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以堂) 김은호
1892. 6. 24 ~ 1979. 2. 7
근현대 동양화단 채색화의 대가
以堂 金殷鎬
1892. 6. 24 ~ 1979. 2. 7
호는 이당(以堂).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7세 때 집안이 몰락하여 한때 인쇄소 직공과 측량기사 조수로 지내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12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여 조석진·안중식 등의 지도 아래 전통적인 관념 산수, 중국 미인도, 화보를 모사하거나 사생을 통해 그림공부를 했다. 그해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려 기량을 인정받았다.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명성을 얻어 윤덕영·윤택영·이희원 등 당시의 세도가와 최제우·김인국(시천교 교주) 등의 초상화를 그렸고, 1913년 덕수궁 어전 휘호회(御殿揮毫會)에 참여하기도 했다. 채색인물화와 화조화에 뛰어났다. 초기작인 〈민영휘 초상〉(1912)·〈고종 초상〉(1912)·〈순종 초상〉(1912)에서는 섬세한 필치로 얼굴의 곡면과 입체감을 살려 사진과 같은 사실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전통화법으로부터 벗어난 일면을 보여준 것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재현하려는 근대적 조형관으로의 변모를 나타냈다. 1915년 프랑스 공관에서 열린 미술전람회,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했고, 1918년 최초의 근대미술가단체인 서화협회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옥에 갇혔으며, 1920년에는 이상범·노수현·오일영·이용우와 함께 창덕궁 대조전 벽화제작에 참여했다. 서화협회 전람회뿐만 아니라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출품하여 1회 4등상, 2회 입선, 3회 3등상, 4회 입선을 했다.
1925년 이용문의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도쿄미술학교 수업도 청강했다. 일본에 머문 3년 동안에도 계속 선전에 출품하여 상을 받았다. 성덕태자 봉찬미술전(1926), 제국미술전(1926, 1927)에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일본 귀족의 주문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당대의 생활상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수접미인도〉(1921)·〈아이야 저리 가자〉(1923) 등에서 볼 수 있는 가늘고 부드러운 필선과 감각적인 색채는 일본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선전에서의 상위 입상과 협전·선전의 동시출품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 한때 선전출품을 중단했다. 1937년 선전 심사 참여자격을 얻고 추천작가가 되면서 다시 출품하여 해방될 때까지 명성을 유지했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의 전시파쇼체제가 강화되자 1937년 친일미술가단체인 단광회와 1942년 조선남화연맹전, 반도 총후미술전 등에 참여했다. 전통회화분야에 제자들이 많은 것도 일제시대 그의 명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김기창·장우성·조중현·백윤문·이유태 등이 1936년 후소회를 결성, 해방 후에도 김은호의 영향력을 유지·강화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화가로 따돌림을 받았으나 일제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채 1948년 남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열리면서 추천작가 자격으로 출품했다. 그뒤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를 지내면서 국전출품작의 화풍과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전체 화단에도 영향력을 키워갔다. 해방 후에는 역사인물의 초상화 제작에도 한 몫을 했다. 〈신사임당〉·〈이이〉·〈이순신〉·〈논개〉등의 공인 영정과 인도 간디 수상의 초상을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