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우주론에서 게네시스, 즉 카오스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게네시스가 코라, 즉 공간의 품속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코라를 게네시스의 어머니, 유모, 수용자, 자궁 등으로 표현한다.
플라톤은 코라가 눈에 보이지 않고 형태도 없지만 결코 서로 닮지 않고 균형도 잡히지 않은 힘들(뒤나메이스dynameis)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 힘을 중시하게 되면 온 우주는 힘으로 되어 있다는 철학자 니체의 존재론이 나온다. 그리고 플라톤은 코라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플라톤은 코라가 자신의 소멸은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생성을 갖는 모든 것에 자리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코라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텅 빈 공간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그런테 플라톤은 코라가 어떤 부분에서도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균형 잡히지 않은 힘들 때문에 균형을 잃고서 기우뚱거리며 흔들린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근원적으로 출렁거리는 공간은 왠지 아인슈타인의 '휜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코라 속에 있는 게네시스 자체도 전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죽박죽 뒤흔들리는 방식으로 운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당연히 그 어떤 질서도 생겨날 수 없고 오로지 혼돈만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멋대로 출렁거리는 공간인 코라 속에서 제멋대로 운동하는 게네시스의 모습을 보고서 우주 제작자인 데미우르고스가 아무렇게나 운동하지 말고 질서 정연하게 운동해보라고 설득했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게네시스가 아니라 코라를 설득했다고 봐야 옳다. 그 질서 정연함은 바로 비례와 척도에 따라, 즉 진정으로 존재하는 형상들에 따른 것이다.
그렇게 질서 정연하게 운동을 하게 되니까, 게니스스에게서 근본적인 4원소들인 흙, 물, 공기, 불이 차례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 플라톤의 우주론이다.
그리고 미세한 4원소가 철저한 기하학적, 수학적 비례와 척도의 원리에 따라 우주 전체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카오스 속에 이미 그 나름의 본성을 지닌 4원소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었을 때 존재ousia, 즉 형상들은 그다지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특별히 중시하게 되면 플라톤 역시 들뢰즈처럼 카오스모스를 주장한 것처럼 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플라톤은 어머니인 코라가 아버지인 형상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식들인 우주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하는 식으로 어머니는 무정형한 것, 오늘날의 식으로 말하면 전혀 유전인자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말하자면 유전인자는 오로지 아버지에게서만 온다고 여긴 것이다. 어떤 주장을 염두에 두면 플라톤에게는 카오스모스가 성립할 수 없다.
코라를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새로운 의미론과 더불어 여성주의적인 의미 생성의 개념을 만들어 낸 인물이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다.
그녀는 《시적 언어의 혁명》에서 '코라 세미오틱'이라는 말을 한다. 이는 일체의 사회 규제적인 상징체계를 벗어나서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의미 생성의 과정을 말한다.
또한 그녀는 코라를 어머니의 몸과 연결해서 유아 성욕이 발생하고 충족되면서 충동의 근원에서부터 근원적인 의미들이 발생하는 터가 된다고 말한다.
이런 크리스테바의 입장은 플라톤에게서 일종의 카오스모스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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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chora 혹은 khora)는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만물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언급하는 (형상과 물질 이외의) 제삼의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보다 정확히 말해 '이름 아닌 이름'이다.
창조의 과정을 설명한 후, 티마이오스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와 반드시 언급했어야 할 제삼의 것 즉 앞서 설명된 창조의 모든 과정이 완결될 수 있으려면 필연적으로 언급해야 하지만, 실체나 실물로서 언급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코라(chora)이다.
모든 만물의 어머니 혹은 산파라 일컬어지는 이 코라를 데리다는 '차이와 지연'을 의미하는 '차연'(diffèrance)으로 해석하면서, 자기-애착(auto-affection)으로부터 비롯되는 동일성의 위계질서를 전복한다.
동일성의 질서를 확보해주던 기의란 실은 기표들의 차이와 지연의 놀이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동일성의 신화가 생기는 이유는 바로 유기체의 '자기-애착'(auto-affection)이 빗어내는 폭력과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결국 동일성의 경계 밖에 존재하는 타자는 실재하는 타자가 아니라, 자기-애착의 힘에 의해 '자기'(self)의 경계로부터 추방된 타자이다.
자기와 타자는 코라의 차이와 지연의 놀이로부터 잉태된 '동일한' 자녀들로서, 나와 타자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동일성' 혹은 '정체성'은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화이트헤드는 코라를 '차이와 지연의 놀이터'로 보는 대신 자연과 인격적 정체성에 통일성 혹은 동일성을 부여해주는 일반 원리로 보았다.
장소적 수동성을 담지한 플라톤의 코라에 신적 에로스의 역동성을 더하여, 자신의 창조성 개념으로 발전시키면서, 화이트헤드는 그 모든 과정들의 궁극적 이상으로 '조화 중의 조화'(Harmony of Harmonies)를 제시한다.
그 모든 과정이 창조적 과정들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 곳, 그렇다, 그곳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코라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여 결합시켜주기만 하는 '터'가 아니라, 창조적으로 조화로운 통일성을 부여하여 새로운 우주 혹은 자연 혹은 인격을 잉태하는 자리이며, 그 모든 탄생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연속성을 갖도록 통일성 혹은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자리가 된다.
얼핏 대립되어 보이는 데리다와 화이트헤드의 코라 해석은 상보적(complementary)이라는 것이 본고의 논지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우주란 저 밖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체의 합생을 통해 각 현실체 속에 창조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서, 이는 곧 단일-우주(uni-verse)가 아니라 애초부터 다-우주(pluri-verse)를 전제한다.
즉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코라의 동일성이란 차이를 배제한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들 위에 근거한 동일성이다.
코라의 창조성은 곧 차이와 동일성 '사이에서' 모든 과정들을 지탱하는 일반 원리인 셈이다. 여기서 '사이'(between)란 말이 코라의 본래적 자리를 드러내기에 보다 적합하다고 본고는 주장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자기-애착에서 비롯된다면, '애초에' 자기나 타자 간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도 타자로도 정의되기 어려운 '사이'(between 혹은,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das Zwischen)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고는 '코라'를 '차연'과 '동일성'으로 해석하는 서로 다른 음율을 "사이"(betweenness)로 엮어보면서, 삶의 근원적 힘을 그 어떤 실체가 아니라, "사이"(between)를 창출하는 힘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출처] 플라톤의 코라의 의미 (잃어버린 철학을 찾아서) |작성자 goodstat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