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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아카데미

선덕여왕의 비밀코드, 첨성대(북두칠성

작성자유토피아|작성시간18.06.01|조회수529 목록 댓글 0

1300여 년 간 신라의 하늘을 받쳐온 첨성대, 첨성대는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 시대에 만들어졌다. 최초의 여왕과 첨성대, 둘 사이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경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첨성대입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가서 이 건축물을 배경으로 단체 혹은 개인 사진을 찍었던 경험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신혼여행길에 첨성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첨성대는 우리에게 친근한 건축물인데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친근한 만큼 첨성대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요? 첨성대는 건축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천문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고대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이미 사라졌고 지금 남은 것들은 후대에 복원된 것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첨성대는 아주 특별한 건축물입니다. 이것은 외국의 경우와 비교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세계 천문학계는 첨성대를 천문대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첨성대는 1300년간 무너지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특히 흥미로운 것은 경주가 한반도에서 매우 불안정한 지층 지역이라는 겁니다. 이쪽을 보시죠. 경주는 보시는 것처럼 두 지층판이 만나는 곳입니다. 부산 양산 경주 포항 그리고 동해를 지나는 양산단층과 울산과 경주를 잇는 울산단층이 충돌하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지진이 자주 일어났고 지금도 미진이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경주지진 자료 첨성대가 세워진 후인 779년 경주에서는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엄청난 지진이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첨성대는 무사했습니다. 1300년 세월을 견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첨성대,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요?


경주시 인왕동, 반월성과 대릉원 사이 벌판에 첨성대는 우뚝 서 있다. 7세기 중반 신라 선덕여왕 대에 세워진 이후 1300여 년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첨성대, 그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보수나 개축도 없었다. 그래서 첨성대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평가 받고 있다. 그렇다면 삼국 시대의 천문대는 신라 첨성대뿐이었을까? 고구려의 경우, 평양에 첨성대가 있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실물은 간데없고 백제의 경우, 기록이나 유물 그 어느 것도 전하지 않는다.


이용삼 교수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인터뷰) "통일신라 이전에 아빌로리아나 혹은 이집트나 혹은 고대 중국에 많은 천문대들이 신전과 함께 그런데 오늘 날 현존하는 것을 찾아보기란 힘듭니다. 있다하더라도 새롭게 복원을 하고 여러 가지 문헌 통해서 새롭게 축조된 것들이 있죠. 그래서 우리의 첨성대가 신라시대에 1300여 년 전에 축조된 것이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천문대로 우리가 알고 있죠."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 첨성대는 지어질 당시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가? 현재 첨성대는 상단부가 북쪽으로 약 6센티미터 정도 기울어져 있다. 제작진은 첨성대를 정밀 실측하기로 했다. 작업 방식은 3D 스캔방식. 3D 스캔이란 대상물에 레이저를 정밀하게 발사하여 그것의 반사를 통해 데이터를 구하는 최첨단 실측방식이다.


인터뷰) "그런데 이런 작업은 기존의 문화재 실측하는 작업과는 좀 다른데요. 기존의 방법은 줄자로 스캔해서 측정해서 하는 방법인데 그런 부분들은 이런 어떤 자연적인 형태를 갖다가 실측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레이저 그대로 좌표를 읽어내기 때문에 정밀하고 정확한 자료를 얻는데 의미가 있구요."

 


3D 스캔 방식으로 얻은 결과를 토대로 우리는 디지털화 된 첨성대 실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실측결과 첨성대의 몸통 높이는 9.108미터, 맨 아랫단 지름은 4.93미터, 맨 윗단 지름은 2.85미터였다. 모두 381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무게는 무려 264 톤이었다. 이런 구조물이 지금껏 견딘 비결은 무엇일까? 우리는 먼저 첨성대 지하의 지층 구조에 주목했다. 지하투과 레이더 탐사법으로 첨성대 지층구조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당시 손호웅교수 배재대 토목환경공학과

인터뷰) "지금 현재 지표면에서 약 1.2 ~ 1.4m 밑에 흙을 다진 다음에 그 위에 잡석을 약 1m 정도 다지고 그리고 그 위에 기단석, 그 기단석 위에 첨성대가 올라가 있는 그런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조사결과 첨성대 지하와 그 주변은 인공적으로 기반을 다진 것이 확인되었다. 즉 1. 5 미터 이상 땅을 파서 큰 돌을 채웠는데 특히 첨성대 바로 아래에는 더 많은 돌들이 채워져 있었다. 이 기초가 첨성대를 버티게 한 비결의 하나였다. 그리고 첨성대 몸체 안... 놀랍게도 흙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첨성대에 난 창 높이까지 채워진 내부의 흙, 이것이 첨성대를 지탱한 또 다른 비결이었다. 첨성대를 구성하는 돌들은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안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첨성대 안의 흙이 이 돌들을 잡아주고 있는 것이다.


첨성대 내부의 흙은 굵은 자갈과 섞여 있는데 이는 배수를 위한 고려로 보인다. 순수하게 흙으로만 채웠을 경우 빗물에 젖은 흙은 오히려 첨성대 외벽을 밖으로 밀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흙으로 채워진 하단부, 그렇다면 상단부에는 어떤 구조적 비밀이 숨어 있을까? 최초로 촬영한 첨성대 상단 내부, 내부는 비어 있었다.


당시 이상구 국립경주 문화재연구소

인터뷰) "상부구조는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역시 그 형태가 절병통형태이다 보니까 안쪽으로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긴 장대석 두 개를 일반 석축에서 볼 수 있는 돌못 성격을 띤 그런 돌입니다. 그 돌 자체가 전체를 물고 있기 때문에 안쪽으로 붕괴되는 것을 방지해주는 아주 안정된 구조라 생각됩니다."


첨성대 상단 내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장대석, 즉 원통형의 구조를 가로지른 길다란 돌이다. 우물 정자를 이룬 이들 장대석이 둥근 구조를 잡아주어 첨성대에 견고함을 더하고 있다. 첨성대의 몸체를 비집고 나온 돌, 이들은 외부로 돌출된 장대석의 끝부분인 것이다. 튼튼한 기초와 하단부 몸체 안의 흙, 그리고 상단부 정자석과 안정된 곡선, 첨성대는 이 모든 것을 고려한 치밀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다. 1300여 년, 비바람과 지진을 견딘 첨성대의 비결, 그것은 신라 건축 과학의 개가였다.


천문대 네,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어 늘 그러려니 했던 첨성대, 이 첨성대가 제 모습을 지킨데는 신라의 건축 기술이 단단히 한몫 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는 이 첨성대를 천문대로 알아왔습니다. 첨성대, 볼 첨자에 별 성자, 별을 보는 곳...이름도 그대로 천문대입니다. 그런데 저 둥근 돌 건축물이 어떻게 해서 천문대라는 것일까요? 자, 여기를 보시죠. 조선시대의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입니다.


'선덕여왕 때 돌을 다듬어 대를 쌓았는데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그 속이 틔여 있어 사람들이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했다'


자 사람들이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했다? 이것을 보면 첨성대 속으로 사람이 올라 별을

봤다는 이야긴데... 자,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어떻게 이 첨성대로 올라갔을까요?

 


계단이나 손잡이 하나 보이지 않고 미끈한 첨성대, 얼핏 보면 올라갈 방법이 없어 보인다. 신라인들은 이 첨성대를 어떻게 올라갔을까? 우리는 창 아래서 그 비밀을 발견했다. 동그라미) 창 아래에 나 있는 움푹 팬 흔적, 그것은 일부러 돌을 깎아 사다리를 대도록 만든 인공의 흔적이었다. 첨성대 한가운데의 창, 그것은 바로 출입구였던 것이다.


첨성대에 뚫려 있는 유일한 구멍, 그것은 출입구였던 것이군요. 그럼 제가 신라인들이 했던 대로 한번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 첨성대의 창은 13단에서 15단 사이, 한가운데에 뚫려 있습니다. 크기는 가로 세로 약 1미터, 사람이 드나들기에 그리 불편한 크기는 아닌 성 싶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높이에 출입구를 만들었을까요? 아래쪽에 만들었더라면 오르내리기에 좀 더 편리하지 않았을까요?


지상 약 4.5 미터 높이의 출입구, 이것은 구조적 안정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드나들기 편하기 위해 하단부에 출입구를 설치할 경우 전체 하중을 받치는데 어려움이 있으며 또한 하부에 출입구를 내더라도 어차피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적당한 높이에 출입구를 냈을 것이다.


남천우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인터뷰) "결국 9m 올라가는 거니까 안에서 올라가건 밖에서 올라가건 한꺼번에 계속해서 올라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죠. 그러니까 그것을 둘로 나누어서 4.5m를 외부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서 일단 평지에 도달한 다음에 다시 나머지를 올라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새 아파트에 올라가더라도 3m 높이를 올라가는 것도 한번 꺽어서 올라가지 않습니까?"


네, 4.5 미터 높이에 출입구를 낸 까닭이 따로 있었군요. 그럼 안으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역시 중간 바닥까지 흙이 차 있군요. 만약 이 흙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라와서 다시 첨성대 안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첨성대 안의 이 흙은 전체구조를 안정시키고 오르내릴 때의 바닥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 첨성대 안에서 저 밖에는 무엇이 보일까요? 오호, 임금이 있는 반월성이 보이는군요. 그런데 이 창은 정남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약 16도쯤 틀어져 있다고 합니다. 왜 신라인들은 이 방향으로 창을 냈을까요? 혹시 임금을 바라보기 위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신라인들은 이 창을 통해 천문을

살폈을까요? 하늘을 살피기에는 자세가 매우 불편하군요. 그리고 이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은 너무 좁다는 생각입니다. 천체 망원경이 있던 시절이면 그것을 댔던 자리라고 하겠지만 아무래도 이 창문은 하늘을 살피기에는 적당치 않습니다. 얼굴을 내밀면 불편하고 안에서는 시야가 좁고... 조금 더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첨성대 상단 내부, 텅 빈 공간, 어떻게 오를 수 있었을까? 표시) 내부의 길다란 돌에 주목했다. 비밀은 두 개 층의 내부 정자 석에 있었다. 이들이 두 개의 내부 사다리 받침대 구실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첨성대 맨 윗부분에서 천문관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곳에는 특이하게도 넓적한 판석이 절반만 걸쳐져 있었다. 나머지는 빈 곳, 그곳은 출입구였을 것이다. 위에 오르면 이 판석 위에 섰을 것이다. 그런데 판석 반대편 원형 돌에서 심상찮은 흔적을 발견했다. 나무판자를 대기 위해 돌을 깍은 흔적이었다. 신라인들은 판석과 출입구를 막은 나무판자 위에서 천문을 관측했던 것이다.


한 두 세평 정도 되어 보이는데 두세 명이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은 될 것 같군요. 일단 오르긴 올랐습니다만 이 외부 사다리를 대서 창문을 오르고 다시 두 개의 내부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불편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첨성대에 외부 돌계단을 설치했으면 어땠을까요? 모양새가 좀 이상해져 버렸죠? 9미터 높이의 첨성대에 외부 계단을 설치해보니 첨성대 자체보다 그 계단의 크기가 훨씬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첨성대에 외부 계단을 설치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지 않나 합니다.


첨성대의 높이는 3층 건물 남짓합니다. 지상에서 보면 꽤 높습니다만 과연 별을 관측하기에

충분한 높이일까요? 더구나 첨성대는 평지에 서 있습니다. 하늘을 살피는 천문대가 평지에 서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과연 어떨까요?


한국 천문 연구원의 소백산 천문대 - 천문대는 해발 1400여 미터의 소백산 정상 부근에 있다. 오늘날의 천문대가 이처럼 높은 산 위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김승리 박사 한국 천문연구원

인터뷰) "별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별빛을 봐야하는데 도시에서는 도시 불빛 때문에 아무래도 별을 많이 볼 수 없습니다. 산에 올라와야 도시 불빛이 없고 공해도 없기 때문에 훨씬 더 별을 잘 볼 수 있게 됩니다."


공해와 도시의 불빛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지금의 천문대, 그러나 산 위라고 해서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다. 산의 지형적 특성상 자주 끼는 안개와 구름, 이들이 시야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인터뷰) "우리나라 기상 여건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닙니다. 국내에 연구용 망원경이 있는 곳은 두 곳인데요.  소백산하고 보현산인 경우에 일년에 125일 정도가 관측이 가능한 날입니다."


시야 확보가 가장 중요한 천문대, 그것을 위해 지금의 천문대는 어쩔 수 없이 높은 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공해와 전깃불이 없던 당시, 첨성대는 현재의 위치에서도 시야 확보에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남천우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인터뷰) "요새 서울에서 별을 쳐다보세요. 별이 보이나, 별이 보입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오늘날 얘기죠. 신라시대 때 무슨 밤중에 경주가면 얼마나 밝고 무슨 공해가 있어서 산중으로 가겠습니까. 또 옛날의 천문관측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무슨 궤변이 일어나는 것을 관측하는 것이 제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였는데 그것은 무슨 일이 있을 적에 즉시 국왕에게 보고해야 하는 그런 사안입니다. 그런데 산중에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교통수단이 있습니까, 아니면 통신수단이 있습니까."

 


첨성대 높이는 9미터 남짓, 당시로서는 만만치 않은 높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9미터의 높이가 필요했을까? 그것은 시계(視界)를 고려한 높이였다. 9미터 미만의 나무는 바로 곁에 있어도 시야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15미터 정도의 나무는 50미터만 떨어지면 시야가 확보되고, 20미터의 나무라 하더라도 100미터만 떨어지면 별로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렇게 첨성대의 높이는 9미터로 충분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 첨성대의 기능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불편한 구조 때문에 천문대일 수 없으며 왕이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또는 고대의 수학적 상징을 건축물로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첨성대 창문 밑에서 사다리를 댄 흔적을 발견했고 신라인들이 천문을 살폈던 작업장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신라의 천문관측관들은 여기서 저 하늘의 무엇을 어떻게 살폈을까요?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 조위의 시 한수가 전한다.


'막대를 세워 그늘을 재고

해와 달을 관측한다

대 위에 올라가 구름을 보며

별을 가지고 점을 친다'

 


시 한 수만 전할뿐, 첨성대에서 어떻게 천문을 관측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관련 기록을 통해서 첨성대에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첨성대가 세워진 선덕여왕 대를 기준으로 기록을 분석해보면,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 천문기록의 양이 무려 4배나 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등 오행성에 관한 기록이 늘어난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용삼 교수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인터뷰) "이 첨성대가 축조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더 관측이 많은 것으로 보는 것은 중국과 달리 우리가 오행성 운행에 관련된 관측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선호하고 중국의 없는 기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록이 고구려나 백제나 신라에서 700백년 간 각각 5회 정도밖에 기록이 없었었는데 이 3백년 간 21번의 그 관측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아주 체계적으로 그 행성의 운행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낮에 행성을 관측을 했다거나 또 그 행성이 달 뒤에 숨겨졌다거나 행성 간에 서로 근접을 하는 이런 현상들을 봤습니다. 이것은 아주 전문가들이 아니면 관측이 불가능하지 않았겠나 생각합니다."


제작진은 경주에서 첨성대와 직접 관련이 있는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첨성대 부근의 거리 이름, 비두 - 첨성대 주변 곳곳에 비두라는 지명이 보였고 이는 첨성이란 지명과 함께 쓰이고 있었다. 비두와 첨성,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석우일 역사과학관 관장

인터뷰) "지금부터 50년 전에 제가 이 첨성대가 현재 부근에 살았거든요. 초등학교 일이학년에 기억합니다. 이 옆에 학교를 다니면서 저 뿐만이 아니라 제 친구들, 아버지, 할아버지까지도 첨성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비두골’, ‘비두고을’과 같은 이런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은 아마도 북두칠성과 다른 별을 비교한다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였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고"

 


비두, 첨성대에서 북두칠성을 기준으로 다른 별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경주의 지형을 먼저 살폈다. 첨성대를 중심으로 동쪽은 명활산성, 남쪽은 경주 남산, 서쪽은 서형산성이 있다. 그리고 북쪽은 텅 비어 있다. 신라 당시의 밤하늘을 재현해 놓은 혼상, 첨성대에서 바라본 신라의 밤하늘이다. 별자리가 변화해도 북쪽의 북두칠성은 결코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터뷰) "첨성대 위의 정자석에서 일관이 북쪽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늘을 관측할 때 그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북두칠성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위치가 현재의 첨성대 위의 정자석이다 이렇게 실험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첨성대는 북두칠성이 항상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신라의 천문관리는 북두칠성을 기준으로 별을 살피고 그것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이 관측한 천문현상, 그것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제작진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현대의 천문학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수천 년 전의 천문현상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용복 교수 서울교대 지구과학과

인터뷰) "이중에서 확실하게 예측가능 한 게 일식은 확신한 것이구요. 거꾸로 계산 할 수 있구요. 월식, 월성, 월성식범이라는 이것도 가능하구요. 행성범합도 가능하구요. 태백범월1)도 가능하구요."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 하나를 선택했다. 첨성대가 세워진 후의 기록이다. 그것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기록대로 그날 그 시각 일식은 일어나고 있었다. 신라의 천문관측은 정확했다. 신라인들에게 천문은 무엇이었을까? 왜 그들은 첨성대에서 그렇게 열심히 하늘을 살폈을까?


인터뷰) "우리가 봤을 때 옛날에 천문관측이라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겁니다. 우리가 생활에 나가고 특히 이제 하나의 농경국가 아니면 정착에 사는 그러한 민족에게는 계절변화 하는데 그 별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이 다 이제 방향과 관련된 것, 계절과 계절변화와 관련된 것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이제 천체관측하고 직결되는 것이죠."


삼국사기 전체 기록을 분석하면 뜻밖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즉, 별자리 관측이나 천재지변에 관한 기사2)가 전쟁이나 외교에 관한 기사보다 월등히 많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인터뷰) "그 태왕과 같은 천문현상 일식이라든가 이런 것은 제왕의 영광을 가리는 것으로 보고 혜성이라든가 뜻하지 않는 천변현상이 바로 왕권의 큰 영향을 주고 길흉을 점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이와 같은 관원들을 통해서 관측을 하게 됐습니다. 이와 같이 왕궁에서 그 천변현상을 살피고 또 첨성대를 만들어서 관원들이 활동을 하는 것은 그 과학적인 의미뿐만 아니고 정치적인 그런 의미로 왕권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죠."


당시의 천문 변화는 왕과 왕이 행한 정치에 대한 예언적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천문을 살핀 첨성대 역시 왕의 운명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어느 왕의 운명에 닿아 있을까?

 


첨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3)입니다. 자, 최초의 여왕이 첨성대를 만들었다? 점점 흥미가 생깁니다. 자 이걸 보시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의 첨성대들입니다. 이것은 고려시대 첨성대입니다. 지금은 북한의 개성 만월대옆에 남아있는데요, 모양을 보십시오. 그냥 밋밋한 탁자를 닮았습니다. 하나 더 보실까요? 조선의 광화방관천대입니다. 얼핏 보기에 굴뚝을 닮은 사각 구조물입니다. 그러나 첨성대는 확연히 다릅니다. 둥근 병모양의 몸통, 네모난 상단부,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무슨 모양으로 보입니까? 이 독특한 모양이 선덕여왕의 맵시를 닮았을거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왔습니다. 자, 첨성대의 이 독특한 모양, 최초의 여왕 선덕과 어떤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요?


최근 첨성대의 위치와 관련하여 새로운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첨성대 주변을 발굴한 결과를 살펴볼 때 첨성대는 왕궁 안에 포함된 건축물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박방룡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인터뷰) "도로 안쪽은 궁궐 안이 되는 것이죠. 바로 그 궁궐 안에 이런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금 이것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것이지만 실체 첨성대 바로 서편에 지금 공터로 남아 있는 발굴되지 않은 곳에도 그런 건물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기와조각도, 토기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점으로 봤을 때 이 첨성대를 중심으로 한 인접해 있는 건물지들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누각전이라든가 하는 이런 천문을 관측하고 기상을 관측하던 그런 관청이 여기에 있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지금까지 신라의 궁궐은 반월성에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신라 궁궐은 첨성대와 첨성대 주변 건물터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라는 것이 새로운 주장의 내용이다.


인터뷰) "바로 이 월성 북쪽 편에 첨성대가 지금 자리 잡고 있죠. 저 건너 보이는 첨성대는 여러 가지 기록이나 정황을 봤을 때 선덕여왕 때에 만든 건물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선덕여왕을 기점한 그 무렵에는 이 첨성대를 포함한 이 일대가 다 궁궐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과 첨성대,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최근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첨성대와 그것을 만든 선덕여왕과의 관계를 밝힌 주장이 주목을 끌고 있다. 건국대 김기흥 교수, 그가 주목한 것은 첨성대가 갖는 상징성이다.


김기흥 교수 건국대 사학과

인터뷰 "우리가 어떤 건축물이나 예술품 이런 것들의 의미나 상징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물론 그것이 같은 기능성에 주목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첨성대에 관해서도 그것이 천문 관측대라든지 제단이라든지 아니면 규표라는 기능에 주목했던 것이고  그것들은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건축물이나 예술품들이 역시 그 시대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때에 그것을 만들어 낸 시대에 사람들의 세계관 종교관 이런 것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첨성대에 나왔던 7C초 선덕여왕대의 어떤 세계관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한 종교관 이런 것들에 주목해서 연구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이 세운 첨성대,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운명과 밀접한 첨성대를 왕궁 안에 세우면서 어떤 상징을 부여했을까? 혹시 첨성대의 둥근 모양 자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첨성대 정상의 우물 정자, 첨성대는 자신이 우물임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재매정, 김유신 집터에 남아 있는 신라의 우물, 재매정 우물과 첨성대의 내부 모습은 영락없이 닮아 있다 모양과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에게 우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그의 탄생 설화 역시 우물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다.


김기흥 교수

인터뷰) "신라에서 우물이라는 것은 나름의 특별한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박혁거세가 바로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이제 말이 울고 갔는데 거기에 알이 있어서 거기서 깨어났다고 하죠. 그 다음에 또 박혁거세의 아내인 알영이 바로 알영정이라는 우물에서 나온 용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그럽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신성한 두 인물이 바로 우물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왔다 이런 이야기가 되는데요. 그렇다면 그 우물은 바로 저 다른 지하세계와 지상세계를  연결하는 그러니까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는 터널이나 통로 기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은 왜 통로가 필요했을까? 첨성대라는 통로를 통해 어디로 가고자 했을까? 경주 남산, 서북쪽 자락의 부처골, 이 산자락에는 바위에 들어앉은 모양을 한 부처가 있다. 동그스름한 얼굴의 후덕한 여인이 부처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이다.


인터뷰) "많은 미술사가들은 이제 이 석불이 7C 전반에 조성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부처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여성, 그러면 누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왕즉불 사상에 의해서 사실 왕은 부처 같은 대접을 받는데요. 그렇다면 7C 전반에 왕으로서 부처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사람 이런 석불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인데요. 진덕여왕은 즉위과정이 조금 더 뒤고 여러 가지 곡절로 볼 때는 선덕여왕이 모델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은 왜 여기 부처의 모습으로 앉아 있을까? 거기에는 그녀의 아버지 진평왕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남동신 교수 덕성여대 사학과

인터뷰) "진평왕은 이름이 백정이다. 이 이름은 석가모니 아버지 이름에서 따온 것이구요. 진평왕의 왕비는 마야부인입니다. 마야부인은 다 아시다시피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진평왕과 왕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그 이름은 당연히 석가모니가 되어야 되는 것이죠. 유감스럽게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고 딸이 태어난 것이죠."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최초로 여왕이 되어야 했던 선덕, 그녀는 부처의 몸을 빌어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덕은 즉위 전부터 많은 정치적 시련을 겪어야 했다. 공주 시절 이미, 여왕의 즉위를 탐탁치 않게 여긴 귀족들의 반란이 있었다. 칠숙, 석품의 난이 그것이다. 즉위한 후에도 시련은 이어졌다. 선덕 11년에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대야성 등 신라 서쪽의 40여 개 성을 잃는 국난을 겪었고 당나라와의 외교적 갈등도 계속되었다.

 

 

선덕여왕 3년에 '분황' 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절이 세워진다. 일반 사찰들은 불교의 교리 등을 절 이름으로 짓는데 비해 분황사는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묘한 뜻을 지녔다. 이 독특한 이름에는 여왕이기에 지녀야 했던 부담과 그것을 떨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당 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자 선덕여왕은 자신을 향기 없는 여자에 빗대어 조롱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인터뷰) "선덕여왕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기 때문에 배필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일종의 조롱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선덕여왕은 받아들인 것이죠. 그런데 나는 향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있다는 생각에서 절 이름을 분황사라고 지었던 것 같습니다."


최초의 여왕 선덕은 통로가 필요했다. 여왕이기에 당하는 정치적, 외교적 어려움을 극복할 통로가 필요했다. 그 통로가 바로 우물 모양의 첨성대였다.


김기흥 교수

인터뷰) "바로 이 땅과 저 하늘을 연결하고 싶었던 선덕여왕과 같은 그런 분 또 그 시대의 사람들은 바로 이 첨성대를 통해서 과거에 자기들 조상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저승세계와 이승을 연결하는 우물이라는 기능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이렇게 우물을 지상으로 올려놓음으로서 즉 세계목인 우주 우물을 이렇게 만들어서 이 땅과 저 하늘을 연결해서 생각했다고 보입니다"

 


선덕여왕은 신의 세계에 이르러, 신의 권위를 빌어오고 싶었다. 그 염원을 담고 첨성대는 그렇게 솟아오른 것이다.


마치 땅 속의 우물이 땅 위로 솟아오른 듯한 첨성대, 첨성대는 최초의 여왕 선덕이 신에게 가닿고자 하는 통로였습니다. 마치 요즘 아이들이 굴뚝을 산타클로스의 통로라고 믿듯이 여왕은 첨성대를 신에 이르는 하나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시 보니 느낌이 달라집니다. 첨성대 모양에는 또 하나 재밌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첨성대의 단층수입니다. 이를 두고도 많은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맨 아래 기단에서 중간 창 까지는 열 두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년 열두 달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간 창 위부터 꼭대기까지 역시 열 두단입니다. 창 아래와 위를 합친 단층 수가 24단, 이것은 1년 24절기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간 창의 단층수는 3단입니다. 아래 위 24단에 창의 단층수 3단을 합치면 전체 27단, 이는 선덕여왕이 신라 27대 왕인 것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또 있습니다. 첨성대의 몸통돌입니다. 이것은 세는 사람에 따라서 약간 다르긴 합니다만 362개에서 366개로 파악되는 전체 몸통 돌의 숫자는 일년의 날짜수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럴듯합니다. 자, 첨성대의 단층 수, 여기에도 선덕여왕의 어떤 염원이 서려 있지 않을까요? 자, 오늘 우리의 마지막 의문, 첨성대의 단층 수에 얽힌 비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먼저 불국사로 가보겠습니다.


가람 배치에서 불교적 세계관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불국사, 불국사로 들어가려면 먼저 사천왕이 지키는 천왕문을 지나야 한다. 그런 후에 대웅전, 즉 부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는 계단이 있다. 사천왕과 부처의 세계 사이에 있는 33개의 계단, 이것은 33천, 즉 도리천을 의미한다. 부처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올라야 할 사다리인 것이다. 첨성대 단층 수의 비밀은 선덕여왕의 무덤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여왕은 자기가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 즉 33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 여왕은 바람대로 낭산 정상에 묻혔다. 그렇다면 이곳이 33천, 즉 도리천일까? 여왕은 무엇으로 이곳이 도리천이라고 믿었을까? 여왕이 죽은 지 32년 후,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는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불국사 사천왕문 위에 33천이 있듯이 사천왕사 위에 배치된 여왕의 무덤은 스스로 33천, 즉 도리천이 되었다. 결국 여왕은 도리천에 묻히게 되어 신의 세계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김기흥 교수

인터뷰) " 아래는 사천왕천이라는 게 있고 그 제일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는데요. 그 도리천의 정중앙에는 제석신이 계시죠. 우리가 잘 아는 하늘님, 정중앙에 계시고 사방의 각각 8개의 하늘들이 있습니다. 모두 합치면 33천이 되는 것이죠. 그 33천이 바로 이젠 전체가 도리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도리천에 가장 중심에 있고 그 전체를 다스리는 대표적인 신이 제석신 즉 하늘신 천신이 되는 것이죠."

 


김유신의 탄생설화가 하나의 예가 되듯 당시 널리 받아들여진 33천 관념은 하나의 신앙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관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해마다 33번 치는 제야의 종, 날마다 33번 쳤던 조선시대의 파루, 이는 33천의 신을 깨운다는 의미였다. 이 모든 것이 33천의 관념의 영향인 것이다.


33천에 묻힌 선덕여왕, 여왕은 죽어서까지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33의 사다리를 갈망했던 것이다. 33단의 사다리에 대한 여왕의 갈망은 첨성대의 단층 수에 담겨졌다. 그런데 첨성대는 몸체 27단과 기단과 정상 4단을 합쳐 모두 31단이다. 33단을 원했던 여왕과 31단의 첨성대, 그렇다면 나머지 두 개의 단, 두 개의 하늘은 어디 있을까?


김기흥 교수

인터뷰) "고대인들의 조상들은 자연물과 자기들의 만든 인공물을 아주 조화롭게 만들고 조화롭게 여겼습니다. 즉 하나로 보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고대인들의 어떤 눈과 같이 되어서 이 첨성대를 바라볼 때 바로 31단 정자석 위에 하늘이 보이는 것이며 그 다음에 기초 석 밑에 그 기초 석을 받치는 땅이 또 한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축물 자체 31단과 저 제석천에 계시는 하늘 한단 그리고 제석천으로부터 후원을 마음껏 받고 있는 신라의 왕들이 살아있는 이 땅 한단 그래서 모두 33단이 돼서 33천의 세계관을 실현하고 있는 겁니다."


선덕은 31단의 인공구조물에 땅과 하늘을 불러 모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에게 갈 수 있는 서른 세 단의 사다리를 완성했다.

 

오늘 우리는 첨성대에 담겨 있는 비밀을 풀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신라인의 지혜가 담긴 천문관측과 선덕여왕의 신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첨성대에 담긴 선덕여왕의 비밀 코드, 우리는 역사적 상상력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그것을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첨성대는 신에게 다가가려는 선덕여왕의 비밀통로, 서른 세단의 사다리였던 것입니다. 살아생전 강력한 군주가 되고 싶었던 선덕여왕은 이제 첨성대 위, 밤하늘의 별이 되어 빛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대의 흥망이 세월을 지나

돌로 세운 첨성대만 푸른 하늘에 솟았네

누군가 오늘 천상을 살핀다고 하면

한 점 문성, 사 성이 되었다하리


                       - 안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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