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에복관된 장경판전(국보 제52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에 대한
다음백과의 해석
국보 제32호이다.
1011년에 새긴 초조대장경이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1236년 몽골이 침입하자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불교적인 의미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251년에 다시 완성하였는데, 이를 재조대장경이라고 한다.
강화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하다가 1398년 5월에 해인사로 옮겨졌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1,516종 8만 1,258판인데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불교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고려시대 목판 인쇄술의 발달수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보 제32호. 목판본은 1,516종에 6,815권으로 총 8만 1,258매인데 이 가운데 후대에 판각된 15종의 문헌은 보유판(補遺板)이라고 한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이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1236년(고종 23) 당시의 수도였던 강화에서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사업은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주관했으며, 제주도·완도·거제도 등에서 나는 산벚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는데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나무를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충분히 말려 사용했다.
이 대장경은 조선 초기까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해인사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1398년(태조 7)에 옮겼을 것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때 2,000명의 군인들이 호송하고, 5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려들이 독경(讀經)했다"라고 한다.
이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관함의 순서는 천자문 순서대로 배열했으며,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색에 의해서 그 내용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첫째,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현재 전하지 않는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짐작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특히 〈대승법계무차별론 大乘法界無差別論〉 권1은 어느 대장경에서도 볼 수 없다.
둘째, 사전류의 저술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원주림 法苑珠林〉·〈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 續一切經音義〉 등 중요한 전적과 〈대승보살정법경 大乘菩薩正法經〉·〈제법집요경 諸法集要經〉 등 중요한 대승경론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자체(字體)의 예술성이다.
하나의 목판에 대략 가로 23행, 세로 14행으로 310자 내외를 새겼는데 그 정교한 판각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의 명필인 한석봉은 이를 두고 "육필(肉筆)이 아니라 신필(神筆)이다"라고 경탄했다.
이 팔만대장경은 뒤에 5차례나 간행·유포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있는데 고려말에 이색(李穡)이 인출한 대장경 1부가 여주 신륵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까지 왜구들이 빈번하게 침략해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을 요구했는데 1389~1509년에 83차례나 요구했지만 대부분 거절하고 간혹 인본(印本)을 주었다고 하며,
1410년(태종 10)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에게 도내에서 생산되는 인경지(印經紙) 267묶음을 해인사로 보내 인경(印經)하도록 명했으며, 세조는 신미(信眉)·수미(守眉)·학열(學悅) 등으로 하여금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 거찰에 나누어 봉안하도록 했으며, 1898년 용악(聳岳)이 4부를 인출하여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에 1부씩 봉안했다.
고려 중반부터 장경도량(藏經道場)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에 6, 7일씩 거의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으며, 현재 해인사에서는 1년에 1번씩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 주위를 도는 행사를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특수성은
첫째, 사상적인 것으로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불사(佛事)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護法的)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호국신앙).
이규보(李奎報)의 〈군신기고문 君臣祈告文〉은 이 대장경조조의 사상적 의의를 천명한 글로 몽골을 야만시하고 문화적 긍지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 경제적인 것으로 대장경의 역사(役事)에 대한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므로 국민에 대한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내용적인 것으로 과학적인 배열과 엄격한 자료수집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고려대장경 이후에 편집된 중국판 빙가장경, 일본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등은 모두 이것을 모본으로 하여 판각된 것이다. 즉 이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한문대장경의 완벽한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의 원본을 영인 축소하여 영인본 47권과 전대장경에 대한 내용·주소(註疏)·번역자·연구서 등을 상술한 해제 색인본 1권을 합쳐서 총 48권을 간행했다.
또한 1967년부터 이 한문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판 대장경을 간행하고 있는데 현재 120권이 출판되었다.→ 고려대장경, 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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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대장경 - 위키백과 해설
8만대장경-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Tripitaka Koreana 트리피타카 코레아나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Tripitaka Koreana 트리피타카 코레아나[*])은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있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1236년(고종 23년) 강화군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15년이 지난 1251년(고종 38년)까지 총 16년에 걸쳐 완성한 고려의 대장경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제32호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팔만대장경은[2] 2007년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역사
불교를 숭상한 고려는 외침(外侵, 외세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막고자 방대한 대장경의 간행사업을 추진했다.[3]
제1차는 거란의 침입으로 곤경에 직면했을 때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대구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大般若經)》·《화엄경(華嚴經)》·《금광명경(金光明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을 조조(彫造)하였다.[4] 현종 때 시작하여 문종 때 완성된 이 초판 고본(古本) 대장경은 고종 19년(1232)의 몽골 침입 때 불타고, 일부가 일본에 전해진다.[4]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Tripitaka Koreana 트리피타카 코레아나[*])은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있는, 고려가 몽골의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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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대각국사 의천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송에서 가져온 불경과 요(遼) · 일본에서 수집한 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하고, 이에 따라 차례로 만들었다.[4] 이것이 이른바 속대장경(續大藏經)으로 1,010부(部) 4,740여 권에 달하였으나, 몽골의 병화로 거의 없어지고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4]
그 후 강화도에서 몽골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대대적인 조판 사업이 진행되었다.[5] 고종 23년(1236) 강화도에 장경도감(藏經都監)을 설치하여 사업에 착수, 고종 38년(1251) 총 81,137매(枚)의 대장경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으로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5] 대장경의 조판으로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 기술에 큰 공헌을 하였다.[5]
현재 보존되어 있는 대장경판은 조선 시대에 다시 새긴 것(보유판)과 일제 강점기 때 다시 새긴 것까지 합하여 총 81,352판(板)이나 된다.[6]
경판의 개당 총 길이는 68 혹은 78센티미터이며 폭은 약 24센티미터, 두께는 2.7~3.3센티미터의 범위이다.
무게는 경판의 재질에 따라 4.4킬로그램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3∼3.5킬로그램 정도이다.
경판의 재질은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왔으나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경판의 수는 81,352장이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처음 81,258장으로 집계했다. 정부가 1962년 국보 지정 당시 별도의 확인 작업 없이 이 숫자를 그대로 적용하면서 그동안 정확한 숫자, 훼손 여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2000년부터 실시한 ‘해인사 고려대장경 디지털 영상화 및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 사업’, 2014년에 수립한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관리계획’에 따른 조사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81,352장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81,352장이라는 숫자에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1937년에 제작, 추가된 36개 경판이 포함되어있는 수치이다. 이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의 견해들이 전문가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엇갈리는만큼, 학문적, 사회적 합의가 절실한 상황이다.
문화재지정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 역시 그 과학적 기술의 탁월함으로 인하여 국보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諸)경판은 2007년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팔만대장경 인쇄본도 강원도 평창군 등에서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한글대장경
1964년 3월 동국대학교 역경원을 설립하여, 조계종 3대 사업으로 한글대장경 번역을 시작했다.
1965년 부터 매년 8권씩 한글대장경이 간행됐고, 36년이 지난 2001년에 한글대장경 318권을 완간하였다.
팔만대장경 완성에 15년이 걸렸는데, 한글대장경은 2배가 넘는 36년이나 걸려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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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대장경 (初雕大藏經)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판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
조성
초조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관판 대장경(官版大藏經: 971∼983)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간행한 한역(漢譯) 대장경이다.
송나라 태조에 의해서 간행한 대장경이 991년 고려에 전래되자, 고려는 커다란 자극을 받고 대장경 간행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 993년(성종 12)부터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1011년에는 현종이 남쪽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거란군이 송악에서 물러나지 않으므로 군신이 무상의 대원을 발하여 대장경판을 새기기로 서원한 뒤 거란군이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다.(『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 즉 거란족이 침입하자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는 국민정신을 통합하여 외적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신앙심으로 대장경판을 조성한 것이다.
판각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011년에 시작하여 1087년까지 77년이 걸려 새겼다는 설이 있고, 1019년에서 1087년까지 69년 동안과 1011년에서 1051년까지 41년이 걸려 완성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나름대로 근거는 있으나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 실린 「대선왕제종교장조인소(代宣王諸宗敎藏彫印疏)」에 의하면 현종 재위(1009∼1031) 기간인 1011년에서 1029년경까지 북송의 관판 대장경과 같은 분량(『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수록분인 1076종 5048권)의 판각은 모두 마쳤음을 알 수 있고, 송 신역본(新譯本은) 그 뒤에 추가로 판각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장경은 권말에 간행기록이 전혀 없고, 권자본의 형식이며 한 면에 23항(行:줄) 14씩 배열되어 있고 장수 표시가 ‘장(丈)’으로 되어 있고 가끔 ’폭(幅)‘으로 표시 되어 있다. 그리고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에는 정교하고 뛰어난 판화가 수록되어 있다.
보존
초조대장경은 1232년 몽골족의 침입으로 불타 버린 뒤 현재까지 전래된 것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왔다. 그리하여 그 동안 초조대장경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와서야 초조대장경은 국내에도 전래되어 성암고서박물관, 호림박물관, 호암미술관과 개인 등이 약 300여 권을 나누어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일본의 경도 난젠지(南禪寺)와 대마도에 상당량의 초조대장경이 보존되고 있는데, 전체 전래되고 있는 권수가 약 2,000 여권 이상으로 추정된다. 앞으로의 연구에 의해 머지않아 초조대장경의 성격이 제대로 밝혀질 것이다.
이 초조대장경은 그 동안 북송의 관판 대장경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 비교해 보면 그 체제가 다르며, 오히려 북송판 보다 글씨가 좋고 정교하게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조대장경은 우리의 독자적인 판각으로 당시의 뛰어난 목판인쇄술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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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大藏經)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장경(大藏經))]
정의
불교의 경장·율장·논장 등을 집대성한 불교경전.개설시대에 따라 삼장(三藏) 또는 일체경(一切經) 등으로도 불렸던 불교성전(佛敎聖典)의 총칭이다. 삼장은 경·율·론(經律論)을 새긴 패엽(貝葉)을 담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인 Tripitaka의 한역(漢譯)이다. 삼장, 일체경 그리고 대장경이란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모아 수록한 것을 말한다. 대장경은 사용된 언어에 따라 팔리어 삼장, 한역대장경, 티베트대장경, 몽골어와 만주어 대장경 등이 현재 전래되고 있다.내용대장경은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집대성할 필요를 느껴 제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의 방법에 의하여 이른바 ‘결집(結集)’이 이루어 진 것이다.제1차 결집이 라자그리하에서 이루어진 후 4차의 결집이 있었다고 한다. 서기전 3세기에 아쇼카왕 때 제3차 결집이 이루어졌고 소위 ‘팔리어 삼장’이 완비되었다고 한다. 이 팔리어 삼장이 아쇼카왕 때 스리랑카로 전해졌다. 그러나 스리랑카로 전해진 팔리어 삼장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암송에 의한 구전의 방법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불교언어로서의 팔리어(pali)를 사용하였지만 문자화된 것은 아니었다.그 후 서기전 1세기 경에 스리랑카에서 비구들이 보수와 진보로 나눠 파벌싸움이 계속되면서 정법의 왜곡을 막기 위하여 스리랑카 문자로 표기함으로써 문자로 된 팔리어 삼장이 정비되었다. 이 전통이 미얀마, 캄보디아, 타이랜드, 라오스 등으로 확산되어 팔리어 삼장이 각국의 문자로 표기되어 소위 남방지역에서는 팔리어 성전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팔리어 삼장은 기원 전후에 형성된 대승경전 등이 포함되지 않은 소위 소승불교의 한 부파의 성전으로 그 양도 한역 대장경의 10분의 1 정도이다.이 팔리어 삼장은 19세기 초기부터 서양인들에 의해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1882년에는 영국에서 Pali Text Society가 설립되어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1941년에는 일본에서도 번역하여 남전 대장경(南傳大藏經)이라 하였고, 현재 인도에서는 범어를 표기하는 데바나가리로 출판하고 있다.이 팔리어 삼장과 함께 원본(original text)이라 할 수 있는 범어대장경이 고대 인도에서의 표준어인 범어(梵語, sanskrit)로 표기된 것이다. 범어 경전은, 그동안 소멸되었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네팔을 비롯하여 티베트, 돈황석굴 등에서 탐험가들에 의해 수집되어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이 범어 경전은 한역의 토대가 되었던 경전이라서 중국에 전래될 법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그리하여 한역이 끝나고 고의로 소멸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 범어 성전은 소위 북방불교 권에서 중국어와 티베트어로 번역되었고, 다시 몽고어, 만주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서장대장경은 대장경을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로 범어를 직역하였기 때문에 대승불교 이해를 위해 중요시되고 있다. 이 대장경은 특히 8세기 이후부터 번역되어 14세기 초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판본이 아니라 사본(寫本)이었다.최초로 인쇄한 것은 티베트가 아니라 1410년에 중국 북경에서 이루어져 북경판 또는 영락본으로 불리는 깐규르(경·률)이다. 이 대장경은 한역 대장경에 없는 밀교 경전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원문에 충실한 직역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범어 원전이 소실된 현실에서 범본에 가장 가까운 내용을 전해주는 대장경으로 알려져 있다.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 유통되고 있는 대장경은 기원 후 1세기부터 범어 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한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이다. 이 한역대장경은 중국 각 왕조의 황제들의 후원으로 인도나 서역에서 온 승려들과 중국의 역경 승려들에 의해서 번역되었다.그러나 모든 경전이 한꺼번에 수입된 것도 아니고, 번역 역시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일이 걸려 이루어졌다.또한 필사(筆寫)의 방법으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중복이 생기게 되고 체제도 통일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번역된 순서대로 적은 목록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지승(智昇)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이 가장 정확하고 내용이 훌륭하여 후대에까지 모범으로 삼았다.『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을 중심으로 최초로 간행한 대장경(大藏經)이 북송 관판대장경(北宋官版大藏經)이다. 이 대장경은 송 태조가 발원하여 971에서 983년까지 새긴 세계 최초의 목판 대장경으로 개보칙판(開寶勅版) 대장경이라고도 한다.이후에 고려초조대장경(高麗初雕大藏經)·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북송(北宋)의 동선사판(東禪寺版) 대장경 등 20여 종의 대장경이 간행되었다. (표 참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장경(大藏經))]
한역 대장경 가운데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서기 67년경에 가섭마등(迦葉摩騰)이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최초로 한역한 『42장경』 등의 『개원석교록』에 수록된 경전에서 『42장경』 등의 『개원석교록』의 입장록에 수록된 1076종 5048권의 경전을 중심으로 싣고 이외에 서기 1054년∼1064년 사이에 일칭(日稱)이 한역한 『부자합집경』과 1090년경에 희린(希麟)이 편찬한 『속일체경음의』 등 11세기에 한역된 경전까지 1496종의 경전이 수록되어 있다.이와 같이 후에 편찬되는 대장경은 수록되는 경전의 양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내용이나 대장경에 싣는 것이 아니다. 대장경은 사찰이 주관하여 편찬한 사찬(私撰)도 있지만 대체로 역경 및 저술의 위작을 막기 위해 황제의 흠정(欽定)에 의하여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편찬하여 간행하였다.그런데 역사적으로 간행된 대장경이 모두 고스란히 전래된 것이 아니다. 최초의 대장경판인 북송관판 대장경도 전체 5,048권 가운데 9권 정도가 알려져 있으며, 고려초조대장경은 현재 2,000여권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세 번째로 간행된 거란판 대장경은 그동안 전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74년 7월에 산서성응현불궁사(山西省應縣佛宮寺)의 석가탑(목탑) 4층에 봉안된 주존 불상의 복장에서 12권이 발견되어 거란 대장경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북송의 동선사판(東禪寺版)이나 개원사판(開元寺版)도 온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해인사에 있는 고려 대장경판은 그 판본이 상당 수 전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목판까지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앞의 [표]에 나타나 있듯이 만력판(萬曆版) 이전에 간행된 중국의 대장경보다 그 수록 경전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고려대장경은 판각할 당시 수기법사 등에 의해서 대교가 철저히 이루어져 그 내용이 정확하기 때문에 유명하다. 당시 대장경을 간행하면서 국내본과 송본·거란본을 대교하여 선본을 실었으며, 그 내용을 기록하여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을 남겨 놓고 있어 현재 거의 전래되지 않는 북송 관판과 거란본의 내용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대장경이다.그리고 다른 대장경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續一切經音義)』·『내전수함음소(內典隨函音疏)』 등은 고려대장경에만 수록되어 있다.고려대장경은 조선조 초기에 일본의 요청으로 대량 수출하였다. 일본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받아들인 이후 대장경 연구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그 결과 20세기에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간행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을 간행하게 되었고, 이 대장경은 불교 연구의 기본서로 세계적 명성을 지니게 되었다.일본에서 제일 먼저 대장경 간행을 시도한 것이 종존판(宗存版) 대장경이나 간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 대장경은 천태종(天台宗)의 종존(宗存)이 경도(京都) 건인사(建仁寺)에 있는 고려대장경을 보고 1613년에 대장 목록을 간행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때 데리고 간 인쇄 기술자에 의해 목활자로 간행하였다.이 대장경은 간기(刊記) 표시를 “갑인세 대일본국대장도감봉칙주조(甲寅歲大日本國大藏都監奉勅雕造)” 등으로 ‘고려’ 대신에 ‘일본’으로 바꿔 사용하는 등 판식(板式)이 고려 대장경을 그대로 답습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 대장경은 당시 천황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천황이 죽자 간기에 ‘봉칙조조’란 글자가 지워지고, 1624년 종존이 입적하자 이 사업은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이후 1637년에서 1648년까지 동경 관영사(寬永寺)에서 일본 최초로 대장경이 완성이 되는데, 왜장(倭藏)이라고 일컬어지는 천해판(天海版)주 10) 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은 덕천가광(德川家光)의 후원으로 천해승정(天海僧正)이 관영사에서 남송의 사계 자복사판(思溪 資福寺版)을 저본으로 목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이후 중국 황벽 희운(希運)의 종풍을 계승한 황벽산 만복사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대장경이 있다.이 대장경은 황벽산 개산조인 은원(隱元)의 제자인 철안(鐵眼)이 주관하여 1668년에서 1678년까지 서민의 시주를 얻어 스승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만력판을 중심으로 번각한 것이다. 이 황벽판은 일본 전역에 염가로 널리 보급되었으나, 내용에 오류가 많아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그리하여 정토종의 승려 인징(忍徵)이 황벽판 대장경에 오류가 많음을 알고 1706년부터 경도 건인사(建仁寺)에 있는 고려 대장경과 내용 대교를 시작하여 1710년에 모두 마치고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완성하였다. 그 후 진종 대곡파 정승사 순예(眞宗大谷派 淨勝寺 順藝)라는 승려가 명장(明藏)에는 없고 고려 대장경에 있는 500권을 건인사 본으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이러한 사실은 고려 대장경이 일본에서 중국판 대장경보다 월등히 뛰어난 대장경으로 여겨졌음을 확실하게 밝혀 준 최초의 예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19세기말부터 대장경도 신활자로 간행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가 역시 일본에서 1880∼1885년에 축쇄판(縮刷版)으로 간행된 「대일본교정대장경(大日本校訂大藏經)주 13)」이다.이 대장경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직후 불교 부흥책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인데 인징이 고려 대장경과 대교한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본 것이 동기가 되어 고려 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 송·원·명의 대장경을 참고하여 차이가 나는 부분에 두주(頭註)를 달아 금속활자 5호로 간행한 것이다.이 판본은 일본 최초의 독창적인 판본이라 하겠다. 이 대장경은 1911년에 상해의 빈가정사에서 4호 활자로 다시 배열하여 인쇄하였다. 그러나 활자가 커서 보기에는 편리하나 두 주를 생략한 것이 흠이 되고 있다. 1902년에 경도에 장경서원(藏經書院)이 설립되어 인징의 『여장대교록(麗藏對校錄)』을 정본으로 1912년에 출판된 것이 「만자장경(卍字藏經)」과 「만자속(卍字續)」이다.이후 불교 서적의 총서로 동경대학(東京大學)의 범문학교실(梵文學敎室)의 다까구수[高楠順次郞] 등이 중심이 되어 1922년∼1934년까지 13년이 걸려 완성한 것이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이다.당시 유통이 되고 있던 축쇄판 대장경이 비싸 학자들이 구입하기 어려웠고 또한 일본 국내에 있는 필사본 대장경을 이본(異本)과 비교 조사하여 가장 정확한 대장경을 만들고자 하는 요망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동경 증상사(增上寺)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고 남송 사계판(思溪版)주 06), 원 대보녕사판(大普寧寺版), 명 만력판(萬曆版), 그리고 궁내청 서릉부(宮內廳書陵部)의 북송 복주동선사판(福州東禪寺版)을 대교하여 지방 사찰이나 대학도서관과 개인 소장을 모두 망라하고 돈황 사본까지 참고하여 간행한 것이다.이 대장경은 학자들이 이용하기 편리하여 현재 세계 각 국에서 불교 연구의 기본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일본에서의 대장경 간행은 거의 고려 대장경을 정본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인쇄 문화를 받아들여 간행하였고, 특히 신활자본 대장경은 일본과 중국을 막론하고 대부분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하였으며, 현재도 간행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장경(大藏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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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대장경에 대한 이해
목판본은 1,516종에 6,815권으로 총 8만 1,258매(조선총독부)
1차대장경 - 6000권
2차대장경 - 4740권
8만대장경의 실제 매수는?
강화도 선원사 : 종 38년(1251) 총 81,137매(枚)의 대장경
일제 조선총독부 : 81258장
현재: 81,352장
1. 대장경의 의미와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를 정확하게 하려면 환단역학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고승들이 대부분이 환단역학 천문학의 대가이기때문인데요
이는 불교에 국한 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물로 동양의 주역이나 공자학이나유교철학 이후의 성리학등의 근저에는 환단역학의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나라의 불교는 환단역학의 이론에 의하여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2. 국내의 전문가들은 환단역학에 대한 조예가 없으니 자연적으로 대장경의 의미를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혹은 점성술으로
해석한다.
인테넷의 다음대백과 혹은 위키백과 민속백과등등...
3. 불교의 교리는 기본적으로 환단역학에의하여 구축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선 8의 수 혹은 800의 수와 8만의 수의 개념을 이해해야한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나 삼성기등에서는 800의 수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800의 수의 개념은 어디에서 온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빛의 상수를 의미한다.
원방각으로는 작은 원방각을 800의 상수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불교의 주용한 교리는 원방각의 상수를 알아야합니다.
5온의 개념
8정도 - 공즉시색 색증시공의 수
12의 지수
108의 수
33천
석가의 탄생 수 28수
금강경 와 금강비의 개념
4. 불교의 고승들은 대부분이 환단역학에 대가입니다.
삼성기 저작
일연대사의 환단신화
5. 8만 혹은 8십만의 수의 등식?
26.6666666667×30,000=800,000.000001
26.6666666667×30,00=800,00.00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