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조선일보의 신형준기자가 문화재청장이었던 미학전문가 유홍준에게 반박한 글입니다.
석굴암은 금강비 혹은 루트2의 비로 건축되었다는 유홍준의 주장에 대한 반론인데요.
석굴암이 루트2의 비로 건축되었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이 일본인전문가라고 합니다.
실제 길이 측정을 해보니 루트2의 비례를 찾아보기힘들다는 겁니다.
이러한 류의 논쟁은 황금비에 대한 개념논쟁에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금도 설왕설래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루트2의 비례로 되었느냐 아니냐
혹은 황금비건축인가 아닌가의 논쟁의 핵심이 없는 것이기에 전혀 엉뚱한 논쟁이라는 겁니다.
달을 가르키니 손가락을 본다는 겁니다.
아무튼 루트2라는 것은 수학에서 닯은비를 상징합니다.
황금비의 특수한 비례인데...
황금비가 원의 비례라고 한다면 닯은 비는 정사각혀의 비례라고나 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손가락질 논쟁을 그만 접고
진정한 의미의 닯은비나 황금비논쟁을 했으면 합니다.
결론적으로 닯은비라고 하면 황금비보다 차원이 떨어지는 건축기법입니다.
그래서 황금비를 금비라고 하고 닯은비를 은비라고 합니다.
이는 서양사람들의 판단입니다.
일본인이 석굴암이 닯은비라고 주장하는 것 그자체가 이미 석굴암의 건축기법을 떨어뜨리는 수작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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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형준기자의 글---
석굴암에는 √2의 비례미가 없다!
'석굴암 √2의 비례미론'을 주장하는 유홍준 문화재청장님께 드리는 반론
안녕하십니까, 유홍준청장님!
저는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일하는 신형준기자입니다.
우리 문화유산의 ‘전도사’로서 애쓰시다가 문화재청장이라는 중책까지 맡아 우리 문화유산 행정까지도 책임지시게 된 유청장님께 우선 경의를 표합니다.
아울러 ‘우리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공전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전 국민에게 각인시키신 유청장님의 그간 활동에 대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입니다.
유청장님께 경의를 표하면서도, 오늘 이 자리에서 저는 외람되게도 석굴암의 비례미와 관련해 청장님께 반론을 펼까 합니다.
그것은 석굴암이 √2의 비례미에 의해 건축됐다는 유청장님의 논리가 기실 얼마나 ‘논리적으로 부실한가’ 혹은 ‘논리적으로 근거없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석굴암에 루트 2의 비례미가 있으면 어떻고, 없은들 어떻겠습니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굳이 반론을 펴는 것은 문화유산과 관련한 청장님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100만권 이상이 팔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같은 유청장님의 글을 읽으며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가졌던(혹은 앞으로도 가질) 독자들이, 그리고 국민들이 자칫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근거없는 과장이나 미화를 여과없이 받아들였을 때 초래될 수 있는 폐해가 걱정돼서입니다.
청장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1994년 창작과 비평사 刊)에서 일제시대 건축기사였던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을 수용해 “석굴암이 √ 2의 비례미에 따라 건축됐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오늘자(2005년 1월 3일자) 어느 일간신문을 보니 청장님은 다시금 “석굴암이 √ 2의 비례미에 의해 건축됐다”고 주장하셨더군요.
저는 쓴웃음이 났습니다. 청장님께서 수장을 맡으신 문화재청의 전신(前身)인 문화재관리국은 이미 1960년대 초반에 석굴암 수리를 하면서 석굴암을 정밀 실측했습니다.
그 실측치는 1967년에 출간된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에 이미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석굴암이 요네다 미요지가 주장했듯 √ 2의 비례미에 따라 건축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네다 미요지 주장의 기초랄까, 전제가 되는 것은 석굴암 주실(主室·본존불을 모신 공간)의 반경이 12당척(1당척은 29.7cm로, 대략 3m60cm)으로 이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관리국의 실측 결과, 석굴암 주실은 곳에 따라 반경이 10당척(약 3m)인 곳도 있고, 13.4당척(약 4m)인 곳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측점에 따라 반경이 1m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석굴암 주실은 반듯한 원(요네다 미요지는 이를 완원<完圓>이라고 표현했습니다)이 아닌 셈이지요.
따라서 석굴암 주실 반경 12당척을 논리의 전제로 삼았던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은 사상누각이었던 셈입니다.
자! 이 장면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우리 한 번 해볼까요? 즉 ‘석굴암 √2 비례미론’이 어떻게 생성됐으며 어떻게 학문적으로 ‘확대재생산’돼 갔는지 말입니다.
그 과정을 면밀히 살피다 보면 우리 미술사학계, 아니 국학계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석굴암 √2 비례미론’을 받아들였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석굴암 √2 비례미론’의 탄생
유청장님도 잘 아시듯 ‘석굴암 √ 2 비례미론’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직원이던 일본인 건축기사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가 1940년 발표한 ‘경주 석굴암의 조영(造營) 계획’에서 처음 제기됐습니다.
요네다 미요지에 따르면, 석굴암은 원형 주실(主室·본존불을 모신 공간)의 반경 12당척을 모든 비례미의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존불을 모신 대좌(臺座) 8각형 앞쪽 변(요네다는 이를 전변<(前邊>이라고 표현했지요) 중심을 석굴 주실의 중심으로 간주했고, 여기서 석굴 주실의 반경(즉 주실 중심~주실 벽면을 이루는 11면 관음상이나 10대 제자상 등 판석이 존재하는 곳까지의 거리)을 측량한다면 12당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석굴암 주실 반경값 12당척을 기준으로 ①12당척에 루트 2를 곱하면(즉 12당척√ 2) 본존불의 총 높이(본존불 대좌를 포함한 높이)가 나오며 ②12당척+(12당척√2)하면 석굴의 총높이가 산출되고 ③12당척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의 수선의 길이 10.4 당척의 절반 길이인 5.2당척을 대좌(臺座·석굴암 본존불을 모신 구조물) 8각형 간석(竿石)의 마주 보는 변과 변의 폭으로 삼아 대좌의 모든 규격이 결정되는 등 석굴암 건축에는 엄밀한 √2의 비례미가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요네다 미요지는 ‘경주 석굴암의 조영 계획’에서 석굴암 비례미론은 자신의 실측치와 일제가 수리 공사(1913~1915년)를 하면서 제시한 실측치를 참고해 전개했다고 밝혔습니다.
한데 요네다 미요지는 그 스스로도 실토했듯이 “석굴 주실의 평면 형태는 완원(完圓)으로 계획되고 시공됐을 것이 분명한데 지금엔 약간 이그러져 있다”며 “이는 처음 쌓을 때 석굴의 부재를 이음하면서, 또는 수리 때의 착오로 그렇게 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석굴암의 축조 계획으로 본다면 처음부터 완원의 평면으로 구성됐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석굴암 건축에서 √2의 비례미를 이야기하면서도 석굴암이 실측치상으로는 명백하게 √2의 비례미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약간 이그러져 있다’는 식으로 변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과연 석굴암 주실은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처럼 ‘약간 이그러져 있는 것’에 불과할까요?
196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석굴암 실측-√2의 비례미는 없다!
문화재관리국은 1961년 9월 13일부터 1964년 6월 30일까지 석굴암을 수리했습니다.
무너져내리는 석굴암을 보수하기 위해 일제가 1913년~1915년 석굴암 해체 수리, 그리고 1917년과 1920~1923년에 걸쳐 두 차례 더 보수를 하는 등 모두 세 차례 보수공사를 했지만 여전히 석굴암 보존에 미흡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문화재관리국은 다시금 철근콘크리트로 석굴암 주위에 돔을 씌우는 공사를 했던 것입니다.
이 공사에 앞서서 문화재관리국은 석굴암을 정밀 실측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확인됩니다.
석굴암 주실의 반경은 요네다 미요지가 ‘석굴암 주실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던 ‘대좌 8각형 앞쪽 변(전변前邊) 중심’을 중심점으로 삼았을 때 측점에 따라 어느 곳은 10당척(약 3m)이고 어느 곳은 13.416당척(약 4m)인 것으로 판명됐지요.
다시 말해 석굴암은 요네다 미요지가 주장했듯, 주실 평면이 12당척을 반경으로 반듯하게 축조된 원의 형태가 아니며, 곳에 따라 반경이 1m나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입니다.
원이란 무엇입니까? ‘중심점에서 같은 거리에 위치하는 점들의 연속’입니다. 만약 중심이 없다면? 당연히 원이 아니지요. 중심이 없는 원은 없습니다.
석굴암을 실측한 결과, 소위 주실의 중심점이라고 간주되던 곳에서의 반경 수치가 일정하지 않고 1m씩이나 차이가 난다면, 결국 석굴암 주실은 원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들 즉 ①석굴암 주실의 평면은 반경 12당척으로 이루어진 원형이며 ②석굴암의 높이는 석굴암 주실의 평면 반경 12당척+(석굴의 반경 12당척X√2)에 따라 결정됐으며 ③석굴암 주실 입구 양 끝에서 12당척으로 정삼각형을 만들면 그 꼭지점은 석굴암 주실 평면의 중심인 본존 대좌 8각형 앞쪽 변(前邊)에 닿고 ④석굴암 주실 평면 반경인 12당척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 수선의 길이(10.4당척)의 절반 길이인 5.2 당척은 본존 대좌 구성의 기본 수치가 됐으며 ⑤대좌 바닥에서 본존 불상의 총 높이인 17.04당척은 석굴암 주실 평면의 반지름 12당척√2배에 해당하는 길이라는 그의 모든 핵심적인 주장은 근본부터 흔들려 버리는 것입니다.
문화재관리국이 1967년 펴낸 ‘석굴암 수리 공사 보고서’ 60~68쪽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이중 석굴암 주실 반경 실측치에 대한 부분은 62~63쪽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문화재관리국의 실측이 잘못됐으며, 요네다 미요지의 실측이 맞다고 주장하고 싶은 분도 계시겠지요. 그런 분을 위해서 한가지 방증을 더 하겠습니다.
일제는 1913년~1915년 석굴암 제 1차 수리공사(이 때는 석굴암을 해체한 뒤 수리하는 대대적인 공사였습니다) 때 석굴암 실측 도면을 남겼습니다.
이 도면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고문서 목록 110-4번’과 ‘보존문서 37-3번’에 남아 있습니다. 두 도면 모두 실측치가 같습니다.
한데 이 도면에 나타난 석굴암 주실의 모습은 석굴암을 해체 수리하기 전의 주실 평면상태를 일제가 기록한 ‘석굴암 재래 기초 평면도’와는 완연히 다릅니다. 다시 말해 일제는 석굴암 해체 수리 이전, 즉 1913년 이전의 석굴암 실측치는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제가 남긴 석굴암 주실 직경의 실측치와 요네다 미요지의 석굴암 주실 직경의 실측치가 같다는 점에서 요네다 미요지는 1913~1915년 석굴암 해체 수리 이전의 석굴암 실측치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석굴암을 1차로 보수하면서 남긴 실측치를 인용, 혹은 참고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한데 일제가 석굴암을 1차로 보수한 뒤 남긴 석굴암 주실 직경 실측치를 보면 소위 석굴암 주실의 중심이라고 간주되는 ‘대좌 8각형 앞쪽 변<前邊> 중심’을 직교하는 횡직경과 종직경 밖에는 없습니다. 요네다 미요지의 수치 역시 이와 동일합니다. 그 역시 이 수치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지요.
하지만 두 곳의 수치를 석굴암 주실 평면 반경의 대푯값으로 간주할 수 없음은 문화재관리국의 실측 결과 드러납니다. 문화재관리국은 반경을 측정하기 위해 최소한 12곳을 실측했습니다.(보고서 63쪽 참고)
소위 ‘횡직경’과 ‘종직경’ 단 두 수치만을 실측한 기관(혹은 사람)과 12곳의 반경을 실측한 기관. 둘 중 어느 곳이 더욱 치밀하게 실측했을까는 여기서도 드러나는 셈이지요.
게다가 문화재관리국은 1967년 보고서를 펴내면서 “일제가 어떠한 방법으로 실측치를 표기하고 어떠한 방침에 의거하여 실측하였는지 잘 알지 못하여 논평할 방도가 없으나, 우리들이 실측한 것과는 별로 부합하는 것이 없었다”(보고서 63쪽)고 일제의 실측치에 대한 신빙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확대 재생산되는 석굴암 √2 비례미론
문화재관리국의 보고서가 나온 이후로도 내로라하는 우리 미술사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은 여전히 석굴암이 √2의 비례미에 의해 건축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매력적이겠지요. 서기 8세기 중엽의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이, 고도의 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2의 비례미까지 갖추었다니...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청장님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 실린 ‘토함산 석불사’에서 요네다 미요지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 석굴암 √2 비례미론을 사실로 받아들이셨지요. 청장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 195쪽에서 “요네다 미요지는 석굴의 평면을 3자짜리 방안지상에 그려 그 수치의 상호관계가 치밀함을 증명했다”고도 하셨습니다.
덧붙여 “석굴암의 정확도는 1만분의 1에 달한다”며 “신라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과학적이고 치밀했다”고 극찬하신 뒤 “그 무서우리만큼 정확한 기술에는 우리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과학이 뒷받침돼 있었던 것”이라고 기록하셨지요.
유청장님! 청장님이 지휘하시는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펴낸 ‘석굴암 수리 공사 보고서’를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석굴암은 결코 반듯한 원의 형태로 축조된 구조물이 아닙니다.
혹시 청장님도 요네다 미요지처럼 1913년~1915년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하면서 석굴암이 지금처럼 일그러진 모습이 된 것이 아닐까, 변명하시렵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석굴암에서 √2의 비례미를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앞서 살핀 국립중앙박물관 고문서목록 110-4번과 보존문서 37-3번에서도 알 수 있듯, 일제는 제 1차 수리공사(1913~1915년) 이전의 석굴암 실측치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제 1차 수리공사를 마칠 즈음(혹은 직후)의 실측치만 남겼을 따름입니다.
요네다 미요지 역시 일제의 석굴암 1차 수리공사 이후에 기록한 실측치를 참고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켰습니다. 결국 ‘일제가 손대기 전의 석굴암에는 분명 √2의 비례미가 건축상 보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때문에 신(神)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네다 미요지조차 ‘경주 석굴암의 조영 계획’에서 “석굴암은 그간 몇 번의 수리가 있었음이 문헌에 보이며, 1913년에는 전면 해체 수리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 석굴이 당초의 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단지 석굴 중요부분과 전실의 짜임이 성실상 크게 달라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남겼으리라 생각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요네다 미요지 역시 ‘해체 수리 뒤 석굴암에 약간의 변형은 있었을 것이나, 석굴암 주실은 판석 위 아래에서 곡선을 이루고 있는 받침돌(면석)이나 이맛돌 때문에 해체 뒤 다시 짜맞추려면 주실 만큼은 크게 변형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의 논지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네다 미요지의 √2 비례미론은 비판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제의 실측치보다 더욱 면밀히 석굴암을 실측했던 문화재관리국의 실측 결과 석굴암은 √2의 비례미를 충족시키는 실측수치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일부 미술사학자가 주장하듯,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 수리하면서도 전혀 원형을 변형시키지 못했을 본존불 뒤편의 두광(頭光)이나 천개(天蓋), 그리고 불두(佛頭·부처님의 얼굴 길이) 사이에 √2의 비례미는 커녕, 어떠한 정수적 비례미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두광은 문화재관리국의 실측 결과 좌우 길이가 224cm 정도이고, 위 아래는 228cm 정도로 반듯한 원이 아니며, 천개는 직경이 248cm 정도, 불두는 미술사학자 강우방선생에 따르면 110cm인데, 문명대선생이나 요네다 미요지에 따르면 115cm 정도였습니다. √2의 비례미를 구현했다는 통일신라인의 작품치고는 상호 수치 차이가 크지요?
유청장님!
요네다 미요지는 그나마 “석굴암이 √2의 비례미에 따라 건축됐음을 내가 증명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주 석굴암의 조영(造營) 계획’에서 내내 √2의 비례미와 실측치 사이간의 괴리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논문 제목은 ‘경주 석굴암의 비례미’가 아니라 ‘경주 석굴암의 조영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2의 비례미에 따라 석굴암을 만들려고 했는데 일제가 해체 수리를 잘못한 탓인지, 아니면 서기 8세기 석굴암을 막상 축조할 당시의 잘못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2의 비례미가 실측치상으로 석굴암에 구현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속되게 말하면 ‘빠져 나갈 구멍’, 즉 ‘학문적 알리바이’를 요네다 미요지는 마련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유청장님은 너무 쉽게 석굴암 건축에서 √2의 비례미가 증명됐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석굴암 √2 비례미론’의 주창자격인 요네다 미요지조차 이를 증명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유청장님!
청장님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서 요네다 미요지를 기리며 이렇게 이야기하셨지요.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 그 해까지도 땡볕에서 부소산성을 측량하던 백면의 기술자이고 무명의 건축학도였던 그가 말없이 성실하고 치밀하게 측량했던 그 경험을 토대로 불과 3년만에 이처럼 위대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인생을 사는 법과 학문하는 법을 동시에 배우게 된다. 그의 삶은 ‘작은 것의 힘, 작은 것의 위대함,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중략) 명나라 문인화가 동기창은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있다’는 뜻으로 ‘소중현대’(小中顯大)라고 하였다. 요네다의 학문에는 곧 ‘소중현대’의 방법론적 실천이 있었으며 그의 일생은 ‘소중현대적’ 인생이었다.”
소중현대를 진정 깨달으셨다면, √2의 비례미니 sin(사인) 9도의 정현(正弦)법칙이니 하는 어려운 말보다는 석굴암의 실측치부터 세세히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문화재청에도 1967년 발간된 당시의 수리공사보고서가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석굴암이 축조된 서기 8세기에는 √로 상징되는 무리수(irrational number) 개념이 동양에는 없었습니다.(사실 무리수는 BC 5~6세기 피타고라스학파에 의해 발견됐지만, 그 정확한 개념은 극한과 연속 등의 개념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밝혀지게 됐으며, 19세기말 칸토르나 데데킨트, 바이에르슈트라스 등에 의해 그 기초가 확고하게 됐지요.)
당시 동양의 대표적 수학서인 구장산술(九章算術)이나 주비산경(周髀算經)을 잘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당시에는 원주율을 나타내는 π값조차도 무리수인 3.141592...로 계산되기보다는 정수인 ‘3’으로 계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빼어난 미술사학자이시자, 우리 문화유산 행정을 책임지시는 유청장님에 대해 너무 비판만 한 것 같습니다.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문화유산과 관련한 유청장님의 영향력이 너무도 크다고 생각되기에, 그리고 잘못된 지식이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부터 전파됐을 때의 결과에 대해 누구보다 우려하고 있기에 결례를 무릅쓰고 몇 자 비판하게 됐습니다.
그저 ‘사실찾기’를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어느 박눌한의 지적이었다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유청장님이 현 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사학자 중 한 분이시라는 점에는 전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제 지적에 반론을 제기하시겠다면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유청장님이 아니어도, 석굴암이 √2의 비례미에 따라 건축됐다는 것을 증명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어느 누구의 반론이라도 환영하겠습니다.
유청장님이 항상 건승하시기를 바라며, 못난 사람 난필 맺습니다.
신형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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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훌륭한 건축문화재들 특히 석굴암은 금강비에 맞춰 건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금강비란 닯은비이고 루트2의 비례비입니다.
1:√2이고, 대략 1:1.414 비율 입니다. 제고하면 2가되는 무리수입니다.
금강비는 금강석 (다이아몬드)에서 단단하고 파괴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국의 금강비로 적용된 건축물
1. 부석사 무량수전은 용마루를 기준으로 했을 때 1.414:1 입니다.
2. 석굴암의 머리:가슴:어깨:다리의 너비가 1:2:3:4의 비율로 커지고, 석굴암 본존불의 높이와 본존불이 놓여있는 주실의 반지름이 1:1.414로 금강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3. 첨성대 밑바닥의 지름과 곡선면의 높이가 1:1.414 입니다.
4. 그외 안압지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인 용왕전의 위치와 안압지 전체의 끝인 북쪽 호수 가장자리까지의 거리의 비가 1:1.414를 이루고 있고, 포석정은 전체 크기에서 세로와 가로의 비율이 1:1.414로 황금비가 적용되어 있고,
또한 포석정에서 술잔이 도는 앞부분에 가상의 원을 만들어 보면 내부 원과 외부 원의 지름의 비가 1:1.414로 황금비입니다.
끝으로 실생활에 이용되는 A4용지가 바로 금강비입니다. 두개를 붙여도 짤라도 금강비는 유지됩니다.
(A4용지 2장을 붙이면 A3용지 한장이 되고 A4 용지를 반으로 가르면 A5용지 두장이 생깁니다. 짤라도 금강비는 유지됩니다.)
그럼, 황금비 VS 금강비 과연 어떤것이 인간에 더 미적이고 좋은 것일까요?
황금비와 금강비 소수비와의 관계는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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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비율(금강비율)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각 국의 건축물들의 특수성과 공통성은 다른 문화 예술품들보다 그 나라의 문화적 특성이 강하다.
때문에 동, 서양간의 미감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에 대한 설명도 건축물이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리라 생각한다. 백은비율은 우리 주위에 있으면서도 생소한 비율이다.
金剛(금강)이란 금강석, 즉 다이아몬드를 일컫는 우리말이다.
동양의 금강비는 황금보다 더 귀한 다이아몬드 같은 분할을 뜻한다.
어느분들은 서양에서는 황금분할이라는 황금비가 있다면 이보다 더 최고의 비율이 금강비라고 격찬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황금비를 금척이라고 하여 사용한 것이다.
금강비와 황금비의 사용과 적용은 좀 다르다.
금강비는 대체로 견고하고 닯은 비로 혹은 최소의 법칙을 적용한 것으로서
자연의 법칙보다는 안정과 안정감을 만족하고 낭비를 최소화하는 인위적인 최소의 절제를 상징한다.
물론 금강비는 안정뿐만 아니라 여유가 느껴지는 수학적 비례이다.
금강비와 황금비는 수학에서 말하는 루트와 파이(Φ, Phi)를 말한다.
이를 굳이 직각삼각형으로 표현하면 이등변직각삼각형은 금강비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금강비는 1: 루트2 = 1: 1.414...를 말하며, 황금비는 1:1.618...를 말한다.
따라서 금강비는 7등신이 되고, 황금비는 8등신이 된다.
금강비는 직각이등변삼각형의 구도이고 황금비는 정오각형의 한변의 길이와 대각선의 길이의 비를 말한다.

식물은 좀 더 안정적인 형태를 갖추면서 금강비례의 형태로 성장한다.
사람의 몸도 아름다움보다는 실용성을 추구하는 금강비례이다.
이는 안정감과 실용성, 편리함과 정적인 평화뿐만 아니라 미적 아름다움을 겸하고 있다.
A4용지 등에 사용되는 비율이 바로 백은비율이다.(금강비율이라고도 함.)
금강비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부석사 무량수전, 신라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던 첨성대, 즐거움과 흥의 문화의 발상지 포석정과 안압지이다.
첨성대는 밑단의 지름과 곡면의 기둥 상단까지의 높이의 비가 1: 1.414인 금강비이다.

포석정은 전체 크기에서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1:1.414이다.
안압지는 중심건물인 용왕전의 위치와 안압지 전체의 끝인 북쪽 호수 가장자리까지의 거리의 비가 1:1.414이다.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부석사 무량수전은 바닥면을 기준으로 용마루 높이까지의 가로와 세로의 비가 금강비이다. 그 내부 기둥의 높이와 두 기둥을 잇는 서까래의 길이의 비가 조화로운 금강비이다.
외부가 가로 61.9자(고려시대의 1자=32.21cm), 세로 38.2자로 직사각형인 무량수전은 황금비례(1.62 대 1)를 이룬다.
직사각형인 무량수전을 정사각형과 작은 직사각형으로 나누는 위치에 불단이 있다. 불단의 앞을 이은 선과 무량수전의 대각선이 만나는 점은 작은 직사각형을 더 작은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으로 나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직사각형이 점점 작아지면서 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각 직사각형의 한 점을 이으면 ‘황금나선’이 나온다. 황금나선은 나팔꽃의 가지가 뻗어가는 모습이나 숫양의 뿔과 같이 자연 속에서 다양하게 발견할 수 있다.


경북궁 근정전은 바깥기둥을 기준으로 가로30.2m, 세로 21.2m로 금강비이다. 근정전은 두개의 단 위에 올려져 있는데, 아랫단 앞의 광장은 정사각형이다. 정사각형의 한 점에서 대각선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리면 근정전 건물 앞부분에 닿는다. 이 대각선의 길이는 정사각형과 √2 비례관계를 보인다. 근정전의 위치가 근정전 일곽(一廓)과 금강비례를 이룬다
또한, A4의 대각선을 B4의 긴 변에 대어보면 꼭 맞는다.
그러면 A4와 B4의 면적 비는 1:1.5가 된다. 이는 백은비율에 의한 것이다.
A4의 가로(210mm), 세로(297mm)는 백은비율이다. B4라고 그 예외는 아니다.
백은비는 보자기 등에도 활용된다. 이들은 정사각형인데, 한 변이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의해 루트2가 되기 때문이다
A4와 B4등의 용지들에 숨어있는 소중하면서도 존재감 없는 비율이지만, 생활 속에는 깊숙히 파고들어 있는 것 같다.
훌륭한 비례는 편안함을 주고 나쁜 비례는 불편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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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비라고 하면 전설적인 금척을 의미하고....
황금비란 사물의 형상을 정확한 비례관계로 수치를 정하여 계산하며 건축을 하는 것인데
여기서 고려되는 것이 원과 직선과 곡선의 관계이다.
즉 원과 타원의 형의 모양 그리고 정사각형과 다양한 구명체와의 관계등을 수학적인 수치로 정확한 비례로 계산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다.
금강비는 황금비와는 좀 다른개념인데
이를테면 정사각형의 모형을 가지고 정학한 대칭관계를 게산하는 것이다.
황금비가 작은 것과 큰것의 비를 계산한다고 한다면
금강비는형상보다는 대칭관계나 변과 대각선의 관계에 집중한다.
황금비가 전혀 다른 모양을 구사한다면 금강비는 닯은 모양을 비례로 구사한다.
이러한 차이를 우리고유한 수치계산에서는
금강비를 법수의 수치라고 하고 황금비를 체수라고 한다.
특히 금강비는 황금비와는 달리 건축의 안정성이나 간단함등을 고려하는 것이고..
아주 단단하게 하여 뼈대와 그 골조 몸체자체가
아주 이상적인 것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금강비가 없는 황금비가 존재하는 것은 빛좋은 개살구고
황금비가 없는 금강비는 향기없는 가짜꽃에 불과합니다.
금강비와 황금비는 함께 어우러져야 이상적인 건축물이되는 겁니다.
금척의 척도로 하는 수학적인 계산법을 하게되면 아주 이상적인 건축물이 탄생하게되는 겁니다.
우리의 선조인 환웅이 천부도를 건설할 즈음에는
이러한 건축설계도를 환운의 구구단이라고 하고 이를 성법체의 수리학으로 하여 실현한 겁니다.
그렇다면 성법체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금척의 비라는 개념으로는 파악하기힘든 개념입니다.
닯은비이든 황금비이든 비율개념은 모두다 선형수학이고 방정식입니다.
즉 선형방정식의 수학이라는 한계를 가집니다.
그런데 사실 자연의 형상들은 비선형입니다.
고전물리학의 수학에 불과한 선형방정식으로는 풀 수가 없습니다.
즉 아인타인의 고전물리학이 아닌 양자역학의 수학으로 풀어야합니다.
이러한 수학이 바로 군환체의 수학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선조인 환웅은 이러한 군환수학을 철학화한 겁니다.
물론 이러한 전통기법은 이미 전승이 단절되었고 잃어버린 철학이 되었는데 ....
그나마 간신히 유지된것이 바로 금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