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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론

일본 과학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

작성자유토피아|작성시간18.05.17|조회수489 목록 댓글 0

1949년에 일본인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는 유카와 히데키가 물리학자로 성장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였다. 특히 젊은 시절의 유카와에게 당시 갓 태어난 분야였던 양자역학은 매력적이었다.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앞으로 새로운 것을 밝혀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아울러, 역사가 길지 않은 분야라는 것은 서구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처지지 않은 출발 선상에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본의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수년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당시, 유카와는 예외적으로 유학을 경험하지 않았다. 1929년에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한 그는 일본에서 계속 연구를 해 나갔고, 처음으로 해외를 방문하는 것은 그의 이론이 주목받은 이후인 1939년, 자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한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유카와는 유학을 떠나지 않고서도 세계 제일선의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29년에 일본으로 귀국한 니시나는 독일의 하이젠베르크(Werner K. Heisenberg, 1901~1976)나 영국의 디랙(Paul A. M. Dirac, 1902~1984), 그리고 덴마크의 보어(Niels H. D. Bohr, 1885~1962) 등 당시 물리학의 변혁을 이끌고 있던 젊은 과학자들이 일본을 방문하도록 주선했고,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일본의 젊은 물리학자들은 큰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보어는 이미 1922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바 있었고, 하이젠베르크는 1932년에, 디랙은 1933년에 각각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특히 1932년경은 유카와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에 의해 원자핵 내부에는 양성자와 더불어 중성자도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졌는데, 이는 원자핵 내부에 어떠한 힘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어려운 문제를 던지는 것이었다. 원자핵이 양전하를 지닌 양성자와 전하를 지니지 않은 중성자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원자핵 내부에는 전기적으로 서로 강하게 밀어내는 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어떻게 해서 원자핵은 이러한 강한 반발력을 극복하면서 결합되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유카와는 원자핵을 결합시키는 힘을 매개하는 입자를 도입하게 되었고, 계산을 통해 이 입자, 즉 '중간자'가 전자의 200배 정도 되는 질량을 지닐 것으로 예측했다. 아직 관측된 적이 없는 입자를 가정한 유카와의 이론이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수년 후 우주선 관측 분야에서 유사한 결과가 나오면서부터 유카와의 예언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우주선(cosmic rays, )이란 우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고에너지 입자를 말하는데, 1937년에 미국의 앤더슨(Carl D. Anderson, 1905~1991)과 네더마이어(Seth H. Neddermeyer, 1907~1988)는 유카와의 중간자라고 해석될 수 있는 입자를 관측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미국 과학자들이 관측한 입자의 질량은 전자의 약 200배로, 유카와의 이론적 예측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 속에서 유카와의 이론은 세계 물리학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유카와의 동료이자 경쟁자인 물리학자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당시 독일에 유학 중이었는데, 그는 "그때까지 일본으로부터 기증된 잡지 「일본 수학물리학회 기사」는 도착하자마자 서고에 묻힌 채 누구에게도 읽힌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카와 논문이 나오기 시작한 무렵부터 이 잡지도 당당히 물리학과 도서실에 비치되었고, 유카와 등의 논문이 실린 페이지에는 사람들의 손때가 누렇게 묻어 있었습니다."라며 유럽 학계의 분위기 변화를 기록했다.

일본의 물리학 연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유럽 물리학자들이 갑자기 유카와의 연구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도모나가의 감상은,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유카와'를 발견했다는 놀라움이 중간자 자체의 발견에 대한 놀라움보다 컸던 것 같다."였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 속에서, 그때까지 일본 과학자를 후보로 추천한 적이 없었던 나가오카가 1940년도 노벨상 후보로 유카와를 추천했고, 같은 해에는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코스테르(Dirk Coster, 1889~1950)도 유카와를 추천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1941년, 1943년, 1944년, 1945년, 1946년, 1948년 등 연이어 유카와에 대한 추천장이 노벨상 위원회로 날아들었으며, 추천자 중에는 1929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드브로이(Louis-Victor de Broglie, 1892~1987)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우주선 관측을 통해서 발견된 입자와 유카와가 이론적으로 예측한 중간자의 성질 사이에는 일치하지 않는 측면이 존재했고, 1945년 6월에 작성된 노벨상 위원회 보고서의 결론도 "현 시점에서 유카와가 예측한 입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확실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카와에 의해 탄생된 중간자 이론은 일본의 물리학자 그룹에 의해 수정되어 갔다.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나는 젊은 과학자들을 모아 중간자에 관한 토론회를 열었는데, 여기에는 교토 제국대학에서 유카와에게 물리학을 배운 사카타 쇼이치(, 1911~1970) 등이 참가했다. 여기서 사카타 등은, 우주선에서 관측된 중간자는 원자핵을 결합시키는 중간자가 붕괴되어 생긴 것이며, 그러한 까닭에 유카와가 이론적으로 예측한 입자와 실제 관측된 입자의 성질 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후의 실제 관측 결과는 일본의 물리학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947년에 이르면 우주선에서 두 종류의 중간자가 발견되었고, 이듬해에는 가속기를 통해 중간자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결국 1949년에 유카와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것이다.

유카와 히데키

유카와 히데키.

아인슈타인이 일본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은 반면, 유카와가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은 것은 미국에서였다. 유카와는 프린스턴 대학 고등연구소,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에 초빙되어 당시 미국에 체재하고 있었다. 서구 과학자와 대등한 입장의 연구자가 되기까지 해외를 방문하지 않았던 유카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직후의 상황에서 승전국 미국은 유카와와 같이 우수한 과학자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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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나가 신이치로: 유카와의 동료이자 경쟁자

한편, 유카와보다 1년 먼저 태어나 16년 늦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유카와와 동급생이었으며, 둘은 비슷한 환경 속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 가며 물리학 연구자로 성장해 갔다. 아버지가 교토 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것도, 당시 새로운 학문 분야였던 양자역학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리고 니시나를 통해 해외의 석학들로부터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도모나가와 유카와의 공통점이었다.

단, 유카와에 비해 도모나가는 지리적으로 이동을 해 가면서 연구 생활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도모나가는 우선 20대 중반의 나이에 교토를 떠나 당시 도쿄에 있던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나 연구실에서 물리학 연구를 했다. 그리고 1937년에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하이젠베르크와 공동 연구를 했다. 도모나가는 국경을 넘나들며 엘리트 과학자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은 이러한 이론 물리학자의 연구 인생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1939년 8월, 도모나가는 제2차 세계대전의 기운을 느끼면서 독일을 떠났고, 귀국한 후에는 해군 연구소에서 전쟁과 관련한 연구에도 종사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던 중에도 도모나가가 이론물리학 연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그는 1940년대 초반부터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융합시킨 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모나가가 연구를 시작할 당시의 이론은, 지극히 작은 크기를 지닌 전자의 질량을 계산하면 무한대라는 값이 튀어나와 버리는 등 골치 아픈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도모나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산 결과가 실험값과 일치하도록 보정을 했고, 그의 연구 성과는 양자 전기역학이라는 분야가 확립되는 데 기여했다. 도모나가가 이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것은 1965년의 일이다.

한편, 이후 일본 물리학이 성장해 가는 과정과 관련해서는 교육자로서의 도모나가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41년에 도쿄 문리과대학(이 대학 등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의 쓰쿠바 대학이 설립됨)에 교수로 부임한 도모나가는 1946년부터 '도모나가 세미나'를 실시했는데, 여기에는 소속 대학인 도쿄 문리과대학뿐만 아니라 도쿄 제국대학의 학생도 참여했고, 이는 후배 세대의 물리학자들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젊은 시절 도모나가에게 도움을 받은 물리학자들 가운데에서 시대를 뛰어 넘어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되곤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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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자와 사카타 쇼이치

일본계 미국인 난부 요이치로()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2008년의 일이지만, 그가 물리학자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것은 바로 유카와와 도모나가가 활약하던 시기였다. 난부는 고등학교 시절, 저명한 물리학자로 떠오르고 있던 유카와의 이름에 자극을 받아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고, 도모나가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연구자로서 성장해 갈 수 있었다. 1921년에 도쿄에서 태어난 난부는 1940년에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했으나, 당시 도쿄 제국대학에는 소립자 물리학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도쿄에 있던 이화학연구소에는 니시나 및 도모나가가 근무하고 있었고, 전쟁이 끝난 후 난부가 육군 기술연구소로부터 도쿄 대학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도모나가가 객원교수로서 강단에 서 있었다. 이후 1949년에 오사카 시립대학에 부임한 난부는 3년 후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 배경에는 도모나가의 추천이 있었다. 이렇듯 젊은 시절의 난부에게 도모나가는 스승이자 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난부는 자신의 연구가 '사카타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사카타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카와의 중간자 이론을 수정하여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기여한 사카타 쇼이치를 뜻한다. 사실은, 이 사카타야말로 2008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난부, 마스카와, 그리고 고바야시 세 사람을 잇는 연결고리였다. 마스카와와 고바야시는 사카타의 제자였던 것이다.

사카타는 1942년에 나고야 제국대학에 부임하여 새로이 소립자 물리학 그룹을 형성했고, 이후 나고야는 또 하나의 소립자 물리학 연구 거점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마스카와 도시히데()와 고바야시 마코토()가 물리학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한 것은 이렇듯 그들의 고향에 형성되어 있던 물리학 연구 그룹의 일원으로서였다. 1940년에 태어난 마스카와는 어린 시절, 사카타 쇼이치라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나고야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까지 "과학이란 19세기까지 유럽에서 완성된 것이며, 우리는 단지 그것을 배우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에게 "과학이 현재 나고야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충격이었다고 한다. 한편, 1944년에 태어난 고바야시도 나고야 대학에 입학한 후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사카타 연구실의 문을 두드렸다.

마스카와와 고바야시가 사카타 연구실에서 만난 것은 1967년의 일로, 이때 마스카와는 조수로 부임하여 연구자로서의 첫발을 내딛고 있었고 고바야시는 대학원에 입학하여 갓 사카타의 제자가 된 상태였다. 1970년에 마스카와는 교토 대학 조수로 자리를 옮겼지만, 2년 후에 박사 학위를 받은 고바야시도 교토 대학에 조수로 부임하여 그들은 다시금 같은 곳에서 함께 연구를 하게 되었다. 나고야 대학 출신의 교원들이 교토에서 유카와와 도모나가의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만큼 나고야 대학 물리학 연구실의 실력이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하나의 지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마스카와 도시히데

마스카와 도시히데.

마스카와와 고바야시의 연구는, 난부와 '대칭성의 깨짐'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난부는 1959년경에 '대칭성의 자발적 깨짐'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여기서 '대칭성'이란 모든 방향이 대등한 자격을 지닌다는 것, 바꿔 말하면 특정한 방향이 다른 방향에 대해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난부는 소립자가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무한의 가능성, 즉 '대칭성'이 어느 순간 자발적으로 깨지면서 결국은 특정의 한 방향을 선택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통해 원래는 질량을 지니지 않았던 소립자가 특정한 질량을 지니게 된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고바야시와 마스카와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연구는 입자와 반입자(보통의 입자와 질량은 같으나 전하의 부호가 반대인 입자)의 성질 사이에 대칭성이 깨져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입자와 반입자 사이의 대칭성, 즉 전하의 부호를 제외하고는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실험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고, 마스카와와 고바야시는 이러한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마스카와는 이론에 복소수를 도입했는데, 그 결론은 소립자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인 쿼크(quark)가 여섯 종류 존재하리라는 것이었다.

단, 그들이 이러한 예언을 발표한 1972~1973년 당시까지 발견된 쿼크는 세 종류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탓에, 그들의 이론이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기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후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그들의 이론이 타당하리라는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었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고바야시와 마스카와는 2008년에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난부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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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민주주의, 그리고 물리학

2008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직후 마스카와는 스스로의 연구 방법론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이는 스승인 사카타의 영향이 이론 물리학 연구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나고야 대학의 사카타 연구실은 1946년에 '학문의 자유와 평등'을 내건 '물리학 교실 헌장'을 제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연구의 주체는 교실 회의를 구성하는 연구원으로, 대학원생급 이상의 연구원은 모두 대등한 자격을 지닌다."라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마스카와가 과학자로서 첫발을 내딛은 것은 이렇듯 진보적인 분위기를 지닌 사카타 연구실에서였고, 그는 현재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실은, 제국 일본이 패망한 이후 민주화의 움직임 속에서 물리학자로서 사회 활동에 참가한 것은 사카타 뿐만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본의, 원자폭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물리학자가 침묵을 지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1949년에 노벨상을 수상하여 사회적인 지명도가 높아진 유카와의 영향력은 작지 않았다.

그는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 1872~1970)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중심이 되어 평화를 호소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서명한 열한 명 중 한 명이었고, 1957년에 세계의 과학자들이 모여 핵군축을 주장한 '퍼그워시(Pugwash) 회의'에도 참가했다. 유카와는 1962년에 도모나가, 사카타 등과 함께 핵무기의 근절을 희망하는 '교토 과학자 회의'를 열기도 했다. 한편 도모나가는 '원자력 이용 3원칙'에 대한 과학계의 의견 집약에 힘을 쏟기도 했다.

여기서 '3원칙'이란, 원자력의 이용에 관해서는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민주', 원자력 개발이 외국에 의해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주', 그리고 원자력 개발에 대해서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공개'의 원칙을 말한다. 1974년도 노벨 평화상은 수상 재임 당시 핵무기에 대해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을 허용하지도 않는다."라는 이른바 '비핵 3원칙'을 천명한 사토 에이사쿠(, 1901~1975)에게 돌아갔는데, 이 배경에는 일본 물리학자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물리학자들이 이러한 활동을 펼친 것은 자신들의 연구가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모나가는 1948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일단 원자폭탄이 폭발하게 되자, 과학자는 실험실 안에서 시험관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고, 일반 시민도 원자라는 것이 과학자의 관념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경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렇듯 과학과 그 외의 다양한 문화 분야, 그리고 과학자와 일반 시민의 상호작용은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며, 서로가 상대방을 남으로 여길 수는 없게 되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책임 의식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는, 일본의 물리학자들도 제2차 세계대전 중 핵무기 개발 계획에 이름을 올렸던 역사가 존재한다. 1930년대의 끝 무렵에 독일에서 우라늄의 핵분열 현상이 발견된 이후 일본 군부에도 핵무기의 가능성에 주목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육군은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나 요시오에게, 해군은 교토 제국대학의 아라카쓰 분사쿠(, 1890~1973)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과학자들은 이른바 '상아탑' 안에만 갇혀 있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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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과학의 끈

이 장에 등장한 물리학자들은, 그들이 노벨상을 수상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다. 나가오카는 유카와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고, 니시나는 유카와와 도모나가를 지도했다. 유카와 및 도모나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물리학자로 성장한 난부는 마스카와와 고바야시에게 영향을 끼쳤고, 유카와의 중간자론에 기여한 사카타는 마스카와와 고바야시의 스승이었다. 이 계보에서 나가오카, 니시나, 그리고 사카타는 노벨상을 수상한 사실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았다고는 하기 힘들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몇 명 나왔는가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는 결코 과학 연구 전통의 성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는 유카와 히데키라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 이전에 이미 여러 곳에 소립자 물리학 연구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다. 도쿄에는 니시나와 도모나가를 중심으로 연구 그룹이 존재하고 있었고, 오사카 및 교토 지역에서도 유카와를 비롯한 물리학자들이 연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카타를 중심으로 나고야에도 소립자 물리학을 연구하는 집단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일본의 소립자 물리학 분야가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온 배경에는, 이렇듯 이 분야가 폭넓고 뿌리 깊게 전통을 쌓아 온 역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전통은 이론 물리학 연구라는 추상적인 영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며,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자각도 유카와, 도모나가, 사카타로부터 마스카와에게로 이어져 갔다. 과학사학자 오카모토 다쿠지는 소립자 물리학이야말로 과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 일본 과학자들의 공헌이 가장 눈에 띄는 분야가 아닐까 하는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일본의 소립자 물리학 분야가 일찍부터 자립적인 연구 전통을 확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노벨상 수상식에 참석하기까지 여권조차 지니고 있지 않았던 마스카와의 경우는 그 상징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난부가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까지 취득했다는 사실은, 일본 사회가 제공할 수 있었던 연구 환경이 시대나 분야에 따라서 때로는 불완전하거나 불편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다음 장에서는, 과학자들에게 국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 인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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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와 국경

2008년도에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인 과학자는 몇 명인가? 국적을 기준으로 한다면 물리학상을 수상한 마스카와 도시히데와 고바야시 마코토, 그리고 화학상을 수상한 시모무라 오사무를 합쳐 세 명이 정답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이야기한다면 2008년도까지 과학 분야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인은 열세 명이 아니라 열두 명이 된다. 그러나 일본계 미국인 난부 요이치로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과학자로서의 훈련을 받았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일본의 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경험까지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난부도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로 포함시켜야만 할 것인가?

사실 이러한 논의는, 노벨상 수상자의 국적을 헤아려야만 하는 집착에서만 해방된다면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집착은 어떤 의미에서 노벨상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기까지 할 수 있다. 노벨 재단은 "후보자의 국적을 묻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세우고 있으며, 노벨상은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국가를 대표하는 누군가에게 부여하는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옮겨 다니며 활약하는 일이 적지 않은 과학자들에게, '국경'이란 과연 무엇일까?

1888년, 그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 연구소 개소식에서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발언에 대해서는 두 측면에서 꼬집어 볼 수 있다. 우선 과학에는 국경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질량 보존의 법칙'이 라부아지에의 조국인 프랑스에서만 성립한다는 이야기도, 부산에서 보는 북극성과 일본의 오사카에서 보는 북극성이 다른 별이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잘 확립된 보편적인 지식은 쉽게 국경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과학을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여기에는 국경이 각인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인류의 발길이 달에까지 닿은 배경에는 최초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소련에 대한 미국의 경쟁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고, 많은 한국인이 '줄기세포'라는 전문용어를 알게 된 배경에도 국가 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과학에 대해 '국가 정책'이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과학 활동 사이에는 국경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아닐지. 다른 한편으로, 과학자들은 각 분야별로 자신들만의 언어를 구축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 서울에 사는 어느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이웃집에 사는 변호사보다 미국 학회에서 만난 인도 출신 물리학자와 이야기가 잘 통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러한 공통의 국제 언어를 배경으로, 보다 좋은 연구 환경을 찾아서 과학자들은 빈번하게 국경을 넘나든다. 그리고 과학자들에 대한 평가 기준도 각 분야에 따라, 국제적으로 존재한다. 대전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분자생물학자의 연구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기계공학자라기보다는 전 세계의 분자생물학자들이다. 과학자에 대한 평가에 국적이나 인종이라는 기준이 개입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독자는 많지 않으리라.

[네이버 지식백과] 과학자와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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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바 마사토시: 과학과 정치 사이에서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키는 유학을 떠나지 않고 일본에서 연구를 계속한 '토종' 과학자였지만, 1949년에 그가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은 것은 미국에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냉전 체제 속에서 미국과 소련은 자국의 위신을 걸고 과학 연구 경쟁을 벌였고, 소립자 물리학은 이러한 정치 환경 속에서 급속히 발전해 나갔다. 2002년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고시바 마사토시()의 연구 인생은, 한편으로는 유카와 및 도모나가로부터 이어지는 일본 소립자 물리학의 전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냉전 체제 속의 양대 세력이었던 미국과 소련을 넘나들면서 연구 활동을 펼쳐 나간 모습을 보여 준다.

1926년에 아이치()현에서 출생한 고시바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의 영향으로 오른손이 불편했고, 그러한 까닭에 작곡가가 되려는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그에게 물리학이라는 길을 알려 준 것은 다름 아닌 도모나가 신이치로였다. 고시바는 고등학교 시절의 교장인 철학자 아마노 데이유()의 소개로 도모나가를 찾아갔는데, 아마노 교장은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아버지인 도모나가 산주로()의 제자였다.

고시바는 1951년에 도쿄 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후지산 정상에 올라가 우주선 관측을 행하는 등 물리학 연구에 첫발을 내딛었다. 한편 고시바에게는 그보다 6년 늦게 노벨상을 수상하는 또 한 명의 스승이 있었다. 2008년도에 노벨상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난부 요이치로는 당시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고시바는 오사카에서 3개월간 난부 밑에서 연구를 했다. 이후 난부는 미국으로 떠났지만, 그들은 미국에서 다시 만난다.

난부는 고시바에게 연구의 등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연구 방향에 대한 감은 잡혀도 그 방향이 옳은지에 대해 확실한 근거가 없었을 경우 고시바는 곧잘 난부에게 팩시밀리로 질문을 하곤 했고, 그러면 난부로부터 간명한 답장이 돌아오곤 했다는 것이다. 난부보다 6년 먼저 상을 받은 고시바의 입장에서, 그리고 난부와 노벨상을 동시에 수상한 고바야시나 마스카와의 입장에서도, 난부의 2008년도 노벨상 수상은 너무나도 뒤늦은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난부 요이치로

난부 요이치로.

한편 고시바의 도모나가와의 인연은 고등학생 시절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고시바가 미국 로체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날 것을 결정했을 때, 추천서를 써 준 것이 바로 도모나가였던 것이다. 고시바는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5년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3년간 시카고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한 후 1958년에 귀국하여 모교인 도쿄 대학 원자핵 연구소에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금의환향한 고시바는 다시금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1960년에 시카고로 자리를 옮겨 국제 공동 우주선 및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의 프로젝트 책임자로 부임했고, 커다란 원자핵 건판(nuclear emulsion plate)을 실은 거대한 기구를 항공모함으로부터 띄워 올리는 등 대규모의 연구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항공모함과 거대과학(big science) 사이에서 냉전 시기 과학의 한 측면이 엿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고시바는 냉전 시기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소련도 방문했다.

1963년에 일본으로 귀국하여 도쿄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던 고시바는 1968년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학회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소련 과학자로부터 전자와 양전자의 충돌 실험을 공동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고시바의 회상에 따르면, 소련과의 공동 연구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반대한 물리학자가 있었던 반면 정치를 넘어서 과학 연구에서 협력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도 있었다고 한다. 과학은 정치적 대립을 초월해야 한다는 이상, 그리고 과학이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엿보이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거대한 관측 시설을 필요로 하는 연구는 막대한 연구비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러한 사실이 지닌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고시바 자신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실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연구에 국민으로부터의 막대한 세금을 사용해도 되는지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면서, 미국의 초전도 초대형 입자가속기(SSC: 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 계획과 관련하여 일본이 자금 협력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바 있었다. 실제로 이 계획은 1993년에 미국 의회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고시바는 또한 2000년에도 한 신문에 국제 열핵융합 실험로 유치에 반대하는 논설을 실은 바 있는데, 이 계획은 건설비만 5,000억 엔에 유지 비용도 막대한 금액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한편 고시바의 연구가 성공한 데에는 본인 스스로가 '행운'이라고 표현한 바와 같이 우연적인 요소가 작용했다. 기후()현 가미오카() 광산에 설치한 관측 시설 '가미오칸데'는 지하 1,000미터의 폐광에 5,000톤의 물을 채워 입자를 검출하는 거대 장치로, 원래는 양성자가 중성자로 붕괴하는 것을 검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결국 이 시설이 1987년 2월 23일에 세계 최초로 초신성 뉴트리노(중성미자: 약한 상호작용만을 하며 질량이 매우 작은 기본 입자)를 관측했고, 이로 인해 고시바는 노벨상에 다가갈 수 있었다.

태양으로부터 지구에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뉴트리노가 쏟아지고 있으나, 뉴트리노는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는 탓에 이를 검출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가미오칸데는 물속에 들어온 뉴트리노가 물 분자 안의 수소 원자핵과 충돌하여 발생한 빛을 검출하는 데 성공했고, 아울러 동일한 결과가 미국 IBM 실험실에서도 얻어짐으로써 그 관측 결과에 대한 신뢰성도 확보될 수 있었다. 고시바는 "가미오칸데로부터 얻어진 결과밖에 없었다면 이에 대해 의심을 품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자연이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관측 연구의 경우,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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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키 레오나: 보다 좋은 연구 환경을 찾아서

고시바는 이론보다는 관측을 중심으로 연구를 한 과학자였으나, 그의 연구 인생은 앞 장에서 살펴본 유카와 및 도모나가의 세대, 그리고 난부로 이어지는 전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고시바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 몇 년 일찍 대학을 졸업한 에사키 레오나()는, 이 전통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립자 물리학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이루지는 못했다. 1925년에 오사카에서 출생한 에사키는 1944년에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사가네 료키치(, 1905~1969)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는데, 사가네는 나가오카 한타로의 다섯째 아들이자 니시나 요시오와 함께 이화학연구소에서 원형 가속기(사이클로트론)의 제작 및 운영에 참가한 인물이었다. 에사키는 일본 소립자 물리학의 전통을 대표하는 과학자 중 한 사람인 사가네 교수 밑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시대 상황이 그의 꿈을 가로막았다.

패전국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사령부는, 니시나의 연구팀이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던 사이클로트론이 원자폭탄 개발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 속에 이를 파괴하여 바다에 던져 버렸던 것이다. 1945년 11월의 일이었다. 이후 1947년에 도쿄 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에사키는 민간기업인 고베() 제강에 입사했고, 9년 후인 1956년에는 소니의 전신인 도쿄 통신공업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도쿄 통신공업회사에서 에사키가 연구에 몰두한 것은 반도체였다. 반도체에 불순물로 다른 원소를 집어넣으면 그 전기적 특성이 바뀌곤 하는데, 당시에는 불순물을 지나치게 많이 집어넣은 탓에 기술적인 문제들이 발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연구를 진행하던 가운데, 에사키 연구팀은 불순물이 다량으로 포함된 다이오드에서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전압을 높이면 전류가 증대해야 하는데, 반대로 전류가 줄어들었던 것이다. 에사키는 언뜻 보기에 기묘한 이 현상이 이론적으로 예상된 '터널링 현상'이라고 판단했고, 이러한 성질에 기반을 둔 '에사키 터널 다이오드'를 제작했다. 이 현상이 이론적으로는 이미 예측되고 있었다고는 하나 반도체에서 실제로 관측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업적이 1973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 대해 처음에는 주변에서 그다지 큰 반향이 없었고,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에사키는 일본의 연구 환경에 실망한 채 1960년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가 일본으로 귀국하는 것은 그로부터 30년 이상 지난 후의 일이었다. 에사키는 1992년에 쓰쿠바() 대학 총장으로 부임하여 대학 시스템의 변화를 추진했고, 그 이후에도 일본의 교육 정책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발언해 왔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에사키는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과학자이기는 하나 교육 정책의 전문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담은 겸허하게 경청하되 개인적인 경험을 성급하게 일반화하지는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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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이 겐이치: 교토에서 한평생을 보낸 화학자

미국에서 연구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보낸 에사키와는 대조적으로, 1981년에 일본 최초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후쿠이 겐이치(, 1918~1998)는 줄곧 일본에서, 그것도 주로 교토 대학에서 과학자로서의 한평생을 보냈다. 1918년에 나라()현에서 출생한 후쿠이는 당시 5년제이던 중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하여 1935년에 오사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한편 대학 진학을 앞두고 그는 교토 제국대학 공업화학과에 재직 중이던 기타 겐이쓰()로부터 당시의 상식과는 다소 어긋난, "수학을 좋아하면 화학을 공부하라."는 조언을 듣고, 후쿠이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실제로 교토 제국대학 공업화학과에 들어간 후쿠이에게 응용 연구를 위주로 하던 당시의 화학은 불만이었다. 그는 왜 '수리 물리'는 있는데 '수리 화학'은 없는가 하는 의문도 품었다고 한다. 이러한 불만과 의문 속에서 후쿠이는 기초 물리학이나 양자 역학 등을 공부했고, 결국 이러한 공부가 이후 그의 연구 성과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30년대 말, 전선을 확대해 가고 있던 일본 제국에게 과학이란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였다.

교토 제국대학에는 1939년에 '연료화학과'가 생겼고, 1941년에 공업화학과를 졸업한 후쿠이는 새로 생긴 연료화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편 그가 대학원에 진학한 1941년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후쿠이는 단기 현역 장교로서 일본 육군 연료연구소에 근무하면서 항공기 연료의 개량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포상도 받았다. 그는 전쟁 중이던 1943년 3월에 모교인 교토 제국대학 연료화학과에 강사로 부임했고, 1945년 3월에는 조교수로 승진했다.

후쿠이가 계산했던 종이

후쿠이가 계산했던 종이.

후쿠이가 애용한 사전

후쿠이가 애용한 사전.

후쿠이가 화학 반응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난 이후인 1950년경부터였다. 그의 목표는 양자역학을 이용하여 화학 반응을 설명하는 데 있었다. 이미 이 시기의 화학 이론에서는 화학 반응과 관련하여 전자 분포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었으나, 실험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나타나는 등 과제도 남아 있었다. 탄화수소와 관련하여 화학 반응이 잘 일어나는 조건을 탐구해 가던 후쿠이는, 분자의 화학 반응에는 모든 전자가 평균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바깥쪽 궤도에 있는 전자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그는 여기에 분자의 경계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프런티어 궤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양자역학에 기반을 두고 화학 반응을 설명한 후쿠이의 이론이 1952년에 발표되었을 때 처음에는 비판적인 반응이 많았으며, 수학적으로 난해한 탓에 화학자들의 주목을 끌지도 못했다고 한다. 한편 1965년에는 호프만(Roald Hoffmann) 등에 의해 후쿠이와 비슷한 결론이 도출되었는데, 이 이론은 화학자의 언어로 쓰인 것이었던 덕택에 화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결국 1981년에 후쿠이는 호프만과 공동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후쿠이는 1938년에 입학하여 1980년대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교토 대학에서 연구 인생을 보냈다. 이러한 예를 생각하면, 반드시 여러 연구 기관을 옮겨 다녀야만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후쿠이의 연구가 교토 대학, 혹은 일본이라는 지역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연구 결과를 영어 논문으로 발표했고, 해외 과학자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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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 히데키: 실수가 큰 발견으로 이어지다

한편, 소립자 물리학의 전통이 물리학상 수상자의 계보를 만들었듯이 후쿠이의 전통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 배출의 한 흐름으로 연결되었다.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을 발견한 업적을 인정받아 2000년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시라카와 히데키()는 후쿠이의 노벨상 수상을 기념해서 설립된 기초화학 연구소에 평의원으로 초빙된 바 있었고, 후쿠이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논문을 발표한 적도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후쿠이의 제자가 시라카와 밑에서 강사 및 조교수를 역임하기도 하는 등 두 사람은 밀접한 교류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토 대학에서 순조롭게 엘리트 과학자로 성장한 후쿠이에 비해 시라카와는 대기만성형의 과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노벨상으로 이어진 그의 연구 인생도 우연의 연속이었다. 1936년에 도쿄에서 태어난 시라카와는, 아버지가 육군 군의관이었던 관계로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이나 구 만주(현재 중국의 둥베이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스로에 대해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수재였던 것은 아니었다."라고 평한 시라카와가 화학에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은 플라스틱을 접하면서였다. 미국 듀폰(Du Pont)사가 나일론을 개발한 이래, 인공 섬유와 플라스틱에 대한 관심이 증폭했고 이와 관련된 학문인 고분자 화학도 각광을 받았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시라카와는 화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1961년에 도쿄 공업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시라카와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1881년에 '도쿄 직공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여 1929년에 대학으로 승격된 도쿄 공업대학은 수많은 기술자와 과학자를 배출해 온 명문 대학이며, 1966년에 박사 학위를 받은 시라카와는 모교에 조수로 부임했다. 시라카와 본인이 강조하고 있듯이, 그가 금속 광택을 지닌 폴리아세틸렌을 발견한 데에는 우연이 작용했다. 1967년 가을, 한국 원자력연구소로부터 파견된 공동연구자와의 의사소통이 잘못된 탓에 밀리몰(millimole) 단위를 몰(mole) 단위로 실수했고, 그 결과 촉매가 1,000배나 더 들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가 행운으로 작용했다.

그때까지는 합성을 했을 경우 가루 형태로밖에는 만들지 못했던 폴리아세틸렌이 광택을 지닌 필름으로 형성되었는데, 이는 폴리아세틸렌의 전기적 성질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학 시절 본의 아니게 물성 연구실에 소속된 적이 있었던 시라카와는 이 새로운 물질의 전기적 성질을 조사하여 반도체 정도의 전도율을 지닌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성과가 바로 각광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또 하나의 우연이 시라카와의 연구를 커다란 성공으로 이끌어 갔다. 이는 그와 노벨상을 공동으로 수상하게 되는 맥더미드(A. G. MacDiarmid)를 만난 것이 계기였다.

1975년에 교환 교수로 교토 대학에 체재 중이던 맥더미드는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 도쿄 공업대학을 방문했는데, 여기서 우연히 시라카와의 연구를 알게 되어 관심을 가졌다. 이듬해인 1976년, 시라카와는 맥더미드의 초청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화학과에 박사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여기서 물리학자인 히거(Alan J. Heeger)를 포함하여 세 명이서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폴리아세틸렌에 브로민이나 아이오딘을 불순물로 집어넣으면 전기 전도도가 급증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이렇듯 화학자와 물리학자가 두 측면에서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던 과정에서였다. 불순물로 인해 화학 결합에 변화가 생겨 전기를 통하는 플라스틱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전기를 통하는 플라스틱은 1977년 봄에 뉴욕 과학 아카데미 주최의 반도체 국제 학회에서 시연된 것을 계기로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일본에서도 이 연구가 주목받게 되었다.

1979년, 나이 마흔을 훌쩍 넘긴 시라카와는 쓰쿠바 대학 조교수로 부임했고, 일본 정부는 1981년에 전도성 고분자 연구 개발에 관한 국가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시라카와 등이 개발한 전도성 플라스틱은 금속에 비해 가볍고 잘 녹슬지 않으며 가공하기 쉽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덕택에 이미 휴대전화용 디스플레이나 태양 전지 등이 상품화되었으며, 여러 응용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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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요리 료지: 명문가에서 성장한 엘리트 과학자

시라카와보다 2년 늦게 태어나 1년 늦게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나고야 대학의 노요리 료지()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엘리트 화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38년에 일본 간사이(西) 지역(교토, 오사카, 고베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서부 지역)의 유명한 고급 주택가인 효고()현 아시야()시에서 출생했는데, 이 지역은 문화 및 경제적으로 일본 전국을 선도해 온 지역이었다. 그가 출생한 가정도 평범하다고는 하기 힘든 명문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대기업에서 화학 연구자로 활약하며 전무까지 지냈으며, 할아버지는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장, 외할아버지는 미쓰이 생명보험 회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노요리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부모는 유카와 히데키와 만난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1939년에 노요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유럽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유카와를 알게 되었고, 그들은 같은 배 안에서 1개월간을 함께 보냈다.

이러한 가정에서 성장한 노요리는 전국적으로 최고 명문 중 하나인 나다() 중학교 및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57년에는 교토 대학 공업화학과에 입학했다. 노요리가 화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도 이렇듯 유복한 동시에 과학과 친근한 환경이 관련되어 있었다. 중학생 시절 그는 아버지를 통해 나일론 신제품 발표회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이 새로운 물질이 "공기와 물과 석탄으로 만들어진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교토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노요리는 원래 기업에 입사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석사를 마칠 무렵 조수로 채용되었고, 1968년에는 나고야 대학에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리고 1969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1년 정도 유기 합성 연구를 행한 후, 1972년에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나고야 대학 화학과 정교수로 승진했다. 일본의 대학에서 30대의 나이에 정교수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참고로 노요리보다 2년 먼저 태어난 시라카와가 조수로 부임한 것이 1966년, 정교수보다 한 직급 아래인 조교수가 되는 것은 1982년의 일이었다.

노요리 료지

노요리 료지.

노요리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아미노산의 비대칭 합성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이다. 물질 중에는, 예컨대 왼손과 오른손의 관계와 같이, 서로 같은 모양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좌우가 뒤바뀐 입체 구조를 지닌 쌍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입체 구조의 차이가 종종 화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곤 한다. 특히 생명체는 이 서로 닮은 쌍 중 한쪽만을 사용하는데, 예컨대 다시마 등의 맛을 내는 성분 글루탐산이나 진통제 혹은 향료 등으로 사용되는 멘톨도 그중 한쪽만이 효과를 지닌다. 심지어는 양쪽 사이의 화학적 성질의 차이가 생명체에 위험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있다.

1960년대 당시 훌륭한 진통제로 여겨졌던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는 서로 닮은 쌍 중 한쪽만이 약효를 지니며, 반대로 다른 한쪽은 태아의 기형을 유발하는 부작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들을 실험실에서 합성하면 양쪽이 모두 절반씩 산출되어 버린다는 것이 문제였다. 즉, 인공적으로 이러한 물질들을 만들었을 경우 그중 절반은 효과가 없거나 심지어는 위험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까닭에, 유효한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생명체에만 부여된 능력이라고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노요리 등이 이룬 업적은, 금속 화합물을 촉매로 하여 유효한 쪽만을 선택적으로 합성하는 기법을 개발한 데 있었다. 즉, 그때까지는 생명체가 만들어 낸 천연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물질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에게 유용한 물질을 저렴하고 안전하며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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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네가와 스스무: 국경을 넘어야만 가능했던 분자생물학자의 길

한편 노요리보다 1년 늦게 태어나 노요리와 같은 교토 대학에서 화학을 배우고 노요리보다 14년 빨리 노벨상을 수상한 도네가와 스스무()의 연구 인생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일본의 명문 대학에서 조수, 조교수, 교수로 안정된 신분을 지니고 있던 노요리와는 달리, 도네가와는 신분이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 가며 과학자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1939년에 일본 아이치()현에서 출생한 도네가와는, 명문 히비야()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당시 그다지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1년 재수한 끝에 교토 대학 화학과에 입학했다. 도네가와의 인생이 크게 바뀌는 것은 대학 4학년에 올라갈 때였다.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졸업논문을 써내야 했는데, 도네가와는 화학과 같이 오랜 역사를 지닌 분야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렇듯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한 선배가 들려준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운 것이었다.

문제는 분자생물학이 너무나도 새로운 분야라는 데 있었다. 당시의 교토 대학에 분자생물학 강좌는 개설되지 않았었고, 어쩔 수 없이 도네가와는 일단 생화학 강좌1)

그런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도네가와의 입장에서 예일 대학이나 하버드 대학, 혹은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 등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기는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도네가와에게, 우연히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이고 캠퍼스로부터 수업료 면제 및 생활비 지급 조건이 제공되었고, 그는 분자생물학 연구자가 되기 위한 꿈을 안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샌디에이고에서 바이러스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도네가와의 앞길은 그다지 밝게 보이지 않았다. 그의 경쟁자는 미국의 유명 대학 출신으로 이미 눈에 띄는 연구 성과를 낸 쟁쟁한 연구자들이었고, 도네가와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조나스 소크(Jonas Edward Salk)가 설립한 소크 생물학 연구소의 둘베코(Renato Dulbecco) 연구실에 연구원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 둘베코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암 바이러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그런데 도네가와에게는 다시금 위기가 찾아 왔다. 이번에는 비자 문제였다.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둘베코는 "스위스의 바젤 면역학 연구소에 가 보는 것은 어떤가?" 하는 조언을 했지만, 면역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도네가와에게 이는 불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둘베코의 판단력을 신뢰한 그는 미국을 떠나 스위스 바젤로 향했다. 위기를 계기로 다시 한 번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

도네가와의 업적이 노벨상으로 이어진 것은 주로 그가 스위스에서 행한 연구를 통해서였다. 스위스로 건너간 그는, 면역학에서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여겨져 왔던 문제에 도전했다. 세균 등 몸 안에 들어온 여러 이물질을 항원, 그리고 이 항원에 대해 몸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을 항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불가사의한 사실이 놓여 있었다. 항체의 종류는 수십억 이상 존재하는데, 이를 만들어 내는 유전자는 단지 1,000종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도네가와에게 또 하나의 위기가 찾아 왔다. 스위스에서의 계약 기간인 3년이 지나도 이렇다 할 성과는 나오지 않았고, 결국 계약이 끝났던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작업에는 주어진 시간 내에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나, 결국 그는 2개월간 무급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도네가와 스스무

도네가와 스스무.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도네가와의 연구가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서로 다른 종류의 유전자를 비교하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아직 항체를 지니지 않은, 실험용 쥐의 태아로부터 추출한 유전자였고 다른 하나는 암세포를 지닌 쥐에서 추출한 유전자였다. 그는 두 유전자 사이의 차이에 주목했다. 태아로부터 추출한 유전자는 여러 개의 작은 배열들로 흩어져 있었던 반면에, 암세포를 지닌 쥐로부터 추출한 유전자는 필요한 부분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1,000종 정도에 불과한 유전자가 다양한 방식의 조합을 이룸으로써 수십억 종류 이상의 항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1976년 여름, 도네가와는 유명한 제임스 왓슨(James D. Watson) 앞에서 4년에 걸친 실험의 결과를 발표했고, 이 거물 과학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성공의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도네가와는 1981년에 MIT 교수로 취임했고, 1987년에는 '다양한 항체를 생성하는 유전적 원리의 해명'이라는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분자생물학이라는 낯선 분야의 연구자가 되기를 희망하던 한 과학도가 여러 위기를 넘어서, 그리고 몇 번이고 국경을 넘어 다니며 이룩한 성과였다.

각주

  1. 1일본 대학의 '강좌' 제도는 흔히 교원 3~4명 정도로 구성된 연구 및 교육의 기본 단위를 일컫는다. 대체로 일본 대학생들은 3학년이 되면 관심 있는 강좌에 소속되어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한 연구 지도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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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는 국경을 넘어야만 하는가

이 장에서 살펴본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 후쿠이와 노요리가 거의 모든 연구 인생을 일본에서 보낸 반면, 이들 이외의 과학자들에게 외국에서의 연구 경험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네가와의 경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남으로써 비로소 연구자로서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고, 시라카와의 경우에도 일본에서 시작한 연구가 꽃을 피운 것은 미국에서였다.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떠난 에사키가 일본으로 귀국한 것은 일흔 살을 바라보던 때였고, 고시바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냉전의 장벽마저 넘나들었다.

연구자로서 활약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국경이란 낮은 장벽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결코 넘을 수 없는 장벽은 아니었고, 심지어 도네가와의 경우 분자생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이 장벽을 넘을 필요가 있었다. 앞 장에서 살펴본 난부의 경우를 포함하여, 이러한 과학자들을 국경이라는 틀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은 때로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과학자들이 반드시 국경을 넘나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장에서 살펴본 후쿠이 및 노요리는 일본의 대학 시스템 안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 가며 과학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고, 심지어 앞 장에서 살펴본 마스카와는 노벨상 수상식에 참가하는 것이 첫 해외여행이었다. 연구에 필요한 환경이 주변에 놓여 있다면 굳이 고생스럽게 외국으로까지 갈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1918년생인 후쿠이, 1938년생인 노요리, 그리고 1940년생인 마스카와가 연구자로서 발길을 내딛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거닐고 있던 교토와 나고야에는 국제적인 화학자와 물리학자를 키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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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무라 오사무: 나가사키, 나고야, 그리고 미국으로

물리학자들의 연구가 원자폭탄을 만드는 이론적 기초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2008년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시모무라 오사무()는 그 원자폭탄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45년 8월 9일, 당시 해군에 동원되어 나가사키 근처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16세의 시모무라 소년은 미군 폭격기를 목격했고, 곧이어 강렬한 섬광을 보았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히로시마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나가사키에서 시모무라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학적에 관한 자료가 불타 버린 탓에 진학하는 데 곤란을 겪었던 그는 어렵사리 나가사키 의과대학 부속 약학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학교를 졸업한 후 1951년부터는 나가사키 대학 약학부로 승격된 모교에서 실험 실습 지도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시모무라 오사무

시모무라 오사무.

시모무라가 본격적으로 연구자의 길로 접어든 것은 1955년에 나고야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객원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빛을 내는 바다 생물인 '갯반디(Vargula 또는 Cypridina)'를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이 연구는 공교롭게도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되어 있었다. 전쟁 말기 일본군은 갯반디의 빛을 전장에서 조명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이 생물을 대량으로 채취했고, 전쟁이 끝난 후 그 일부를 나고야 대학이 보유했던 것이다.

시모무라가 도전한 것은 갯반디의 발광 물질을 결정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연구팀이 20년 이상 시도해 왔음에도 성공하지 못한 과제였다. 그런데 우연이 그를 도왔다. 시모무라는 어느 날 밤늦게까지 실험을 하여 피곤했던 탓에 실험 기구를 정리하지 않은 채 퇴근했는데, 다음 날 연구실에 도착해 보니 진한 염산 용액 속에 발광 물질의 결정이 침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결과는 1957년에 논문으로 발표되었고, 이러한 시모무라의 성과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재직 중이던 프랭크 존슨의 주목을 끌었다. 존슨 교수로부터 연락을 받은 시모무라는 1960년에 미국으로 떠났고, 나고야 대학은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한편 3년 후에 시모무라는 나고야 대학 조교수로 금의환향했다가 1965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는 않았으나 이후의 연구 생활은 계속해서 미국에서 보낸다.

시모무라가 미국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된 대상은 평면해파리(Aequorea coerulescens)였다. 그는 이 생물이 빛을 내도록 하는 물질을 연구하기 위해 1만 마리나 되는 해파리를 잡았고, 1962년에는 이 물질을 분리 및 정제하는 데 성공하여 여기에 에쿼린(Aequor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그는 에쿼린에 칼슘 이온이 결합하여 파란색 빛을 낸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이러한 성질은 1967년경부터 몸속에서 칼슘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연구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렇듯 생명 과학 연구에서 에쿼린이 중요해지는 가운데 시모무라는 더욱 더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매년 5만~10만 마리에 이르는 해파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의 성공에는 꾸준함과 부지런함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시모무라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그가 '녹색 발광 단백질(GFP: Green Fluorescent Protein)'을 발견한 업적을 인정받아서인데, 이는 원래 에쿼린 연구의 부산물이었다.

에쿼린이 내는 빛은 파란색인데 비해 살아 있는 해파리가 내는 빛은 녹색이었는데, 이러한 차이점에 주목한 그는 미량의 녹색 형광물질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단계에서 녹색 빛을 내는 단백질은 주된 연구 관심이 아니었고, 시모무라는 이 사실을 논문의 각주에 간단하게 몇 줄 적어 두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녹색 빛을 내는 단백질이 이후 생명과학 연구에서 각광을 받게 된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단백질 유전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생물체의 몸 안에 녹색 발광 단백질의 유전자를 집어넣어 특정 세포나 단백질이 빛을 내도록 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을 통해 예컨대 암세포와 같이 그 특성을 조사하고 싶은 세포나 단백질의 움직임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즉,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녹색 발광 단백질은 조사 대상에 표시를 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생명 과학 연구에 유용한 도구가 된 이 단백질을 처음으로 발견한 시모무라가 노벨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시모무라가 발광 물질에 대해 연구를 시작한 것은 생명과학 연구에 사용되는 도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그가 노벨상을 노리고 녹색 발광 단백질을 연구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묵묵히 성실하게 실험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연히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반세기 가까이 지난 시점의 과학계에서는 그의 연구 성과가 예상외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그 까닭에 시모무라는 노벨상 수상자가 될 수 있었다. 역시 노벨상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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