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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선문명

고인돌과 천문도

작성자뽀야|작성시간22.02.12|조회수329 목록 댓글 0

 

 

'고인돌은 전세계에 약 7만 개 中 한반도에만 3만 개.'

구석기시대에 바이칼호에서 한반도로 민족 대이동이 있었던걸까?
바이칼호 일대는 구석기시대부터 6세기까지 동서양 문화교류 중심. 
바이칼호 주변에서 남진해왔고 석관 돌매장 풍습이 있었다는 환웅족.

단군이 아사달로 도읍을 옮긴 후 3달 동안 대홍수.
단군은 아사달(평양) 인근 묘향산으로 대피한 기록.
그당시 한반도의 평야 대부분은 물 속으로 잠겼던듯.

 

서해 바닷가는 물론 대동강은 홍수로 범람
그당시 대홍수로부터의 피난처였던.,묘향산'

고인돌은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장사를 지내는 풍습.
한반도는 선사시대부터 동아시아의 고래잡이 중심지였던 곳.
고인돌 축조, 운반기술은 고래잡이에서 비롯된 것인듯 여겨진다.

'(고래 한마리 = 황소 10 마리 = 고인돌) 무계.'

선사시대 고래잡이 운반기술이 고인돌 풍습을 가능하게 한듯.
석관 돌매장 풍습은 선사시대 한반도 조상인 아리안족의 풍습.
한반도에서도 지리산 일대에는 유난히 고인돌 군락의 밀집지역.

'큰돌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사회 믿음.'
즉, 큰돌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한다는 숭배 의식.
한반도 조상의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전북 고창에 고인돌(지석묘) 공원이 있다.

고창에는 80 여곳에 2,000기 이상의 고인돌

고창 읍성에서 선운사 가는 길에 고인돌들

 

커다란 돌덩어리의 용도를 모르던 시절,

주민들이 내다 버린 돌만 500개가 넘는다

<BC 10세기 전후 ~ 청동기시대까지> 축조

 

규모가 큰 것은 300톤에 달한다고 한다.

죽림리, 상갑리, 도산리 일대 6개 탐방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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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사적  제391호  
고창지석묘군(高敞支石墓群) 
 
 지석묘란 선사시대., 고인돌 무덤

 고창 아산면 죽림리 매산마을 1.8㎞

야산 기슭에 있는 440여기의 고인돌

 

기원전 400년∼500년경 이 지역 족장들의 가족무덤

당시 농사 짓기 좋은 이 지역에 터를 잡았던 것 같다.

 

바둑판 모양 남방식,

탁자 모양의 북방식,

 

천장돌만 있는 개석식 등

각종 형식을 갖추고 있어

고인돌의 발생과 성격을

아는데 매우 중요하다.

 

 또한 아산면 상갑리 일대 고인돌은

북방식 고인돌의 남쪽 한계선으로

 학술적인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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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은 전세계 7만기 중 한반도에 3만기

전남에 2만기가 몰려있고 평양 일대에 1만기.

우리나라 고인돌 밀집지역은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 문화.

고창은 남방식·북방식·개석식 등 2천여 기 분포

화순에 500기 남방식, 강화도에120기 북방식 분포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한 돌덩이 여러 개 운반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

 

소 한마리에서 소 열마리., 무계의 돌들

또는 수십마리 소를 합친 만큼 큰 고인돌.

고래잡이 종족이 아니면 운반이 불가할듯.

 

제 4빙하기 후 지구온난화로 해수면 143m 상승

저지대가 바다로 바뀌자 삶의 터전을 잃은 민족들.

'서해 남해 동해' 속에 잠긴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탈출.

 

빙하가 급속도로 녹아 흐르며 해수면이 급상승.

하룻밤 자고나면, 수십리씩 물속에 잠긴 저지대.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대홍수 무렵인듯 싶다.

 

지석묘군은 저지대 민족이 남긴, 흔적들.

 

큰 고인돌일수록, 강력한 부족 집단임을 과시.

저지대 민족을 모두 다 수용하기에 좁은 한반도.

저지대 민족들은 살길을 찾아 전 세계로 흩어진듯.

 

탈출 중 진로가 막혀 섬에 갇히기도 했고

정착한 섬이 통째로 물에 잠기기도 했던듯.

하여, 서해와 남해 앞바다 섬속에도 지석묘군.

 

대홍수가 일어나며 천재지변이 발생.

인류가 예전에 겪어본적 없던 대재앙.

그 무렵 민간신앙이 싻튼듯 추정된다.

 

인류가 거대한 돌 구조물을 남긴 이유는,

아마도 그곳에 영험한 힘이 깃들여 있다는

옛사람들의 민간신앙이 깃들어있기 때문일듯.


.............강루리 고인돌..................
산청군 동남부에 있는., 단성면[丹城面]
면소재지 성내리, 북서쪽에 웅석봉(1,099m)
경호강이 동쪽 면계를 흐르다가 남강을 이루며,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면 서남부를 흐른다.

평야는 이들 하천 유역을 따라 길게 분포.

특산물로 매실 밤 인초 특히, 고령토 생산이 많다.
사월리는 문익점 목화 재배지 및 면화 시험 재배지
피서지 백운동계곡, 단속사지(斷俗寺址) 등 유적지.

성내(城內) 강루(江樓) 방목(放牧) 청계(淸溪) 운(雲)
입석(立石) 남사(南沙) 사월(沙月) 묵곡(默谷) 소남(召南)
관정(官亭) 창촌(倉村) 길(吉) 호(虎) 당산(堂山) 백운(白雲)
자양(紫陽) 등 17개 동리, 면적 108.62㎢, 인구 6,424(2000) 명.

산청 강루리 고인돌(山淸 江樓里 支石墓)

낙동강의 한 지류인 경호강 유역 충적대지상에 위치
6기 모두 덮개돌 만 보이는., 개석식(無支石式)고인돌

축조할 때 냇돌(川石) 또는 판돌(板石)을 혼합 사용.
고인돌 1 ~ 3호는 매장주체부로 돌널(石棺)이 있으나
4 ~ 6호 고인돌은 돌널 구조가 없는 형태 고인돌이다.

강루리 3호 고인돌은 지름 17-23㎝ 냇돌을 깔았다.
2호 고인돌의 덮개돌 장축은 남-북 방향으로 놓였다.
6호 덮개돌은 2.1×1.05×0.42m이며 남-북 방향이다.

6호 고인돌에서 동북쪽으로 0.8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가로, 세로 2.6×0.5m 석벽이 북쪽으로 면을 맞추었다.
45㎝ 아래에서 구멍무늬토기편(孔列土器片) 1점이 출토.

1·2·4·6호 고인돌에서는 출토유물이 없었으며,
3호 고인돌에서는 붉은간토기편, 빗살무늬토기 1점,
5호에서는 민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붉은간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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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 지금보다 훨씬 면적이 넓었던 한반도.
삼면 바닷가 대부분 육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한반도 일본이 대륙으로 이어졌을 듯 싶다.

'저지대 민족으로부터 유래된 고인돌 풍습.'

현재 바다 속에 잠긴 저지대는 광활한 대륙.
지구온난화로 인해 급속히 녹아 흘러내린 빙하.
해수면이 급상승하자 살 길을 찾아 민족 대이동.

하루가 다르게 바다 속으로 사라져가는 저지대.
그 공포스러운 광경을 목격하며 고지대로 피난.
고지대는 물론 어지간한 산까지 삼켜버린 대홍수.

수많은 저지대 민족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 듯.

한반도로 이주 후 원주민들과 치열한 영역다툼.
청동기에 이어 철기 무기로 무장한 저지대 민족.
원래부터 한반도에 살던 원주민을 정복하고 노예화.

'고인돌은 저지대 민족들 고유의 장례풍습.'

중국 진나라에서의 산사람을 매장하는 순장풍습.
한반도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존재한 순장풍습.
석기시대부터 저지대 민족의 전통풍습으로 추정된다.

저지대 민족들이 점령한 민족들을 노예화한듯.
순장풍습은 당시 계급사회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배층이 죽으면 그 노예도 함께 생매장하는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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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은 뚜껑 덮개돌과 여러 굄돌이 받치고 있는 형태.
무덤 용도로 꾸민 고인돌은 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
돌멘(dolmen)이라고 불리우는 말의 뿌리는 켈트어로 추정.
한국 만주 일본 유럽 영국, 북아프리카에 분포되어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전북 고창군 아산면 상갑리
바둑판식 고인돌은 경남 창녕군 영산면 등등.

강화 고인돌은 사적 제137호(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는데, 선사시대 고인돌 중 가장 크다.
중국 산동반도와 랴오닝 지역 남부 저장성 부근에도 더러 있다.
일본은 규슈 지역에 있을 뿐인데 우리나라에 무려 3만기 고인돌.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있고 강을 낀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
골짜기 강 해안선 따라서 있어 바다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고인돌은 자연숭배 사상과 연관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자연을 향한 여러 의식을 거행한 듯 보이는 제단 고인돌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서해안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탁자식 고인돌(북방식 전형)은 4개의 돌을 세운 네모꼴
땅위에 네모꼴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이 놓였다.

덮개돌 하중을 받는 긴 벽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나들이 문 역할을 한 짧은 벽 쪽은 대부분 파손.
황해도 평안도 서북지역에 많이 발견되어 북방식.

전남 나주, 경남 거창에서도 드물게 나타난다.

바둑판 고인돌(남방식 기반식)은 땅 위에 놓인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형태.
땅 속 무덤방은 구덩이 돌널 돌덧널 등 여러가지 형태.

구덩이식 고인돌(무지석식·개석식)은 덮개돌만 있다.
전북 고창 지방에 있는 것은 덮개돌은 무려 170t 무계.

고인돌은 상당히 일찍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옛 기록으로는 BC 78년 〈전한서 前漢書〉에 처음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1200년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기록.
금마군(지금 익산군)의 고인돌이 기록상으로는 최초 고인돌.

제천 황석리와 양평리,
달성 진천동 고인돌에서
사람의 뼈가 출토되었다.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토기가 있는데
간혹 늦은 시기 고인돌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석기는 대부분 간돌검[磨製石劍]·돌촉[石鏃] 등.

가끔 청동 유물을 찾아볼 수 있는데,
최근 여천 적량동유적에서 비파형동검

드물게, 곱은옥[曲玉] 대롱옥[管玉]이 나오고
사슴이나 소, 동물, 돼지 등 짐승뼈가 발견된다.
이는 묻힌 사람의 영생을 바라는 내세에 대한 믿음

고인돌 시대 의식세계를 보여주는 'X'자가 새겨진 자갈돌
옥천 안터 유적과 화순 대전 유적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
양평 양수리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결과는 3,900±200 BP

안터 고인돌에서는 늦은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왔으며,
담양 문학리, 충주 하천리, 제천 함암리 고인돌은 철기시대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리나라 고인돌은 늦은 신석기시대부터
조금씩 만들어지다가 청동기시대에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른 철기 시대에도 지역에 따라 가끔 만들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언제 어디서부터 유래되었을까?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동북부지역에서의 전파설
주변지역과 관계없이 한반도에서 만들어졌다는 설.
아직까지 어느 쪽이 맞는 학설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커다란 덮개돌을 옮겨 고인돌을 만드는 기술과 인력.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
발굴한 유적으로 분석해보면 고인돌은 주민 공동체의식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선사시대의 유적.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순, 고창, 강화의 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서 알려져왔다.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은 덮개돌 무계만 80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중의 하나이다.
하여, 이 무덤의 주인공은 족장 또는 지도자.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는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와 달리 대부분 농사를 지어 식량조달.
식량관리 및 부족을 통솔하는 족장이 나타난 시기.
족장은 농사가 잘되길 하늘에 기원하는 일도 맡았다.

때로는 식량을 약탈하려는 타부족과 전쟁도 벌렸다.
전쟁이 거듭될수록 강력한 지도자와 세력이 필요했다.
고인돌은 그 부족의 강한 세력을 나타내 보이려는 수단.

'이집트 피라미드나 중국 황제의 거대한 무덤.'

그당시 조상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신에게 간다고 생각.
그리고, 그 영혼이 후손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던 듯.
하여, 족장은 자신의 권력에 걸맞은 거대한 무덤을 세웠다.

무덤 속엔 지배자만이 가졌던 청동검 청동방울 등도 묻었다.
고인돌은 족장의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써 만들어진 무덤이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부터 지배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뜻한다.

천왕봉 정상을 받치고 있는 통신골 일대
천왕봉 정상은 거대한 형태의 고인돌 같다.

바다속으로 변한 저지대에서부터 탈출한 민족들.
저지대 민족에게 천왕봉 정상은 신과도 같은 존재.
하여, 천왕봉은 신석기 시대부터 '민간신앙의 성역'.

...............고인돌이 발견된 지역.................
BC 4000∼3000년 프랑스·남부스웨덴·포르투갈·
덴마크·네덜란드·영국 유럽은 물론 지중해 연안
불가리아·에티오피아·수단 등등의 아프리카 지역

아시아에서는 팔레스타인·이란·
파키스탄, 티베트 남부지역, 인도.
인도네시아·보르네오·말레이시아

'한반도에서는 전역에 고루게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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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북방식은 4개의 판석을 세운 직사각형 석실 위에 뚜껑돌
유해가 매장된 석실을 지상에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한강 이북인, 평안남도, 황해도 대동강,·재령강,·황주천 일대

한반도에서 고인돌 밀집지대는 황해도와 전라도 일대.
한곳에만 수백기의 고인돌이 군락을 이룬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전북 고창의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

한강을 경계선으로 서로 다른 문화권이 형성.
지리산 일대는 한반도 한강 이남 문화권 중심.
황해도 평안도는 한반도 한강 이북 문화권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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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한강 이남에 분포.
일본 규슈(九州)지방 고인돌은 죠몽시대 말 ~ 야요이 초기.
한반도 유물과 함께 발견되어 우리나라에서 건너갔음을 암시.

한반도 남방식은 <바둑판식>판석 개울돌을 사용,
지하에 석실이 있고 뚜껑돌을 받친 받침돌은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있는 전라도 경상도 고인돌.

주로 한강 이남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고창군 죽림리, 상갑리 일대 2천 여기 밀집 지역.

고인돌에서 돌검과 화살촉이 주로 출토되었고,
충북 제천시 황석리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묘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만 축조가 가능했을 고인돌
고대국가 이전에 혈연 중심의 족장사회 공동묘지.
세습 신분 사회까지도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고인돌은 지렛대와 밧줄·수로를 이용, 운반한 듯.
뚜껑돌은 받침돌을 세우고 봉분 흙을 쌓아 올린 듯.
경사면을 만들어 끌어올린 후 봉토를 제거하는 방법.

한강 이북에 퍼져있는 북방식 고인돌
시베리아 카라스크 거석 문화의 영향

한강 이남에 퍼져있는 남방식 고인돌
세골장(洗骨葬)과 함께 동남아시아 식.
남방식 고인돌이 북방식보다 훨씬 많다.

'고인돌은 어디에서부터 유래되었을까?'

3면이 수심이 낮은 바다로 애워쌓인 한반도.
한반도 3면의 바다 밑에 펼쳐진 광활한 대륙붕.
지구 온난화 이전까지는 저지대 육지였던 곳이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리던 제 4빙하기 말.
3~4도 기온 상승으로 지구 해수면은 140m 급상승.
지구상에서 거의 대부분 바다속으로 사라진 저지대.

'한반도 남해안 일대에 분포된 수많은 섬들.'

당시 저지대 산들이 오늘날에는 정상만 남은 흔적.
저지대에 살던 많은 인류는 살길 찾아 민족 대이동.
당시 대홍수 천재지변에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민족들.

육지까지 탈출 못해 서해와 남해 섬에 갇힌 민족들.
농토를 지키기 위해 섬 둘레에 제방을 쌓아올린 흔적.
그당시부터 공동의 생존을 위한 공동체 문화가 발전한듯.

저지대 민족을 육지까지 무사하게 인도한 지도자들.
최초의 고인돌은 그 지도자들의 돌무덤으로 추정된다.
종족 목숨을 구해낸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고인돌 축조.

'그 민족들이 남긴 돌 무덤들이 고인돌인듯.'

대범람, 대홍수에서 겨우 생존한 저지대 민족.
천재지변을 일으킨 하늘을 신처럼 두려워했을듯.
인류에게 하늘을 경배하는 민간 신앙이 싹텄을듯.

지리산은 수많은 남방식 고인돌 분포지역 중심.

고인돌은 우리나라와 일본 등지 지석묘(支石墓)의 총칭.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 한다.
이외 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 Megalith).

고인돌 축조시기는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일본에서는 죠오몽(繩文) 만기(晩期)시대.
서유럽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초기,
동남아시아는 선사시대 거석(巨石) 숭배사상.

우리나라에서 고인돌에 대한 다양한 별칭들.

땅에 묻혀있는 것에서 독배기, 바우배기 독바우.
받침돌(支石)이 있는 남방식은 괸바우, 암닭바우,
상석 형태에 따라 거북바우·두꺼비바우·개구리바우.

민간신앙과 연관시켜 고인돌의 배치 상에서의 이름
칠성바우, 장군이 옮기다가 말았다는 전설의 장군바우.

하여, 고인돌은 불교 이전 청동기시대 민간신앙.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영어로는 돌멘(Dolmen)

 

거석기념물의 하나이며 피라미드, 오벨리스크(Obelisk)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등이 모두 거석문화의 산물이다.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 우리나라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 고인돌

그중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구조, 정치체계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어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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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

 

10톤 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 고인돌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고인돌유적으로 평가된다.

 

인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

고려산 기슭을 따라 1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

길이 7.1m, 높이 2.6m 국내 최대 북방식 고인돌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 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한다.

 

 고창고인돌유적


고창지석묘군(사적 제391호)
도산리지석묘(전라북도기념물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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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인돌별자리
고대 국가에서 지배자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것 중의 하나는 천문 현상 관측이다.
천문 현상을 왕권의 존립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성인으로 추앙 받는 3명의 제왕이 있다.

요, 순, 우가 그들인데 그들의 업적은 모두 하늘과 땅에 관한 일이다. 

요 임금은 ‘희화씨’라는 천문 관측 관원과 기관을 설치했고, 순 임금은 ‘선기옥형(혼천의)’이라는

천문기구를 창안해 완벽한 천문 역법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우 임금은 잦은 홍수로 황폐해진 중원지역의 치수에 성공함으로써 천하를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결국 중국의 전설적인 세 성군 요, 순, 우는 천문 역법과 치수를 완성함으로써 제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즉 하늘은 제왕만이 대행할 수 있고 자연재해는 제왕의 부덕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는 자연관은 결국

하늘을 잘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천문학이 고대에서 통치 기술로 접목될 수 있는 것은 천문학이 농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즉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파종하는 등 사시사철의 변화와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수다.

그런데 이 절기를 제대로 알아내려면 하늘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계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1년의 시작, 한 달의 시작점을 정확히 안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시계가 없던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은 어떠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해, 달, 별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역(歷)을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계산할 수 있었다.

4계절의 변화와 매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농사에는 필수였으므로 하늘을 관찰해 제대로 된 역을

만들고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제왕의 책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작물의 생육조건과 하늘 즉 기후와 연계시킨 노하우가 축적돼 있을 때 특정 작물이 잘 자라며 또

수확도 많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하늘의 정보는 하늘을 계속적으로 관찰하고 거기서 이상 징후에 대한 결과를 도출하는

담당자가 있어야 함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문명사에서 천문학의 발달 여부가 중요시되는 것이며, 기원전 1200년경에 하늘을

관찰했음을 보여주는 바빌로니아의 토지 경계비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1800년이나 빠른 천문도가 우리 나라의 고인돌에서 발견된다. 

▲ 지석리 고인돌(좌)와 원화리 고인돌(우) 별자리 실측도.  ⓒ


고인돌에 새겨진 천문도는 주로 평양의 고인돌 무덤 중에서 발견되는데, 그 수는 2백여 기나 된다.

고인돌의 두껑돌에 새겨진 홈구멍이 천문도임을 알게 되기 전에는 이 홈구멍에 대한 견해가 구구했다. 

고인돌의 뚜껑돌에 있는 홈구멍은 고인돌을 채취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으로 보거나

불을 일구는 발화구멍의 일종으로 보기도 했으며 하늘과 태양 숭배사상의 표현 또는 장례의식이나

장식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일부는 민간에서의 장수를 의미하는 발자국으로 인식하기도 했고 피장자의 족보로도 보았다.

또한 중국학자들은 제사를 지내고 그 회수를 표시하거나 제사에 사용된 동물의 수량을 표시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인돌 무덤에 새겨진 홈구멍의 배열 상태를 조사한 학자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별자리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성좌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평범한 돌에 아무렇게나 구멍을 뚫은 것처럼 보이는 고인돌이 현대 과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정확한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우리 선조들이 당시의 최첨단의 과학기술 정보를 돌 위에 적은 것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획기적인 자료가 됐다. 

고인돌과 같은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별자리를 기록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위에 직접 별자리를 새겨 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위 자체를 하나의 별로 간주해

바위들을 별자리 모양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인돌별자리의 추정 연대이다. 

고인돌별자리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 있는 외새산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 무덤이다.

평양에서 북서쪽으로 약 44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는 이 무덤의 돌은 문자 비슷한 곡선과 점들이

새겨져 있어 글자를 전하는 돌이라는 뜻에서 ‘전자석’이라고 불린다. 

고인돌 무덤의 뚜껑돌 겉면에는 80여 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는데, 조사 결과 그 구멍들이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했다.

밤에 별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하늘의 모든 별들이 한 별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심이 되는 별이 북극성이다.

또한 북극성 주변의 별들은 다른 별자리들과 달리 연중 계속 볼 수 있다.

▲ 강동군 항목2리 별자리 고인돌.  ⓒ
 
그 당시의 북극성은 오늘날 용별자리의 알파(α)별이다.
이 별을 중심으로 80여 개의 구멍은 큰곰별자리, 사냥개별자리, 작은곰별자리, 케페우스별자리 등 11개의 별자리를 나타냈다.
별의 밝기를 반영하듯 구멍의 크기도 각각 달랐는데 세차운동(歲差運動)을 감안해 연대를 측정하면 고인돌의 별자리는 4800±215년의 하늘을 보여준다.
또 같은 고인돌 무덤에서 발굴된 질그릇 조각의 연대를 핵분렬비적법으로 측정해 4926년(±741년)이란 결과를 얻었다.
이는 적어도 기원전 2900~3000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천문을 세밀하게 관측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평양시 상원군 번동 2호 고인돌 무덤도 기원전 30세기 전반기의 무덤으로 뚜껑돌 위에 80여 개의 홈구멍이 새겨져 있으며 크기도 제각각 다르다.

그 중 큰 홈구멍은 6개가 있는데 5개는 북두칠성의 국자와 자루를 연상시킨다.
북두칠성의 놓임새에 따라 나머지 별들을 관찰하면 큰 별 하나는 5제좌(사자별자리의 β별)에 해당하며 작은 별자리들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자미원(당시 북극)과 테미원, 천시원에 속한다.
동양에서는 하늘의 신들이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운영하며 별자리를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는데
자미원은 옥황상제가 살고 있는 담(북극성)을 의미하며 태미원은 옥황상제가 정사를 논하는 장소, 천시원은 백성들이 생활하는 시장을 뜻한다.
이 고인돌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는 4800년 전 여름이다. 은천군 정동리 ‘우1-19호’ 별자리는 약 4,700년 전으로 나타났으며 계절은 여름경이다. 즉 여름경 밤하늘의 별을 새겼다는 뜻이다. 

또한 평안남도 평원군 원화리 고인돌에 그려진 별그림은 길이 3.45미터, 폭 3.20미터, 두께 0.60미터의 뚜껑돌에 있다.

구멍의 크기는 가장 큰 것이 직경 10센티미터, 깊이 3.5센티미터이며 여러 가지 크기로 구분돼 있는데 용별자리, 작은곰별자리, 큰곰별자리 등을 나타낸다.
연대는 기원전 2500년으로 추정된다. 

은천군 ‘ㅎ-3호’ 고인돌은 구멍수는 28이지만 별자리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고인돌에는 븍극5, 구진, 자미원(당시 북극), 천리, 북두칠성, 등이 보이는데 연대는 3,944±215년이다. 강동군 화강리 고인돌에는 전사, 화개(케페우스별)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천문학적 연대는 3700년 전 여름경이다. 

함경남도 함남 함주군 지석리의 고인돌 무덤에서 발견된 별그림은 기원전 1500년경의 것으로

고조선 중기에 해당한다. 중심점(북극점)을 기준으로 해 큰곰별자리에 속해 있는 북두칠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작은곰별자리, 카시오페아, 케페우스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특히 뚜껑돌 우측을 따라 은하수에 해당하는 작은 별들이 많이 새겨져 있다.

이는 은하수가 별들이 많이 모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의 관찰이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석리 고인돌에는 별의 밝기에 따라 구멍의 크기를 4부류로 구분해 새겼는데, 그 크기는 직경

10, 6, 3, 2센티미터 순이고 깊이는 3~3.5센티미터 정도이다.

이 돌에 새겨진 별을 관찰하면 동지, 하지, 춘분, 추분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특히 지석리 고인돌 별그림을 보면 그 이전 시기의 것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자리 별을 기준으로 볼 때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에 속하는 별에 해당하는 구멍들의 간격이

용덕리 고인돌보다 더 정확하며, 4등성 이하의 별까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단순히 별을 관상한 것이 아니라 관측 연구하고 그 결과를

실생활에 적용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은천군 ‘ㅂ-1호’는 오덕형 고인돌로 구멍수가 134개나 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별자리는 자미원, 직녀, 구진, 북극5, 정수(쌍둥이), 삼수(오리온) 등이 있는데

기원전 3,200년으로 추정됐다.

                               ▲ 황해남도 은천군 정동리 우녕동 별자리 고인돌, 북두칠성이 선명하게 보인다.  ⓒ

 

 

 

용덕리 고인돌별자리는 그 당시 북극점이 용별자리의 α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보다 1500년 후의 지석리 고인돌별자리 그림에는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다.
이것은 당시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북극점이 세차운동에 의해 변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당시의 천문관측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총체적으로 대동강 유역에 있는 2백여 기의 고인돌 무덤에 그려진 별자리는 북극 주변의 별자리와

지평선, 적도 부근의 28수(二十八宿)를 비롯해 모두 40여 개가 된다.
이 별자리들은 북위 39도의 평양의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모두 새긴 것이다.
또 이 별자리에는 특이하게 은하수와 플레이아데스 성단들도 새겨져 있다.
육안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이렇듯 많이 새긴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다. 

2002년에는 평양시 순안구역 구서리에서 매우 특이한 고인돌이 발견됐다.

모두 9기의 고인돌이 배치돼 있는데 이들 모양은 누가 보아도 북두칠성이 분명했다.
이들 9기의 고인돌은 대체로 350미터 거리에 분포돼 있다. 

유물로 돌활촉이 20개, 돌도끼 1개, 반달칼 1개, 질그릇 2개 등이 발견됐는데 돌활촉은 모두 점판암을

정교하게 갈아서 만들었다. 이들 고인돌은 구조형식상 북방형고인돌이다.
고인돌무덤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돼 있는 것은 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에서도 나왔다.
(계속) 

참고문헌
「한반도 거석기념물 고인돌」, 황규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3년 10월 
「화순고인돌에 대하여」, 네이버neverfell81, 2004.03.16 
「지석묘는 무엇을 말하는가?」, 유태용, 『대한문화재신문』 제16호, 2004년 7월 15일 
「고조선의 석각천문도」, 김동일, 조선고고연구, 2003년 1호 
「고인돌 무덤에 새겨져 있는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 추정에 대하여」, 김동일 외,

조선고고연구, 1999년 4호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렬되어 있는 구서리고인돌무덤 발굴보고,
김동일, 조선고고학학회, 2005년 3호
                                                                                                               /이종호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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