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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선문명

문종과 첨사원

작성자뽀야|작성시간22.01.21|조회수343 목록 댓글 0

 첨사원과 왕세자 향 

 

대리청정은 국왕이 나이가 많거나 중병이 들어 국정을 담당하기 어려울 때 그 후계자에 해당하는 왕세자나 왕세손, 왕세제가 국 왕을 대리하여 국정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 대리청정이 이루어진 것은 모두 여섯 경우가 있었는데, 세종대의 왕세자 문종, 숙종대의 왕세자 경종, 경종대의 왕세손 영조, 영조대의 왕세자 장조(사도 세자), 영조대의 왕세손 정조, 순조대의 왕세자 익종 (효명 세자)이 대리청정을 실시했다.

이와는 별도로 선조대에는 왕세자 광해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논의가 무성했는데, 실제 로 대리청정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조선시대에 대리청정에 관한 규정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세종대였다.

1442년(세종 24)에 세종은 동궁에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 고 왕세자에게 국왕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왕세자는 29세의 성인이었고, 세종은 안질(眼疾) 때문에 국정 문서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세종의 명령은 선례가 없는 일인 데다가 국가의 명령이 두 곳에서 나올 수 없다는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밀고 나갔다.

세종은 당나라의 태자첨사부(太子詹事 府) 제도를 원용하여 첨사원을 설치하고 소속 관리들을 임명했으며, 우선 국왕이 주재하는 강무(講武, 군사 훈련)를 세자가 대행하도 록 했다.

 

왕세자 문종의 대리청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443년이었다.

 

세종은 명나라 태자가 태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하는 것을 근거로 왕세자에게 남면(南面)을 하여 조회를 받고 국정을 섭행(攝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남면하여 조회를 받는 것은 국왕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세자에게는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결국 세종이 왕세자가 동쪽에 앉아서 서면(西面)을 하는 것 으로 양보했다.

남면하는 것은 국왕이 정사를 듣고 판단하는 자리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남면하여 여러 신하의 조회를 받는데, 동궁이 어찌 감히 지존처럼 남면하고 조회를 받겠습니까? 제왕의 자리는 북극성이 그 자리에 있으면 뭇별이 둘러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동궁이 오늘은 북면(北面)하여 전하에게 조회를 드리고, 내일은 남면하여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다면 일의 형세가 어떻게 되겠 습니까?

이후 대리청정에 관한 제도는 빠른 속도로 정비되었다.

 

건춘문(建春門) 안에 왕세자가 조회를 받을 계조당(繼照堂) 건물을 세웠는 데, 왕세자가 서면을 하는 것을 고려하여 집을 서향으로 지었다. 또한 섭정에 관련된 문서의 용어를 정비하고, 첨사원이 공무를 보고 할 때에는 먼저 승정원과 협의한 다음 왕세자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도록 했다.

 

1447년(세종 29)에 왕세자는 승화당(承華堂)에서 국정을 처리하기 시작했고, 왕세자를 위한 국가 전례(典禮)도 계속 추가되었다. 1 449년에 세종은 세 가지 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국정을 세자에게 일임했는데, 그 업무는 다음과 같다.

 

이를 보면 국왕 업무의 대부 분을 왕세자가 대리했음을 알 수 있다.

1) 사대(事大)와 제향(祭享)에서 따로 의논할 일

2) 군대를 움직이는 일

3) 당상관을 임명하고 죄주는 일

46) 왕세자 경종의 대리청정은 앞서 세종대에 정비된 규정을 근거로 했다.

 

1717년(숙종 43) 7월에 숙종은 왕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 했다.

이 무렵 숙종은 안질 때문에 왼쪽 눈은 거의 보지를 못했고 오른쪽 눈도 물체를 희미하게 보는 정도에 불과했다.

숙종은 대리 청정의 절목(節目)을 만들기 위해 기 왕의 사례를 검토하게 했다.

강화도 사고(史庫)를 방문하여 세종대의 기록을 검토했고, 당나 라의 사례도 조사했다.

당나라의 사례는 앞서 세종대에 첨사원을 설치할 때도 검토한 바 있었다

 

 

 

文宗, 왕세자시절부터 국사를 보다.

 

 

아버지 세종의 업적을 이어받아 아버지께서 못다 이루신 문(文)의 찬란

한 업적과 세련된 문치를 통해 조선을 4代, 자신의 5代에 걸쳐 조선의 문화와 함께 조선의 문치를 완성시킨다.

성균관 입학식을 처음 거행한 왕자는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었다.

하지만 왕세자의 신분으로 성균관 입학례를 처음 거행한 사람은 문종이

었다.

1421년 왕세자 향의 나이 8살이 되자 세종은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성

균관 입학례를 거행하도록 하였고, 12월 25일에 마침내 행사가 거행되

었다. 이 날 왕세자 향은 세자궁 소속 관리들을 대동하고 성균관을 방

문하여 대성전에 제사를 올렸으며, 이후 박사에게 예물을 올리고 명륜

당에서 [소학제사]를 읽었다. [세종실록 1421년 12월 25일]

 

그는 독서를 좋아하고,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천문과 역산, 언어, 서

예 등에 뛰어났다. 성격은 유순하고 자상했으며, 거동에 기풍이 있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남에게 비난받는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비난받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 세종처럼 책을 늘 달고 살았으

며, 자신이 비록 학문적 실력이 뛰어나도 학자들과 대신들의 의견을

늘 경청하고 좋은건 받아들였으며, 아버지 세종처럼 여러 사람들을 거

느릴 수 있는 은연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1437년 세종을 대신하여 서무를 직접 결재함 (왕세자 향, 24세)

 

세종은 자신의 나이 41세 때 건강이 조금씩 안좋아지기 시작하면서 왕

세자 향에게 서무를 대신 결재하여 정사를 돌볼것을 지시한다. 물론

세종이 자신의 건강을 탓하긴 했지만 승하하기 13년 전이다. 그러니 왕

으로서 활동하는데는 이때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아들의 능력을

알고도 싶고 그만큼 왕세자 향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다.

문종은 1437년 24세의 나이로 아버지 대신 서무를 결재하면서 정치에

대한 감각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있는 文宗의 시...

 

향나무 향기는 코에만 향기롭고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단데

가장 사랑스런 동정호의 귤은

코에 향기롭고 입에도 달구나

 

이 시는 문종이 어렸을 때 귤을 먹고, 귤을 담아온 쟁반에 쓴 시라고 한다.

 

文宗의 시도 뛰어나며 글씨가 예사롭지 않아 그 본을 떠놓으려했던  집현적 학사들...

 

위의 시를 본 집현전 학사들은, 시도 뛰어나고 글씨가 예사롭지 않아

그 본을 떠놓으려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어 쟁반을 들고 차마 놓지를

못했다고 한다. 문종의 애책문에도 문장과 서예가 뛰어나고 학문에 열

중했던 그의 모습이 나타난다.

 

"성상께서는 재능이 많으셔서 여러 가지 뛰어난 재주를 겸비했습니다.

 [서경]의 요전, 순전, 대우모와 같은 문장이요, 법도에 맞는 신필이

 었습니다. 밤늦도록 피로함을 잊으시고 심신이 편안하면 해독이 된다

 도 경계했습니다."

 

문종은 거둥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다.

 

世宗, 문종의 연약한 성품에 걱정을 함...

 

그러나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세종은 "세자는 순수한 바탕이라 부인과 같다"면서, 다음과 같이 문종

의 연약한 성품을 걱정하기도 했다.

 

"세자는 거의 장년이 되었는데 용맹스런 기질이 없으므로 말을 달리며

활을 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때때로 과녁을 쏘아 기력과 체질

을 기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성품이 착하고 어질며, 여자와 유희

보다는 책,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1427년 문종이 세자빈을 얻으면서의

문제도 발생하게 된다.

 

 

文宗곁에  환조선역학의 가문인 영해박씨가... 

 

깁시습공에 의하면 그의 징심록 추기의 제 13장에서 아래와같이 언급합니다.

 

 

本朝世宗大王登位 甚慇懃於寧海 周恤公家一門 20
又建赫居世王陵廟 乃命公之宗次二家 移居於京師泮宮之隣 25
命長老入侍便殿恩顧甚重 11
徵次家裔昌齡公父子而登用 12
時余在隣受業于宗嗣之門 11

 제13절
本朝(조선조), 세종대왕이 왕이 되어서는 은근히 寧海를 생각하여 公의 門中을 두루 구제하였다. 

또 赫居世王 능묘를 세우고, 곧 公의 宗家와 次家 두 집에 명하여 서울 성균관 옆으로 옮겨 살게 하고,

장로로 편전에 들어 왕에게 알현하도록 명하여 은혜로 보살펴 주기를 甚重하게 하였다.

次家의 後裔 昌齡公 父子를 불러 登用하였다.

때에 나는 이웃에 있어 宗家의 후손의 가문에서 수업하였다.

 

이 시절에 와서야 세종대왕에 의하여 환조선역학의 계승인 금척역학과 왕세자와  만남이 이루어졌다.

문종은 그 선조인 태조 이성계가 꿈에 금척을 얻었다고 한 것을..

실제  세종대왕의 배려로 현실에서 얻은 것이다.

문종이  금척이론을 응용하여 개발한 것이  바로  측우기, 자격루, 칠정산 내외편,  훈민정음창제, 앙부일귀, 화차, 신기전 등 등...

농사직설과 , 의방유취, 동국병감 등등... 

다양한 분야를 상호 모순됨이 없이 바르게 정립하고 ...

우주만물의 복잡한 운동을 간단한 공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 것이었다.

 

 

대신들의 반대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항 문종...

 

1439년 (세종 21년)에 세종은 자신의 나이 43세의 나이로 병이 심화되

고 왕세자 향의 나이 26세 였으므로 왕위를 계승하기에 나이가 부족함

이 없었고, 아버지 태종이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상왕으로 물러난

것처럼 세종 또한 세자 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려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들은 대신들은 한결같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왕의 춘추가 아직 강녕하신데 왕위를 물려줘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주변의 반대가 너무 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문종은 대신들의 반대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다.

 

문종, 1442년에 비로소 국가 경영을 직접 하게 된다...

 

그의 나이 29세, 연부역강한 나이였다. 세종은 46세로 이미 병으로 인

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춘추였다. 세종은 첨사원을 설치, 과

거 자신의 경우처럼 차기 CEO 예정자가 국가 경영을 대행하는 길을 열

어주게 된다.

 

1437년 24세의 나이로 첫 서무를 결재했던 세자 향은 본격적으로 정사

를 보게 된다.

 

1442년 부터의 세종시대의 文宗의 업적...

 

1437년 24세 때 서무에 관해 직접 결재를 함

1439년 26세 때 아버지 세종이 자신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물려받지 못함 

1442년 29세 때 [왕세자 향(29세 ~ 37세) 사실상 업무를 시작함]

1445년 32세 때 세종이 대리청정을 시키려 했으나 이루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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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宗의 업적...

 

1442년 8월 : [고려사]를 편찬함    

1443년 11월 : 전제를 정하는 관서(전제 상정소)를 설치함

1443년 12월 : 궁내에 정음청을 설치,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으로 하여금 한글을 창제하게 함

1444년(세종 26년)에 칠정산내편 출판하였다. ( 칠정산 외편은 역학이론서라 출판하지 않은 것으로 보임)

 1445년 4월 : [용비어천가]를 지음

1446년 9월 : [훈민정음] 창제 (반포함)

1447년 7월 :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함

1447년 8월 : 숭례문(남대문)을 개축함

1447년 9월 : [동국정운]을 편찬함

1448년 7월 : 궁궐 안에 불당을 건립함

1449년 12월 :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함 대신들의 반대로 왕위를 받지 못한 문종, 본인의 병도 악화...

세종 27년(1445년)이래로는 세종은 서무 결재를 맡았는데, 오히려 건강상이유로 세종이 문종을 대신해 정무를 돌봐줘야 할 형편이었다. 이렇듯 문종은 병약하여 이런 상태로 한 국가를 이끌어나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441년 세자빈 권씨가 사망한 상태라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심약하고 가정도 부실한 가운데, 자신의 역량을 국가경영에 제대로 쏟아 부을 수 있는 기회를 대신들의 반대로 왕위를제때 이어받지 못해 그는 본인의 병이 점점 안좋아졌다.

1450년 2월 조선 제 5代 CEO에 오른 문종...

1450년 2월 17일 아버지 세종이 54세의 나이로 영응대군 집에서 승하하자왕세자 향은 37세의 나이로 곧바로 즉위하였다. 당시 문종은 몸이 안좋아서대신들이 치료하기를 청했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고 아버지 세종의 삼년상을 치렀다. 삼년상 후에는 신하들을 일일이 윤대하며 정사에 지나친 열정을보였다. * 문종시대의 문종의 업적...

1450년 : [동국병감]이 출간됨

1451년 : [고려사] 139권이 편찬됨

1452년 : [고려사절요] 등이 편찬됨

1452년 : 병제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             고 각 병종을 5사에 배분함      

     (문종은 유학, 천문, 역법, 산술 등에도 조예가 깊음) 자격루 개발 아이디어를 낸 文宗...

 

1434년 세자의 나이 21살 때 장영실, 김조,이천 등이 제작했다.

자동으로시보를 알려주는 시계로 그것이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였다.

자격루 개발에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문종이다. 너무나도 과학적이어서그의 군왕 기질은 그때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文宗의 업적중 특이한 이력...

[동국병감]과 같은 병서를 편찬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하는데 상당한 노력을기울인 것은 특이한 이력이다.

그가 무(武)에 능하진 않았지만 무(武)를 다룰줄 아는 능력과 그 제도에 대해서는 특이할 만한 사항이라고 사료된다.

정리하면서... 그는 아버지 세종처럼 무(武)보다는 문(文)에 더 능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궁궐에서 자라 온갖 보호속에 왕세자 교육을 받으며자라왔기에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성격 또한 아버지 세종을 쏙 빼닮아 유순하고 착하고 어질며 효성도 지극하였고 연약하였다. 또한 남에게 해가 가는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세종이 32년동안 조선의 르네상스, 태평성대를 이룩하였지만 사실상 1442년부터의 업적은 문종이 한 것이다.

 

세종이 아버지 태종이 승하하고 1422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사를 폈고

1442년 부터는 사실상 왕세자 향이 섭정을하면서 실질적으로 세종은 22년동안 재위한 셈이다.

 

만약 문종이 1439년에 왕위에 올랐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면서 그가 건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 당시 조선은 태종이 강력한 왕권으로 무의 정치를 하고 세종이 세련된 문치를 통해 조선을 르네상스로 이끌었지만2%가 부족했다. 문종이 즉위하여 한 15년 정도만 좀더 세련된 문치를 통해왕위를 이끌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결국 문종이 39세의 짧은 생애를 마침과 동시에 아들 단종은 영특했지만12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대왕대비,왕대비,대비,왕비도 없는 상황에서 왕위에 올라 당시 왕권이 다소 악화되었다.

이를 보다못한 세조가 결국 쿠테라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세조 또한 정치와 강력한 왕권, 업적에 있어서는 Top7에 들 정도로 훌륭하지만 세조는 세종과 문종처럼 집현전이라는 훌륭한 기구를 폐지하여 더 인재들이 나와야 할 시기에 사육신 인사들이 집현전 출신이라는 이유로 폐지한것이 자못 아쉬웠다.

세종,문종은 자신들의 반대 의견에도 수렴하고 경청할 줄 아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지만 세조는 쿠테타로 왕위에 올라서 그런지 자신에게 해가 되는인물하고는 타협하지 않았고 일부 사람들은 사사했다.

 

세종때에서 세련된문치가 끝나서는 안되었고 문종이 15년 정도 더 세련된 문치를 끌어줌으로서 완성을 어느 정도 보면서 그 다음에 세조 같은 군주가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세조의 이같은 정치형태가 결국 성종이 사림우대정책을 취하고 연산군이두번의 끔직한 사화를 일으킴과 동시에 군강신약에서 군약신강으로 바뀌게되는 결과를 초래한걸 본다면 문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세삼 실감하게 된다.

 

위대한 군주란 재위기간이 길고 짧고, 업적이 많고 적으냐가 기준의 잣대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필요하고 알맞는 군주가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제 2의 세종인 문종이란 군주의 짧은 생애게 아쉬움이 너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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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세종대왕의 건강상태

 

 

실록의 기록을 보면, 세종은 술과 고기를 아주 좋아하여 끼니마다 거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왕들과 세자들, 왕자들은 공식 사냥 등이 아니면 운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운동을 금지한 이유는, 운동하다 다칠까봐서...

 

운동을 금지하고, 술과 고기를 매 끼니마다 먹고, 후궁을 많이 둬서 여색을 즐겼는데...

 

당시는 위생관념이 희박하고, 명분을 강조해서 지금처럼 자주 샤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후궁들이 머리에 쓰는 가채... 가발... 이것을 자주 세척한 것도 아니었으니 온통 세균덩어리였을 것이다.

 

후궁의 숫자가 많으면 탈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성종 역시 성병에 걸렸다고 한다. 

 

 

https://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2301923461

 

 

여기서는 성병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등창도 있는 것으로 봐서, 성병으로 보인다. 그것도 꽤 악성. 사람들이 매독이라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왕이 스스로 자기가 임질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은, 임질이 성병인 줄 당시에는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은 슬하에 22명의 자식(18남4녀)을 두었다.

정후인 소현왕후 심씨에게서 8남2녀를, 후궁인 영빈 강씨(1남)·신빈 김씨(6남)·혜빈 양씨(3남)·숙원 이씨(1녀)와 궁녀인 상침 송씨(1녀)에게서 10남2녀를 생산했던 것이다. 22명이나 되는 자식에, 아들이 18명이나 되었다.

 

거의 매일을 주지육림에서 놀았다는 말이 된다.

거기다가 당시에 왕가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합법적인 운동인 사냥도 좋아하지 않았으니...

비만에 운동부족에 술과 고기를 즐기고 색을 즐겼으니, 오래 살기 힘들었을 것이고.

성병은 거의 필수처럼 따라왔을 것이다. 

 

저건 기록으로 나온 후궁 등의 숫자이고.

왕이 부르면 달려올 궁녀들이 궁에 수백명 정도는 되니까..

언제든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궁녀가 있으면 오라고 하면 와야 하니...

실제로는 매일은 아니라도 자주 여자를 바꿔가며 즐겼을 텐데...

모든 궁녀가 다 행실이 바른 것도 아니었을 테고. 성병으로서의 임질이나 매독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바로 아래 1438년 실록을 보면, 이런 몸 상태로 훈민정음을 혼자서 창제했다고 믿기는 힘들다.

 

세종은 흔히 떠올리는, 약간 마른 체형에 샤프한 천재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고도비만에 술과 고기를 매 끼니마다 먹고 거의 매일 여색을 즐겼던...

그런 스타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할 일을 못한 것도 아니었을 터이니 천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 54세 정도에 죽었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단명한 것도 아니었다.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4월 28일 신사 4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이징옥 김효성을 대신하여 경원을 지킬 장수와 세자섭정을 문의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전일에 대신들과 재차의논하기를, ‘만일 사람을 쓴다거나 군병을 동원한다거나 사형수를 결단하는 등의 일을 제외한

그 나머지의 모든 일은 모두 세자(世子)로 하여금 섭행(攝行)해 다스리게 하려 한다. ’고하였더니, 대신들이 모두 ‘불가하다. ’고 하여, 드디어 그 의논을 정침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전부터 물을 자주마시는 병이 있고, 또 등 위에 부종(浮腫)을 앓는 병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병에 걸린 것이 이제 벌써 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 병의 뿌리가 다 근절되지 않은데다가 이제 또 임질(淋疾)을 얻어 이미 열 하루가 되었는데, 번다한 서무를 듣고 재가(裁可)하고나면 기운이 노곤하다.

이 병을 앓은 자가 모두 말하기를, ‘비록나았다가도 다시 발작한다.’ 하며, 또 의원이 이르기를, ‘이 병을 치료하려면 마땅히 희로(喜怒)를 하지 말고 마음을 깨끗이 가지고 화락하게 길러야만 한다. ’는것이다.

또 근래에는 기억력이 전보다 많이 감퇴하여 무슨 일을 말하려고 사람을 불러서 오면 문득 말하려던것을 잊어버리곤 하며, 모든 일이 다 전과 같지 않다.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 4월 4일 경오 1번째기사 1441년 명 정통(正統) 6년

 

임금이 자신의 안질에 대해 언급하다

 

도승지 조서강(趙瑞康) 등이문안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아파,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에 어려웠다.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더니, 어젯밤에 이르러서는 본초(本草)의잔 주석(註釋)을 펴놓고 보았는데도 또한 볼 만하였다."

 

하여, 조서강 등이 청하기를,

 

"안심하시고 오래 목욕하시어영구히 치유되게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말하기를,

 

"이제 여름철을 당하여 흙비[?雨]가 있을까 염려되는 까닭으로,내월 초하루에는 환궁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 당시에임금이 모든 일에 부지런하였고, 또한 글과 전적(典籍)을 밤낮으로 놓지 않고 보기를, 즐겨하였으므로 드디어 안질을 얻게된 것이고, 왕비도 묵은 병이 있었던 까닭으로 이 행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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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첨사원 설치를 반대하는 상소문

 

○癸丑/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伏聞殿下將置東宮詹事院, 分委庶務, 實駭觀聽。 政府六曹臺諫累請停之, 殿下不允, 臣等不勝驚惶, 敢陳危懇。 臣等竊謂二政分權, 古人所戒。 世子之職, 在於視膳問安而已, 若其分決庶政, 非三代盛世之事也。 姑擧其可考者言之。 昔周武王之爲世子也, 年已八十四, 而文王則年已九十七矣。 文王以九十之年, 豈無倦勤之心? 然未聞委政於武王, 其爲後世慮深矣。 以來, 始令太子聽政, 然或以疾病(式)或以危疑或以征伐, 皆非太平無事之時也。 若 太宗詔太子聽政, 高宗詔太子監國, 順宗命太子監國, 周太祖王聽政,  眞宗詔太子決事, 皆以疾篤也。 若 太宗, 親征高麗, 詔太子監國, 此出於征伐者也。 是皆出於不得已耳。 今殿下此擧, 非爲征伐, 非爲危疑也, 亦非不得已之比也, 不過以微痾耳。 況我祖宗以來, 無此古事, 乃何不法三代祖宗之盛, 而欲效叔世不得已之事, 以開異日二政分權之弊乎? 昔 孝宗令皇太子參決庶務, 朱文公上疏以謂: "使之習事, 不若勉其修德。" 此誠至論也。 伏望殿下俯循輿望, 停詹事院, 使世子專心講學, 宗社幸甚, 生民幸甚。 若殿下猶以微痾爲念, 時令世子侍側參決, 則政權不分, 而民聽亦不惑矣, 伏望聖裁施行。

不允。

 

"엎드려 들으니, 전하께서 장차 동궁에 첨사원을 두어 서무(庶務)를 나누어 맡기려고 하신다 하니 실로 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정부와 육조와 대간이 여러 번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놀라고 두려워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위태하고 간절한 말을 진술합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오니, 정치를 둘로 하여 권한을 나누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한 바입니다. 세자(世子)의 직책은 부왕(父王)의 식선(食膳)을 보살피고 문안을 드리는 데에 있을 뿐이옵고, 그 서정(庶政)을 나누어 재결하는 것과 같은 일은 삼대(三代)의 성세(盛世)에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잠깐 그 고증할 수 있는 것만을 들어 말한다면, 옛날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세자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84세였고, 문왕(文王)은 97세였습니다. 문왕이 90세의 나이로 어찌 근무를 게을리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무왕에게 정무를 맡겼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가 후세를 위하여 염려함이 깊었던 것입니다. 위(魏)나라·진(晉)나라 이후로 비로소 태자로 하여금 정사를 청리(聽理)하게 하였으나, 혹은 질병 때문이고, 혹은 위태하고 의심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며, 혹은 정벌(征伐) 때문이어서 다 태평무사한 때는 아니었습니다.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이 태자에게 청정(聽政)을 명령하고, 고종(高宗)이 태자에게 국정의 감독을 명령하며, 순종(順宗)이 태자에게 감국(監國)을 명령하고 주(周)나라의 태조가 진왕(晉王)에게 청정을 명령하며, 송(宋)나라의 진종(眞宗)이 태자에게 일의 재결을 명령함과 같은 것은 다 병이 위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唐)나라의 태종이 고구려(高句麗)를 친정(親征)할 때에 태자에게 감국(監國)을 명령함과 같은 일은 정벌 때문에 한 일입니다. 이것은 다 부득이한 데서 나왔을 뿐입니다. 지금 전하의 이 처사는 정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위의(危疑) 때문도 아니니 또한 부득이하여 한 일에 견줄 수도 없습니다. 경미한 병환 때문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조종(祖宗) 이래로 이러한 옛일은 없었습니다. 이에 어찌하여 삼대(三代)와 조종의 성세(盛世)를 법으로 하지 않고 말세(末世)의 부득이한 일을 본받아 다른 날 정치를 두 곳에서 하여 정권을 나누게 하는 폐단을 열고자 하십니까. 옛날 송나라 효종(孝宗)이 황태자로 하여금 서무의 재결에 참여시키고자 하니, 주문공(朱文公)이 상소(上疏)하기를, ‘일을 익히게 하는 것이 그 덕을 닦는 것을 힘쓰게 하기만 못합니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지론(至論)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굽어 민정(民情)에 좇아 첨사원의 설치를 정지하고 세자로 하여금 강학(講學)에 전심(專心)하게 하시면 종묘 사직을 위하여 매우 다행한 일이며, 생민(生民)을 위하여도 매우 다행한 일이 되겠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오히려 경미한 병환을 염려하신다면 때로 세자로 하여금 곁에 모시어 재결에 참여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정권은 나누어지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이 들어도 의혹하지 않을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의 재결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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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갑손 등 대간이 첨사원 설치를 반대하는 의견을 거듭 아뢰다

 

○臺諫闔司守闕啓: "言官之說, 或因往古之事而不合於時宜, 或見眼前之計而不及於遠圖。 如此則人主豈能盡從言官之說? 言官亦豈能必其人主之聽納也哉? 今此詹事院, 稽諸古則前古之所無, 非徒臣等, 政府六曹大臣與擧國臣民皆以爲不可, 而不允其請, 臣等所以憤鬱也。 若人君設施, 一定於心而不易, 不復採納衆論, 則爲置言官, 將安用之? 於舍己從人、從諫如流之意何如? 願更加商量。" 上曰: "政府來啓是事, 予已詳說之, 卿等後當知之。" 鄭甲孫等更啓曰: "臣等豈不知上意? 政府豈別有所啓? 古人云: ‘專命則不孝。’ 姑以一家言之, 父雖老病臥床, 子不得專制, 事皆咨稟而行。 一家之事尙爾, 而況於國政乎? 今旣立承政院, 出納王命, 東宮又置詹事院, 出納命令, 安有此理? 此乃綱常所係。 古人雖有君命, 猶讓國而不受, 殿下不得分庶政於東宮, 使之專命, 東宮亦不得受分政之命而專行也。 且詹事院, 實是中朝之官制也。 僭擬中朝而設此官, 亦不可也。" 上曰: "卿等之意, 予已知之, 卿等可退矣。" 甲孫等更啓曰: "自古儲副參決萬幾, 臣等不以東宮治事爲不可也, 爲設詹事院, 出納命令, 與承政院一體, 臣等以爲不便。 東宮已參視事, 是古者參決萬幾之意也。 殿下若或未能親決庶務, 委之東宮, 則承旨咨稟於東宮而行之可也, 何必別設詹事院乎? 殿下以臣等之言爲不可, 拘囚之罷黜之, 則臣等退矣, 安可無辭退去, 以廢言官之責乎?" 上曰: "已使議政府更議節目。" 甲孫等更啓曰: "詹事院之設, 臣等以爲不便。 若不罷此官, 則其間節目, 雖改何益?" 上曰: "此官非爲世子治事而設, 雖後世孺兒爲世子, 此官常置不罷矣。" 甲孫等更啓曰: "東宮若不治事, 則詹事院, 乃閑冗之官也。 書筵進講, 翊衛司侍從, 固無欠缺, 何必設此閑冗之官也? 況本國壤地褊小, 調度浩繁, 祿俸尤不可增。" 上曰: "已命大臣更議之, 卿等何屢啓不已?" 鄭甲孫、朴仲林等更啓曰: "若議詹事院設罷可否則臣等當退竢命, 但議節目則是非臣等之本意也。 乞賜兪音。" 上曰: "(丁)〔予〕 已知之。" 甲孫等更啓曰: "臣等之意, 已自前日無遺啓達。 (令)〔今〕 敎以已知, 然臣等之意不在於殿下知之而已, 只在停詹事院之設。 臣等職在言官, 安敢默默?" 上曰: "已令政府更議, 卿等何不徐觀其終而强爲之說?" 甲孫等更啓曰: "臣等所啓者, 詹事院耳, 其節目, 非臣等所知。 殿下嘗以臣等爲迂闊, 然太王傳位王季, 其志在於傳至於文王也。 文王五十始受命, 其爲世子, 問寢視膳之外, 無他事也。 我祖宗積累旣厚, 有萬世無疆之休。 是以儲貳元良, 道德夙成, 然參決萬幾可也, 分治庶事, 不可也。 此事, 綱常所係, 臣等不敢不言。" 上不答。

 

대간(臺諫)이 관사(官司)의 문을 닫고 대궐을 지키면서 아뢰기를,

"언관(言官)의 말이 혹은 지나간 옛일에만 인유(因由)하고 시의(時宜)에 맞지 않거나, 혹은 눈앞의 계책만을 보고 먼 장래의 계획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러한 경우에 임금이 어찌 언관(言官)의 말을 다 좇을 수 있겠으며, 언관(言官) 자신들도 또한 어찌 반드시 임금이 청납(聽納)할 것을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 첨사원은 옛 제도를 상고하여 보아도 전고(前古)에 없던 것입니다. 한갓 신 등(臣等)만이 아니라 정부와 육조의 대신과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다 옳지 않다고 하는데, 그것을 중지하라는 청을 윤허하지 아니하시니 신 등이 분격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만약 성상께서 무엇을 시행하겠다고 한번 마음에 정한 것은 바꾸지 않으며, 다시는 여러 사람의 여론을 채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언관을 주는 것은 장차 어디에 쓸 것이며,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남의 의견에 좇는다. ’고 한 말이나, ‘간언(諫言)에 좇는 것은 물흐르는 것과 같다. ’라고 하는 말의 뜻에 어떠하겠습니까. 원컨대, 다시 깊이 헤아리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부에서 와서 이 일을 아뢰기에, 내가 이미 자세히 말하였으니 경 등은 뒤에 의당 알게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정갑손(鄭甲孫) 등이 다시 아뢰기를,

"신 등이 어찌 위의 뜻을 모르겠습니까. 정부인들 어찌 별다른 아뢸 것이 있었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명령을 전단(專斷)하는 것은 불효(不孝)한 행위라. ’고 하였습니다. 잠깐 한집안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아버지가 비록 늙고 병들어 자리에 누어 있더라도 아들이 제 혼자서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다 아버지에게 사뢰어 명령을 받은 뒤에 실행하는 것입니다. 한집안의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나라의 정사이겠습니까. 지금 이미 승정원이 있어서 왕명(王命)을 출납하고 있는데, 동궁에 또 첨사원을 두어 명령을 출납한다면 어디에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비록 임금의 명령이 있어도 오히려 나라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사오니, 전하께서는 서정(庶政)을 동궁에 나누어 주어서 명령을 전단(專斷)하게 할 수 없을 뿐더러, 동궁도 또한 서정 분담의 명령을 받아 전행(專行)할 수는 없습니다. 또 첨사원은 실로 중국의 관제(官制)이온데, 참람되게 중국에 견주어 이 관부를 설치하는 것도 또한 옳지 않습니다."

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의 뜻은 내가 이미 알았으니, 경 등은 물러가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갑손 등이 다시 아뢰기를,

"예전부터 왕세자가 만기(萬機)의 재결(裁決)에 참여하였으니, 신 등은 동궁이 치사(治事)하는 것을 불가(不可)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첨사원을 설치하여 명령을 출납함에 승정원과 동등하게 하는 것을 신 등은 온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궁이 이미 정사를 보는 데 참여하는 것은 옛날 만기(萬機)의 재결에 참여하던 것과 뜻이 같은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혹이나 서무(庶務)를 친히 재결할 수 없어서 동궁에게 맡긴다면, 승지가 동궁에게 품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찌 반드시 따로 첨사원을 설치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신 등의 말이 옳지 않다고 하여 구금(拘禁)하거나 파면시켜 내쫓으면 신 등은 물러갈 것이나, 어찌 말없이 물러감으로써 언관(言官)의 직책을 폐기(廢棄)할 수야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의정부로 하여금 다시 절목(節目)을 의논하게 하였다."

고 하였다. 갑손 등이 다시 아뢰기를,

"첨사원의 설치를 신 등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관직을 폐지하지 않는다면 그 절목(節目)을 비록 고친들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관직은 세자가 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후세에 어린애가 세자가 되는 경우에도 이 관직은 상설(常設)하고 폐지하지 않을 것이다."

고 하였다. 갑손 등이 다시 아뢰기를,

"동궁이 만약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첨사원은 곧 한가한 일없는 관청입니다. 서연(書筵)에서 진강(進講)하고 익위사(翊衛司)에서 시종(侍從)하더라도 결함이 없을 터이온데, 하필 이 한가하고 일없는 관청을 설치해야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나라는 땅이 좁고 쓰임새는 많으니 녹봉(祿俸)을 더욱 증액(增額)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라고 명령하였는데 경 등은 어째서 여러 번 아뢰기를 그치지 않는가."

하였다. 정갑손(鄭甲孫)·박중림(朴仲林) 등이 다시 아뢰기를,

"만약 첨사원의 설치와 중지에 대한 가부(可否)를 의논하시겠다면 신 등은 마땅히 물러가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마는, 절목(節目)만을 논의한다면 이것은 신 등의 본의가 아니오니, 바라옵건대, 윤허하는 윤음(綸音)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사(丁巳) 일이면 알 것이다."

고 하였다. 갑손 등이 다시 아뢰기를,

"신 등의 의사는 이미 전일부터 빠짐없이 계달(啓達)하였으나, 이제 ’이미 알았다. ’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 등의 뜻은 전하께서 아시는 것에만 있지 않고 오직 첨사원의 설치를 정지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 등의 직책이 언관(言官)에 있으니, 어찌 감히 말없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정부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였는데 경 등은 어찌 천천히 그 귀결을 보지 않고 강변을 하고 있는가."

하였다. 갑손 등이 다시 아뢰기를,

"신 등이 아뢰는 것은 첨사원뿐입니다. 그 절목(節目)은 신 등의 알 바 아닙니다. 전하께서 일찍이 신 등을 오활(迂闊)하다 하시겠으나, 주(周)나라의 태왕(太王)이 왕계(王季)에게 전위(傳位)한 것은 그 뜻이 전(傳)하여 문왕(文王)에게 이르게 하려고 한 데에 있었던 것이오며, 문왕은 50세가 되어서 비로소 명(命)을 받았습니다. 그가 세자가 되었을 때에는 부왕(父王)의 침소(寢所)에서 안부를 묻는 일과 부왕의 식선(食膳)을 살펴보는 이외에는 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조종(祖宗)께서 은덕을 쌓고 거듭한 것이 이미 두터워서 만세(萬世)에 걸쳐 끝이 없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자께서는 도덕(道德)이 일찍 이루어졌으니 국가의 온갖 기무(機務)에 참결(參決)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마는, 그러나 여러가지 정사를 나누어 다스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일은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신 등이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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