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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 경남지역 근ㆍ현대 미술계와 미술가 - (1) 진주지역 미술계의 맥

작성자프란|작성시간26.06.16|조회수31 목록 댓글 0

 

문화기획 - 경남지역 근ㆍ현대 미술계와 미술가 - (1) 진주지역 미술계의 맥

 

기자명 경대뉴스 승인 1995-08-28 00:00 경대신문 제 534호

 

개천예술제, 전국의 예술인들 교류 활성화에 기여

미술의 해가 반이나 흘러갔다. 국내외적으로 미술계의 움직임은 활발하고 일반인드르이 참여도 나름대로 잘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러나 지역의 활동은 미비하다. 우리지역의 미술계는 어떠한지 어떤 미술가가 나왔는지 관심 밖이다. 진주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을 거처간 뛰어난 미술가들이 많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학기 동안 뛰어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지역의 미술인을 다루어 보도록 한다. - 엮은이 말-

 

조 원 섭

 

<동명고 미술교사>

 

 

▲ 강희안(1417-1464)작 「산수인물도」 : 인재 강희안은 그림 뿐 아니라 시와 글씨에도 뛰어나 시ㆍ서ㆍ화 삼절이라 일컫었다.

 

 

 

옛부터 산수 수려하고 진양성 촉석루를 휘감아 도는 남강의 정취에 많은 시서화(詩書盉)인들이 진주를 찾았다. 또한 논개의 작열한 죽음 이후의 진주는 기생이 그래도 대접받는 도시라 하여 내면적으로는 어올릴 수 있는 조건들율 두루 갖추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진주의 미술활동을 1949년 개천예술제 이전의 시기를 '태동기' 라 보고 개천예술제가 탄생된 이후부터 현재 까지를 '전환기' 라 하여 이 지방 미술의 맥락을 살펴보기로 한다. 작가 개개인의 작품활동 상황은 다음회부터 싱셰하게 다루기로 한다.

 

① 태동기

 

신라 경덕왕때 건립된 단속사(산청군 단성면 운리)에는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삼층석탑만 동서로 2개가 보물로 지정되어 전해져 오고있다. 신라때의 작품인 망경동의 금선암의 '단성석조여래좌상'과 삼선암의 '고려동종' 평거동의 '석조여래좌상' 그리고 '촉석루' '향교' 선조때의 유명한 서원이던 '창렬사' 등은 보물 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진주목관하에 많은 자기소와 도기소가 기록되어 있는데 경호강을 중심으로 산청일대와 이 명산을 중심으로 한 진교, 곤양 그리고 월아산을 중심으로 한 대곡 등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접한 거창 둔마리 벽화는 고려사의 회화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삼고 있다. 다만 고려때 까지의 여러 작품에 대해서는 인명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음이 아쉬운 점이다. 조선 초기부터는 학자들을 비롯 화가들의 인명이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관직을 따라 외지로 다녔지만 진주사람으로 기록된 인명위주로 기록함을 밝혀둔다.

 

고려 공신왕2년(1390)에 나서 조선 성종6년(1475)에 세상을 뜬 조선조의 문신이며 서예가인 정척(鄭陟)은 진주정씨 정설(鄭舌)의 아들로 춘정 변계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태종8년 사마시에 급제, 세종31년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양계지도를 그렸고 세종 9년에는 양성지와 더불어 동국지도를 그랬다. 특히 예서와 전서에 뛰어나 여러 공경들의 묘비 글씨를 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국초에 서책을 반포할 때도 그의 글씨가 씌어지기도 했다. 특히 인재(仁齎)강희안(姜希顔:1417~1464)은 시와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 시ㆍ서ㆍ화 삼절(三絶)이라 일컫어졌다. 시는 위(韋)와 유(劉)에 그림은 유(劉)와 곽(郭)에 글씨는 왕희지와 조생부에 비유했다. 그는 인면전서를 봉서한 사실이 있으며 안평대군의 글씨와 함께 주자화 되었다 하며 그림은 조선오백년간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라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교두연수도], [고사도교도], [절매삽병도], [소동개문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인관수도,국립박물관 소장]은 당ㆍ송ㆍ원의 고법을 융합하여 호단의 조화가 이루 말 할 수 없다 했다. 강희안의 아우로서 송ㆍ죽(松,竹)에 뛰어난 강희맹과 시ㆍ서ㆍ화에 뛰어난 하융감, 죽(竹)을 능숙하게 그려 당대의 대가로 평가받은 유덕장, 풍속화와 호렵도로 유명한 강희언, 산수, 노송, 사군자, 화조 등에 다양한 명작을 남긴 강세황, 강세황의 손자로 매화와 산수에 능통했던 강이오, 강석덕, 유우, 유혁연, 유최진, 유상룡, 강진, 하연 등의 많은 서화가가 있었다.

 

한말기 거제에서 출생한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州)는 생애의 대부분을 진주에서 보내며 영남 서예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추사체 연구에 몰두하여 그 경지가 추사에 근접하였다한다. 후진 양성에도 크게 이바지 하였는데, 은초 정명수, 석천 김우동, 도연 김정 등이 있다. 사군자의 대가 매산 황영두(梅汕 黃永斗)는 그 재질이 뛰어나 소년화가로 어전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고종으로 부터 칭송을 받은적이 있으며 세인들은 그를 매선(梅仙)이라 불렀다. 또한 동초 황관룡은 의제 허백련 선생과 교우하면서 일본화단에도 잘 알려졌으며 목단과 산수화에 뛰어났다. 현재 의곡사 입구에 유일하게 묵죽비가 세워진 벽산 정대기는 당대의 묵죽의 대가라고 불리우며 자기의 고집과 전통 필법을 교체시킨 운전 허민은 동의보감과 열하일기를 번역하리만큼의 한학 실력과 산과 마음의 참새를 그렸던 화가이며, 해방전 진주의 강신호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재학당시 선전에 입선한 최초의 경남 서양화가이다.

 

 

 

② 전환기

 

1949년 영남예술제가 개최됨에 따라 미술인들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예술제 발기인에 박생광, 오제봉 등이 참여하였고 이 지방 화각들의 결속의 계기가 되었다. 동양화에 박생광 성재휴 서양화에 조영제, 홍영표, 사군자에 정대기, 황영두 서예에 오재봉, 정명수, 강석도, 김창군, 정현복 등이 주축이 되었다.

 

6.25로 인하여 변관식이 이곳으로 내려와 4년여간 거주하면서 촉석루를 비롯한 많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김은호, 허백련 등과 교류하면서 오지산의 신진화가를 배출하였으며 이중섭이 진주를 자주 들렀으며 정상진씨의 도움으로 이곳에 머물기도 하였고 박생광이 문을 연 청동다방에서 이중섭이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한편 당시의 청동다방은 예술인들의 사무실 하나 제대로 마련치 못하던터라 예술인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서화인들은 서로의 정담을 나누며 약주 한잔에 서로를 위로하는 가족적 분위기로서 교우하였다. 의곡사 주지로 있던 오제봉은 많은 서화인들을 불러 들여 접대했다. 당시 진주에 드나드는 문인 묵객은 누구나 할것없이 의곡사에 들러 주식을 하였는데 특히 큰 불공이 드는 날에는 소정,운전,풍곡,유당,내고,벽산 등이 초대받아 주연을 벌이곤 했다.

 

 

진주사범학교 미술특기생 양성하여 서양화의 기틀 마련

 

이 시기에는 만나고 오가는 술잔이 화우들의 대화였으며 특히 소정은 술자리에서도 곧잘 사회풍조를 말하기 좋아하며 운전과 토론이 엇갈려 소정의 괴목 지팡이를 높이 쳐들게하였다. 제헌 국회의원을 역임한 효당 최범술이 다솔사를 지키면서 국화주와 더불어 향토의 서화가는 물론 의제 허백련 화백을 비롯한 경향각지의 예술인들을 초빙, 교우하기도 했다.

 

이때의 미술교육은 진주사범학교에서 미술특기생을 받아들이면서 미술반을 양성하였고 진주농고와 이어 진주고교에도 미술반을 양성하여, 양화의 기틀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58년도에는 재일 교포 학생작품전이 진주여고 강당에서 개최되었고, 59년도에는 백양회 동인 초대작품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운보 김기창을 비롯한 국내 한국화의 대가들이 출품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대한민국 거류민단 중앙총본부 제공으로 동경부 강산현 창경학원의 작품 45점과 미국 보스턴시 아동미술전람회도 중앙국 강당에서 전시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교육 열의가 전국 어느곳보다 높았음을 알 수 있다. 1963년 14회 개천예술제에는 전국 유명작가 초대전에는 국전의 심사위원급의 각부문 대가들의 47명이 대거 작품을 출품한 것으로 보아 전국 어느 곳에서도 추진하기 어려웠던 전시회였음은 이곳이 명실상부한 미술의 도시였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67년도의 국제판화전이나 재일교포 학생 작품전도 개최되었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기에서 70년대 초반기를 접어들면서 이곳을 떠나, 외국이나 서울로 떠나는 작가들이 많아졌다.

 

1970년도 이후 진주화단은 미협을 중심으로 각 전공분야나 이즘을 같이하는 신생 단체들의 활동이 뛰어남은 물론 미대를 졸업한 신진작가들이 향리로 정착하면서 호흡을 같이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도 이후의 미술은 잘 알려져 있기에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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