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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선문명

세종의 역법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작성자유토피아|작성시간18.06.07|조회수447 목록 댓글 0

1444년(세종 26)에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이 편찬한 역서(曆書).

 

칠정산내편

 

 

 옛사람들은 인간 세상의 흥망성쇠를 주관하는 하늘의 뜻이 별들에 나타난다고 믿었으며, 역대 왕조의 임금들은 천상계의 변화가 나라의 안녕과 직결된다고 여겼다.
실제로 농업이 산업의 거의 전부였던 당시에는 하늘의 움직임을 읽고 백성들에게 절기와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는 일이야말로 봉건 왕조의 가장 중요한 책무이기도 했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지 3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418년, 세종은 21살의 젊은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에 올랐다.세종은 활자ㆍ인쇄ㆍ화기ㆍ농업ㆍ의학ㆍ도량형ㆍ음악을 개발하고 발전시켰으며 한글을 반포하여 백성들의 말을 글로 쓸 수 있게 하였다.

 

세종은 고려 시대부터 왕립 천문기상대 역할을 하던 서운관(書雲觀)의 이름을 관상감(觀象監)으로 바꾸고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簡儀臺)를 세워 여기에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渾天儀), 동짓날의 정확한 시각과 주기를 찾아내는 규표(圭表),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正方案)과 같은 기구를 설치하고 별자리를 비롯하여 일출과 일몰, 일식과 월식, 혜성과 행성의 운행을 관찰토록 했다.

당시 천문학의 꽃은 ‘역법’ 즉,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살피고 예측하는 방법이었다.

쉽게 말하면 달력을 만드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옛날에는 일식과 월식의 시간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으로 역법(曆法)의 정확성을 검증하였다. 일식 날에는 임금도 나와 관찰했는데, 일식 시간이 잘못 계산되었을 경우에는 관측관리가 태형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관측관리의 잘못이 아니라 역법의 부정확성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은 환웅 임검씨 이후에  중국대륙에서 피신하여 한반도로 이주해 왔는데 이 때부터 한족들의 음양오행의 역법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요받고 초고대부터 사용한 것을  은밀하게 이어왔는다.

아무튼 한족에게서 차용한 역법은  중국의 위치에서 계산한 것이기 때문에 위도와 경도의 차이로 빚어지는 여러 가지 오차를 피할 수가 없었다. 또 중국의 역학 역시 많은 오류를 안고 있었다.

 

세종 시절에도 일식이 15분 늦게 시작되었는데 이로 인해 세종은 역법도 중국과는 달라야 한다는 깨달음이 생겼다. 백성들에게 절기와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려면 이제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천문계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침내 세종은 즉위한 지 14년째인 1432년, 지금까지 사용해 온 중국의 모든 천문학 이론을 정리하고 개선하여 우리나라에 맞는 천문ㆍ역법을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중인 계층의 학문인 산학(算學) 연구에 문과 급제생인 이순지와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그 후 10년 만인 1442년 마침내 <칠정산 내편(七政算 內篇)>과 <칠정산 외편(七政算 外篇)>이 완성되었다.

<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과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서울의 위도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고, <외편>은 당시로는 최신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라비아 천문학을 흡수하고 있다.

 

<내편>은 1년을 365.2425일, 1달을 29.530593일로 정하고 있는데, 이 수치들은 현재의 값과 유효 숫자 여섯 자리까지 일치하는 정확한 것이다.

  <내편>이 원주를 365.25도, 1도를 100분, 1분을 100초로 잡고 있는 데 비해, <외편>은 원주를 360도, 1도를 60분, 1초를 60초로 한 새로운 방식을 수용하고 있다. 이 방식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그대로다.


<칠정산>의 편찬을 두고, “다른 민족이 오래 전부터 하던 일을 우리 민족은 이제야 겨우 처음으로 하게 되었나 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442년에 이 정도의 천문학 계산을 할 수 있던 나라는 중국과 아라비아 외에는 조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우리 민족의 천문학은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물론 더 자세하게 파악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즉 부도지의 23장에 의하면 이미 우리민족은 부도역법을 사용한 것이 기원전의 수천년전이다.



그런데 왜 역법에 ‘칠정산’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칠정(七政)이란 글자 그대로 ‘일곱 가지의 정치’가 아니라 해와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과 토성이라는 다섯 행성을 함께 아울러 칭한 것이다. 오늘날의 일곱 요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정치란 하늘의 뜻을 이 땅 위에 실현하는 일이고, 따라서 하늘의 별들이 이 세상의 정치 현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칠정산 내푠의 기본내용

3책. 활자본.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에 대한 해설서이다.

칠정(七政)이란 일·월과 오성(五星), 즉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5개 행성(行星)을 가리킨 것으로, 이 해설서에서는 이들 천체의 운행에 관한 자료가 다루어져 있다.

세종은 1423년 우선 학자들에게 선명력(宣明曆)·수시력(授時曆)·보교회(步交會)·보중성역요(步中星曆要) 등의 역법(曆法)의 차이점을 비교, 교정시켰다.

 

이어 1432년 예문관제학 정인지(鄭麟趾)·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 등에게 명나라의 『칠정추보(七政推步)』·『대통통궤 大統通軌』·『태양통궤(太陽通軌)』·『태음통궤(太陰通軌)』 등의 서적을 연구하여 수시력의 원리와 방법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한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하였다.

 

『칠정산내편』의 내용은 권두에 여러 천문상수(天文常數), 즉 천행제율(天行諸率)·일행제율(日行諸率)·일월식(日月食)의 여러 상수가 실리고, 다음에 역일(曆日)·태양·태음·중성(中星)·교식(交食)·오성(五星)·사여성(四餘星)의 7개의 대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권말에 한양을 기준으로 한 이지(二至), 즉 동지(冬至)와 하지(夏至) 후의 일출몰(日出沒) 시각과 밤낮의 길이를 나타낸 표가 실려 있고, 각 장에 필요한 곳에는 입성(立成)이라고 부르는 여러 가지 수표(數表)가 들어 있다. 일월오성의 운행을 다룬 것으로 보면 이 역서는 단순한 달력이 아니라 오늘날의 천체력(天體曆)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일행제율의 항에서 보면,

세주(歲周, 1년의 길이)=365일 2,425분으로 되어 있고, 1일=10, 000분(分)=100각(刻)

1각(刻)=100분(分) 의 십진법(十進法)이 쓰인 것으로 보면, 1년의 길이가 현재 실시하고 있는 그레고리(Gregory)태양력과 같은 365.2425일이고, 1분은 현행 8.64초와 같았음을 알 수가 있다.

 

서양과 다른 점의 하나는 하늘의 한바퀴인 주천도(周天度), 즉 원주의 각도를 360°가 아니라 365°25′75″로 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태양이 하늘을 한바퀴 도는 일수를 그대로 도(度)·분(分)·초(秒)로 나타낸 것으로 각 도에서도 십진법으로, 1도=100분, 1분=100초 로 하고 있는 데 유래한다.

 

여기 1도는 오늘날의 0.9756°에 해당한다.

 

끝의 대목에 있는 사여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별이 아니다. 이들은 어느 특정한 위치의 규칙적인 변동, 또는 규칙적으로 운행한다고 본 가상적인 천체의 이동을 생각하여, 마치 별의 운행처럼 보고 이를 복술가(卜術家)의 추산의 근거로 쓴 것 같다.

 

사여성의 이름은 자기(紫氣)·월패(月?)·나후(羅?)·계도(計都)인데, 『칠정산내편』에 의하면 이들은 각각 28년, 8년 10개월, 18년 7개월로 하늘을 한바퀴 돈다.

 이 중 나후와 계도는 태양이나 달과는 반대로 돌고 있는데 이 둘은 본래 중국에는 없었던 것으로, 인도에서 온 범어(梵語)의 Rahu와 Ketu에 유래한다.

 

중국에서는 이 둘을 보이지 않는 별(二隱星)이라고 하여 나계(羅計)로 총칭하였고, 일월오성은 칠요(七曜), 여기에 나계 둘을 합하여 구요(九曜), 또 자기와 월패를 더하여 십일요(十一曜)로 불렀다.

 

칠요양재결(七曜攘災決)에는 나후를 일명 식두신(蝕頭神), 계도를 일명 식미신(蝕尾神)으로 하였는데, 하늘을 도는 주기와 일월식이 관련되는 데서 미루어 이들은 황도(黃道)와 백도(白道)의 두 교점으로 추정된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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