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5세기 무렵부터 BC 4세기에 걸쳐 그리스에서 활약한 지식인들의 호칭이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당시의 그리스 전역을 편력(遍歷)하면서 변론술과 입신출세에 필요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르쳐, 많은 보수를 받았다.
아브데라의 프로타고라스, 레온티니의 고르기아스, 엘리스의 히피아스, 케오스의 프로디쿠스 등이 유명하다. BC 7~6세기의 '7현인'도 소피스트라고 불렸다.
소피스트란 원래 '현인(賢人)' 또는 '지자(知者)'를 의미하였다.
그들은 거의가 지방출신 학자들로, 각기 자부하는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어 개인이나 국가에서 돈을 받고 그것을 제공하였다.
프로타고라스처럼 덕(德)을 가르친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가장 중요한 과목은 변론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신(一身)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선(善)을 도모하고, 언론이나 행위에서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길'을 청년들에게 가르친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가르친 것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 선(善)이란 이런 것이라는 지혜가 아니라,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한 자인 체하는 기술만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성공, 진위(眞僞)에 상관 없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변론하는 재능에만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진리의 문제나 윤리·도덕의 규준(規準)에 관하여서는 회의적인 분위기를 일으켜 좋은 의미의 비판적 정신을 기르기는 하였다.
그러나 안티폰, 트라시마코스 등과 같은 후기의 소피스트들에게 엿보이는 악풍과, 자기의 이익을 꾀하고 그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체의 도덕을 무시하는 풍조를 조장한 점도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힌 것이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다.
이후 ‘소피스트’란 말은 ‘궤변을 일삼는 무리’를 의미하게 되었고, 궤변학파라고도 불리었다.
그리고 소피스트들이 진리를 중요시하지 않고 논쟁에서의 승리만을 가르쳤다는 플라톤의 평가는 아직도 별 의문 없이 받아들여진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어떤 논증에 대해 항상 그 논증을 부정하는 반대논증을 제시해 두 논증이 모두 참이라고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주장을 '반(反)논리'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논리를 폭넓게 사용하기 때문에 소피스트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플라톤도 현상세계에는 반논리적인 면이 있음을 인정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키가 한 대상보다는 크고, 다른 대상보다는 작은 것처럼, 한 진술이 그와 모순되는 다른 진술에 비해 진리의 정도가 더 크다고 할 수 없을 때, 이 현상은 반논리적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 반논리적 현상에 대한 연구가 진리를 얻는 데 꼭 필요한 예비단계라고 보았다.
이 맥락에서 보면 소피스트의 반논리 사용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지나친 면이 있다.
그러나 고대와 근세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소피스트들을 철학자로 여기지 않았고 그들의 사상도 철학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근세 사상가 중 소피스트를 그리스 철학의 역사 속에 다시 끼워넣은 최초의 인물은 헤겔이었다. 헤겔은 자신의 변증법에 비추어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정립'에 대해 '반정립'을 제시했다고 해석했다.
탈레스·헤라클레이토스·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진리를 열정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세계를 설명하면서 관찰자를 문제삼지 않았고 현상세계 자체를 비실재적인 것으로 점점 배제해나갔다.
결국 파르메니데스의 엘레아 학파는 모든 현상세계를 비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완전한 회의주의의 위험이 도사리는 이러한 경향은 이제 인간이 자연현상의 궁극적 기초를 알 수 없다는 불신을 팽배하게 만들었다.
철학은 막다른 골목에 빠졌다. 헤겔에 의하면 이러한 극단적 처지가 소피스트 운동이라는 반정립을 불러일으켰다.
소피스트 운동은 객관주의자들의 정립을 거부하고 자연 대신 인간에 관심을 집중했다.
헤겔은 소피스트들을 주관적 관념론자로 보았다.
헤겔이 보기에 그들은 오직 정신과 그 내용만이 실재라고 주장했고, 그결과 인식의 주관적 요소에 관심을 둠으로써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
소피스트들과 이전 철학자들의 대조적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종합'되었다. 플라톤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을 철학의 최고봉으로 생각했고, 소피스트들이 너무나 반(反)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철학자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형이상학이 더이상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닌 현대에 와서 BC 5~4세기 소피스트들이 제시한 많은 문제와 교의는 점점 더 높게 평가받고 있다.
소피스트의 출현 배경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소피스트 이전의 철학자들이 우주에 대한 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러 학파는 각자의 주장만을 고집했고, 자연 철학자들은 알맞은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이런 주장은 자연의 비밀을 간파하는 데 따르는 난점을 제공했으며 자연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회의주의적 분위기를 초래했다.
회의주의로 인해 철학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으며, 철학자들은 인간 지식의 문제에 집중한다.
둘 째는 아테나이 사회의 변화이다. 페르시아 전쟁(B.C 490~480)에서 아테네가 승리하게 되어 아테네 사회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그들은 소위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 후 선생으로서 소피스트가 출현(대부분 아테네 출신이 아닌 타 지역인)하게 되었고 그들은 노예국가에 예속된 소피스트들이었으므로 아테네의 관습과 문화를 바꾸는 데 주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피스트는 주로 떠돌이 교사로서 혹은 외교관의 자격으로 아테네에 왔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 중 대략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까지 아테네에 출현했던 소피스트들은 서로 다른 지방에서 왔기 때문에, 아테네인의 사고방식과 관습을 참신하게 여겼고, 그것들에 대해 탐구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프로타고라스
그 (Ρρωταγόρας, 기원전 약 490/485년 - 415/410년)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소피스트이다.
프로타고라스의 출생과 사망 연대에 관해서는 서류상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기원전 5세기 초에 고대 그리스의 북부 지방 트라키아의 압데라에서 탄생하다. 유명한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고향 출신이다.
그의 성장과 교육과정에 대해서도 크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후의 활동과 사상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당시에 배울 수 있는 모든 분야 (문법, 수사학, 수학, 고전문학 등등)에 두루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라는 이름아래 철학 및 문명사에서 처음으로 손꼽히는 사상가, 교육자, 정치가로 손꼽히며, 그가 주장한 교육의 목적과 방법은 플라톤이 쓴 대화록 프로타고라스에서 비판적으로 토론되었으며 그리고 그의 철학 사상의 골자를 이루는 주관주의 역시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말로도 유명하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는 것은, 인간은 인식하기를 제각각 인식하여 사물을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인간이 가지게 되는 지식은 인간의 인식에 기초하는데, 이 인식은 또한 인간의 감각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인간의 감각기관에 의해서 인식되는 것이 각각 다르므로 지식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는 상대주의적 진리론을 주장한 것이다.
궤변과 관련하여 '프로타고라스의 재판'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신의 논리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던 프로타고라스는, 어느날, 한 청년으로부터 그의 논법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때 청년이 돈이 없어도 논법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묻자, 프로타고라스는 그것은 너에게 달려있다고 하며, 공부가 끝난 뒤, 치른 첫 재판에서 이기면 그 돈으로 수업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수업료를 외상으로 해주겠다고 하였다. 청년은 그의 배려로 수업을 마쳤으나, 청년은 어떤 재판도 치르지 않고 놀기만 했다.
결국 프로타고라스는 수업료를 받기 위해 제자를 고소하고는, 재판정에서 청년에게 "어차피 너는 수업료를 물게 되어있다. 재판에서 이기면 나와의 계약에 의해서, 지면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수업료를 물어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오히려 스승에게 "저는 수업료를 물 필요가 없습니다. 이기면 수업료를 안 내도 된다는 판결에 의해서, 지면 스승님과의 계약에 따라 물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하였고, 이로 인해, 프로타고라스는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1] 이는 그의 논법이 서로 다른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논리적 오류를 갖고 있음을 지적한 이야기이다.
고르기아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대표적인 소피스트였다. 엠페도클레스의 제자가 되지만, 엘레아의 제논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비유(非有)에 관하여》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여도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된다 하여도 남에게 전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소피스트 사상의 본질
소피스트들이 진리를 중요시하지 않고 논쟁에서의 승리만을 가르쳤다는 플라톤의 평가는 아직도 별 의문 없이 받아들여진다 (→ 색인 : 논쟁술).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어떤 논증에 대해 항상 그 논증을 부정하는 반대논증을 제시해 두 논증이 모두 참이라고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주장을 '반(反)논리'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논리를 폭넓게 사용하기 때문에 소피스트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플라톤도 현상세계에는 반논리적인 면이 있음을 인정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키가 한 대상보다는 크고, 다른 대상보다는 작은 것처럼, 한 진술이 그와 모순되는 다른 진술에 비해 진리의 정도가 더 크다고 할 수 없을 때, 이 현상은 반논리적이다 (→ 색인 : 관념).
그리고 플라톤은 이 반논리적 현상에 대한 연구가 진리를 얻는 데 꼭 필요한 예비단계라고 보았다. 이 맥락에서 보면 소피스트의 반논리 사용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지나친 면이 있다.
그러나 고대와 근세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소피스트들을 철학자로 여기지 않았고 그들의 사상도 철학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근세 사상가 중 소피스트를 그리스 철학의 역사 속에 다시 끼워넣은 최초의 인물은 헤겔이었다. 헤겔은 자신의 변증법에 비추어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정립'에 대해 '반정립'을 제시했다고 해석했다.
탈레스·헤라클레이토스·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진리를 열정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세계를 설명하면서 관찰자를 문제삼지 않았고 현상세계 자체를 비실재적인 것으로 점점 배제해나갔다.
결국 파르메니데스의 엘레아 학파는 모든 현상세계를 비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완전한 회의주의의 위험이 도사리는 이러한 경향은 이제 인간이 자연현상의 궁극적 기초를 알 수 없다는 불신을 팽배하게 만들었다.
철학은 막다른 골목에 빠졌다. 헤겔에 의하면 이러한 극단적 처지가 소피스트 운동이라는 반정립을 불러일으켰다. 소피스트 운동은 객관주의자들의 정립을 거부하고 자연 대신 인간에 관심을 집중했다.
헤겔은 소피스트들을 주관적 관념론자로 보았다.
헤겔이 보기에 그들은 오직 정신과 그 내용만이 실재라고 주장했고, 그결과 인식의 주관적 요소에 관심을 둠으로써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 색인 : 관념론). 소피스트들과 이전 철학자들의 대조적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종합'되었다.
플라톤 이후 많은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을 철학의 최고봉으로 생각했고, 소피스트들이 너무나 반(反)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철학자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형이상학이 더이상 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닌 현대에 와서 BC 5~4세기 소피스트들이 제시한 많은 문제와 교의는 점점 더 높게 평가받고 있다.
논쟁술eristic
('논쟁을 좋아하는'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eristikos'에서 유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논쟁을 하기보다는 성공적인 논박을 본래의 목적으로 삼는 논변(論辯).
이러한 논변은 변증법의 형식을 가지고 있고 간접적 반박법을 사용하며, 철학적 탐구의 수준을 수사학으로 떨어뜨린다. 논쟁술적 논증은 그리스 소피스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플라톤은 대화편 〈에우티데모스 Euthydemos〉에서 이 논증을 조소거리로 만들었다.
좀더 넓은 의미에서 이 용어는 교묘하고 겉만 번지르한, 약삭빠른 사고과정에 의존하는 논증을 가리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