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만약 이러한 욕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인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이 세계와 자연 및 인간에 대해 알려고 하는 고대인들의 다양한 시도와 탐구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생존하게 해주었으며,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 인간의 앎에 대한 욕구는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상호활동에 기초하는 '교육'을 통해 보다 체계적으로 충족되어 왔다.
이 책에서는 서양철학에서 교육론의 토대를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플라톤의 이론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은 한 개인과 가족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교육론은 단순히 철학의 한 분야로서 교육에 대해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삶을 반성하는 철학 전체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서구의 교육학뿐만 아니라 철학·종교·예술·문학 등 서구 정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플라톤은 철학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를 '훌륭한 삶'이라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잘 살기를 원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유명해진 델포이 신탁의 명제 '너 자신을 알라'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앎을 통해 자신을 지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지배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앎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플라톤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의 가장 중요한 계기를 교육에 두고 있다. 교육의 핵심적인 활동은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항상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일상화했다. 대화란 인간과 인간을 소통시켜주는 중요한 영혼의 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단지 추리를 통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말'을 통해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는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것은 모든 교육의 시초가 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실질적으로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즉 진리에 대한 사랑은 '놀라움'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놀라움'은 어떤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모를 때 일어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원인에 대한 탐구'라고 말한 것이다.
플라톤의 교육에 관한 주요 논의는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필자는 동굴의 비유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교육의 주요 개념과 연관시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동굴 안의 어둠', 둘째 '동굴 안의 수인', 셋째 '전향', 넷째 '동굴 밖의 태양', 다섯째 '동굴 안으로의 귀환'이다. 이 다섯 단계를 통해 세부적으로 플라톤의 교육관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동굴 안의 어둠: 세계와 교육목적
'동굴 안의 어둠'에서는 플라톤의 세계관과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동굴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의 대조를 통하여 플라톤의 이원적 세계관을 볼 수 있다. 그는 영원히 존재하며 생성·소멸하지 않는 원형으로서의 이데아의 세계와, 항상 생성·소멸하면서 결코 존재하지 않는 모사의 세계를 구분한다. 우리 신체의 감각 기관에 나타나는 세계는 부단히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이다. 즉, 그의 비유를 따르자면 동굴 안과 같이 '어둠'과 가상으로 가득 차 있어, 태어나서 동굴 안에서만 살아온 수인은 그것을 마치 실재인 것으로 착각하고 억측하는 세계이다.
반면에 우리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유에 의해서 볼 수 있는 것들은 동굴 밖에서 태양의 빛이 비추고 있는 실재의 세계이다. 여기서 동굴 안의 어둠은 인간이 처해 있는 무지의 상태를 가리킨다. 세계는 어둠과 무지로 가득 찬 생성의 세계와 빛과 진리로 가득 찬 존재의 세계로 구별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히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생성의 세계에서 지성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존재의 세계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굴 안의 수인: 인간과 교육원리
'동굴 안의 수인'에서는 사슬에 결박된 인간의 모습과 해방된 인간의 모습이 비교되어 고찰되고,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인간의 특성이 반영된 교육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동굴 안의 수인은 이 동굴 안의 생활 세계를 참으로 실재하는 세계로 여기고 감각과 경험에 의해 모든 것을 평가한다. 그는 모든 일상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동굴 안의 세계에 있는 수많은 사물들과 나아가 동굴 안의 다른 수인들이 단지 그림자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처음에 인간은 자신이 감각을 통해 인식하고 경험하는 세계가 진정한 세계라고 믿는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은 인식의 한계를 더욱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이성을 통해 영원하고 불변하는 세계에 대해 관심을 돌리게 되고 주체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플라톤은 일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사슬에 묶여 있는 상태로 표현한다. 그것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무지와 편견 및 선입견일 수 있다. 우리가 이것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적 삶에 결박된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래적인 특성은 무엇이며, 또 그것을 올바로 구현시킬 교육적 원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전향: 인식과 교육단계
'전향'에서는 사슬에 결박된 인간이 고개를 돌려 그림자로부터 진정한 존재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술되는 인식의 정의와 인식이 이루어지는 단계적 특징을 통해 교육의 단계를 추출해볼 수 있다. 동굴 안의 어둠 속에서 생활하던 수인은 사슬에서 풀려서 갑자기 일어나 고개를 돌리게 된다. 이전에 보았던 그림자들과 달리 불빛을 바라보게 되면 처음에는 눈부셔서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다. 더욱이 누군가 고개를 돌려 불빛을 바라보게 된 수인에게 이전에 보았던 것은 모두 환영에 불과하고, 이제 실재에 좀 더 가까이 있고 훨씬 더 실재적인 것으로 향하고 있어 훨씬 올바로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일종의 문답법의 방법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대답하게 한다.
교육이란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치 앞을 못 보는 눈에 시각을 넣어주듯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다.1) 눈이 어둠으로부터 밝음으로 나가려면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 않고는 안 되듯이, 영혼도 생성하는 세계로부터 존재하는 세계로 완전히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태를 "존재하는 것에 보다 더 접근하고 있다"라고 말한다.2) 해방된 사람은 이제 그림자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지만 아직 불빛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 상태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슬에서 벗어난 사람도 역시 '참된 것'을 잘못 알고 있다.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슬로부터 풀려난 것도 물론 일종의 해방이지만, 아직 실질적인 자유는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가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혼이 동굴 밖을 향해 전환하는 데에서 교육은 시작되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교육의 과정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동굴 밖의 태양: 형상과 철학교사론
'동굴 밖의 태양'에서는 궁극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좋음의 이데아와 그것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어떤 사람, 즉 참된 교사에 관해 논하고 있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누군가가 동굴 밖으로 나온 해방된 사람을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로 억지로 끌고 올라가 태양의 빛이 비추는 곳으로 갈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 빛에 이르게 되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어떤 것도 볼 수 없게 되지만 점차로 익숙해지면 태양 그 자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태양은 좋음의 이데아이며 진리 자체를 가리킨다. 진리를 인식하게 되면 완전히 해방될 수 있으며, 진정한 교육도 성취될 수 있다. 특히 사슬에서 막 해방된 수인에게 말을 거는 그 사람은 문답을 통해 가르치며, 진정한 인식을 하도록 이끌어주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참된 교사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동굴 안으로의 귀환: 사회와 이상교육
'동굴 안으로의 귀환'에서는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한 후에 다시 동굴로 귀환하는 사람이 겪게 되는 사회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굴의 비유에서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생각하지만, 동굴 안의 세계의 삶을 떠올리고 동굴 안의 동료들을 가엾게 여기게 된다.1) 그래서 그는 동굴 안으로 다시 귀환하지만, 어둠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다른 수인들로부터 조롱을 당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빛에 익숙해져 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의 사슬을 풀어주고 동굴 밖의 세계로 인도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해방시키려는 사람을 살해하려고 한다.2)
따라서 플라톤은 단지 좋음의 이데아, 즉 진리를 인식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플라톤은 교육의 과정에 이론적 지식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실천적 지혜를 익히는 것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진리를 인식한 사람들은 어두운 것에도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3) 그들은 번갈아가면서 동굴 안의 세계로 내려와 현실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일단 익숙해지면 동굴 안의 수인들보다 훨씬 잘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진리 자체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세계
플라톤의 교육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세계관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 세계 속에서 수많은 대상들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세계는 인간의 삶의 일차적인 조건이다. 인간은 세계를 통해 삶의 다양한 가치를 창출해낸다. 진정한 교육은 궁극적으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세계가 어떻게, 누구에 의해, 무엇으로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이야기'를 신화적 형식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항상 존재하고 생성되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또 항상 생성하고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기 위한 기준으로 우리의 두 가지 인식능력인 감각과 지성을 제시한다. 지성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항상 동일한 상태에 있으며 불변하지만, 감각에 의해 파악되는 것은 늘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에 있으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1) 이러한 전제를 기초로 플라톤의 세계 창조에 관한 설명을 살펴보면 이 세계를 두 가지로 구분하려는 의도가 뚜렷이 나타난다.
세계 형성의 기원과 목적
모든 창조된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원인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원인이 없다면 아무것도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가 시작이 있으며 창조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세계는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으며 또 형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
우선 우주는 아버지인 제작자(demiourgos)에 의해 만들어졌다. 제작자는 선하며(agathos) 선한 것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질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이 그 자신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 제작자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한 좋게 되기를 원했고 나쁘게 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가시적인 영역이 정지되지 않고 불규칙하고 무질서한 형태로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무질서한 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2)
플라톤은 제작자가 이 세계를 만들 때, 그 어떤 것을 본(paradeigma)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본은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자연물과 비슷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어떠한 것도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작자는 이 세계를 이성에 의해 파악된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려고 그와 유사한 성질들을 포함시켜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 세계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질서를 가지고 있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원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와 그것을 모방하여 만든 생성·소멸하는 현상의 세계는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가장 아름답고 좋게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여전히 감각에 의해서 파악되며 생성·소멸하기 때문이다.
세계 형성의 재료와 형태
플라톤은 이 세계가 수학적 또는 기하학적 원리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전제한다. 이 세계에서 창조된 것은 물질적이므로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다.1) 기본적으로 이 세계는 네 가지 요소들인 불·물·공기·흙으로 만들어졌다. 어떤 것도 불 없이는 볼 수가 없으며, 흙 없이는 아무것도 단단하지 못하므로 만질 수가 없다. 또한 불과 흙 사이에 물과 공기를 두어 서로 일정한 비율을 이루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이 세계의 형태가 요소들 간의 비례 관계로 인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사실 이 네 요소는 세계가 질서 있게 형성되기 전에는 기하학적인 입체를 구성하지 못한 무한정자(apeiron)의 상태였다. 그러나 수학적 비율에 의해 이 세계는 질서 있고 조화롭게 되어 친화력(philia)을 가지게 되었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또한 그 제작자 외에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세계는 해체될 수 없다고 한다.2)
제작자가 세계를 만든 의도는 다음과 같다.3) 첫째, 세계가 가능한 한 완전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최대한 살아있는 완전한 전체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둘째, 세계를 유일하게 만들어서 그것으로부터 다른 어떠한 것도 나가지 못하게 하여 다른 세계가 창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플라톤의 설명에 의하면 세계는 가장 완전하게 만들어지기 위해 중심에서 각 거리가 같도록 구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제작자는 세계의 형체를 만들기 전에 먼저 세계영혼을 만들었다. 이 영혼은 세계의 형체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므로, 그것을 지배하게 되었다. 플라톤이 세계영혼을 설정한 것은 이 세계가 살아서 움직인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인들은 영혼(psyche)이라는 말로 생명을 의미했고 이것은 살아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 세계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마치 천체의 운행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 세계영혼을 설정한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의 영혼의 경우에 이성이 다른 능력들을 지배하여 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처럼, 이 세계영혼의 경우에도 세계 속에 포함된 이성적 요소에 의해 세계가 비이성적이거나 우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운동한다고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플라톤이 이 세계가 영혼과 지성을 가진 살아있는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한 이유는 그것이 항상 질서 있고 규칙적으로 운행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연과 이성
세계가 창조될 때 제작자가 세계를 '가능한 한' 이데아와 유사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창조의 원인으로 '이성' 이외에 또 다른 원인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추론케 한다. 그것은 바로 필연(ananke)이다. 플라톤은 이것을 '방황하는 원인의 종류'라고도 부른다.1) 이 세계의 창조는 필연과 이성이 협동한 작업이다. 여기서 '필연'은 모든 인과관계의 결정적인 법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제작자 자신이 만들지 않은 어떤 무질서하고 비결정적인 힘으로 이성이 개입하기 이전의 물질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성은 가능한 한 세계가 '가장 좋은 것'으로 만들어지도록 하기 위해 필연을 '설득'한다. 그래서 필연이 이성에 의해 창조 작업에 참여하고 '보조원인'이라 불린다. 결국 이성은 필연을 설득하여 창조된 것들의 대부분을 완전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세계는 이성에 의한 합리적이며 질서 있고 조화로운 측면과 필연에 의한 비합리적이고 무질서하고 부조화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제작자는 창조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기뻐서 원형과 훨씬 더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다.1) 그러나 원형은 영원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 창조물에게 이러한 본성을 완전하게 부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작자는 '영원'의 움직이는 모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는 천체에 질서를 부여할 때 이 모상을 '수'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이것을 시간(chronos)이라고 부른다. 세계가 창조되면서 밤, 낮, 월, 년이 생겨났다. 그것들은 시간의 부분들이며, 과거와 미래는 시간의 하위 종(種)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영원한 존재를 잘못 모사하여 우리는 시간을 '있었다'(과거), 또는 '있다'(현재), 또는 '있을 것이다'(미래)라고 말한다. 그러나 '있다'만이 진리이며, '있었다'와 '있을 것이다'는 단지 시간의 생성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움직이지 않는 동일한 것'은 언제나 시간에 의해서 더 새롭게 되거나 낡게 되지 않는다. 또한 과거나 현재 또는 미래에 생길 것이라고 말해질 수도 없다. 나아가 움직이는 것들이나 감각적인 것들에게 영향을 받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전혀 지배될 수 없다. 이것이 시간의 형상이며, 시간은 영원을 모사하며 수의 법칙에 따라 운행된다. 시간의 원형은 영원이다. 세계는 모든 시간에 존재해 왔으며, 존재해 있고, 존재할 것이다.
공간(chora)은 세계를 제작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 없이는 어떠한 생성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수용하거나 보호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생성의 세 가지 요소로 첫째 '생성되고 있는 것', 둘째 '생성이 이루어지는 장소', 셋째 '생성물이 모방하는 대상'을 말한다. 여기서 첫째는 생성물로 불리며 자식에 비유되고, 둘째는 수용자로 불리며 어머니에 비유되고, 셋째는 형상이라 불리며 아버지에 비유된다. 수용자가 다양한 현상을 그 안에 받아들이려면, 그 자체는 어떠한 형태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생성된 것들의 어머니인 수용자는 흙도 불도 물도 공기도 아니며, 이것들의 복합체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형태도 없는 종류의 것으로 지성에 의해 파악되는 존재이다.
교육의 목적
세계 창조에 대한 플라톤의 '그럴듯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이 세계의 창조와 관련하여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세계를 가정하고 있다. 한 가지는 원형으로서 영원불멸하는 이데아의 세계이고, 다른 것은 제작자에 의해 모방된 생성의 세계이다.
둘째, 플라톤은 이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두 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 생성의 세계는 이성이 필연을 설득하여 이루어졌다. 우리는 여기서 이성에 의해 완전히 설득되어 질서와 조화를 이룬 합리적인 부분과, 설득되지 않은 무질서하고 조화롭지 못한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다는 가정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성이 필연을 완전히 설득시키는 것은 물질 자체가 갖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플라톤은 가능한 한 이성이 필연을 설복하여 질서 있고 조화로운 세계를 지향하기를 의도하고 있다.
셋째, 이성이 필연을 설득한다는 것은 강제가 아니라 협력 관계이다. 또한 설득이란 개념은 대상을 요구하는 개념으로 강제적으로 바꾸어간다는 개념이 아니라 필연에 속하는 본성을 잘 이용하여 협력 관계를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진정한 교육이란 우리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먼저 플라톤은 이 세계를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두 가지 인식 능력에 따라 먼저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세계, 즉 가시계(可視界)와 다음으로 지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세계, 즉 가지계(可知界)다. 그것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안의 세계와 동굴 밖의 세계로 구분된다. 교육은 동굴 안의 세계에서 동굴 밖의 세계로 고개를 돌리게 하는 것처럼, 생성 소멸하는 현상의 세계에서 영원불멸하는 실재의 세계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세계에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는 것처럼, 영혼에도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다. 최초에 제작자가 우주를 만들 때 이성에 의해 가능한 한 질서 있고 조화롭게 만든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 가능한 한 조화로운 상태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작자가 이 세계를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세계'로 만들기 위해 이성이 필연을 설득한다는 설명에서 우리는 현장 교육의 방법을 살펴볼 수 있다. 교육은 단순히 일방적인 주입식의 방법이 아니라 상호관계를 고려한 이해와 설득의 방법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우리는 영혼의 변화를 통해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인식하는 영혼의 본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 영혼의 본성
인간은 누구나 잘 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플라톤은 『국가』에서 가장 좋은 삶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가장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에게 자기 자신은 바로 영혼을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박하는 것들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주요 원인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진정한 교육은 우리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영혼이 무엇인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자.
영혼과 육체의 어원
플라톤은 『크라틸로스』에서 영혼과 육체의 어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영혼의 본성을 설명한다.1) 우선 영혼의 어원과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영혼은 육체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인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숨 쉬거나 되살아나는(anapsychon) 능력을 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영혼이 떠나는 순간 육체는 파괴되고 소멸된다. 둘째, 영혼은 신체의 본성(physis)을 운반하고 유지한다는 의미의 퓌세케(physeche)로부터 유래되었다.
다음으로 육체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플라톤은 이것들 중 세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육체(soma)는 영혼의 '무덤(sema)'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리하여 고대인들은 영혼이 현재의 삶에 묻혀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육체는 '영혼에 징후를 준다(semainei)'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영혼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육체를 통해 표시하기 때문이다.
셋째, 육체는 영혼이 죄의 처벌을 받을 때까지 안전하게 '보존해준다(sozetai)'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플라톤은 이것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여 육체는 영혼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머무르는 영혼의 감옥(soma)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오르페우스의 전통에 따라 영혼이 육체와 결합한 원인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찾아냈다. 즉, 영혼은 마치 지상의 나그네와 같이 죄의 처벌을 받을 때까지 수많은 육체를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
모든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전혀 다른 특성을 가졌다. 그러나 영혼은 태어나면서 육체와 결합하여 존재한다. 그것은 육체 속에서 본래 자신의 역할이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영혼은 가능한 한 육체나 육체적인 것과 멀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이것을 '죽음에의 연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살아있는 한 또는 죽기 직전까지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존재하며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플라톤은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상태를 '술에 취한 상태'나 '감옥에 갇힌 상태' 혹은 '못에 박힌 상태'에 비유하며 영혼이 육체로 인해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우선 '술 취한 것과 같은 영혼'은 영혼이 육체의 방해를 받아 술에 취한 것과 같이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1) 영혼은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시각이나 청각, 혹은 다른 어떤 감각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때 영혼이 감각을 통해 육체를 사용하게 되는데, 육체로 인해 영혼은 흔들리게 된다. 그래서 결국 영혼이 마치 술 취한 상태와 같이 방황하며 혼란을 일으켜 어질어질한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감옥 속에 있는 영혼'은 마치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서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2) 영혼은 육체라는 감옥 속에 꼼짝 없이 감금된 채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고찰한다. 인간의 욕망은 육체의 창을 완전히 가리게 만들어 결국 우리를 무지에 빠지게 만든다. 참된 철학자는 영혼이 자신을 해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한 쾌락과 욕망을 멀리 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지나치게 즐거워하거나 두려워할 때, 또는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욕심을 부리는 경우에는 욕망과 고통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지막으로 '못 박힌 영혼'은 영혼이 육체에 마치 못 박힌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3) 모든 쾌락이나 고통은 마치 못과 같아서 영혼을 육체로부터 떨어질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이런 영혼은 육체가 우기는 것을 바로 참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영혼은 육체로 인해 오염된 상태에서 이승을 떠나 저승에 갈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영혼은 다시 다른 육체 속으로 들어가서, 마치 씨가 뿌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속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플라톤은 살아있는 동안에 영혼이 육체와 너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면, 죽은 이후에도 육체를 떠나기 힘들다고 말한다.4) 하지만 영혼이 살아있을 때 가능한 한 육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면 육체를 떠날 때 아무런 육체의 흔적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항상 육체의 욕망이나 쾌락에 정신이 팔렸던 영혼이나, 오직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만이 진리라고 믿는 영혼은 더럽혀져서 순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영혼은 밤낮으로 육체만 염려하여 결국 육체적인 것에 매이게 된다. 유령들이 무덤가에서 배회하는 이유는 영혼이 깨끗이 육체를 떠나지 못하고 매여 있기 때문이다.
영혼의 구분
플라톤은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1) 첫째, 배우는 부분인 이성이다. 둘째, 격정을 느끼는 부분인 기개이다. 셋째, 여러 종류라서 명확하게 이름 붙이기는 어려우나 온갖 욕구들과 관련된 욕망이다. 그러나 영혼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의 육체와 여러 개의 영혼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세 부분들과 상응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2) 우선 이성은 언제나 진리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이 지배하는 사람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한다. 다음으로 기개는 무언가를 지배하고 승리하고 명성을 떨치려 하기 때문에 기개가 지배하는 사람은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욕망은 돈이나 재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욕망이 지배하는 사람은 이익을 탐하는 사람이라 한다.
플라톤은 영혼의 세 부분의 역학적 관계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영혼의 부분들을 괴물에 비유한다.3) 그것은 외모는 인간이지만 속은 괴물인 존재이다. 괴물은 여러 개의 머리들을 가진 '욕망'과 사자의 머리를 가진 '기개'와, 인간의 머리를 가진 '이성'으로 되어 있다. 영혼의 세 부분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욕망이 가장 크고 기개가 두 번째로 크고 이성은 가장 작다. 만약 우리가 이 세 가지 중에서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 같은 욕망과 사자 같은 기개를 배불리 먹이고 인간의 모습을 한 이성을 굶겨서 쇠약하게 만든다면, 이성은 욕망이나 기개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게 되며 결국 서로 싸우다가 잡아먹히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세 가지 중에서 이성을 가장 크고 강하게 키우고, 욕구가 가진 여러 개의 머리들 중에 유순한 머리는 길들이고 사나운 머리는 못 자라게 하고, 사자와 같은 기개를 이성의 협력자로 만들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나아가 영혼의 세 부분들 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쌍두마차에 비유하고 있다.4)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두 마리의 말과 한 사람의 마부로 이루어진 것으로 비유한다. 마부는 이성적인 영혼의 부분이며, 말들은 비이성적인 영혼의 부분들을 나타낸다. 비이성적인 영혼의 부분들인 두 마리 말들은 각기 다른 영혼의 특성을 나타낸다. 마부를 따르는 좋은 말은 용감한 영혼(기개)을 상징하고, 마부를 따르지 않는 나쁜 말은 충동적인 영혼(욕망)을 상징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이 세 측면이 잘 조화되어 이성적인 부분에 의해 통제될 수 있을 때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한다
영혼의 교육원리
인간에 관한 플라톤의 설명은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개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나 모든 운동과 변화의 원리인 영혼에 집중되고 있다. 영혼의 이성적 부분, 즉 '배우는 부분'은 교육과 특히 긴밀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어떻게 인간의 '배우는' 부분을 올바르게 훈련시켜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가는 교육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플라톤이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제안하고 있는 교육학적 원리는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첫째, '개인차'의 원리이다. 인간의 영혼은 각기 다른 특성을 보인다. 그래서 각 영혼의 상태에 따라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세 부분, 즉 이성·기개·욕망으로 나누고, 이에 상응하여 국가도 세 계급, 통치 계급·수호 계급·생산 계급으로 구분한다. 이 세 계급은 태어난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능력에 의해 분류된다. 각 개인은 서로 다양한 욕구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활동에 특히 적합한 소질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소질을 계발하고 촉진시켜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한다.
둘째, '자발성'의 원리이다. 플라톤의 교육목적은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각자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1) 플라톤은 교육이 결코 강제적으로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영혼은 어떠한 공부도 노예적으로 배우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강제적으로 배운 것은 어떤 것도 영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르칠 때에는 강제적으로 하기보다는 놀이하듯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2)
셋째, '모방'의 원리이다.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모방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학습 초기 단계에서의 모방 또는 동일시를 인정하고 중요한 원리로 보고 있다. 그래서 특히 나이가 어릴 때는 허용하지만 모방의 대상을 엄선하도록 강조한다. 만약 모방을 한다면 용감하고 절제 있고 경건하며 자유로운 사람들을 어릴 때부터 모방하도록 해야 한다. 모방이 오래 계속되면 습관이 되고 성격으로 굳어지게 되기 때문이다.3)
넷째, '놀이와 유희'의 원리이다. 플라톤은 놀이란 어린아이들의 본성을 지도할 때, 어린아이들의 본래적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활동'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예컨대 『법률』에서는 사과나 꽃다발을 분배하는 놀이를 통해 산술을 더 잘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한다.4) 그밖에 음악과 체조의 교육도 점점 조직적인 유희 형태로 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멋대로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지키며 놀이를 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참된 교사론
플라톤은 철학자(philosophos)란 누구인가를 정의하면서 우리에게 참된 교사상을 제시해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교사란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지혜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굴의 비유에서 지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지혜를 인식한 후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노력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모두 찾아볼 수 있었다. 단지 이론에서 끝나지 않고 실천하는 자로서 진정한 철학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모습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작품에 나오는 흥미로운 비유들을 통해 참된 교사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철학자의 천성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하며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사람으로 결코 스스로 포기하는 법이 없다. 플라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1)
첫째,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거짓도 결코 의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를 좋아한다. 따라서 젊어서부터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둘째,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오는 즐거움에는 관심이 없고, 영혼 자체의 즐거움에만 관심이 있다. 셋째,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삶에 초연하며, 모든 일에 편협하지 않으며 언제나 전체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그는 모든 것에 절제력이 있어서 심한 낭비벽을 보이거나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또한 비겁하지도 저속하지도 않고 허풍을 떨지도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선천적으로 기억력이 좋아 쉽게 배우는 자질을 타고났으며, 고상하고 정중한 기품을 가졌으며, 절도 있고 호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지혜와 정의와 용기 및 절제라는 덕을 갖추고 있다
철학자의 결단: 절름발이의 비유
나아가 플라톤은 철학에 종사하려는 사람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에 반쯤은 부지런하고 반쯤은 게으른 절름발이여서는 안 된다.1) 가령 어떤 사람이 체육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는 등 모든 신체의 훈련을 열심히 하지만, 배우거나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이러한 종류의 영혼의 훈련을 싫어하는 경우이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신체의 훈련이나 영혼의 훈련이 모두 철학을 탐구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이것들 중 어떤 것은 열심히 하고 어떤 것은 소홀히 하는 것은 온전하게 철학을 연구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학문에 대한 자신의 기호나 취향에 따라 편협하게 연구하는 자세를 비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을 하려는 사람은 진리를 배우는 데 최선을 다하며 편협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철학자의 자세: 전기가오리의 비유
플라톤은 『메논』에서 철학자의 자세에 대한 흥미로운 비유를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특유의 방식으로 대화 상대자인 메논에게 덕(arete)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해보라고 요구하자, 메논은 자신 있게 덕에 대한 수많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한다.1)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많은 사례들을 덕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공통된 특징을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메논은 처음과는 달리 궁지에 몰려 당황해하면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공격을 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누군가 공격할 의도가 있든지 또는 없든지 간에 자신을 곤경에 빠지게 하면 상대방에 대해 쉽게 분노하고 비난하게 된다. 더욱이 적절한 공격 방법이 없을 때 인신공격마저 서슴지 않는다.
메논의 경우도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듣고 곤경에 처하게 되자, 소크라테스에 대해 약간의 인신공격을 가하며 불평을 토로한다. 소크라테스가 외모나 다른 특성들을 볼 때 남을 마비시키는 넓적한 전기가오리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전기가오리가 자신에게 접근하거나 접촉하는 것을 마비시키는 것처럼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영혼도 입도 모두 마비시켜 버렸다고 불평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만약 그 전기가오리가 스스로 마비되면서 다른 것들을 그렇게 마비시킨다면 자신이 전기가오리를 닮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난관을 벗어날 길을 알고 다른 사람들을 난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난관에 빠져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난관에 빠뜨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메논에게 같이 탐구를 하자고 제의한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철학하는 사람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배제하고 처음부터 서로 대화를 통해 탐구하는 태도이다. 단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앎도 새로운 차원에서 배우는 자와 함께 철저히 검토하고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철학자의 의무: 동굴의 비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동굴 안의 사람이 동굴 밖의 세계에서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해 나아간다.1) 그 사람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동료 죄수들을 생각해내고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게 되고, 다시 동굴 안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마치 우리가 갑자기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면 잘 보이지 않아 더듬거리는 것처럼, 그는 동굴 안의 세계에 바로 적응이 되지 않아 동굴 안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오히려 현실적인 물정에 어두운 사람으로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동굴 밖으로 나아가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없다고 주장하게 되고, 자신들을 풀어주어 동굴 밖으로 인도하려는 사람을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우선 동굴 안의 어둠에 익숙해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동굴 안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아름다운 것들과 좋은 것들과 관련하여 참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진리를 인식한 사람은 단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이 인식한 것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즉, 철학자는 단지 진리를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리를 실천해 나아가야 한다
철학자의 사명: 등에의 비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 아테네 시민들에게 재물을 늘리고 명예를 얻는 데만 관심을 쏟고 진리를 인식하고 영혼을 돌보는 데는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충고한다.1) 그는 사람들을 일단 세 부류, 즉 재물을 구하는 자, 명예를 구하는 자, 진리를 구하는 자로 구분한다. 만일 누군가 재물이나 명예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소홀히 취급하고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만 중시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재물로 인해 사람이 훌륭해지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훌륭하여 재물과 다른 좋은 것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자신의 영혼이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돌보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재물이나 명예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설득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자신을 사람들이 졸음에서 깨어나도록 하루 종일 어느 곳에서나 각성시키고 설득하며 반박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사람들은 선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화를 내고 경솔하게 자신을 죽이려 들지 모르나,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졸면서 지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 자신은 등에처럼 사람들에게 들러 붙어서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설득하고, 비록 남에게 귀찮게 여겨지고 심지어 미움을 사게 되더라도 자신의 소명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등에에 비유한 이야기에서 철학자가 지향해야 할 모습과 사명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철학을 가르치는 자는 진리를 사랑하며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그가 자신의 영혼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이나 명예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끝까지 일깨우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남에게 미움을 받게 되더라도 고난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참된 교사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하도록 도와주는 데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한다
철학자에 대한 오해: 키잡이의 비유
플라톤은 한 사회에서 철학자들이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이유를 키잡이의 비유를 들어 해명하고 있다.1) 배의 주인(대중)은 몸집이나 힘에 있어 배에 탄 다른 모든 사람보다 월등하다. 그러나 그는 귀도 잘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눈도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항해에 관해서도 대충 알고 있다. 선원들(대중 선동가들)은 서로 키잡이를 하여 배를 조정하겠다고 싸우나, 사실 그들은 그러한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그것을 가르칠 선생도 없다. 그들은 배의 주인을 에워싸고는 자신에게 키를 맡겨달라고 온갖 짓을 한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배의 주인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기라도 하면 그들을 죽여버리거나 배 밖으로 던져버린다. 그런 후에 배의 주인에게 최면제를 먹이거나 술에 취하게 하여 꼼짝도 못하게 만들고 자신들이 배를 지휘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를 지휘하는 데 도와주려는 사람은 항해술과 조타술에 유능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더욱이 그들은 참된 키잡이가 한 해와 계절, 하늘과 별들, 바람들과 같이 항해를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며, 남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러한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점성가나 수다쟁이 또는 쓸모없는 사람이라 부른다. 이 비유를 통해서 플라톤은 철학자들이 한 사회에서 존경을 받지 않는 일이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존경을 받는 것이 훨씬 더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철학을 가르치는 참된 교사와 거짓 교사: 짐승의 비유
플라톤은 참된 교사와 거짓 교사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1) 거짓 교사는 보수를 요구하며 대중의 신념과 다른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거짓 교사와 대중과의 관계는 '짐승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가령 거짓 교사는 크고 힘센 짐승(대중)의 기분이나 욕구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어떻게 접근해야 하고, 어떻게 붙잡아야 하는지,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사나워지는지 혹은 온순해지는지를 오랜 세월 동안 그 짐승과 함께 살면서 터득한다.
그 후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터득한 짐승의 기분이나 욕구를 지혜라고 부르며 전문적 지식으로 체계화하여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신념들과 욕망들 가운데 어느 것이 진실로 훌륭한 것인지 수치스러운 것인지, 혹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또는 올바른 것인지 올바르지 못한 것인지를 전혀 모른다. 단지 짐승이 기뻐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 부르고 짜증내는 것은 나쁜 것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이것에 대해 아무런 이유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며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이 '지혜를 사랑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며,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중으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필연적이다. 철학적 천성을 타고난 사람들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어 결국 철학을 떠나게 된다. 만약 훌륭한 성향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철학에 이끌리더라도, 거짓 교사들이나 지도자들은 온갖 수단과 협박을 동원해서 굴복시키고 결국 갖가지 음모와 송사를 일으킬 것이다. 만약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과 능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면 국가나 국민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해줄 수도 있으나, 반대로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면 국가와 국민들에게 가장 큰 해를 입힐 수도 있다.2)
그래서 철학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철학을 떠나 자신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반면에 철학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 철학에 접근하여 철학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갖가지 비난을 받게 만든다. 그들은 마치 감옥에서 탈출하여 신전으로 도망친 사람들처럼, 껑충껑충 뛰어들어가 자신들의 자질구레한 기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철학자인 체하며 거들먹거린다.3)
그러나 참된 교사는 대중에게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과 대조되는 아름다움 자체를 가르친다. 그는 영원히 실재하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사소한 상황들과 싸우면서 질투와 증오로 가득 찰 여유가 없다. 오히려 항상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관조하며, 서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행하거나 당하는 일이 없이 모두가 질서 있고 이성에 따른 것들을 본받으며 최대한 닮으려고 노력하는 데 전념한다. 그래서 신적인 질서와 연관된 지혜를 사랑하는 자, 즉 철학자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 절도 있고 신과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4) 플라톤은 진정한 교사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진리만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의 영혼들을 보살피고 '가장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진리의 인식
우리가 이 세계에서 인식해야 할 궁극적 대상은 '진리'이다. 플라톤에게 진리는 마치 태양처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비추어주는 인식의 '원천'이다. 동굴의 비유에서도 동굴 안의 수인이 동굴 밖으로 나와 바라보는 세계는 태양에 의해 비추어지는 세계이다. 만일 태양이 빛의 원천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비록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태양은 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궁극적인 원인이다.
그것은 바로 이데아들 중의 최고의 이데아로 때로는 좋음의 이데아로, 때로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로, 때로는 참의 이데아로 나타난다. 만약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진리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최고의 이데아는 철학적 방법에 의해 훈련을 받아 일정한 단계들을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인식의 단계에 따라 교육의 단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당시 그리스의 유명한 교사들인 소피스트의 교육방법과 플라톤의 교육방법을 비교하여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이 적절한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인식의 원천: 태양의 비유
플라톤은 최고의 이데아로서 좋음의 이데아 또는 '좋음 자체(auto to agathon)'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태양의 비유를 끌어들인다.1) 그것은 그리스 철학의 주요 문제인 하나(一)와 여럿(多)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개별적인 것들에는 하나의 이데아가 있다. 개별적인 것들은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지성에 알려지지는 않는 반면에, 이데아는 지성에 알려지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들은 '가시적(可視的)인 것들'이라 불리고,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들은 '가지적(可知的)인 것들'이라 불린다.
우선 우리는 가시적인 것들을 시각에 의해 본다. 그러나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는 시각 외에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시각은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빛'이며, 이 빛의 원인은 바로 태양이다. 플라톤은 바로 이 태양을 '좋음의 이데아'와 유비적으로 생각한다. 즉, '좋음의 이데아'가 가지적 영역에서 지성과 가지적인 것들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태양이 가시적인 영역에서 시각과 가시적인 것들에 대해 갖는다. 만약 태양이 비추지 않는다면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좋음의 이데아'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인식능력을 주는 것"이라고 선언한다.2) 그것은 진리의 원인으로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다. 마치 태양이 보이는 것들을 볼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것처럼,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인식대상과 능력: 선분의 비유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에 이어 선분의 비유를 통해 인식대상과 능력을 구별하고 있다.1) 인식대상들이 '가시적인' 것들(ta horata)과 '가지적인' 것들(to noeta)로 구분되는 것처럼, 이에 따라 인식상태는 가시적인 대상을 지각하여 얻은 억견(doxa)과 가지적인 대상을 인식하여 얻은 지성에 의한 앎(noesis)으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유비적으로 같은 비율로 나누어진 선분으로 설명되며, 이 선분은 인식대상들의 상대적인 명확성과 불명확성에 따라 서로 다른 비율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가시적인 것들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한 부분은 그림자나 상과 같은 영상이고, 다른 부분은 동식물 및 일체의 인공물들이다. 다음으로 가지적인 것들도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한 부분은 도형이나 홀·짝수와 같은 수학적인 것들이며, 다른 부분은 이데아나 형상들이다. 전자는 가정이나 전제(hypothesis)에서 원리가 아닌 결론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탐구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후자는 어떠한 가정이나 전제도 없는 원리로 나아가서 어떠한 감각적인 것도 사용하지 않고, 단지 형상들만을 사용하여 탐구한다.
이에 따라 영혼 안에 일어나는 인식의 상태도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인 이데아나 형상에 대해서는 지성에 의한 앎(noesis)이, 둘째 부분인 수학적인 것에 대해서는 추론적 사고(dianoia)가, 셋째 부분인 동식물 및 일체의 인공물들에 대해서는 믿음(pistis)이, 마지막 부분인 영상에 대해서는 상상(eikasia)이 속한다.
인식의 과정: 동굴의 비유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및 동굴의 비유는 상호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다. 동굴의 비유는 다른 두 비유들에 나타나는 인식의 대상과 과정에 대한 주제를 통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으로 동굴의 비유는 태양의 비유와 유비적인 관계에 있다. 시각은 앎으로, 보는 것은 아는 것으로, 보는 능력은 앎의 능력으로 해석된다. 또한 시각의 근원인 태양은 존재와 진리의 원천인 '좋음의 이데아'를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의 궁극적 대상이다.
다른 한편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유비적인 관계에 있다. 첫째, 동굴 안의 수인이 그림자를 지각하는 단계는 '상상'의 단계이며 둘째, 사슬에서 풀린 수인이 고개를 돌리는 부분에서는 어둠 속에서 이제까지 보였던 것보다 실제적으로 훨씬 명료한 것을 보는 단계로 '믿음'의 단계이다. 셋째, 해방된 수인은 동굴 안의 어둠에서 벗어나 동굴 밖의 빛 속에서 현상을 보는 단계로 '추론적 사고'의 단계이다. 넷째, 동굴 밖에서 빛의 근원인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는 단계로 '지성에 의한 앎'의 단계이다.
인식의 단계: 에로스의 변증법
플라톤은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인식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향연』에서도 우리가 에로스를 통해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하기 위한 몇 가지 인식단계들을 소개하고 있다. 에로스의 변증법을 알아보기 전에 우선 에로스의 본성을 살펴보자.
첫째,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중간자이다.1) 그것은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으며, 그것들 사이에 있는 중간적인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아름다움 자체를 목표로 한다. 둘째, 에로스는 가사적인 것과 불사적인 것의 중간자이다.2) 즉, 그는 인간과 신의 중간자로서 '다이몬(daimon)'이라고 불린다. 에로스는 신이 아니다. 신들은 모두 행복하고 아름답다. 그렇지만 에로스는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 다이몬은 신들에게 인간들이 전하는 기도와 제물을 전달하고, 인간들에게 신들이 전하는 그들의 뜻과 제물에 대한 응답을 해석해주고 전달한다. 그리하여 신과 인간의 중간에 존재하면서 이 우주 전체를 결합시켜주는 능력을 가진다.
셋째, 에로스는 지혜와 무지의 중간자이다.3) 어떠한 신도 지혜를 추구하거나 지혜로워지기를 욕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들은 이미 지혜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혜를 추구하지 않는다. 사실 지혜를 가지지 않은 사람만이 지혜를 추구한다. 그러나 아예 무지한 사람도 지혜를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지는 실제로는 전혀 아름답지도 좋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아주 아름답고 좋으며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불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이 아무것도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지도 욕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 즉 철학자가 지혜로운 자도 아니고 무지한 자도 아니라면 누구라고 할 수 있는가? 이들은 지혜와 무지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다.
궁극적으로 에로스는 '아름다움 자체', 즉 진리 자체를 인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플라톤은 에로스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를 통해 아름다움 자체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한다.4)
첫째, '육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단계'는 하나의 육체로부터 여러 육체로 나아가 모든 육체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결국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나의 육체에 지나치게 애착하는 것은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경멸하게 된다. 둘째, '영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단계'는 영혼의 아름다움이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는다. 만약 아직 육체의 꽃을 피우지 못해 매력적이지 않을지라도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돌보며,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는 대화를 자주 나눌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아름다움이 다른 모든 아름다움과 같은 종류임을 깨달아 결국 육체적 아름다움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셋째, '학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단계'는 이제는 개별적인 것에 있는 아름다움을 쳐다보지 않는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면서 수많은 아름답고 훌륭한 이야기들과 심오한 사상을 낳게 된다. 넷째, '아름다움 자체를 사랑하는 단계'는 이러한 순서로 올바르게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 본성적으로 아름다운 것, 즉 아름다움 자체를 바라보게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플라톤은 우리가 인식해야 할 궁극적인 대상인 아름다움 자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5) 아름다움 자체는 영원하며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아름답고 부분적으로는 추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은 어떤 때에는 아름답고, 다른 때는 추한 것이 아니며, 어떤 곳에서는 아름답고 다른 곳에서는 추한 것도 아니다. 또한 어떤 측면에서 보면 아름답고 다른 측면에서 보면 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고 다른 사람에게는 추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독립적인 것으로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져도 줄거나 늘지 않고,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동일한 전체로 남아 있다.
이 세상의 개개의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저 아름다움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되, 마치 사다리를 올라가듯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아름다운 일과 활동에로 나아가고 이로부터 아름다운 학문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움 자체로 나아가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를 직관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아름다움 자체를 직관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된다.
우리는 에로스의 인도로 각 단계들을 차례로 올바르게 올라가면 아름다움 자체, 즉 진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요, 언제 어디서나 또 누구에게나 항상 아름다운 것이다. 이러한 에로스의 발전 단계는 매 단계마다 선행하는 단계를 전제로 하여 궁극적인 아름다움 자체로 나아가게 된다. 인식단계에 관한 세 가지 비유와 에로스의 변증법적 발전 단계는 교육과정의 단계와 상관관계를 갖기 때문에 교육과정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교육단계
플라톤은 이상적인 교육단계를 연령별로 여섯 시기로 나누어 그 교육내용을 제시하고 있다.1) 제1기는 출생에서 17세가 될 때까지로, 기초적인 훈련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시가(詩歌)와 체육을 가르치게 되는데 개개인의 소질을 알아보기 위해 강제로 하지 않도록 하고 놀이 삼아 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제2기는 17세부터 20세까지로 체육과 군사적 훈련에 전념하는 시기이다. 운동은 각자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데 좋은 방법이다. 운동을 배우는 목적은 이 시기 이후에 어려운 공부를 해낼 수 있도록 강인한 영혼과 육체를 기르는 데 있다.
제3기는 20세부터 30세까지로 철학의 예비 교과인 산술·기하학·천문학·화성학 등을 연구한다. 우리는 예비 교과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각 교과의 본질과 상호관계를 파악하고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예비 교과들은 철학을 연구하는 데 기초가 된다.
제4기는 30세부터 35세까지로 변증론(dialectike), 즉 좁은 의미의 철학을 연구하는 시기이다. 철학은 아무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변증론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에 국한한다. 그들은 올바르고 훌륭한 것들을 존중하며 절제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플라톤은 특히 청년들이 처음에 논변의 맛을 보게 되면 마치 놀이처럼 늘 남을 반박하는 데 남용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들은 자기들을 논박한 사람들을 흉내 내 스스로 남들을 논박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걸려드는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논변에 끌어들여 조각조각 찢어버리며 강아지처럼 즐거워한다. 그리하여 철학과 이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논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견실한 사람으로 적합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2)
제5기는 36세부터 50세까지로 이 시기는 동굴의 비유에서 다시 동굴로 귀환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실천적으로 전쟁에 나가 지휘도 해 보고, 그 나이에 적절한 관직도 맡아야 한다. 그래서 경험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도록 하며, 여러 가지 유혹을 겪고도 굳건한지, 또는 흔들리거나 빗나가는지를 시험해봐야 한다.
제6기는 50세 이후로 영혼의 눈을 위로 들어 모든 것에 빛을 비추는 것을 주시하여 좋음의 이데아를 본다면, 그것을 본(paradeigma)으로 삼아 국가와 국민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올바르게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철학을 연구하는 데 보내다가, 정해진 순서가 되면 국가에 봉사한다. 그리고 또 다른 세대들을 자신들과 같이 교육시켜 국가의 수호자로서 남긴 후에 축복받은 자들의 섬으로 가서 살게 된다.
플라톤이 제시하고 있는 교육과정의 단계는 인식단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식단계에 따른 각 시기의 교육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제1·2기는 시가와 체육 교육을 통해 영혼과 육체를 단련하여 훌륭한 품성과 건전한 견해를 형성시키며, 나중에 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자유롭게 준비하는 단계이다. 이 시기는 상상과 억견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제3기는 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예비적으로 다양한 개별 학문을 연구하는 단계로, 이 시기의 인식상태는 추론적 사고의 단계이다. 제4기는 철학을 연구하는 단계로 인식의 단계는 지성의 단계이다.
플라톤의 모든 교육과정은 인식의 단계에 따라 빈틈없이 설계되어 서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각 단계는 그 선행되는 단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각 단계를 필수적으로 모두 이수해야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플라톤은 이러한 교육과정을 제시하며, 이것은 어렵긴 하지만 결코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인식단계와 교육단계
구분 | 선분의 비유 | 동굴의 비유 | 에로스 | 교육 시기 | 교육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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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 상상(eikasia) | 동굴 안의 수인이 그림자를 지각하는 단계 | 육체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단계 | 출생~19세 | 문예와 체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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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 믿음(pistis) | 사슬에서 풀린 수인이 고개를 돌려 지각하는 단계 | 영혼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단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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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 추론적 사고(dianoia) | 해방된 수인이 동굴 밖으로 나와 현상을 보는 단계 | 지적인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단계 | 20~29세 | 철학의 예비 과목(산술·기하학·천문학·화성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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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 지성(noesis) | 동굴 밖의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는 단계 | 미 자체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단계 | 30~35세 | 변증론(협의의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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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단계와 교육단계
교육방법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은 다양한 분과학문들 중의 특정 과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학문' 전체를 총괄하는 말이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철학이라는 명칭에서 자연학·형이상학·천체학·생물학·문학·예술·체육·종교·윤리학·정치학·경제학 등 모든 학문 분야를 연구했다. 따라서 근대 이후와 학문과는 달리 철학은 '학문'의 의미로 통합학문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은 '지혜(sophia)'를 '사랑하다(philein)'는 말이다. 플라톤은 '사랑하다'는 말로 철학의 본질적 특성과 목표를 보여주고 있다.
철학은 끊임없이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며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소피스트(sophistes)의 이름은 '지혜를 가진 자(sophos)'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철학자가 끊임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피스트는 이미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다. 원래 소피스트는 자신이 지혜를 가르친다고 하지만 참된 인식 또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못해 현실에 적당히 비위 맞추고 지식을 사고파는 상인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것은 원래의 의미와 거리가 먼 '똑똑함' 또는 '영리함'을 가르치는 궤변론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소피스트: 지식의 판매상
당대에 유명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가 아테네에 오자,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가 소크라테스에게 프로타고라스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 데에 함께 가자고 조른다. 소크라테스는 히포크라테스가 몹시 들떠서 프로타고라스를 만나기를 열망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충고하려고 한다. 그는 우선 히포크라테스에게 프로타고라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서 그에게 무슨 수를 내서라도 배우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프로타고라스가 소피스트이며 소피스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자신의 영혼을 떠맡기려고 한다고 질책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가 영혼에 무엇이 좋은지 또는 나쁜지도 모르면서 아무것이나 파는 상인이라고 하며, 소피스트가 파는 지식이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피스트란 영혼의 음식을 도매하거나 소매하는 자라고 말한다.1) 영혼은 교육에 의해 자라게 된다. 소피스트들은 마치 도매상이나 소매상이 신체에 필요한 음식을 팔기 위해 선전하는 것처럼 자신의 상품을 선전하고 다니는데 이것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팔러 다니는 것들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판다. 이러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상품이 영혼에 좋은지 혹은 나쁜지를 알지 못하는데, 영혼을 돌보는 데 전문가가 아닌 바에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 상품이 영혼에 좋고 나쁜지를 안다면 프로타고라스이든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들로부터 안전하게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도박에 거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지식을 사들인다는 것이 음식을 사들이는 것보다 훨씬 위험이 크다. 왜냐하면 우리가 판매상으로부터 음식을 살 때는,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시기 전에 먼저 그것을 장바구니에 넣고 집으로 가지고 돌아오게 된다. 그 후에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셔도 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또 얼마만큼 먹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 먹어야 하는지를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을 구입하는 것 자체는 그다지 커다란 위험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식의 경우에는 장바구니에 넣어 가져올 수 없다. 그것을 배우면 돈을 지불하고 즉각 우리의 영혼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 다음에는 그것이 이롭든 해롭든 간에 떠나야 한다.
궤변술: 모상을 만드는 기술
소피스트의 궤변술(sophistike)은 모든 일에 대한 말싸움에 있어서 충분한 능력으로 보이는 기술이지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소피스트는 실제로 진리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모든 것에 관한 진짜 지식이 아니라 단지 지식으로 보이는 가짜 지식을 갖고 있는 자이다.1) 또한 소피스트란 하나의 기술에 의해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약속하는 사람이다.
가령 그가 그림을 그리는 기술에 의해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생각이 미숙한 아이들에게 멀리서 그림들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실제로 모두 만들어낼 수 있다고 속이는 사람이다.2) 마찬가지로 소피스트는 말에 의한 모상(eidola legomena)을 만들어 그것을 참된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젊은이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기가 모든 사람들 중에서 모든 점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기술을 가진 자이다.3) 따라서 우리는 소피스트의 기술을 모상을 만드는 기술(eidolopoike)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놓아야 할 것이다.
수사술: 믿음을 제공하는 설득의 기술
플라톤은 『메논』에서 직업적으로 덕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소피스트로 알려진 사람일 것이라고 한다.1)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수사술(rhetorike)이라고 한다. "수사학은 설득하는 기술이다."2) 그러나 설득은 수사술의 전유물은 아니다. 모든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설득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사술이 하는 설득이 어떤 종류의 설득이며, 무엇에 관한 설득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두 종류의 설득을 구분한다.3) 하나는 앎 없이 믿음(pistis)만 제공하는 설득이고, 다른 하나는 앎(episteme)을 제공하는 설득이다. 후자는 설득의 과정이 곧 배움(mathesis)의 과정이다. 그러나 수사술은 앎이 없이 믿음만 제공하는 설득이라고 규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앎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앎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을 발휘한다.4)
수사술은 일종의 아첨술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대상의 좋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앎이 되지 못하고 단지 일종의 경험이나 짐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사용할 때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는 수사술이 기술이라는 사실조차 부인한다. 그는 아무런 설명(logos)을 하지 못하는 것을 기술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5)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기술이 그것이 적용될 대상에 왜 좋은지를 가장 좋은 것에 비추어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수사술은 기술이 아니라 '비위 맞추기'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는 영혼과 신체에 모두 좋은 상태가 있다고 하며,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또는 아닌지는 전문가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비위 맞추기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단지 즐거운 것을 짐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리술과 의술에 비유하여 설명될 수 있다. 의술은 신체에 가장 좋은 것을 제공하지만, 요리술은 신체에 즐거운 것을 제공한다. 그래서 요리술은 단지 짐작에 불과하며 앎이 아니기 때문에 단지 신체에 즐거운 것만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수사술은 참된 기술이 아니라 단지 사이비 기술 또는 비위 맞추기에 불과하다.
철학의 교육방법
플라톤의 교육방법은 소피스트와 달리 좋음의 이데아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지혜나 진리를 인식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교육방법들 중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방법들인 산파술, 변증술, 가설의 방법을 설명해 보자.
산파술: 정신적인 산파
플라톤은 앎에 관한 정의를 논하면서, 특히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다. 플라톤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름붙인 영혼의 산파술은 그의 삶의 방식과 연관된 독특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초기 대화편에서 산파술은 소크라테스가 문답을 통해 많이 사용하던 방법이다. 이것은 『테아이테토스』에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1)
산파역을 하는 사람은 만약 자신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그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산파역은 어린아이를 더는 낳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 맡게 된다. 그렇지만 아이를 한 번도 낳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을 도울 수 없다. 그래서 산파가 해야 하는 가장 큰 역할은 산모가 낳으려는 아이가 상상인지, 아니면 진짜인지를 알아내어, 진짜 아이를 낳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육체의 출산을 돕는 산파가 자신이 직접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영혼의 출산을 돕는 산파도 자신이 직접 지혜를 낳을 수는 없다고 한다. 산모와 마찬가지로 지혜를 낳으려는 사람은 그 산파로부터 직접 지식을 주입받아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훌륭한 것들을 출산하는 것이다. 산파는 단지 그 일을 도와주는 것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낳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진통의 과정을 산모가 아이를 낳으려고 할 때 겪는 진통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초기 소크라테스의 방법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즉, 그것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지로 드러났을 때, 갑작스러운 혼란 상태, 즉 '아포리아'에 빠지는 상태이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메논』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서 메논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의해 덕을 정의하는 데 실패하여 아포리아에 빠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진통의 과정을 겪은 후에, 소크라테스(산파)와 메논(산모)은 지혜(아이)를 낳기 위해 공동의 탐구를 시작한다.
플라톤은 논박에 의해 아포리아에 빠졌을 때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논』에서는 상기(anamnesis)설을,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산파술을 활용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을 통해 가르치려는 자가 배우는 자에게 직접적으로 지식을 주입하고 전수하는 형식이 아니라, 문답을 통해서 강한 동기를 유발시켜 스스로 진리를 발견해내도록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산파술이 문답법과 연관을 갖고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기 위해 대상 인원의 제한이 문제가 되나, 교수·학습의 일반 원리에 적용되어 쓰인다면, 이 방법의 효과를 최대한 발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산파술
구분 | 일반적 산파 | 철학적 산파 |
주체 | 직접 아이를 낳을 수 없음 | 직접 지혜를 낳을 수 있음 |
대상 | 임산부 | 학생 |
전제 | 아이를 가지고 있음 | 지혜를 가지고 있음 |
역할 | 아이를 낳도록 도와줌 | 지혜를 낳도록 도와줌 |
과정 | 진통 | 자신의 무지에 대한 혼란 상태 |
결과 | 아이 출산 | 지혜 산출 |
변증술
플라톤은 변증술(dialektike)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초기 대화편에 나오는 문답법과 후기 대화편에 나오는 변증술이다. 문답법은 역사적 소크라테스에 의해 직접 사용되었지만 플라톤은 이 방법을 차용하여 그의 대화편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문답법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기본적인 문답법의 절차를 찾아낼 수 있다. 특히 『메논』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첫째,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존 개념의 정의를 시도한다. 둘째, 기존 개념의 정의를 하는 데 실패한다. 그것은 개별적 사례들로부터 보편적 정의에 이르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대화자는 무지를 자각하게 된다. 셋째, 무지를 자각한 후에 진리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유발되어 질문자와 응답자 양측이 공동의 탐구 작업으로 들어간다. 넷째, 이러한 탐구는 결론 없이 끝난다. 문답법의 주요 요소로는 귀납적 추리·보편적 정의·산파술·논박 등이다.
첫째, '귀납적 추리'는 구체적인 개별 사실들을 일일이 기술하여 보편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귀납법의 의의는 그가 수용한 경험적 사실들이 그의 사유의 토대가 되며, 더욱이 그 자신이 이러한 경험적 인식방법의 한계를 알고 있었으므로,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둘째, '보편적 정의'의 일반적 형식은 '~은 무엇인가?'이다. 이것은 무지를 자각시키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대화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방은 질문에 대해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므로 그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한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그 여러 가지 것들을 바로 그것이게 해주는 것이 그 질문이 요구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즉, 이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은 ~이다'라는 형식을 가져야 보편적 정의라 할 수 있다.
셋째, '산파술'은 문답법의 내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서, 대화 상대방이 자기 스스로 지혜를 산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누군가 진리를 낳으려고 한다면 산파는 진리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는 이미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넷째, '논박'은 대화 상대방에게 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여 그 개념을 정의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개별적인 경험적 사실이나 일반적 견해를 열거하는 상대방에게 보편적 정의를 요구하여 대화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산파술과 연결되어서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형식이 된다. 플라톤의 문답법은 초기 대화편들에서 대화 상대자들이 가진 허위의식과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 영혼을 정화하는 효과를 얻는다. 이후 중기와 후기 대화편에 나오는 변증술은 본격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훈련이라 할 수 있다.
변증술
플라톤은 각 사물의 본질을 설명해낼 수 있는 사람을 변증술에 능한 사람이라고 한다.1) 변증술에는 두 가지 절차가 있다. 그것은 상승의 길인 '모음'과 하강의 길인 '나눔'이다. 방법적 절차에 따르면 먼저 모음(synagoge)이 나눔(diairesis)에 선행되어 여러 개로 흩어져 있는 것을 하나로 모아, 가정이 없는 궁극적 원리로 올라가 좋음의 이데아를 파악한다. 그 후에 이것에 의존해 있는 것을 가지고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후의 종에 이르기까지 내려가서 형상들만을 이용하여 형상을 통해 형상에서 끝난다.
『소피스트』를 보면, 나눔의 과정은 유적 형상을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후의 종들에 이르기까지 나누는 것이다. 여기서는 같은 형상을 다른 형상으로 취급하거나, 다른 형상을 같은 형상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2) 또한 모음의 과정은 각각 떨어져 있는 많은 것들에 널리 퍼져 있는 하나의 형상과 그것에 의해 포괄되는 서로 다른 많은 형상들을 분명하게 식별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에 의해 종을 구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여러 가지 종들이 결합될 수 있고 또 결합될 수 없는가를 아는 것을 말한다.3)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나눔과 모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고, 본성적으로 하나이면서 여럿인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을 변증술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4) 『필레보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변증술을 항상 사랑하는 사람(erastes)이라고 밝히며,5) 변증술이 "신들이 인간에게 준 선물"로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사람을 통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우리보다 훨씬 더 훌륭하며 신들과 훨씬 더 가까이 살았던 옛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6) 일상적으로 우리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와 여럿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정된 것과 한정되지 않는 것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각 경우에 항상 모든 것에 대해 하나의 이데아가 있다고 생각하고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변증술을 배우기 위한 예비 과정의 교과로 산술·기하학·천문학·화성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한다. 각 예비 과목은 생성하는 세계의 감각적인 것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고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 즉 변증론의 연구 대상인 좋음의 이데아를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술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젊은이에게 너무 빨리 가르치면, 말장난을 일삼게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철저한 준비 과정이 끝난 30세부터 35세까지 변증술을 집중적으로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인식론·형이상학·윤리학·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변증술을 사용하여 진리를 인식하려고 한다.
인식론에 있어서 인식의 네 단계는 각기 분리되어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단계는 다음 단계를 향한 디딤돌이 되어 변증론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미학에 있어서도 에로스는 육체·영혼·학문·아름다움 자체라는 네 단계로 발전되어 가고, 각 단계는 다음 단계를 전제로 하여 궁극적인 아름다움 자체로 나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변증술은 플라톤에게 학문하는 참된 방법으로 여러 가지 탐구에 적용되고 있다.
가설의 방법: 제2의 항해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가설(hypothesis)의 방법은 특별히 생성과 소멸을 이루는 원인에 대한 탐구에서 난관에 부딪혔을 때 새로운 방식으로 탐구하기 위해 채택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산파술에 이어 중기 대화편에 나오는 중요한 철학적 방법론 중의 하나이다. 가설의 방법은 가설 자체를 진리로 놓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논박에 의해 정당하게 입증되면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거부하는 것으로, 그것의 진위 판단에 의하여 그 방법의 본래적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앎을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가설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1) 그는 존재의 진정한 원인에 대한 모든 탐구가 실패로 돌아가고, 아무한테서도 그것을 배울 수 없게 되어서 이 원인을 찾아 제2의 항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어떤 것 속에 비친 태양의 영상을 관찰하지 않고 일식 상태의 태양을 직접 관찰한다면 눈을 버리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으로 직접 사물을 관찰하여서 다른 감각 기관들로 그것을 파악하려 할 때, 영혼의 눈이 멀 수가 있다.
플라톤은 가설의 방법을 사용하는 절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경우마다 가장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원칙(logos)을 가정하고, 그와 일치되는 것은 참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2) 만약 어떤 사람이 가설 자체에만 매여 있다면, 가설과 그것의 결론이 상호 일관성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그에 대한 대답을 보류한다. 그리고 그 가설을 입증하게 될 때까지 마음에 드는 좀 더 나은 가설이 있더라도 만족스러운 것에 도달할 때까지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3) 여기서 말하는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란 모든 존재의 원인인 '좋음의 이데아'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설이 없는 상태로 모든 가설적인 것은 이것을 지향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가설의 방법의 절차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원칙을 가설로 둔다. 둘째, 그 가설이 다른 지식 또는 사실들과 모순이 되는지 또는 그렇지 않는지를 알아본다. 셋째, 이 가설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러한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넷째, 모든 것이 지향하는 좋음의 이데아에 도달하면 이 가설은 완전하게 된다.
『국가』 제6권에도 가설의 방법이 특별하게 적용된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플라톤은 여기서 기하학자들이 채택한 절차와 변증술을 대조시키고 있다. 기하학자들은 홀수와 짝수, 여러 가지 종류의 도형과 세 가지 종류의 각들, 그리고 그 외 학문의 다른 과목에서 이와 유사한 것들을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을 가정으로 삼는다. 그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자명한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그것들에 관해 더 이상의 설명을 그들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기하학자들은 이러한 제1원리들로부터 시작하여 나머지 여러 단계들을 거쳐 일관되게 결론을 내린다.4)
반면에 변증술은 가정이 없는 원리(arche anypothetos)를 목표로 삼고 탐구한다. 이를 위해 오직 형상들 자체만을 이용하여 탐구한다.5) 여기서 모든 것의 첫 번째 원리는 좋음의 이데아로 모든 존재하는 것의 궁극적 목적이다. 그리하여 변증술은 감각(aisthesis)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로고스만을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향해 출발한다. 그리하여 지성에 의해 이해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탐구하려 할 때 좋음의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6)
플라톤은 기하학자가 분석에 의해 도달한 소위 원리로부터 하나의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자가 사물의 본성으로 돌아가 모든 진리를 분석할 수 있고, 참으로 궁극적인 원리로 돌아가 모든 사물을 분석할 수 있으며, 또한 사물의 분석이 가설적 방법에 의하여 성취될 수 있기를 바란 것으로 보인다.7) 궁극적으로 플라톤에게 최선의 학문 인식방법은 변증술이지만, 이것이 좌절되었을 때 차선책으로 가설의 방법이 상정된다.
사회와 이상교육
진정한 교육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담고 있다.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의 수인은 교육을 통해 동굴 밖의 세계로 나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결국 태양으로 비유되는 최고의 이데아를 인식한다. 하지만 이것이 진리를 향한 여정의 종착지는 아니다. 그는 반드시 다시 동굴 안으로 귀환해야 한다. 사실 이미 진리를 인식한 사람들은 다시 동굴 안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은 동굴 안으로의 귀환이 일종의 사회적 의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진리를 인식한 사람은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는 동굴 밖의 빛 속에서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이익이고 행복일 수 있지만, 국가적으로는 그가 동굴 밖에서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통치하는 것이 이익이고 행복이다. 개인의 관조적 삶과 실천적 삶 사이에서 플라톤은 때로는 전자에 때로는 후자에 무게를 두지만 궁극적으로 개인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천적 삶의 국가는 이상교육을 통해 특정한 개인이나 계층의 행복이 아닌 국가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이 있다.
국가와 정치의 목적
궁극적으로 플라톤은 현실에 나타나는 국가들을 토대로 가장 완전한 국가의 모습을 그의 『국가』에서 그려내고 있다. 그 국가는 이상적인 것이므로 현존하지는 않지만, 현실을 개혁해 나아가는 하나의 본 또는 기준으로서 구상되어 있다.
국가의 기원
플라톤은 국가의 기원을 '필요'에 두고 있다.1) 국가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구성원들이 각자 자급자족하지 못하고 서로 많은 것을 부족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사람들이 서로 많은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서로 협력자와 보조자로서 한 지역에 여럿이 함께 모여 살게 된다. 이것을 국가라고 부른다. 즉, 국가는 우리의 필요에서 나온다.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의식주이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제각기 다른 소질을 갖고 있으며, 자연히 각자에게 적합한 일이 있다. 따라서 각 사람이 자신의 소질에 맞는 일을 하게 될 때 훨씬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 그래서 각자가 자기 적성에 맞게 '분업'하여 생산해낸 것들을 '교환'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충족될 수 있다
국가의 구성과 조건
국가의 목적은 국가의 어느 한 집단이나 계층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최대한 행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1) 그러나 국가에는 여러 계층이 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능력을 타고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가장 적합한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교육이라는 적절한 절차를 통해 각자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은 사회 구조의 원칙으로서 정의를 규정하고 있다. 정의란 '각자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와 개인의 영혼 둘 다에 해당된다. 국가에서의 정의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이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할 때 이루어지며, 한편 개인에서의 정의는 영혼의 세 부분인 이성·기개·욕구가 조화를 이룰 때 이루어진다. 플라톤은 훌륭한 국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 즉 지혜·용기·절제·정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지혜는 통치자 계층에게 필요한 덕이다.2) 국가의 부분적인 것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와 관련하여 대내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 잘 경영할 수 있는가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지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바로 통치술 또는 수호술(phylakike)이다. 이러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완벽한 수호자라 불리는 '통치자들(archontes)'이다. 이들은 다른 계층에 비해 소수에 불과한 최소 집단이다.
둘째, 용기는 수호자 계층에 필요한 덕이다.3) 용기(andreia)는 두려워할 것에 대한 소신이나 억견을 언제나 보전(soteria)해주는 능력이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입법자가 교육을 통해 이미 지시한 것들이나 혹은 이와 비슷한 유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고통스러울 때나 즐거울 때나, 또는 욕망에 차 있을 때나 공포에 빠질 때에도 이를 버리지 않고 굳건하게 보전하는 것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염색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초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며 용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염색을 하려면 사전에 철저하게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한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통해 염색을 하게 되면 어떤 세제를 써도 물이 쉽게 빠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교육을 할 때에도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면, 적절한 교육이 잘 물들여져 어떠한 강력한 고통이나 공포 또는 욕망도 이것을 탈색시키지 못할 것이다. 플라톤은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지속적으로 잘 보존하는 능력을 '용기'라 부른다.
셋째, 절제는 생산자 계층에 필요한 덕이다.4) 절제(sophrosyne)는 일종의 질서요, 어떤 쾌락과 욕망의 억제이다. 사람들은 절제와 관련하여 '자기 자신을 이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영혼과 관련하여 인간 자신 안에는 보다 나은 성향과 보다 못한 성향이 있어, 만약 전자의 성향이 후자의 성향을 이기는 경우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자의 성향이 후자의 성향에게 지는 경우에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진다'라고 말하며 '무절제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플라톤은 특히 절제를 매우 강조했다. 용기나 지혜는 국가의 어느 한 계층에만 있어도 용기 있는 국가나 지혜로운 국가로 불리겠지만, 절제는 국가의 모든 계층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화성의 비유'를 통해 절제는 협화음(symphonia)이나 화성(harmonia)과 유사하다고 한다.5) 절제는 전 국가의 모든 국민들이 적절하게 가지고 있어서, 마치 가장 약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가장 강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 그리고 중간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같은 노래를 합창하는 것과 같다.
넷째, 정의는 특정 계층에 해당되는 덕이 아니다.6) 정의는 각자가 자기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에서 자기의 성향이 천성적으로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일에 종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제각기 자신의 일을 하고 자신의 것을 소유하는 것이 정의이다. 그래서 동일한 계층에 있는 사람들이나 또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고유한 일을 하지 않고 남의 일을 하거나 또는 개입하게 될 때 국가는 커다란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가령 목수가 제화공의 일을 또는 제화공이 목수의 일을 하려고 하거나, 혹은 이들이 서로의 도구나 직분을 바꾸어 하게 된다면, 더욱이 동일한 사람이 이 양쪽의 일을 다 하려고 한다면 국가에 커다란 해를 입힐 것이다. 또한 생산자 계층의 사람이 수호자 계층이나 통치자 계층의 일을 하려고 하거나, 혹은 이들이 서로의 도구나 직분을 바꾸어 하게 된다면, 더욱이 동일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하려고 한다면 국가에 파멸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래서 올바름이란 국가의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상국가의 특징
플라톤은 『국가』 제5권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의 특징을 설명할 순서가 되었을 때 논의를 더 이상 진행시키는 것을 매우 꺼리고 있다. 사실 플라톤은 당시 사회적 관습에 반해서 매우 혁신적인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상국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밝혔다가 앞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받게 될 여러 가지 오해를 걱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몇 차례나 논의를 계속하기를 사양하다가 제자들의 끈질긴 권유로 어쩔 수 없이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가 이상국가의 일반적 특징으로 제안한 것은 바로 '공유제'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논의의 어려움을 '파도'에 비유하고 있다. 첫 번째 파도는 여성 수호자와 교육 문제이고, 두 번째 파도는 처자의 공유 문제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파도는 이러한 문제들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이 논의하기 어렵게 생각하던 이러한 문제들과 이상국가의 다른 특징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
남녀평등
플라톤은 당시 사회적 관습에 반해서 매우 혁신적인 구상을 했다. 당시 그리스 사회는 가부장제 사회로 여성의 지위가 매우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남녀가 모든 일을 공동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1) 사람들은 '정의'에 입각하여, 각자가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만약 남자의 성향과 여자의 성향이 다르다면, 당연히 그 성향에 따라 다르게 일을 맡겨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여기서 말하는 다른 성향과 같은 성향의 종류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그러한 구분을 하는지에 대해 검토하자고 제안한다.
남녀를 동등하게 취급해야 하는 이유는 '대머리와 장발의 비유'를 통해 쉽게 설명되고 있다.2) 가령 대머리인 사람들과 장발인 사람들의 성향이나 능력이 전혀 다른 것이라 해보자. 만약 그렇다면 대머리인 사람들이 제화공 노릇을 할 경우에 장발인 사람은 그것을 못할 것이고, 이와 반대로 장발인 사람들이 제화공 노릇을 할 경우에 대머리인 사람들이 그것을 못할 것이다. 플라톤은 만약 이렇게 가정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우스워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같음과 다름을 '일 자체'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머리와 장발처럼 남자와 여자는 모습에서만 다를 뿐이지, 일 자체에서 다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가령 남자 의사나 여자 의사나 영혼의 성향이나 능력은 같다. 따라서 만약 남녀가 어떠한 기술과 업무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면, 각 성에 따라 각기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남녀의 차이란 여성은 출산하고 남성은 출산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유로 남자와 여자가 업무에 있어 다른 일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3)
결국 플라톤은 여자가 단지 남자보다 약간 약하다는 것 말고는 양자 간의 근본적인 성향의 차이는 없다고 주장한다.4) 통치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가 해야 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여러 가지 성향들이 양자에 모두 비슷하게 흩어져 있어, 모든 일에 여자나 남자나 자신의 성향에 따라 관여할 뿐이다. 모든 남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여자들도 각자 자신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일을 한다. 가령 어떤 여자는 의술에 능하나 다른 여자는 그렇지 못할 것이고, 또한 어떤 여자는 시가에 능하고 다른 여자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 어떤 여자는 지혜를 사랑하나 다른 여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고, 또한 어떤 여자는 격정적이나 다른 여자는 소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녀는 같은 일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도 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플라톤은 '반쪽의 비유'를 통해 남녀의 교육이 동등하게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5)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능력을 계발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모두 동일한 목적을 가지지 않고 동일한 활동에 자신들의 에너지를 쏟지 못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왜냐하면 이런 국가는 반쪽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입법자의 실수 중에서 가장 큰 것일 거라고 한다. 입법자는 어디까지나 인간 전체를 문제 삼아야지, 결코 그 절반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여성도 교육이나 다른 모든 것에서 남성과 동일한 혜택을 받아야 한다. 여성이 국가 전체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인생의 절반의 행복만을 받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처자 공유와 재산 공유
플라톤은 이상국가에서는 모든 것이 공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 및 아내를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유재산도 모두 포함된다. 모든 남자들과 모든 여자들은 서로 공유하게 되어 있고, 어떤 여자도 어떤 남자와 개인적으로 동거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아이들도 모두 공유하게 되어 있으며, 부모와 아이들이 서로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을 막기 위한 것이며 남녀의 무차별적인 성적 자유를 위한 것은 아니다. 이상국가에서 남녀가 서로 무질서하게 성적 관계를 갖는 것은 경건하지도 않으며, 통치자들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플라톤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혼인과 출산에 있어서 우생학적인 원리를 주장하고 있다.2) 말하자면 최선의 남자들은 최선의 여자들과 자주 성적 관계를 가져서 가장 우수한 아이들을 많이 얻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혼인과 출산을 제한하는 데 상당한 반발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혼인이 통치자에 의한 정교한 추첨제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3) 플라톤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단순히 이상적인 목적에 부합된 인간을 많이 출산하려는 목적에서 나왔다. 남녀의 혼인과 출산의 적령기는 여자는 20~40세이고, 남자는 25~55세이다.4) 이때는 남녀가 모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절정기에 있다. 그래서 이들보다 나이가 더 많거나 나이가 더 적은 사람이 출산을 하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이 시기가 지난 후에, 즉 여자는 40세, 남자는 50세 이후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나면 자유로운 결혼 생활을 허용하고 있다.
플라톤은 처자 공유제뿐만이 아니라 재산 공유제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수호자와 통치자 계층은 주택이나 토지 또는 소유물 등과 같은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없으며, 오히려 생활비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아서 모두 공동으로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몸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유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특징들이 수호·통치 계층에는 해당된다고 명시했지만,5) 이러한 체제가 생산 계층까지 해당된다는 명확한 언급은 없다.
플라톤은 한 국가의 국민들은 최대한의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6) 한 국가의 국민들은 최대한 서로 비슷하게 모든 일에 함께 즐거워하며 괴로워해야 국가가 단결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일부 사람들은 매우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들은 매우 괴로워하면 국가는 해체될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상국가가 유기체적인 공동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손가락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7) 가령 한 사람이 손가락을 다쳤을 때 영혼에 이르기까지 온몸이 하나의 유기체로 되어 있어, 다친 손가락만 아픈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가 동시에 함께 아프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장 훌륭하게 다스려지는 국가도 어떤 시민이 고통을 겪으면 그가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국가도 고통을 겪는다. 국가는 온 국민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괴로워하게 된다.
플라톤은 공유제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8)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부모와 형제로 인식하게 되어 서로를 타인들로 생각하지 않고, 서로 공경하고 순종하며 우애를 지킬 것이다.9) 그래서 국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분열 상태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들을 '내 것'과 '네 것'을 따로 구분하지 않아 함께 나누어 가지며, 모든 일에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재물이나 아이들 및 친족들의 소유로 인해 분쟁을 하거나 소송을 일으키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또한 그들 간에 강제 행위나 폭행으로 인한 소송도 없으며, 서로 난폭해지거나 모욕을 주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게 될 것이다.
철인 왕에 의한 지배
통치에 관해 『국가』와 『법률』은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국가』는 철인 왕에 의한 지배이고, 『법률』은 법에 의한 지배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법에 의한 지배는 이상적인 통치자가 없을 때 실시되는 차선의 방법이라고 한다. 이상적인 통치자를 가진 국가는 법에 의해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각자의 상황에 맞게 통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 통치자를 갖고 있지 않거나, 선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법에 복종해야 한다. 철인 왕에 의한 지배는 시의적절하게 그리고 융통성 있게 각 상황을 처리해 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법에 의한 지배는 그렇지 못하고 일률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을 것이다.
『정치가』에서 플라톤은 법은 가장 좋은 것과 가장 올바른 것을 정확히 파악하여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지시할 수는 없다고 한다.1) 입법가는 정확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을 정할 수 있기 때문에 대강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을 법으로 제정한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이란 일단 정해지면 그 자체로 변하기도 힘들고 유연성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 적절하게 적용되기 힘들다.
따라서 『정치가』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통치술은 상황에 따라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그때마다 지시하는 법률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지성과 기술에 의해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통치한다.2) 그러나 현실적으로 완전한 교육에 의해 이상적인 완전한 통치자가 나타나 가장 적절하게 지배한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기원은 인간의 필요 욕구에서 나온다. 국가는 이것을 보완하고 충족시켜주려고 성립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성립을 단지 욕구 충족의 측면에서만 논한다면, 이것은 플라톤 자신이 추구하던 완전한 국가의 모습을 구현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조화된 인간을 동물적인 차원에로까지 끌어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또 다른 측면, 즉 이성적·도덕적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제도로서 교육제도를 선택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 전반에 걸쳐 그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면에서도 나타난다. 플라톤은 단지 법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덕을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로서 '교육'을 선택하고 있다.
정치 교육의 목표
플라톤에게 한 국가의 시민 교육은 국가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덕들과 연관된다. 그것은 바로 정의(dike)와 수치(aidos)이다.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에게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를 묻자, 프로타고라스는 국가와 관련하여 '잘 숙고할 수 있는 능력(euboulia)'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1)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를 통해 국가의 구성과 존립을 위한 인간의 덕에 관해 흥미로운 신화를 제시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모든 동물들은 에피메테우스에 의해 생존을 위한 능력을 나누어 받게 되나, 인간만이 아무 능력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아테나와 헤파이스토스 작업장에서 불과 기술을 가져다주어 인간이 생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간들은 흩어져 살면서 다른 짐승들의 공격을 받게 되어 위험에 처하고, 모여 살게 되면 서로 불의를 저지르게 되어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
결국 제우스는 인간이 멸종할 것이 두려워 헤르메스에게 모든 인간에게 정치적 덕들인 정의와 수치를 가져다주도록 한다.2) 그리하여 이것들을 통해 국가 안에는 질서(kosmos)가 인간들 간에는 사랑(philia)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덕들인 정의와 수치는 자연적으로 얻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획득한 사람들이 가르침(didakton)과 돌봄(epimeleia)에 의해 얻게 되는 것이다.3) 시민들은 공동선이나 공동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기술을 가진 사람이다.
이상교육
플라톤은 국가를 통치자 계층·수호자 계층·생산자 계층으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사실 각 계층에 따라 교육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국가』에 보면, 통치자 계층과 수호자 계층의 통제된 교육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내용이 제시되고 있지만, 생산자 계층의 교육에 관해서는 거의 제시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플라톤은 유아와 청소년 교육에 관해 말할 때, 분명히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향해 말하고 있다.
국가는 어느 한쪽 계층만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계층이 똑같이 가능한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다. 플라톤이 농부·장인·상인 등과 같은 생산자 계층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은 것이 그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논의는 아무 근거 없는 주장이다.1) 플라톤은 국가가 통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큼 수호자나 생산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통치자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다룬 이유는 국가의 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위해 통치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호자 계층의 교육은 사실상 통치자 계층의 교육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왜냐하면 각 교육단계에서 정밀한 관찰을 통해 다음 교육을 받을 사람들이 선발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모든 시민들이 교육을 받은 후에 생산자 계층이 선발되고, 다음으로 수호자 계층이 선발되며, 마지막으로 통치자 계층이 선발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플라톤의 전체 교육과정은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먼저 전통적인 그리스의 교육내용인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받는다. 다음으로 철학의 예비 과목인 산술·기하학·천문학·화성학을 연구한다. 마지막으로 최종 과정인 변증론을 연구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먼저 시기별로 좀 더 세분화하여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때까지의 평생 교육의 과정을 크게 태교, 어린이 교육, 청소년 및 성인 교육으로 구분한다. 실제로 『국가』의 주요 교육 프로그램은 시기적으로 청소년과 성인 교육에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실제로 교육의 적용과 관련하여, 플라톤의 작품들인 『메논』과 『에우튀데모스』를 구체적인 사례로 삼아 교육에서의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두 가지 계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자.
어린이 교육
플라톤은 모든 동물 중에서 어린이가 가장 다루기가 어렵다고 한다.1) 왜냐하면 어린이는 아직 이성적 능력이 올바른 방향으로 자라나지 않아 분별이 없어 교활하고 예민하며 가장 말을 듣지 않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아주 많이 통제되고 제어되어야 한다. 처음에 어린이가 어머니나 유모의 손을 떠나면 어리석고 무지하기 때문에 교사가 돌보도록 해야 한다. 교사는 다양한 과목을 가르쳐야 한다. 만약 어린이가 올바르게 행동하면 작은 신사처럼 대우를 해주어야 하고, 만약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면 반드시 처벌해야 하고 마치 노예처럼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유아의 감정과 표현
플라톤은 유아의 감정을 알아내고 적절하게 훈련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1) 유아는 밤낮으로 잘 돌보며, 운동을 시키는 것이 좋다. 유아는 어릴수록 더 많은 운동이 필요하다. 특히 플라톤은 유아를 팔에 안고 노래를 부르며 일정하게 흔들어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유아는 가능하면 마치 바다 위에서 파도에 의해 언제나 흔들리는 배에 타고 있는 것처럼 되면 좋다. 그렇지 않으면 가능하면 이와 가장 유사한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만일 외부의 변화에 감정이 잘 적응되면, 내부의 파동을 진정시켜 영혼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공포와 두려움과 같이 우리를 괴롭히는 감정을 능히 이기는 습관을 붙이면 이것이 바로 용기를 기르는 방법이 된다. 유아가 무엇을 보여주었을 때 잠자코 있으면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고, 울거나 소리를 지르면 싫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쾌와 불쾌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 우리는 유아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유아의 시기가 3년은 족히 된다고 한다.
태교와 조기 교육의 중요성
플라톤은 태교와 조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 일반적으로 참된 생활은 결코 쾌락을 구하는 데 있지 않고, 또 전혀 고통 없이 사는 것도 아니며, 그 중간 상태를 취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온화하고 인자한 생활이며 신의 은총으로 생각된다. 신성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중용의 습성이 몸에 배도록 하고 무턱대고 쾌락을 위해 안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쾌락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쾌락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특히 갓난아기의 경우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릴 때는 타인의 습성에 물들기 쉽기 때문이다. 더욱이 플라톤은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약간 망설이면서 태교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임신한 여자는 언행을 조심하고 지나친 쾌락이나 고통을 피해야 하며, 특히 임신한 동안에 사람들에게 온화한 마음으로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하는 수양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규칙 준수와 체벌의 필요성
플라톤은 『법률』에서 어린아이들이 규칙을 준수하는 훈련을 해야 하며 적당한 체벌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
그것은 항상 동일한 것을 좋아하고 변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을 갖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어린아이가 4~7세가 되면 제멋대로 놀지 못하도록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아이에게 체벌이 필요하지만 결코 창피를 주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놀이 습관은 나중에 법률 준수와 연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놀이가 잘 변하고 자주 새로워지면 동일한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옛것은 모두 멸시하게 하고 새것만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플라톤은 악을 시정하는 경우 외에는 어떠한 변화도 해롭다고 주장한다.
『국가』에서도 플라톤은 아이들이 처음부터 올바르게 놀이를 시작하게 하여 시가를 통해 훌륭한 법질서(eunomia)를 받아들이면 모든 면에서 훌륭한 법질서가 생길 것이라고 한다
청소년 및 성인 교육
플라톤은 어린이와 청소년기의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그들의 태도와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1)
더구나 어릴 때의 모방은 점차 습관이 되어 제2의 천성이 될 수 있다.2)
그래서 플라톤은 그리스인들이 전통적으로 교육받아 온 서사시의 내용들을 비판한다.
특히 신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비종교적이고 비도덕적인 내용들은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호메로스는 제우스가 인간에게 행운과 불운을 섞어주는 존재라고 하지만, 플라톤은 신은 선한 존재이며 악이 아니라 선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또한 호메로스는 제우스가 아가멤논에게 거짓 꿈을 보냈다고 하지만, 플라톤은 신은 언제나 모습이 변하지 않는 진실한 존재라고 반박한다.3)
플라톤이 전통적 서사시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은 주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아직 분별력이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제한된다.
시가 교육
그리스어에서 무시케(mousike)는 오늘날 학문과 예술을 포괄하는 말로 교양 교육 또는 시민 교육을 가리킨다. 그러나 흔히 그것은 시가(詩歌)로 번역된다. 당시에 글쓰기가 시의 형식으로 쓰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가 교육은 근본적으로 영혼을 위한 교육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시가의 리듬과 화음(harmonia)은 영혼의 내면에 가장 깊숙이 들어가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는다.1) 만약 어떤 사람이 올바르게 교육받는다면 고상한 사람이 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이와 반대의 사람이 될 것이다.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아름다운 것들을 칭찬하고 즐거워하며, 이를 영혼 속에 받아들여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유를 알기도 전에 이미 추한 것들을 비난하고 싫어하다가, 나중에 이유를 알게 될 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시가 교육의 목적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끝나야 한다.2)
체육 교육
플라톤은 영혼을 위한 교육만이 아니라 신체를 위한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체육은 신체를 위한 교육으로 어릴 적부터 제대로 받을 필요가 있다. 더욱이 어느 한 시기에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평생 배워야 한다.
그러나 신체를 지나치게 돌보는 것은 오히려 영혼을 돌보는 데 방해가 된다.1)
체육 교육은 특히 기개(thymos)의 측면과 관련하여 중요하다.
만일 체육 교육만 전적으로 받으면 지나치게 사나워지며, 시가 교육만 전적으로 받으면 지나치게 유약해질 것이다. 영혼을 위한 시가 교육과 신체를 위한 체육 교육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특히 신체의 건강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절제이다.
만일 신체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건강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에 의해 욕망을 적절히 조절해야 할 것이다.
예비 과목
플라톤은 기초 단계의 교육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변증론, 좁은 의미의 철학을 연구하기 전에 필요한 예비 과목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그것들은 산술·기하학·천문학·화성학 등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도대체 왜 이러한 학문들이 철학을 공부하는 데 예비 과목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것들이 철학의 궁극적인 대상인 최고의 이데아, 즉 항상 동일하고 영원불멸하는 특성을 가진 것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첫째, 플라톤은 국가를 잘 다스려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요구되는 학문의 하나로 산술을 들고 있다.1) 산술은 계산을 잘하고 추론을 잘하는 이성적 능력과 관련 있기 때문에, 철학자가 생성에서 벗어나 본질을 파악하는 데 필요하다. 그래서 국가의 중대한 일을 할 사람들에게 산술을 익혀 지성에 의해서 수의 본성을 고찰할 수 있게 하면, 영혼 자체를 생성에서 진리와 본질로 방향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둘째, 기하학은 좋음의 이데아를 한층 쉽게 볼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목이다.2) 그것은 '언제나 있는 것'에 관한 앎이며,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것에 대한 앎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을 진리로 이끄는 것으로, 현재 우리가 올바르지 않고 아래로 향하고 있는 철학적 사고를 위로 향하도록 만들어준다.
셋째, 천문학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위로 향하게 한다.3) 이제까지 다른 활동으로 인해 눈이 멀어 버린 영혼의 어떤 기관이 천문학을 통해서 순수화되어 제 기능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지성이다. 우리는 지성에 의해서만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천문학은 오히려 천문의 대상을 감각에 의해 연구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는 천문학을 연구할 때 눈과 같이 감각이 아닌 '지성'에 의해 배우려고 노력해야 본질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넷째, 화성학도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탐구하는 데 유용하다.4) 그러나 만일 화성학이 당시의 천문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단지 귀로 들을 수 있는 협화음들에 있는 수(數)들을 찾는데 그친다면 본래적인 탐구 목적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수들이 협화음들이고 어떤 것들이 아닌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각각의 경우가 그러한지를 고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변증론
변증론 이전의 모든 과목은 예비 학문에 불과하다. 모든 학문은 변증론에서 완성된다. 모든 감각을 사용하지 않고 이성(logos)을 통해 각각의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방법을 찾으려 시도하는 사람은 지성(noesis)에 의해 좋음의 이데아의 본성을 파악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아야 한다.
플라톤은 변증론을 연구하기까지의 다른 모든 학문들을 거치는 과정을 동굴의 비유와 유비적으로 설명한다.1)
앞서 말한 예비 학문들은 결박에서 풀려난 수인이 동굴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실재하는 대상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수인이 인식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비추어주는 인식의 원천인 태양으로 비유되는 '좋음의 이데아'이다. 그것은 변증론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적 사례: 가르침과 배움
플라톤이 실제로 대화편에서 '교육'을 실현하는 방식을 어떻게 언급했는지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특히 『메논』에서 '가르침'과 '배움'과 관련된 주제로 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화 자체가 교육의 본질적인 활동인 가르침과 배움을 이론화시키고 체계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천적 사례로서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가 이 대화편을 이끌어가는 주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선결 문제인 "덕은 무엇인가?"를 논의하자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메논은 '덕'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많이 들어 설명하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것들은 덕 자체가 아니라며 정의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결국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소크라테스는 공동의 탐구를 제안하게 된다.
여기서 소위 '메논의 역설'이라 불리는 부분이 소개된다. 그것은 사람은 만약 자기가 알고 있는 경우에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으므로 탐구할 필요가 없으며, 만약 자기가 모르고 있는 경우에는 탐구할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탐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알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도 탐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1) 이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영혼 불멸설과 영혼 윤회설을 전제로 하는 상기설을 내세운다. 말하자면 '배움'이란 상기(anamnesis)의 일종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앎은 이미 전생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영혼은 불멸할 뿐만 아니라 여러 번 태어나고 여기 지상뿐만 아니라 하데스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영혼이 배우지 않는 것은 없네."2) 만약 우리가 완전히 아는 것을 배우는 것도, 전혀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도 아니라면 이전에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상기해 낸 것들은 바로 전생에서 이미 알았던 것이다. 만약 영혼 윤회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전생에서의 앎'을 단순히 '이전에 이미 알고 있던 것'에 대한 신화적 설명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노예 소년을 가르치는 내용은 실제로 수학이나 기하학과 같이 논리적으로 추론해내면 알 수 있는 종류의 지식이다. 따라서 반드시 전생이라 하지 않더라도 이전에 주요 개념이나 전제를 알고 있으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상기설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노예소년을 데려다가 교수·학습의 과정을 시범으로 보여준다. 이 노예 소년과의 교수·학습의 과정을 잘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나타나 있다.
첫째, 대화를 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그 노예 소년이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가를 질문하고, 그것을 대화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 그 질문은 단순히 그리스어를 사용하여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에게 던져질 질문들에 사용될 중요한 언어적 표현들(점, 선, 사각형 등)의 언어 게임을 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사실상 올바른 '상기'를 하는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3)
둘째, 대화를 진행해가는 방식에 있어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노예 소년은 단지 자기 생각에 의해 '예' 또는 '아니요'라는 대답을 해 나간다. 소크라테스는 직접 해답을 가르쳐주지 않고, 배우는 자가 스스로 해답을 산출해내도록 하는 산파술의 방법을 쓰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으로 교육을 진행해 나가려면, 가르치는 자는 미리 문제에 대한 선행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를 기초로 단계적인 질문들을 통해 올바른 해답에 이르도록 교수 계획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메논의 역설 이전에 전기가오리의 비유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요청하던 공동의 무지 상태를 사실상 거부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대화의 내용면에 있어 플라톤이 소재로 삼은 것은 기하학이다. 그것은 분석명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논리나 추론에 의해 이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종합명제로 이루어진 경험 과학적인 내용은 어떻게 이러한 형식의 문답, 즉 '예' 또는 '아니요' 식의 대답만이 요구되는 질문에 의해 가르쳐질 수 있는가는 문제가 있다.
넷째, 대화 진행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우선 질문하는 자는 대답하는 자에게 대답하는 사람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어떤 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그렇게 되면 대답하는 사람은 매우 당황하게 되어 올바른 대답을 알려고 하는 동기가 유발된다. 질문하는 자는 계속된 문답을 통해 대답하는 사람 자신이 그 해답을 상기해내도록 도와주어 마침내 그러한 결과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메논』에서 산파술과 동시에 상기설을 도입하여 앎의 방법과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자면 소크라테스는 가설에 의한 방법을 통해 '덕을 가르칠 수 있는지'를 알아본다. 가설에 따르면 덕(arete)은 앎(episteme)일지도 모르며, 앎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도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정하면 덕이 앎인지 또는 아닌지를 고찰해야 한다.4) 덕은 좋은 것(agathon)이다. 좋은 것은 유익한 것이다. 그래서 덕은 유익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앎이다. 따라서 덕은 앎이다. 덕이 앎이라면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다. 따라서 덕은 가르쳐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덕이 가르쳐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5)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만약 덕이 앎이라면 가르쳐질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가르칠 교사와 배우는 학생이 있어야 한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나 페리클레스 같은 사람들은 덕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덕을 자식들에게 가르치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덕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아니다. 따라서 덕은 앎이 아니며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다시 덕은 앎이 아니라 올바른 견해일지 모른다고 주장한다.6) 만약 어떤 사람이 라리사(Larissa: 그리스 동부, 테살리아 지방에 있는 도시) 혹은 어떤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을 알고 또 다른 사람을 그 길로 올바르게 안내할 수 있다면, 그 점에서 그것에 대한 앎을 가진 사람과 동일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견해'는 앎과 달리 인간의 영혼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늘 달아나 버린다. 따라서 그것들은 크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앎이 올바른 견해보다 가치가 있다.7)
우리의 행위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으로 앎과 올바른 견해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앎'이 이미 부정되었다. 그러므로 덕은 올바른 견해라고 한다. 이러한 가설의 방법에 의해 진행되어온 논의가 적절하다면, 소크라테스는 덕은 타고난 것도 아니요, 또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결국 신의 섭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8)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는 궁극적으로 덕이 진정한 의미의 앎일 때 진정한 교사도 있고 덕이 가르쳐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을 마치며
플라톤의 철학은 마치 교육의 현장을 연출하는 듯하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에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 수많은 다른 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진리를 향한 여정을 하도록 그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로 되어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가 되고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가 되는 실천적인 공간이다. 플라톤 자신은 말에 비해 글이 가진 한계를 철저하게 인정하고 있다. 글은 기억을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하여 쉽게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들지 못하며 기억력도 떨어뜨린다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플라톤이 남긴 대화편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에게 철학을 이론적으로 가르치려 들지만은 않는다. 플라톤 자신이 대화편 속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철학함을 보여주고 있다. 때때로 플라톤은 우리에게 진리를 향해 나가도록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아버지처럼 그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미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자세히 조언한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은 단지 논리의 힘으로 이성을 납득시키려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성으로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실천적으로는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바로 그의 영혼 전체를 설득해야 한다.
플라톤의 철학은 항상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동굴의 비유와 같이 우리에게 현실에서 고개를 돌려 진리를 향해 나아가라고 말한다. 플라톤이 우리를 동굴 안의 세계에서 동굴 밖의 세계로 이끌고 나가려는 이유는 단지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만은 아니며, 인류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동굴의 비유에서 최고의 장면은 '동굴 안으로의 귀환'이다. 그것은 단지 최고의 진리를 인식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철학은 그 자체로 가르침과 배움의 실천적 연관을 보여주는 교육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