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숙명적으로 삶의 문제 상황에 직면한다. 이러한 문제상황에 대해 인간은 전지전능자도 아니며 본능에만 의지하는 동물적 존재도 아닌 중간적 존재로서 이성적 숙고와 궁리 즉 이성적 사고를 통해 문제상황에 대처한다. 철학은 삶의 문제상황에 대한 지적 대응으로서 발생한다. 칸트에 의하면 "철학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철학(philosophy)는 사랑한다는 뜻을 가진 philo와 지혜라는 뜻을 가진 sophia라는 그리스어 합성어로서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여기서 지혜란 인간의 지혜로서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창조하며 조정하는 전지전능한 신의 지혜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지식, 깨달은 지혜를 가르친다. 동양에서 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세기 말로 일본의 학자 니시아마네가 필로소피아를 철학(哲學)으로 번역한 것이다. 원래 니시아마네가 사용한 말은 희철학(希哲學) 즉, 현명해지를 바라는 학문이었는데 나중에 철학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철학은 죵교와의 갈등에서 출발하였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서양적인 신관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이 창조하였으며 의심하거나 의문을 갖지않고 무조건 믿어야 하는 존재가 신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만큼 인간은 오로지 복종만 하면 된다. 회의하지 않는 맹신이 바로 종교의 핵심이며 중세에는 인간은 모든 것을 신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중세 종교관에 의한 철학이 발생하기 이전 즉, 돈오점수의 불교, 삼위일체의 기독교, 예언자의 이슬람교, 메시아사상의 유대교등 체계적인 교리로 정리된 세계종교가 자리잡기 전에는 고대종교는 신화의 세계였다. 그 중 가장 완벽한 체계를 갖춘 것이 그리스 신화였는데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적인 신들의 모습이었다. 인간들이 나라는 존재가 무엇이며 신에 대해 인간의 존재는 무엇인가를 물어가는 과정에서 철학이 발전하였다고 한다. 철학은 그리스에서 시작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 싶다.
철학적 진리는 이성적 숙고와 분별에 기초한 비판과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진리인 것에 비하여 종교적 진리는 오히려 이성이 좌초하고 합리성이 두절된 지점에서 지정의를 총망라한 저 이성 너머로의 총체적 비약, 이른바 믿음 또는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진리이다. 요컨대 종교는 삶의 가치를 믿음을 통해 완성하고자 하나 철학은 그것을 냉철한 지성으로 탐구하고 인식하며 비판하고자 한다.개별과학과 철학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19세기 말 이후 자연과학들을 중심으로한 개별과학들의 성과는 전통적인 철학의 기초가 되어온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전통적인 지식 체계를 뒤흔들어 놓게 된다. 인간의 일체의 문제에 대한 지적 대응은 과학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신념이 싹트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신체의 모든 부분의 역할과 상호관계를 명확이 인식해야만 명의가 되듯이 다양한 분야에서의 개별과학적 성과들이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에 총체적으로 조화롭게 귀일되지 않고 갈등을 빗는 경우도 많음에 따라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관점에서 개별과학의 성과와 방법 목적 전제등에 대한 비판적 반성적 고찰이 요구됨에 따라 철학의 역할은 더욱 증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은 모든 것에 대한 의문을 넘어서서 그 모든 것에 관한 통일적인 인식에로 육박하고자 하는 근원적 지적 갈구라 할 수 있다. 이 갈구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과 사태에 대한 수 많은 개별과학적 성과들과 그 성과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너머 필연적으로 사물과 사태의 총체적 근원과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으로 다가갈 수 밖에 없다. 철학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한 불후불멸의 해답을 제시한 이론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지적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시대의 문제를 그 시대의 조건에서 그 시대의 지성들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고통스럽게 육박하여 이루어낸 살아있는 그림들의 역사이다. 철학사는 지성의 회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이다. 철학이 다루는 문제는 딱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다. 캄캄한 방에서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보이지 않는 검은 고양이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있는 문제를 해명하는 총체적인 학문인 것이다. 철학의 대표적 대상이라면 존재,지식의 본질,도덕,이성,왜사는가 등의 문제가 될 수 있고 그 대답도 수없이 많고 답을 찾아가는 방법도 수 없이 많다. 현재 맞는 대답이라고 여겨지더라도 후에 아닌 대답이 되기도 하며 끊임없이 실체에 가까운 답을 찾아가는 학문인 것이다. 다만, 대상, 방법, 목적에 따라 철학은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으로 분류한다.
구분 대상 방법 목적
의학(개별과학) 질병 자연과학 건강
법학(개별과학) 법현상 사회과학 정의
- - - -
철학(종합과학) 대상일반 방법일반 가치일반
존재론(Ontology) 인식론(Epistemology) 가치론(Axiology)
오늘날 철학의 4대분과는 존재론,인식론,가치론에다 논리학을 덧 분여 4대분과로 본다. 주제에 따라서는 형이상학,윤리학,정치철학,과학철학,논리학등으로 보기도 한다. 에를 들어보자. 돈은 오늘날 살아가는 수단중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철학적 물음을 돈에 대하여 적용시켜 본다면 '돈은 도대체 무엇이며 돈은 어떻게 벌어야하며 돈은 어떤 가치로 다루어야 하는가' 이다. 종교마저도 종교가 발달한 시대에 주어진 맹신이 아니라 이러한 철학적 물음을 근거로 나아가야 신의 의미를 진정하게 깨달을 것이다. 철학은 결코 무의미한 학문이 아니라 정신적 주춧돌이다. 물질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혼돈의 시대에 철학은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하는 정신적 고속도로이며 이정표이다. [참조] 서양철학사(스털링 렘프레히트)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알렝드 보통) 철학의 이해(이정호)
존재론 [存在論, ontology]
철학의 일부분으로 존재학(存在學)이라고도 한다. 라틴어로는 'ontoligia'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어의 'on(존재자)'과 'logos(논)'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데카르트파의 철학자 J.클라우베르크(1622∼1665)가 처음으로 썼다. 이 말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없으나 존재 및 존재자의 탐구는 이미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최초의 철학자가 모든 사물의 시초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것은 사물의 존재에 선행(先行)해서 존재하는 사물 이외의 힘(신들)에 의해 사물의 존재를 설명(신화적 해석)하지 않고, 사물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전체적인 추구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철학은 그 시초부터 이미 존재에 대한 추구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 문제를 그 자체로서 분명히 한 최초의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였다. 그에 의해서 존재에 대한 문제는 '있다(estin)'라는 말로 파악되었고, 존재자는 '있다'라고 하는 말이 모든 제약을 떠나 갖는 충분한 의미에 따라 완전무결한 것(모든 비존재를 배제하는 것)으로서 사고(思考)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불완전한 존재자는 모두 비존재자(非存在者)로 여겨졌고 무우주론(無宇宙論:Akosmismus)에 귀결되었다.
후대에서의 존재론 문제는 생성소멸(生成消滅)하는 세계 안의 모든 존재자를 어떤 의미에서 존재한다고 보는가,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가에 달려 있다. 비존재의 문제는 플라톤에서 처음으로 파악되었다. 존재는 비존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나타난다(따라서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시현(示現)이 이데아이다. 존재와 비존재의 관련에 존재론의 문제가 있으며 이를 밝히는 방법이 변증법(辨證法:dialektikē)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존재는 존재본질과의 연관에서 문제시된다. 모든 '있는 것'은 어떤 '그 무엇'이며 이 '그 무엇'이 그 존재본질이다. 존재본질은 어느 일정한 것인 한에서 어떤 유(類) 안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유로서 10개의 카테고리를 들었다. 그러나 '있다'라는 술어(述語)는 모든 유에 속하는 것의 술어가 되므로, 카테고리의 범위를 늘 초월하는 것이며, 일정한 유 안에 포함되는 존재자를 다루는 특수한 과학에서는 취급되지 않는다.
존재는 이런 뜻에서 선(善)·진(眞)·일(一) 등과 함께 후에 초월자(超越者:transcendentalia)라고 일컬었다. '있다'라는 술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그것이 어떤 뜻을 가지며 어떤 원리에 입각해 있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의 원리학'이라고 규정하고 이것을 '제1철학(후에 형이상학)'이라고 이름지었다. 이것은 철학사에서 존재론의 최초의 체계적인 시도였다.
고대 말기로부터 중세에 이르는 그리스도교 사상은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계시)을 세계존재를 해명하는 열쇠로 삼은 것이 그 특색이다. 모세가 전했다고 하는 '나는 존재한다(Ego sum qui sum)'라고 하는 신의 자기시현(自己示現)의 말은, 원리인 신의 존재와 피조물(被造物)인 세계존재의 관계를 푸는 열쇠로 일찍부터 주목되어 여기에 독특한 존재의 사색이 전개되었다. '존재론적 증명'으로서 안셀무스 내부에 결정(結晶)된 존재의 사변(思辨)은 이 독자적인 존재론이 낳은 훌륭한 성과의 하나이다.
이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슬람교권(敎圈)으로부터도 신학적 사변(神學的思辨)의 전통을 흡수하여 이 존재사변(存在思辨)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에 접합시켰다. 신은 '존재 그 자체(esse ipsum)' 즉 존재의 작용 그 자체가 그 존재본질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계의 존재는 각 존재에 따라 서로 다른 존재본질을 지닌다. 그러나 그 존재본질은 존재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므로 신인 존재 그 자체에 원인지어져서 존재한다. 이리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존재론적으로 해석되었다.
근세철학의 인식론적·관념론적 경향은 존재문제를 철학의 주제로부터 멀리하였다. 이 경향은 20세기 전반기 이래 실존론적·형이상학적인 철학에 의해서 시정되기 시작하였으나, M.하이데거가 이 편향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존재문제를 철학의 주요문제로 회복시켰다.
인식론 [epistemology]
(epistemology는 '지식', '참된 앎'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epistēmē에서 유래)
인간의 인식의 기원·본질·한계 등을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
"인간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슨 권리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탐구대상이 인간이라면 인식론은 그 탐구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앎이란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바깥 세계를 알고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의 문명과 과학의 발달은 바로 인간의 세계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눈부신 과학의 성취로 때로 인간은 세계에 관한 진리를 손에 쥔 것 같은 느낌을 갖기도 하지만, 인간은 또한 언제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이는 과학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 자신의 인식 능력을 탐구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된다. 곧 인식론은 지식에 관한 지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식론이란 앞에분도 대답하셧듯이 지식의 한계를 알고 자 하는 이론입니다.
인식론적 문제들은 유동적인 문제들이며, 또 지속적으로 변증법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식론이란 철학의 중심적 논쟁이며 지속적인 논쟁이었습니다.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간의 논쟁에 있어서도 인간의 지식을 인간경험의 변증법적
특색에 기초지우면서 그것의 객관성 더 나아가 절대적인 가치를 옹호함으로써,
하나의 "소크라테스적 실재론"으로 불릴 수도 있을 한 철학을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논쟁들간의 접근은 광범위한 인식론적 전통과의 결과적 만남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인식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사람이 데카르트라고 저는 보는데요.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한 지식의 끝을 찾으려고 즉 절대적으로 회의할수 없는 지식의 끝을 찾으려고 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입니다.
데카르트가 철학적진리를 의심하고, 과학적 진리, 타자의 존재(꿈의 회의), 수학적 진리등을 의심한 끝에 발견한 진리가 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의 반대되는 사람으로 소피스트들 절대적 회의자들도 볼 수 있겠구요,
인식론에서 중요하게 결정되는 것이 관념과 실재의 차이도 있구요.,
하지만 저희 교수님께서 인식론은 이것이다. 하고 이야기하신 것은
실존적 진리였습니다.
질문과 연관이 있는 대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식론이란 우리들이 끊임없이
일상생활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 그러한 질문들 .. 또 지식에 한계에 도달하는
방법이라든지 그 끝이라든지에 대해 말그대로 인식하는 이론입니다.
인식론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다 아시는 분들이죠?)
등과 같은 사람들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현재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거론하고 생각하고 의심하고 있는 논쟁, 주제 이기도 한 것입니다.
존재론이나 인식론같은것은 중세암흑기에서 벗어나 인간이 주체가 돼면서 생겨난것입니다.
원래 인간의 존재는 신에게서 받은것이었고, 그로인해 신안에서만 인식이 가능했습니다.
신이란 '절대진리'로부터 모든 답이 나온것이었죠..
그렇지만 계속해서 모순들이 발전하면서 신은 실제한다는 '실제론'에 대항하는 '유명론자'들이
나오면서 '보편논쟁'이라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결과 유명론자들은 거의 모두가
도망다녀야하는 신세가 돼었죠..
그렇지만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어쩔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인해 '근대철학의 사조'인 데카르트가 나왔던 것입니다.
그는 신에 속한 인간... 즉 진리였던 신에게서 모든것을 받았던 인간이란 존재를
신에게서 떼어냅니다.. 바로 주체가 인간이 된것이죠....
그렇지만 이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도 약하고.. '절대진리'였던 신에게서 독립을
했기때문에... 인간의 존재여부마저도 증명할수가 없었죠..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이
또 다른 변치않는 진리인 '과학'으로서 철학을 증명하려했던 것이죠..
각설하고.. 그리하여 신에게서 독립하여.. 드디어 주체가 된 인간이 과연 어떠한 존재인지
새로이 대답해야했죠.. 이것이 존재론입니다.
그리고 신에의해 보증돼었던 주체와 객체의 일치가, 신으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불확실하게
돼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주체가 진리를 인식할수 있는지대답할수 있어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식론인것입니다.
동양에선 이러한 논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그것은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은 그 성격을
달리하기때문인듯 합니다. 서양철학은 사회와함께 발전해와서 그런지 사회적인 성격이 매우 강한데요..
동양은 그런것과는 무관하게 커다란 어떠한 법칙같은것을 논하면서 그것으로 논쟁을 했던 것이죠..
'이기일원론', '이기이원론'따위가 바로 그런것들이죠
가치론 [ axiology]출처
axiology
('가치있는'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axios와 '학문'이라는 뜻의 logos에서 나온 말)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선'(善) 또는 '가치'에 관한 철학적 연구를 뜻하는 용어.
가치론은 첫째, 가치라는 용어의 뜻을 크게 넓혔으며 둘째, 경제·도덕·미학, 심지어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서로 관계없는 것으로 보였던 다양한 문제들을 통일적으로 연구할 기틀을 마련해준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가치'라는 용어는 본래 어떤 것의 값을 뜻했으며, 18세기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주로 교환가치라는 경제학적 의미로 쓰였다. 가치의 의미가 확대되어 더 넓은 철학적 관심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19세기의 다양한 사상가와 학파의 영향 때문이었는데 루돌프 헤르만 로체와 알브레히트 리칠 등 신칸트주의자, 모든 가치의 전도(顚倒) 이론을 주장한 프리드리히 니체, 알렉시우스 마이농과 크리스티안 폰 에렌펠스, 〈가치론 개요 Grundriss der Axiologie〉(1909)에서 이 용어를 처음 책이름에 쓴 무의식의 철학자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 등이 대표적이다. 가치론의 동향을 미국에 소개한 사람은 응용심리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후고 뮌스터베르크와 가치론에 관한 최초의 영어논문 〈가치평가, 그 본성과 법칙 Valuation, Its Nature and Laws〉(1909)을 쓴 윌버 마셜 어번이다. 랠프 바턴 페리의 〈일반가치론 General Theory of Value〉(1926)은 새로운 접근법을 사용한 걸작으로 꼽힌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가치란 '어떤 관심의 대상'이다. 나중에 그는 도덕·종교·예술·과학·경제학·정치학·법·관습 등 8가지 가치 '영역'을 탐구했다.
보통 가치는 도구적 가치와 본질적 가치, 즉 수단으로 좋은 것과 목적으로 좋은 것으로 구분된다. 존 듀이는 〈인간본성과 행위 Human Nature and Conduct〉(1922) 및 〈가치평가론 Theory of Valuation〉(1939)에서 실용주의적 해석을 제안하고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는 태도를 넘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건강·지식·덕처럼 인간생활에 실제로 있는 많은 것들이 수단과 목적이라는 2가지 의미에서 모두 좋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C. I. 루이스, G. H. 폰 라이트, W. K. 프랑케나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것을 더 세분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 좋은 도구적 가치와 어떤 일을 하는 데 좋은 기술적 가치 또는 전체의 부분으로서 좋은 기여적 가치와 전체로서 좋은 궁극적 가치를 구분하기도 했다.
'무엇이 본질적으로 좋은가?'라는 질문에는 다양한 대답이 있다. 쾌락주의자는 '쾌락'이라고 대답하며, 실용주의자는 '만족, 성장 또는 적합', 칸트주의자는 '선의지'(善意志), 인문주의자는 '조화로운 자기실현', 그리스도교인은 '신(神)의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G. E. 무어, W. D. 로스, 막스 셸러, 랠프 바턴 페리 등 다원론자는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분석철학의 창시자 무어는 유기적 전체론을 전개하여, 사물들의 집합체가 갖는 가치는 그것들이 결합하는 방식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은 객관성을 상징하고 '가치'는 주관성을 시사하기 때문에 가치와 사실의 관계는 가치와 가치판단의 객관성에 관한 이론을 세우는 데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사회학·심리학·인류학·비교종교학 등 기술과학(記述科學)은 모두 실제로 가치평가된 것을 사실적으로 기술하거나 그 가치평가들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반면 그 가치평가의 객관적 타당성을 묻는 것은 여전히 철학자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철학자는 이렇게 묻는다. 페리 등 주관주의자의 주장처럼 사람들이 어떤 것을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치를 갖는가, 아니면 무어, 니콜라이 하르트만 등 객관주의자의 주장처럼 어떤 것이 가치를 갖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욕구하는가? 이 2가지 접근법은 가치판단이 인식적(cognitive) 지위를 갖는다고 가정하지만, 가치가 인간의 관심이나 욕망에 의존하지 않는 어떤 것의 객관적 속성으로 존재한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반면에 비인식주의자들은 가치판단의 인식적 지위를 부정하고 실증주의자 A. J. 에어처럼 가치판단이 주로 정의적(情意的)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하거나 분석철학자 R.M. 헤어처럼 규정적 기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장 폴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자도 자유, 결단, 각자의 가치 선택을 강조하면서, 가치와 사실 사이의 논리적 또는 존재론적 연관을 모두 거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관념론
흔히 실제의 일을 고려하지 않고 머리 속에서만 생각하며 여러 가지로 주장하는 것을 관념론이라고 하는데, 물론 철학에서 말하는 관념론(觀念論)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철학에는 세계관과 인식론이라는 두 연구 분야가 있으나 이러한 분야에서 마음·정신 또는 의식과 자연·물질과의 관계가 논의되고 있다. 이 경우 마음·정신·의식 쪽에 중점을 두고서 철학설을 주장하는 것이 관념론이다. 그래서 세계관으로는 마치 종교에서 신이 세계를 만들어냈다고 하듯이 정신에 의해 세계가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인식론에서 세계에 관한 인간의 지식은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것으로, 의식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사물(事物)의 세계에 관한 지식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관념론은 마음·정신이 세계를 형성하는 기초라 하여 유심론(唯心論)이라든가 비물질론(非物質論)이라고도 한다. 또한 사물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세계는 의식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환영설(幻影說)이라고도 한다.
사변철학(思辨哲學)
오감(五感)에서 획득되는 경험상의 사실에서 출발하여 철학의 학설을 수립할 때 경험론의 철학이라 하나, 이에 반하여 인간의 머리로 궁리하고, 즉 이성의 활동으로 사변(思辨)하여 철학의 학설을 세울 때 사변철학이라 한다. 이는 이성이 생각하는 능력(사변을 한다는 것)으로서, 세계 전체에 관해서나 인간 지식의 형성에 관해서도 진실을 밝혀낸다고 보는 견해이다.
아이디얼리즘(Idealism)
이데알리스무스(독일어: Idealismus)혹은 이데알리슴(프랑스어: Idéalisme)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관념론 및 이상주의라고 번역된다. 이 하나의 말에 두 뜻이 있기 때문에 관념론과 이상주의가 혼동, 혼용되어 자주 올바른 이해를 그르치기도 한다.
주관적 관념론(主觀的觀念論)
관념론의 일종으로서 객관·대상,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주관(인간의 의식)의 관념에 불과하며, 주관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세계를 시인하지 않는 견해이다. '내재철학(內在哲學)'이라 불리는 것도 이것의 하나이다.
객관적 관념론(客觀的觀念論)
관념론의 일종으로 절대적 관념론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관념론은 정신을 세계의 기초에 두는 견해를 취하는 철학이나 이 정신을 인간 의식, 즉 주관으로서의 정신을 초월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신이라든가 절대정신)이라 하여, 이에 바탕을 두고 세계관을 수립하는 철학이다. 또한 개인적인 주관(의식)이 아니라 인간 일반(一般)의 의식을 생각하여 이것이 세계를 만든다는 생각도 객관적 관념론이라 하는 수도 있으나 이러한 입장은 오히려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유물론 [ materialism]
정신적인 것(영혼·정신·마음·사고·의식 등)보다는 물질적인 것(자연, 물질, 신체, 물질적 활동, 존재 등)이 근원적이며 제1차적이라고 하는 철학적 입장 또는 그러한 사상적 경향이나 생활태도.
개요
정신적인 것을 근원적이며 제1차적이라고 하는 관념론이나 유심론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유물론 중에도 물질적인 것을 어떠한 것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입장이나 경향, 태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역사
유물론이 특정한 내용을 갖는 용어로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 영국의 화학자 R. 보일(1627~91)의 저서 〈역학적 철학의 장점과 기초〉(1974)에서부터라고 한다. 철학자 G. 라이프니츠(1646~1716)가 사용했고, 그의 제자 C. 볼프(1679~1754)가 이 용어를 보급시켰다. 더욱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은 18세기말 프랑스 유물론을 거쳐 19세기 전반에 L. 포이어바흐(1804~72), K. 마르크스(1818~83), F. 엥겔스(1820~95) 등이 유물론의 입장을 강조하고부터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물질적인 것이 먼저 존재해 있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표상하고 사고한다는 태도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러한 태도를 자각하고 철학적인 입장으로서 처음 제기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이다. 탈레스(BC 624경~548/545)에서 데모크리토스(BC 470경/460경~370경)에 이르는 초기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자연적인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원리를 자연적인 사물 자체 속에서 찾아 그것을 '물'(탈레스)·'공기'(아낙시메네스[BC 546경])·'불'(헤라클레이토스[BC 540경~480경])과 같은 물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거기에는 아직 신화적인 요소가 남아 있으나 유물론적 입장이 제시되어 있었다. 다만 이 경우 아직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지 않다. 이 구별을 의식하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BC 470경~399)와 플라톤(BC 428/427~348/347)에 의해 철학적 관념론이 형성되고부터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근원적 원리로 삼은 물질은 물질 스스로 운동하고 분열하며 변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질 자체가 생명이 있다고 보는 물활관(物活觀)과 결부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은 운동의 원인이 물질 밖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며, 물질 자체가 스스로 운동하며 분열한다는 점에서 근대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물질관과 관련되는 면을 지니고 있다. 데모크리토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자(原子論者)는 실재하는 것은 무수한 불가분의 '원자'와 그 운동의 장으로서의 '공허'라고 하고, 원자의 활상운동(滑狀運動)에서 시작되는 필연적인 운동이나 충돌에 의해 모든 현상이 생긴다고 말했다. BC 4세기 그리스의 도시국가 붕괴 후, 이 원자론적 유물론을 계승한 사람은 에피쿠로스(BC 341~270)이며, 그의 철학을 고대 로마 세계에서 주장한 사람은 루크레티우스(BC 94경~55경)이다.
중세유럽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이었던 중세 유럽에서는 유물론적인 사상은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가 근대의 자연과학과 기술 발달에 따라 다시 그 모습을 나타냈다. 다만 중세의 스콜라 철학 속에 생긴 실재론과 유명론(唯名論)의 대립은 근대의 관념론과 유물론과의 대립을 잉태하고 있었다. 실재론이 비(非)물질적·보편적인 것, 이데아(형상)를 실재라고 인정하는 데 반해, 유명론은 그와 같은 것은 단순히 이름에 불과하다고 보고,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개체만이 실재라고 한 것이다(→ 실재론).
근대유럽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즘과 자연연구를 배경으로 하여 17세기 프랑스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P. 가생디(1592~1655)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되살렸다. 그는 자연의 기본원리로서 원자와 공허한 공간을 들어, 원자의 필연적이며 기계적(역학적)인 운동으로서 세계의 모든 과정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는 운동의 궁극 원인과 원자의 창조자로서 신을 제시하여 원자론적 자연해석과 스콜라 철학과의 조화를 지향했다. 같은 시대의 영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인 T. 홉스(1588~1679)는 F. 베이컨의 경험론적 입장을 계승함과 동시에 유럽 대륙의 기계론적 자연관의 영향도 받아 유물론의 입장에 선 독특한 체계를 만들었다. 홉스에 의하면, 이 세계에 실재하는 것은 물체뿐이며, 모든 사상(事象)은 바로 물체의 필연적이며 기계적인 운동이다. 철학이 하는 일은 이 물체의 운동에 대해 고찰하고, 그결과로부터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하여 비물체를 대상으로 하는 신학으로부터 철학을 분명하게 분리했다. 그리고 '감각'이란 외적 물체로부터 보내어지는 운동에 의해 감관이 받아들이는 상이 생리적으로 뇌에 전달되는 것이라고 했다.
경험론의 입장에 선 J. 로크(1632~1704)는 지식의 기원을 감각적 경험에서 찾았는데, 확실하게 유물론의 입장을 취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로크의 철학이 프랑스에 도입되자 그 감각론은 철저하게 유물론이 되어 많은 유물론자가 나타났다. 프랑스 계몽사상의 중핵이 된 〈백과전서〉 편집의 중심인물인 D. 디드로(1713~84), 감각론적 윤리설을 주장한 C. 엘비시우스(1715~71), 유명한 〈인간기계론〉(1747)을 쓴 J. 라 메트리(1709~51), 유물론의 성서라고 불리는 〈자연의 체계〉(1770)를 쓴 P. 올바크(1723~89) 등이 각각 유물론의 입장에 서서 활약했다. 라 메트리는 정신현상도 물체의 상태에 의존한다는 것을 논증하려 했고, 인간을 동물보다 많은 톱니바퀴를 사용한 기계에 비유했다. 또 올바크는 물질과 물질의 운동 외에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 운동은 기계적 법칙에 지배되고 있으며, 목적과 같은 것은 우리가 자연 속에 써넣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무신론의 기초를 닦고 종교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그들의 유물론은 후에 '기계적 유물론'이라고 불렸다.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인 G. 헤겔(1770~1813)의 사후,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청년 헤겔파'가 나타났는데, 그중에서는 헤겔 철학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유물론의 입장을 구축한 포이어바흐가 있다. 그는 인간이 육체와 감각을 지진 자연물이라는 입장을 기초로 헤겔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 현실적인 인간의 자기소외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포이어바흐의 경우도 프랑스의 유물론들과 마찬가지로 대상으로서의 현실과 그것을 감수하는 감성이 단지 객체로서 관찰되는 데 그치고, 감성적 자연물로서 인간이나 현실이 주체적으로 활동하고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지 못했다.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계승하면서 그 결함을 극복하고 감성적인 인간의 활동인 실천에 기초를 두는 유물론을 구축했다. 그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독일 이데올로기〉(1845~46)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가 인간을 추상적·일반적으로밖에 포착하지 않은 점, 또 대상으로서의 현실적인 존재를 인간들의 역사적 활동의 성과로서 파악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개인의 활동과 그 기초가 되는 물질적 생활의 여러 조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역사의 기초는 물질적 생활의 여러 수단을 생산하는 데 있으며, 이 생산에서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욕구가 생긴다. 이와 같은 물질적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이 여러 가지 관념 및 표상,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의식의 산출은 최초에는 직접 인간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통이라고 하는 현실생활의 언어 속에 짜넣어졌으며, 따라서 인간의 표상작용과 사고와 정신적 교통은 그들의 물질적 활동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곧 정신적 활동과 육체적 활동이 다른 인간에 의해 분담되면 물질적 활동에서 떠난 사고를 행하게 되어 정신적 생산물인 정치·법·도덕·종교·형이상학 등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표상과 관념을 만들어낸 것도 현실적으로 물질적 생활을 하고 있는 인간이다. 따라서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적 역사관(사적 유물론)을 구축하고 그것을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적인 입장을 세운 것이다. 근대 철학에서 변증법을 크게 발전시킨 인물은 헤겔이다. 그의 경우 모순과 대립을 통해 보다 높은 종합으로 전개해가는 주체는 정신 또는 개념이라고 하는 관념적인 것이었다. 포이어바흐의 헤겔 비판을 실마리로 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의 관념론 입장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변증법을 계승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생성과 소멸의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포착된다. 즉 운동하고 변화해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계기를 내포하며 모순과 대립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보아온 것처럼 기계적 유물론은 물질의 양상이나 운동을 기계에 비교하여 이것을 역학적으로 설명하려 했기 때문에, 그 물질의 운동이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이에 비해 변증법적 유물론은 물질의 운동과 변화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 하여 거기서 모순과 대립의 계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또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상을 서로 관련지어 구조를 이루어 통일체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파악한다. 기계적 유물론을 포함하여 비변증법적인 사고법에서는 대상으로서의 사상을 그것만 고립시켜서 파악하려고 하여 다른 여러 사상과의 연관을 파악할 수 없었다. 사상을 전체적인 상호관련 속에서 파악할 때 부분과 부분 사이에도, 전체와 부분 사이에도 의존관계나 대립관계(모순)를 찾을 수 있어 운동이나 변화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모든 사상을 운동하고 변화해나가는 것으로 보지만, 그 발전방법은 한결같이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급격한 비약을 내포한 것이라고 본다. 사상이 같은 성질을 유지하면서 발전하여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질적인 전화를 가져오는 급격한 발전이 생긴다. 이러한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에로의 전화를 내포하는 발전이 역사 속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증법적 유물론은 모든 사상을 변화와 상호관련된 제 과정을 파악하여 세계에 대한 일반적이며, 통일적인 파악법(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엥겔스는 역사적 사상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사상 또한 변증법적인 양상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자연변증법을 설명했다. 자연(물질)의 성질이나 구조에 대한 과학의 연구성과를 검토하면 거기에 변증법적인 대립관계와 운동과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레닌은 과학의 발전에 의해 물질개념이 애매해지는 것에 반대하여 물질개념은 인간에게 그 감각에 주어지고 있는 객관적인 실재, 우리의 감각에서 독립하여 존재하고 우리의 감각에 의해 모사(模寫)되고 반영된 객관적 실재를 제시하는 철학적 범주라고 말했다. 이런 경우 감각은 인간의 실천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으며, 우리의 인식은 이 객관적 실재에 한없이 접근해가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레닌은 구체적 사항의 구체적 분석을 강조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제 과정 속에 있는 모순적 대립관계를 해명하고 구체적 인식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 레닌은 인식과정의 변증법을 설명하고 우리의 부분적이며 부정확한 지식이 어떻게 해서 전체적이며 정확한 지식으로 발전하는가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현대 유물론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걸쳐, 물리학의 급속한 발달과 함께 E. 마흐(1838~1916), H. 푸앵카레(1854~1912)를 비롯해 자연과학의 대상은 이론적 개념이라고 하고, 물질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사고가 나타났는데,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러한 사고법을 '물리학적 관념론'이라고 배격했다. 즉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의 발달에 의해 물질의 구조와 성질이 보다 상세하게 밝혀졌는데, 그것은 물질이 인간의 감각이나 사고로부터 독립하여 있는 객관적 실재라는 것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레닌의 주장이 계승된 것이다. 또 '빈 학파'에 의해 전개된 논리실증주의가 존재와 의식이라는 이원론을 경험과 그 표현의 도구로서 기호계(記號系:주로 언어)와의 이원론으로 바꾸어놓은 데 대해서도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것이 존재의 문제를 보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이것은 E. 후설(1859~1938)에서 시작되는 현상학(現象學)이 존재의 문제를 괄호에 넣어 불문에 붙이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변증법적 유물론이 반대한 것과 공통된 점이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유력한 철학이 된 분석철학에서는 예를 들어 "물이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논의는 하지 않으며, 이 명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이러한 뜻이라면 "물은 존재한다"라고 할 수 있고, 또다른 뜻이라면, "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으므로, 문제는 어느 쪽의 표현방법을 택하느냐이며, 어느 쪽을 택하든 자유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분석철학적 입장에 비해 변증법적 유물론은 존재란 실천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며, '존재한다'는 의미는 일정하다고 주장한다. 그 자체가 물질인 인간의 몸 운동(감성적 실천)에 의해 객관적 실존의 존재가 확증되는 것이며, 그것은 표현방법 문제 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실천이 중시되었는데, 독일에서는 그 실천이 어떻게 파악되느냐를 둘러싸고 1964년 이래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형이상학 [ metaphysics]
철학적 기본 가정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철학의 한 분야.
형이상학은 논리학·인식론·미학·윤리학 등 철학의 다른 연구분야와 상호작용한다.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광범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주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언급한 것으로, 정신의 대상이 되는 추상적 실재, 즉 형상의 존재와 성격이다. 고전 그리스 철학자들이 실재 세계의 대상인 감각할 수 있는 사물들과 정신의 대상인 관념들을 구별한 뒤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은 추상과 실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여 둘 다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나머지 하나보다 더 실재적인지를 해명하려 했다. 형이상학자들은 형상과 관념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연세계, 시간과 공간의 의미, 신의 존재와 본성 등을 해석했다.
형이상학적 논증은 대체로 선험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선험적 논증은 서로 정합적인 기본 가정들에서 출발하여 일련의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이러한 연역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불합리한 점이 나타나면 최초의 원리는 거부되거나 재평가되어야만 한다. 형이상학의 결론은 지극히 보편적인 성격을 띠며, 경험에서 나온 사실의 진술이라기보다는 사고의 전형이 되는 포괄적 주장이다. 따라서 몇 가지 반대 사례를 들어 형이상학의 결론을 비판하는 것은 효과적인 비판이 아니다. 더욱이 새롭게 발견된 지식이 기존의 낡은 지식을 대체하고 극복하는 경험과학과는 달리 서로 대립하는 많은 형이상학 이론들은 모두 시간의 검증을 통과함으로써 단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최초의 형이상학자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은 현상과 실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식했다. 플라톤은 감각세계의 가변적이고 기만적인 실재를 거부하고 불변라는 참된 이데아의 세계를 선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에 대한 플라톤의 구별에서 출발하고 생물학적 모델을 사용해 그 2가지를 통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가 자신 속에 잠재된 이상적 형상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가정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물질세계는 유기적 변화의 연속체로 인식된다.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더불어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 선천적으로 증명·개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에 기반을 둔 토마스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을 결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일상사에 대한 명상(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와 형상의 관계를 고찰한 방법임)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신이야말로 물질세계의 최고의 지속적 원인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유한하며 항상 변화하는 물질세계를 고찰함으로써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 변화의 원천인 신에게 인도된다.
르네 데카르트는 형이상학 사상에서 또다른 주요한 흐름을 낳았다. 데카르트의 이원론 철학은 물질 영역과 정신 영역을 구분하고 그 둘은 서로 독립적인 영역이라고 규정했다. 데카르트는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이 주장한 신 개념에 반대하여, 물질세계가 최고의 동인(動因)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 이후에는 마치 커다란 기계처럼 신의 영향을 받지 않고 움직였다고 주장했다. 이마누엘 칸트는 이원론을 받아들였지만 데카르트의 설명을 거부하고 지각의 중요성을 입증함으로써 형이상학에 혁명을 일으켰다. 칸트에 따르면, 객관적 실재는 인간정신이 만든 시간과 공간의 구성물을 통해 지각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물리세계에 대한 인간의 견해는 항상 지각 메커니즘의 영향을 받는다. 칸트는 모든 관찰을 관찰 메커니즘에 종속시킴으로써 이전 형이상학자들이 객관적 실재라고 본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유물론과 관념론은 각기 단일한 이론 내에 정신과 물질 개념을 종합하려 했다. 관념론자들이 물질을 정신에 종속시킴으로써 그 2가지 영역을 통합한 반면, 유물론자들은 정신을 물질에 종속시킴으로써 모든 존재가 물질이며 정신은 객관적 상황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여러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의 방법론과 결론의 진리성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데이비드 흄은 모든 지식이 감각을 통해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모든 기본관념들은 감각경험에서 파생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흄은 결론을 내렸다. 20세기 철학학파인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모든 진술의 의미는 어떻게 그것이 검증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의 주장은 검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 경험이란 언어의 영역을 초월한 것이라고 보았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단지 보여질 수만 있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이론화는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론화는 언어가 조명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영역에 대해 말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형이하학 [physical science]
형이하란 형이상에 대응되는 말로, 시간·공간 속에 모양을 갖추고 나타나서 감성적인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영어의 'metaphysical'을 형이상으로, 'physical'을 형이하로 번역하는데, 이 용어는 〈주역 周易〉의 계사전(繫辭傳)에서 취한 것이다. 물리학·동물학·식물학 등이 형이하학에 속한다.→ 물리학, 생물학
변증법
('대화술' 또는 '문답술'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dialektikē technē 에서 유래)
한 가지 사물을 대립된 2가지 규정의 통일로 파악하는 방법.
변증법이라는 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시대나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 의미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재로서는 변증법이란 실재 속에 모순구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보통의 형식논리학에서 모순율은 절대적인 근본원리이므로 이 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A는 B이다"이면서 동시에 "A는 B가 아니다"가 되므로 두 주장이 모두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변증법은 이 모순율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논리학과 대립하는 논리로 이해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에서 변증법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헤겔 이후이며, 그 이전에는 전혀 그러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 원래 변증법이 대화술이라는 의미였으므로 이는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사상이 다른 사람을 상대로 대화나 토론을 할 때 우리는 상대의 입장이 어떤 점에서 틀렸는가를 논증해야 한다. 즉 상대의 입장에 어떠한 모순이 포함되어 있는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 입장의 모순을 밝혀낼 수 있다면 상대도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인정하고 우리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사상적인 대화란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모순율이라는 원리가 처음부터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입장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받아도 결코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상대로는 토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모순율의 인정은 대화를 성립시키는 전제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대화술로서의 변증법은 본래 형식논리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논리라고는 할 수 없고, 형식논리학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성립한다. 이렇듯 변증법이라는 개념은 헤겔 이전과 이후에 전혀 그 의미가 달리 쓰이고 있는데, 여기서는 역사적 흐름을 따라 그 의미의 변천을 더듬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논을 변증법의 창시자로 불렀는데, 제논의 변증법이란 바로 토론이나 변론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유일부동이며 불생불멸이라는 자신의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계승해, 이 입장에서 '운동'이나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얼마나 자기 모순을 안고 있는가를 논증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논의 변증법은 소피스트들에게 와서는 논의를 위한 논의, 반론을 위한 반론이 되고 말았다.
완전히 논쟁술로 전락해버림으로써 그 적극적 의의를 잃어버린 변증법에 철학의 방법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변증법을 대화술, 문답법으로 훌륭하게 구사한 철학자였다. 그는 아테네 시가에 나가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철학적인 문답을 나누었는데, 그것은 어떤 질문을 하여 상대방이 대답하면 그 대답을 찬찬히 짚어보면서 상대에게 모순이 있음을 자각시킴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의욕이 생기게 하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계승한 플라톤은 변증법을 학문의 최고의 방법으로 중요시했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경우 변증법이 실제로 타인과 주고받는 문답술이었던 데 비해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사유방법으로 생각했다. 원래 사상적인 대화는 반드시 실제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찾아 사색할 때는 언제나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면서 자기 자신을 상대로 대화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의 발전은 이처럼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플라톤과 달리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법을 학문의 방법으로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변증법은 통설이나 추측으로부터 출발하여 추론하는 논의로서, 개연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참된 학문적 의의는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사유의 훈련으로서, 참된 인식을 하기 위한 준비의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와 중세를 통해 변증법이라는 말은 단순히 논리학의 일부인 변론술 또는 논리학 자체를 의미했지만, 근세에 이르자 칸트는 이 말에 다시금 중요한 의의를 부여했다. 칸트에 의하면 변증법이란 가상(假象)의 논리학, 즉 참인 듯이 보이는 오류를 비판하는 논리학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단지 경험적 세계 즉 현상계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며 초경험적인 것, 예컨대 신이나 영혼 등에 대해서는 인식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이성은 본래 개개의 판단을 종합, 통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떡해서든 경험을 초월한 무제약적인 것을 찾으려고 하며 여기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칸트는 이 오류를 선험적 가상이라 불렀는데, 이를 밝히고 비판하는 것이 선험적 변증법의 임무이다. 즉 칸트에게서 변증법이란 플라톤과 같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적극적인 철학의 방법이 아니라 단지 참인 듯한 오류를 비판하는 소극적인 역할로 규정되어 있었다.
변증법에 가장 적극적인 의의를 인정한 것은 헤겔이다. 헤겔은 변증법이 인식의 발전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발전 논리라고 생각했다. 즉 모든 사물은 결국 정·반·합의 3단계로 발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존재 자체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면, 존재는 적어도 발전의 제2단계에서는 모순적 구조를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변증법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즉 변증법은 모순의 실재를 인정하는 모순논리로서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수한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헤겔에 이르러 변증법의 의미가 달라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변증법이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지면 존재 속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상은 변증법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헤겔은 "만물은 태어나서 유전하며, 만물을 생성하는 것은 사물의 대립"이라고 생각했던 헤라클레이토스를 변증법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를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할 때, 이는 제논을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할 때의 변증법과는 전혀 다른 뜻이 된다.
헤겔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러 유물론과 결합되어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계승되는데,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모든 존재, 즉 자연이나 사회도 변증법적 구조를 갖고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해간다. 자연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은 자연변증법이며, 사회나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유물사관이다.
변증법적 유물론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상에서 나온 실재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법(→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유물론은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물질 세계가 마음이나 정신과 독립하여 객관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는 이론이다. 그들은 심적·정신적 과정의 실재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관념은 물질적 조건의 산물 또는 반영으로서만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을 관념론에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했는데, 그들에 따르면 물질을 마음이나 정신에 의존하는 것으로 다루거나 정신이나 마음이 물질에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다루는 이론은 모두 관념론이다. 그들은 유물론적 견해와 관념론적 견해가 철학의 발달사를 통해 화해할 수 없이 대립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철저한 유물론적 접근법을 채택하여 유물론과 관념론을 결합하거나 융합하려는 모든 노력은 혼란에 빠지고 정합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 개념은 헤겔에게 많이 의존했다. 사물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개별 사물을 따로 떼어서 마치 고정된 속성을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처럼 다루는 '형이상학적' 사유 양식과는 반대로, 헤겔의 변증법은 사물을 운동과 변화, 상호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고찰한다.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생성·소멸하는 과정 속에 있고 이 과정에서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며, 모든 사물은 변하고 결국 지양된다. 모든 사물은 자기 안에 서로 모순되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측면들 사이의 긴장이나 갈등이 변화의 추진력이고 결국 그 사물을 변형하거나 해체한다. 그러나 헤겔이 변화와 발전을 자연과 인간 사회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세계정신 또는 이념의 표현으로 생각한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화와 발전을 물질세계의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헤겔처럼 어떤 '변증법 원리'에서 사건의 실제 경로를 연역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이 원리를 사건에서 추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인식론은 모든 인식이 감각에서 나온다는 유물론적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주어진 감각 인상만을 인식의 근거로 삼는 기계론적 견해와는 달리, 그들은 실천 활동을 하는 가운데 사회적으로 얻는 인식의 변증법적 발전을 강조했다. 사람은 사물과 실천적으로 상호작용하고 관념을 실천에 알맞게 형성함으로써만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관념과 실재의 일치 즉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은 사회적 실천뿐이다. 이러한 인식론은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모습만 인식할 수 있을 뿐 물자체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 있다는 주관적 관념론에 반대하고 우리가 초감각적 실재를 감각과 독립된 순수 직관 또는 사유로 인식할 수 있다는 객관적 관념론에도 반대한다.
추론방법의 이론적 기초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개념을 '역사적 유물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유물론은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본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고 주로 논쟁과정에서 그들의 철학적 견해를 밝혔다.→ 유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