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키메데스 | |
아르키메데스의 초상 앙드레 테베의 삽화집(1586년)에서 | |
| 출생 | 약 기원전 287년 시라쿠사 |
|---|---|
| 사망 | 약 기원전 212년 시라쿠사 |
| 국적 | 마그나 그라이키아 |
| 직업 | 철학자, 수학자, 공학자 |
아르키메데스(고대 그리스어: Ἀρχιμήδης, 그리스어: Αρχιμήδης 아르히미디스[*], 약 기원전 287년 ~ 기원전 212년)는 고대 그리스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일부였던 시라쿠사 출신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겸 공학자고전 고대의 대표적인 과학자물리학 분야에서 정역학과 유체정역학을 연구했으며 지레아르키메데스 나선양수기, 해상에 있는 배를 공격하기 위한 거울 등의 기계[1]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고전 고대 시기의 가장 뛰어난 수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2][3] 수학과 관련한 아르키메데스의 업적으로는 소거법의 도입, 포물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의 넓이 계산, 원주율[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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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87년 무렵 시라쿠사시칠리아에 있는 도시인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날 무렵 마그나 그라이키아비잔틴[5] 아르키메데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출생지와 죽음 이외에 알려진 사실이 그리 많지 않다. 발견의 기쁨에 벌거벗고 거리를 달렸다는 것 같은 아르키메데스와 관련한 많은 일화는 후대에 각색된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스스로를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여겼고 특히 구[6]
아르키메데스는 《모래알을 세는 사람》에서 아버지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였는데, 이름이 피이아스라는 것과 천문학자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아르키메데스가 시라쿠사의 국왕 히에론 2세[7] 다른 기록으로는 아르키메데스의 친구였던 헤라클레이데스가 쓴 전기가 있었으나 소실되었다.[8] 이 때문에 아르키메데스가 결혼은 했는지, 아이가 있었는 지와 같은 것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알려진 것으로는 아르키메데스가 청년기에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에서 공부하였다는 것과, 사모스의 코논, 에라토스테네스[9]
저는 옛 친구였던 코논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친구이자 평소 존경했던 한 수학자를 잃었다는 슬픔에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지금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연구된 적이 없고 마침내 저에 의해 완성된 한 정리를 코논에게 보낼 작정이었는데 이제 보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군요.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12년 무렵 제2차 포에니 전쟁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10]
한편, 아르키메데스가 남긴 말로 유명한 “내 원을 밟지마” (그리스어: μὴ μου τοὺς κύκλους τάραττε, 라틴어: Noli turbare circulos meos)는 후대에 누군가가 지어낸 것으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10] 폴리비오스플루타르코스와 티투스 리비우스[11]
아르키메데스가 사망한 지 137년이 지난 기원전 75년 키케로는 시라쿠사의 재무관[12]
아르키메데스의 묘비에는 그가 증명한 같은 높이의 원기둥과 구의 부피
s
이고, 이 때 같은 높이를 갖는 원기둥의 밑변은 반지름이 r인 원이 되고 높이는 2r이므로 원기둥의 부피는
c
이다. 따라서,
- Vs : Vc

이 되므로 구의 부피는 같은 높이의 원기둥에 대해 언제나 3분의 2가 된다.
[편집] 발견과 발명
[편집] 금관
가장 널리 알려진 아르키메데스의 일화는 불규칙한 물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비트루비우스순금은[13] 아르키메데스는 사람이 욕조에 들어가면 물이 차오르는 것에 착안하여 물질의 밀도에 따라 비중[14] 이 것을 깨닫게 된 아르키메데스는 옷을 입는 것도 잊고 뛰쳐나와 “찾았다”(그리스어: εὕρηκα!)[주해 1]를 외쳤다고 한다. 왕관과 같은 무게의 금을 비교한 실험으로 아르키메데스는 금세공사가 속임수를 썼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15] 다면체가 갖는 부력에 대한 정리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편집] 아르키메데스 나선양수기
아르키메데스가 제작한 기계들은 대부분 그의 고향인 시라쿠사의 일상 생활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의 작가 아테나에우스아프로디테아르키메데스 나선양수기[16] 로마 시대의 작가 비트루비우스는 아르키메데스 나선양수기가 바빌로니아의 공중 정원[17][18][19] 1839년 건조된 세계 최초의 프로펠러 추진 방식의 증기선은 아르키메데스의 업적을 기려 SS 아르키메데스[20]
[편집] 아르키메데스 갈고리
이 부분의 본문은 아르키메데스 갈고리입니다.
무거운 금속 갈고리를 단 밧줄을 지레에 연결한 아르키메데스 갈고리는 연안에 접근하여 상륙[21][22]
[편집] 아르키메데스 거울
2세기 무렵 고대 로마의 작가 루키아노스는 시라쿠사 공방전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는 아르키메데스가 사용한 무기가 일종의 화경[23] 아르키메데스 열선이라고도 불리는 이 무기는 햇볕을 한 데 모아 불을 붙이는 기구였다. 이러한 무기로 공격이 가능한 지에 대해서는 르네상스 시대까지 논란이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실제 그런 무기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여겼지만 근대에 들어 존 웨슬리[24]
구리나 청동으로 제작된 거울을 포물면 반사판태양로타르[25]
2005년 메사추세츠 공과대학호기심 해결사에서 다시 시도되었는데 샌프란시스코[26][주해 2] 나무가 불이 붙기 시작하는 발화점[27][28]
한편, 아르키메데스가 이러한 무기를 실제로 제작하여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6][주해 3]
[편집] 기타
아르키메데스는 《평면의 균형》에서 지레[29]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르키메데스 이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학파에서 연구하였던 아르키타스[30] 알렉산드리아의 파푸스가 쓴 기록에 따르면, 아르키메데스는 “적당한 장소가 주어진다면 지구라도 들어보이겠다”(그리스어: δῶς μοι πᾶ στῶ καὶ τὰν γᾶν κινάσω)라고 말하였다고 한다.[31]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메데스가 복합 도르래[32] 이 외에도 아르키메데스는 사거리의 조정이 가능한 투석기와 주행거리계톱니바퀴[33]
키케로는 대화록 《국가에 대해》(라틴어: De re publica)에서 아르키메데스의 발명을 언급하고 있다. 키케로는 시라쿠사가 함락된 후 7년이 지난 기원전 219년 로마를 배경으로 가상의 대화를 집필하였는데, 여기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를 함락시킨 뒤 태양과 달, 그리고 다섯개의 행성탈레스와 에우독수스집정관
Hanc sphaeram Gallus cum moveret, fiebat ut soli luna totidem conversionibus in aere illo quot diebus in ipso caelo succederet, ex quo et in caelo sphaera solis fieret eadem illa defectio, et incideret luna tum in eam metam quae esset umbra terrae, cum sol e regione.
갈리우스가 지구를 돌리자 실제 하늘에서 그러하듯이 청동으로 만들어진 달과 태양이 몇 바퀴씩 회전하였다. 태양이 지구의 그림자로 들어가면 달이 자신의 위치로 모습을 드러내었다.[34][35]
키케로의 설명은 플라네타리움이나 태양계의안티키테라 기계는 차동 톱니바퀴를 사용한 일종의 계산기로 추정되고 있는데[36], 키케로가 언급하고 있는 천체 모형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되었을 것이다.[37][38]
[편집] 수학
[편집] 무리수의 계산
아르키메데스는 근대 적분이 없었던 당시에 무한소소거법을 사용하여
의 근사값극한을 취하는 것으로, 귀류법다각형이 임의의 원
의 값을 다음과 같이 계산하였다.[40]
아르키메데스는 이 결과에 따라
의 근사값으로 3.1416을 제시하였다.[주해 4]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원의 면적이
임을 증명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그의 저서 《구와 원기둥》에서 어떠한 크기가 주어지더라도 임의의 크기에 적당한 수를 곱하여 주어진 크기를 초과할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를 실수에서의 아르키메데스 성질[41]
아르키메데스의 이 계산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산과정을 따로 밝히지는 않았다. 17세기 영국의 수학자 존 월리스[42]
[편집] 도형의 넓이
아르키메데스는 《포물선의 구적법》에서 오른쪽의 그림과 같이 포물선과 직선으로 둘러쌓인 도형의 넓이는 그에 내접하는 삼각형의 넓이에 대해 4/3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아르키메데스의 증명 과정을 간략히 소개하면,
- 포물선을 가로지르는 직선을 한 변으로 하는 내접 삼각형을 그린다.
- 위와 같이 하여 그린 내접 삼각형에 의해 포물선은 두 구간으로 분할되며 여기에 다시 같은 방법으로 내접 삼각형을 그릴 수 있다.
- 이렇게 계속하여 내접 삼각형을 그려나가면 오른쪽 아래의 그림과 같이 포물선을 가로지르는 직선에 둘러싸인 도형은 무수히 많은 삼각형으로 분할된다.
- 최초의 내접 삼각형 넓이를 1이라고 하면 전체 삼각형의 넓이는 다음의 공식에 의해 구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분할되는 도형의 넓이를 모두 합하여 급수로 표현하는 것을 기하급수1/4이다. 이 기하급수의 값을 증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서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수학 매거진》1999년 2월호[43]에 실린 그림을 소개한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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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매우 큰 수의 표현
- “겔로 2세(히에로 2세의 아들)는 모래알은 너무나 많아 무한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나는 시라쿠사나 시칠리아에 있는 모래알 뿐만아니 온세상의 모래알을 모두 합한 것이라 할 지라도 셀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를 만의 제곱의 배수로 표현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이 방법에 따르면 1억은 1만의 만배, 즉 10,0004로 나타낼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온세상에 있는 모래알의 전체 갯수는 대략 8×1063 개라고 추정하였다.[45]
[편집] 저서
아르키메데스의 저서는 도리아 고대 그리스어[46] 에우클레이데스알렉산드리아의 파푸스는 아르키메데스가 《구의 제작에 대해》와 다른 다면체알렉산드리아의 테온은 아르키메데스의 《굴절에 대해》를 인용하여 빛의 굴절비잔티움 제국, 이슬람 세계 등을 통해 전파되어 그리스어나 아랍어 등으로 번역되어 전해졌고, 르네상스 무렵 유럽에 소개되어 라틴어[47]
소실되었던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이 근대에 다시 발견된 경우도 있다. 1906년 덴마크의 수학사학자 하이베르그는 이스탄불동방 정교회[48]
지금까지 전해오는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평면평면 도형의 무게 중심
- 《원원의 측정에 대해》에서 아르키메데스는 소거법을 이용하여 원주율
- 《나선
- 《구와 원기둥구와 원기둥에 대해
- 《원뿔의 단면타원, 포물선
- 《부체에 대해》- 다면체
- 《포물선
- 《오스토마치온》 - 아르키메데스의 상자라고도 불리는 오스토마치온은 칠교와 같이 정사각형을 여러 개의 도형으로 분할 한 퍼즐
- 《아르키메데스의 가축 문제디오판토스 방정식부정 다항 방정식[49] 1880년 계산된 아르키메데스 가축문제의 답은 7.760271×10^206544 이다.[50]
- 《모래알을 세는 사람》- 해변에 있는 모래알의 갯수와 같은 매우 큰 수를 10,000
- 《수학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