의 연쇄로 최후의 단계인 최고의 형상은 ‘신’입니다.

 

신은 어떠한 질료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형상으로서 신 스스로는 부동이면서 우주의 만물을 움직이게 합니다.

신이 뒤나미스를 전혀 가지지 않으며 우주만물을 움직이는 것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일원론이 신에게서만은 신의 정신과 질료가 융화되지 않는 이원론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은 진리를 의식할 때 감각에서 첫 출발을 시작한다고 한 반면 플라톤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참된 세계가 아니며, 감각을 통해 얻는 지식 또한 참된 지식이 아니므로 완전한 사물의 본질인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플라톤의 윤리학은 개인은 자기가 타고난 기질이 어디에 속하는지 잘 알고 선의 이데아를 모방하여 알맞은 역할을 수행할 때, 개인적으로 정의롭고 자신의 자아실현을 잘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국가 또한 계급에 적합한 교육을 받고 거기에 알맞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 정의로운 국가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최고의 이데아는 ‘선(善)의 이데아’로서 여기에 가장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철학자이고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는 철인정치론을 이상적인 국가로 내세웠습니다.


신체,              개인,     덕(德),     계급 
머리,              이성,     지혜,     통치계급 
심장,              기개,     용기,     수호계급 
복부 및 사지,  정욕,     절제,      영양계급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관은 목적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최고선’으로서 인생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eudaimonia)’을 제시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선이란 결국 덕에 일치하는 정신의 활동이다’라고 하였으며, 행복 역시 어떤 종류의 정신의 유덕한 활동’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덕(arete)을 통하여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에 도달한다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제자인 플라톤이 대화를 가지고 완성하여 기록하였고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철학을 통합시켰기에 우리가 참다운 진리를 배울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kimheesun122?Redirect=Log&logNo=10017094413

 

 

[도올의 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탈레스와 같이 만물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아르케 같이 단순한 것으로 환원 시키려고 했다. 소크라스때에는 소피스트들이 프로타고라스처럼 사람이 만물의 척도다라 같이 극단적 상대주의적, 주관적 인식이 모든 사물의 기준이 된다고 주장했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진리의 기준이 단순한 것으로 환원 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과 개인에 따라 다르다는 주관적인 것으로 진자추 운동을 한다. 하지만 우주에 대한 관심에서 개인에 대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그런 소피스트들 중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는데 다른 소피스들과 달리 문답법을 통해 궁극적 진리에 추구하려고 했음.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플라톤이었다. 자연 철학 시대에는 철학의 양대 산맥. 있었다. 이 세상에 변화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와 모든 것이 변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쪽이었다. 그래서 이 세계를 감관계와 예지계, 즉 사유계로 나눠 감관의 대상이 되는 세계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관념을 이데아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플라톤에게 있어 형상이었다. 형상(form). 플라톤에게 있어 형상은 단순한 모양이 아니라 관념적 형상이다. 이런 것만이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들은 존재라고 말 할 수 없다고 했다. 감관의 세계는 덧없고 부상하다고 보아 존재론적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경험론이 등장한다. 로크의 경우 관념(idea)은 오로지 감각을 통해 확인하고 이를 계속해서 머릿 속에서 반추(reflction)하면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로크와 같은 경험론자들은 관념이란 우리의 감각(sensation)과 내성(reflection)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형성되는 것이지 감각기관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했다. 이것이 근세 경험론의 출발이다. 현대는 이미 경험주의 패러다임이다. 과학 자체가 경험주의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 시대에 플라톤의 주장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 생물학은 굉장히 귀납적 성격이 강하다. 생명현상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하학은 그런 관찰이 필요없다. 기하학은 공리나 정리가지고 머리 속에서 엮어 내는 것이다. 기하학은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사고력, 추리능력가지고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궁정 의사였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관심이 생물학이었다. 플라톤이 기하학을 모르는자 들어오지 말라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적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개별적 사물에 대한 관심과 관찰, 정보 수집, 그것을 분류해서 정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플라톤과 스타일이 아주 달랐다. 플라톤은 완벽한 형상의 세계를 감관계로부터 분리 시켰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이데아, 형상은 사물에 내재할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찻잔은 흙으로 만든다. 흙이라고 하는 것은 질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그릇을 흙에다 형상이 부여되었다고 보았다. 만들고자 사는 사람의 관념을 가지고 흙을 가지고 구현했을 때 그릇이 된 것이다. 형상을 에이도스(eidos)라고도 하는데 모든 물체는 질료(hyle)와 형상(eidos)가 결합해서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 흙에다 형상이 합쳐질 때 사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 컵의 형상이 이 질료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이 세계는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4 원인설이 있다.

 

먼저 질료인(material cause)가 있다. 다음에 형상인(formal cause), 세번째가 동력인(efficient cause), 모션 즉 목수가 집을 지을 때는 못을 박는 목수의 에너지가 될 것이고 그릇의 동력인은 다리로 물레를 돌리고 손으로 만지면서 만들 때의 동력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적인(final cause)가 있다.

 

문제가 목적인이다. 왜 형상이 부여되고 동력이 생겨나는 이유가 뭘까? 바로 차를 마시기 위해서다. 그 목적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모든 만물은 반드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차를 마시기 위해 그릇이 생겼다. 한마디로 4가지 원인이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중의 모방 그릇은 주르르 흐른다. 목적인에 위배된다. 이건 예술작품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목적인과 동력인은 형상인 속에 포함되어 결국 4원인설은 형상인과 질료인으로 압축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한마디로 형상과 질료의 철학이다. 여기서 형상은 플라톤에서 왔고, 질료의 세계는 생물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질료인 이 흙은 potentiality 다 즉 가능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태. 그 가능태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그 형상이 여기에 실현된 것이다. 이때 형상은 실현태(actuality)가 된다. 가능태(잠재태)가 현실태(실현태)로 바뀌게 된다. 가능태의 형상이 실현된 것이다. 이때의 형상은 그것을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이러한 형상을 여기에 구현했을 때 이 형상이 이 사물에 있어 본질(essence)’이라고 부른다. 이 사물은 이것의 본질을 구현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게 된다. 텔로스(telos), 즉 목적이라는 말을 기억하라. 목적론(teleology)이란 존재하는 사물을 모두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지우개의 경우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야겠다고 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이 아이디어의 형상을 지우개에 구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목적은 지우는 것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이 지우개는 다른 목적을 위해 또 질료가 될 수 있다. 결국 모든 사물은 질료에다 형상이 가해지면 이것이 또 다시 더 큰 질료가 되고 또 형상이 가해진다. 더 나은 실현을 위해서 즉, 모든 것은 엔텔레키(entelechy)를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엔텔레키란 목적론적인 실현태로 목적을 구현한 완성태를 의미한다.  결국 모든 사물은 질료와 형상이라는 결합에 의해 목적론적으로 배열이 된다. 얼마나 더 많은 형상을 구현하느냐에 따라 그 사물은 그 가치가 더 높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존재에 가치론 적인 위계 질서가 있다. 배열이 되어 있으면, 존재의 사닥다리에서 맨 위는 바로 순수 형상, 즉 질료가 없는 형상이 존재하고 맨 밑바닥에는 순수 질료가 있게 된다.  순수 질료란 전혀 형상이 가해지지 않은 순수한 질료, 순수한 가능태만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순수 질료와 순수 형상은 없다. 질료와 형상이 반드시 결합되야 현상계 사물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있어 순수 형상의 세계가 ‘GOD’가 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God와 비슷하게 들리지만 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지고 중세에서 교부철학으로 만든다. 신의 존재 증명에 사용한다. 기독교는 원래 복잡한 이론체계가 아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만나게 되면서 교리로써 조직화 된 것이 중세기의 교부철학, 신부님들이 만든 철학이다. 그런데 아리스토 텔레스 철학에는 창조론이 없다. 질료는 희랍사람들에게 있어 그냥 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다르다. 희랍에서는 창조론이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신은 이 세계의 순수한 디자이너가 된다. 순수한 형상으로서의 존재다. 이 세계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본질이기 때문에 모든 세계는 거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텔로스를 구현하기 위한 목적론적인 위계질서를 가진다. 그래서 세계는 목적 없는 존재란 없다고 했다. 

 

 

플라톤은 그릇에서 형상을 우리의 관념으로 천장으로 분리시켰다.

왜냐 관념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깨지고 없어지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데아 세계의 형상을 회상할 뿐이라고 했다. 플라톤에게 햄버거 윗 뚜껑과 아랫 뚜껑을 분리할 수 있었지만 아리스토 텔레스는 햄버거를 반죽해서 아코디언 처럼 좍 하고 늘린 것이다.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제일 밑에 순수 질료, 꼭대기에는 순수 형상.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이 세계라는 과정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를 목적론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도 내가 나의 본질을 즉 나의 형상을 내가 구현하는 잠재태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잠재태는 새로운 목적을 구현해야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생성(becoming)해가는 과정적 철학이다.  이 두가지 철학의 차이만 알면 서양철학 끝난다. 중세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체계에 의해 인간을 얽어맨 철학이다.

 

 

하지만 이 철학은 있는 것은 있는대로 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있는 것이 반드시 어떤 목적(telos)를 구현하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아주 근사하게 들린다. 4원인설을 보면 근사한데 이것이 거대한 사기일 수 있는데 서양 중세기 `1천년 동안 욹어먹으면서 방대한 철학 구축, 헤겔과 막스철학까지 영향을 미친다. 역사의 단계는 그 다음 어떤 단계를 위해 존재하고 궁극적으로 공산사회다. 막스 철학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한다. 또한 막스의 공산사회는 유토피아며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상통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만 알아도 서양 문명사 전체 2000년의 가장 본질적인 심층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철학 공부란 우선 이런 핵심적인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결국 플라톤의 2원론을 현상 사물 속에서 일원화 한 것 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도 플라톤의 2원론적 구조가 숨어있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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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유토피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5.30 위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플라톤의 철학을 잘못 비교한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철학계는 아직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감정이입하여 왜곡된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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