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예절강의]
제20강 【향사】 '망료례'와 '망예례'의 차이점?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전 성균관 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
2014년 4월 3일 봉행된 대구 수성사직제 망료례
문민공 한석당 박중림(박팽년 선생의 부) 사우인
충의사 추향 망료례(205년 11월 08일)
대구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 추향 망료례(2015년 11월 08일)
에필로그
혹 ‘망료례’, ‘망예례’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생각건대 이 질문에 대한 일반인들의 답은 십중팔구 ‘들어 본적 없다’ 내지는 ‘그게 무슨 소리요?’ 정도일 것이다. 사실 이 용어는 전통예학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전통예학 분야의 전문용어인 셈이다.
음력 10월 향사(享祀) 철도 다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처럼 난데없이 ‘망료례’, ‘망예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까닭이 있다. 서울의 모 명문사립대학교 00연구소에서 발간한 한 책자를 읽고 그 느낀 바가 있어서이다.
그 책은 전통예학에 관한 여러 논문들을 묶어놓은 책이었다. 그런데 그 논문들 중에서 한 연구자의 논문이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읽는 내내 불편해서 혼이 났다. 사실 ‘망료례’와 ‘망예례’를 정확히 구별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대체로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통용(?)’해서 사용하는 편이다. 그래서 말인데 일반인들이야 이 둘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분야의 전문가라면 용어 구사만큼은 정확해야하는 것 아닌가? 더욱이 논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말이다.
‘망례례’가 아니라 ‘망예례’라오
‘망료례’, ‘망예례’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예전에 다른 게시판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었다.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아래 클릭
(감(坎) 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http://cafe.daum.net/3169179/Dkyi/22)
간단히 설명하자면 ‘망료례’와 ‘망예례’는 사가(私家)의 제사 곧, 가제(家祭)가 아닌 국제(國祭), 향제(鄕祭), 향사(享祀) 같은 제사의 절차 중 하나로서, 이들 제사의 거의 맨 마지막에 행해지는 절차이다. 참고로 ‘료(燎)’는 불태운다는 의미이고, ‘예(瘞)’는 묻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망료례’는 제사에 사용된 폐백과 축문을 감(坎·구덩이)에서 불사르는 의식이고, ‘망예례’는 폐백과 축문을 감에다 묻는 예를 말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망료례’와 ‘망예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못된다.
‘망료례’와 ‘망예례’에는 공통적으로 ‘망(望)’과 ‘례(禮)’라는 글자가 있다. 참고로 여기에서 사용된 ‘망’자의 경우는 둘 다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례’는 말 그대로 의례를 말한다. 따라서 이 두 글자의 의미를 참고해서 다시 ‘망료례’와 ‘망예례’의 의미를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망료례: 축관이 감에다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는 것을 초헌관이 곁에 서서 바라보는 예.
▪망예례: 축관이 감에다 폐백과 축문을 묻는 것을 초헌관이 곁에 서서 바라보는 예.
한 마디로 ‘망료례’와 ‘망예례’는 제사에 사용된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거나(燎·료)’ ‘묻는(瘞·예)’ 것을 ‘바라보는’ 예법인 것이다.
살펴본 것처럼 ‘망예례’의 ‘예’자는 한자로 묻을 ‘예(瘞)’이다. 묻을 ‘례’가 아니다. 그런데도 각종 자료들을 보면 ‘망예례’를 ‘망례례’로 표현한 예가 수없이 많다. 하긴 유명 대학의 교수님들조차도 저렇게 표현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망료례’, ‘망예례’는 영조 이후 ‘망료례’로 통일
조선시대 대표적인 국가 예전(禮典)인 국조오례의에는 ‘망료례’와 ‘망예례’에 대한 규정이 있다. 대체로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에 사용된 폐백과 축문은 불태우고(망료례), 지기(地祇·땅 귀신)와 인신(人神)에 대한 제사에 사용된 폐백과 축문은 땅에 묻는다(망예례)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 같은 ‘망료례’와 ‘망예례’의 규정에 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한 일례를 들어보면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에는 종묘제례 때 ‘폐백’과 ‘축문’을 다르게 처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폐백은 불사르는 ‘망료’로 축문은 구덩이에 묻는 ‘망예’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같은 ‘망료례’와 ‘망예례’의 혼동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향사 시 ‘망료례’와 ‘망예례’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혼동은 사실 ‘혼동’이라기보다는 ‘통용’으로 보는 편이 나을 듯하다. 다시 말해 ‘망료례’와 ‘망예례’의 의미를 모른다기보다는 의미가 비슷한 두 예법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편하게 통용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예법에 대해 명쾌하게 결단을 내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였다. 영조는 1757년(영조33), 당시까지 ‘망료례’와 ‘망예례’ 두 가지로 구분되었던 의식을 ‘망료례’ 하나로 통일했다. 영조는 신에게 올렸던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지 않고 감(坎)에 계속 방치해두면 결국은 불결해질 것이라는 것을 이유로 ‘망료례’로 의식을 통일시켰던 것이었다. 참고로 이와 관련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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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혼전의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는 의식을 정하다.
두 혼전(魂殿)의 축문(祝文)과 폐백(幣帛)을 망료(望燎)하는 의식을 정하고,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篇)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에는 제향하고 축문(祝文)은 모두 망료(望燎)한다고 하였는데, 오직 《오례의(五禮儀)》에는 망예(望瘞)한다고 일컬었으니, 오래도록 구덩이에 쌓아두는 것은 불결(不潔)하기가 더 심할 수 없다. 그런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중대한 예(禮)이므로, 감히 혼자의 견해로는 개정할 수 없는 것이고, 궐전(闕殿)에서 부묘(祔廟)한 뒤에 이르러서는 종묘와 사직에 견줄 것이 아니니, 효소전(孝昭殿)과 휘령전(徽寧殿)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제향(祭享)의 축문과 폐백은 구덩이 위에서 망료하고, 재는 구덩이 속에 묻는 일을 《상례보편(喪禮補編)》에 기재하도록 하라.”하였다.
영조 89권, 33년(1757 정축 / 청 건륭(乾隆) 22년) 5월 26일(병진)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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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혹시라도 오늘 이 글을 읽은 뒤, ‘망료례’와 ‘망예례’를 뭐 그리 거창한 예법으로 오해하는 일은 부디 없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망료례’와 ‘망예례’는 우리가 집에서 지내는 기제사 때도 행해지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이는 퍼뜩 이해를 했을 것이다.
‘분축문(焚祝文)·소지방(燒紙榜)’
그렇다. 제사를 다 모신 뒤 맨 마지막 절차로 향로에서 행해지는 축문과 지방 불사르기가 바로 그것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한편 영조는 모든 제향의 축문과 폐백은 구덩이 위에서 망료하고, 재는 그 구덩이 속에 묻으라고 명을 내렸다. 필자는 오늘 이 글을 쓰면서 가만히 영조의 이 말 뜻을 음미해보니 참으로 명쾌한 결단이었음을 알 것 같다.
‘축문과 폐백은 감 위에서 태워 망료하고, 그 재는 감에 묻어 망예하라.’
‘망료’와 ‘망예’를 한데 묶은 그 뜻이 참 절묘하다.
도동서원 사우의 북서쪽 담장
(도동서원은 북향집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남동편 담장이 된다)
2014년 도동서원 추향 때의 망료례
2008년 대구향교 추계 석전대제때의 망료례
2008년 대구향교 추계 석전대제때의 망료례
2012년 합천 태동서원 위패 봉안식 망료례
하빈 묘골 육신사 사당의 감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고 있는 도동서원 감(坎)
2015.12.19
풍경산방에서 송은석
☎018-525-8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