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 게시판

흥남부두 철수작전 (크리스마스의 기적) / 퍼온글

작성자石普(송유장)|작성시간15.01.31|조회수157 목록 댓글 0

 

                                                                                                

          
                                
 
크리스마스의
기적인 흥남부두 철수 작전
6, 25 한국전쟁 흥남부두
 .

 

 

6, 25 한국전쟁 흥남부두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작전상항도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6.25 전쟁때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T-34-85형 인민군 탱크.중량32t,
최대시속 50km, 승무원 4명으로 인민군 전력의 핵심이었다

 

 

朴昌石-韓國戰 參戰記-2.1950년 서울

 

 

朴昌石-韓國戰 參戰記-2.1950년 서울.

 

 

朴昌石-韓國戰 參戰記-2.1950년 9월 28일 서울에서.

 

 

朴昌石-韓國戰 參戰記-2.강변의 피란촌

 

 

朴昌石-韓國戰 參戰記-2.주먹밥.1950.7.29.

 

 

朴昌石-韓國戰 參戰記-3.1950. 7. 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파병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0년 9월 15일 기함 마운트 매킨리
함상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0년.함포지원 사격.


 

 

朴昌石-韓國戰 參戰記-75mm 무반동총.당시 신무기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0.학도병르로 미 3사단15연대 편입
일본에서 훈련 받고 원산 상륙.미국명-Otto로 호칭.원산에서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0. 12. 18. 흥남 철수 작전.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UN군ⓒ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0년 12월19일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가기 위해 부두로 몰려든 피란민들의 모습.
우리부대도 이렇게 철수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0년.흥남 철수 작전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1년 부상병.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1년 포사격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1년 포사격 후 탄피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1년.대동강철교 남하 피난민 행열.
1951년 퓰리처상 [Pulitzer Prize]수상.
사진기자 막스 데스퍼.다리가 얼어붙고 손이 쩍쩍 달라붙는 추위속에서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1년.무명고지에서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1년.수류탄 투척

 

朴昌石-韓國戰 參戰記-1951년.한강 도하모습.

 

 <daum. blog . 朴 努山 >

 

크리스마스의 기적인 흥남부두 철수 작전

 

흥남 철수 작전(한자興南撤收作戰)은 중국인민지원군한국 전쟁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X) 군단대한민국 1군단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다.

 

전개

국제 연합 사령부는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로 인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12월 4일에 대한민국 육군이 평양에서 철수하고, 이어

12월 6일에 조선인민군이 평양을 수복하자, 1950년 12월 8일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

12월 15일 미국 1 해병사단을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뤄졌다.

 

미국 전쟁 역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는

장진호 전투. 이 전투에서 미국 1 해병 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마지막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었다.

(온양호가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났다) 10(X) 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에드워드 알몬드 10 군단장, 그리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명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많아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에는 10만명의 인명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흥남 철수 작전에서 대한민국 제1군단과 미국 제10군단의 장병

00,000명과 차량 17,000대, 피난민 약 100,000명과 350,000t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합군 흥남시 입성 장면

장진호 전투 후퇴 작전

 

 

 

 

 

 

 

수송선박 흥남항 도착

흥남항에 적재되어 있는 엄청난 양의 군수 물자

미군과 함께 흥남으로 피난가는 피난민들

 

 

 

 

 

 

 

 

메러더스 빅토리호와 레너드 라루 선장

 

 

 

 

 

 

 

 

마지막 철수 보트에 오르는 미 제1사단 장병

 

 

 

 

 

 

 

 

 

 

무두가 철수한후의 흥만 부두역

 

 

흥남 부두역및 항구에 남은 보급물자를 파괴하기 위한 미 공군의 폭격

 

  

공병단의 폭발물 설치팀의 흥남항 파괴장면

 

함포 사격과 폭발물 폭파로 초토화 되는 흥남항

 

 

거제도에 있는 기념탑

 

<Source: 아고라. henry8세 (henry****) 님>

 

Click

동영상보기

 

 

굳세어라 금순아 

 

굳세어라 금순아
강 사랑 작사 / 박 시춘 작곡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놓아 불러봤다 찾아를봤다
금순아 어디로가고 길을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떴다
 
철의장막 모진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난데 변함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잡고 웃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동영상을 보시려면 위 음악을 중지하세요.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Click

 
현인 
 

현인은 1919년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대표곡 "굳세어라 금순아" 는
가장 부산적인 대중가요이자,
현인의 존재를 대중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킨 노래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1951년 1.4 후퇴 직후에 발표된 이 노래는
흥남부두, 1.4후퇴, 국제시장, 영도다리 등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와 함께 전쟁으로 헤어진 血肉 금순이가
굳세게 잘 살아주길 바라는 심정이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의
"굳세어라 금순아" 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가장 부산적인 대중가수이자,
부산이 낳은 "제1세대 가수"인 현인의 존재를
대중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킨 노래이다.

 

현란하게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으로 유명한 현인은
불어, 중국어, 영어, 일어 등 5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 가수로,
"굳세어라 금순아" 외에도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신라의 달밤",  "서울 야곡", 
"베사메 무쵸" 등 1천여곡의 노래를 남긴
"국민 가수" 이다.

 

부산 영도에서 출생 현인은,
아버지 현 명근과 어머니 오 봉식의 2남 1녀 중 맏이로 1919년 12월 14일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영국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일본 마이니치신문 도쿄지사에서 기자로 근무했으며,
어머니는 일신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풍족했다.
구포 소학교에 입학, 2학년 때
초량의 영주 소학교로 옮겼으며,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전학,
1931년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영어와 일어, 음악에 재능을 보였으며,
학교 배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났고,
밴드부 활동을 통해 일본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었다고 한다.
현인이 음악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일본 여인과

재혼하자, 이에 상심해, 아버지가 권한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포기하면서부터이다.
현인은 1935년 어린 시절의 꿈인 파일럿을 포기하고
우에노음악학교(上野音樂學校 - 현 도쿄예대)
성악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한다.

관립(官立) 우에노 음악학교는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인 소프라노 윤 심덕,
바이올리니스트 홍 난파, 동요 작곡가 윤 극영 등
극소수의 조선인에게만 입학이 허용 될 정도로
조선의 음악 엘리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5개 국어 능수능란한 인텔리 가수...
그러나 음악학교에 진학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학비를 보내주지 않자,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마이니치신문 보급소에서
신문포장 일을 하는 등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낸다.

 

재학 당시에는 음악이론보다는
재즈나 샹송을 좋아했으며,
방송국에 드나들며 최신 음악정보나 악보를 구해
열심히 익혔다.

 

194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성악교수가 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성보악극단의 음악교사가 된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해
황해 등과 악극단을 구성해 중국 상하이와
텐진(天津)으로 건너가 악극단 활동을 했으며,
텐진의 클럽 "신태양" 에서 샹송 등
외국가요를 본격적으로 불렀다.

해방 후 1946년 귀국한 현인은
음악활동에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작곡가 박시춘과 인연을 맺고
본격적인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는 미8군과 악극단을 오가며 활동하다
1947년 서울 명동 시공관(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영화 "자유부인" 개봉 축하공연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다.

그 자리에서 아직 음반 취입도 하지 않은
"신라의 달밤" 을 불러 "아홉 번 앙코르" 기록을

세웠다.
결국 박시춘 작곡 유호 작사의 '신라의 달밤'을
취입곡으로 데뷔, 데뷔곡이 빅 히트를 한다.

 

이국적인 멜로디, 가수 특유의 부르르 떠는 창법 등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데뷔곡 "신라의 달밤" 의 인기를 몰아
1949년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영화 "푸른 언덕"의
주인공으로 등장, 영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한다.

 

이와 함께 '베사메 무쵸' 등을 번안해 노래함으로써,
트로트 일변도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으며,
1952년에는 "장밋빛 인생" 등을 불러
샹송 붐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남태평양으로 징용간
젊은이들의 망향을 그린  "고향만리",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등지고 남하한 사람들의
그리움을 노래한  "비 내리는 고모령",
전쟁 중 국군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준
"전우여 잘 자라" 등은
고단했던 한국 현대사를 반영한 민족의 노래이자,
서민들의 아픔을 달래 준 희망의 노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현인은 부산에서
동아극장 은방울 악극단의 '은방울 쇼'에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가수 남인수, 영화배우 황정자,
최은희 등과 활동을 함께 하는 한편,
"현인과 그 악단" 을 만들어 무대에 오른다.

 

1952년에는 신청년 극단의 가극 "성웅 이순신" 에
남인수, 김정구, 신카나리아, 이난영 등과
출연하기도 했다.

 

영도다리에 노래비와 동상,
1967년 문화공보부 공로상을 받았으며,
가수의 날 특별 공로대상(1996년),
제6회 대한민국 연예 예술대상(문화훈장·1999년) 등을
수상했으며, 2002년 4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비는
현재 영도다리 입구에 세워져 있다.
노래비는 가로 세로 각각 4m, 높이 3m로
부산을 상징하는 바다와 항구가 어우러진 배의 형상과
음반 파도 음표와 함께 갈매기가 나는 모습으로,
노래비 앞에는 현인이 앉아서 노래하는 모습의
1.2m 동상이 세워져,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구 파크호텔 입구에 "비 내리는 고모령",
경주 불국사 앞에도 "신라의 달밤" 노래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Click

현인 프로필

 


송도해수욕장 현인광장

 

1.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 제막식

2003년 11월 27일 부산 영도대교 입구서 가져

http://www.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04

2. 흥남철수와 관련된 자료,

http://blog.naver.com/sescia?Redirect=Log&logNo=70041166971

3.현인 노래비 관련 자료,

http://daumsir.blog.me/80115723140

4.'굳세어라 금순아' 특별행사 기사,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

5.'장진호 전투를 기억하자' 칼럼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

6.흥남철수 그 처절한 기억 '굳세어라 금순아'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4664

7.한국전쟁과 대중음악의 ‘분단’
http://legacy.www.hani.co.kr/section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Click

 

 
 

'흔적이'  공간에 오신님! 환영합니다.

 
                                                                                                                    

                                                                                                                        

 


jQuery.noConflict(); // jQuery.fn.UOCLike.defaults.host = 'http://like.daum.net' jQuery.fn.UOCLike.defaults.updateServiceCategory=true; jQuery("#blogLikeBtn").UOCLike({ buttonType : 'pc', showLayer : false });

window.[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xxxxxxxxonload = function () { var mediaEl = document.getElementById('mediaSocialShareContainer'); if (typeof mediaEl == "undefined" || mediaEl == null) { return false; } var media = new socialshare(mediaEl, { shareType: 'media', link: '$snsurl', prefix: '$snstitle', comment: { count: 30, link: 'http://media.daum.net/entertain/star/newsview?rMode=list&cSortKey=depth&allComment=T&newsId=20130911103507740' } }); };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