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후 100여년 만에 나타난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학자이며 사회지도자였다.
그는 교학의 깊은 연구와 정리로써 불교계와 학계에 새 기운을 조성하였다. 그의 경론에 관한 연구는 불교학의 모든 분야에 미쳤고 많은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총 100여 부 24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종단이나 학파에 구애됨이 없이 "만법(萬法)이 일불승(一佛乘)에 총섭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대해(大海) 중에 일체 중류(衆流)가 들어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여 大乘․小乘, 性․相, 頓․漸의 상호 대립적인 교의를 다 융회하여 一佛乘에로 귀결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히 공변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쟁론들을 화합시킨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화쟁(和諍)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불교가 일경일론(一經一論)만을 주로 하여 기타의 경론을 모두 그 일경일론의 사상을 천명, 수립하는 보조적 자료로만 채용하는 연구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원효의 화쟁사상이야말로 저러한 종파의식을 떠난 관용적이고 포괄적이며 공평무사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원효의 불교 이론면에서의 화쟁사상은 실생활면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하면서 불교를 생활화하는 불교대중화운동으로 전개된다.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과 자장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불교 수용면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층과 일반 서민층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에 혜공․혜숙․대안 등이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대중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 생활화시킴으로써 유익한 의지처가 되게 하였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지방의 촌락, 거리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박을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 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참된 것과 속된 것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참된 것 가운데 속된 것이 있으며 속된 것 가운데 참된 것이 구현되는 불교의 진수를 몸소 실천한 위대한 실천행동가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그는 당시 신라사회에서 위로는 귀족층으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층의 노비에 이르기까지 널리 성행된 미타정토(彌陀淨土)신앙에 대하여 미타정토인 극락에의 왕생이 미륵정토인 도솔천에의 왕생보다 훨씬 수월하다고 함으로써 미타신앙을 권장하고 일반 서민들도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여기서 민중들을 불법의 길로 이끌어 보려는 그의 배려를 엿볼 수 있다.
또 그가 <<십념론(十念論)>>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착한 행실이 극락왕생을 위하여 닦아야 할 행이 되는 것이라고 한 데서도 그의 불교생활화운동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생애
원효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에 현재 경북 경산군 자인면, 당시 압양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의 밤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며, 그를 낳을 때에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의 아명은 서당(誓幢)인데 당(幢)은 속어로 ‘털’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서당은 ‘새털’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하고 달이 찼을 때 집 근처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급한 김에 남편의 털옷을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아기를 낳은 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는 그의 나이 10여 세에 벌써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남달리 영리하여 나중에 불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학문 범위는 불교학 전반에 걸쳐서 뿐만 아니라 <<논어>>나 <<노자>>, <<장자>> 등 유가․도가에도 상당히 밝았음이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인용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고려 대각국사가 남긴 시에 의하면 원효는 의상과 함께,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인 전주 고대산으로 옮겨 간 보덕화상(普德和尙)에게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등을 배웠다고 하며,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반고사(磻古寺)라는 절에 있을 때 영취산의 낭지(浪智)가 그로 하여금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쓰게 하였다.
원효는 그 글을 지어 낭지에게 전달하면서 그 글 끝에 "西谷沙彌稽首禮 東岳上德高岩前" 이라 하여 자신을 사미라 낮추고 상대방인 낭지를 상덕으로 높이고 있다. 이로 보아 원효가 낭지에게 사사하였거나 단순히 학덕 높은 노화상으로 존경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삼국유사>>의 석혜공전(釋惠空傳)에는 원효가 혜공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실이 보이고 있다. 즉, 당대의 튀어난 스님이었던 혜공에게 원효가 찾아가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는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하였다는 것이다.
원효는 34세에 의상과 함께 당의 현장과 규기에서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45세에 두 번째로 역시 의상과 함꼐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입당하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항구로 가는 도중 비오는 밤길인지라 어느 토굴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 토굴 아닌 오래된 무덤임을 알고도 부득이 또 하룻밤을 더 지내다가 불법을 크게 깨치게 되었다.
"즉,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므로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상 혼자 배를 타고 당으로 들어가고, 원효는 당나라행을 포기하고 돌아와 이후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오늘날 여러 문헌에 의하면, 원효의 저서는 대략 100여 종 240여 권으로 알려져 있고 그 연구범위도 소승(小乘)․대승(大乘), 경(經)․율(律)․논(論) 등 거의 모든 부분을 다 망라하고 있어 그야말로 초인간적인 학문 해석과 저술활동이라 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의 석학들마저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존하고 있는 것은 19부 22권 뿐이며 그나마도 충분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원효는 이를 스스로 파계(破戒)라 여겨 승복이 아닌 민간 복장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사용하는 큰 박을 본뜬 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뱅이나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서민대중의 교화에 나선 것은 입당 포기 후 심법을 깨달은 후이며, 요석공주와 세속의 인연을 맺은 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한 것은 승려로서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속죄의 한 방법으로서 였다기 보다는 오히려 대중교화의 방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대중교화의 선구자인 혜공(惠空)이 등에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크게 취해 노래하고 춤을 추었던 일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대중교화의 행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小姓居士)가 아닌 원효로 돌아가 혈사(穴寺)라는 절에서 세수 70세 법랍 60세의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대승기신론을 통해 본 그의 사상
원효의 일생은 화쟁(和諍)의 방법에 의하여 자신의 불교사상을 확립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설법을 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 정신을 구현하는 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대표적인 저술인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를 들 수 있다.
그는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만나자마자 이상의 그의 학문적 목표와 너무나 일치함에 크게 감명을 받아 기신론에 관한 9종의 연구서를 썼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인도에서 그 당시 대립되고 있던 양대 불교사상, 즉 중관파(中觀派)와 유가파(瑜伽派:유식파)의 사상을 지양·화합시켜 진(眞)과 속(俗)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미오한 현실생활(俗) 가운데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수행함에 의하여 완성된 인격(眞)을 이루어 갈 수 있으며, 깨달음의 단계(眞)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俗)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진속일여(眞俗一如)·염정불이(染淨不二)의 사상을 잘 나타낸 논서이다.
원효는 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하여 몇 가지 특징적인 기술을 하고 있다.
첫째, 그는 <대승기신론>의 성격을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의 지양·종합이라고 판석한다.
이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일심(一心)을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2가지로 크게 나눈 후 심진여문에서는 마음의 청정한 면을 묘사하고 심생멸문에서는 마음의 염정연기(染淨緣起), 즉 마음이 물들어가는 현상과 이에서 벗어나 심원으로 가는 단계를 밝히고 있는 데서 매우 타당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원효의 이러한 해석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출현의 시기에 인도 불교사상계에서 중관파와 유가파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던 사실에도 부응한다.
원효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법장은 이 점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하여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이라 판석했다.
원래 여래장사상은 중국 화엄종의 선구인 지론종(地論宗) 남도파(南道派)들에 의해 성하게 연구되어왔던 것으로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은 이 지론종 남도파들의 영향에 의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여래장연기종이라 판정한 것이다.
둘째, 원효는 우리의 미망(迷妄)한 마음, 즉 무명(無明)이 본래의 청정한 마음 즉 진속을 훈습하여 불각심(不覺心)이 처음으로 일어난 무명업상(無明業相), 이 무명업상은 즉 극미(極微)한 동념(動念)에 의해 소연경상(所緣境相)을 볼 수 있게 되는 전상(轉相), 그리고 이 전상에 의해 경계를 나타내는 이상(理想) 등 3가지 미세한 마음 곧 삼세식(三細識)이 아뢰야식(阿賴耶識) 위(位)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이 삼세·아뢰야식설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본문에 직접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법장에 의해 그대로 답습된 원효의 독특한 주장이다.
이처럼 각(覺)과 불각(不覺)의 2가지 뜻을 가진 화합식(和合識)으로서의 아뢰야식에 삼세라는 미세한 마음들을 배대하여 화합식 중의 불각 즉 생멸분(生滅分)인 무명업상·전상·현상을 제멸하면 바로 그 자리가 불생불멸분(不生不滅分), 즉 각의 상태가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유식가에서의 아뢰야식이 막연한 잠재심인 데 비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아뢰야식은 3가지 미세한 마음으로 구체화시킴으로써 환멸(還滅)의 구체적 단계를 제시한 것이며, 따라서 수행면에 있어 더욱 실천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중관파와 유식학파의 양대 주장의 조화라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성격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셋째, 원효는 아뢰야식의 각의(覺義)에 의해 자성청청한 깨달음의 상태로 환멸한 후의 본각의 성격 즉 지정상(智淨相)과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에 대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2가지 면으로 배대시킴으로써 심원에 도달한 각자(覺者)는 깨달은 상태(自利)에 안주하지 말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적극 노력해야 함(利他)을 역설한다.
이는 속에서 진으로 향해가는 길(上求菩提)을 명시했던 앞서의 삼세·아뢰야식설에 비해 이제는 진으로부터 속으로 돌아와 중생과 더불어 삶을 의미하는 것이니 바로 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
그의 이러한 진속불이로부터 나온 자리·이타의 겸수야말로 그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에서 강조한 그의 중심사상인 것이다.
결국 원효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부처의 가르침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진속일여 불주열반(眞俗一如, 不住涅槃)인 것이다.
이는 또한 자기 혼자 불법을 구해 나아가는 것이 불교의 진의가 아니고 일체중생이 다함께 깨달음이 세계를 이룩할 때 불타의 참 정신이 구현되는 것임을 이론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또한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미타사상과 <<십념론(十念論)>> 등을 통하여 일반 대중들이 보다 쉽게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려 하였고, 종국에는 집필의 붓을 꺾고 중생들의 교화를 위한 실천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로써 원효는 그의 생에 있어서 이론면에서나 실천면에서나 부처의 정신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구현한 한국의 위인이라 할 것이다.
한편 원효의 화쟁에 의한 제종문(諸宗門)의 회통사상은 원효 이후 한국불교가 5교9산으로부터 5교양종이 되고 결국에는 선과 교가 합하여 하나로 된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즉, 원효의 진가를 재발견한 고려 의천의 교선일치, 그 뒤를 이어 보조의 선교일화, 유․불(儒․佛)의 일치, 조선조 청허의 유․불․도(儒․佛․道)의 일치 등에서 원효가 이룩한 한국불교의 전통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효의 이 화쟁사상은 근원적으로는 석가 이전 인도의 베다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도철학의 석학 라다크리슈난에 의하면, 인도 원주민을 정복한 아리안의 종교는 처음부터 광범하고 자기 발전적이고 관대하여 성장해 감에 따라 그가 만나는 새로운 힘들은 자기 안으로 융화시키고 보다 낮은 종교를 무시하거나 그 존재를 말살하기 위하여 싸우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것만이 유일하고 참된 종교라는 광신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사유경향이 인도불교에서 화합의 사상을 있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석가는 당시 수많은 사상체계들이 서로 대립충돌을 일으키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논쟁에 끼어든 적이 없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진실한 실천적 인식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하게 살아가는 길과 진실에 대한 실천적 인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했을 뿐 베다의 권위를 배척하고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했다. 거시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장들은 모두가 상대적이고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있어서의 화합의 원리는 이러한 실천원리를 중시하는 석가에서 시작된 셈이고, 이는 대승불교 후기에까지 면면히 지속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신라통일 전후기에 나타난 원효가 화쟁사상의 가치를 높게 든 것은 바로 석가의 화합의 정신의 재현 내지 재창조라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사물을 공평무사한 입장에서 보려는 원효의 화쟁사상이야말로 오늘날 학문상에서나 그 밖의 정치․경제 등 사회문제에서 흑백 양론으로 대립되어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식의 외고집만을 고수함으로써 야기되는 온갖 병폐와 해악의 요소를 일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