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사망 1464 ~ 1498
1498년(연산군 4)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조의제문김일손
사림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한 훈구파의 정치 공작으로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졌고, 그의 스승인 김종직 마저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그러나 꺾이지 않았던 그의 직필(直筆) 정신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후대까지도 그를 널리 기억하게 하였다.
1영남사림파의 기수, 중앙으로 진출하다
15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사는 기성의 정치세력인 훈구파에 대항하는 사림파의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성종대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파는 기존에 정치적ㆍ사회적 특권을 향유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특히 이들은 언관이나 사관과 같이 비판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직책에 포진되어 훈구파의 기득권 비리에 서서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김종직
이것은 그가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
그러나 실록의 편집이 끝나면 세초(洗草- 실록 편찬이 완료된 뒤 사초를 없애는 일)를 하여 비밀리에 부쳐져야 하는 것이 원칙인 그의 사초가 훈구파들에 의해 입수되어 정치적 참극이 일어났다. 1498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 사람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의 서막을 연 사건이기도 하였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 경상도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이다. 조부인 김극일(金克一)은 길재(吉再)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부친 김맹(金孟) 역시 가학을 계승하고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일손 또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니 김일손 가문은 정통 영남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한 셈이 된다. 어린 시절 김일손은 부친을 따라 용인에서 살았으며, 이때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학]은 사림파의 학문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영남사림파의 대표학자 김굉필
15세에는 단양 우씨를 부인으로 맞았으며, 이해 고향 청도를 거쳐 선산에 사는 정중호(鄭仲虎), 이맹전(李孟專)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16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했으나, 이듬해 예조의 복시(覆試)에는 실패했다.
17세 때 고향에 돌아온 김일손은 그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이 있는 밀양으로 가서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김종직은 김일손의 부친 김맹의 [효문명(孝文銘)]에서 청도에서 올라온 김극일의 두 아들 김기손(金驥孫)과 김일손을 가르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472년 김종직은 지리산을 다녀온 후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는데, 김일손 역시 1489년 지리산을 유람하고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지리산을 사랑하고 기행문을 남긴 것 또한 스승과 제자가 하나였던 셈이다. 밀양에 살던 김종직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인연은 김종직의 사후 때까지 끈끈하게 이어진다.
김일손은 23세가 되던 1486년 청도군학(淸道郡學)으로 있으면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다. 생원시는 장원, 진사시는 차석이었다. 이해 가을의 문과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료로서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던 최부, 신종호, 표연수도 함께 급제하였다.
1487년 김일손은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진주목사와 진양수계(晉陽修稧)를 조직하였으며, 정여창, 남효온, 홍유손, 김굉필, 강혼 등과 교유하면서 사림파의 입지를 굳건히 해 나갔다. 이후 김일손은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정자, 검열, 주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과 사관의 핵심 요직을 맡으면서 적극적이고 강직한 사림파 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490년 무렵부터는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을 교정하고 증보(增補- 모자란 내용을 보탬)했다. 소릉(昭陵-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의 능)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수양대군의 불법적인 왕위찬탈을 비판하고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정통성을 강조한 조처로서, 나아가서는 세조의 집권을 돕고, 그 그늘에서 크게 권력을 차지한 훈구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김일손에 대해서는 무오사화의 대표적인 희생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사관으로서의 그의 강직한 면모만이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문장을 쓰려고 붓을 들면 수많은 말들이 풍우같이 쏟아지고 분망하고 웅혼함이 압도적인 기상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개혁책 제시에도 적극적이었다.
실록이나 그의 문집인 [탁영집(濯纓集)], 그의 조카인 김대유의 [삼족당집(三足堂集)]등의 기록에는 이러한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김대유는 숙부인 김일손의 연보를 쓰면서 김일손의 호매하고 강직한 성품과 함께 경제지책(經濟之策)을 품고 있었음을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실록에서 그가 제시한 여러 정책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인사정책에 대해서는 효행과 염치가 뛰어난 자와 재질이 훌륭한 종실(宗室- 왕족)의 등용, 천거제의 충실한 활용 등을 주장했는데 이는 훗날 조광조 일파가 주장한 천거제의 논리와도 유사하다. 또한 언관의 활동 보장과 지방관의 사관 발탁 등을 건의하여 언론권의 강화를 주장하였고, 법전을 지방 관아에서 충분히 활용할 것, 사원전과 서원 노비의 혁파 등을 건의하였다.
국방대책으로는 무예가 뛰어난 문관을 뽑아 변방의 장수에 제수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방비할 것을 제시하고 당시 충주나 웅천에서 있었던 왜인들의 소란 사건에 대해서는 강력한 응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후에도 왜구들의 소요가 계속 일어났고 1592년 임진왜란까지 일어났음을 고려하면 선견지명을 보인 셈이다.
2위험한 사초(史草),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사림파의 기수로 우뚝 선 김일손은 가장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시무책을 제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활동의 선두에 섰다. 그가 제기한 소릉 복위 문제는 정국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소릉은 문종비 권씨의 위호로서 권씨는 단종을 낳은 후 곧 죽었는데 세조 집권 후 추폐(追廢)되어 종묘에는 문종의 신위만이 배향되어 있었다.
김일손은 소릉과 묘주(廟主)를 복위하여 문종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세조의 그늘이 여전했던 시대상을 고려하면 매우 개혁적인 주장이었다. 언관으로서 그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에 비례하여, 그에 대한 훈구파의 기피는 훨씬 커지게 되었다.
훈구파와 절대 타협하지 않는 그의 강한 기질과 직선적 성향은 훈구파 대신들에게 김일손을 정치적 공적(公敵)으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무오사화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사회,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사림파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정쟁이다. 또한 이후 4번에 걸친 사화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발단에 섰던 인물이 바로 김일손이었다. 무오사화의 시작은 성종 사망 후 실록청의 구성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사망하면 바로 실록청을 구성하고, 전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사초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이 사초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미리 사초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극돈은 광주 이씨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권력을 누려온 전형적인 훈구파였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중에는 이극돈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정희왕후의 상을 당했을 때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과 뇌물을 받은 일, 세조 때 불교중흥 정책을 편 세조의 눈에 들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것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었다. 김일손의 위험한(?) 사초를 입수한 이극돈은 전전긍긍했다. 그렇다고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일손을 찾아가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김일손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결국 이극돈은 검증된 정치 공작의 귀재 유자광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들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연산군은 사초를 마침내 왕에게 올리게 하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다. 독재군주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 셈이다.
김일손의 사초에는 세조가 신임한 승려 학조(學祖)가 술법으로 궁액
기본적으로 세조의 왕의 찬탈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 정책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사림파의 입장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진나라 말 숙부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이 글은 바로 선왕인 세조의 단종 시해를 중국의 사례를 들어 비판한 글이었다. 당시 김일손은 모친상으로 청도에 내려가 있었지만 바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훈구파들은 김일손의 불손한 언행이 스승 김종직의 영향 때문이라 주장하면서 사림파의 일망타진에 나섰다.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일손을 비롯하여 권오복, 권경유 등을 능지처참하고, 표연말, 정여창, 최부, 김굉필 등 김종직의 제자들을 대거 유배시켰다. 김종직마저 그의무덤을 파헤쳐 관을 꺼내고 다시 처형하는 최악의 형벌인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이것이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로서 김종직,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사림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3사림파 성장의 자양분이 되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무오사화의 칼끝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김일손의 생을 마감하게 했다. 김일손이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을 흘렀다고 해서 ‘자계(紫溪- 붉은 시냇물)’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그를 배향한 사당도 자계사(紫溪祠)가 되었다. 자계사는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구현된 선조대에 자계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661년(현종 2) ‘자계’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김일손의 추숭 작업에 가장 힘을 기울였던 인물은 조카 김대유
김대유는 41세 때 김일손의 유고(遺稿)를 모아 자계사에서 판각(板刻)을 했으며, 70세 되던 해에는 숙부인 김일손의 연보를 편집하였다. 그만큼 숙부를 존경하고 그의 정신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김대유는 경상우도 사림의 종장(宗匠- 경학에 밝고 글을 잘 짓는 우두머리)이 되는 남명 조식이 존경했던 인물로서, 김일손의 사림파 정신은 김대유를 거쳐 조식으로 이어지면서 영남사림파의 학맥에 큰 분수령을 이루었다.
조식은 김일손에 대해 ‘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凌霜之節)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사림파의 젊은 기수로서 훈구파의 전횡에 맞섰던 김일손은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은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도도한 역사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반영하였다. 훈구파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상과, 정치이념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선봉에 서서 김일손은 현실을 냉철히 인식하였고 적극적인 언관과 사관 활동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적극 맞섰다.
김일손처럼 행동하는 사림파의 모습은 훗날 조광조에게도 이어졌고, 결국에는 네 번의 사화라는 대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파가 궁극적으로 역사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사림파의 도도한 성장에 훌륭한 자양분을 마려해준 학자 김일손. 그가 배향되어 있는 청도의 자계서원을 찾아, 붉은 시냇물처럼 타올랐던 김일손의 붉은 마음을 되새겨보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민족문화연구소, [탁영 김일손의 문학과 사상], 영남대학교출판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