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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知恨一結

작성자石普(송유장)|작성시간19.01.11|조회수68 목록 댓글 0

조선시대에 이런 기막히고 애절하며 원통한 일이 있었다니~~

 當知恨一結(당지한일결), 終古不磨滅(종고불마). 巴山萬里色(파산만리색),

望帝千年血(망제천년혈) 기억하라! 한이 한번 맺히면/ 영원토록 마멸되지 않음을./

 파산(巴山) 만 리 붉은 빛은/ 망제(望帝) 천년의 피눈물임을! 진달래꽃을 노래한 시다.

비운의 촉(蜀)나라 임금 망제는 죽어서 진달래꽃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산천에도 진달래꽃은 피었으니 만 리의 산야를 천년토록 붉게 물들일 내 한을 기억하라!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떠올리지만 처절한 느낌은 오히려 더하다.

이 시를 쓴 시인은 이광사(李匡師·1705~77)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의 참담한 인생과 애절한 사랑을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천하명필이 왜 이런 처절한 한을 노래했을까?

내로라하는 명문가로서 강경파 소론(少論)이었던 그의 집안은 반대 당파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하루아침에 역적의 집안으로 몰락했다. 백부가 한 일에 연좌되어 이광사는 평생 출세를 단념하고 오로지 불우한 심사를 글씨와 그림과 시에 풀어내 시대를 초월한 조선의 명필로

군림했다. 그러나 반대 당파는 세사에 초연한 채 예술에 몰입해 사는 것조차 봐주지 않았다.

1755년 50세의 그는 역적으로 몰려 의금부에 투옥되어 왕의 국문까지 받았다.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이때 그는 머리를 치켜들고 “빼어난 예술을 갖고 있으니 목숨만은 건져주소서!”라며 통곡했다. 그를 불쌍히 여긴 영조가 극형만은 모면하게 해주었다.

이후 그는 국토의 양끝 부령과 진도에서 무려 23년간 유폐되어 살다가 죽었다.

유배지 두만강변의 부령에서 진달래꽃을 노래한 시가 지어졌다.

인생에 일어난 모든 것이 그에게는 한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오로지 한 가지 가슴 깊이 응어리진 한은 그의 아내였다. 그가 의금부로 끌려갔을 때 아내 윤씨(尹氏)는 남편의 죽음을 예상했다. 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이레를 굶으면 죽고, 여자는 여드레를 굶으면 죽는다 하니 여드레가 내가 세상에 머물 날이다”라며 바로 굶었다. 그러나 물 한 모금 안 마신 지 엿새째, 남편을 극형에 처한다는 헛소문이 들려오자 윤씨는 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처마 끝에 목을 매어 죽었다. 의금부에서 풀려나 유배를 떠나려는 이광사는 찾아온 아들이 상복을 입은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유배지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그는 통곡을 터트렸다. 그해 겨울 망자를 애도하는 시를 지었다. “내가 죽어 뼈가 재가 되어도 이 한은 정녕코 사라지지 않으며, 내가 살아 백 번 윤회를 거듭해도 이 한은 영원히 생생하리라. 수미산이 개미둑처럼 줄어들어도, 황하가 물방울처럼 가늘어져도, 천 번이나 부처를 땅에 묻어도, 만 번이나 신선을 장사지내도, 천지가 뒤집혀 태초가 되어도, 해와 달이 빛을 잃어도, 이 한은 맺히고 굳어져 세월이 갈수록 단단해지리라. 부서지지 않는 번뇌처럼, 뚫지 못하는 금강석처럼, 간직하면 큰 덩어리 되고 토해내면 대천(大千)세계에 가득하리. 내 한이 이럴진대 그대 한도 그럴 테지. 둘의 한이 영원히 흩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만날 인연이 있으리라.” 일백 번의 윤회를 거듭해도 한은 더 굳어지고, 해와 달이 빛을 잃는 일은 있을지언정 한은 사라지지 않아 그의 한은 극단과 대결한다. 저승과 이승에서 한을 풀지 않으면 언젠가 만나리라는 마지막 대목이 사무친 비원(悲願)으로 들려온다. 곱게 늙어가던 부부에게 일어난 이 기막힌 사별을 감당할 길이 없으니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진달래꽃을 읊은 시는 다음해 어느 봄날에 쓰였다. 우리 역사에서 잔혹한 정치판이 무고한 사람들을 파멸로 몬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애정 깊은 명필 부부의 인생은 파괴되었지만 그 한은 예술로 바뀌어 지금까지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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