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지정번호 : 국보 제31호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대 : 신라시대
크기 :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
종류 : 천문대
땅 위로 솟은 우아한 우물 모양을 하고 있는 첨성대는 오래전부터 고대 신라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으나, 지구상에서 그 비슷한 형태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신비에 싸인 유물이다.
첨성대도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논란이 많다.
첨성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느 주장이 맞는지 가릴 수도 없고, 또 앞으로도 해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외형으로 보면 전혀 천문대일 것 같지 않은 첨성대가 천문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역사 기록에 근거한다.
첨성대라는 이름이 지니는 사전적 의미(별을 보는 구조물) 뿐만 아니라 ‘천문에 대해서 묻던’ 구조물이었다는 역사 기록을 ‘천문을 관측’하던 구조물로 이해해 받아들인 것이다.
첨성대에 대한 연구와 분석 : http://yellow.kr/blog/?p=187
3D 스캔 방식으로 얻은 결과를 토대로 우리는 디지털화 된 첨성대 실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실측결과 첨성대의 몸통 높이는 9.108미터, 맨 아랫단 지름은 4.93미터, 맨 윗단 지름은 2.85미터였다.
모두 381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무게는 무려 264 톤이었다.
이런 구조물이 지금껏 견딘 비결은 무엇일까?
우리는 먼저 첨성대 지하의 지층 구조에 주목했다.
지하투과 레이더 탐사법으로 첨성대 지층구조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당시 손호웅교수 (배재대 토목환경공학과) 인터뷰
"지금 현재 지표면에서 약 1.2 ~ 1.4m 밑에 흙을 다진 다음에 그 위에 잡석을 약 1m 정도 다지고 그리고 그 위에 기단석, 그 기단석 위에 첨성대가 올라가 있는 그런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하생략>
TV 역사스페셜 선덕여왕 비밀코드, 첨성대 :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793420
경주 첨성대 [慶州 瞻星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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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의 용도는 무엇일까.
전해오는 문헌이 없는지라 별을 바라본다는 뜻의 첨성대라는 명칭에서 천문관측 시설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별을 관측하려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구조여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데서 논란도 지속된다.
1.첨성대라는 거대한 표의 그림자를 지상의 규(圭)를 통해 관찰해 방위, 시차, 계절 등을 측정했다는 규표설,
2.고대 중국의 수학 및 천문학 서적인 주비산경을 반영해 세웠다는 주비산경설,
3.불교의 수미산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는 수미산제단설,
4.토속신앙인 영성제와 관련 있다는 영성제단설,
5.생명의 근원인 우물의 형상을 표현해 풍년을 기원했다는 우물제단설,
6.첨성대가 지상세계와 천상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우주우물설 등 학설이 쏟아지고 있다.
7.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스러운 탑인 지구라트를 모방했다는 지구라트설까지 등장했다.
사실 역사적으로 첨성대(瞻星臺)는 그 이름에서부터 '별[星]을 보는[瞻]'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왔으며 조선 후기까지는 별 다른 이견이 없었으나, 광복 이후 새로운 견해가 등장하였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밥목고 사는데 첨성대가 뭔지 용도가 뭔지를 알고싶은 동기나 이유가없을 것입니다.
우선삼국사기에는 첨성대의 기록이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유사에는 명칭과 용도, 사람이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그렇다고 하기엔 내부가 매우 좁고 불편합니다.
게다가 천문 관측을 하는 시설인데 정작 다른 천문대처럼 산 위나 높은 곳이 아니라 왕궁 옆의 평지에 건설되었다는 점도 의문입니다. 간측소로 부적당하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고작 10미터 더 올라간다고 해 봐야 딱히 별을 관측하는 데 큰 도움은 안 된다.(...) 높이로 따지면 바로 옆에 있는 왕궁인 월성이 지형적으로 높은 언덕지형이라서 오히려 하늘에서 더 가깝고, 주변 남산과 토함산 등에 올라가면 훨씬 별을 관측하기 쉽다.
그래서 첨성대의 역할이 천문대가 아니라 일종의 기념비 혹은 제단, 창고였을 것이라는 설이 등장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종교적 상징물(이용범 교수)', '과학 수준을 과시하는 상징물(김용운 교수)', '선덕여왕을 신성화하기 위한 도구(정연식 교수)[6]' 등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며, 또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이 자리에 과거 천문대가 있기는 했지만 목조 건물이었으므로 지금은 사라졌고 폐사지의 석탑, 포석정지의 석구(石溝)처럼 천문대의 '부속 건물'만 남은 것이 지금의 첨성대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들 역시 추측에 불과할 뿐 문헌적・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확신이 불가능하며, 주류 학계에서는 정사에 기록된 통설과 신라 천문기록의 정황 연구 등을 토대로 첨성대가 천문대였음을 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천문학지인 김봉규 박사는 신라 시대의 고천문학 자료들을 종합연구하여, 첨성대가 만들어진 뒤 신라 천문 관측 기록의 양이 대폭 증가하고, 기록 또한 자세해졌으며, 당시 관측된 유성의 낙하 지점들이 모두 첨성대 주변이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7].
이는 첨성대가 천문대로서의 실제적 기능을 수행했음을 알려주는 정황상의 증거라고 하면서 천문관측대이거나 그 기구라고 주장합니다.
첨성대의 위치나 높이에 관한 경우에도 다음과 같은 해명이 가능하다.
고대의 천문 관측은 현대의 천문학과는 성격이 매우 달라서, 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대개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8][9],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시설은 당연히 왕궁에 가까워야 했다.
즉, 부지선정에서의 고려대상은 천체 관측의 용이성이 아닌 교통 접근성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정도 근거가 있는 말인데, 삼국유사 1권 왕력(王曆)편 내물 마립간 조의 말미에는 내물왕의 왕릉 위치를 이야기하면서 '능이 점성대 서남쪽에 있다(陵在占星臺西南)'고 서술하고 있다.
실제로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를 비교해 보면 삼국유사에 언급된 '점성대'는 이 첨성대가 맞으며, '점'은 '점칠 점(占)'이므로 이것을 점성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일정(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와서 저렇게 오르내리기도 했다니...
첨성대 상부에 이런 정자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우물 정(井)자 같은 상부의 돌로 보아 사각 정자였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건축양식을 고려하면 이런 형태였을 것인데...에디터 '사울의칼'의 생각으로는 다릅니다.
경복궁 동십자각이 생각나게 하는 형태가 되는데 이러면 전망대로는 훌륭한데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즉 천문을 관측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각형으로 편하게 돌을 쌓아 올리면 되는 것을 왜 이렇게 멋을 부리며 어렵게 쌓은 것일까요..
당시 건축재료로는 유리도 없었고...이렇게 천문대형 돔을 얹을 수도 없었을테니..
일본인 와다유지의 첨성대원형 추정도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뽀야 작성시간 22.01.22 361+54=415(첨성단최소점 )
15÷58=7.1551724138
7.1551724138×58=415.0000000004
416÷58=7.1724137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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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24137932×58=416.0000000056
417÷58=7.1896551724
7.1896551724×58=416.9999999992
7+1+8+9+6+5+5+1+7+2+4+5+8=68
418÷58=7.2068965517
7.2068965517×58=417.9999999986
7+2+0+6+8+9+6+5+5+1+7+5+8=69
361+45=406(훈민정음의 최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