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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전통과학

작성자유토피아|작성시간18.05.28|조회수254 목록 댓글 0

다음의 글은 중국의 전통적인 과학에 대한 사고방식을 근거로 한 중국의 과학철학을 서술한 것이지만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금척의 과학철학이나 수학사상에 관한 것은 상당하게 왜곡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주비산경이라는 수학서에 대한 평가에서 주비산경의 수학적인 의미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주비산경은 피타고라스의 수학과는 천차만별인데도...

 

독자들은 이점을 유념하시고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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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전통과학은 오늘날 그 존재조차 잊혀질 정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이후에 동양의 전통 과학은 서양의 근대과학에게 철저하게 패배하고 압도당하였다.

 

당시 동양의 지식인 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빨리 전면적으로 수용해야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근대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동양의 근현대사는 어떻게 보면 근대과학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근대를 수용하고 모방하던 시대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일부 비유럽 세계, 그 중에서도 동아시아 삼국은 비로소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함으로써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졌다.

지난 100년 동안 동아시아 삼국은 서양의 근대를 배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며, 그 사이 전통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제 동아시아 삼국은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전통에 대해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서양의 근대과학이 상당부분 동양의 전통 과학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동양의 전통과학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전근대시대 동아시아에서는 점차 신화적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연현상으로부터 규칙성을 찾아내고 그러한 규칙에 입각해 자연현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동아시아의 전통과학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중국 당나라의 학자들은 방술(동양과학)을 천문, 역산, 오행, 의방의 네 분야로 분류하였다.

 

천문은 일식이나 혜성과 같은 하늘에 나타난 이상 현상을 관측하고 이상 현상이 지상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는 일종의 점성술이다.

 역산은 천체관측이나 계산을 기초로 해 달력을 만드는 방법으로서, 정밀과학이란 측면에서 근대 천문학과 가장 가깝지만 달력에 길흉을 점치는 내용도 포함한다.

 

오행은 주로 길흉을 점치는 방법이다. 의방은 질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신선이 되는 비법인 연단술이나 방중술도 포함되었다.

즉, 천문과 역산은 오늘날의 천문학에 가깝고 의방은 의학에 가까우며 오행은 점술에 관한 분야이다.

방술 중에서 근대과학에 가장 근접한 분야는 천문, 역산과 의방이다.

물론 천문, 역산이나 의방에도 미신적인 점술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점술조차도 과학이 뒷받침된다면 과학사의 연구대상에 포함시켜도 무방하다.

 

 과학사의 과제는 특정시대의 과학이 갖는 보편성을 그 시대적 상황에 입각해서 규명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전통과학은 분명히 근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비과학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만 전근대시대 동아시아에서는 보편적 진리로 여겨졌다.

동아시아에서 과학이 국가에 의해 육성되고 통제되었으며 과학자들이 관료였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과학이 다른 문명권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갖도록 하였다.

 

동아시아의 과학자들이 순수 이론적인 탐구보다는 실용적인 분야의 탐구에 주력했던 것은 국가의 필요에 과학이 종속되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근대 시대 동아시아에서는 근대과학을 발전시켜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근대과학은 모든 문명이 보편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발전시켜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서 발생한 서구 특유의 문화적 산물이다.

전근대 시대 동아시아와 서양은 각각 다른 세계관과 다른 역사조건 속에서 각각 다른 과학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동아시아 과학사 연구는 동아시아의 전통과학이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발전했는가를 탐구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한때 과학발전에 기여했던 유교와 관료제, 과거제도가 그 폐단이 심화되어 더 이상 시대적 변화에 부응할 수 없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서양이 근대과학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동아시아의 전통과학이 쇠퇴하였다.

 

 

중국의 우주론

 

근대과학에 의해서 그 기초가 마련되기 전까지 우주의 구조와 생성에 관한 이론은 언제나 과학이론임과 동시에 형이상학 그 자체이기도 했다. 즉 전통적인 우주론은 경험적인 관찰에 근거하면서도 형이상학적 사변에 의존했다. 근대과학에서는 수학이 형이상학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수학의 힘에 의해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도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21세기가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라 할지라도 지금껏 우주의 끝을 경험해본 사람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새로운 연구 성과에 의해서 획기적인 새로운 이론이 제시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영원한 이론일 뿐이다. 그 때문에 가장 위대한 천체 물리학자는 동시에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론은 천문, 역산 연구의 기본전제를 제공한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우주론은 개천설이다. 개천이라는 이름은 하늘의 모양을 삿갓을 덮어놓은 모양에 비유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개천설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기계인 주비와 결부되어 발전하였다. 혼천설은 개천설보다 훨씬 설득력있는 구조론을 보여줄 수 있었다. 혼천설은 천문기계인 혼의와 혼상을 모델로 해서 발전하였다. 혼의는 여러 개의 둥근 테로 구성된 천문기계로 오늘날의 망원경에 해당한다. 혼상은 별자리와 적도, 황도 등을 새기거나 상감을 한 공 모양의 기계로 오늘날의 천구의에 해당한다.

우주 구조론으로서 혼천설이 개천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하늘의 형태와 하늘과 땅의 위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다. 하늘의 형태에 대해서 개천설은 평면이나 곡면으로 여기고 있는데 비해 혼천설은 분명히 천구개념을 보이고 있다. 하늘과 땅의 위치관계에 대해 개천설은 평행한 상하구조를 상정하고 있는데 비하여 혼천설은 하늘이 땅을 밖에서 감싸고 있는 내외 구조로 파악했다. 혼천설의 장점은 하늘을 회전하는 고정된 물체로 보고 황도와 적도를 설정하고 천구위에서 천체의 운행을 설명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선야설은 하늘이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거의 무한한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고정된 물체로서의 하늘의 개념을 배격함으로써 선야설은 하늘이 물에 의해 지탱되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10세기 초에 북송에서 일어난 성리학은 자신의 체계적인 철학 안에 우주론을 편입함으로써 기존 유학을 혁신하려 하였다. 성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혼천설을 계승하면서도 우주의 생성, 구조에 대한 옛 관념들을 재검토하고 합리화하려 했다. 성리학의 우주론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장재였다. 장재의 우주론은 기존의 우주론의 총결산임과 동시에 천문학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은 획기적인 이론이었다. 장재는 이전 시대의 기의 이론을 계승하여 우주는 기로 가득 차 있고 기의 운동에 의해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하늘은 기의 끊임없는 회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회전하는 기의 개념을 통해 해와 달과 별들이 어째서 땅에 떨어지지 않는지, 어떻게 기 가운데를 떠돌아다닐 수 있는지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장재의 우주론을 계승, 발전시킨 사람이 주희이다. 주희의 우주론은 하늘과 땅이 생성되는 과정을 고찰함으로서 시작하고 있다. 주희 역시 하늘을 기의 회전으로 보았으며 기의 회전과정에서 땅이 생겨난다고 인식하였다. 주희는 땅과의 거리에 따라 기의 회전속도에 차이가 있으며 회전속도에 따라 하늘을 아홉 개의 층으로 구별하였다. 땅에 가까운 층일수록 기의 농도가 짙으며 회전속도도 느리다. 아홉 번째 층에 이르면 매우 옅은 기가 매우 빨리 회전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딱딱한 껍질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 주희의 우주론은 장재의 우주론을 이어받아 그것을 혼천설의 발전방향으로 전개한 기의 무한우주론이었다. 중국의 우주론적 사색의 전통은 12세기말 마침내 주희에 의해 완성되었다. (주희의 우주론은 이후 동아시아의 유학자들을 지배하였을 뿐 아니라 17세기 이후 서양 천문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국의 역법

 

달력에는 오랜 기간에 걸친 천체 관측의 성과와 매우 복잡한 계산법이 숨어 있다.

역법은 시간을 일, 월, 연으로 구분하는 체계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역법이란 달력을 만드는 방법이다. 해와 달의 운행은 규칙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는데 비교적 확실한 기준을 제공한다.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모든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모든 문명은 자기 문명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고유한 역법을 가지고 있다. 역법은 기준으로 삼는 천체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눈다. 해의 운행을 기준으로 한 역법을 ‘태양력’이라고 하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대 이집트의 역법과 로마제국의 역법, 그리고 중세 유럽의 역법이 있다.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한 역법은 태음력이라고 하며, 지금도 이슬람권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해와 달의 운행주기를 조정한 역법을 태음태양력이라고 하며, 바빌로니아의 역법과 그리스와 로마의 역법, 그리고 동아시아의 역법이 이에 속한다.

서양의 태양력은 해의 운행만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그 원리가 간단하다. 율리우스력의 경우 평년보다 하루가 더 많은 윤년을 4년마다 한 번 설치하였다. 서양에서 역법은 천문학의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고, 천문학자들은 역법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서 역법은 천문학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역법은 해와 달의 운행뿐만 아니라 다섯별의 천구상의 위치나 일식, 월식 등의 계산도 포함하고 있는 천체력이라는 점에 큰 특징이 있다. 중국의 역법은 그 원리나 계산이 매우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역법을 제작하려면 고도의 천문학적, 수학적 훈련이 필요하다. 중국의 천문학자들은 하늘을 구면으로 보고 혼천의를 사용해 가상적인 구면 위에 펼쳐진 천문현상을 관측하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천체의 운동을 계산하고 예측하였다. 이것은 천체의 운동을 역법으로서 다룬 것을 의미한다.

중국 천문학에서는 천체운동론이 역법에 포섭되기 때문에, 역법이 천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상용력과는 다른 천체력이 중국에서 성립하게 되었다. 그 대신 어디까지나 가상적인 구면 위의 현상을 고집함으로써 우주 구조론이 완전히 빠져버리게 된다. 특히 우주구조에 대한 논쟁이 혼천설의 승리로 끝난 후 천문학자의 관심은 오로지 해, 달, 다섯별(행성)의 운동에 대한 기술과 계산을 포함한 역법의 작성에 집중되었다.

고대 그리스 이래의 서양 천문학에서는 천체운동론이 역법과 분리되어 발전하였다. 그리고 항상 우주의 구조를 염두에 둔 채 천체의 운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달랐다. 가상적인 구면은 거리를 갖지 않는다. 아니 거리를 갖는가 아닌가 하는 의문 자체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현상의 기술과 계산에 파고들었다. 천체는 가상적인 동일 구면 위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운동하고 있다는 명제가 암묵적인 전제로 깔려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역법을 제작하는데 충분하였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역법의 제작은 국가의 초특급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프로젝트의 대상에는 상용력뿐만 아니라 천체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체력의 제작을 전통으로 지속시켜 준 것은 해와 달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다섯별의 운행도 역시 인간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천인감응론이었다. 개개의 천문학자들이 그것을 믿고 있었는지 아닌지 관계없이, 천인감응론은 왕조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사상으로서 중국 천문학의 특징을 지속적으로 규정해 왔다.

은나라의 달력은 갑골문 중 일부에 남아있는데 갑골문이란 거북의 껍질이나 무소의 어깨뼈에 기록한 문자를 가리킨다. 은력은 태음태양력으로서 60간지를 가지고 날짜를 기록하였다. 60간지 혹은 60갑자란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의 조합을 말한다. 그러한 날짜 계산은 은나라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3천년을 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매월의 일수는 삭망월을 기준으로 정하고, 30일의 큰달과 29일의 작은달을 적절하게 조합해 큰달과 작은 달을 거의 번갈아가며 배열했는데 때로는 큰달을 두 번 연속해서 배열하기도 했다. 이렇게 큰 달을 연속해서 배치하는 방법을 연대배치법이라고 한다. 달의 이름은 순서대로 표시해서 첫 번째 달을 정월, 두 번째 달을 2월, 열두 번째 달을 12월이라고 불렀다.

태음태양력은 달이차고 이지러지는 것에 맞추면서 동시에 계절의 운행에도 맞추어가는 역법이다. 즉 삭망월과 태양년을 어떻게 결합시키는가가 역법의 근본이다. 1삭망월의 평균치는 약 29.5306일이고, 1태양년의 평균치는 약 365.2422일이다. 12삭망월은 약 354.3671일이므로, 한달의 일수를 354일 또는 355일로 취하면, 1태양년과 10일 또는 11일 정도의 차이가 생긴다. 3년이 지나면 1삭망월의 일수를 초과하게 되므로, 이 차이를 없애기 위해 윤달을 놓을 필요가 생긴다. 1년 12개월로 구성되는 평년과 13개월로 구성되는 윤년의 구별이 생겨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윤달을 몇 달 만에 놓을지 결정하는 방법을 치윤법이라고 한다.

기원전 5세기 무렵에는 달(삭망월)과 계절(태양년)의 불일치를 바로잡는 지침으로 ‘24절기’가 완성되었다. 24절기란 1태양년, 즉 계절의 주기를 24등분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24절기는 적경을 24등분했을 때 해가 각 지점을 통과하는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계절의 순환을 보여주는 24개의 표지이다. 전국시대에는 1태양년의 일수를 365 1/4 (=365.25)로 하고 1삭망월의 일수를 29(29.53085)로 하는 사분력이 실시되었다. 19년 사이에 7개의 윤달을 삽입하면, 19년이 235개월에 해당하게 된다. 그리고 235개월의 일수는 19년의 일수와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 태초력은 전한 말기에 유흠에 의해 증보되어 삼통력이 되었는데, 삼통력은 일식, 월식의 예보를 위한 135개월 주기, 다섯별 운행의 추산 등을 채택한 천체력으로서 후대 역법의 모델이 되었다. 삼통력에 이르러 중국 역법의 전통적인 구조가 완성되었다.

 

 

중국의 천문

 

천문관측에 대해서는 중국이 훨신 이른 시기에 서양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유럽보다 훨씬 더 정확한 역법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17세기 이전까지는 일식의 예보에서 중국 측이 더 뛰어났다. 그리스 이래 서양 천문학은 관찰 대상을 태양과 달 및 다섯별의 운동에 집중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황도 근처에서 관측되었다. 서양에서는 황도좌표계를 사용했고, 따라서 황도부근의 천체운동에 대해서는 서양 천문학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적도좌표계를 사용했기 때문에 세차의 발견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황도면에서 멀리 떨어진 천체에 대해서는 적도좌표계를 채택한 중국 쪽이 훨씬 유리했다.

기원전 첫 번째 천년동안 중국인들은 시간권이 적도를 나누는 점에 의해서 정의되는 적도좌표계를 만들었다. 적도좌표계에서 시간권이 적도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별자리가 바로 28수이다. 중국인들은 28수에 따라 하늘을 28개의 부분으로 분할하였다. 28수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면 별의 위치를 정확하게 표시할 수 있게 된다.

황도좌표계가 주로 해와 달, 다섯별의 운행을 관측하기 위한 것인데 반해, 적도좌표계는 천구 상의 북극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항성을 관측하기 위한 좌표계이다. 북극은 하늘의 중심에 있으면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중국의 별자리 체계는 먼저 28수를 동, 서, 남, 북 각 7수씩 정리하고, 거기에 속하지 않는 별자리는 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의 세 영역으로 구분한다.

중국의 별자리 체계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28수의 존재이다. 28수란 천구상의 적도 근처에 있는 28개의 별자리를 말한다. 달은 날마다 하늘에 나타나는 위치가 달라지다가 28일쯤 지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대략 달의 위치를 기준으로 별자리를 28개로 나누어 28수라 했다. 중국인들은 28수를 일곱 개씩 넷으로 나누어 동서남북에 배정하였다. 네 방위의 별자리를 모아 동방칠수, 남방칠수, 서방칠수, 북방칠수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그 모습은 각 방위를 지키는 사신을 본떳는데 동방칠수는 청룡, 남방칠수는 주작, 서방칠수는 백호, 북방칠수는 현무를 본떴다.

근대 천문학이 들어오기 이전에 중국인들이 알고 있었던 행성은 수성부터 토성까지 5개 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다섯별’(오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섯별은 지구에 가까이 있어서 다른 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밝고 관찰하기 쉽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일찍이 다섯별에 대해 주목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1세기 말에는 공전주기에 대한 추정치가 실제 값에 거의 접근할 정도가 되었다. 이보다 100여년이 더 지나서야 유럽에서도 그 정도의 정확한 값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관측이 정밀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섯별의 운동에 관한 중국의 연구결과는 순전히 수치적인 것에 머물렀다. 한편 다섯별은 역행이나 밝기와 크기의 변화 등 유별난 데가 많기 때문에 일찍이 점성술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중국인들은 땅 위의 모든 현상을 천문현상으로 인식했으며 하늘의 불변성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천문현상들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이리하여 천변의 기록과 지상의 정치적 사건의 기록이 대대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였다. 기록이 쌓이는 동안 하늘과 땅 사이의 관계에서 경험적인 법칙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그 법칙들은 점의 형태로 정리된다. 앞에서 여러 차례 인용했던 ‘진서’나 ‘구당서’의 천문지는 바로 그러한 점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록이다. 만약 어떤 천변이 발생하면, 천문학자들은 역대 정사의 천문지 등을 들추어 보고 이 천변이 지상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천변점성술의 전통이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문명은 동아시아였다.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점성술은 관료제 안에 정착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받고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세계사상 유례없는 장기간에 걸친 풍부한 관측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점성술은 결코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경험적 자료를 쌓아 놓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경험적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있어야 비로소 과학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천문 현상과 지상의 정치적 사건 사이의 관계를 완벽하게 이론화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일식의 발생 원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발생 일자까지 예보하게 되었으며 혜성의 주기성도 인식하게 되자 ‘천변’의 의미는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일본의 천문역산학

 

중국의 전통과학을 모르고는 우리의 전통과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 일본의 전통과학이 중국 혹은 우리를 모방했다고 해서 절대로 깔보아서는 안된다. 동아시아 과학사란 바로 한국, 중국, 일본의 전통과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일구어낸 역사이다. 그것은 세 나라의 과학유산이 서로 매우 닮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독자적인 역법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일정수준 이상의 관측기술과 계산법이 필요하다. 특히나 천체력인 중국의 역법은 더욱 높은 수준의 기술과 지식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과 지식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15세기에 조선에서 칠정산이 제작되고 17세기에 일본에서 죠오쿄오력(貞亨曆)이 제작되기 이전에는 역법의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달력을 받아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자적인 역법을 사용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국을 자극할 수 있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다.

조선시대는 국왕과 사대부들이 이 땅에 중국 문명의 정수를 완벽하게 구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시대였다. 중국 문명의 정수란 바로 유교경전에 실려 있는 성인들의 가르침이었다. 사대부들은 위정자들이 요임금과 순임금으로 대표되는 성인들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왕도 즉 군주라면 반드시 실현해야 할 정치의 기술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 기술의 요점은 바로 자연의 운행에 순응하는 데 있었고, 천문 역산학은 자연의 운행을 관찰하고 계산하는 학문이었다. 특히 서경에서 요임금이 삼가 천체운행의 원리를 파악해, 해와 달과 뭇별의 운행을 계산하고 관측하도록 하라고 명령한 구절은 천문, 역산 프로젝트에 임하는 조선의 군주들과 신하들에게 확고한 지침이 되었다.

세종 15년(1433)에 세종은 정초와 정인지 등에게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하고, 이순지와 김담에게는 칠정산외편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 결과 세종 24년(1442)에는 내편과 외편 모두 완성되었고, 2년 후에는 책으로 간행되었다. 1442년 이후 달력의 제작은 칠정산에 의거해서 시행되었다. 이렇게 칠정산에 입각해서 제작된 독자적인 달력을 본국력 혹은 향력이라 불렀다. 칠정산은 1653년에 청나라의 역법인 시헌력이 채택될 때까지 210년 동안 사용되었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던 전란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등장한 에도시대는 천하태평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크게 번성한 시대였다. 병법이나 무술보다도 학문과 예술이 대접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관료와 학자들은 천문역산학에 관심을 가지고 개력을 추진할 수 있었다. 개력은 책상 위에서 주판을 튕기는 것만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 그 때문에 정부 요직에 있는 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적 수완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단지 세 치 혀만으로는 권력자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과학자로서의 능력도 필요했다. 시부카와 하루미(澁川춘海)는 이 두가지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죠오쿄오 개력은 칠정산의 제작보다 약 240년 후에 이루어졌다. 죠오쿄오력은 1756년에 호오레키력(寶曆曆)으로 개력할 때까지 70여년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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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약 4,000년 전 우나라의 임금이 치수공사를 하던 중, 물속에서 기어 나온 거북이 등에 있는 무늬를 보고 낙서를 하였다. 낙서의 수는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계가 모두 15가 되는 3차 ‘마방진’이었고 이것은 숫자 속에 숨겨진 우주의 질서로 생각되어 ‘기문둔갑술’로 발전하였다. 원래는 1에서 9까지의 숫자가 가로 셋, 세로 셋의 배열로 놓였을 때 그 합이 어느 방향으로나 15가 되는 모양을 기본으로 한 무늬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교묘한 숫자의 배열로부터 사람들은 우주의 수학적 질서 즉 ‘주역(周易)’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모으게 하였다. 또 일년을 만드는 열두달과 한달을 만드는 30일, 그리고 그것을 합쳐 나오는 360일이라는 숫자에도 모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동아시아로부터 전해진 이 낙서, 마방진 등의 지식을 얻게 된 후, 수와 수적비례 그리고 조화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수는 만물의 척도’라고 하였으며, 사물은 수들로 구성되어 있고, 수는 사물과 닮아서 사물 그 자체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상수원리’가 서양수학의 기본개념이 되었다.)

중국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주역’은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만물이 생성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해석한 책이다. 부드러움과 강함이 함께 하면서 그 속에서 변한다는 것이 역(易)의 핵심 사상이다. ‘주역(周易)’은 내용이 풍부하고 다루고 있는 내용도 아주 광범위하다.

천문, 지리, 사람의 일상사 및 자연과학에서 사회과학까지, 생산에서 생활에 이르기까지, 제왕과 재상이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에서부터 백성의 처세와 지켜야 할 도리에 이르기까지 아주 상세하게 다루었다. 일분위이(一分爲二), 대립과 통일의 우주관, 유물주의와 변증법의 방법론을 활용하여 우주만물의 발전과 변화의 법칙 및 대립과 통일의 법칙을 명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세계관을 활용하여 8괘를 통해 자연계 및 사회와 사람 본연의 각종 정보를 예측하는 것이다.

은나라 말에 주 문왕이 64괘의 단사를 썼다. 즉 기본요소는 양(-)효와 음(- -)효이고 이효(二爻)를 겹쳐 놓으면 8괘, 즉 건(乾; 별), 곤(坤; 땅), 진(震; 우뢰), 간(艮; 산), 이(離; 불), 감(坎; 물), 태(兌; 연못), 손(巽; 바람)이 된다. 8괘를 다시 겹치면 64괘가 된다. '경(經)'은 64괘의 괘상, 괘명, 괘사, 효사 네 부분이다. 괘사는 전괘의 뜻을 해석하고 효사는 효 하나하나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모든 괘는 양효(陽爻)와 음효(陰爻)로 구성된다. 만약 양효를 1로 하고 음효를 0으로 하면 이진법의 2는 10이 되는 규칙에 따라 건부터 곤까지 64괘는 모두 0과 1로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제1괘인 건괘는 111111=63, 제2괘는 011111=62, 제3괘는 101111=61이 되고 이렇게 죽 배열해 나가면 제62괘는 010000=2, 제63괘는 100000=1, 마지막 1괘는 000000=0이 된다. “오직 0과 1만 존재하는 이진수는 형식이 간결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양(量)을 나타낼 수 있다.” (음양 팔괘를 통하여 처음으로 이진수의 개념을 제기한 것이다.)

한나라 이후 ‘주역’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한무제의 “백가를 배척하고 오로지 유교의 사상만을 존중하자”는 정책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함으로써 ‘주역’은 나라를 다스리는 경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상수학

중국인에게 있어서는 존재는 부동의 실체가 아니고 움직이며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움직여 멈추지 않는 존재를 ‘기(氣)’라고 부른다. 만물은 ‘기’에서부터 생성하여, ‘기’로 소멸되어 간다. 중국인은 ‘기’의 운동 가운데에서 유동하는 세계의 기본적인 패턴을 찾아낸다. ‘기’는 우주에 충만한 연속적 물질(에너지)이다. 그에 관련해서 중국에는 원자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만들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극미(原子)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는 말하자면 연속적인 장(場)이며, ‘기’의 운동은 흔히 파동의 이미지를 통하여 파악된다.

그 운동의 기본적인 ‘패턴’은 태양의 운동에 바탕하는 사계절의 변화 가운데에서 나타난다. 봄부터 여름에 걸쳐서는 양기가 신장하고 음기가 쇠퇴하는 과정,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서는 양기가 쇠퇴하고 음기가 신장하는 과정이다. 음양의 ‘기’의 파동적인 리듬은 1년을 주기로 하여 순환한다.

음기 앞에는 양기가 있고 양기 앞에는 음기가 있다. 더욱이 양기라는 것은 ‘기’가 가볍고 빠르게 운동하는 상태(動), 음기라는 것은 ‘기’가 무겁고 느리게 운동하는 상태(靜)에 대하여 주어진 비교개념이며, 본래는 단 하나의 ‘기’가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음양의 ‘기’의 순환은 상호 전화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음양의 기의 상호 전화와 순환적 변화에, ‘기’의 운동의 기본적 패턴이 있다.

물론 개개의 실재(實在)는 ‘기’의 복잡한 형성물이며, 더욱이 동류간(同類間; 음기-음기, 양기-양기) 및 이류간(異類間; 음기-양기)에 특정의 상호 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 ‘패턴’은 극히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리하여 개개의 사물과 현상 혹은 그 유(類)에 대하여 하나하나의 고유한 ‘패턴’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코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주자는 대학에서 '격물(格物)·치지(致知)'를 강조했는데, 그것은 개개의 사물과 현상 가운데에서 고유한 ‘패턴’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은 ‘패턴’을 양의 인식에다 결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역의 원리는 이진법(二進法)에 의한 ‘패턴’의 표시이다. 음과 양, 건(--)과 곤(-), 오늘날의 방식으로 말하면 0과 1의 여러 가지 배열 방법, 즉 ‘패턴’에 의하여 사물과 현상의 여러 가지 ‘패턴’을 분류하고 표시하려 한다. 기본적인 ‘패턴’으로서는 8가지가 선택된다. 그것은 이진법의 3자리수까지의 수에 해당한다. 그리고 8의 2승, 즉 64, 2진법으로 말하면 6자리수까지의 수에 의하여 사물과 현상의 모든 ‘패턴’이 표현된다. 또는 무한히 다양한 ‘패턴’도 결국은 64가지의 ‘패턴’에 귀착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역의 64괘이다.

괘(卦)의 의미부여는 각각의 괘에 있어서의 음양의 배열방법과 괘 상호간의 배열의 변화방법에 의하여 주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패턴’에 있어서의 음양의 배치와 상호 전화 및 순환적 변화의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적 인식과 패턴인식을 결합하려는 노력은 이윽고 ‘상수학(象數學)’이라고 불리는 학문을 낳았다. 역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수와 ‘패턴’의 통일적 이론을 쌓기 위하여 송의 철학자 소강절(邵康節)은 몇 개의 도식(圖式)을 채용하였다. 하나는 만물의 ‘패턴’을 이끌어 나가는 우주생성론적 도식이다.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로 말하면 태극으로부터 음양이, 음양으로부터 사시(四時)가 생긴다고 하는 도식을, 소강절은 1에서 2가, 2에서 4가, 4에서 8이라는 무한한 수의 2분할로 전개하여 1·2·4·8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수에 원소나 성질 등에 의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만물과 그 고유의 ‘패턴’을 이끌어 낸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시간의 ‘패턴’ 도식이다. 1년은 12월, 1월은 30일, 1일은 12각(刻), 1각은 30분이라는 시간단위에 착안하여, 이 12와 30이라는 수의 조합을 1년을 단위로 하는 역사적 시간에 끼워 넣어 순환적인 역사의 여러 가지 주기를 이끌어 냈다. 그 최대의 주기는 2만 8천 2백 11조 9백 9십만 7천 4백 56억 년이라는 엄청난 것이었다.

소강절의 ‘상수학’은 다양한 사물이나 현상의 패턴을 간결하고 통일적인 수의 이론으로 구성하려는 시도가 그 의도였지만 마침내 방대한 수자의 유희라는 밑 없는 늪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중국인이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우리들은 이해할 수 있다. 역의 이진법과 라이프니츠에 의한 이진법 발명과의 관계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정보과학에 있어서의 이진법과 패턴인식에 대하여도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과 ‘상수학’에는 정보과학으로의 싹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논한 것과 같이 중국인은 근대과학을 뛰어넘어 현대과학의 과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근대과학이 태어날 수는 없었다.


 

중국의 대수학

 

전통 중국에서 ‘수학’은 ‘산학’이라고 불리었고, ‘산가지’를 써서 ‘역법’이나 실용적인 목적의 ‘계산’에 사용했다. 이러한 ‘대수학’이 중국에서 발달한 이유는 그들이 자연현상을 양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즐겨 썼기 때문이다.

 ‘대수학’은 국가의 재정 회계 등과 관련이 있는 실무적인 지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고급관리인 학자 층의 교양으로도 필요하였다. 즉 중앙집권적인 중국의 관료제 사회는 대규모의 치수, 관개, 곡물수송 등을 필요로 하였는데, 이러한 산업과 관련해서 학자관료는 수리공학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했다.

산가지는 중국 고대에 2000년 동안 셈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계산기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산가지’가 점차 수요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면서 ‘주판’이 생겼다. ‘주판’의 원리와 기본방법은 ‘산가지’와 대체로 비슷하나 ‘주판’이 더 편리하고 발전된 형태로 계산이 간결하고 속도도 훨씬 빨랐다. ‘주판’은 ‘산가지’의 세가지 특징인 9개 숫자 부호와 0의 개념, 자리 잡기 원리, 십진법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9개 숫자 부호와 0의 부호를 나타내는 방법도 같다.

가장 널리 알려진 주산서적은 정대위(程大位)가 지은 ‘산법통종(算法統宗)’으로 주산의 규칙과 계산법칙에 대해 전반적으로 설명하여 놓았다. 주산 구결(口訣; 외우기 쉽도록 요점만 정리하여 만든 어구)은 오경(吳敬)의 ‘구장산법비류대전(九章算法比類大全)’이 가장 유명하다. ‘주판’은 일반백성이 사용하기에 적당했을 뿐만 아니라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어려움 없이 ‘주판’을 이용하여 계산 할 수 있었다. 중국의 주산은 점차 한국 및 일본, 인도, 미국,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다.

진한시기에 중국에서는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수학저서가 쏟아져 나왔다.

중국 최초의 천문수학 저서인 ‘주비산경(周髀算經)’, ‘구장산술(九章算術)’도 이 시기의 것이다. 주비산경은 천체와 수학을 다룬 천문역산 저서로, 주로 개천설에 대해 토론하고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 정리도 제시하였다.

주비산경과 거의 동시에 나온 수학저서 ‘구장산술’은 246개의 응용문제 해법을 비롯하여 산술, 초등 기하, 초등 대수 등 다방면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에는 분수 사칙연산, 비율 구하는 법,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한 측량상의 문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음수에 대한 개념과 음수와 양수의 가감법칙이 있으며 이 밖에도 제곱, 세제곱, 일원이차방정식의 해법과 연립일차방정식의 해법 등에 관한 많은 문제를 설명하였다. 구장산술의 수학체계는 실제적인 계산에 치중하였다.

삼국 양진 남북조시기에는 훌륭한 두 명의 수학자 유휘(劉徽)와 조충지(趙沖之)가 배출되었다. 유휘는 ‘구장산술’에 문자로 주석을 달았다. 그의 주석 내용은 상세하고 풍부하면서도 원서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고 새로운 견해를 많이 내놓았으며, 수많은 수학 원리와 증명을 만들었다. 이것들이 각종 계산법에 응용되면서 유휘는 중국 전통수학 이론체계의 기초를 세운 창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유휘는 ‘구장산술’에 주석을 더한 것 외에도 ‘중차(重差)’를 펴냈다. 할원술(割圓術)을 만들어 극한 개념을 활용하여 원면적과 원주율을 계산하였으며 십진분수, 작은 단위수 및 미수(微數)를 창의적으로 계산하려 했다. 또 수많은 중요한 수학개념에 정의를 내리고 율(率)의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직각 삼각형의 성질을 활용하여 중차술을 만들어 보급시키고 고유의 정확한 측량법을 확립했다.

또 유휘원리를 제시하여 직선형 입체부피 계산법의 이론체계를 확립하였으며, 모형, 도형, 예제를 활용하여 관련 계산법을 논증하고 설득력과 응용성을 강화함으로써 중국 전통 수학의 체계를 형성하였다.

유휘에 이어 200년 뒤 남북조시기에 조충지(祖沖之)가 원주율을 계산하였다. 진한 이전 사람들은 지름이 1일 때 원주가 3이라는 주삼경일(周三徑一)로 원주율을 삼았는데 유휘는 원에 내접하는 정 96각형일 때 원주율이 3.14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그런데 조충지는 이전 사람들의 계산과 원리의 기초위에 파이가 3.1415926에서 3.1415927 사이임을 제시하였고 파이분수 22/7와 355/133 근사치를 취해 원주율을 표시하였다. 이중 355/133에서 얻은 여섯 자리 소수가 3.141929이고, 분자분모는 1,000 이내 가장 접근한 파이 값의 분수이다. 조충지가 계산해 낸 이 원주율을 유럽 수학자들은 이로부터 1천 년이 지난 후에야 얻을 수 있었다.

조충지는 자신의 아들 조긍과 함께 구의 체적계산법도 구하였다. 즉 평행한 두 평면 사이에 두개의 입체가 놓여있는데, 이 두 평면에 평행되는 평면에 의해 잘린다면, 만약에 두 절단면의 면적이 동일하다면 이 두 입체의 체적은 같다는 것이다. 조충지가 발견한 1천 년 뒤 이 원리는 서양에서 카발리에리(Cavalieri)가 재발견하였다.

‘사원옥감(四元玉鑑)’은 주세걸(朱世傑)의 역작으로 총 3권, 288문제로 되어 있다. 이 책의 모든 문제는 방정식의 해를 구하거나 연립방정식을 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가운데 사원의 문제 7개, 삼원의 문제 13개, 이원의 문제 36개, 일원의 문제 232개가 나와 있다.

명나라 주재육(朱載堉)은 1584년 ‘율학신설(律學新設)’을 완성하고 처음으로 12평균율 이론과 계산법을 제기함으로써 각 음계간의 비율을 정확하게 재정립하였다. (이는 서양에서보다 100여년 앞선 것이다.) 그는 12평균율 이론에 따라 세계에서 처음으로 ‘현준(弦準)’을 개발하였다. 그는 개평방(開平方; 제곱근 구하기)과 개입방(開立方; 세제곱근 구하기)의 수학연산을 율학에 응용하여 두 음계간의 음 주파 차이가 1.059463094라는 결과를 얻었으며, 수치를 소수점 아래 십 몇 자리까지 정확하게 나타내어 가장 완벽한 등비수열을 유도하였다. 이로써 각 음계의 음 높이 간격이 같다는 것을 알아내어 움률 상에서 음계의 조바꿈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였다. (현재 12평균율의 이론은 세계 각국에서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다.)

조선의 풍수

풍수(風水)란 대지를 흐르는 ‘기(氣)’를 읽어내어 만대에 걸쳐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도록 ‘기’의 흐름을 살린 집이나 묘지, 도시를 디자인하기 위한 이론 내지 방법론이다. 생기(生氣)는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에 닿으면 머문다고 한다. 풍수에서는 보통 산맥에 따라 기맥이 있다고 알려져, 그 기맥이 평지에 도달하여 힘을 담은 장소가 좋은 땅이 된다. 현실의 존재방식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음양오행론’이고 그 논리에 의해서 생활의 존재방식을 개선하려는 구체화의 하나가 ‘풍수술’이다.

‘풍수술’은 ‘기’에 의해서 대지의 형세를 판단하고 조작해서 그 땅의 길(吉)을 얻고 흉(凶)을 피하려는 것이다. 지형의 판단은 ‘득수(得水)’를 으뜸으로 하고 ‘장풍(藏風)’을 다음으로 한다. ‘기’의 면에서 볼 때 풍수사는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기’를 볼 수 있고 갖가지 도구를 이용해서 ‘기’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의 장례식에는 도사나 승려가 힘을 지녀 의례를 주관하였다. 한편 조선조에서는 풍수사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조선에 풍수가 성행한 하나의 원인이다.

조선시대 민중들은 풍수란 묘지의 길흉을 나타내는 법술(法術)이라 생각하였다. ‘묘지(陰宅)’는 부모를 비롯한 선조들의 안택이며 ‘주택(陽基)’은 자손의 안택이었다. 근본이 되는 부모나 선조에게 잘하는 것이 자손의 번영을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살아있는 자들의 ‘주택’보다 ‘묘지’가 길상의 자리에 자리 잡게 되기를 크게 바랐다. 더구나 조선조는 주자학을 철저하게 사회에 적용하였기 때문에 선조의 묘지를 좋은 자리에 잡는 것은 효의 실천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묘지의 선정에는 풍수설이 이용되고 이것에 의해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 중요시 되어왔다.

풍수는 단순히 지형, 방위 등의 판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형, 방위 등의 구조상의 결함을 ‘주물(呪物)’로써 보충한다는 주술적 측면이 있었다. 어떤 ‘주물’을 사용하는가에 의해서 신령스러운 가르침이 있는 경우도 있어서 풍수설은 무속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풍수를 늘 마음에 간직하는 문화도 융성하게 되었다.

17세기는 위기의 시대였다. 왜란 후 호란이 잇따라 일어났을 뿐 아니라 이른바 소빙기(小氷期)현상의 자연재해가 연속되어 사회적 불안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었다. 태양의 흑점활동의 쇠퇴로 기온이 전반적으로 강하하면서, 가뭄과 홍수 등이 번갈았으며 기근이 연속되고 전염병이 자주돌아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가 사회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 위기적 상황은 인구가 200-300만이나 감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회의 불안고조가 ‘도참설’ 유행의 온상이 되었다. 나라의 근본지인 도읍을 잘못 선택하여 이런 재난이 계속 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즉 풍수의 주술적 특성을 수용한 ‘정감록’이 등장하여 사회변혁을 기대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그것은 구원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나 현실성은 크게 뒤지는 것이었다.

(당시 선조-광해군은 허준에게 당대 의술의 총정리 작업인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고 ‘벽역신방(僻疫神方)’등 전염병 치료에 관한 책을 쓰게 하였으며, 김육(金堉)은 세제의 쇄신에 앞장서 ‘대동법(大同法)’의 조속한 시행을 촉구하고, 상공업 진흥, 화폐의 보급 등을 주장하였다. 또 송시열(宋時烈)처럼 주자(朱子)의 진휼책(賑恤策)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주장아래, 주자 절대주의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었다.)

풍수는 어떤 면에서 조선 지리사상의 뿌리였다. 개화시기 외국에서 공부한 지도자들은 한국을 미신이 설치는 나라라고 하면서, 이 미신을 타파하는 것이 생활을 투명하게 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말한 미신 중에는 점쟁이나 관상가, 풍수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의 전통의술

고대 중국인들의 관념 속에 ‘질병’은 ‘역귀’가 오는 것으로 ‘무(巫)’는 능히 귀신을 쫓을 수 있으며 따라서 질병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의(醫)’도 능히 병을 치료할 수 있어서 고서에서는 항상 ‘무의(巫醫)’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고대 중국의 의사들은 ‘호흡’, ‘소화’, ‘순환’의 기능에 대한 많은 문헌을 남겼는데 음양의 본성상 양은 상승하고 음은 하강하므로 기관을 상승하는 호기는 양에 속하며, 양으로 분류되는 신체기관인 심장과 폐가 호기와 연관되어 있다. 반면 하강하는 흡기는 음에 속하며, 음에 속하는 기관인 간장 및 신장과 연관되어 있다. 비장은 그 중간에 위치하여 호기와 흡기를 모두 받아들인다. 사람이 숨을 들이 마시면 들이 마신 공기는 음의 기운에 의해 비장을 통과하고 심장과 폐를 우회하여 간장과 신장으로 직접 하강한다. 반대로 숨을 내쉴 때는 비장으로 들어온 공기가 양의 기운에 의해 심장과 폐로 상승한다.

또 섭취한 음식물은 위장으로 내려간다. 위에서 비장의 영향을 받아 수곡의 단맛, 매운맛, 짠맛, 쓴맛, 신맛 즉 ‘오미’는 각각 담백 무미한 기, 역겨운 기, 향기나는 기, 뜨거운 기, 악취나는 기 등 다섯 종류의 ‘기(氣)’로 변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기(氣)가 각각 ‘오미’에 대응하고 각각 ‘오행’에 대응하며 다시 ‘오장’에 대응한다. 다섯 가지의 기는 비장의 영향을 받아 물 성분과 혼합되면서 붉게 변해 혈액을 산출한다. 결국 섭취한 음식물은 위장에서 비장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며, 그 불순한 부분은 위의 밑 부분 유문으로 배출되고 순수한 부분은 기가 되어 위의 윗부분 분문을 통해 밖으로 배출되어 혈액이 된다.

혈액순환의 과정은 먼저 위의 내관인 중초에서 시작되어 위의 윗부분 분문을 통해 밖으로 나아가 식도 즉 상초로 올라간다. 혈액은 상초로부터 ‘수태음’이라는 혈관으로 흘러 들어가 흉부에서부터 엄지손가락 끝에 이르기까지 혈액이 공급된다. 다음으로 ‘수양명’이라는 혈관으로 흘러들어가 식지손가락 끝으로부터 머리까지 환류한다. 그런 후 머리에서 ‘족양명’이라는 혈관을 타고 혈액은 머리로부터 새끼발가락 끝까지 하강한다. 그렇게 혈관에서 혈관으로 유입되어 흐르는 동안 혈액은 신체의 20개 혈관을 통과하게 된다. 전신을 한 바퀴 돈 다음에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되며 출발점에서 다시 순환하기 시작한다.

중국의 전통 의술은 (1) 건강과 질병에 관한 이론적 탐구와, (2) 약물 및 기타 처치법으로 질병을 치료하였고, 아울러 (3) 일반적인 섭생과 여러 건강 비법들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전통중국의 의술은 인체 내의 기관들보다 그 기능들을 중요시해서 서양과는 차이를 보였다. 즉, 그들은 ‘간’이나 ‘신’과 같은 용어로 간장, 신장과 같은 구체적 기관들만을 가리킨 것만이 아니라, 그 기관들과 관련된 기능들을 함께 가리켰다. 심지어는 해부학적으로 알 수 없는 '삼초'를 오장육부의 하나로 포함시키기까지 하였다. 또 침, 뜸 등의 처치법은 독특한 것이며, '본초'에는 동물, 식물, 무기물의 약효를 포함한 많은 지식을 분류,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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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대문명도 중동이나 이집트의 고대문명과 같이 신화적 바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흐름이 주(周)나라의 역성혁명과 주공(周公)의 작업으로 방향을 틀어 공자의 인문주의로 집대성되었다. 공자는 ‘거리두기 방법’으로 중국문명을 인문세계로 인도하였다. 공자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 관하여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외하는 마음을 품어주되, 그것과 나와의 철저한 ‘거리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였다. 거리감을 유지하는 끊임없는 동적 평형의 방법을 통하여 공자는 신적 존재를 나의 존재로부터 차단시켰을 뿐 아니라 그 종교적 경건성의 모든 의미를 인문정신 속에 포섭(包攝)하였다. 신적 세계와 나와의 거리가 유지될 수 있을 때만이 참된 앎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국정신이란 신이라는 초월자의 전제가 없이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으며 물신적(物神的) 욕망에 이끌림이 없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조화로운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있다.

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출현은 중국사상이 본래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백가구류(百家九流)’라는 다양한 사상가 또는 학파는 사상의 여러 가지 원형을 낳았다. 여기서 9류, 즉 9개의 중요한 학파 가운데 기축을 이루는 것은 ‘도가’ · ‘유가’ · ‘묵가’ · ‘법가’였으며 도가-묵가, 유가-법가가 대각을 이루었다. ‘도가’는 반사회성을 표방하는 단 하나의 학파이다. 국가 사회를 버리고 개인에 일관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머리카락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는 ‘이기주의’로 향하였다. 그 대극에 서는 것이 ‘묵가’이다. 소아를 멸하고 대아에 살며 남을 위하여 생사를 돌보지 않는 철저한 ‘이타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유가’는 관습을 소중히 여긴다.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사회적으로 용인된 관습의 총체를 ‘예(禮)’라고 부르는데, 이 ‘예(禮)’에 바탕을 둔 개인의 행동과 국가사회의 통치를 추구한다. 그 대극에 ‘법가’가 있다. 낡은 제도나 관습을 부정하고 관료제에 맞는 형법중심의 실정법을 제정하여 엄격한 ‘법치주의’의 입장을 택한다.

도가-묵가의 중간에 서는 것이 ‘유가’이다. ‘도가’의 '자애(自愛)'에 대하여 ‘묵가’는 '겸애(兼愛)'를 타이른다. ‘겸애(兼愛)’는 원래 수공업자 집단 내부의 기술을 유대로 하는 ‘동료애(同僚愛)’였다. 그것을 집단의 성원 외까지 확장할 때 ‘겸애(兼愛)’의 슬로건이 태어난다. ‘유가’는 양자의 중용을 골라서 '별애(別愛)', 즉 ‘인(仁)’을 타이른다. 그것은 가족의 질서를 지탱하는 ‘서열화 된 사랑’을 모든 사회로 확대한 것이다. 그리고 ‘예(禮)’는 ‘인(仁)’의 외적 표현이라고 간주한다. ‘유가’가 성문화되지 않는 ‘예(禮)’를, ‘법가’가 성문화된 법을 사회생활의 질서의 원리로 한 것에 대하여, 그 중간적인 원리에 따른 것이 ‘묵가’이다. 그들은 집단 내부의 규칙을 성문화하고, 그것을 성원에게 외우게 했는데 내용은 윤리적인 것이었다.

또 ‘도가’는 무정부주의의 입장에 서고 ‘묵가’는 군주를 인민의 합의에 의하여 뽑혀진 것이라 본다. 이 권력의 ‘부정’과 만인에 기초를 두는 권력 사이에서 ‘법가’는 한 사람의 전제군주에 의한 권력지배를 주장한다.

중국의 존재론은 ‘도가’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장자(莊子)는 ‘혼돈(카오스)’으로 부터 ‘질서(코스모스)’로 라는 신화적 우주생성론을 형이상학으로 비약시켰다. 이 경우 ‘질서’의 형성은 악이며 궁극적 가치인 ‘혼돈’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혼돈’에서 ‘질서’로의 과정은 자연 즉 '저절로 그러한' 것이었다. 질서의 행위를 강조한 것이 ‘법가’이다. 형체에 명명(命名)한다는 행위, 즉 형명(形名)을 통하여 ‘혼돈’으로부터 ‘질서’가 형성된다. 그 구체적 표현이 바로 ‘법’이다.

그에 대하여 고대의 성왕이 ‘제도’를 부여하였다는 ‘유가’에는 존재론이 매우 결여되고 있다. 고작 '명분을 밝혀야한다'고 주장한다. 이윽고 그들은 ‘도가’의 우주론을 수용하여 ‘질서’를 반 가치로부터 가치로 역전시킨다. 그리고 ‘혼돈’으로부터 ‘질서’로의 과정을 '저절로 그러한'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자연의 도를 체득한 성인에 의하여 인륜이 정해졌다는 ‘도가’와 ‘법가’의 중간에 서는 존재론을 만들어 냈다. 인간학의 자연주의적 기초부여는 이렇게 하여 주어졌다.

묵가의 창시자 묵자(墨子)는 이름이 적(翟)이고 노나라 사람으로 목공 출신이다. 묵가의 구성원 대다수가 사회의 하층민으로 생산노동과 과학연구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묵자(墨子)’란 책은 모두 71편이었으나 현재는 53편만 전해진다. 그중 ‘경상(經上)’, ‘경하(經下)’, ‘경설상(經說上)’, ‘경설하(經說下)’, ‘대취(大取)’, ‘소취(小取)’ 이렇게 여섯 편을 ‘묵변(墨辯)’이라고 부르며 여기에는 중국 초기의 역학, 물리학 및 기하학의 연구 성과가 기록되어 있다. ‘경상(經上)’에는 ‘미이시(彌異時)’와 ‘미이소(彌異所)’를 이용해 시간과 공간이라고 정의 하였다. 즉, 구체적인 시간(時)과 공간(所)을 종합하여 시간과 공간관념을 형성했다.

‘경상(經上)’에서 ‘운동’은 물체의 위치가 움직이는 것이며 ‘정지’는 물체가 어떤 곳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머무는 것이라고 하였다. 물체의 운동은 반드시 시공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운동과 시간, 공간 삼자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힘을 형태가 흥분한 상태라고 정의를 내리고 물체가 운동하는 원인이 힘이라고 보았다.


 

유가 통일시대

 

먼저 ‘묵가’가 ‘법가’의 입장을 취하는 진(秦)제국에 의해 박멸되었다. ‘묵가’집단의 주장과 힘은 두려워할 만한 것 이었다. 이어서 ‘법가’가 ‘유가’의 입장을 취하는 한(漢)제국에 의해 이빨이 뽑혀지고 관료제 자체 속으로 해소되었다. 드러내놓고 ‘법치주의’를 관철하는 데는 농업사회에서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가’는 가족윤리 이외는 어떠한 이론적 지주도 갖지 않았다. 그런 만큼 다른 모든 학파로부터 사상을 빌어 올수 있었다. 그때 그들은 언제나 ‘중용’의 길을 택하였다. 이로써 농업사회 위에 군림하여 전제군주를 받드는 ‘관료제’에 가장 적합한 사상체계가 형성되었다.

'인(仁)'이라는 공적 가치만을 들고 출발한 유교는 공공막막(空空漠漠)하고 융통무애(融通無碍)하여 ‘도가’를 포함한 모든 학파로부터 탐욕스럽게 개념을 차용하고 학설을 탐식하여 사상을 감싸들며 오직 하나의 정통적인 학파로 성장하였다. 한편 ‘도가’는 자연성 자체의 표현으로서 관료제를 이면에서 떠받쳤다. 이것이 ‘유가’승리의 비밀이며 ‘도가’의 존재 이유였다. 진의 멸망으로 ‘인위’라는 모티브는 중국사상사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한나라 말에 ‘불교’가 도입되어 오랫동안 중국의 사상은 ‘도교’와 ‘유교’와 ‘불교’ 사이를 왕복하게 된다. 10세기에 사상가들이 ‘유불선’ 세 갈래의 가르침을 종합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오늘날까지 중국의 지배적 사상체계가 된다. 이 사상적 전환이 송 대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송학(宋明理學)’이라고도 한다. 이 새 사상가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정통 ‘유교’의 계승자라고 믿었고 이것을 ‘신유학’이라 하였다.

이 새로운 유학운동에는 새로운 방법, 혹은 신기구가 필요하였다. 그것이 다름 아닌 약 1,700자 밖에 안 되는 대학(大學)이란 자그마한 책이었다. 여기에서 이들은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해야 한다(治知在格物)’는 구절에 주의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자학’에서 핵심적이었던 이 ‘격물(格物)’의 노력이 윤리적인 목표를 가지고 정(靜)과 경(敬)의 상태에의 침잠을 추구하였다.

‘주자학’에서 아주 중요한 '리(理)'는 사물의 존재나 현상의 발생을 위한 일종의 필요조건을 나타낸다. ‘리(理)’와 함께 또 한 가지 개념이 ‘기(氣)’이다. ‘기(氣)’는 ‘취(聚)’, ‘산(散)’, ‘굴(屈)’, ‘신(伸)’, ‘승(昇)’, ‘강(降)’등 여러 형태의 작용과 움직임을 겪지만, 이것들은 '기(氣)'의 고유한 성질로서 외적인 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어떤 현상이 일단 '기(氣)'의 어떤 작용과 운동으로 인한 것이라고 규정되면, 그 현상은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여겨졌고, 더 이상의 설명이 요구되지 않았다. '기(氣)'의 운동과 작용들에 의해 일어난 여러 자연현상들을 주자학자들은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자연현상은 사람이 직접 지각한다. 자연현상들은 지각 가능한 성질과 물리적인 효과를 수반하며 '형이하'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현상들은 당연한 것으로 그냥 받아들여졌다. 주자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자연현상들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했기 때문에 ‘진공’, ‘무한’, '운동'과 ‘동인(動因)’, 원자의 불가분성, ‘물질’과 ‘공간’, 혼합물에서의 원소의 존재 양태 등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들을 생각할 기회는 없었다. 이렇게 중국 사상가들은 지각의 확실성에 중점을 두고 과학적으로 추상화하려 하지 않았다. 즉 주자학자들은 현실세계의 실재성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내세위주의 불교의 교리와 구별되는 것이라 생각하였으며 그 실제세계에 유용한 개념들에 대해서조차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인의 사상표현은 단편적이어서 자연의 사물과 현상사이의 전체적인 연관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도(道)’ 또는 ‘리(理)’라고 불렀다. 중국사상에 분석적 방법이 결여된 것은, 유용성의 한계 이상으로는 분석적 사고를 펼치려 하지 않은, 중국인의 ‘사고패턴’에 있다. 이러한 기술적 사고에서는 경험적으로 축적된 지식이 더 쓸모가 있다. 이러한 사고는 무릇 완전함은 오직 자연 스스로 꾸미는 것이라는 자연주의 사상이 바닥에 있다.

그 좋은 보기가 17세기 중국의 온갖 생산기술을 집약한 백과전서 ‘천공개물(天工開物)’이다. 이 책은 베틀, 배, 용광로, 그리고 대포, 지뢰 등의 제조기술을 소개하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농경기술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것은 천(天)과 지(地)의 관여가 없는 ‘개물(開物)’, 즉 인공만으로는 훌륭한 기술이 이룩되지 않는다는 사상인 것이다.

중국 전통과학은 달력, 치료, 점복, 생산기술 및 전쟁 등에 이용되는 실용적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론적이거나 '지적'인 흥미로 탐구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전통들은 중국의 학문세계의 주류인 ‘유가’로부터는 상당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그 종사자들은 ‘사’라고 불리는 중국 전통사회의 정치적 · 사회적 · 지적 지도계층의 구성원보다 뚜렷하게 낮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전통과학 지식 또한 유학자들에게 제대고 흡수되지 못 하였고, 그에 따라 중국 전통유가학문에서 과학적 지식이 차지하는 위치는 보잘 것 없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생길 수 없었던 이유로는 (1) 자연관의 차이, (2) 학문의 대중화 부족, (3) 기술발전에 대한 사회적 요청의 부재, 그리고 (4) 유가학자들의 법칙의 수량화와 수학적 내용에 대한 과학적 이해부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전제 관료제

 

중국의 지식인은 원천적으로 관료였다. 관료인 것은 공적가치에 관계되며 공적가치의 실현에 관여하는 일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국정을 담당하지만 얼마 후 여러 나라를 방랑하며 그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할 무대를 구하였다. 고난에 찬 방랑생활 끝에 그는 후진양성이란 교육자의 길을 선택한다. 교육자로서 공적가치를 옹호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교육은 한나라 때 국가윤리로 채택되었으며 이후 2,000년 동안 그 위치를 계속 유지하였다. 유가사상에 바탕을 둔 중국의 관료제가 발달한 것이다.

‘유교’에서의 수신제가라는 교육은 치국평천하의 달성에 의하여 비로소 완결된다. 즉 관료로서의 정통성이 주어진다. 관료인 것을 거부하는 것은 사적가치를 택하는 것으로 ‘도교’이며 ‘불교’이다. 송나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이단'이었다. 지식인관료로서의 정치적 실천과 공적가치의 실현은 중국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지식인은 먼저 공적가치의 체현자여야 한다. 공적가치는 이미 고대 성인의 언행에 표현되어 있으므로 고전적 교양이 학문의 중심이 된다. 새로운 사상은 고전의 주석 또는 성인의 언행의 해석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지식 그 자체의 추구는 반 가치로서 배척된다. 중국의 학문이나 사상은 지식인 관료의 실천지향에 의하여 방향 지어진 것이다. ‘유가’ 자체가 주로 인간과 사회의 문제에만 관심을 둘 뿐 자연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지니지 않았다. 지식인의 교양이 고전적 혹은 문학적인 그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흔히 정치적으로도 무능하였다.

중국의 모든 천문학자,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수학자는 관리였다. 중국에서는 기술자, 장인들도 관료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민간에서의 수공업 생산이 광범한 영역에 걸쳐서 있었지만, 중요한 산업은 국유화되고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관리의 감독 아래 행하여 졌다. 그러나 중국의 관료를 구성하는 엘리트는 유학자들이었으며, 이들이 관장하는 관영과학은 아마추어적인 판단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이 때문에 이들의 통솔 아래에 있는 하급 기술관료들은 무사안일하게 일상 업무에 종사하는데 그쳤다.

근대산업사회는 분업의 세분화를 전제로 성립되었다. 근대산업사회는 전문적 능력에 의하여 인간을 평가하는 사회이다. 그 능력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전통의 관료적 사회주의적 방식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유교’의 사대부들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서 중국에서는 발견과 발명을 통해 명성을 얻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는 상류 지식층의 모든 사람들이 관료가 되기만을 원함으로써 과학기술분야에 능력 있는 인재가 유입되지 못하였다.

또 전통 중국에서는 상인계층이 형성되지 못하였다. 중국의 상인은 사회적으로 가장 존경받지 못하는 계층에 속하였다. 명나라 농촌에도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방직업 네트워크가 있었으나 방직 업주 들은 방직으로 번 돈을 농업생산에 투자하거나 건축, 토지구매, 혼인, 출산과 같은 ‘가족경제’에 투자하였다. 이러한 투자성향은 당시 사회가 인간의 본질을 더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다. 상인계급만이 과학연구에서 필요한 ‘손’(기술)과 ‘두뇌’(학문)의 결합을 이룰 수가 있는데, 이들이 힘을 펴지 못함으로서, 중국사회에서는 ‘이론’(학문)과 ‘기술’이 융합할 기회가 없었다.

중국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찬미했을 뿐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망이 없었으며 과거 시험 등으로 관리가 되면 자손 몇 대까지 잘 살 수 있었으므로 상인이나 수공업자는 천시되었다. 사업에 대한 투자도 정부의 수탈 때문에 불안정하였으며 길드조직은 관료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과학자의 발명권 같은 것은 그냥 빼앗아버렸다. 게다가 중국의 지배계층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가장 크고 가장 강한 국가로 생각하였다. 그러니 바다를 건너 멀리 나갈 필요도 없었고,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다른 국가를 제압할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중국에서 역사상 아무리 많은 천재적 과학자들이 태어나고 아무리 많은 혁신적 기술들이 발명되었어도, 여기에 관심과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이 분야의 발전이란 불가능하였다. 또 다양성을 거부하는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나라라서 창조성과 독창성이 나오기 어렵다. 더욱이 청나라 말, 중국은 두 가지 중독 즉 아편중독과 고전중독에 걸려 있었다.

 

분류적 사고

 

중국인이 실재세계의 현상적인 다양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취한 방법은 ‘분류’였다. 낱낱을 들어가면서 하는 기술(記述)과 그 분류에 의한 서술적 사고이다. 일례로 명(明)나라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각각의 ‘종(種)’에 대하여 먼저 문헌 · 민간 · 지방에서 사용되는 별명을 열거한다. 이어서 산지 및 식물학적 특성이 기술된다. 그런 다음 약물로서의 용법과 효용이 역시 여러 문헌으로부터의 인용을 통하여 상세하게 논해진다. ‘본초서(本草書)’는 ‘농서(農書)’나 ‘약전(藥典)’과 같은 기술서(技術書)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기술적(技術的)실천에 필요한 것은 지시적 기능을 띤 '교범(敎範)'을 말한다. 중국 지식인의 실천지향은 기술적인 생각을 인간적 실천의 전 영역으로 확대시킨다. ‘질서’는 만들어지는 ‘교범’이다.

세계의 다양성은 양(量)으로 투영된다. ‘양적관계’에서 어떤 규칙성이 발견된다면 ‘통일상(統一象)’을 그릴 수 있다. 중국인은 양(量)적인 관측 · 관찰 · 측정 · 실험 · 조사 · 계산 · 기록 · 설명 · 사색에서 많은 자료를 남기고 있다. 천체의 위치와 운동에 관한 ‘역계산(曆計算)’, 악기의 ‘음정(音程)’, 제기(祭器)나 수레(車)나 의복(衣服)의 ‘규격(規格)’, 인구에 관한 것, 관직의 정원과 등급에 관한 것, 형법의 양적 규정에 관한 것, 화폐나 경제정책이나 토목사업에 관한 것, 이것들은 양적(量的)인 서술이다. 중국의 수학이 양(量)의 수학 즉 대수학(代數學)이었던 것같이, 천문학도 대수학적 천문학으로 천체의 운동은 모두 가상적인 구면상에서 적도좌표계의 양(量)으로 파악된다. 즉 중국인은 천체운동을 하늘의 ‘역수(曆數)’로서 파악하였다.

전통 중국에서는 음악을 ‘예악(禮樂)’이라고 하여 ‘예(禮)’와 결합할 정도로 매우 중요시했고, 그에 따라 음악의 기초가 되는 화음에 대한 논의는 '율학(律學)'이라고 하여 화음을 이루는 음을 내는 현이나 관의 길이들 사이의 간단한 수적 관계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중국의 음정은 관(管)의 부피에 의하여 결정되는데, 그 기본적인 음정을 나타내는 12개의 관의 부피에는 ‘수적(數的)비례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아울러 ‘역법(曆法)’분야와 결합되어 ‘율력(律曆)’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중국수학이 기하학적이 아니고 늘 대수적이었던 것처럼, 중국의 ‘예악(禮樂)’은 원초적인 파동이론에 충실하였다. 이러한 양적인식과 양적사고는 중국인이 자랑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역법 (천문학)

 

옛날 사람들이 천체를 관측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오늘 해가 뜬 시각부터 내일 다시 해가 뜰 때까지의 시간이 대략적인 ‘하루’가 된다. 밤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달의 모양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초승달에서 다음 초승달까지 또는 보름달에서 다음 보름달까지의 간격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달’이라는 시간단위의 등장이다. 1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자루의 막대기를 땅위에 수직으로 세워둔다. 그리고 태양이 남중했을 때 막대기의 그림자 길이를 잰다. 매일매일 그림자의 길이를 관찰해보면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반구에 위치한 곳에서는 동지 때의 해 그림자가 가장 길고, 하지 때는 가장 짧다. 결국 해 그림자가 가장 긴 때부터 다시 그 길이로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재면 그것이 ‘일년’이 되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방법으로 ‘하루’와 ‘한달’ 그리고 ‘일년’의 길이를 측정할 수 있었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한 이래 해야말로 농사를 짓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천체였다. 햇빛이 강한 계절에는 만물이 왕성하게 자라고 비도 많이 오지만, 햇빛이 약한 계절에는 식물들이 시들고 마르며, 비대신 차가운 눈이 내린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고, 아울러 이러한 현상이 1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종합적인 체계로 만들어낸 것이 ‘역법(曆法)’이었다. 따라서 ‘역법’이란 1년 4계절의 순환이나 달의 위상변화와 같은 자연현상의 법칙적 질서를 수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역(曆)’은 필수적인 생활의 지침이 된다. 중국의 역법은 경험적으로 관측된 주기들을 사용한 계산법에 의존하였다. 북송의 심괄은 “도는 하늘에 있다. 그것을 관측기계에 갖추게 하면 도는 기계 속에 있다. 도가 기계에 갖추어져 있으면 일월오성은 기계 속에 파악되고 하늘과는 상관이 없게 된다. 하늘과 상관이 없다면 하늘에 있는 것을 인식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하여 기계에 파악된 천체는 인식 기능의 대상이 된다 하였다.

옛날 동아시아에서 사용했던 역법의 체계는 음력과 양력을 결합시킨 ‘태음태양력(太陰太陽歷)’이었다. 태음태양력에서 한 달의 길이는 달의 운동을 기준으로 정하고, 1년의 길이는 태양의 운동을 기준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한달은 대략 29.5일이 되고 1년은 365일 정도가 된다. 결국 음력 12달의 길이는 대략 354일로 되어 양력 1년의 길이인 365일과 약 11일의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달의 주기는 29,530588일이고 지구의 주기는 365.242216일이므로, 이 두 개의 주기는 서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농사력에서는 음력에서 큰 달을 30일로 하고 작은 달은 29일로 하였다. 그러면 19개 음력 년에 7개의 윤달을 더하게 되면 19개 양력 년과 거의 대등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춘추 중엽에 이미 19년 동안에 7차례의 윤달을 설치하는 '19년법'으로 음력과 양력을 조절하였다. 이는 B.C. 433년에 그리스 사람 메톤(Meton)이 발견한 '메톤주기'보다 160여 년이나 앞섰다. 춘추 이후 진나라에서는 ‘전욱력(顓頊曆)을 사용하였고, 한무제 시기의 태초력(太初曆)에서는 1년을 365와 4분의 1로 정하였다. 이는 로마 대제 카이사르의 율리우스력과 같지만 200년이나 빨랐다.

원나라에 이르러 중국 판도가 유럽과 아시아의 두 대륙에 걸치자 중국의 문화는 여러 면에서 모두 새로운 요소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곽수경(郭守敬) 등은 새로운 역서를 만들어 1280년에 반포했는데, 이것이 ‘수시력(授時曆)’으로 1년을 365.2415일로 하였다. 이는 지구가 태양을 싸고도는 실제 주기와의 차이가 26초밖에 나지 않는다. ‘수시력(授時曆)’은 중국 전통 역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각종 천문 의기를 정비하여 천문관측에 신중을 기하였고, 과거의 역법을 참작함과 아울러 새로운 계산법을 사용하여 각종 천문상수를 재정리하였다. 그 결과 ‘수시력’은 역대 중국역법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고, 이후 400년 동안 ‘수시력’을 능가하는 역법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수시력’은 일월식을 계산하는 면에서 완전하지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 역법인 ‘회회력(回回曆)’을 일부 병용하여 그 결점을 보완하였다. 지금 사용되는 ‘그레고리력’의 1년 주기와 같지만 수시력은 그레고리력보다 300여 년이나 빨랐다.

조선조 세종의 ‘칠정산’은 원나라 때 중국에서 제작했던 곽수경의 역법 ‘수시력(授時曆)’을 서울기준으로 고쳐 계산하는 길을 연구해 완성한 작품이다. 칠정(七政)이란 태양과 달, 5행성(水, 金, 火, 木, 土)을 뜻하니 ‘칠정산’이란 이 일곱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는 방법이라는 의미이다. ‘칠정산’의 내편은 중국의 전통역법을 소화해 낸 결과물이고 외편은 아랍역법을 국내에 처음 소화해 들여온 결과물이다.

‘칠정산’의 완성으로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서울의 위도를 기준으로 천체의 위치를 미리 계산해 낼 수 있었고 일월식을 비롯한 각종 천문현상을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이러한 수준의 천문역산학을 보유하고 있었던 나라는 중국과 아라비아 그리고 조선뿐이었다.

한편 중국의 ‘역법’은 '하늘을 관찰하여 백성에게 시(時)를 주는 것이 제왕의 의무'라는 '관천상수인시(觀天象受人時)‘를 실행하기 위해 발달했다. 중국의 황제는 우주의 시간에 맞추어 농사지을 수 있도록 달력을 만들어 백성에게 나눠주어야 했다. 이것은 '하늘의 명을 받아 제도를 고친다'는 '수명개제(受命改制)사상'과도 연결된다. 중국의 역대왕조는 건국의 정당성을 정치사상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천문학의 정비와 천문역법을 발달시켰다. 천명을 받아 황제가 되면 역법 등 기본적인 제도를 새로이 고쳐야 한다. 중국역법의 이러한 성격상, 개력을 할 때는 일-월-행성 등에 관한 온갖 ‘천문상수’를 형이상학적인 설명으로 꾸미게 된다. ‘천문정수’를 ‘음률’과 결합시킨다든지 ‘역수’와의 연관을 시도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실용’과 ‘사변(우주관)’이 이중으로 얽혀서 ‘역’은 고대 중국에서 국가의 대전으로서 성립하였다.

농업생산의 필요에 따라 사람들은 평균 15일마다 하나의 절기를 만들어 1년을 24절기로 구분했다. 실질적으로는 태양의 위치와 시운동에 의거해 정한 일종의 역법이다. BC 104년 등평(鄧平)등이 제정한 ‘태초력(太初曆)’에 정식으로 24절기를 정하고, 24절기의 천문적 위치를 명확히 하였다. 태양이 황경 0도에서 황경을 따라 15도 움직이는 시간을 하나의 절기라고 했다. 매년 360도를 운행하니 1년에 24개의 절기를 지나고, 한 달에 두 개의 절기를 지난다. 매월 첫 번째 절기를 '절기'라고 하는데 입춘, 경칩, 청명, 입하, 망종, 소서, 입추, 백로, 한로, 입동, 대설, 소한이 절기에 속하고, 매월 두 번째 절기를 '중기' 라고 하는데 우수, 춘분, 곡우, 소만, 하지, 대서, 처서, 추분, 상강, 소설, 동지, 대한이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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