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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포석정지(慶州鮑石亭址)
종목 : 사적 제1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동 454-3
시대 : 통일신라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포석정 터의 과학적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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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찍은 포석정 터 사진 - 귀한 사진입니다>
`신라시대 왕과 귀족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다는 포석정(鮑石亭.사적 제1호.경북 경주시 배동 소재)은 고도의 과학기술이 만들어 낸 결정체다.'이런 주장에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우선 포석정의 구조를 살펴 보면 수로(水路)는 다양한 크기의 63개 석재를 이용해 만들었는 데 20㎝ 높이의 측벽 석재의 최대 폭은 15㎝ 정도로 상당히 안정돼 있고 내측 함몰도 보이지 않는다.
형태는 마치 `포어(鮑魚)'라는 물고기처럼 구불구불하고 동서의 긴 축이 10.3m,폭은 7m, 수로의 총 길이는 22m이며 수로 폭은 24-40㎝로 일정치 않지만 평균 30㎝ 정도다.
포석정이 과학적으로 설계됐다는 것은 수로가 유체역학적으로 술잔이 물을 따라흘러 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도록 하는 `와류(渦流.회돌이)현상'을 응용했다는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과학기술원 장근식 교수가 포석정과 같은 형태의 모형을 제작, 직접실험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포석정의 유체역학적 특성을 분석한 결과, 수로에서 와류현상이 일어남을 확인했다.
특히 포석정은 물이 흘러 가는 경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술잔을 서로 다른 위치에서 출발시킬 경우 결코 같은 경로로 이동하지 않으며 수로 경사가 급격하게 변하는 곳이나 굴곡 지점에서 수로 폭을 확장, 내측 바닥면의 함몰을 만들어 술잔이 엎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이런 유체학적 기술은 수천번 이상의 실험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에 포석정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흘러 내리는 물의 양 및 속도와 수로의 형태 및 폭, 측면의 만곡률, 표면장력, 술잔의 크기 및 무게 등이 치밀하게 고려된 고도 과학기술의 산물임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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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역학적 해석 시뮬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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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호
면적 7,432㎡이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이 포석정에 대한 기록이 처음 쓰여졌으나,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포석정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연의 삼국유사에 보면
[ 헌강왕(875 ~ 886)대의 태평스러운 시절에 임금이 신료들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 ] 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헌강왕 이전에 축조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포석정은 사실 우리에게는 경애왕(924 ~ 927)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과연 이 포석정의 용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포석정이 소위 유상곡수연을 하는 연회장 정도로 알려져 왔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를 보면 포석정은 임금이 친히 제사를 지내던 사당 이라고도 합니다
사실 백제가 기습적으로 경주에 입성했는데 경애왕이 이곳에서 여러 비빈들과 신하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가졌다는건 사실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경애왕은 이미
'연식'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원군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정작 원군을 요청한 임금이 유흥을 가졌다는건 분명 앞뒤 사리가 맞지는 않습니다
현재의 포석정터에는 애초의 포석정 모습은 없고 다만 전복 모양의 돌홈(일명 곡수거)만이 남아 있을뿐입니다.
현재에는 이곳 포석정터 근처에서 포석(砲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된 점과 화랑세기 필사본에 포석사(鮑石祠)라는 문구가 있는 점을 들어
포석정터가 단순히 연회를 베풀던 이궁지가 아니라 포석사 라는 사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즉 포석사 라는 사당에 포석정 이라는 부속시설물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경애왕도 여기서 유흥을 즐긴게 아니라 바로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는
학설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포석정터에 남아있는 전복모양의 돌홈은
가장 긴 세로축이 10.3m 가로축이 약 5m이고 깊이는 50cm 정도의 도랑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 돌홈의 역할은 물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술잔(혹은 찻잔)을 띄우도록 하는
장치였습니다.
이러한 장치의 유래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는데 현재 중국에는
이런 유적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포석정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다만 헌강왕을 기준으로 그 전후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이궁원(離宮苑) 내에 유연(遊宴)을 위한 자리로 만든 이 석구는,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시회(詩會)를 벌일 수 있도록 특이한 구조로 만들었다.
원래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이 있었다 하나 없어졌고, 이 물을 받는 원형 석조(石槽)가 있어, 이곳에서 구불구불한 모양의 곡석(曲石)이 타원 모양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배수구의 마무리가 분명하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임의로 보수하여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이 많이 파손되었다. 이러한 석구는 중국 동진(東晉) 시대부터 있었다 하나 대개 자연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완전히 인공적인 점이 그 특색이다.
포석정은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신라 역대 왕들이 전복 모양으로 생긴 유상곡수에 술잔을 띄워 놓고 시를 읊으며 연회를 하던 장소로 여겨져왔습니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음이 알려지고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기류도 출토됨에 따라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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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포석정 터는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에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통일신라시대 때에 만들어 졌다고추정하고있다.
임금의 놀이터 또는 별궁 터로, 그 일대를 일명 '성남 이궁 터'라 한다. 현재는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 남아 있다.
포석정 물길의 형태는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세로 길이가 약 10.3m, 가로 길이가 약 5m이고, 수로의 전체 길이는 약 22m이다. 수로의 폭은 일정치 않아 큰 쪽은 약 40cm, 작은 쪽은 약 24cm이다. 석계천의 물이 흘러들어 포석정을 한 바퀴 휘감고 돌았을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배수구의 마무리가 분명하지 않다.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고, 옛 신라 왕실의 향락의 쉼터이고, 포석정에서 귀족들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데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은 벌칙으로 술 석잔을 마셔야한다고 ‘난정수희도’에 기록되있다. 그러나 포석정의 경우 규모가 작으므로 물이 그대로 흘러가면 2~3분만에 다 빠져 나가므로 그 짧은 시간에 4언이나 5언의 시를 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시작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7~10분 정도는 주어야 한다. 포석정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유체역학으로 말끔히 해결했다. 술잔이 곡수를 돌때 맴돌기도 하고 멈추는 것이다. 포석정은 유체학적으로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유상곡수에 잔을 띄웠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 수 있었던 것은 유체학적으로 와류(회돌이: 주 흐름의 반하는 회전 현상을 말하며 쉽게 말해 소용돌이현상)현상이 생기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보존상태는 건물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조 구조만이 남아있다. 또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던 데에서‘어무산신무’ 또는 ‘어무상심무’라는 춤이 만들어졌다고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에 기록되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헌강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또다른 의견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 신이 왕에게 춤을 추었는데 왕이 손수 신의 춤을 흉내냈다는 기록도 있어 포석정은 호국제사와 연관이 깊은 시설이란 해석을 낳게 한다.
포석정이 신라 멸망의 비운의 장소로 기록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55대 경애왕은 927년 음력 11월, 겨울에 후백제 견훤의 군대가 왕경을 쳐들어왔는데도 왕비 신하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 줄도 몰라 견훤에게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 때문에 지금까지도 포석정은 왕들의 놀이터로 알려졌고 신라 멸망의 현장으로 얘기돼 왔다
견훤이 쳐들어온 때는 음력 11월 한 겨울인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 놀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궁궐과 가까운 안압지와 같은 연회장소를 두고 굳이 남산자락 포석정에 놀이판을 벌인 것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또한 경주문화재연구소가 1999년 포석정 주변 발굴 결과, 제사시설로 추정되는 건축유적과 통일신라 이전의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포석정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호국 성지 역할을 한 것이란 추정을 뒷받침했다.
나아가 1995년에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에도 포석정과 연관된 '포사' '포석사. (사는 제사를 뜻함)'란 말이 나와, 포석정이 사당의 기능을 했다는 해석이 더욱 설득력이 높아졌다. 또 포석사에 중요한 인물의 화상이 있었고 진골 이상 고위 신분이 결혼식을 한 장소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에 포석사는 마치 신궁(神宮. 왕이 제사 지낸 곳)과 세트처럼 활용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와 관련 최근 나정 발굴현장에서 신궁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어 이 기록의 신빙성이 높아질것이다. 경애왕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곳은 별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의 건물이 확인되고 있지 않아 많은 이견이 있다. 특히 이 곳은 통일 이전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포석사가 있던 곳일 가능성도 있어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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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곡주의 유래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삼짇날 정원에서 술잔을 띄우고 자기 앞으로 떠내려 올 때까지 시를 읊던 연회로, 동양의 선비나 귀족들이 즐겼다. 곡수유상(曲水流觴)·곡수지유(曲水之遊)·곡수연(曲水宴)·곡강연(曲江宴)이라고도 한다.
삼짇날 또는 삼사일(三巳日), 원사(元巳), 상제(上除), 중삼(重三)은 한국의 명절로서 음력 3월 3일이다. 이 날이 되면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삼짇날에는 주로 화전(花煎)을 먹는 풍습이 있다.
유상곡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알려진 것은 4세기 경에 쓰인 왕희지의 난정서로, 문인들을 모아 굽이진 물줄기에 줄서 앉아 시를 지으며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문화는 한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었는데, 한국의 포석정은 현존하는 유상곡수 유적으로는 한중일 삼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자구 해석을 하면 “굽이도는 물에 흘러가는 술잔” 정도의 의미인 유상곡수는
왕희지가 (서기 353년)에 처음 시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 중국에는 현재 명나라(1548년)때 중건한 것이
절강성에 남아 있고
일본서기(日本書記)는 485년에 곡수연(曲水宴) 개최 기록이 있고 신사(神社)나 정원 그리고 궁 같은 곳에
노천 개방형의 곡수 유적이 여러 개 남아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동양3국은 曲水란 유사한 문화를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목적이 유희냐 아니면 儀式에 사용한 것이냐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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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곡수(流觴曲水)
옛날 도인들은 ‘풍류(風流)로써 세상을 건지리라!’고 하였다.
고대의 풍류 가운데 여러 가지 풍류가 있지만,
필자가 해보지 못한 풍류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풍류이다.
흐르는 물에다 술잔을 띄워 보내면
그 술잔을 받은 사람마다 시를 지어 화답하는 놀이가 유상곡수이다.
경주의 포석정이 그러한 유상곡수의 풍류가 행해졌던 유적이다.
통일신라시대 정읍 태인에 태수로 부임했던 고운 최치원도
칠보 시산리에 유상대(流觴臺)를 만들어놓고 유상곡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대개 이 유상곡수의 풍류는 음력 3월 3일에 많이 행해졌다.
마음에 맞는 친지들이 둘러앉아
물에다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둥둥 떠서 자기 앞에 온다.
물이 곡수(曲水)로 굽어서 돌기 때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앞에 머물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에 둥둥 떠오는 술잔을 받는다는 것은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흐르는 물가에서 이 놀이를 하는 이유는
상서롭지 못한 액운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유상곡수’ 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진(晋)나라의 왕희지(王羲之)이다.
그는 절강성 소흥현 회계산 북쪽에 있는 난정(蘭亭)에서 이루어졌던
유상곡수의 풍류모임에 관한 내용을 ‘난정기’(蘭亭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난정기’는 내용 자체도 명문이지만,
그 서체가 또한 절세의 명필인 왕희지의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한자문화권에서 서예를 하는 사람치고 이 ‘난정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유명한 필첩(筆帖)이 ‘난정기’인 것이다.
왕희지 글씨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그 모든 요체가 여기에 들어 있다.
필자는 평소 왕희지를 흠모한 나머지
10년 전쯤에 왕희지의 유적지를 찾아갔던 적이 있다.
왕희지가 살았던 거처는 중국의 역대 은자(隱者)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였던 여산(廬山) 자락에 있었다.
계곡물이 저 위쪽에서부터 굽이굽이 휘감아 돌아오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절경에서 왕희지는 살았다.
그 옆의 바위 절벽에는 옥룡폭포(玉龍瀑布)라고 하는
폭포가 뿌연 물안개를 품으며 물길을 내리꽂고 있었다.
이번에 크리스티 경매에서 왕희지 글씨 모사본이
무려 45억원에 낙찰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외신을 보면서,
왕희지의 유상곡수가 생각난다.
이글의 출처입니다
http://cafe.daum.net/damju19/EwZF/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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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이 회돌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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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은 예로부터 귀하게 대접 받아온 주요 수산물 중 하나이다.
전복의 종류
전 세계적으로 1백여 종이 있는 전복류 중 우리나라에는 크기가 작은 오분자기와 마대오분자기를 비롯해 북방전복(참전복), 둥근전복(까막전복), 말전복, 왕전복 등이 발견된다. 북방전복은 가장 얕은 곳에 사는 종이고 그 다음이 둥근전복이며, 대형종인 말전복은 가장 깊은 곳에 서식한다. 왕전복은 오랫동안 말전복과 구분 없이 취급되다가 1979년에 신종으로 분리되었다. 2001년에는 수온이 낮은 북쪽해역에 사는 참전복이 둥근전복의 변이종으로 밝혀져 북방전복으로 명명되었다. 또한 과거 별개의 종으로 분류되었던 시볼트전복은 말전복과 같은 종으로 밝혀져 시볼트전복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되었다. 둥근전복은 패각이 둥글게 생겨 이름 지어졌지만 패각이 검은 빛깔이 강한 갈녹색이라 까막전복이라고도 부른다. 제주도 방언으로 떡조개라 불리는 오분자기는 전복류가 4~5개의 깔대기처럼 돌출된 출수공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7~8개의 평평한 출수공을 가지고 있고 껍데기도 전복류보다 매끈한 편이라 쉽게 구별된다.
생태적 특징
전복은 연체동물 복족류에 속하는 조개로 크고 넓적한 발을 움직여 기어 다닌다. 타원형 껍데기 위에는 구멍들이 줄지어 위로 솟아 있다. 이 구멍들은 뒤쪽 몇 개를 제외하고는 막혀 있는데 열려 있는 구멍이 출수공이며 배설물도 이곳을 통해 밖으로 내 보낸다. 껍데기 표면에는 해면, 따개비, 해조류 등 부착생물들이 붙어 있다. 양식과 자연산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이들 부착생물의 여부이다. 커다랗게 열려 있는 진주광택이 나는 껍데기는 자개, 나전, 세공, 단추 등 공예품의 원료로 쓰인다.
1 경남 남해 해역에서 만난 수컷 말전복이다. 말전복은 패각의 색에 따라 암수를 구분한다. 수컷은 패각이 푸른색을 띠며 암컷은 황갈색이다. 2 전복에서 만들어지는 진주는 진주 중에서도 으뜸으로 대접 받는다. | |
자웅이체인 전복은 외부 생식기가 발달되지 않아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 산란하여 수정한다. 암수 구별은 북방전복의 경우 패각의 안쪽에 있는 생식선이 녹색을 띠는 것이 암컷이며, 황백색을 띠는 것이 수컷이다. 말전복은 패각의 색에 따라 암수를 구분하는데 푸른색 껍데기(수컷)는 육질이 단단해 횟감으로,황갈색 껍데기(암컷)는 육질이 연해 가열 조리용에 적합하다. 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개의 경우 껍데기는 1년 동안에 2~3cm 정도 자란다. 전복의 머리에는 한 쌍의 촉각(더듬이)과 눈이 있으며 아가미 역시 한 쌍으로 좌우대칭이다. 전복은 위협을 느끼면 패각 속으로 더듬이와 눈을 집어넣은 채 바닥면에 딱 달라붙는데 맨손으로는 떼어내기 어렵다. 제주 해녀들은 ‘빗창’이라 부르는 납작하고 길쭉하게 생긴 쇠붙이를 지렛대 삼아 전복을 떼어 낸다. 제주도에서는 전복을 ‘빗’이라고 하니 빗창은 전복을 따는 창이라는 의미가 된다.
전복의 식생
전복의 주 산란기는 늦가을에서부터 초겨울 사이이다 이때 산란한 알은 약 1주일간 부유생활을 하고, 곧 저서포복생활로 들어간다. 전복은 부유생활기간 동안에는 먹이를 먹지 않지만, 저서포복생활로 들어가면서 먹이를 먹기 시작한다. 이때는 부착 규조류와 같은 작은 조류를 먹지만, 성장하면서 차차 큰 해조류를 뜯어 먹는다. 전복은 미역, 다시마, 감태 등 대형 갈조류를 먹이로 삼는데, 갈조류가 무성한 곳에 한번 자리 잡으면 잘 옮겨 다니지 않고 집단생활을 한다. 그래서 어민들은 이곳에다 전복종패를 뿌려두고 다른 지역 어민들의 출입을 제한한다. 종패를 뿌려둔 곳은 몇 달 지나면 전복 밭이 되기에 지역 어민들에게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1 전복이 갈조류를 포식하기 위해 서서히 접근하고 있다. 2 전복이 입에 있는 치설을 이용 갈조류 엽상체를 갉아 먹고 있다. 치설은 구강으로부터 돌출되어 먹이를 긁어 잡는 기능을 한다. 치설은 가장 딱딱하고 날카로운 부분이 이용되고 무디게 갈려서 쓸데없어진 것은 버려진다. | ||
식품으로서의 전복
중국의 진시황제가 불로장생을 위해 먹었다고 전해지는 전복은 예로부터 귀하게 대접 받아온 주요 수산물 중 하나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전복을 복어(鰒魚)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살코기는 맛이 달아서 날로 먹어도 좋고 익혀 먹어도 좋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말려서 포를 만들어 먹는 것이다. 그 내장은 익혀 먹어도 좋고 젓갈을 담가 먹어도 좋으며 종기 치료에 효과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제주도로 발령 받은 관찰사는 한양으로 보내야할 공물 중 전복에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복은 고단백, 저지방 식품으로 영양이 체내에서 잘 흡수되어 회복기의 환자나 노약자를 위한 건강식으로 많이 쓰인다.
전복에 들어 있는 타우린, 아르기닌, 메티오닌, 시스테인 등의 아미노산은 특유의 오돌오돌하게 씹히는 촉감과 어울려 맛을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듯 귀한 수산물이다 보니 주로 ‘죽’을 만들어서 먹어왔다. 적은 양으로 한 가족이 나누어 먹을 수 있기로는 ‘죽’ 이 가장 적절한 요리법이었을 것이다. 그런 전복이 대규모 양식에 성공하면서 회, 구이, 찜 요리 뿐 아니라 가장 대중적인 음식인 라면에 까지 넣어 먹을 정도가 되었으니 진시황제의 식도락이 부럽지만은 않게 되었다. 미식가들은 전복 내장을 즐긴다. 내장에는 해초 성분이 농축돼있어 맛, 향, 영양이 뛰어나다. 전복죽을 끓일 때 내장이 들어가야 초록빛 바다 색깔이 제대로 우러난다.
한 가지 가려할 것은 산란기(참전복 기준 9~11월)에는 내장에 독성이 있으므로 생식은 피하고 살짝 익혀서 먹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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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토피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6.03 오늘날 자연수를 구구단으로 한 곳으로 물건이 갯수를 세고 땅의 크기를 재는데 유용한 수학이되고 있다.
자연수의 연산법칙을 활용하여 자연의 개조하는데 아주 유용한 것이다.
그런데 주비산경은 원과 사각형 그리고 각을 이른바 3과 4와 5의 황금비개념으로 하여 구구단을 만들었는데 이를 천문학을 역을계산하는데 활용한 것이다.
이를 만물의 새명체를 생성하는데 활용한 것이 바로 회돌이 개념이다.
이를 옥으로 만든것이 바로 곡옥으로서 우리조상이 있는 홍산흥와문화에서많이견되는데
오늘날 태극문양에서 발견되는 회돌이 문양이다.
이를 99단으로 한 것이 바로 천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