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역사

작성자石普(송유장)|작성시간06.04.27|조회수65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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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심난한 변천사
덕수궁의 역사길을 걸어보자
 
42211-5_1.jpg덕수궁이라는 이름이 입에 걸리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덕수궁의 돌담길~~옛날의 돌담길" 이라는 노래가 먼저 생가날까?
아니면 가사에 들어있는 돌담길이 생각날까?
 
암튼 덕수궁의 지금의 이미지는 이렇게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무언가가 살아있는 정겨운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마 조선시대의 여타의 宮에 비하여 그 규모도 작고, 접근하기도 쉽고..그 안에 전시관들이나 수문장 교대식 등의 문화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나쯤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우리의 실생활과 마음에 가진다는 것은 즐겁고 가슴떨리는 소중한 장소이며 동시에 추억이다.
그러나 이 덕수궁의 이미지가 원래부터 이렇게 아름답거나 추억을 그리게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여러 궁들이 많은 수난이 있었지만 이 덕수궁도 만만찮은 수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원래 덕수궁은 조선 태조 이 성계가 계비인 강(康)씨 능에 행차했을 때 거처했던 이궁으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처럼 덕수궁의 정문도 남향을 한 화(化)자 항렬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덕수궁(德壽宮)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초에도 있었다. 정종(定宗)은 왕위를 자신에게 양위(讓位)하고 물러난 태조를 위해 개성에 덕수궁(德壽宮)을 지었다. 태종(太宗)이 한양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도 역시 덕수궁(德壽宮)이라 하였다.
 
200503gisa_17104.jpg현재의 덕수궁(德壽宮)은 조선초의 덕수궁(德壽宮)과는 무관하게 현재의 자리에 행궁(행궁이란 본래 왕이 왕릉에 행차할 때 하루나 며칠 묵을 곳이 필요하여 경유하는 군현의 관아에 마련한 것을 의미한다)을 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피난하였던 선조가 1593년 한양으로 돌아와 보니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하게 되어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지금의 덕수궁(德壽宮) 자리에 행궁을 정한 것이다.
 
大安門(윗그림)과 大漢門(아랫그림) ▶
 
선조는 승하시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를 보았으며, 뒤를 이은 광해군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 3년(1611년)에 이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거한 이후로 점차 퇴락하다가 구한말 고종이 수리를 명하기까지 한적한 별궁에 불과했다.
 
지금의 덕수궁의 정문의 이름은 大漢門 이지만 원래의 이름은 仁化門 이었으며 1593년 계사년에 선조임금이 의주에서 환도하여 지금의 자리에 행궁을 정하고, 나라는 태평스럽고 백성을 크게 편안하게 한다는 뜻을 담은 대안(大安)이라는 이름을 지어 동쪽 대문에 현판을 걸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선포시까지 남쪽의 인화문(지금의 중화문 앞쪽에 있었다고 한다)이 경운궁(慶運宮)의 정문이었다. 그 후 대한제국의 선포를 계기로 경운궁(慶運宮)의 동쪽에 설치된 원구단과 통천로로 이어지는 대안문(大安門)이 정문으로 되었던 것이다.
 
200503gisa_17102.jpg그 후로도 약 10년동안 대안문(大安門)이라는 이름은 변동이 없다가 1906년 2월부터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경운궁(慶運宮) 중명전에 일본 통감부를 개설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정치를 시작하였다.
 
선조임금이 1593년 행궁을 정하면서 동문에 대안문(大安門)이란 현판을 올리게 한 이래, 1897년 10월 고종황제가 경운궁(慶運宮)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원구단으로 통하는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하였다.
의정부참찬 민병석의 글씨인 '大安門'의 편액(위)은 1899년 3월에 걸렸다. 지금 이 편액은 궁중유물전시관의 소장품(유물번호 674)으로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대한문(大漢門)에 매달린 편액(아래)은 궁내부특진관 남정철(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음)의 글씨이며, 1906년 5월에 등장했다.
 
이때 이미 고종황제는 주권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화재로 불탄 경운궁(慶運宮)의 전각들과 불타지도 않은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여 상량하도록 한 것은 고종황제가 아니라 사실상 이토 히로부미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고종황제는 주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와신상담하며 의병지원과 밀사파견을 추진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불타지도 않은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도록 할 겨를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905년경 고종의 출궁행렬을 담은 사진(오른쪽)에는 大安門으로 되어있던 현판이
1년사이인 1906년 순종의 가례식 때 찍은 사진에는 현판이 大漢門으로 나와있다.
 
오히려 선조임금이 대안문(大安門) 현판을 올린 지 약 300여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한지 약 9년만에 대안문(大安門) 현판을 내리고 대한문(大漢門)을 현판으로 한 것은 고종황제의 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통감정치를 시작하여 대한제국을 완전히 집어삼키려는 이토 히로부미의 의도를 표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과거 경부선을 지나면서 ‘태전(太田, 지금의 대전)’에 이르러 클 태(太)의 기운이 크다하여 점 하나를 빼고 ‘대전(大田)’으로 지명을 바꾸도록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대한문(大漢門)이라는 글자의 뜻이 "상놈 한"字라는 일부의 지적이 있는데 그것도 일리있는 지적이다. 굳이 이토 히로부미가 현판의 글자를 바꾼데는 그런 의미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덕수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대략 이 대안문(大安門)과 대한문(大漢門)에 대한 논란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역사적인 사료로 보나 당대의 상황으로 보나 역시 大安門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복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정도 600년이라는 엄청난 이름에 걸맞는 서울의 모습들이 전혀 전통과 역사와는 무관하게 꾸며진 지금 하나씩 원래의 원형을 찾아가는 것은 서울 600년에 대한 고마움을 갚는 길이고, 우리의 역사를 하나씩 다시 재현하고 그려간다는 면에서 지금도 의미있는 일이고, 미래에도 의미심장한 일이 될 것같은 생각에서 덕수궁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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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송춘복(八甫) | 작성시간 06.05.27 漢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1.한수한 2. 나라이름한. 3.사나이한, 4.놈한으로 그 용례에서 불한당, 악한 등으로 쓰임에서 불한당, 상놈보다 못한 왜넘들이 우리민족을 멸시하기 위해 大漢門으로 고쳐 달았군요....나쁜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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