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첨성대 미스터리 (1)
최근에는 이들 유력해 보이는 가설들을 몇 개 섞은 절충설이 제기됨으로써 첨성대의 기능을 둘러싸고 그동안 있어왔던 첨예한 대립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 상황이다. 하지만 이렇게 적당히 절충을 함으로써 첨성대의 본질적 기능을 완벽하게 설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시점에서 첨성대와 관련해 가장 유력한 키워드인 ‘별 관측’과 ‘우물’이 유기적으로 연관된 사례를 역사 속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록
기원전 1세기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클레오메데스(Cleomedes, ?~?)는 우물 속에서 태양을 바라본 기록을 남겼다. 그는 우물 바닥에서 태양을 보면 평소보다 크게 보인다고 말했다1)천정(天頂, zenith)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클레오메데스가 천문학자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물에서의 태양 관측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문 관측용으로 건축된 우물에서 상시적으로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Eisler, R. 1949. “The Polar Sighting-Tube”, Archives Internationales d‘Histoire des Sciences, Vol.6 No.28, p.324.
고대에 우물에서 태양을 바라보는 것이 천문학적 관심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란 심증은 기원 전후에 활동했던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 BC 64 or 63~AD 24)의 기록을 볼 때 더욱 확고해진다. 그는 이집트 시에네(Syene)에 매우 깊은 우물이 있으며, 시에네가 북회귀선에 있으므로 우물이 아무리 깊어도 하지 정오에 태양빛이 우물 속 물을 비춘다고 기록하고 있다2)북회귀선(北回歸線, Tropic of Cancer)은 북반구에서 하짓날 정오에 태양이 천정을 지나는 지역을 잇는 선이다3)
- Dreyer, J.L.E. 1914. “The Well of Eratosthenes”, The Observatory, Vol.37, pp.352-3.
북위 23도 27분에 위치한 북회귀선. 북반구에서 하짓날 정오에 태양이 천정을 지나는 지역을 잇는 선이다.<출처: (cc) WikiLaurent at en.wikipedia.org>
스트라보의 기록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었던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BC 273?~ BC 192?)의 지구 크기 측정과도 연관이 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하짓날 정오에 시에네의 해시계 그림자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지구 크기를 오늘날 알려진 수치와 매우 근접한 값으로 계산해냈다. 해시계 그림자가 없어지는 것이나 깊은 우물에 태양빛이 비추는 것은 모두 태양이 수직 상방에 위치하는 조건에서 발생한다4)5)
그렇다면 우물에서 태양이 아니라 별을 관측했다는 고대 기록은 없을까? 기원전 4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들의 눈꺼풀 종류와 기능을 논하는 글에서 “인간이 손으로 눈을 가려 빛을 어느 정도 차단하거나, 빛을 가리는 관(管)을 통해 사물을 볼 때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땅 구덩이나 우물 속에서는 낮에도 이따금 별들을 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6)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Pliny the elder, 23~79)도 했었는데, 그는 대낮에도 우물에 반사된 별빛을 관측할 수 있다고 했다7)
- Aristotle(Translated by Arthur Platt), On the Generation of Animals, Book V, 1. ebooks@adelaide. The University of Adelaide.
Last updated Wednesday, February 26, 2014
- Arago, F. 1834. Astronomie Populaire Vol. I. Librairie Theodore Morgand, pp. 302-3.
낮에 별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수증기를 비롯해 대기 중의 많은 미세입자들이 햇빛을 산란(散亂)시켜 별에서 지구로 오는 빛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관측자와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입자들이 이런 산란에 기여하는 정도가 심하다. 따라서 낮에 별빛을 보려면, 관측자 상부에 빛 산란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대낮에 별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암상자(camera obscura) 또는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시설을 이용한다8)
- Brewster, David. 1832. The Edinburgh Encyclopedia, Vol.14, Joseph and Edward Parker, p.569
중세 이슬람과 유럽의 천문 관측용 우물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그들이 일궈놓은 천문학적 유산은 고스란히 이슬람 세계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계승된 학문은 나중에 유럽에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과학적 발전이 주로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우물을 이용한 주간 천체 관측이 그리스-로마 문명의 주(主) 계승자인 이슬람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슬람권에는 천문 관측용 우물에 대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중세 유럽과 이슬람권을 통틀어 두드러진 업적을 낸 네 곳의 천문대는 마라가(Maragha), 사마르칸트(Samarqand), 이스탄불(Istanbul), 그리고 우라니보르크(Uraniborg) 천문대다. 이란 서북부에 소재한 마라가 천문대는 1259년에 나시르 알-딘 알 투시(Nâsir al-Din al Tûsî, 1201~1274)에 의해 건설되었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 천문대는 1429년에 티무르의 술탄 울루그 베그(Ulugh Beg, 1394~1449)에 의해 건설되었다.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 소재했던 이스탄불 천문대는 1577년 타키 알-딘(Taqî al-Dîn, 1526~1585)에 의해 건설되었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섬에 있는 우라니보르크 천문대는 덴마크인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에 의해 1580년에 건설되었다.
이처럼 중세의 중요 천문대 네 곳 중 세 곳이 이슬람권에서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이 당시 이슬람의 천문학이 유럽보다 훨씬 앞서나갔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슬람권에 건설된 세 곳의 천문대 모두에 주간 별 관측용 우물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9)10)
- Sayili, Aydin. 1953. “The Observation Well”, Ankara Universitesi Dil ve Tarih-Cografya Fakultesi Dergisi, Vol.11 No.1, p.151.
- Wilson, S.G. 1895. Persian Life and Customs(Third Edition, Revised), Student Missionary Campaign Library, p.77
16세기 오스만 튀르크 제국을 대표하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엔지니어인 타키 알-딘은 이스탄불 천문대 부속으로 주간용 천체관측 시설을 건축해 사용했다고 한다11)
- Mordtmann, J.H. 1923. “Das Observatorium des Taqî ed-din zu Pera”, Der Islam, Vol.13 No.1-2, pp.82-6.
1 16세기 이슬람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발명가였던 타키 알-딘과 천문학자들이 이스탄불의 천문대에서 일하는 모습. 2 이스탄불 천문대에 부속되어 있었던 주간 별 관측 시설. 5~6미터 정도 되는 원통형 우물 형태의 탑의 모습이다. |
이 그림에서 보듯 당시 건축되었던 주간 천체 관측용 시설은 우물 형태를 한 탑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키와 비교해보면 우물 탑 높이가 5~6미터쯤 됨을 알 수 있다. 관측자는 우물의 꼭대기가 아니라 그 안에서 천체를 관측한다. 우물 꼭대기에 걸터앉아 있는 이는 관측을 돕는 보조원인 듯하다. 이 그림에서 하늘에 태양과 달이 동시에 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양이 떠 있으니 관측을 하고 있는 시점이 밤은 아니다. 하지만 달도 함께 떠있으니 백주(白晝) 대낮도 아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이 우물 탑은 여명(黎明)인 시점에 천체 관측을 하기 위해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
천체 관측용 우물의 실체는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67년 건설된 프랑스 파리 천문대에는 깊이가 55미터나 되는 우물 형태의 부속 건물이 있다. 1748년에 건설된 오스트리아의 크렘스뮌스터 천문대(The Kremsmünster Observatory)에도 59미터 깊이의 우물형 구조가 존재한다. 이들은 모두 대낮에 별자리를 관측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12)
- Sayili, Aydin. 1953, op. cit. p.153.
첨성대는 우물 탑이었다?
지금까지 우물에서의 별 관측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 및 유물 등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고대 세계에서는 우물이 주간의 천체 관측 용도로 이용되었다. 둘째, 이런 천문 관측 방법은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 이슬람 제국을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 셋째, 우물이 깊은 경우는 백주(白晝)에도 별 관측이 가능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여명일 때 별 관측용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첨성대를 이와 같이 고대 세계에 알려져 있던 주간 별 관측용 우물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첨성대를 주간 별 관측용 우물탑(the star-gazing well-tower for daytime use)이었다고 가정하면, 문헌적으로나 그 형태상 최선의 답이 된다. 야간에 별을 관측할 요량이었다면 굳이 속이 빈 내부 공간을 만들지 않아도 됐겠지만, 주간 관측용이었기에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첨성대는 문헌적으로나 형태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주간에 별을 관측하기 위한 우물 탑이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이스탄불에 건설되었던 우물 탑 형태의 천문대와 마찬가지로 첨성대에서도 여명 때까지 별을 관측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출처: (cc) Zsinj at ko.wikipedia.org>
지난 회에서 첨성대를 개방형 돔 형태의 천문대로 보는 가설을 소개한 바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관측자는 입구로 올라간 후 다시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고 바닥에 누워 천정을 지나는 별들을 관측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굳이 야간에 이런 관측을 위해 내부 공간이 필요했겠느냐는 의문에 적절한 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야간이라면 이런 의문이 일리가 있지만 주간이라면 전혀 다르다. 첨성대의 내부 공간은 주간에 별을 관측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최근 제안된 가설 중에는 첨성대에 카메라 원리가 적용되었다는 것이 있다. 첨성대 내부가 암상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본질에 상당히 접근한 가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의 주창자들은 마지막 부분에서 핵심을 벗어나 표류한다. 첨성대 상부에 존재했을지 모를 가상(假想)의 작은 구멍을 통해 카메라의 원리가 고스란히 구현되었다는 식의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 제안을 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13)
물론 첨성대에서 주간에만 별 관측을 했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 밤새도록 천정을 지나는 별을 관측하고 해가 떠오른 후에도 연장해서 천체관측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의 별관측은 불가능하다. 이스탄불에 건설되었던 우물 탑과 마찬가지로 첨성대도 그 깊이가 5~9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첨성대에서의 별 관측은 여명 때까지로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경주는 북위 35도 51분에 위치하고 있어 마라가와 비슷한 위도다.
그렇다면 주간 천체 관측용 우물 탑 이론이 첨성대와 관련된 지점 정렬설이나 불탑설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무엇보다 동지 일출 시점이 일 년 중 가장 중요하고 상징적인 ‘여명기(黎明期)’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첨성대는 동지 일출 시에 경주의 천정을 지나는 별빛을 담는다는 상징성을 띄고 있었을 수 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의문은 왜 첨성대가 원통형인 이스탄불의 우물 탑과 달리 마치 동남아의 불탑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은 아마도 그리스-로마 문명권에서 신라로 천체 관측용 우물의 아이디어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찾아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