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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선문명

타이페이 - 국립고궁박물원(國立古宮博物院)에 전시된 유물들

작성자유토피아|작성시간18.12.07|조회수702 목록 댓글 0

한 나라의 '국립' '중앙' 박물관이라면 시내중심에 있는게 보통인데,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은 좀 떨어져있다.

담수선 사림역에서 내려 30번 버스를 타고 갔었다. 아침 일찍 갔었는데 출근시간은 지났던건지 한가했었다.

1925년 개관한 베이징의 고궁 박물관을 모체로 1965년 손문(孫文) 탄생 100주년 기념일에 개관했다. 중국 전통 궁전 양식의 건축물이다.

박물관 패방에는 天下爲公, 천하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라고 써있다.

 

연중 무휴, 사진 촬영 금지, 입장료 NT$160, 오디오 가이드 NT$100.

(당시 2013 12월말) 소장품 수량 총 696,295점. 베이징 고궁박물관보다 질적으로 우수하며 세계 4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대만의 자랑 - 온 중국 역사를 통튼 진수들이 모여있는 최대, 최고 유물 집합처로 들어갔다.  

 

 

 

그런데 왜 이곳이 중국의 수도 북경에 있는 고궁박물관보다 더 많고 더 좋은가? 왜냐하면 그곳에 있던것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1924년 11월 일 청 왕조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자금성에서 추방됨으로써 청은 마지막 길을 걷는다. 황제는 떠났지만 자금성 안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엄청이나 남아있었는데, 당시 최고 지도자 자리에 있던 장개석(蔣介石)은 공산당을 숙청하고 보물들을 정리하며 청실선후위원회(淸室善後委員會)를 조직하여 1925년 10월 고궁박물원을 정식 선포한다. 그러나 아직도 왕실 보물들은 엄청이나 남아있었고 정통성이 필요했던 장개석은 공산당 숙청사업을 계속했고 서태후 묘까지 도굴하는 등 보물 찾기에 열을 올렸다. 

장개석이 자금성 밖에 있던 보물들까지 싹쓸이하고 무자비하게 공산당을 숙청하니, 열이 받을대로 받은 모택동(毛澤東)과 부딪혀 국공내전이 불이 붙었다. 혼전에 불안해진 국민당 정부는 보물들을 상해, 남경 등지로 옮겨 보관했으나, 1945년 본토가 공산당 정권으로 넘어가게 되고, 이에 목숨조차 지키기 어려워진 장개석은 무려 3,900여 상자에 보물들을 실고 대만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더 남은 보물들도 있었는데 그건 미국한테 중국인들을 구해야한다고 뻥쳐서 수송선을 지원받아 대만으로 옮겼다.) 모택동은 엄청난 황실 유물을 싣고가는 장개석의 배를 폭파해 그 보물들을 수장시킬 수가 없었고, 장개석은 결국 보물들과 함께 대만에 도착해 정통성을 내세우며 총통자리에 앉는다. 

이렇게 가져온 신석기, 청동기 문물부터 송, 원, 명, 청 역대 왕조가 수집했던 방대한 보물들은 1965년 일반에 개방된다.

 

 

중국이 주장하는 4대 문명 훨씬 이전의 홍산문화(紅山文化 일명 요하 문명遼河文明)시기, 대략 8천여년 전 이미 가축을 기르고 농지를 경작하는 정착생활을 하였다. 이때 도자기와 마제석기, 옥을 조각하는 기술이 생겼는데 자연, 동물이나 인체부위를 결합시켜 하나의 작품으로 재현했다. 위는 홍산문화 말기 구운형패(勾雲形佩). 구름끝에서 치솟아 오르는 매의 발톱을 형상화 한것이다.

 

 

상(商), 주(周) 시기에는 청동기가 발전했다. 청동을 주조하려면 전문적인 기술과 인력, 물력이 많이 필요했기에 청동기를 소유한 사람들 대부분은 군왕,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청동기에 문자를 주조하거나 새겼는데, 이는 매우 진귀한 사료이다. 사진은 서주말기 모공정(毛公鼎)으로 안쪽에 497개 글자가 새겨져있어 명문이 가장 긴 청동기물로 남아있다. 명문은 7개의 단락으로 나뉘어지며 선왕(宣王)이 조정을 바로잡기 위해 모공에게 정치의 부흥을 명한 내용이다.

 

 

 

송(宋)대 백자영아침(白瓷嬰兒枕). 자세가 묘하면서 발랄한 아기. 이걸 베고 자면 아기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19cm 작아서 그럴수는 없겠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황제가 침을 맞을 때 베었었다고 한다.)

 

 

 

 

 

 

 

 

 

 

청(淸) 건륭황제(乾隆帝) 때 만들어진 진조장(陳祖章) 조감람핵소주(雕橄欖核小舟). 상아를 세공하던 진조장이 만든 예술품으로 굉장히 작다. (높이 1.6cm, 길이 3.4cm) 유리관 안에 들어있는 이 작은 올리브 씨앗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소동파, 점원, 뱃사공까지 8명이 앉아있는 것이 보이고 놀랍게도 그 문이 열린다고 하며, 또한 배 밑엔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360자까지 새겨져있다. 삐끗하면 끝장인데. 어떻게 만들었을지 잠깐 상상만 해봐도 팔과 손, 몸까지 불편해진다. 진짜 어떻게 했지.

 

 

 

 

 

 

요것도 건륭황제때 만들어진거다. 태평성대 시기, 다른것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장인들은 과감한 창조물들을 만들었나보다. 요건 제청묘김유어전심병(霽靑描金遊魚轉心甁). 겹병으로 병 입구를 잡고 돌리면 안쪽 병이 움직여 금붕어가 헤엄치는 듯이 보인다. 바깥병의 푸른색도 아름답지만 그 안에서 헤엄치는 금붕어와 이렇게 잘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두 병의 수축을 엄청나게 계산했을 장인의 정신이 존경스럽다.

 



위에서 봤듯 청대에는 세심한 예술품이 유행했고, 그 중 특별히 아름다운 옥 문물들이 번영을 맞는다. 고궁 부근 광산에서 광부들은 좋은 옥을 발굴하여 황제한테 바쳤고 이를 기술자들이 가공해서 예술품을 만들었는데 이 중 매우 신기한 것들이 있다. 이 유명한 옥 - 육형석(肉形石)은 양심전(養心殿 황제 침궁)에 소장되어있던 보물로 흡사, 거의 동파육의 모습이다. 약간의 가공과 염색을 거쳤지만 얻어걸린 천연옥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니 정말로 신기하다. 

 

 

 



 

육형석과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던 보물. 요것도 신기하다. 취옥백채(翠玉白菜). 원래 영화궁(永和宮)에 소장되어있던 것으로 광서제(光緖帝)의 왕비인 서비(瑞妃)가 혼수로 들여온 예물이다. 싱싱한 배추 위에 여치가 앉아있다. (이는 순결과 다산을 상징한다.) 한 덩어리에 두가지 색깔이 섞여있는 급이 떨어지는 옥에 특출한 아이디어로 이렇게 생동감 있고 독특한 예술품을 만든 상상력과 기술은 역시 존경스럽다. 대체 배추를 조각할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나. 그 위에 앉은 여치는 또 어떻고.

 

 

 

 

 


 



청대 후기, 국력이 약화되고 서구 열강의 개입이 더해져 궁정 공방들은 문을 닫고 많은 장인들이 민간으로 흩어져 수공기술에 의지해 생계를 꾸린다. 돈을 벌려면 남들보다 뛰어나야 했기에 장인들은 고난도의 기술을 스스로 창조해내 모든 사람들이 감탄할 작품을 만든다. 상아투화운룡문투구(象牙透花雲龍紋套球). 상아를 가공하여 만든 노리개로 3대에 거쳐 만들어졌다. 공 속에 공, 공 속에 공...17겹이나 되는 공들이 서로 붙어있지 않고 자유롭게 회전하고 원형 구멍을 일직선으로 맞출 수도 있다. 가장 큰 구경이 11.7cm밖에 안되는데. 손이 들어가지 않는데. 이걸 어떻게 깎았을까?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이 그렇듯 입장료로 낸 돈의 몇배의 가치를 뽑아낸 것 같다. 하도 유명해서 안보면 죄를 짓는게 아닌가 싶어 꼬불꼬불 긴 줄을 기다려 본 육형석과 취옥백채, 그리고 대학생때 달달 외웠던 모공정을 직접 보니 이게 바로 그거구나. 진짜로 요런게 있구나. 반갑고 놀라웠다. 디테일 묘사의 모든 난관을 뛰어 넘어버린 장인들의 솜씨는 차라리 상상하기조차 버거웠고, 걸작의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한 나라의 박물관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는 공간이다. 청동기, 옥기, 도자기, 칠기, 조각, 문구, 탁본, 회화, 서예, 자수, 도서, 악기 등등 고궁 박물원 소장 유물은 너무나 많아 구경 온 한국인은 그 나라 역사와 문화에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이 모든것들을 지켜낸 장개석과 모택동이 얼마나 잘한건지, (장개석은 도둑인가 아닌가) 그리고 지금의 대만인과 중국인들 모두가 이곳의 모든 문화재는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라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좀 궁금하다.

 

 

 

 

(박물원 내에 있는 건륭황제 서재였던 삼희당(三希堂)을 재현한 식당 겸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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