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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고종황제가 27명의 조선 군주 중에 명군에 속하는가? 암군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근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 논쟁은 진행형이다.
역사에 밝은 학자들도 이럴진대 하물며 일반인들은 고종황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는지 매우 궁금하다.
고종황제는 1863년부터 1907년까지 43년 7개월간 왕위에 있었으므로 조선의 27명의 왕 중에서 영조(51년 7개월), 숙종(45년 10개월)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12세)에 왕위에 오른 까닭에 왕위 등극 첫해인 1863년부터 친정에 들어간 1873년까지 아버지인 대원군의 섭정이 있었음을 감안하여야 한다.
아무튼 고종황제는 27명의 조선 왕 중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이며 그의 생전에 조선의 패망을 직접 목도한 비운의 군주이다.
조선은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물게 518년이나 장수한 왕조국가이다.
학자들은 조선이 어떻게 518년이나 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중앙집권체제 국가를 유지하였는지에 대해 각자마다 매우 분분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으나, 나로서는 조선의 통치 시스템과 전체 민중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박힌 "충군애국정신" 즉, 성리학의 기본인 도덕과 예의 그리고 물질이 아닌 정신에 기초하고 있는 유학적 동력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500여 년 동안 조선을 지탱했던 성리학적 동력이 추력을 잃었을 때 조선은 패망의 수순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주변 국가의 각 왕조 존속기간을 짚고 넘어간다면, 조선이 얼마나 장수한 왕조국가인가? 를 쉽게 이해할 것이다.
먼저 중국을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시황제의 진나라는 겨우 15년, 수나라 37년, 당나라 289년, 원나라 161년, 명나라 276년, 청나라 295년에 그칠 뿐만 아니라 "오대십국"조의 존속기간은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71년에 불과하다.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기까지는 봉건사회로 웅번들이 다투는 무사 시대였으므로 중앙집권 체제의 국가라고 부를 수가 없고 토요토미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1603년 정이 대장군이 되어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다음, 대정봉환이 이뤄진 1867년까지 도쿠가와 막부는 265년 동안 존속했으며,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 2013년 현재까지 일본이라는 입헌군주제의 국가가 146년간 존속하고 있다.
이러한 이웃 국가들의 왕조 존속기간을 보면서 신라 천년, 고려 5백 년, 조선 5백 년이 얼마나 긴 세월인가를 알 수가 있지만, 돌아다 보건대 "국가나 개인이나 장수한다는 것이 꼭 자랑할 만한 것은 못된다."라는 점이다.
아무튼 고종황제는 조선 왕조 전체 기간의 12분지 1이나 되는 기간을 왕위에 있는 동안, 그가 어떠한 일들을 했었기에 지금에 와서 후세의 학자들이 명군이다! 암군이다! 하고 있을까?
우리가 고종황제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세계사적 동향과 상황을 일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종이 왕위에 있었던 43년 7개월은 그야말로 조선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였었고 결국엔 조선이 망국으로 치닫게 된 시기이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무자비한 약육강식과 서세동점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영국은 인도를 점령하고 베트남은 프랑스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노대국 청국은 2차에 걸친 아편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영국은 애로호에 게양하지도 않은 영국 국기를 청군이 바다에 버렸다고 생트집을 잡아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1차 아편전쟁은 영국에 의해 점화되어 청국과 영국의 1대 1 싸움이었으나, 2차 아편전쟁(애로우호 전쟁)은 청국 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4개국과의 싸움이었다. 청국의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거의 북경까지 점령당할 위기에 처해 그들이 오랑캐라고 부르는 영국에 강화를 청하여 영, 프, 러, 미와 텐진조약을 맺어 영국에는 4백만 냥 프랑스에는 2백만 냥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이들의 요구대로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는 등 그야말로 견딜 수 없는 민족적 수모와 국가 재정이 흔들릴 만한 큰 손해를 보았다.
텐진조약과는 별도로 그동안 북만주 흑룡강 유역에 군침을 삼키던 러시아는 청국과 아이훈 조약을 맺어 흑룡강 유역의 아무르주를 빼앗고 연해주 지역을 공동통치 지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젖어 있던 청국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계속되는 침략에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1856년에 시작한 2차 아편전쟁은 이렇게 4년 만인 1860년에 끝났다.
이 때가 에이브람 링컨이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한 해전이었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3년 전, 조선은 강화도령 철종이 치세 중이었고 세상은 안동 김 씨들의 세도정치로 조선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암담한 시절이었다.
1854년 미국 페리 장군의 강압적인 함포 외교로 마지못해 미일 화친조약을 맺은 일본도 그 당시 서양과 어떻게 조약을 맺어야 하는지? 를 알지 못할 정도로 청국, 조선, 일본 동아시아 3국의 개화 수준은 도토리 키 재기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과정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또한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후 10년 동안 그의 부친인 대원군의 섭정과 그의 공과도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선 그 당시 도도하게 몰려오는 서세동점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맞서 그가 어떻게 치세를 하였는가? 에 초점을 맞춰 고종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조감하기로 한다.
메이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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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웃나라 일본은 그들 역사상 보기 드문 불세출의 영웅 "메이지 천황"이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통치권(대정봉환)을 반환 받아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군사정권, 이른바 막부 정치를 종식시키고 천황 정치 시대로 들어섰다.
"메이지 천황" 그 자신도 걸출한 영걸이지만, 대정봉환을 이끌어 낸 사초 동맹의 두 번벌,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와 같은 유신삼걸과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오 히로부미 등 근왕 주의자들이 생명을 걸고 천황 보위를 하여 일본 역사상 두 번째 개혁인 "메이지 유신"을 완성하게 된다.
일본의 근대사를 돌아보다가 이 "메이지 유신"에 접어들게 되면 물론 세이난 전쟁같은 내전도 있었지만 많은 인재들이 부국강병에 의기투합하여 일본을 근대화시킨 것을 보면 부러운 소회를 느끼는데 이것은 필자만의 느낌인가?
우승열패, 서세동점의 도도한 물결과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탈취 탐욕이 극에 달했는데도 은둔의 나라 조선은 잠에서 깨어 날줄을 몰랐다.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는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데 혈안이었고, 왕실과 왕실의 척족들은 매관매직으로 날을 새웠으니 백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피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산으로 들어가 화적떼가 되거나 남부여대하여 북간도, 서간도로 신천지를 찾아 떠났다.
왕실은 종사를 보전하는데 급급하여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고, 고관대작은 물론 아전 나부랭이들도 사복을 채우기 위하여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었다.
아! 누가 이 땅과 백성들을 지켜 줄 것인가?
굳이 국가의 생노병사를 따진다면 조선은 임진왜란 무렵 또는 늦어도 병자호란 무렵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국가가 들어섰어야 했다.
임종의 때를 놓친 조선은 노추의 세월을 견뎌야 했으니, 그 백성들의 삶을 어찌 보호하며 국가의 존엄을 어찌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이 힘들고 암울할 때 뛰어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군주가 왕위에 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마는 순조 이후 조선을 철저하게 망가뜨린 안동 김씨 세도정치 하에서 그러한 인물을 기대하기는 난망이었다.
대원군의 10년 섭정을 마친 청년 군주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의 쇄국정책만이 나라를 보전하는데 능사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게 자각하였다.
고종은 청과 일본의 발전을 눈여겨보며, 나름대로 개화의 불씨를 당기기에 노력하였지만, 조선을 그들의 속국으로 여겨 이것저것 대놓고 간섭하는 청국과 청국에 대항하여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본의 치밀한 외교와 내정간섭 사이에서 고종은 때론 개화파를 억제하였다가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개화파를 부추겨 청국에 붙은 수구 친청 세력을 견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한 예로, 물론 일본의 강압이 있었지만, 김홍집 친일 내각을 세 번에 걸쳐 세웠다가 결국에는 김홍집, 정병하 등을 백성들의 손에 죽게 만들었던 것은 고종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근대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고종의 이러한 면을 들어 “매우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군주”라고 하는 주장에 일면 수긍이 간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허망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19세기 말 조선의 군주로 있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강단있는 성격인 정조는 이러한 난세를 과연 어떻게 헤쳐 나왔을까?
있지도 않았던 일을 가정해 보는 것은 허망한 소리인 줄은 알지만, 정조였다면 최소한 조선을 그렇게 망국의 길로 인도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서두에도 말했지만, 이 글은 우리 근대사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느꼈던 필자의 소회일 뿐이므로, 고종에 대하여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의 주장을 존중한다.
사실 이 글의 제목이 “고종은 명군인가? 암군 인가?”이지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고종이 명군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 이유는 그의 치세에 조선은 망국으로 접어들었고 외교권도 빼앗긴 허깨비 나라 대한제국을 그의 아들 순종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에 그가 명군이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암군 인가? 아닌가? 가 오히려 필자의 관점일 뿐이다.
고종의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물론 당시의 상황과 형편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혼란스러운 결정을 하게 만들었으리라 이해는 하지만, 고종은 일국의 군주로써 갖춰야 할 최소한의 카리스마와 일관성을 갖추지 못 했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친청으로 갔다가 친일로, 때로는 친미로, 친러로 갈지자 행보를 보였던 그는 관리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그리 믿음직스런 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에선 유약함이라 표현했지만, 윤치호 같은 이는 고종을 두고 “겁쟁이였고 이기적이며 아랫사람들을 믿지 못하였기에 아무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라고까지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생즉사 사즉생 (生卽死 死卽生)"이라는 사생관을 갖지 못한 군주로 평가함이 지나치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런 점에서는 민 왕후가 그를 앞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민 왕후의 죽음은 고종의 유약함에 대한 대가를 대신 치른 희생이었다.’ 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종은 군주가 갖춰야 야 할 국가 지도자로서의 일관성이 현저히 결여되었다는 점을 숨길 수가 없다.
시의에 따라 바뀌는 그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많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었고, 형편에 따라 능소능대하려는 임기응변으로 인해 나라의 체면은 말할 수 없이 훼손되었다.
공명정대한 정공법을 취하지 않은 고종
고종은 본래 타고난 성격으로 인하여 이러한 모습을 숱하게 보여줬다.
여기에 대표적인 두 가지 예를 들겠다.
그 첫 번째는 1905년 을사늑약 시 보여준 고종의 모습이다.
일본 천황의 특명 전권공사로 온 이토오 히로부미 (이하 '이토오’)의 강박에 대해 고종이 취했던 태도와 대처하는 방법을 보면, 물론 현재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지만,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1904년 11월 10일 일본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고자 가졌던 경운궁 수옥헌(1906년 중명전으로 개명)에서의 첫 번째 면담 자리에서 이토오는 시종일관 방약무인한 태도와 언사로 고종을 협박했다.
고종에게 결심을 촉구하는 이토오의 강박에 고종은 이 조약 여부의 책임을 대신들에게 미루었다. 고종이 단호하게 불가하다는 뜻을 이토오와 대신들에게 밝혔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황제가 불가하다고 했는데도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들이 황제의 뜻에 반하여 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다.
고종이 이토오에게 했던 "대신들에게 잘 해보라고 했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물론 고종의 이 말은 ‘조약을 체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었을 거다. 대신들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조약을 잘 검토하여 체결 여부를 정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 있는 중대한 순간에 이런 애매모호한 말을 한다는 것은 한 나라의 군주가 취해야 할 태도가 결코 아니다.
결국 이토오는 각 대신들을 수옥헌에 가둬 놓고 “황제가 조약을 잘 해보라고 했지 않았느냐?”라고 다그치어 한 명 한 명씩 호명하여 가부를 물은 끝에 황당무계한 다수결 원칙을 들어 조약 성립을 선언하였다.
헤이그 특사 3인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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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다른 예는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3인의 특사를 보낸 사건이다. 특사파견으로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박으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고 황제 자신은 결코 이를 재가하지 않았다는 점을 만천하에 공개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러시아 등 열강들의 기피와 일본의 막후 외교로 이루고자 하는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사건을 기화로 일본은 이토오 히로부미를 특명 전권대사로 한국에 보내어 고종의 책임을 강하게 추궁하였으나, 고종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다."라고만 발뺌하여 결국은 헤이그에서 사망한 이 준을 제외한 이상설과 이위종 2인은 고국에 발을 딛지 못하고 만주를 헤매다가 죽게 만들었다.
고종은 특사 파견을 부인하였지만 결국엔 이 헤이그 사건을 빌미로 한 일본의 강압에 의해 황제 자리에서 퇴위당하기에 이른다.
특사 파견을 당당하게 시인하고 일본의 잘못을 추궁했어도 황제 자리에서 강제 퇴위 당하고, 발뺌해도 결국은 퇴위당할 일이었다. 황제 폐위는 이미 일본에서 정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이중플레이를 익히 잘 알고 있던 이토오는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밀어내는 시기를 이 사건을 기화로 하여 약간 앞당겼을 뿐이다.
의심 많은 군주
옛말에도 “사람이 의심스럽거든 쓰지를 말고, 사람을 썼거든 의심하지 말라 (疑人勿用 用人勿疑)“라고 했거늘 고종은 벼슬아치들을 임명하면서도 미더워하지를 않아 고종 주위에 위국 헌신할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고종은 민영환을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 대관식에 특사로 결정하면서, 민영환을 감시하기 위하여 또 다른 사신단을 보내려 했다.
이를 안 민영환이 대관식에서 돌아온 후 탄핵될 것을 우려하여 특사 직을 사양했다.
그는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로부터 대관식에서 돌아온 후 어떠한 탄핵도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후에야 러시아로 떠났다. 그러나 민영환이 떠난 후 고종은 그를 감시할 사신단을 페테르부르그로 보냈다.
의심이란 유약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성이다. 고종은 지나치게 의심이 많았다.
고종과 백성들의 삶
물론 당시의 국내외 정세가 그리 녹록치 많은 않았겠지만, 고종은 그의 말과는 달리 선대의 몇몇 왕들에 비해서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는 그리 큰 책임을 느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종사의 보전에 전전긍긍하여 많은 재정을 낭비하였고, 민 왕후의 지나친 무속신앙으로 인한 낭비를 막지를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 자신도 무당이나 술사들에게 과도하게 의지한 나머지 많은 점쟁이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왕실과 나라의 앞날을 점쳐 보곤 하였다.
또한 부족한 왕실 재정을 채우기 위하여 고종 스스로 매관매직을 하여 동학란에 그 빌미를 주기도 하였다.
동학란을 막을만한 군사력이 부족하여 청국에게 파병을 청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일본에게 이 나라 땅에서의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만드는 기회를 주어 전국토를 유린당하게 만들었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러시아에게 또는 미국에 군사를 청하다가 거절당한 적도 여러 차례이다.
?또한 러일전쟁의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개화 군주로서의 고종
사학자들 간에 고종이 개화 군주냐? 아니냐? 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지만, 1895년 청국이 일본에 패전한 후 그토록 고종을 힘들게 하던 청국의 원세개, 자칭 조선의 감국(총독)이라는 명함을 각국 공사관에 돌리며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원세개도 도망치듯이 한국을 빠져나간 후, 고종은 한숨을 돌렸고 그때에야 비로소 근대화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의 승전으로 기고만장한 일본의 내정간섭이 시작되므로 조선은늑대를 피했으나 범을 만난 격이었다.
이런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친러 정책은 결국 일본 정부가 주도한 "민 왕후 시해"라는 전대미문의 을미사변을 초래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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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 시해의 주범인 이토오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그리고 종범인 미우라 고로
연이은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으로의 피신은 당시의 형편으로 봐선 이해가 가지만 주권국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관파천 후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일본과 친일세력들은 움츠려 들어 고종은 이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니 그것이 바로 근대화의 첫걸음이었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칭제 건원을 선포하여 비록 열강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황제 국가의 반열에도 올라섰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고종은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하여 개화파를 등용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고종은 황제가 된 뒤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이른바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 경제, 산업, 군사 부문에서 상당 부분 근대화를 성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광무개혁을 추진해가는 고종 자신은 이에 적극적이지도, 과감하지도 못했다.
고종은 천성적으로 추진력이 부족했으며 나약하고 겁도 많은 사람이었다.
미국 콜브란 사에게 경성 시내에 전기를 가설하게 하고, 이어 동양에서는 일본의 교토 다음으로 전차를 도입하여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물론 경성을 새롭게 정비하여 황제 국가의 수도에 걸맞은 도시를 만드는 정책도 병행하였다.
은행을 만들어 조선 상인들의 상업을 장려하였고 러시아의 도움으로 신식 군대를 만들어 훈련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은 한국의 근대화를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만주 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일본의 입장으로서는,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서 또는 병참기지로 활용해야 할 한국이 근대화로 들어서 강성해지는 것은 그들의 배후를 장담할 수 없었으므로 한국의 근대화는 그들에게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고종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탐욕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가 고종의 한계였다.
결어
위에 전거한 몇 가지 예를 가지고 고종이라는 인물을 평한다는 것은 경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시대에 청국과 일본으로부터의 간섭과 강압에 의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우리 군주의 모습이 서럽기만 하다.
이렇게 하면 괜찮을까? 저렇게 하면 좀 나을까? 하여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결국엔 고독한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했던 대한제국의 고종황제.
?고종은 그보다 4년 늦게 천황의 자리에 오른 이웃나라 일본의 메이지 천황과 거의 같은 시기를 한 나라의 군주로 재임하면서 한 사람은 망국을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를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올려 놓았으니 이를 역사의 희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위 기간 내내 부국강병은 하지 못하고 청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황준헌의 '조선책략' 이 기르쳐 준대로 親청국, 結일본, 聯미국에 나라의 힘을 탕진했는데, 힘없는 나라가 어찌 "이이제이 (以夷制夷)"의 방법으로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우리 역사는 힘이 없으면 나라가 어찌 되어 가는가? 를 그대로 보여준다.
2013 10.7
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