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답사기]심억수 / 청령포

작성자연잎|작성시간26.06.07|조회수22 목록 댓글 0

 

청령포에서 만난 단종/심억수

 

오월 마지막 토요일 청령포와 이효석 문학관을 다녀왔다. 사무국장의 일정 소개와 회장 인사말에 이어 각자 인사 소개로 여정이 시작됐다.

청령포 주차장에 도착했다. 청령포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으로 청령포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뉴스가 실감 났다. 30여 분의 기다림 끝에 나룻배에 승선했다.

청령포를 둘러싼 서강의 강물은 세월의 흐름조차 아파하듯 뱃머리를 따라 맴돈다. 상념의 소용돌이도 잠시 배는 청령포 나루터에 닿았다. 강가에 작은 돌탑이 즐비하다. 저마다 간절한 소망을 담은 돌탑이 봄 햇살 아래 평온하다. 탐방객 서너 명이 각자의 돌탑을 만들고 있다. 둥근 돌 위에 작은 돌을 올려놓는 모습이 진지하다.

돌탑에 간절함을 올려놓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단종어소로 향했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영조가 단종의 유배지를 기리며 세운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친필 비(碑)가 서 있다. 1763년 원주 감영에서 세웠다는 음각 글씨에는 청령포라는 지명도 선명하게 새겨져 법도와 의식으로 잊히지 말라는 듯 역사를 붙들고 있었다. 마치 단종의 슬픈 영혼이 담긴 작은 등불과 같다.

단종어소 담장 밖 소나무가 눈길을 잡는다. 어소를 향해 절을 하듯 휘어진 모습이다. ‘엄흥도 소나무’라고 한다. 엄흥도는 밤이면 몰래 이곳을 찾아 단종에게 문안을 올렸단다. 깊은 밤 적막 속에서만 비로소 전해졌을 그리움과 충절이 어찌 허투루 느껴지랴. 자신을 믿고 인내하며 책임을 다했던 엄흥도의 삶의 철학을 생각하며 어소에 들었다.

단종어소 내부에는 단종과 그를 알현하는 선비의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정교하게 재현해 놓았다. 하얀 옷을 입은 어린 임금의 얼굴에는 고뇌와 슬픔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다. 한순간에 무너진 단종의 삶에서 세상의 냉혹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게 한다.

단종어소를 돌아 나서자 바람이 불어온다. 소나무 사이사이 공간을 채우며 앞서가는 바람을 따라 걸어가니 노송과 마주했다. 단종은 이 소나무에 앉아 외로움과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600년 넘게 세월을 견뎌낸 소나무의 생명력이 놀랍다. 이 노송은 단종의 불행한 모습과 오열하는 소리를 담았다는 뜻으로 ‘관음(觀音)’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애달픈 역사의 현장을 지켜온 관음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상처투성이로 세월을 버텨낸 소나무 한 그루에 담긴 서사가 끝없이 이어지는 듯하다. 단종의 한과 그 시절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은 소나무가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마음을 추스르고 망향탑으로 향했다. 서쪽 절벽에 자리한 망향탑은 단종의 순애보를 품은 작은 돌무더기다. 두 달 동안 쌓았다고 하기엔 소박하고 아담하다. 아내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손수 쌓았다는 돌탑이다. 그리움에 하나하나 돌을 얹어 남긴 돌무더기 한 줌이 긴 세월 속에 잊힌 듯한 아픈 역사를 품고 앉아 있다.

저릿해져 오는 마음을 달래며 노산대로 향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이 시름에 잠겨 한양을 바라보았다는 바위에 서서 강을 내려다본다. 노산대 아래 휘돌아 가는 강이 통곡한다. 슬픔과 그리움의 눈물로 몸부림치는 강물 위로 단종의 고독과 절망감이 떠간다.

노산대를 내려와 나루터로 향하는 길목에 금표비(禁標碑)가 서 있다. 그 앞면에는 ‘청령포 금표(淸泠浦 禁標)’라는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일반 백성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목적은 지금 거의 무색해 져버렸다. 단종의 한 서린 청령포는 오늘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역사적 명소가 되었으니 말이다.

청령포는 삼면이 푸른 물결에 잠긴 채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까마득한 암벽들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다. 섬과 같은 곳은 나룻배 없이는 탈출할 수 없는 감금의 장소였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이곳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청령포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한 인간의 기구한 운명과 그 뒤에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낸 공간임을 깨닫게 했다. 6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아픔은 침묵 속에서도 살아 숨 쉬었다. 단종의 짧고 비참했던 삶과 그를 지켜준 이들의 애정과 역사가 내 마음을 휘저었다.

단종의 한 서린 삶과 함께 나룻배에 올랐다. 서강의 나룻배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 같았다. 2분 남짓의 짧은 항해였지만 나룻배는 600년 역사의 한과 슬픔을 한 겹 한 겹 펼쳐 강물 위에 길게 이어놓는 듯했다.

여행은 특별하거나 거창하지 않더라도 의미를 부여하면 새로운 세상과 마주한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지낸 유배 생활은 나에게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살아가는 태도와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었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하루하루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다음 갈 곳 장릉으로 향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