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페를린데(Verlinde) 교수의 가설, 초끈이론에 한발 다가서나?
물리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지 모른다. 네덜란드의 한 과학자가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조차 설명하지 못한 중력의 근원에 도전하는 학설을 내놓으면서
세계 과학계는 과학사 초유의 논쟁에 휘말릴 전망이다.
12일자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논란의 핵심은 에릭 페를린데(Verlinde) 교수
(암스테르담대 물리학과)의 최근 논문 '중력, 그리고 뉴턴 법칙의 근원'이다.
페를린데 교수는 1980년대 ‘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소립자나 쿼크 같은 구형이 아닌
끊임없이 진동하는 끈’이라는 초끈이론의 주요 난제를 풀어낸 세계적 물리학자다.
"중력이 원래부터 존재하는 힘이 아니라 우주의 다른 작용으로부터 생겨나는 현상이라는 새로운
가설이 과학자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NYT가 타전하자 우리 언론들도
"중력은 없다"(조선일보)거나, “중력개념 틀렸다”(서울신문)는 등의 자극적인 제목으로
이러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아이작 뉴턴(Newton·1643 ~1727) 이후 '불변의 힘'처럼 여겨져 온 중력이 우주를 지배하는
근원적 힘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이라면… 가설이긴 하지만, 300년 넘게 유지되어 온 뉴턴의 '만유인력'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뿌리째 뒤 흔드는 것이라 하겠다.
이들 천하의 이론들 역시 처음엔 가설이었단 점을 고려하면 무시하기 힘든 새로운 시각의 접근이다.
이 논문은 복잡한 수학적 논증을 통해 물리학자들이 중력에 대한 접근방식이 잘못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력은 전자기력, 핵력, 약력과 함께 우주를 지배하는 4가지 힘의 하나이지만 다른 힘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페를린데 교수는"지금까지 과학은 중력을 완전히 잘못된 시각으로 연구해 왔다. 중력은 자연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힘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우주의 법칙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세계 과학계에서는 ‘새로운 접근’이라는 찬사와 ‘폭탄같은 이론’이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물리학에서는 만물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이 모든 힘의 성질을 규명하며 중력 역시 ‘중력자’라는 입자의 역할 때문에 생긴다고 추정했지만, 중력은 다른 힘에 적용되는 수식들이 대부분 들어맞지 않는 데다 또 다른 힘을 결정하는 소립자들이 가속기에서 검출되고 있는 데 비해 중력자는 여전히 가설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중력을 다른 힘들과 연결짓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중력에 대한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는 뉴턴법칙이나 이를 보완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중력의 변화와 작용에 대해서만 설명할 뿐 중력이 어떻게 발생하느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페를린더 교수는 다른 힘들이 물질 자체에 들어 있는 입자로 인해 발생하는 것과 달리 중력은 질량, 시간, 공간 등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부수적인 힘으로 봤다.
페를린데 교수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열역학의 ‘엔트로피(물질계의 열적 상태)’ 개념을 도입했다. 어떤 물질 사이에 중력이 생기는 이유는 무질서한 흐름 속에서 자연이 평형을 유지하려고 움직이기 때문이며, 우주가 평형을 유지할 확률보다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무질서해질 가능성이 월등히 높기 때문에 중력이 계속 발생한다는 것이다.
페를린데 교수는 "'그 어떤 존재'가 열역학의 법칙(자연계에서 에너지의 흐름을 지배하는 법칙)일 가능성이 크다. 중력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어떤 존재'가 중력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마치 원자의 움직임이 '탄력'이라는 성질로 나타나는 것이나 개별적인 투자자의 행동이 모여 주식시장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본 셈이다.
이러한 페를린데 교수의 논문에 대해 “전혀 새로운 시각의 접근이며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는 극찬(미 이론물리연구소 리 스몰린 박사)에서부터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며 우리의 모든 믿음에 도전하는 폭탄 같은 이론”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입장(브렌데이스대 스탠리 데서 교수• 상대성이론 전문가)이나 “이 논문은 미세한 물질 간의 관계에서 뉴턴법칙을 보완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는 중립적 견해(한국고등과학원 이필진 교수) 등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이처럼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도 과학자들은 대체로 중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과학계가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우주의 현상을 밝혀낼 열쇠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앤드루 스트로밍거(Strominger) 교수(하버드대 물리학과)는 NYT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가설이 우주 현상 중 우리가 아직 풀지 못한 부분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라고 밝혔으며, 김제완 명예교수(서울대 물리학)는 "스티븐 호킹(Hawking)이 블랙홀과 열역학이 신비롭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중력이 근원적 힘이 아니라 또 다른 원인을 지닌 현상이라는 가설이 많이 나오는 추세다. 이 같은 가설을 허황한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지만 아직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며 이론으로 다루려면 더 많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NYT는 "우주를 끝없이 팽창하게 하는 암흑에너지, 우주의 90%를 이루면서도 통상적인 관측법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암흑물질 등 현재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 물리학의 논쟁들을 중력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페를린데 교수의 논문이 가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이기에, 과학계 전체가 논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는 페를린데의 이론이 초끈이론을 따르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만물의 궁극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우주와 자연에 작용하는 가장 근본적인 섭리는 무엇일까?’하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자연철학으로부터 오늘날의 첨단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온 중요한 주제와 관련된 문제의 해결단초로서 제시된 것이 초끈이론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양성자, 전자, 중성자와 같이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소립자들이 발견됨에 따라, 원자 역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궁극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근래에는 소립자 역시 물질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아니고 이보다 더 작은 쿼크(quark)라고 하는 입자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를 뒷받침하는 실험결과 등이 나온 바 있다.
그런데 1970~80년대 이후 미국 칼텍의 이론물리학자 존 슈바르츠와 영국 퀸 메리 대학의 마이클 그린 등이 발전시킨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에서는 대담하게 발상을 바꿔서, 만물의 궁극을 끈과 같은 형태라고 본다. 즉 우주의 만물은 소립자나 쿼크와 같은 기존의 단위보다도 훨씬 작은 구성요소인 ‘진동하는 가느다란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바이올린이나 첼로에서 각기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이 현의 진동 패턴과 주파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끈들이 진동하는 패턴에 따라서 각기 입자마다 고유한 성질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이 같은 초끈이론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초끈이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만물의 궁극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졌다고 할 수 없지만, 그나마 물질의 최소 구성단위를 당구공과 같은 구의 형태라고 생각해 온 것을 전면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에는 초끈이론이 우주와 자연의 모든 원리를 통합하여 설명하는 이른바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 때문에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가 우주를 거시적으로 볼 경우에는 대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떠올린다. 시, 공간과 중력의 원리 등에 대해 설명하는 상대성 이론을 적용하면, 태양과 지구의 운동, 머나먼 별빛의 경로 및 우주의 모습 등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다. 상대성 이론이 보여 주는 거시 세계는 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측 가능한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인 세계가 아닌, 원자 이하 단위의 아주 작은 미시세계를 기술할 경우에는 양자역학이라는 전혀 다른 이론을 적용해야 한다. 미시세계에서는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입자들의 운동 등을 확률적으로 밖에는 기술할 수 없고,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 나타나는 등, 우리가 거시세계에서는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과는 매우 다른 물리적 현상들이 자주 일어난다.
즉, 미시세계는 불연속적이며 예측 불가능의 세계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거시세계를 설명하는 상대성 이론과 미시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서로 대치되어 있는 셈이며, 현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두 이론체계가 충돌을 일으키면서 양립되지 못한다는 점은 오늘날 물리학자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초끈이론을 적용하면 아주 작은 물질 입자에서부터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커다란 천체에 이르기까지 자연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우주와 자연의 궁극적인 원리를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발견된 것이다. 왜냐하면 초끈이론에서는 만물이 1차원적인 끈의 요동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양자역학의 불연속성과 상대성 이론의 연속성 간의 모순을 해소하고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물리법칙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나는 신이 어떻게 이 세계를 창조했는지 알고 싶다. 신의 생각을 알고 싶은 뿐, 나머지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아니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아인슈타인의 평소 지론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말년에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만물의 이론’을 밝혀내기 위해 오랜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성공시키지는 못하였다.
과연 초끈이론이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꿈이었던 만물의 이론을 실현시켜 줄 수 있을까? 정말 뉴튼의 만유인력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까지 모든 물리학 이론을 통합하는 꿈의 이론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런 반신반의 속에서 초끈이론의 대가인 페를린데 교수가 중력이론을 뒤집는 가설을 들고 나왔기에 세계 과학계 역시 논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