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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西厓 柳成龍의 人生 十戒銘》

작성자淸閑 柳漢潤|작성시간24.07.11|조회수28 목록 댓글 0

 서애 류성룡의 인생 십계명

임진왜란 극복에 가장 공이 큰
서애 류성룡 선생은 3차례나
영의정을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했다.
임진왜란 전 해에 형조 정랑 권율을
4계급 승진시켜 의주목사에 천거하고,
정읍현감 이순신을 7계급 승진시켜
전라좌수사에 천거한 사례는 유명하다.

왜적이 오는 길목 동래에 송상헌을 부사로 보내는 등 '임란9영웅'이 모두
류성룡에 의해 발탁되었다.
류성룡이 3번째 파직당하는 날,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우연이라 볼 수 있을까?

서애 류성룡에게서 배우는 10가지 교훈을 만들었다.

■인생1계명
외부의 적과는 싸워도 내부의 적과는 싸우지 마라.
정적이었던 이산해와 정철과 조정 안에서 끊임없이 만나고 국사를 논의해야 했다.
'기축옥사'로 동인 1,000여명을 죽이고 귀양보낸 정철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산해에 반대해서 피의 보복을 멈추자고 주장해 관철시킨게 류성룡이다.
(이때부터 동인은 이산해의 북인, 류성룡의 남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인생2계명
전쟁을 대비하지 않고 평화를 누리지 마라.
평화는 강자의 여유다.
약자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다.
평화를 누리려면 먼저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인생 3계명
결단의 순간에 망설이지 마라.
선조가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도주하려 하자 막아선 사람이 류성룡이다.
왜적과의 뒷거래를 막으려고
명나라 황제의 깃발을 막아섰다가 사형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류성룡에게는 명나라 황제의 권위보다
절대군주인 왕의 안위보다 국가와 백성의 안위가 더 중요했기에 필요한 때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인생 4계명
옳은 일을 했다고 당장 인정받기를 바라지 마라.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동분서주하며 나라를 위해 뛴 결과가 파직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조용히 고향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하늘이 알았고, 백성이 알았고,
역사가 알아주었다.

■인생 5계명
현장을 모르고 탁상공론으로 정책을 만들지 마라.
류성룡은 탁상에서 정책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7년 중 5년을 4도 체찰사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함길도의 전시총사령관)로 현장을 다니면서 진두지휘했다.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할 때,
조선군의 총사령관 류성룡은
칡넝쿨을 모아오라 해서 그걸로 새끼를 꼬아 엮어서 임진강 양쪽에 매고 부교를 만들어 말과 대포를 건너게 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헐버트는 거북선, 한글, 금속활자와 함께 '칡넝쿨부교'를
한국의 4대 발명품으로 꼽았고, 지금도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에서는 칡넝쿨부교를 교재에 넣어
가르치고 있다.

■인생 6계명
고정관념을 깨지 않고 세상에 인재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
기축옥사로 조정대신 1,000여명이 사라져서 인물이 없다고 한탄할 때,
우의정 겸 이조판서를 맡은 류성룡은
권율, 이순신, 송상헌 등을 파격 승진발탁해서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인생 7계명
능력을 보지 않고 신분과 학력을 따지지 마라.
평민도 공을 세우면 군관이 되도록 했고,
노비도 전공을 세우면 면천했다.
훈련도감을 만들어 최초로 상비군(봉급받는 군인)을 창설하고, 양반이건 평민이건 노비건 가리지 않고 능력이 있는 자를 합격시켰다.
이로 인해 왕족들과 양반들의 엄청난 반발을 샀고, 조선의 기본질서(반상차별)를 무너뜨린다고
탄핵상소가 빗발쳤다.

■인생 8계명
경계를 넘어 공부하지 않고 할 수 없다고 하지 마라.
과거시험에만 몰두하지 않고 폭넓은 학문을 탐구했다.
당시 금기시된 맹자도 탐닉했고, 스님들과도 교분이 깊었다.
류성룡이 집필한 '증손전수방략'이란
병법서를 받은 이순신은 "육전, 수전, 화공 등 전략들이 모두 구체적이며
비교할 데가 없는 탁월한
이론"이라고 했다
(난중일기 1592년 3월 5일)

■인생 9계명
마음을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때론 포악하고 때론 변덕스러운
선조의 마음을 잡아 국정을 바르게
이끌어가기는 어려운 일이다.
선조가 전쟁책임을 덮어씌워 파직시킨 학봉 김성일을 선조를 끝까지 설득하여
경상도 초유사로 발탁하고 이어서 경상도 관찰사로 공을 세우게 했다.
전쟁 중에 도망친 사람들도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만들고 지방 아전들을 공명책으로 자발적으로 봉사하도록 만들었다.

전쟁때는 군량미를 징발(약탈)할 수 있으나 류성룡은 창고에 양식을 쌓아둔 중인과 아전들에게 실권이 없는 관직(공명첩)을 주고 군량미를 자발적으로 내도록 했다.

■인생 10계명
반성하는 삶을 살지 않고 내 인생만 힘들다고 하지 마라.
류성룡은 평생을 국가에 헌신했고
왜란극복에 앞장섰지만 그 대가는 파직이었다.
그러나 말없이 고향으로 내려가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허균은 류성룡을 '조선의 장자방'이라 칭송하면서 "류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굶어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서애 류성룡의 인생십계명’(도서출판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 책으로 나왔다.
곧으면서 유연하고 유연하면서 추진력이 있는 류성룡의 리더십이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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