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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김해성 사충신 학술대회 작성자民草 農溪 鄭奉永작성시간18.12.09조회수70
임진왜란 김해성 사충신(四忠臣) 학술대회 참관기
일시 ; 2018.12.7(금)
장소 ; 인제대학교 인정관 대강당
주최ㆍ주관 ; 김해시, 인제대학교박물관
개회식 사회 ; 정찬우(인제대박물관)
축사를 보내온(게재한) 분 ; 허성곤(김해시장), 민홍철(국회의원), 김정호(국회의원), 김형수(김해시의회 의장)
주제발표 ;
1. 임진왜란 김해성 전투 ; 김태영(동서대학)
2. 김해 사충신 관련 문헌 기록의 현황과 그 내용 ; 임종욱(진주교육대학)
3. 김해성 사충신과 향촌사회의 변화 ; 송희복(진주교육대)
4. 사충단 향사과정과 역사적 전개 ; 조구호(남명학연구원)
5. 종합토론 좌장 ; 이영식(인제대학)
6. 토론자 4인 ; 송준식(한국국제대학), 이재현(진주교육대학),
권복순(경상대학), 박용국(경상대학)
☆☆☆
본란에서는 소장(少壯) 학자 4人의 주제발표는 배부한 논문 소책자를 필독하기로 하고,
지면 관계로 민초 나름으로(주관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 기술한다.
《1》임진왜란(1592~1598) 초기 전황, 1592(선조 25) 4.13 일본 선봉 제1군 쓰시마(對馬島) 출항, 4.14 개전 부산진성(첨사 정발 순절), 다대포성(첨사 윤흥신 순절), 4.15 동래성 함략(부사 송상헌 순절), 4.17 양산 함략, 4.18 밀양 함략, 4.19 김해성 함략, 사충신 의병장 ;
송빈(宋賓), 이대형(李大亨), 김득기(金得器), 류식(柳湜) 순절,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의병장의 효시이다. 여러 의병 중에서 가장 먼저 기의(起義- 의병을 일으킴)했다는 의령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의병장은 4.22이다. 곽재우는 체계와 진용을 갖춘
의병장이라 할 수 있다.
《2》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송빈(宋賓)의 송담서원이 훼철된 후 지방 유림들의 건의로 1871년(고종 8) 김해 부사 정현석(鄭顯奭)이 나라에 고하여 왕명을 받아 삼충신을 기리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면서 류식(柳湜)도 추가로 함께 배향하여 사충신으로 기리게 되었다.
《3》부사 정현석이 지방 유림의 표충 행장(行狀)을 받들어 1872년(고종 9) 2월에 김해 사충단(四忠壇 ; 宋賓, 李大亨, 金得器, 柳湜) 축조하였다. 정현석은 조선 말기의 청백리(淸白吏)이자 현신(賢臣)으로 뛰어난 지방관(수령)이기도 했다. 사충단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99호(지정 ; 1990.12.20)이다.
※註<1> ; 흥선대원군 왕권강화 섭정기간 10년 : 1863년 12월(철종 14, 철종 승하로 고종 12세로 즉위)~1873년 11월(고종 10, 22세로 친정:親政 선포)
《4》임진왜란 개전 초기 경상도 동남부의 첫 격전지 김해에서 최초로 기의하여 의병을 일으킨 사충단의 의병장 송빈의 송공순절암기(宋公殉節巖記)를 1872년(고종 9 ; 음 2월)에 김해 부사 팔계(八溪) 정현석(鄭顯奭)이 근지(謹識)하였다.
(1)순절암기(殉節巖記) 원문은 다음과 같다.
築四忠壇記履及子城北有石屹然猛獸搏噬之狀詞于
府人則曰宋公殉節巖也盖我 皇明嘉靖年間參議宋公諱賓之先諱昌與舊要題名而及
壬亂宋公守府城遂慬於是其後雲仍繼刊之余慕公之偉烈恐其石之久而泯也與其來
耳謀不笞而剔之治垣而僚之然後人之過府者知有是巖也庶宋公之名幷壽于石而
欲爲他日是邦之故事云爾
壬申仲春
府使 八溪 鄭顯奭 謹識
(2)위 원문의 번역문이다.
순절암기(殉節巖記)
사충단(四忠壇)의 축조(築造)를 마치고 발걸음이 미친 이곳 김해성 북쪽에 한 큰 암석이 있는데
우뚝 솟은 모양이 맹수(猛獸)가 무엇을 치고 깨무는 형상이라 부민(府民)들에게 물으니 이르기를
송공순절암(宋公殉節巖)이라 한다.
이는 천자가정년간(天子嘉靖年間 ; '가정'은 명나라 세종 연호로 '丁酉' 1537년 연표로 1592년
임진왜란 발발 55년 전 시대임)에 참의공 송빈의 부친 휘(諱), 창(昌) 및 그 오래된 벗들이
제명(題名)하였으며 그 뒤 임란에 이르러 송공이 부성(府城)을 지키다 이곳에서 마침내 순절하셨다.
그 뒤 송공의 후손들이 이어서 글을 새겼으며, 내가 송공의 위열(偉烈)을 추모하고 그 돌[石]이 오래되어 내력이 민멸(泯滅)될까 두렵도다.
그래서 돌에 낀 이끼를 털어내고 주위 담장을 고치고 다스린 뒤에, 김해고을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순절암(殉節巖)이 있음을 알리고자 함이라.
바라건대 송공의 이름이 이 돌의 수(壽)와 아울러 다른 날에 우리나라의 고사(故事)가 되기를 바라노라.
임신중춘(壬申仲春)
부사(府使) 팔계(八溪) 정현석(鄭顯奭) 근지(謹識 ; 삼가하여 기록하노라.
※註<2> ; 1872년(고종9) 음력 2월 ; 중춘은 음 2월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註<3> ; '팔계(八溪)'는 호(號)가 아니고, 정씨(鄭氏)의 관향(貫鄕)으로 현 합천군 초계(草溪)의 고명(古名)으로 초팔혜(草八兮), 팔계(八溪), 청계(淸溪)라 일컬었다.